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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레(2021. 6. 22일)는 백성오 스님의 15주기 기일이다. 백성오 스님께서 범어사 주지직에 계실 때 불교신문 임병요 기자와의 인터뷰 기사를 올립니다. 이 자료는 울산 백원일 거사님이 제공한 것입니다. 관정 합장
◉ 불교신문 인터뷰 기사 중에서 (1996년 4월 28일 )
松竹(송죽)처럼 꼿꼿하고 鶴(학)처럼 청정하여 俗塵(속진)의 거센 바람 속에서도 당당한 수행자의 위풍을 견지해오고 있는 제14교구 본사 범어사 주지 性悟(성오)스님은 완연한 봄기운이 금정산을 감싸고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처럼 중생제도를 위해 감로법을 펼쳤다.
雲惺(운성) 대강백(大講伯)을 강사로 모시고 범어사 강원 大敎科(대교과)를 마치고 다보사(多寶寺), 송광사(松廣寺), 범어사(梵魚寺), 보광사(普光寺) 등 제방선원에서 16안거(安居)를 성만(成滿)해 선교(禪敎)를 두루 겸비한 스님은 포교⋅불사(佛事)에도 남다른 탁월함을 보여 부산불교중흥의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하고 있다.
記者; 금정산 나무들이 연초록 새싹을 키워내고 있으며 만물은 봄을 흠뻑 머금고 새로 운 계절로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부산지역 포교의 중심지인 선찰대본산인 제14 교구 본사 범어사를 이끌고 계신 스님의 근황은 어떻습니까?
스님; 계절은 마치 순례자 같아요. 사중(寺中) 일에 진력하다보니 한철 선방에서 참선 수행(修行)한 것처럼 벌써 봄의 중턱에 와 있으니 정말로 세월은 유수와 같습니다. 근황이야 수행자가 자기 공부 철저히 하고 부처님 시봉(侍奉) 잘하고 사부대중화합하면 그만 아닙니까? 그저 아침 예불하고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자고 틈나면 경전 보며 지내야 하는데 주지라는 소임을 맡다보니 대중들과 화합해 金井山門(금정산문)의 본래 모습을 지켜 대중이 편안히 공부할 방법을 생각하고 어떻게 하면 한 사람에게라도 더 불법을 전할까 생각하며 바쁜 가운데서도 그저 如如(여여)하게 지냅니다.
기자 ; 스님께서 처음 불법과 인연을 맺게 된 동기와 출가수행 이후 어떤 마음으로 구도 의 길을 걸어오고 있습니까?
스님; 인연이야 수천억겁(劫)의 인연이지 않겠습니까? 본래 속가(俗家)부터 불법(佛法)과 인연이 됐어요. 어려서부터 서당에 다니며 한학을 공부했는데 책 읽고 공부하는 것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어요. 당시 대학자인 松沙門人(송사문인)1) 水村(수촌)2) 선생과 省齊(성제)3) 및 玄谷(현곡)4)선생 문하에서 공부를 했는데, 그때 공부한 것이 경전을 볼 때 많은 도움이 됩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釋迦』라는 책을 탐독하게 됐는데 그때 받았던 감명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因果(인과), 見性(견성), 出家(출가)라는 말은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고, 무작정 스님이 보고 싶고 절에 가고 싶은 충동이 일었습니다. 그래서 방장산 방장산 임공사(方丈山 臨空寺)5)를 찾았는데 당시 도량석(道場釋), 쇳송(鐘頌), 염불소리를 들으며 부처님처럼 출가의 길을 걷겠다고 다짐했어요.
출가하려고 내장사(內藏寺)를 찾았는데 절 살림이 너무 어렵다고 썩 반기지를 않았어요. 그래서 집에 내려와 거짓말로 공부하러 절에 간다고 해 돈을 타서 그 돈으로 쌀을 사서 삼월 삼짇날에 출가를 했어요. 자기가 먹을 쌀을 가지고 출가한 사람은 아마 별로 없을 겁니다.(웃음) 출가수행자의 길에 들어선 이후 放逸(방일)하려 는 생각이 들면 처음 『釋迦』를 읽을 때의 감명과 도량석, 염불소리를 들을 때의 가슴 벅참을 생각하며 출가수행자의 모습을 견지합니다.
