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왕명에 담긴 뜻
그러면 다음으로 우리나라 고대 왕명에 담긴 뜻을 새겨보기로 하자.
단군왕검(檀君王儉)
단군은 단군(檀君) 또는 단군(壇君)으로 문헌에 따라 그 표기가 약간 다르게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원래 한자어 아닌 순수한 우리말을 한자로 빌어 표기한 것이기 때문이다. 단군이란 말의 어의(語義)는 몽고어 Tengri에서 온 것으로, 천(天)을 대표하는 군사(軍師)의 칭호이다. 즉, 단군(Tengri)은 고대의 제사 의식을 관장하는, 제사장 곧 무당을 이르는 말이다.
단군은 고대 제정일치 시대에, 정치권과 제사권을 함께 지닌 우리 민족의 신권 계승자였던 것이다. 이러한 제의를 행하는 우리의 고유 신앙은 무속(巫俗) 즉, 샤머니즘을 배경으로 행하여졌음은 물론이겠는데, 이러한 제사권자로서의 단군의 명칭은, 현재 호남 일원에서 제의를 관장하는 무당을 가리켜, ‘단골, 당골, 당갈’이라 하는 데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단군이 제사권을 행사하는 자의 이름이라면, 왕검은 정치권을 행사하는 자의 이름이다. 그런데 임금을 왕이라 하면 될 것을 왜 ‘왕’ 뒤에 ‘검’을 붙여 왕검이라 했을까? 이 ‘검’은 앞에서도 이야기했다시피 신을 뜻하는 고대어다. 그러니 단군왕검은 단군왕이 신이란 것이다. 극도의 존칭이다. 사실 제정일치 시대에는 왕이 제사장을 겸하였기 때문에 신과 동일시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 ‘검’은 뒷날 ‘ᄀᆞᆷ, , 감, 금, 즘’ 등으로 분화하였다. 임금이란 말의 ‘금’도 바로 그런 뜻이다. ‘감’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가미(神)’가 되었음은 앞에서 말한 바다.
동명왕(東明王) 주몽(朱蒙)
고구려의 시조 동명왕(東明王)의 東(동)은 ‘ᄉᆡ’요 明(명)은 ‘ᄇᆞᆰ’을 표기한 것이다. 동명은 ‘’임금이란 뜻이다. ‘’는 동쪽이란 뜻이고 ‘’은 밝다는 뜻이다. 이 말이 변하여 ‘새벽’이 되었으니 동명왕에 함축된 의미를 대강 짐작할 수 있겠다.
또 삼국사기에는 동명왕의 이름은 주몽(朱蒙) 또는 추모(鄒牟)라고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주(朱), 추(鄒)의 고음 ‘즈’에 몽(蒙), 모(牟)의 첫소리 ‘ㅁ’을 합하여 ‘즘’을 표기한 것인데, ‘즘’은 신의 뜻인 ‘금’의 변한 말이다. 지금도 ㄱ과 ㅈ은 서로 바뀌는 현상을 띈다. 그러니 주몽은 신 곧 임금의 뜻이다.
또 주몽은 활을 잘 쏘는 사람을 가리킨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는 당시에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신’과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무엇을 잘 맞히는 사람을 보고 ‘귀신’ 같다고 하는 것과 상통한다.
박혁거세(朴赫居世)
신라 시조 혁거세(赫居世)는 삼국유사에 “혁거세는 방언으로서 불구내(弗矩內)라고도 하는데, 이는 세상을 밝게 다스린다는 말이다.”라고 적혀 있다. 혁거세와 불구내는 같은 말인데, 앞엣것은 주로 한자의 뜻을 따서 적었고, 뒤엣것은 한자의 음을 빌려 적은 것이다.
밝음 …………………… 의 ………… 세상(누리)
혁거세 … 赫(‘붉을 혁’의 ‘붉’) 居(거) 世(세상)
불구내 … 弗(붉) 矩(구) 內(누리의 준말 ᄂᆡ(뉘)
‘居(거)/矩(구)’는 경상도 방언의 관형격 조사 ‘우’에 ‘붉’의 끝소리 ‘ㄱ’이 결합된 것이다. ‘우’는 표준어 ‘-의’에 해당한다. 이를테면 ‘닭의 똥’을 경상도에서는 ‘닭우 똥[달구 똥]’으로 ‘남의 집’을 ‘남우 집’이라 한다.
그러므로 혁거세나 불구내는 다 같이 ‘밝은 세상’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니 혁거세(불구내)는 고유어 ‘뉘’ 곧 ‘밝은 누리’란 뜻이다. 이로써 우리 민족은 ‘[光明]’을 추구하는 겨레임을 알 수 있다. 박혁거세의 성인 ‘박(朴)’도 ‘’을 표기한 것이다. 김대문이 박처럼 둥근 알에서 나왔다고 해서 박(朴)을 성으로 삼았다고 했는데, 이는 갖다 붙인 이야기다. 이로 보면 동명왕, 혁거세는 모두 ‘(새벽)을 연다’는 뜻인 광명이세(光明理世)의 의미다.
차차웅(次次雄) 자충(慈充)/거서간(居西干) 거슬한(居瑟邯)
2대 남해(南解)는 차차웅(次次雄)이라 불렀는데, 『삼국사기』에는 자충(慈忠)이라 적혀 있다. 『삼국사기』에는 김대문의 말을 인용하여 “차차웅은 제사를 주관하는 무당을 가리키는 우리말인데 점차 존장(尊長)을 가리키는 칭호가 되었다.”라는 설명이 적혀 있다. 제정일치 시대에는 왕이 곧 제사장이었다. 그러니 남해는 왕이자 제사장인 무(巫)였다.
