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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언어] ASICS, Anima Sana In Corpore Sano :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영혼)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많은 상호들에도 라틴어가 사용됩니다. 그중에서 ASICS는 라틴어 문장 “Anima Sana In Corpore Sano”의 약자로,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영혼)”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운동의 표어를 넘어, 가톨릭 신앙 안에서 인간 존재의 통합성과 조화를 성찰하게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실 때, 몸과 영혼을 함께 지으셨고, 그 둘은 분리될 수 없는 조화를 이루며 하느님께 나아갑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로마 12,1-2) 신앙인은 기도와 성사 안에서 영혼을 돌보듯이, 절제와 절도 있는 삶 속에서 육신도 정결하게 가꾸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영혼)”은 단지 이상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살아가는 신앙인들의 삶의 방식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하느님께 드리는 성전임을 기억하며, 매일의 삶 속에서 조화롭게 자신을 돌보는 것이 곧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는 거룩한 행위라는 것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가톨릭 신학] 그리스도인의 균형(성사론)
그리스도인은 신앙과 삶 사이에서 한쪽으로 치우쳐 사는 것을 경계합니다. 신앙 따로, 삶 따로 살아가는 모습은, 신앙이 현실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방증이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신앙과 일상 사이에서 균형을 이룰 수 있을까요? 그 출발점은 인간에 대한 올바른 이해여야 합니다.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진 존재입니다. 그런데 시대에 따라 이 두 요소 중 어느 하나를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배제하는 경향이 나타나곤 했습니다. 고대에는 육체를 ‘영혼의 감옥’이라 여겨 터부시하기도 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기도에 몰입하고 싶지만 피로와 졸음으로 집중할 수 없을 때, 육체는 고귀한 영혼의 갈망을 방해하는 불완전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반면, 현대에 들어서는 영혼이 ‘육체의 감옥’이라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주변을 살펴보면 스트레스나 우울함 같은 심리적인 문제로 신체적인 아픔을 겪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완벽한 외형을 만든다는 신념 하에 강박적으로 육체를 학대하거나 외모에 따라 자존감을 결정하기도 합니다. 현대인의 다친 ‘영혼’은 몸에 죄책감을 덧씌우며, 몸을 억누르는 새로운 감옥처럼 작용합니다.
이러한 양극단에서 무엇이 우리를 해방시킬 수 있을까요? 바로 ‘그리스도의 성사’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추상적 관념이나 보이지 않는 이상으로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살과 피가 있는 사람의 모습으로 오셔서 구원의 길을 구체적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또한 먹고 마실 수 있는 빵과 포도주라는 물질적 형상 안에 현존하시며, 우리의 육체적 감각으로 그분을 느낄 수 있게 해 주십니다.
또 그리스도의 성사는 율법주의라는 영혼의 감옥에서도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율법주의가 구원을 명목으로 자기 검열을 반복하게 했다면, 그리스도께서는 무상의 은총을 성사의 형식으로 주셨습니다. 이 은총은 우리의 노력에 대한 대가가 아닌, 거저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간혹 교우들은 성사에 대해 ‘주일 의무를 지켜야 한다.’는 식의 강박과 부담으로 느끼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성사는 예수님의 구원 업적에 대해 자녀들이 자발적으로 느끼는 감사와 찬미를 전례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사는 단순한 예식이 아니라, 오시는 그분을 우리의 거처에 모셔, 우리가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살아가도록 하는 힘의 원천이 됩니다.
우리는 영혼과 육체가 함께 어우러진 존재입니다. 영혼 없이 육체적 유희로만 살 수 없고, 육체 없이 정신적 만족만으로 살아갈 수도 없습니다. 신앙은 생각으로만 지키는 게 아니라, 몸과 마음의 헌신으로 살아 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몸과 마음을 온전히 그리스도의 감실 앞에 가져감으로써, 영혼과 육체가 함께 거룩해지고, ‘신앙을 삶으로 실현하는(fides qua)’ 균형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믿나이다] (37) 사도신경
그리스도 신앙 핵심만 골라 집약한 ‘신경’
세례성사를 통해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여 교회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 앞에서 자기 신앙을 고백해야 합니다. “저는 믿나이다”라고 시작하는 이 신앙 고백을 라틴말로 ‘Credo’(크레도)라고 하지요.
