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동) 양산8경 3 : 김흠운과 조천성 전투와 양산가 보기
양산8경을 단지 경치만 구경하는 것이 아닌 그속에 담긴 얼을 찾는 것도 색다른 나들이가 되리라.
양산면 소재지 가곡리에 가서 한식백반으로 늦은 점심을 하고는 다시 송림이 있는 곳으로 지나온다.
양산벌이 이렇게 넓다는 것을 직접 걸으면서 느낀다.
발로 느끼고 말한다. 산골 깊은 곳에 이리도 넓은 벌,이라니.
옥천이나 금산 제원으로 나갈 수 있는 길목에 있으니 이 또한 요충지 중에 요충지이다. 산성 이름에 (대왕산에) 대왕산성이 있으니, 이는 아마도 신라의 대왕과 관련된 지명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황간 백화산에 있는 일명 검돌성(?큰돌성) 안에 대궐터라는 지명이 있는 것을 생각해보면 더욱 예사롭지가 않다. 삼국을 통일한 문무대왕을 일컫는 대왕을 떠올린다..
이곳에서 전투가 있었고( 조천성 전투), 그 전투에서 김흠운 장군이 전사했음을 삼국사기(열전)는 전하고 있다.
송림 가운데 있는 '양산가' 기념 조각물에서
양산가의 유래와 화랑에 관한 얘기 또한 함께 적고 있슴을 본다 .
현재 러시아와의 침공에 대적하는 우크라이나의 모습에서 온 국민의 일치단결된 전의가 얼마나 중요한 가를 보여줌은 동서고금이 같다는 교훈을 얻는다.
(* 언급되는 산성들에 대해서는 검색창에서 대왕산성, 마니산성 등을 검색해서 찾아 볼 수 있다.
대왕산성 연번 54번(42회차) 2009.12.01,
마니산성 연번 267번(43회차) 2012. 11.4 . 등 )
- 송림 속에는 송림의 조성 유래비가 있고 이웃에는 여의정도 함께 있다.-
( 양산가에 관한 조각물 )
-신라 김흠운 장군의 장렬한 전사와 양산가에 관한 언급과 함께,
구전되어오는 양산가를 비 뒷면에 새겼음을 밝히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오언한시 양산가 -
양산가(陽山歌)
敵國爲封豕 荐食我邊彊
赳赳花郞徒 報國心靡遑
荷戈訣妻子 嗽泉啖糗粻
賊人夜劘壘 毅魂飛釰鋩
回首陽山雲 矗矗虹蜺光
哀哉四丈夫 終是北方强
千秋爲鬼䧺 相與歆椒漿
『佔畢齋集』 卷之三
이 시는 김종직이 30대 초반에 지은 『東都樂府』7수 가운데 하나로, 화랑도의 의연한 기상을 기리는 과정을 통해 신라의 후예인 영남인의 기상을 과시하고자 한 시이다.
(출처: 원주용, 『조선시대 한시 읽기』, 이담, 2010년, 93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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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린 내용도 참고한다>
신증동국 여지 21 경상도 경주부
양산가(陽山歌)
“적국(敵國)이 큰 돼지가 되어 우리나라의 변경을 거듭 먹어 들어오니,
용맹스러운 화랑도들 보국(報國)하느라 마음에 겨를 없었네.
창을 메고 처자와 하직하고, 샘물로 입 가시고 말린 밥을 씹었네.
적병이 밤에 성책(城柵)을 무찌르니, 씩씩한 혼백(魂魄)이 칼날 앞에 날아 흩어졌다네.
머리를 돌려 양산(陽山)의 구름을 바라보니, 무지개 빛 높이 뻗쳤구나.
슬프다. 네 명의 장부는 마침내 북방의 강한 사람이었네.
천추(千秋)에 귀웅(鬼雄)이 되어 서로 더불어 초장(椒漿)을 음미하리.”
陽山歌。
“敵國爲封豕,荐食我邊彊。
赳赳花郞徒, 報國心靡遑。
荷戈訣妻子, 嗽泉啖糗糧。
賊人夜劘壘, 毅魂飛劍鋩。
回首陽山雲, 矗矗虹蜺光。
哀哉四丈夫, 終是北方强。
千秋爲鬼雄, 相與歆椒漿。”
D117] 적국이 큰 돼지가……먹어 들어오니 :
《춘추 좌전(春秋左傳)》에, “오(吳) 나라가 긴 뱀과 큰 돼지처럼 중국(中國)을 먹어 들어온다.”한 말이 있다.
