장애, 그리고 여성에 대해 주로 다루는 만화가, 다운증후군 딸(은혜)을 둔 장애자녀의 엄마.
어쩌면 이 두 가지 타이틀은 따로 따로가 아니라 그냥 ‘장차현실’이라는 한 사람을 설명하는 일로 합쳐질 지도 모르겠다.
현재 채널 비로소의 연재만화 ‘미안해’를 통해서 매달 장애아 부모의 생생한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는 ‘장차현실’ 작가를 지난 금요일 만났다.
경기도 양평에서 작은 미술교습소를 운영하고 있기도 한 그는 만화가이면서 아이들에게 미술을 가르치는 일, 그리고 아내이자 두 자녀의 엄마로서의 삶을 참 조화롭게 꾸려가는 편안한 일상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 장차현실 작가의 미술교습소 앞에서
#만화를 업으로 삼으신 계기가 궁금합니다.
원래는 홍익대학교에서 동양화를 전공했어요. 졸업 후에는 어린이 그림책 일러스트나 북 디자인, 그리고 신문에 한컷 짜리 삽화를 그리는 일 등을 했었는데, 우연한 기회로 (지금은 폐간됐지만) ‘if(이프)’라는 페미니즘 저널에서 여성 관련 민담을 풀어내는 ‘이야기 만화’ 작업을 제안해왔고 그것이 첫 만화가 됐죠. (나중에 해당 연재는 ‘색녀열전’이라는 책으로 출간되었다)
또 ‘만화’는 작업 특성상 출판사처럼 어떤 회사에 소속돼서 일해야 하는 다른 작업에 비하면, 아이 키우면서 하기에 좋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죠. 당시에 은혜(현재 나이 25세)가 어렸었는데, 은혜가 재활프로그램이나 치료 받는 것을 기다리는 동안 아이디어를 정리하고 스토리를 짜고, 은혜가 자는 동안 그림을 그리는 그런 식으로요. 마침 그 당시 인터넷도 발전하기 시작해서 이메일로 작업 결과를 주고받을 수 있었던 것도 행운이었죠.
#주로 장애, 여성, 교육 등에 대한 만화가 선생님 작품의 주를 이루는 것 같은데요
아마 그렇게 된 가장 큰 터닝포인트가 된 작품이 ‘엄마 외로운 거 그만하고 밥먹자’ 라는 작품일거에요. 제가 알려지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고. 2000년에 한겨레신문에서 처음 연재하기 시작한 작품인데(연재 당시 제목은 <장차현실의 ‘현실을 봐’>) 주인공이 딸 은혜였고, 은혜와 제 삶 속에서 나온 이야기들을 담아서 독자들 사랑을 많이 받았죠. 장애아를 키우는 싱글맘의 이야기를 생활만화 형식으로 푼 것인데, 그 이후에 여러 가지 다양한 작품들을 많이 했었지만 아직까지도 그 책만큼 제 마음에 든 작품은 없어요.
지금은 어린이잡지, 가정법률, 청소년폭력예방 등 관련 기관에서 연재를 하고 있고요. 사실 (소재가) 그렇다보니 가끔은 제 만화가 너무 계몽적으로 가는 건 아닌가 하고 스스로 반성할 때도 있어요. 기본적으로 만화는 재밌어야 하는 건데 하고...(웃음)
(이 때 인터뷰 자리에 함께 있던 은혜 씨가 조용히 책장에 있는 엄마의 책들을 모두 꺼내와 하나씩 소개해주었다. 그 모습이 엄마의 매니저라 해도 손색이 없다.)
▲ 미술교습소 내부 모습
#그림을 가르치는 일은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일간지에 연재를 오래하면서 병이 났었어요. 아무래도 마감에 쫒기고 일상이 거기에 온통 매달려 있다 보니, 신경도 항상 곤두서있고 스트레스도 많고. 그래서 안 되겠다 싶어서 연재 몇 개 빼고 다 내려놓았죠. 그리고 동네에서 아이들 몇 명 모아서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동네가 워낙 작다보니 입소문이 나서 하나둘씩 모이다가 지금처럼 교습소의 모양을 갖추게 됐죠.