이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세례성사 때 처음 공개적으로 선포하는 기본적인 신앙 고백입니다. 이 신앙 고백은 첫째 전능하신 창조주 아버지 하느님께 대한 신앙이며, 둘째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세주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이고, 셋째 거룩한 교회 안에 계신 성령께 대한 신앙입니다.
교회는 사도 시대 때부터 자신의 신앙을 모든 사람을 위한 간결하고 규범적인 신앙 조문을 통해 표현하고 전달해 왔습니다. 이 신앙 조문을 ‘신경’(Symbola fidei)이라 합니다. 이 말은 헬라어 ‘σμβολον(심볼론)’에서 유래했는데 깨트린 물건의 ‘반쪽’을 의미하는 말로 신원을 확인하는 증표를 뜻합니다. 따라서 신경은 가톨릭교회 신앙의 근본 기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도 신경’은 교회에서 가장 오래된 신앙 고백문입니다. 사도들이 직접 작성했다고 수세기 동안 여겨져 최고의 권위를 지녔던 신경입니다. 사도 신경은 2세기 무렵부터 사용됐습니다. 성 암브로시오 주교가 주재한 밀라노 교회회의가 390년 성 시리치오 교황에게 보낸 서한에서 처음으로 ‘사도 신경’이라는 명칭을 언급합니다.
404년 「신경 주석」을 쓴 아퀼레이아의 루피누스는 교회 전승을 인용해 열두 사도가 선교를 떠나기에 앞서 각 사도가 한 항목씩 신앙 고백을 했다고 밝힙니다. 7세기에 이르러 오늘날 사용하고 있는 사도 신경으로 확정되었고, 13세기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이 이 사도 신경을 공인했습니다.
현존하는 신경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215~217년께 로마의 히폴리토 교부가 쓴 「사도 전승」에 수록된 ‘세례 고백문’입니다. 히폴리토의 ‘세례 고백문’은 선언보다 질문 양식으로 쓰였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를 당신은 믿습니까?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 성령으로 동정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시고,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살아나 부활하시고, 하늘에 올라가시어 성부 오른편에 앉으셨으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당신은 믿습니까? 성령을 당신은 믿으며, 거룩한 교회와 육신의 부활을 믿습니까?”(「덴칭거-신경, 신앙과 도덕에 관한 규정· 선언 편람」 10)
성 암브로시오 주교는 교회의 오랜 전승에 따라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신앙 전체를 사도들의 수로 상징하고자 신경을 열두 절로 구분했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를 저는 믿나이다. 또한, 그분의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성령으로 동정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시고,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 고난을 받으시고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시어, 성부 오른편에 앉으시며, 그리로부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나이다. 또한,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교회, 죄의 용서, 육신의 부활을 믿나이다.”(「덴칭거-신경, 신앙과 도덕에 관한 규정· 선언 편람」 13)
지역에 따라, 또한 다양한 시대적 필요에 따라 많은 신앙 고백 또는 신경들이 생겨났습니다. 다음은 348년께 예루살렘의 치릴로 주교가 구성한 신경입니다. “한 분이신 하느님, 전능하신 아버지, 하늘과 땅과 유형무형한 만물의 창조주를 저희는 믿나이다. 또한,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외아들, 영원으로부터 성부에게서 나신 참하느님, 그분을 통하여 만물이 생겨났으며, 내려오시고, 육이 되시어 사람이 되셨으며,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그리고 묻히셨으며,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셨으며, 하늘에 올라가시어 성부 오른편에 앉으시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영광 속에 오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으리라 믿나이다. 또한, 한 분이신 성령,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보호자를 믿으며,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유일한 세례를 믿으며,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를 믿으며,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덴칭거-신경, 신앙과 도덕에 관한 규정· 선언 편람」 41)
이처럼 사도 신경에서 유래한 교회의 다양한 신경은 초기 교회가 많은 이단으로부터 정통 신앙을 지키기 위해 그리스도교 신앙 핵심을 집약한 신앙 규범(기준)입니다.
사도 신경은 성부·성자·성령에 대한 신앙 고백을 내용으로 하지만, 사도 신경의 가장 중요한 출발점은 “저는 믿나이다”라는 신앙의 고백에 있습니다. 사도 신경은 바로 이러한 그리스도교 신앙의 정통성과 정체성을 찾아가는 가장 중요한 잣대로 교회 안에서 고백돼왔습니다.
