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
오늘 우리가 한국 순교자 대축일을 지냅니다. 오늘 이 대축일의 정확한 명칭을 아시는 분 계십니까?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 하상 바오로와 그의 동료 순교자 대축일’입니다. 길지요. 왜 이렇게 이름이 깁니까? 그냥 한국 순교자 대축일 하면 더 쉬울 텐데 왜 굳이 두 분의 이름을 명칭에 넣었겠습니까?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첫 사제일 뿐만 아니라 참으로 뛰어난 분이며 한국 교회의 자랑이요 한국교회사에 우뚝 선 거봉으로 한국 순교 성인들을 대표하고 있는 것은 누구나 다 잘 알고 있지요. 그런데 한 사람이면 되지 왜 굳이 정하상 바오로의 이름이 공식 명칭에 들어가 있는 가라는 생각을 해 보신 분들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7월 5일 성 김 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에 대해 강론에서 말씀드렸으니 오늘은 성 김대건 신부와 함께 103위 한국 순교 성인의 대표인 성 정 하상 바오로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는 신유박해로 불리는 대박해로 주문모 신부를 비롯해 이승훈, 정약종, 홍교만, 최필공, 김현우 등 교회 지도자들이 대거 잡혀서 참수되고 전국적으로 박해가 치열하여 위기에 놓여 있던 한국천주교회의 부흥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정열적으로 일하다가 순교의 영예를 안은 분으로 모든 그리스도인들, 특별히 평신도들에게 사표가 되기에 사제인 김 대건 신부와 더불어 평신도로서 순교 성인의 대표로 불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정하상은 아버지 정약종과 어머니 유소사 사이에 1785년 출생하여 1839년 서소문 형장에서 44세의 일기로 순교를 하게 됩니다. 그의 아버지 정약종은 한국 천주교회 창설에 참여한 초기 평신도 지도자로 명도회 회장을 역임하였고 ‘주교요지’라는 교리서를 저술하여 일반 대중들이 쉽게 천주교 교리를 접할 수 있도록 했던 뛰어난 학자이기도 했습니다. 아버지 정약종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하였고, 삼촌들인 정약전은 흑산도로, 이조 시대의 가장 탁월한 저술가인 정약용은 강진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습니다.
당시의 상황을 한국천주교회사를 쓴 달레는 이렇게 서술합니다. “박해로 인해 추방되고 파산을 하고 여러 사람이 아직도 귀양살이를 하고 있던 정씨 일가는 천주교란 말만 들어도 벌벌 떨며, 그와 같은 교를 계속해서 믿으려 한다는 생각조차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친척들은 정하상과 그의 집안식구들이 하느님을 섬기는 일을 방해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통렬한 비난, 협박, 멸시, 조소 심지어는 학대까지도 모두 동원하였다.” 가문이 엄청나게 중요하던 당시 시대상에서 이런 가문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정 하상이 훌륭한 신앙을 지니고 교회의 지도자로 살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와 형의 순교뿐만 아니라 그의 어머니의 가정 교육이 탁월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비범한 성품의 아버지와 뛰어난 부덕을 지닌 어머니의 영향으로 정 하상은 일찍부터 두각을 드러내면서 오로지 하느님에 대한 열정으로 교회를 위해 일하고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기 위한 학문 연구에 열중하였습니다. 달레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그의 위대한 마음은 결혼 같은 것은 염두에도 두지 않았고, 그의 고귀한 심경은 더 높은 곳을 향해 있었다.”
