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회] 정계진출, 국회의원 옥중당선
장준하 평전/[13장] <사상계>의 수난과 반독재 투쟁 2009/01/07 08:00 김삼웅 야권은 1967년 5월로 예전된 제 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 해 2월 7일 신한당과 민중당이 통합하여 신민당을 창당했다. 야당의 분열 상태로는 박정희 후보를 꺾기 어렵다는 국민의 여론 때문이었다.
그런데 차기 대통령 후보에 누구를 내세우느냐가 초미의 관심사이고 선거 결과에도 크게 영향을 미치게 되는 절체 절명의 과제였다. 당시 야권에서는 윤보선ㆍ이범석ㆍ허정ㆍ백낙준ㆍ유진오 등이 자천타천으로 후보군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장준하는 측근들과 상의하여 후보단일화 작업에 나섰다. ‘4자회담’을 은밀히 주선한 것이다.
"야권에서 '4자회담'이 있었지요. 이것을 뒤에서 사상계가 주선을 했어요. 백낙준ㆍ이범석ㆍ윤보선ㆍ유진오 등 지도자들이 만나게 되었지요. 이분들이 모이게 설득작업을 각각 분담해서 맡았는데, 백낙준씨는 장선생이 맡았고, 윤보선씨는 제가(지명관-저자) 맡았고, 유진오씨는 부완혁씨가 맡았을 거예요. 그리고 유창순씨가 이범석씨를 맡았어요. 이분들이 매일 저녁 모여서 상의해가지고 가서 설득작업을 벌였던 것이지요. 그래가지고 성사가 되었는데, 아무도 모르게 감쪽같이 해냈지요." (주석 16)
'4자회담'을 장준하와 <사상계>가 주선한 것은 함석헌의 증언에서도 드러난다.
"내가 ''4자회담'이 되어가는 것을 안 것은, 여기 <사상계>사에 와서 안 겁니다. 그래도 뒤에서 그것을 줄기차게 염려하고 추진하고 어느 정도 뒤에서 획책도 하며 걱정을 한 것은 장준하 사장, 부완혁씨 둘이 늘 만나면 그저 의논하고 성사시켜야 되겠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고 또 그래서 알았지요." (주석 17)
장준하는 야당 후보를 단일화시켜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루고자 했다.
하지만 결과는 그의 뜻과는 달리 나타났다. 당수는 유진오, 후보에는 윤보선이 되면서 선거전은 맥이 빠졌다. 집권 6년을 넘긴 박정희는 경제발전과 재건국민운동 등을 통해 상당한 수준의 지지기반을 확보하고 있었다.
윤보선은 낡은 이미지에 야권 분열 등의 과정에서 국민적 지지도가 크게 훼손되고 있었다.
선거결과는 참패였다. 장준하는 백낙준이 후보가 되기를 바랐지만, 윤보선의 당선을 위하여 대도시의 선거 유세에 나서는 등 정권교체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장준하는 이때 지원유세에서 "박정희씨는 국민을 물건취급, 우리나라 청년을 월남에 팔아먹었고 박씨는 과거 공산주의 조직책으로 임명되어 조직활동을 한 사람이다" 라고 한 말이 허위사실 유포죄와 대통령선거법위반 혐의로, 선거가 끝난 5월 7일에 구속되었다. 박정권에서 두 번째로 구속된 것이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장준하는 5월 8일 <사상계> 편집부장 유경환을 불러 자신이 살고 있는 서울 동대문 을구에 옥중 출마 의사를 밝히고, '출마의 변'을 언론에 발표토록 했다. 이에 앞서 <사상계>의 부장들에게 총선출마 의사를 밝히고 준비를 하도록 했다.
총선을 며칠 앞두고 구속된 관계로 후보자 없는 선거운동이 시작되었다. 상대 후보는 육사 8기생으로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을 지낸 현직 의원이었다. 상대측은 기왕의 탄탄한 조직을 통해 거칠 것 없이 선거운동을 진행했다. 하지만 장준하 진영은 돈도 조직도 후보도 없는 황량한 불모지와 같았다. <사상계> 취재부장으로 선거운동을 지켜봤던 고성훈의 증언이다.