“사도 신경은 사도들의 신앙을 충실히 요약했다는 점에서 이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 마땅하다. 사도 신경은 로마 교회의 세례를 위한 옛 신경이다. 이 신경의 막중한 권위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비롯된다. ‘이 신경은 사도들의 으뜸인 베드로의 사도좌가 있고 그곳에서 공적인 결정을 내렸던 로마 교회가 간직하고 있는 신경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94)
인공지능,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 교황청 공지 「옛것과 새것」에 대하여
교황청 신앙교리부와 문화교육부는 1월 28일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 AI)과 인간 지성의 관계에 관한 공지 「옛것과 새것」(Antiqua et Nova)을 발표했으며, 주교회의는 이를 한국어로 번역해 7월 15일 홈페이지에 공개했다. 「옛것과 새것」을 통해 교회가 어떻게 인공지능을 성찰하고 있는지, 또 인공지능을 선하게 이용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살펴본다.
‘인공지능’과 ‘인간 지성’
인간의 지적 활동을 모방하는 인공지능은 그동안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여겨졌던 많은 일을 처리할 수 있을 정도로 고도의 발전을 이룩했다. 특히 데이터 분석이나 이미지 식별, 의학적 진단에 이르는 전문 영역까지도 인공지능이 담당하고 있다. 이렇게 빠르게 진화하는 인공지능은 결국 인간을 뛰어넘고, 인간의 모든 활동을 대신하게 되지는 않을까?
그러나 교회는 「옛것과 새것」에서 “인간 지성과 인공지능을 지나치게 동등하게 보는 것은 기능주의적 관점에 종속될 위험이 있다”고 경고한다. 교회는 “인공지능이 인간 추론의 측면들을 모방하고 특정 과제를 놀랍도록 빠르고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고 해도, 그 계산 능력은 그저 인간 정신의 광범위한 능력의 단편일 뿐”(32항)임을 명백히 하고 있다. 인공지능이 아무리 탁월해도 결국 그 능력은 근본적으로 논리 수학적 구조에 한정됨을 말한다.
반면 인간 지성은 “현실의 모든 차원을 이해하고 현실에 적극 참여하는”(33항) 능력이 있고, 무엇보다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마련된 하느님의 선물”(21항)이다.
인간의 지성은 단순히 계산이나 논리적 언어 등 기능적인 과제만을 완수하는 능력이 아니다. 이는 일부분일 뿐으로 인간 지성은 더 폭넓게 이해해야 한다. 인간이 ‘육화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육화된 존재’란 인간 안의 정신적 부분과 물질적 부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지 않는 단일체라는 의미다.
인간의 지성과 몸은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마치 인간 지성이 몸 없이도 작동할 것처럼 생각되지만, 인간은 육화된 존재기에 “인간의 영은 육체 없이는 본연의 정상적인 앎의 방식을 수행하지 못한다.”(17항) 인간 지성의 성장은 “감각적 자극, 감정적 반응, 사회적 상호 작용, 그리고 각 상황의 고유한 맥락을 포함한 구체적 경험들로 형성”(31항)된다. 논리적 구조 안에서 기계 학습만으로 성장하는 인공지능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또한 인간 지성은 “관계 안에서 발휘되며, 대화와 협력과 연대 안에서 가장 충만하게 표현된다.” 인간이 본성적으로 타인과 친교를 이루기 때문이다. 인간 지성은 이런 친교를 통해 “타인과 함께 배우고, 타인을 통해 배운다.”(18항)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은 “창조와 구원 안에서 당신 사랑을 드러내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영원한 자기 증여에 궁극적 기반”(19항)을 두고 있기에 그렇다. 무엇보다 인간은 감각적 경험과 데이터의 한계를 넘어, 인간 지성의 한계를 초월한 ‘진리’를 추구할 수 있다.
‘인공지능’이라는 말 때문에 마치 인공적으로 인간 지성(지능)을 구현했다고 오해하기 쉽지만, 인공지능은 사실상 인간 지성과는 비교될 수 없고, “인간 지성의 산물”(35항)일 뿐인 것이다. 교회는 “인공지능은 인간 지성의 풍요로움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지성을 보완하는 도구로만 사용돼야 한다”(112항)고 가르친다.