記者; 스님께서 특별히 인연이 깊으신 스님이 있으십니까? 또 스님께서 구도자의 길을 걸어오시는 데 등불과 같은 역할을 해주신 스님이 있으시다면요.
스님; 이 세상에 인연법(因緣法)이 아닌 것이 어디 있습니까. 나는 한 인연이라도 소중 히 하기 때문에 모두 특별한 인연으로 생각합니다. 은사이신 東山(동산)6)스님에게는 수행자의 당당함 그리고 척사현정(斥邪顯正) 대진종풍(大振宗風)의 여법(如法)한 수행가풍(修行家風)과 모든 대중을 섭수(攝受)하는 자세를 배웠고, 종정을 세 번이나 지내신 古庵(고암)7)스님에게서 자비(慈悲), 인욕(忍辱), 수행자의 면모를 배웠고, 나주 다보사(多寶寺)에서 雨華(우화)8)스님을 모시면서는 철저한 본분납자(本分衲子)의 수행생활과 삼보정재(三寶淨財)를 아끼는 행을 배웠습니다. 또한 담양 보광사(普光寺) 導光(도광)9)스님에게서 청정계율(淸淨戒律), 대중외호(大衆外護), 가람수호(伽藍守護)를 현재 태고사(太古寺) 조실(祖室)이신 道川(도천)10)스님을 모시고 정진하면서 수행의 방법을 배웠습니다.
記者; 스님께서는 선승(禪僧)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덧붙여 理(이)와 事(사)에 대한 풍부한 식견도 갖고 계신데, 후배 수행자들에게 마음 다스리는 길을 열어 주십시오.
스님; 구도자는 자신의 이익을 앞세우지 말고 수행을 근본으로 삼아야 합니다. “소탐대실(小貪大失)”이라는 말이 있는데, 물질, 명예, 자리 등에 연연하면 가장 크고 넓은 이 세 상 어느 곳에도 견줄 데가 없는 내 마음을 잃어버릴 수가 있어요. 무엇보다 수행자는 마음을 자각하는 공부를 해야 하고 보살심을 가지고 이웃을 자비의 눈으로 봐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자기집착을 놓아야하지요.
물질, 명예에 집착된 마음과 개인주의적 사고방식은 내 자신을 보지 못 할 뿐 아니라 이웃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이제라도 수행자는 本心(본심)을 깨달아 자비의 마음으로 바꾸어야하고, 보살의 인격으로 승화시켜야 해요. 삶이란 많이 소유했다고 해서 풍부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갖고 싶은 욕망을 버리면 자기 자신이 참 으로 풍족해질 뿐만 아니라 넉넉해지는 도리를 알아야합니다.
記者; 불자들은 신행생활을 하는데 있어 어떤 마음과 행동으로 임해야 하는지 간단히 설법해 주십시오.
스님; 平常心是道(평상심시도)의 생활모습이 필요합니다. 불자들은 기도하고 불공, 참선 할 때의 모습과 가정, 사회생활 할 때의 모습이 천양지차입니다. 이것은 자기주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올바른 불자는 언제나 굳은 心地(심지)를 가지고 가정에서나 절이나 사회에서나 신해행증(信解行證)11)의 마음으로 수행하고 생활해야 합니다.
觀心一法總攝諸行(관심일법총섭제행)12)이라는 말처럼 불공, 기도, 정진할 때의 모습으로 생활하고 내 이웃을 생각한다면 불국정토(佛國淨土)가 따로 있겠습니까. 이곳이 곧 불국정토 아닙니까. 그러니까 불국정토는 우리불자들의 마음과 행(行)에서 비롯됨을 바로 알아야합니다.
記者; 현재 IMF의 위기로 국민들은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여야는 당리당략에 눈이 어두워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위기상황을 극복할 대안을 일침(一鍼)으로 놓아주십시오.