[주-D118] 초장(椒漿)을 음미하리 :
당 나라 시인이 상산사호(商山四皓)의 사당에 제사지내며 지은 시에, “초장(椒漿) 한 잔을 드리다.”는 구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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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산면사무소 가까이에 있는 고분. 말고분이라고도 한다는데 조천성 전투와 관련된 것은 아닌지 막연히 생각해본다.-
-가곡리 고분에서 조금 더 동남쪽으로 가면 (영동군) 학산면 박계리에 독립군나무가 있다.-
( 일제시 독립군의 항일투쟁 방식의 일화가 담긴 보호수 이다.)
<구전되어 오는 양산가>
그때 불렸던 「양산가」는 전해지지 않고,
이 지역의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온 「양산가」만 남아 있단다. 신정일의 자료에서 옮겨 적는다..
양산을 가세, 양산을 가요.
모링이 돌아서 양산을 가요.
난들 가서 배 잡아타고
양산을 가세, 양산을 가세, 양산을 가세.
잉어가 논다, 잉어가 논다,
양산 창포장에 잉어가 논다.
양산을 가세, 양산을 가요, 양산을 가요.
자라가 논다, 자라가 논다,
양산 백사장에 자라가 논다.
양산을 가세, 양산을 가요.
장끼가 논다, 장끼가 논다,
양산 수풀 속에 장끼가 논다.
양산을 가세, 양산을 가요.
(*출처:
한국사 이야기 834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5
: 충청도 신라 화랑 김흠운에서 비롯한 「양산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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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에 나오는 김흠운 편 보기 >
삼국사기 권 제47 열전 제7
( 출처: 완역 삼국사기 김종권(金鍾權) 역 광조출판사 1972년판)
김흠운(金歆運)
김흠운은 신라 奈密王( 내물왕 奈勿王)의 8세 손으로 그 부친은 *잡찬(迊飡) 달복(達福)이었다.
김흠운은 어려서 화랑 文努의 문(門)에서 놀 때 도중(徒衆)들이 말하기를 “누구는 전사하여 지금까지 이름을 남겼다‘하는 이야기를 듣고, 김흠운은 감개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생각을 가다듬고 스스로 격려하여 몸가짐을 바르게 하려고 결심하였다. 이때 동문(同門)에 있던 중(僧) 전밀(轉密)이 그 행동을 보고 말하기를 ”이 사람이 만약 적진으로 나가면 반드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태종대왕(武烈王) 2년(655)(唐高宗 永徽6년)에 왕은 백제가 고구려와 함께 변경을 침해하므로 이의 토벌을 도모하여 군사를 일으키고 김흠운으로써 낭당대감(郞幢大監)을 삼으니, 그는 집속에 들어 자지도 않고 비바람을 맞으며 군사들과 고락을 같이 하며 백제의 지경에 이르러서, 양산 밑에 병영을 설치하고 조천성(助川城 (沃川)으로. 진공하고자 하였는데, 백제군은 밤을 타가지고 달려와서 동이 틀 무렵까지 숨어 있다가 갑자기 쳐들어오므로 아군은 크게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혼란되어 능히 진정할 수 없게 되었는데, 적들은 이렇게 어지러운 틈을 이용하여 급히 공격하니 화살이 빗발처럼 날아 들어왔다. 이에 김흠운은 말위에 앉아 창을 거머쥐고 적을 기다리는데, 이때 대사 전지(大舍 詮知)가 말하기를 “지금 적들은 어두운 속에서 일어나서 지척을 잘 가릴 수 없으므로 비록 공이 싸워서 죽는다면 백제는 이를 자랑으로 말할 것이니, 우리는 이를 깊이 부끄러워할 바입니다.” 하니, 김흠운은 말하기를 “대장부가 이미 몸을 나라에 맡겼거늘 사람들이 이를 알던, 알지 못하던, 이는 한 가지인데 어찌 감히 명예만 구하리오” 하며 꿋꿋이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를 아니함으로, 종자들은 말고삐를 잡고 돌아가기를 권하였으나 듣지 않고 드디어 김흠운은 칼을 빼어 휘두르며 적과 어울려 싸워 몇 명을 쳐 죽이고 전사하였다.