박해로 어려움에 처해 있던 교회를 다시 살리기 위해 20 세도 되기 전에 1816년 북경을 다녀 온 정하상은 그 후 본격적으로 천주교회 부흥 운동만을 위해 전 생애를 바치게 됩니다. 우선 성직자 영입을 위해 교황과 북경에 눈물로 편지를 썼는데 특히 유진길과 더불어 한국교회의 대표로서 정하상이 쓴 교황님께 올린 편지는 조선 교회의 비참한 실정을 소상히 기록하고 손을 내밀어 절망의 심연에서 그들을 구해 달라고 간청하는 내용으로 교황청의 심금을 울리게 됩니다. 그 결과 유방제, 모방, 샤스땅 신부들과 앵배로 주교를 모실 수 있었습니다. 또한 모방 신부가 한국에 도착한 즉시 세 명의 신학생을 선발하여 마카오로 보낼 때 그 주도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정하상은 모셔온 신부님들을 집에 모셨고 그분들의 비서, 곧 오늘날의 사무장의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는 신자들의 지도자였으며 대표이었습니다. 그의 동료 순교자인 이 베드로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나와 모든 신자들이 증언할 수 있는 바이지만, 그는 참으로 덕성스럽고 굳세었으며 충직한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교리에 무척 밝고 놀라울 정도로 열심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의 이러한 재능과 덕 때문에 신자들은 그를 진정으로 장상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정하상은 당시 재상에게 올리는 글인 상재상서라는 글을 남겼습니다. 이 글의 내용을 살펴보면 그가 어떤 신앙을 지녔으며 그의 하느님과 한국교회에 대한 사랑과 열정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털끝 만한 것도 다 하느님의 힘입니다. 낳으시고 기르시고 도와주시고 인도해 주십니다. 죽은 후에 받을 상은 그만두더라도 현재 받고 있는 은혜가 이미 무한하여 비할 데 없으니 우리가 마땅히 일생을 다하여 어떻게 받들어 섬겨드려야만 그 만 분의 일이라도 보답할 수 있겠습니까?” “이 도리를 한 집안에서 실행하면 집안을 바로 잡을 수 있을 것이며, 한 나라에서 실행하면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을 것이고, 전 세계에서 실행하면 온 세계가 평화로울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을 때는 정신이 흐려서 깨닫지 못하다가 죽은 후에 후회하고 뉘우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목을 끊어버릴 큰 도끼가 앞에 있고 몸을 삶을 큰솥이 뒤에 있더라도 굳건히 신앙을 굽히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목숨을 걸고 생명을 바쳐서 천주의 참된 가르침을 증거하고 천주의 영광을 나타냄은 저희들이 해야 할 본분입니다. 이 몸 또한 머지않아 죽어야 할 몸입니다. 이렇게 감히 말해야 할 때를 만나서 한번 머리를 쳐들고 길게 외치지 않고 슬프게 입을 다물고 죽는다면 산더미와 같이 쌓인 감회를 장차 백대가 지닌다 하더라도 다 풀지 못할 것입니다.” 1839년 기해년 6월 정하상은 체포되어 순교의 월계관을 받게 됩니다.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올라 한국천주교회의 부흥을 위해 애쓰던 그는 결국 순교로서 신앙의 탁월한 증거자가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순교 성인들의 축일을 지내면서 순교의 의미와 오늘날 우리가 순교자들의 정신을 이어받아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순교는 무엇보다도 신앙에 대한 증거입니다. 하나 뿐인 목숨을 바쳐서까지 믿는바에 대한 확신을 지니고 그것이 바른 행위이라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증거 하는 것은 참으로 하느님의 은총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고 우리는 얼마만큼 내가 믿는 바에 대한 확신을 지니며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증거 하고자 애쓰는가 반성하게 됩니다.
순교는 참으로 커다란 사랑과 용기에서 나올 수 있는 결단입니다. 자기의 목숨보다도 하느님을 더 사랑하는 마음,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 교회의 형제자매들을 사랑하는 마음과 그리고 그 사랑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용기는 참으로 놀라운 것이고 이 또한 하느님의 은총 없이 불가능한 행위입니다. 우리 자신들의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돌아보며 더 큰 사랑을 지닐 것을 다짐하며 순교 성인들의 전구를 청해야 할 것입니다. 순교 정신은 한마디로 희생정신이라 하겠습니다. 희생이란 자기를 나누고 남을 위해 기꺼이 자기를 버리는 행위입니다. 오늘 순교 성인들의 축일을 지내며 우리가 하느님과 교회, 그리고 우리의 이웃을 위해 나는 무엇을 희생할 수 있는지, 목숨을 바치지 않아도 되는 이 시대에 나는 내가 지닌 무엇을 나눌 수 있을 것인지 함께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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