스님; 이 모든 것은 물질적인 것에 집착해 살면서 自我(자아)를 상실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즉 정신적인 빈곤이 원인이 된 것이지요. 사치하고 낭비하고 우선 쓰고 보자는 식의 살림살이였으니 두말할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이제 이 서양적인 물질만능, 향락주의, 배금주의를 버리고 安貧樂道(안빈낙도)의 마음이 필요한 때입니다. 그리고 위정자들은 德化(덕화)와 忍辱(인욕)으로 국민들을 위해 정치를 해야 합니다. 옛말에 山無道人 朝無良臣(산무도인 조무양신)13)이라고 했지 않습니까. 산 중에 도인이 없으면 방황하는 수행자가 많아지고, 조정에 어진 신하가 없으면 백성은 고통을 받는다는 뜻이지요. 여야의 목표가 爲民(위민)에 있다면 대화와 양보로 衆智(중지)를 모아 타협을 해야만 합니다. 또 현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은 무엇보다 남을 용서하고 攝受(섭수)하는 마음과 인욕정신(忍辱精神)이 있어야합니다.
記者; 며칠 후면 인류의 대 스승이신 부처님 오신 날입니다. 본래 중생에게 갖추어진 佛性(불성)을 증명하시기 위해 나투신 이날을 맞아 불자들은 어떤 마음과 자세로 임해야 하는지 한 말씀해 주십시오.
스님; 釋迦不出 達磨不來 佛法遍世 春風開花(석가불출 달마불래 불법편세 춘풍개화 ⇨ 부처님이 나투지 아니하고, 달마가 오지 아니했더라도 불법은 항상 온 법계에 두루 해서 봄바람에 꽃이 피는 것과 같다.) 이처럼 부처님은 법계에 충만해 있어 가고 옴이 없고, 시방세계에 부처님이 항상 계십니다. 불자들은 부처님이 오셨다 가셨다에 얽매이지 말고 사람마다 본래 갖추어져 있는 자기본성을 찾는 것이 부처님 오신 날을 뜻 깊게 맞이하는 것임을 알아야합니다. 즉 진리의 몸을 성취해 있기 때문에 우주법계에 충만해 계십니다. 다만 마음을 깨닫고 구하는 사람은 항상 부처님을 친견하고 나아가 頭頭物物(두두물물)이 法身(법신)임을 알 것입니다. 十方法界(십방법계) 문을 열어놓고 보면 부처님이 우주의 생명체로 現身(현신)하고 계심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大聖(대성)은 無出沒(무출몰)이예요. 나고 죽음이 없는 眞如法身(진여법신)으로 人格化(인격화)한 부처님에게 어찌 오고감이 있겠습니까. 『금강경』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약이색견아(若以色見我) 이음성구아(以音聲求我) 시인행사도(是人行邪道) 불능견여래(不能見如來) ⇨ 형상으로 여래를 보거나 음성으로 여래를 구한다면 삿된 도를 행하는 사람이니 제법의 실제 모습인 여래를 보지 못하리라.)라고 한 것처럼 진실로 부처님을 보려면 모양, 형상에 얽매이지 말고 자기본성을 찾는 일에 정진해야 합니다.
記者; 긴 시간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스님께서 평소 즐겨 쓰시는 偈頌(게 송)이나 佛⋅祖師(불⋅조사)말씀을 불자들에게 話頭(화두)로 주십시오.
스님; 六祖 慧能(육조 혜능)14)스님이 말씀하신 “菩提自性(보리자성)이 本來淸淨(본래청 정)하니 但用此心(단용차심)하면 直了成佛(직료성불)하리라. ⇨ 진리는 본래 청정하기 때문에 다만 마음을 잘 쓰면 곧 성불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을 항상 가슴 깊이 새겼으면 합니다.
<글; 임 병요(林秉禾) /사진; 장 용준(張容俊) 기자>
아래 각주는 백원일 거사님이 단 것을 그대로 올립니다.