인공지능, 선용하려면
“모든 과학 기술 성취는 궁극적으로 하느님의 선물이다.”(37항) 그러나 인간이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 선이 될 수도 있고, 악이 될 수도 있다. 인공지능의 시스템을 설계하고 그 사용 목적을 결정하는 주체가 바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특히 인공지능이 수행한 결과가 누구에게 도덕적으로 책임이 있는지를 판단하기 어렵기 때문에 더욱 신중한 윤리적 성찰이 필요하다.
사회적인 면에서 인공지능은 다양한 인간 발전을 이룩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교회는 이 기술이 윤리적으로 선용되지 않았을 때 예상되는 다양한 문제들을 지적하고 있다.
인공지능은 물질적 부는 물론이고 정치·사회적 영향력에 대한 불평등을 심화시킬 수 있고, 소수의 기업이 기술을 지닌 만큼, 개인이나 기업의 이익을 위해 악용될 우려도 있다. 또 모든 문제를 인공지능이라는 기술로 해결하려 하는 ‘기술 지배 패러다임’이 팽배해져 인간 존엄성과 공동선이 침해당할 여지도 크다. 이에 교회는 “인공지능은 단순히 경제적 또는 기술적 목표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온 인류의 공동선’에 이바지해야 한다”며 “사물의 안배는 인간 질서에 종속돼야 하며 그 반대가 돼서는 안 된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전한다.(55, 69항)
‘사람’처럼 보이는 인공지능은 인간관계에도 영향을 미친다. 인공지능은 현실의 진정한 만남을 방해하고 인간을 고립시킬 수 있고, 어린아이의 경우 인간관계를 인공지능과의 관계처럼 도구로 여기게 될 수도 있다. 교회는 이런 폐단을 막기 위해 인공지능을 하나의 인격처럼 제시하는 것을 피해야 하며, 인공지능을 이용해 속이는 것이 부도덕한 행위임을 강조한다.
그중에서도 교회가 특별히 우려하는 것은 인공지능을 이용해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범죄들이다. 교회는 “인공지능의 이론상의 위험도 주목할 만하지만, 더욱 시급하고 당면한 우려는 악의를 품은 개인들이 이 기술을 어떻게 오용할지 모른다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옛것과 새것」은 인공지능의 오용으로 발생하게 되는 허위 정보, 딥페이크, 사생활 침해, 자유의 억압, 그리고 전쟁 등에 관해 고찰하고 이를 예방하기 위해 제언하고 있다.
교회는 “우리는 알고리즘이 인간 존엄성에 대한 존중을 제약하거나 조건을 달도록 허용할 수 없고, 연민과 자비와 용서, 특히 개인이 변화할 수 있다는 희망을 없애버리도록 허용할 수도 없다”면서 특히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의 신성함이 존중될 수 있도록, 군사용 인공지능의 개발과 사용은 가장 높은 수준의 윤리적 검증 대상이 돼야 한다”(94, 103항)고 역설한다.
「옛것과 새것」은 “인공지능이 제기한 심오한 질문과 윤리적 도전을 다루기 위해 인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마음의 지혜”(114항)라고 강조한다. 마음의 지혜는 인공지능이라는 이 기술을 인간 중심적으로 사용하도록 이끌고, 공동선을 증진하며, ‘공동의 집’ 지구를 돌보고 인간의 연대와 형제애를 증진할 수 있다. 나아가 궁극적으로 하느님과 이루는 복되고 완전한 친교로 이끈다.
[글로벌칼럼] 니케아 신경에 담긴 궁금한 이야기
전 세계 가톨릭교회에서 주일 미사 중에 낭송되는 ‘니케아 신경’은 그리스도교에서 가장 오래된 신앙 고백 중 하나로 꼽힌다. 이 신경은 325년 8월, 약 세 달간 이어진 니케아공의회를 마치며 발표되었으며, 올해로 1700년을 맞는다.
