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계산 너머(1024)
유병덕
일요일이다. 아침기온이 청량하다. 지난여름 실내온도는 섭씨 30도를 맴돌았다. 오늘아침 기온을 보니 25도를 나타내고 있다. 서재에 앉으려 커튼을 올리니 누가 청소 해놓은 듯 하늘이 깨끗하다. 아파트 사이로 수통골이 아침햇살을 받으며 가까이 다가온다. 좌우로 나지막한 빈계산, 금수봉, 도덕봉이 선명하게 나타났다.
금수봉이 빈계산보다 높지만 봉이라 부른다. 봉과 산을 나누는 기준을 잘 모르겠다. 세봉우리는 주말이면 찾아오는 손님 대접하느라 모두 바쁘다. 가끔 저 품에 안기어 휴식을 취하고 새로운 에너지를 얻어오곤 한다. 비록 작은 봉우리지만 내공이 많이 쌓인 듯하다. 찾아가면 늘 여유롭게 편안히 맞이해준다.
지난 사월에는 계룡산을 등산하며 대지의 꿈틀거림을 느껴보았다. 계룡산은 큰 산이라 할 수 없지만 작다고도 할 수 없는 명산이다. 빈계산은 계룡산자락 동쪽외곽에 자리한 암탉처럼 생긴 작은 산이다. 나는 빈계산 보다 수통골이 더 익숙하다. 대전시민들 조차 이름을 모르고 지내는 사람이 많다. 시내버스 표지판도에도 빈계산 입구로 표기하지 않고 수통골로 표기하고 다닌다.
어제 「오늘도 네가 있어 마음속 꽃밭이다.」라는 주제로 풀꽃 문학제가 공주에서 있었다. 그 곳이 가기위하여 주유소도 들릴 겸 수통골 쪽으로 우회했다. 지난번 보았던 푸름이 가득한 빈계산은 간곳없다. 산 중턱에 누런 검버섯이 ‘내 나이 가을되었소.’ 하며 외로움을 타는 듯 초라해 보였다.
나의처지와 비슷해 보였다.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만나고 싶었다. 마침, 어제 공주풀꽃 문학제에서 만난 친구가 함께 가겠노라했다. 그는 산을 느껴보고 싶어 했다. 그냥 오롯이 편안하게 품에 안기어 보고 싶은 모양이다. 약속한지라 시간을 맞추어야 했다. 평소 교중미사에 참석하던 것을 아침미사로 바꾸었다.
도착하니 그 친구가 보이지 않았다. 순간 걱정이 되었다. 오다가 교통사고가 났을까, 아니 무슨 일이 생겼나, 이런 생각 저런 생각에 잠시나마 심난했다. 손전화기를 꺼내 열어보니 거두절미하고 ‘20분 늦음?’이다. 이는 한편으로 나의 조바심을 탓하여 볼일이다. 평생 시간에 맞추어 움직이던 습관이 아직도 남아 있다.
충남도청이 대전 있을 때 주말이면 가끔 수통골을 찾았다. 예산실에 근무할 때다. 야간작업을 많이 했다. 직원들이 체력소진 되어 힘들어하면 찾아왔다. 창백해진 얼굴로 십여 명이 찾아오면 말없이 품어주었다. 산봉우리를 한 바퀴 돌아 내려오면 속옷에 땀이 촉촉이 배었다. 온천욕을 하고 맛있는 식사를 하고나면 그 친구들 얼굴에 혈색이 돌았다. 그 힘으로 다시 한주를 거뜬히 버틸 수 있었다.
주말이라 수통골 주차장은 차와 사람으로 넘쳤다. 주차공간이 부족하여 도로변 경계석 까지 차가 올라와 앉아있다. 계곡 쪽으로 가족이나 친구끼리 무리지어 걸어간다. 간혹 혼자서 백 팩을 메고 두리번대는 사람도 있다. 예전 직원들하고 왔을 때는 일렬로 늘어서 부지런히 걸어 올라갔다. 체력 단련하러 왔던 것이다. 이산저산을 둘러보거나 파란하늘을 올려다보며 즐길 여유가 없었다.