註1). 송사(松沙); 1846(헌종 12)∼1916. 조선 말기의 의병장으로 기우만(奇宇萬)을 말한다.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회일(會一), 호는 송사(松沙). 전라남도 장성 출신. 참봉벼슬을 하였으므로 기참봉으 로 불렸다. 호남에서 이름에 높았던 참판 정진(正鎭)의 손자로서 학업을 이어받아 일찍이 문유(文儒)로 추앙받 았다. 1894년 동학운동 당시에 유생들이 동학에 가담한 사실을 유생의 수치로 여겼으며, 1895년 나주에 세워 진 동학당 토평비의 비문을 짓는 등 동학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이어 단발령이 내려지자 머리를 깎는 욕은 나라가 망하는 것보다 더한 일이라며, 머리를 깎고 사느니 차라리 머리를 안 깎고 죽는 편이 낫다는 통분의 상소를 하였다.
1896년 2월 제천의진의 창의대장 유인석(柳麟錫)의 격문이 호남지방에까지 영향이 미치면서 의병 봉기의 기운 이 짙어져 갔다. 3월 광주향교(光州鄕校)에서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모아 규칙을 정하고 전략을 의논하는 등 준비에 철저를 기하였다.
그 동안 이러한 소식을 접한 사람들이 속속 모여들어 의병의 형세가 커지자 관리들은 자기들 신변에 위험을 느껴 모두 도피하였다. 이때, 장성의 기삼연이 장정과 군사 300명을 이끌고 와 합세하게 되자 그 기세는 더욱 높아졌다. 이로써 사실상의 호남창의 총수가 되었다.
각 고을에 통문을 보내어 모든 의진을 일제히 광주로 모이도록 하고 광주의 광산관(光山館)을 본영으로 삼았 다. 그러나 고종으로부터 의병을 해산시키라는 명으로 파견된 선유사 신기선(申箕善)의 설득으로 해산하고 말았 다. 5월에 장성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켰으나 10월 16일 왜군에게 붙잡혀 옥고를 치르고 1897년 4월에 석방되었 다. 1908년 2월 순천 조계산의 암자에서 동지·문인들과 재거사를 꾀하던 중에 고종이 강제 퇴위 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북쪽을 향하여 통곡한 후 해산하고 은둔하였다.
註2). 수촌(水村);
註3). 성제(省齊); 1876(고종 13)~1913. 조선 말기 유학자로 송인직(宋寅直)을 말한다.
자(字)는 자온(子溫), 호는 성재(惺齋)이며, 본관은 은진(恩津)이다. 전라북도 고창군(高敞郡) 흥덕면(興德面) 출신이며 판원사(判院事) 송대원(宋大原)의 후손으로 많은 후진을 양성하였다. 문집으로《성재유고(惺齋遺稿)》 가 있다.
註4). 현곡(玄谷); 1893(고종 30)∼1961. 유학자로 유영선(柳永善)을 말한다.
본관은 고흥(高興), 자는 희경(禧卿), 호는 현곡(玄谷). 전북 고창(高敞) 출생. 아버지는 기춘(基春)이며, 어머 니는 광주이씨(廣州李氏) 병현(秉賢)의 딸이다. 전우(田愚)의 문인으로,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의 치욕으로, 전우를 따라 서해(西海) 고군산 외딴섬 왕등도(暀嶝島)·계화도(繼華島) 등지에서 근 20년간 갖은 고초를 극복 하면서 유학에 전념하였다.
1924년 고향에 돌아와 현곡정사(玄谷精舍)를 건립하고 전통의 도학을 보전하기 위해 후진교육에 전념하여 많은 영재를 배출시켰다. 그의 학문적인 입장은 한말의 심성론(心性論)에 있어서 주리론(主理論)의 입장을 비판 하고, 성(性)은 스승이요 심(心)은 제자라는 ‘성사심제(性師心弟)’ 즉 성존심비설(性尊心卑說)을 제창한 전우 의 핵심적 학설을 강조하여 철저히 계승 발전시켰다.