“엄마가 (지금은) 밝아졌고 좋아졌어요”
은혜 씨가 이번에는 엄마의 인터뷰를 거들고 나섰다. “원래는 전화 오면 (*마감 독촉 전화를 말함) 짜증내고 그랬었는데...좋아졌어요”
“아마 연재에 쫒기지도 않고, 아이들을 곁에 두고 일할 수 있게 되니까 엄마의 지금이 많이 좋아 보이는 것 같다”고 작가는 덧붙인다.
이쯤에서 은혜 씨 이야기를 묻지 않을 수 없다.
▲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은혜 씨
#선생님 작품 때문인지, 은혜 씨가 원래 알고 지냈던 사이처럼 친근하게 느껴집니다. 은혜 씨는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나요?
지금 제 교습소에서 일을 도와주고 있어요. 교실 청소도 하고, 상담 오시는 분들 차 대접해드리고, 이것저것 도와주고 있죠. 월급도 30만원 씩 주고 있어요. 원래는 호산나대학에 다니다가 굿윌스토어라는 곳에서 잠시 일하게 됐었는데, 거리가 너무 멀어서 쉬게 됐고요.
며칠 후부터 다시 근처 복지관 프로그램에 다니기로 했어요. 또래친구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하거든요. 지금 은혜에게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은 그런 또래 청년들과의 유대 관계, 그리고 직업, 성취에 대한 경험 등이에요. 한동안은 은혜가 연애를 했으면 해서 온 식구가 모두 바라고 기대했었는데, 잘 안됐어요. 아주 잠깐 남자친구가 있기도 했는데, 좋아하는 사람 만나기가 어려운가 봐요.
#만화를 그리시는 일과 은혜 씨 엄마로서의 삶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네, 맞아요. 제 만화가 주로 일상을 다루다보니까 더욱 그렇죠. 만화를 그리면서 내 삶을 되돌아보는 시간이 저절로 주어지고, 또 그리면서 정리가 되고, 그렇게 스스로 지나간 일들의 의미들을 차근차근 찾게 됐죠.
독자들의 반응이 큰 힘이 되기도 해요. 같은 상황에 놓인 엄마들이나 특수학교 선생님처럼 관련된 분들이 함께 동의해주고, 박수쳐주고, 공감해주는 게 너무 좋았죠. 아무래도 만화가 특성상 그림과 글이 모두 포함되는 작업이니까, 제 의도를 정확하게 담게 되잖아요. 그러다보니 독자와의 소통도 좀 더 명확해지게 된 것 같아요.
▲은혜 씨와 함께 한 작가
# 그런데, 워낙 실제 경험들을 작품에 녹여내시기 때문에, 타인에게 사생활이 지나치게 노출된다는 부담도 있으실 것 같은데요
앞에도 말씀드렸지만 제 만화는 ‘허구’가 아니라 실제 있었던 일, 나나 내 주변 사람들이 겪은 일상 속의 일들이 중심이 되다 보니까, 다소 가공이 될 수밖에 없는데도 사람들이 다 ‘실제’처럼 느껴요. 연락을 잘 안 하고 지내더라도 제 만화를 보면서 “전에 그런 일 있었다며?” 하고 묻기도 하고 그렇게 제 만화를 통해 안부를 확인하기도 하는.
그런데, 정치하시거나 그런 분들이면 모를까, 우리 같은 사람들은 다 드러내도 굳이 크게 손가락질 받을 만큼 잘못할 일들이 없잖아요. 실수를 하더라도 다 용서될 수 있을만한 것들이라고 생각하니까, 숨길 게 없어요.