차(次) 자는 고음(古音)이 ‘즈, 저’로, ‘ㅈ’ 등을 표기하는 데 쓰인 글자다. 차차웅(次次雄)은 ‘즈중’을 표기한 것이고, 자충(慈充)은 ‘중’을 표기한 것이다. 자충은 자(慈) 자의 ‘ㅈ’과 ‘충(忠)’ 자의 ‘’을 합쳐 ‘중’을 적은 것이다. 그러니 ‘즈중’이란 말이 후대에 ‘중’으로 변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중[僧]’은 원래 종교적 행사를 주관하던 임금이나 무당 같은 존장자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러한 뜻을 지닌 ‘중’이란 말이 뒷날 불교가 들어오자 의미가 확대되어 그 사제자를 ‘중’이라 일컫게 된 것이다. 이 말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의미론적인 축소를 일으켜, 지금은 승려를 가리키는 말로만 쓰이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차차웅을 거서간(居西干) 또는 거슬한(居瑟邯)으로도 적고 있다. 이는 모두 ‘한’을 표기한 것으로 ‘’은 신의 뜻인 ‘굿’의 또 다른 표기다. ‘한’은 큰 우두머리란 뜻임을 앞에서 말했다. 현대어 ‘한길, 한물, 한사리, 한숨’ 등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그러니 거서간․거슬한은 ‘ᄀᆞᆺ한’을 표기한 것으로 ‘우두머리 신’이란 의미다. ‘서(西), 슬(瑟)’ 자는 우리말 ‘사이 ㅅ’을 표기하는 데 쓰인 글자다.
니사금(尼師今) 니질금(尼叱今) 이질금(爾叱今) 치질금(齒叱今)
신라 3대 임금 노례(弩禮)부터 16대 걸해(乞解)까지 쓰인 니사금(尼師今)은 니질금(尼叱今), 이질금(爾叱今), 치질금(齒叱今)으로도 적었는데, 모두 ‘닛금’을 표기한 것이다. 여기서의 사(師), 질(叱) 자는 모두 우리말의 ‘사이 ㅅ’을 적는 데 쓰인 글자다. 여기서 우리는 ‘닛금’이라는 말이 ‘니’와 ‘금’이란 말의 합성어임을 알 수 있다.
닛금은 임금의 옛말이다. 닛금이 잇금으로 변하고, 잇금이 또 임금으로 변한 것이다. 그러면 이 말의 뿌리가 되는 ‘니(이)’는 무슨 뜻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이것은 ‘앞’이나 ‘위’를 뜻하는 말이었다. ‘앞’을 뜻하는 말로는 현대어 ‘이마(니마)’와 ‘이물(니물)’에 남아 있다. 이마는 사람의 ‘앞︣쪽에 있는 마루’요, 이물은 ‘배의 앞머리’를 뜻하는 말이다.
그리고 ‘이(니)’가 ‘위’를 뜻하는 말로는 현대어 ‘(머리에) 이다’에 남아 있다. 건물 위의 지붕을 덮는 것을 ‘지붕을 이다’라 하는 것도 같다. ‘이다’란 말에는 이와 같이 ‘위’의 뜻을 그 속에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닛금(잇금)’의 ‘금’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신을 뜻하는 ‘’의 한 갈래말이니, ‘닛금’은 ‘앞에 있는 신’, ‘위에 있는 신’이란 뜻이 된다. 이로써 보면, ‘닛금’이란 말은 왕을 아주 높여 부르는 순 우리말 경칭어임을 알 수 있다.
‘닛금’은 노례와 탈해 중에서 이[齒理]가 많은 사람을 가려 임금을 삼은 데서 유래했다는, 『삼국유사』 남해왕조에 실려 있는 기록은 어디까지나 민간에서 전해오던 허탄한 이야기(민간 어원설)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마립간(麻立干)
17대 나물(奈勿)왕부터 22대 지증(智證)왕까지는 마립간(麻立干)이 쓰였는데, 마립은 ‘’를 표기한 것이고 ‘간(干)’은 ‘한’을 표기한 것이다. ‘’는 꼭대기란 뜻인데 뒷날 ‘마루’로 변하였다. 지금의 ‘산마루, 고갯마루’ 등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한’은 앞에서 말한 몽골어 Khan과 같은 말인데, 우두머리란 뜻이다. 징기스칸의 ‘칸’ 즉 성길사한(成吉思汗)의 그 ‘한’이다. 그러니 ‘한’은 꼭대기 혹은 우두머리라는 뜻이다.
위에서 우리나라 고대 국가명과 왕명에 대해 일별해 보았다. 그것들의 이름은 대체로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우리말을 표기한 것이었다. 국명에 나타난 가장 두드러진 점은 ‘밝음’을 지향하고 ‘신국’임을 선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나라의 신성함과 광명이세(光明理世)의 국시를 보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왕명 또한 대체로 ‘ᄇᆞᆰ’과 ‘우두머리[君長]’를 표방하는 내용으로 짜여 있다. 백성들의 삶을 밝게 살피고 아울러 자신의 권위를 최대로 높이 내걸려는 의도가 그 밑에 깔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