또한 그 성리설과 학문론을 체계적으로 분류 정리하여 『간재성리유선(艮齋性理類選)』을 편집하였다. 그는 예학에도 합리적인 절충을 수행하여 『예의관보(禮疑管補)』와 『사례제요(四禮提要)』를 편찬하였으며, 그의 예설은 광범한 호응을 얻기도 한다.
그는 지조를 생명으로 삼아 조선시대 도학의 전통을 최후까지 보존하고 학문적 신념에 살았던 학자요 교육 자이기도 하다. 그는 고창에 용암사(龍巖祠)를 건립하고 전우의 영정을 봉안하였는데, 그 후 이 용암사에 배향 되었다. 편저로는『담화연원록(潭華淵源錄)』·『구산풍아(臼山風雅)』·『오륜시편(五倫詩編)』·『규범요감(閨 範要鑑)』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현곡집』 32권 16책이 있다.
註5). 임공사(臨空寺); 전라북도 고창의 진산인 방장산에서 서남간 기슭 벼랑 위에 있는 절.
註6). 동산(東山)스님; 1890~1966. 법명은 혜일(慧日), 속명은 하동규(河東奎), 아버지는 성창(聖昌), 어머니는 정경운(鄭敬雲)이고 본관은 진주이다.
1890년 충청북도 단양읍 상방리 191번지에서 태어났다. 7세부터 단양읍 향숙(鄕塾)에서 수학하여 사서삼경 등 한학을 익혔다. 1904년 익명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주시경(周時經) 등으로부터 신학문을 배웠고 중동중학교와 의학전문학교를 나왔다. 고모부 오세창(吳世昌)과 은사 주시경의 영향을 받아 1912년 흥사단에서 국어연구회 활동을 하였고,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용성(龍城)과의 만남에서 불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1912년 범어사에서 출가하였다. 당시 용성으로부터 인간의 병은 의술로 다스린다지만 마음의 병은 무엇으로 다스릴 것이냐? 라는 물음을 받고 불교에 심취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1913년 금어선원에서 계를 받고 혜일이라는 법명을 얻었다.
용성으로부터 《전등록》과 《염송》 《범망경》 《사분율》 등을 배웠고, 한암으로부터 《사교》를, 영명으로부터 《대교》를 배웠다. 28세부터 운수승으로 전국을 돌며 수행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난 뒤 민족대표 33인 중 한명인 용성이 일경에게 체포되자 3년간 옥바라지를 하였다. 도봉산 망월사, 금강산 마하연, 가야산 해인사 등 여러 절에서 안거하였는데, 각화사에서 눕지 않고 수행한 장좌불와(長座不臥)와 직지사의 3년 결사(結社)가 잘 알려졌다.
1930년 해인사 선원 조실과 안변 석왕사 조실이 되었고, 1935년 금어선원 조실로 추대된 뒤에는 30년간 후학 지도에 힘써 130여 명의 제자를 길러냈다. 1955년에는 불교정화운동을 마무리하여 승단을 비구 중심으로 바꾸었으며, 종정에 추대되었다. 같은 해 효봉·청담 등과 함께 네팔에서 열린 제4차 세계불교도회의에 참석하여 한국불교를 세계에 알렸다. 1958년 종정에 재추대되었다. 1966년 나이 76세, 법랍 53세로 입적하였다.
註7). 고암(古庵)스님; 1899~1988. 호는 환산(歡山), 법명은 상언(祥彦)이며, 고암은 법호이다. 속명은 윤지호(尹志豪)이다. 아버지는 문, 어머니는 정원행이다. 경기도 파주군 적성면 식현리에서 태어났다. 1917년 해인사에서 출가하여 제산을 은사로, 한암을 계사로 득도하였다. 20세부터 운수승으로 전국의 사찰을 순례하였는데, 부처의 행적을 본받아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1938년 내원사 천성선원에서 깨달음을 얻어 용성으로부터 전법게를 받았으며, 상언이란 법명 대신 고암이란 당호를 얻었다. 1967년 대한불교조계종 3대 종정에 추대된 뒤 4대·6대 종정으로 재추대되었다. 1970년 해인총림 2대 방장, 1980년 용성문장에 추대되었다.