국회의원 선거일을 한 달 앞두고 주인공인 후보가 갇혀 버린 상황에서, 그의 선거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파견된 우리 <사상계>팀(필자를 포함한 부장급 3인)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고 있을 뿐이었는데, 평소에 장준하를 아끼던 함석헌 선생이 스스로 찾아오셔서 장후보를 위하여 선거운동에 발 벗고 나서겠다며 오히려 우리를 격려하여 주었다. 함선생은 그때로부터 보름 동안을 거의 홀로 선거연설회(30회 이상)를 이끌어서 끝내는 옥중 당선이라는 영예의 꽃다발을 장준하에게 안겨주었던 것이다. (주석 18)
야당측의 첫 유세, 그것도 옥중출마로 후보 본인이 없는 연설회가 어찌 진행될 것인가 궁금했던 청중의 눈에 들어온 것은 흰두루마기, 흰머리, 흰수염의 노인 함석헌 옹의 모습이었다. 호기심에 찬 청중 앞에 등단한 함석헌 선생의 첫 말은 이러했다.
"여러분! 장준하를 살려주세요. 장준하 <사상계> 사장을 국회로 보내주셔야 합니다. 안 그러면 장준하 이 사람은 죽습니다. 자살할지도 모른단 말입니다."
이 대목에 이르러 함선생의 목은 갑자기 꽉 막히고, 이어 눈물이 글썽거리는 것이 아닌가. 잠시 침묵이 흐르고 술렁대던 청중이 순간에 조용해져 버렸다.
청중들 가운데는 눈시울을 닦는 사람이 보이며, 나 또한 코끝이 찡해 오면서 눈물이 쏟아지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청중은 감동한 듯 요지부동으로 앉아 있었다.(주석 19)
함석헌의 지원연설로 여론이 움직이고, 지식층을 중심으로 장준하의 독립운동과 <사상계>의 가치가 알려지면서 선거 판세는 하루가 다르게 바뀌었다. 여기에 구속된 장준하 후보에 대한 동정여론이 가세되어 바람이 일게 되자, 공화당 후보가 검찰요로에 진정하여 장준하 석방운동을 하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런 결과였는지는 몰라도 장준하는 투표일을 일주일 남겨 놓은 6월 1일 오후 가석방되었다.
그는 곧 바로 선거유세장으로 달려오고, 이 소식을 들은 유권자들은 석방된 후보의 얼굴이라도 보고자 유세장으로 몰려왔다. 이렇게 하여 대세는 굳어지고, 57,119표 (차점은 35,386표)라는 압도적 득표로 당선되어, 제 7대 국회의원이 되었다.
장준하가 옥중출마하여 당선된 6.8 총선은 공화당이 129석(지역구 102석, 전국구 27석)을 획득하여 압승하고, 신민당이 45석(지역구 28석, 전국구 17석), 대중당이 지역구 1석을 얻었다.
박정희는 3선 개헌에 필요한 3분의 2 의석을 확보하기 위해 무더기표ㆍ매표ㆍ위협투표 등 온갖 부정선거를 저질렀다. 이른바 3ㆍ15에 버금가는 6ㆍ8부정선거가 치러진 것이다.
공화당은 6명의 당선자를 부정선거의 책임을 물어 제명하는 등 제스추어를 썼지만,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학생시위가 1개월간 지속되고 신민당 소속 당선자들은 재선거를 요구하며 6개월 동안 등원을 거부했다.
장준하도 당선은 되었지만 당의 등원거부 방침으로 <사상계>사에 머물면서 회사문제와 의정활동의 준비에 바쁜 나날을 보냈다.
주석
16) 지명관, '주간좌담 : 사상계 시절을 말한다', <광복 50년과 장준하>, 48쪽.
17) <사상계>, 1967년 4월호, 15쪽, ''4자회담'을 말한다'.
