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전 이 영화를 보았지요.
그리고 얼마 전 소설 '범도'를 읽고 북받치는 감정을 억제하지 못해 한참 들끓다가
이 영화를 다시 보았습니다.
이 영화가 나온 때는 2019년.
이 영화 이전까지 홍범도 장군을 직접적으로 언급한 국내 개봉 작품은 찾기 힘들었습니다.
물론 모티브로 삼은 인물의 작품 출연은 있었지요.
이병헌, 김태리 주연의 tvN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 - 국모 시해 소식에 분개한 일명 홍대장으로 불린 인물, 바로 '호랑이 사냥꾼' 홍범도였죠. 드라마에선 '장포수'란 인물로 등장했습니다.
이 영화 개봉을 기점으로 예능 프로그램도 홍범도 장군을 소개하기 시작했고, 그의 업적과 생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비롯해 미디어에서 본격적으로 '홍범도'를 쏟아냈고.
그로부터 불과 4년 만에 육사 교정 안에 설치된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 문제를 둘러싼 격렬한 논란이 발생했습니다. 흉상 이전을 주장하는 쪽의 논리는 홍범도 장군의 소련 공산당 입당을 문제 삼고 있지요.
친일파 청산이 안 된 이 나라에서,
친일파들의 묘가 뻐젓이 대전 현충원과 동작동 현충원에서 윗자리를 떡 하니 차지하고 있는 이 나라에서
그렇게 떠들고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홍범도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런 분들, 너무 길어서 다 읽을 능력도 없으시겠지만 소설 '범도'를 꼭 읽어 보시길...
두 번째 보아도 가슴 뭉클한 영화.
이 영화의 평점이 왜 2.8(5.0 만점에서)이고 관객수가 4,788,118명 뿐인지 이해가 안 될뿐.ㅠㅠ
2019년 8월 9일 처음 영화를 보고 쓴 글을 다시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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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민초들이 이루어낸 위대하고 가슴 벅찬 승리 - 봉오동 전투
바람숲추천 0조회 94 19.08.09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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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 전투는 같은 해(1922년) 10월에 있었던 청산리 전투에 가려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저도 청산리 김좌진은 잘 알고 있었지만 봉오동 전투는 자세히 깊이 알지 못했으니까요. 조경숙 작가의 역사동화 '굳게 다짐합니다.'를 읽고나서 봉오동 전투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굳게 다짐합니다'는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홍이가 좀도둑으로 전락하고 여러 사건을 겪으면서 작은 독립운동가로 성장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어찌보면 홍이는 영화 '봉오동 전투'에 나오는 수많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일지도. 어제는 괭이를 든 농부였다가 오늘은 총을 든 독립운동가로 변신한 그 시대 많은 민초들.
영화는 치열하고 잔인하고 화가 나고 소름 끼치고 그렇습니다. 전투를 위해 봉오동 계곡으로 모일 때는 영화를 보는 나도 그 계곡으로 달려가는 느낌이 들 정도로 실감났지요. 간간이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은 배우 유해진 때문. 굉장히 쫓기는 상황인데도 왠지 여유가 느껴지는 말투 때문이지요. 그는 이 영화의 주인공 황해철이라는 캐릭터를 완벽하게 소화해냈지요. 이장하 역의 류준열도 참 대단했고요. 그러나, 이 주연배우들보다 더 대단했던 것은 그 수많은 독립군 역, 일본군 역의 단역 배우들... 험준한 산과 들을 뛰어다니며 벌이는 그들의 전투는.... 시간 가는 줄 모르게, 하나도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첫 장면도 인상 깊었지만 마지막 장면- 봉오동 계곡에 의기양양 다다른 일본군을 완전 포위하고 나선 독립군 그리고 그들의 공격으로 사그리 무너져 버린 일본군들.
이 영화에 진짜 일본군 장교로 출연한 두 일본 배우가 있는데 이 배우들, 이 영화를 찍으면서 어떤 걸 느꼈는지 참 궁금합니다.
지금, 나라안팎이 어려운 시절. 아베에게 우리가 사과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 이상한 사람들이 꼭 이 영화를 보았으면 좋겠네요.
봉오동 전투를 다룬 독립신문(1920년 06월 22일)
독립군 승첩(勝捷) 봉오동에서 적을 대파 적은 궤란(潰亂) 사상(死傷) 120명 6월 7일 접전에 관한 아군의 공보(公報)
6월 7일 북대륙 우리 독립군과 적의 접전에 관한 적의 보도는 별항과 같거니와 6월 20일 아군의 통신이 국무원에 도착되었으므로 임시정부 공보호외로 다음과 같이 발표되다. 이로써 보건대 적의 보도가 어떠한지 신용치 못할 것임을 알리라.
6월 7일 상오 7시에 북간도에 주둔한 아군 700명이 북로(北路)사령부 소재지인 왕청현(汪淸縣) 봉오동(鳳梧洞)을 향하여 행군할 때 불의에 동 지점을 향하는 적군 300명을 발견한 지라 동 군을 지휘하는 홍범도(洪範圖), 최명록(崔明錄) 양 장군은 즉시 적을 공격하여 급 사격으로 적에게 120여 명의 사상자를 내게 하고, 적의 궤주(潰走)3) 함을 따라 즉시 추격전에 옮겨가 목하4) 전투 중에 있다. 이 급보를 접한 동로(東路)사령관 OO은 즉시 전투 지점으로 급행하였다고.
해설 봉오동은 두만강에서 만주 쪽으로 40리 정도 들어간 곳에 있는 계곡 지대다. 홍범도와 최진동이 이끄는 독립군 연합부대는 1920년 6월 7일 여기서 매복 작전을 펼쳐 일본 157명을 사살하고 200여 명의 부상자를 내는 대승을 거두었다.
그 발단은 독립군 부대가 6월 6일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의 일본군 헌병초소를 습격한 것이었다. 일본군이 1개 중대를 출동시켜 반격전을 편 데 이어 보병과 기관총대 1개 대대를 동원하자 안산과 고려령에서 기습해 유인한 뒤 타격을 가했다.
이 전투는 그 해 10월에 있은 청산리 대첩에 다소 가려진 면이 있지만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한 최초의 대승으로 독립군의 사기를 크게 올렸다는 점에서 주목할 가치가 있다. 오죽 기뻤으면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이 공보 호외를 발행했을까.
한편 이에 자극받은 일본군은 중국 마적을 매수해 일본 영사관과 일본인들을 습격하도록 해 이른바 ‘훈춘 사건’을 일으킨 뒤 이를 빌미로 중국 당국과의 교섭도 없이 군대를 만주에 진주시켜 독립군 토벌에 나섰다.
<다음 백과에서> |
첫댓글 이 영화 나온 덕인지 그때 제 책도 출판사에서 먼저 개정판을 내자고 해서 제목도 고치고 표지도 갈고 했답니다.
그리고 그후 카자흐스탄에 있던 홍범도 장군 유해를 모셔왔지요. 생중계로 봉환식 보는데 가슴이 뛰더라고요.
근데 육사에서 동상을 빼라느니 말라느니.... 그런 날이 오다니 그때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러니까요.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요?
평생을 일본군과 싸우다 가족 다 잃고 카자흐스탄으로 추방되어 극장 수위로 쓸쓸하게 죽었다는데...죽어서도 수모를 당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