종정 시절, 설법 서두에 항상 목격전수(目擊傳受)라는 말을 하였는데, 이는 계율은 계를 전하는 이와 받는 이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에 이미 다 전해졌다는 뜻이다. 계율을 중요시 할 것을 강조하고, 스스로도 계율을 엄격히 지켜 율사(律師)로 존경받았다. 80세가 넘는 나이에도 해외에 나가 포교하는 등 대중포교에 힘쓰다가 1988년 해인사 용탑선원에서 입적하였다. 나이 90세, 법랍 71세였다.
註8). 우화(雨華)스님; 1903~1976. 전남 담양군 무정면 성도리(成道里)마을에서 태어났다. 부친 이규준(李奎俊)선생과 모친 하남정씨(河南程氏)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법명은 도원(道元)이고 법호는 우화(雨華)로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어려서부터 묵묵히 앉아 있기를 좋아했으며, 혼자 있어도 울거나 보채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15세 되던 해에 할아버지가 세상 떠나는 것을 보고 무상(無常)을 절감한 것이 출가 동기가 됐다. 덕유산으로 입산해 영각사(靈覺寺)에서 영명(靈明)스님에게 머리를 깎고 출가사문으로 첫발을 내딛었다.
해인사 불학강원(佛學講院)에서 교학을 연찬한 후에는 참선수행의 길을 걸었다. 금강산 마하연을 비롯해 오대산, 묘향산 등 명산대찰에서 만공, 혜월, 한암, 용성스님 등 당대의 선지식들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만공스님 회상에서는 성철스님과 같이 공부했으며, 만공스님이 많은 수좌 가운데 “성철수좌가 1등이고, 우화수좌가 2등”이라고 했다한다. 전국 방방곡곡을 행각참상(행각참상)하며 공부의 깊이를 더하는 과정에서 오도(悟道)의 경지에 이르렀다. 오도송(悟道頌)은 다음과 같다. “脫落身心(탈락신심)하고, 身心脫落(신심탈락)이여, 雲浮靑山(운부청산)에 一峰(일봉)이 獨露(독로)로다.”
1935년에는 운봉(雲峯)스님이 조실로 있던 천성산 내원사 동국제일선원에서 정진했다. 이때 운봉스님의 법제자가 되면서 우화(雨華)라는 법호를 받았다. 우하(雨下)라고도 한다. 해방 후에는 나주 다보사에서 주석하면서 수좌를 제접(濟接)하고 중생을 제도(濟度)하며 일생을 보냈다. 단순담백하고 천진무구한 모습과 음성으로 사람들을 맞이했다.
1967년 10월 1일 “금성산(錦城山)에도 해가 저무는구나”라면서 “각자 노력하라”고 당부한 뒤 임종게를 남기고 원적에 들었다. 세수는 74세 법납은 60세였으며 스님의 비는 1977년 봄 나주 다보사에 모셔졌다.
상좌에는 적명(寂明, 문경 봉암사), 정진(正眞), 일륜(一輪, 광주 다보선원)스님 등이 있다.
註9). 도광(道光)스님; 1922~1984. 부친 김기춘 속명은 김오남(金午南)이다. 모친 장대각화 보살이 태몽으로 보름달 (滿月)을 보았다고 한다.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부모의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부처님 가르침과 가까워졌다. 16세 되던 해에 범어사로 출가해 동헌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불법을 배우고 익혔다.
용성(龍城)스님을 시봉할 때 문득 깨달은 바가 있다. 용성스님이 도광스님을 앉혀놓고 “마조(馬祖)가 백장 (百丈)의 코를 잡아 비트니 기러기가 어디로 날아갔느냐”고 물었다. 이때 도광스님은 “육자대명왕진언 옴마니 반메훔 천고대비만고월(千古大悲萬古月)이여 조명무한이인천(照明無限利人天)입니다”라고 답했다. 그 뒤로 도 광스님은 팔도를 만행하면서 명산대찰을 찾아 공부의 깊이를 더했다.