이에 대감 예파(大監 穢破)와 소감 적득 (少監 狄得)도 함께 싸우다가 전사하였는데, 소기당주 보용나(少騎幢主 寶用那)는 김흠운이 전사하였다는 말을 듣고 말하기를 “그는 뼈가 귀하고 세도도 영화로우므로 사람들이 애석하는 바이나, 그러나 오히려 절개를 지켜 죽었는데, 항차 보용나(寶用那)야 살아도 유익함이 없고 죽어도 손상이 없는 몸이 아니냐‘ 하고 드디어는 적진으로 달려들어 수 삼명을 죽이고 전사하였다.
태종왕(武煙王)은 이 말을 듣고 슬퍼 통곡하며 흠운, 예파에게는 일길찬(一吉飡) 벼슬을 추증하고, 보용나, 적득에게는 대나마(大奈麻) 벼슬을 추증(追贈)하였다. 이때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양산가(陽山歌)를 지어 부르며 이를 슬퍼하였다.
논컨대 신라에서는 인재를 알지 못하는 것을 근심하여 사람들을 많이 모여 놀게 하여 그 행실을 잘 관찰한 연후에 이를 천거하여 등용하고자 하고, 드디어 미모의 남자를 골라서 곱게 단장시키고 이를 화랑(花郞)이라 이름하여 받들게 하니, 많은 무리들이 구름같이 모여 들어 혹은 서로 도의(道義)로써 연마하고 혹은 서로 가악(歌樂)으로써 즐기며 산수를 찾아다니며 즐겨 놀면서 먼 곳까지 이르지 않는 곳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그의 사정(邪正)을 알아가지고 인재를 뽑아 조정에 천거하였다. 그러므로 김대문(金大問)은 말하기를 “현좌충신(賢佐忠臣)이 여기에서 뽑혀 나오고, 양장용졸(良將勇卒)이 이로부터 생겨 나온다.” 한 것은 곧 이를 말한다. 삼대(三代)의 화랑은 무려 이백여 인(二百餘人)이나 되고, 그리고 그 방명미사(芳名美事)는 그 전기에 갖춰 있는 것과 같다. 김흠운과 같은 사람도 또한 화랑으로 능히 목숨을 국사(國事)에 바쳤으니 가히 그 이름이 욕되지 않는다고 말할 것이다.
<원문>
金歆運. 奈密王八世孫也. 父達福迊飡. 歆運少遊花郞文努之門. 時徒衆言及某戰死, 留名至今. 歆運蓋然流涕. 有激勵思齊之貌. 同門僧轉密曰. 此人若赴敵. 必不還也. 永徽六年. 太宗大王 憤百濟與高句麗梗邊. 謀伐之. 及出師. 而歆運爲郞幢大監. 於是不宿於家. 風梳雨沐. 與士卒同甘苦. 抵百濟之地. 營陽山下. 欲進攻助川城. 百濟人乘夜疾驅. 黎明緣壘而入. 我軍驚駭顚沛不能定. 賊因亂急擊. 飛矢雨集. 歆運橫馬握槊待敵. 大舍詮知說曰. 今敵起暗中. 咫尺不相辨. 公雖死. 人無識者. 況公新羅之貴骨. 大王之半子. 若死賊人手. 則百濟所誇詫. 而吾人之所深羞者矣. 歆運曰. 大丈夫旣以身許國. 人知之與知不一也. 凱敢求名乎. 强立不動. 從者握轡勸還. 歆運拔劍揮之. 與賊鬪殺數人而死. 於是大監穢破,少監狄得相與戰死. 步騎幢主寶用那聞歆運死曰. 彼骨貴而勢榮. 人所愛惜. 而猶守節而死. 況寶用那生而無益. 死而無損乎. 遂赴敵. 殺三數人而死大王聞之傷慟. 贈歆運, 穢破位一吉飡. 寶用那, 狄得位大奈麻. 時人聞之. 作陽山歌而傷之.
論曰 羅人患無以知人. 欲使類聚羣遊, 以觀其行義, 然後擧用之. 遂取美貌男子粧飾之. 名花郞. 以奉之. 徒衆雲集. 或相磨以道義. 或相悅以歌樂. 遊娛山水. 無遠不至. 因此知其邪正. 擇而薦之於朝. 故大問曰. 賢佐忠臣從此而秀. 良將勇卒由是而生者. 此也. 三代花郞. 無慮二百餘人. 而芳名美事. 具如傳記. 若歆運者. 亦郞徒也. 能致命於王師. 可謂不辱其名者也.
*잡찬 벼슬은 17관등급중 3번째 벼슬.
(2022.04.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