은혜를 키우면서 그런 닫혀있던 것들이 많이 깨진 것 같아요. 내려놓게 되고.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바라보느냐가 아니라, 우리(은혜와 나)가 저들을 바라보자. 삶의 중심을 다른 사람에게 두지 말고, 우리에게 두자고 생각하니까 편해지더라고요. 그 변화는 한 끝 차이인 것 같아요.
그렇게 오히려 확 드러내고, 사람들과 소통하니까 오히려 더 가볍게 생각해주시더라고요. 저는 우리 가족이 참 평범한 가족이라고 생각해요.
# 모든 워킹맘이 그렇듯이, 일과 육아를 병행하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은혜가 어릴 때, 저처럼 장애아를 둔 선배 어머님 한분이 저에게 “일이든 육아든 하나 포기하라”고 하셨었어요. 조언을 해주신거죠. 근데 전 그게 행복할 것 같지 않더라고요. 어쨌든 ‘끝까지 둘 다 해보자’라는 마음을 먹었고, 지금은 일을 놓지 않았던 게 너무 잘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아마 아이 때문에 내가 포기했다면 내 안에 희생에 대한 원망 같은 것이 남아 있었을 것 같아요. 어쩌면 그게 오히려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작업실에서 아이들과 함께 (왼쪽이 은백 군, 가운데가 작가, 오른쪽이 은혜 씨)
# 혹시 장애를 가진 자녀를 키우고 계시는 후배 부모님들께 해주고 싶으신 이야기가 있다면?
(장애아를 키우는 데 대한 어려움은) 결국 아이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문제라고 생각해요. 세상의 중심을 자녀와 자신에게 두는 것. 거기서부터 시작했음 좋겠어요. 타인의 시선은 흘러가는 것일 뿐이고,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은 우리 가족이니까. 우리가 행복해질 수 있는 것 중심으로 생각을 하다보면, (삶이) 바빠지더라고요.
[편집팀 에필로그]
“은혜야, 너 화장이 너무 과하다, 얘”
편집팀과 처음 인사를 나눴을 때 은혜 씨의 입술은 새빨갰다. 아직은 화장이 서툰지 립스틱 농도 조절에 어려움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 은혜 씨의 화장을 고쳐주는 장차현실 작가의 모습은 엄마라기 보다, 언니나 친구 같았다. 은혜 씨의 동생 은백 군은 개학 후 첫 선거에서 하고 싶었던 임원이 되지 못해 시무룩한 얼굴로 학교에서 돌아왔다. 작가는 아들이 좋아하는 머핀을 살뜰히 챙겨 달래고, 누나인 은혜 씨는 동생에게 애교 가득 '사랑한다'고 표현해준다. 취재를 마치고 점심으로 함께 먹은 냉면은 편집팀과 함께 먹을 메뉴를 고민하던 작가에게 남편(서동일 영화감독)이 추천해준 메뉴라고 했다. 그리고 편집팀을 차로 바래다주는 길. 작가는 차의 속도를 두 번 줄였다. 맨드라미가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집 앞에서 한번, 그리고 지나가는 고양이에게 눈길을 주기 위해서가 두 번째였다.
작가가 말한 것처럼 이렇듯 이 가족의 일상은 특별하지 않고 소소하다. 그리고 이날 우리가 만난 사람 역시 ‘만화가 누구’, ‘누군가의 엄마’가 아닌, 평범한 사람 장차현실이다. 시종일관 숨김없이 담담하게, 그러나 유머를 잊지 않고 자신과 은혜, 그리고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보여준 장차현실 작가에게 감사드린다. 그의 만화에서 만나는 네 가족의 평범한 행복이 앞으로 더 기대된다.
※추석 연휴로 다음 주(9월 8일) 채널 비로소는 쉽니다.
글 | ch.비로소 편집팀
중앙장애아동·발달장애인지원센터, 비로소 에서 운영하는 e-레터 편집팀. 장애아동과 발달장애인을 위해 보고,듣고,쓰고,읽는 능력을 계속 키워나가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