18) 고성훈, '장준하 사장의 옥중당선 이야기', <민족혼, 민주혼, 자유혼>, 203~204쪽.
19) 앞의책, 206~207쪽.
그런데 차기 대통령 후보에 누구를 내세우느냐가 초미의 관심사이고 선거 결과에도 크게 영향을 미치게 되는 절체 절명의 과제였다. 당시 야권에서는 윤보선ㆍ이범석ㆍ허정ㆍ백낙준ㆍ유진오 등이 자천타천으로 후보군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장준하는 측근들과 상의하여 후보단일화 작업에 나섰다. ‘4자회담’을 은밀히 주선한 것이다.
"야권에서 '4자회담'이 있었지요. 이것을 뒤에서 사상계가 주선을 했어요. 백낙준ㆍ이범석ㆍ윤보선ㆍ유진오 등 지도자들이 만나게 되었지요. 이분들이 모이게 설득작업을 각각 분담해서 맡았는데, 백낙준씨는 장선생이 맡았고, 윤보선씨는 제가(지명관-저자) 맡았고, 유진오씨는 부완혁씨가 맡았을 거예요. 그리고 유창순씨가 이범석씨를 맡았어요. 이분들이 매일 저녁 모여서 상의해가지고 가서 설득작업을 벌였던 것이지요. 그래가지고 성사가 되었는데, 아무도 모르게 감쪽같이 해냈지요." (주석 16)
'4자회담'을 장준하와 <사상계>가 주선한 것은 함석헌의 증언에서도 드러난다.
"내가 ''4자회담'이 되어가는 것을 안 것은, 여기 <사상계>사에 와서 안 겁니다. 그래도 뒤에서 그것을 줄기차게 염려하고 추진하고 어느 정도 뒤에서 획책도 하며 걱정을 한 것은 장준하 사장, 부완혁씨 둘이 늘 만나면 그저 의논하고 성사시켜야 되겠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고 또 그래서 알았지요." (주석 17)
장준하는 야당 후보를 단일화시켜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루고자 했다.
하지만 결과는 그의 뜻과는 달리 나타났다. 당수는 유진오, 후보에는 윤보선이 되면서 선거전은 맥이 빠졌다. 집권 6년을 넘긴 박정희는 경제발전과 재건국민운동 등을 통해 상당한 수준의 지지기반을 확보하고 있었다.
윤보선은 낡은 이미지에 야권 분열 등의 과정에서 국민적 지지도가 크게 훼손되고 있었다.
선거결과는 참패였다. 장준하는 백낙준이 후보가 되기를 바랐지만, 윤보선의 당선을 위하여 대도시의 선거 유세에 나서는 등 정권교체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장준하는 이때 지원유세에서 "박정희씨는 국민을 물건취급, 우리나라 청년을 월남에 팔아먹었고 박씨는 과거 공산주의 조직책으로 임명되어 조직활동을 한 사람이다" 라고 한 말이 허위사실 유포죄와 대통령선거법위반 혐의로, 선거가 끝난 5월 7일에 구속되었다. 박정권에서 두 번째로 구속된 것이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장준하는 5월 8일 <사상계> 편집부장 유경환을 불러 자신이 살고 있는 서울 동대문 을구에 옥중 출마 의사를 밝히고, '출마의 변'을 언론에 발표토록 했다. 이에 앞서 <사상계>의 부장들에게 총선출마 의사를 밝히고 준비를 하도록 했다.
총선을 며칠 앞두고 구속된 관계로 후보자 없는 선거운동이 시작되었다. 상대 후보는 육사 8기생으로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을 지낸 현직 의원이었다. 상대측은 기왕의 탄탄한 조직을 통해 거칠 것 없이 선거운동을 진행했다. 하지만 장준하 진영은 돈도 조직도 후보도 없는 황량한 불모지와 같았다. <사상계> 취재부장으로 선거운동을 지켜봤던 고성훈의 증언이다.