하지만 니케아 신경이 가장 오래된 신앙 고백은 아니다. 그 영예는 초기 로마 교회의 세례 신앙 고백을 바탕으로 한 ‘사도 신경’에 돌아간다. 그럼에도 니케아 신경은 교회 역사에서 더욱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삼위일체에 관한 신학적 설명이 훨씬 더 정교하고 구체적이기 때문이다. 두 신경 모두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초를 이루지만, 사도 신경이 간결하다면 니케아 신경은 더욱 정밀하다고 할 수 있다.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313년 ‘밀라노 칙령’을 통해 그리스도교 신앙을 합법화했다. 그로 인해 더 이상 그리스도인은 로마 제국 내에서 박해의 대상이 아니었고, 오히려 사회 전반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집단으로 부상했다. 이런 상황에서 교리적 논쟁은 단순한 학문적 토론을 넘어서 사회적 파장을 낳았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아리우스라는 사제가 “예수는 하느님이 창조한 피조물이며, 시간상으로도 본질적으로도 하느님과 같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적지 않은 신학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아리우스는 하느님의 절대적 우월성을 주장하며, 예수는 하느님이 창조하신 최초이자 가장 사랑받는 피조물이라고 보았다. 그는 “하느님 아버지만이 시작이 없고, 무한하며 영원하다”고 말하며, “예수는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되고 탄생한 존재로, 존재하지 않았던 시점이 있었던 유한한 존재”라고 주장했다.
아리우스는 성경도 근거로 들었다. “아버지께서 나보다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요한 14,28),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이십니다”(콜로 1,15) 등의 구절을 인용하며, 예수는 하느님과 동등하거나 영원한 존재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 논쟁은 알렉산드리아교구 내부에서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커졌고, 결국 교회 전체의 문제로 확산됐다.
당시 교회 문제에 개인적으로 관심이 있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이 논쟁을 종식하고자 직접 나섰다. 그는 325년 제국 전역의 주교들을 니케아(현재 튀르키예의 이즈니크)로 소집해 공의회를 열었다. 이는 교황이나 주교단이 아닌, 아직 세례도 받지 않은 이교도 황제가 소집한 최초의 ‘보편 공의회’였다.
회의에는 주로 제국 동부 지역에서 온 300여 명의 주교가 참석했다. 성 실베스테르 1세 교황은 고령으로 인해 참석하지 못했지만, 두 명의 사제를 대표로 파견했다. 아리우스 본인도 참석했고, 그의 반대편에는 젊은 부제였던 아타나시오가 있었다. 그는 훗날 삼위일체 신앙의 가장 강력한 옹호자가 되었고, 평생을 아리우스주의와 싸우며 보냈다.
회의는 황제 본인이 주재했으며, 때로는 논쟁에 직접 참여하고 이끌기도 했다. 당시 아리우스를 지지한 22명의 주교는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우스를 중심으로 뭉쳤지만, 아리우스의 저술 일부가 회의에서 낭독되자 대부분의 주교는 이를 신성 모독이라며 비난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과 ‘본질상 동일하다’는 삼위일체 입장을 옹호한 인물은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알렉산데르였다. 그의 후계자 아타나시오의 주장은 결국 공의회에서 채택되었고, 예수가 ‘하느님과 동일 본질(Homoousios)’이라는 표현이 니케아 신경에 명시되었다. 이는 아리우스의 주장과는 양립할 수 없는 신학이었다.
325년 6월 19일, 공의회와 황제는 알렉산드리아 지역 교회들에 회람을 보내 아리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을 파문하고 추방한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니케아에서 승리한 삼위일체 진영의 승리는 오래가지 못했다. 아리우스가 추방되었고 공의회에서 결론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아리우스주의 논쟁은 지속되었다. 327년 알렉산데르 주교가 죽자 아타나시오가 그 뒤를 이었고, 콘스탄티누스는 점차 아리우스 측 인사들에 대해 관대해지기 시작했다.
이 초기 교회의 신학 논쟁을 되돌아보면 놀라움이 앞선다. 당대 사람들은 신앙과 신학 문제에 대해 공개적으로 논의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신념을 위해 싸우고 심지어 살인도 마다하지 않았다. 오늘날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다. 현대인들은 신앙보다는 경제와 부의 축적에 관심이 있으며, 그 과정에서 수단과 방법은 크게 개의치 않는 듯하다.
니케아공의회는 신학적 문제에 관해 결정했지만, 실제로는 정치적 셈법이 더 큰 영향을 미쳤다. 아리우스주의는 신앙의 형태로 초기 교회에서 끈질기게 살아남았고, 많은 신학자가 조용히 복권되었다.
이것은 중요한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실제 삶에서 바른 믿음(Orthodoxy)과 바른 행위(Orthopraxis) 중 무엇이 더 중요한가? 정답자에게 상은 없겠지만, 되새겨 볼만 한 질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