화엄사에서는 새벽예불을 마치고 아침공양을 하기 전 새벽 5시 30분만 되면 목장갑을 낀 손으로 도량을 비 질하는 도광스님의 모습을 보고 후학들이 어찌 방안에 머물러 있을 수 있었겠는가, 대중들이 모두 마당을 쓸며 하루를 열었던 도량이 바로 화엄사이다.
스님은 주지소임을 여러 곳에서 보았다. 1962년 백양사 주지를 시작으로 1965년에 범어사, 1967년에 용주사, 1969년ㆍ1980년에 화엄사, 1975년에 해인사 등 여섯 차례에 걸쳐 큰절 살림을 맡았다. 이와 같은 일은 아주 드문 일로 스님이 대중을 외호(外護)하고 사찰을 여법(如法)하게 운영하는데 귀감이 되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때문에 제방에서는 스님에 대해 “대중 외호하는데 1등 수좌”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상좌
註11). 신해행증(信解行證); 신(信)⇨ 진리가 있음을 믿어서 의심하지 말 것. 해(解)⇨ 부처님의 진리의 말씀과 그 내용을 알려고 노력할 것. 행(行)⇨ 안 것을 실행해 볼 것. 증(證)⇨ 알아 얻은 것을 결정을 받아 다시는 없어지지 않게 할 것.
註12). 관심일법총섭제행 (觀心一法總攝諸行); 마음을 관찰하는 한 가지 법이 모든 행을 다 포섭한다는 뜻으로 마음 을 관찰하여 마음을 바로 깨칠 것 같으면 전체 불교가 그 가운데 다 포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완전히 성취된다는 것을 뜻한다.
註13). 산무도인 조무양신(山無道人 朝無良臣); 산중에 도인이 없으면 배회하는 수행자가 많아지고, 조정에 어질고 충성스러운 신하가 없으면 백성은 시달림을 받는다는 뜻이다.
註14). 혜능(慧能)스님; 헤능(慧能, 638 ~ 713)은 선종(禪宗)의 제6조로써 당(唐)의 승려. 광동성(廣東省) 신주(新州) 출신. 성(姓)은 노(盧). 흔히 육조대사(六祖大師)·조계대사(曹溪大師)라 함.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함 께 땔나무를 팔아 생계를 꾸려가다가 어느 날 금강경(金剛經) 읽는 소리를 듣고 느낀 바 있어 호북성(湖北省) 풍무산(馮茂山)에 머물던 홍인(弘忍, 601-674)을 찾아가 문답함. 8개월 동안 곡식 찧는 소임을 한 후에 그의 의 발(衣鉢)을 전해 받고 남쪽으로 내려가 10여 년을 은둔하다가 676년에 광동성(廣東省) 광주(廣州) 법성사(法性寺)에서 삭발하고 수계(受戒)하여 정식으로 출가함. 그 후 소주(韶州) 조계산(曹溪山) 보림사(寶林寺), 소주(韶 州) 대범사(大梵寺)·광과사(廣果寺), 광주(廣州) 법성사(法性寺)에서 선풍(禪風)을 크게 일으킴. 시호(諡號)는 대감선사(大鑑禪師). 신수(神秀, ?-706) 문하의 선법(禪法)을 북종선(北宗禪)이라 하는 데 반해, 혜능 문하의 선 법은 남종선(南宗禪)이라 함. 소주(韶州) 대범사(大梵寺)에서 행한 설법을 엮은 것이 육조단경(六祖壇經)이고 혜능(慧能)을 시조로 삼아 그의 선법(禪法)을 중심으로 고려 시대에 성립된 선문파(禪門派)의 총칭이며, 현재의 대한불교 조계종(大韓佛敎曹溪宗)이다. 본래 불교의 모든 종파(宗派)가 중국에서 성립됐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종파는 대부분이 중국의 종명(宗名)을 그대로 쓰고 있다. 그러나 그 중에는 중국에서 볼 수 없는 종명들이 간혹 있는데 조계종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