이번에는 사람들이 적어보이는 버스종점인근 뒤로 시작했다. 등산로를 따라 아이들이 내려온다. 재잘거리는 소리가 새소리처럼 들렸다. 입구에 소나무가 국군의 날 열병하듯 도열해 환영한다. 깨끗한 공기가 폐부를 시원하게 해준다. 나무수형도 잘 생겼다. 쭉쭉 하늘로 향하고 있다. 함께 간 친구얼굴표정이 오버랩 된다. 한 주간 축제로 체력은 고갈되었지만 영혼은 편안해 하는 듯 보였다.
주차장에서 빈계산 정상으로 향하는 등산로는 조금 가파르다. 친절하게도 로프를 잡고 올라가라고 늘여놓았다. 쉬엄쉬엄 걸어 올라가다가 체력단련 하러온 친구가 나타나면 길을 양보했다. 여기가 어디일까 궁금할 때 쯤 이내 안내 푯말이 나타나 정상까지 몇 미터 남았다고 알려준다. 이야기 나누며 걷다보니 다 올라왔다.
대전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도심에 차들이 분주히 왕래할 뿐 평화롭다. 멀리서 초라해보이던 검버섯이 찾아온 손님에 묻혀버렸다. 바로 아래 도안신도시빌딩이 오벨리스크처럼 하늘을 향하고 있다. 대전을 둘러싼 구봉산, 보문산, 계족산까지 보인다. 서북방향으로 지난봄에 올랐던 계룡산 삼불봉이 눈에 보인다. 멀리 동남쪽방향으로 서대산까지 바라볼 수 있다. 미리 올라온 사람들은 휴식을 취하며 허기를 채우고 있다. 잠시, 백 팩을 내려놓고 물 한모금과 김밥 한 줄로 요기를 하며 휴식을 취했다.
산에만 오면 잊지 못할 추억하나가 떠오른다. 군에서 실제훈련 상황이다. 한 병사의 애인을 헬기로 백운대 정상에 이동시켜놓고 그 아가씨가 무전기로 한 병사의 이름을 부른다.
“자기야, 나 북한산 정상에 와 있어,”
놀랜 그 병사는 앞으로 나왔다. 교관이 완전군장을 시켰다. 그리고 명령한다. 지금부터 시간을 잰다. 정상까지 몇 분 걸리는가. 1시간 30분 내에 도착하면 애인과 함께 일주일간 휴가다. 나머지 병사들이 부러워했다. 이어 선착순 10명, 2박3일 휴가다. 소총 한 자루와 수통만 옆구리에 매고 헉헉거리며 북한산을 올랐던 나의 모습이다.
오래 만에 여유롭게 가을 산을 즐겼다. 나무숲사이로 청량한 가을하늘을 바라보았다. 스쳐지나가는 사람의 얼굴을 마주하며 눈인사도 나누었다. 산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수많은 아파트, 빌딩을 바라보며 군상의 모습도 그려보았다. 함께 간 친구의 체력이 소진되어 힘들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바로 주차장 계곡으로 내려갈까요?
아니란다. 금수봉으로 돌아가자고 한다. 산에 와서 힘이 더 생긴 것 같다. 힘들었지만 꾹 참고 땀을 뻘뻘 흘리며 금수봉까지 올랐다. 빈계산 정상보다 대략 100여 미터 정도 더 높지 않을까 한다. 잘 지어놓은 나무 정자에 들어가 보려 했더니 장정들이 십여 명이 지키고 있다. 정자주변을 한 바퀴 돌아 서북방향 능선으로 걸었다. 한참을 따라가다 보니 도덕봉과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갈림길이 나왔다. 도덕봉쪽으로 가고 싶지만 해가 많이 기울었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주차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한때, 빈계산 너머 후지산, 알프스, 킬로만자로, 아콩카구아 등 외국의 최고봉을 향해 본적이 있다. 때로, 금강산, 한라산, 지리산, 설악산 등 국내 명산만을 찾아다닌 적도 있다. 산을 찾는 것은 풍광만을 즐기기 위한 것이 아니다. 거기에 있는 다른 유형의 자유에 흠뻑 빠질 수 있어야 한다. 연행당하 듯 버스에 실려 가서 어버이 수령께 불경하지 않도록 감시받아가며 바라보는 금강산이 세계적인 절경인들 일회용일 뿐이다.
이 가을에 만난 빈계산은 편안히 나를 맞아주었다. 고봉이나 명산보다 내게 부담을 주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에 평화만 선물로 받았다. 누런 검버섯에 상심하지 말라 한다. 한 닢 두 잎 내려놓으며 다음을 준비하라고 충고한다. 다시 찾아가 그 작은 품에 안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