국회의원 선거일을 한 달 앞두고 주인공인 후보가 갇혀 버린 상황에서, 그의 선거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파견된 우리 <사상계>팀(필자를 포함한 부장급 3인)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고 있을 뿐이었는데, 평소에 장준하를 아끼던 함석헌 선생이 스스로 찾아오셔서 장후보를 위하여 선거운동에 발 벗고 나서겠다며 오히려 우리를 격려하여 주었다. 함선생은 그때로부터 보름 동안을 거의 홀로 선거연설회(30회 이상)를 이끌어서 끝내는 옥중 당선이라는 영예의 꽃다발을 장준하에게 안겨주었던 것이다. (주석 18)
야당측의 첫 유세, 그것도 옥중출마로 후보 본인이 없는 연설회가 어찌 진행될 것인가 궁금했던 청중의 눈에 들어온 것은 흰두루마기, 흰머리, 흰수염의 노인 함석헌 옹의 모습이었다. 호기심에 찬 청중 앞에 등단한 함석헌 선생의 첫 말은 이러했다.
"여러분! 장준하를 살려주세요. 장준하 <사상계> 사장을 국회로 보내주셔야 합니다. 안 그러면 장준하 이 사람은 죽습니다. 자살할지도 모른단 말입니다."
이 대목에 이르러 함선생의 목은 갑자기 꽉 막히고, 이어 눈물이 글썽거리는 것이 아닌가. 잠시 침묵이 흐르고 술렁대던 청중이 순간에 조용해져 버렸다.
청중들 가운데는 눈시울을 닦는 사람이 보이며, 나 또한 코끝이 찡해 오면서 눈물이 쏟아지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청중은 감동한 듯 요지부동으로 앉아 있었다.(주석 19)
함석헌의 지원연설로 여론이 움직이고, 지식층을 중심으로 장준하의 독립운동과 <사상계>의 가치가 알려지면서 선거 판세는 하루가 다르게 바뀌었다. 여기에 구속된 장준하 후보에 대한 동정여론이 가세되어 바람이 일게 되자, 공화당 후보가 검찰요로에 진정하여 장준하 석방운동을 하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런 결과였는지는 몰라도 장준하는 투표일을 일주일 남겨 놓은 6월 1일 오후 가석방되었다.
그는 곧 바로 선거유세장으로 달려오고, 이 소식을 들은 유권자들은 석방된 후보의 얼굴이라도 보고자 유세장으로 몰려왔다. 이렇게 하여 대세는 굳어지고, 57,119표 (차점은 35,386표)라는 압도적 득표로 당선되어, 제 7대 국회의원이 되었다.
장준하가 옥중출마하여 당선된 6.8 총선은 공화당이 129석(지역구 102석, 전국구 27석)을 획득하여 압승하고, 신민당이 45석(지역구 28석, 전국구 17석), 대중당이 지역구 1석을 얻었다.
박정희는 3선 개헌에 필요한 3분의 2 의석을 확보하기 위해 무더기표ㆍ매표ㆍ위협투표 등 온갖 부정선거를 저질렀다. 이른바 3ㆍ15에 버금가는 6ㆍ8부정선거가 치러진 것이다.
공화당은 6명의 당선자를 부정선거의 책임을 물어 제명하는 등 제스추어를 썼지만,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학생시위가 1개월간 지속되고 신민당 소속 당선자들은 재선거를 요구하며 6개월 동안 등원을 거부했다.
장준하도 당선은 되었지만 당의 등원거부 방침으로 <사상계>사에 머물면서 회사문제와 의정활동의 준비에 바쁜 나날을 보냈다.
주석
16) 지명관, '주간좌담 : 사상계 시절을 말한다', <광복 50년과 장준하>, 48쪽.
17) <사상계>, 1967년 4월호, 15쪽, ''4자회담'을 말한다'.
18) 고성훈, '장준하 사장의 옥중당선 이야기', <민족혼, 민주혼, 자유혼>, 203~204쪽.
19) 앞의책, 206~20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