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최부자집
‘국립공원 경주’는 한국수력원자력 본사가 옮겨오면서 방사능폐기장까지 들어서자 매년 그 면모가 크게 바뀌고 있다. 그 이전에도 월성원자력발전소가 있어 다른 기초단체보다는 재정이 넉넉한 편이었다. 한수원 본사 이전 몇 년 후 경주 시내에서 만난 한 택시기사가 투덜대는 소릴 들었다. 경주에 있는 문화재와 시설물에는 돈을 쏟아 부으면서 자신에겐 한 푼도 주지 않는다는 불만이었다. 난 마땅히 해줄 말이 떠오르지 않아 손님들 돈이라도 차곡차곡 모아보라며 택시비를 건넸다.
작가 문형렬은 “봄에는 경주를 가지 말라”고 했지만 난 2월 마지막 주말, 아내의 생일을 떠올리며 경주로 향했다. 문 작가는 알려진 대로 필력이 대단하여 부정에 부정을 가하는 방법으로 긍정을 말하면서 천년의 신라 역사 속 사건과 유물을 조곤조곤 들려주고 있었다. 경주는 사계절 다 좋지만 잘 가꿔진 숲이 많아 파릇파릇 새싹이 움트는 초봄도 사람들이 몰린다. 복원공사를 끝낸 '월성'을 찾아가는데 차량들이 혼잡하여 향교가 위치한 교촌부락까지 떠밀려갔고 그곳에서 '경주 최부자집'을 만났다.
최부자집을 들어서자 마당에 있어야할 여러 안내판 중 ‘육훈’만 남은 게 보였다. ①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마라. ②재산은 만 석 이상 지니지 마라. ③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④흉년에는 땅을 사지 마라. ⑤ 며느리들은 시집온 후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⑥사방 백 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것. 8년 전엔 진주강씨 안산문중에서도『부한세적富閑世跡』개정판을 내면서 본받을 명문으로 ‘경주 최부자집’을 실었으니 성씨에 관계없이 존경받는 최부자집이 아닐 수 없으리라.
최부자집은 신라시대의 궁성인 월성을 끼고 흐르는 남천 옆 양지 바른 곳에 자리 잡았다. 월성은 반달 모양으로 생겨서 '반월성'이라고도 부르며 신라왕들이 거처하던 곳이다. 도성으로 출발했으나 인구 증가와 함께 대규모 고대도시로 성장하면서 월성은 궁성의 기능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석빙고뿐이다. 성벽은 서남쪽 월정교지를 바라보는 곳이 가장 높게 남았다. 교촌은 한반도 최초의 국립대학인 국학이 있던 곳으로 원효대사와 요석공주가 사랑을 나눈 요석궁도 있다.
국학은 그 뒤 고려시대의 향학과 조선시대의 향교로 이어졌다. 교촌에는 첨성대와 계림도 있어 신라와 조선의 문화가 함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최부자집 고택은 여러 채의 한옥으로 구성되었다. 집을 지을 당시에도 부자로 보이지 않으려고 애쓴 흔적이 돋보인다. 부엌은 낮게 만들고 굴뚝을 지붕으로 바로 올리지 않고 땅바닥으로 까는 식이었다. 한옥은 문간채와 사랑채 안채 사당 교방으로 구성되었고 사당은 사랑채와 서당으로 이용된 별당 사이에 배치되어 공간적 깊이를 느끼게 한다.
최씨 집안이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에서 이곳으로 이주한 것은 조선 중기 무렵. 이곳에서 12대 동안 만석지기 재산을 지켰고 학문에도 힘써 9대에 걸쳐 진사를 배출하였다고 한다. 한편 최준 선생은 일제 말기 조선국권회복단과 대한광복회에 군자금을 제공하는 등 독립운동을 지원하였으며 대한광복회 재무를 맡아 항일투쟁을 전개하다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광복 후 그는 나라를 이끌어갈 인재를 길러야 한다며 모든 재산을 털어 대학을 설립하여 오늘날의 영남대학이 되었다.
봄에는
경주를 가지 말라
문형렬 작가
봄날, 그대는 경주를 스쳐 가지도 말라. 그래도 그대가 봄 경주에 가려거든 어떤 슬픔에도 놀라지 말고 어떤 황홀함에도 흔들리지 않으리라고 깊이 다짐하고 마음속으로 無明不明 맹세하고 경주를 가라. 그러나 경주에 이르기 전에 남산이 보이고 목월의 생가와 동학교주 최제우의 생가 그 어디를 지나면서, 죽은 이도 살려낸다는 금척이 기다리는 비밀의 무덤을 스치면서, 그대는 알 수 없는 두근거림과 가슴 밑바닥에서 차오르기 시작하는 속 울렁임의 첫 관문을 통과할 수 없으리.
어쩔 수 없는 일, 하냥 그대가 봄에는 꼭 경주를 가야 한다고 말한 바 없고 들은 바 없고 찾을 수 없었던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앙탈처럼 외친다면 나는 대답을 잃어버리고 수만 리 꽃 사태로 무너지듯 확 물러서 말하리라. 봄 경주에 가려거든 눈을 감고 가라. 경주에 이르러 고요히 눈을 감으라. 눈을 감고 경주에 다가서고 눈을 감고 경주를 헤매며 눈을 감고 경주를 지나가라. 눈을 꼭 감고 수직으로 베인 가슴을 두 손으로 덮고 입술을 앙다물고.
어찌 눈을 감고 경주를 볼 수 있겠느냐고 실눈이라도 뜨고 가야 하지 않겠느냐고 그대는 타협해 오리라. 난들 어찌 눈을 감고 경주의 수많은 부처님과 화려한 무덤과 시간의 갑옷을 입고 달려오는 말발굽을 똑바로 만날 수 있으랴. 나는 아무 것도 약속할 수 없으리라. 실눈을 뜨고서라도 봄날 그대가 경주에 가려 한다면 아스라하게 실눈에 맺히는 희고 붉은 앙금과 그 앙금에 서리는 환상과 터져 오르는 상처들을 내내 다스릴 수 없어 그대는 스스로 눈이 멀어버리리라. 경주로 가는 길도 되돌아서 오는 길도 오래 찾지 못하리라.
그대가 눈을 뜨고 경주를 찾아가면 전쟁에 나가는 청년을 동시에 사랑한 자매가 못에 몸을 던지고 보라색 등꽃으로 거듭 세상에 나와 눈뜬 그대를 오라고 오라고만 손짓하리니 스산한 향기로움에 그대는 몸을 벗고 그만 물속으로 걸어 들게 되리니 함께 가라앉았다가 등꽃으로 필 뿐 이미 애욕이 다져진 그대 눈동자는 보라색 겹꽃잎 아래 또 매달릴 뿐이니 그대 경주에 가려가든 제발 눈을 감고 가라. 누가 눈이 멀어버리고 싶으랴.
정말 눈을 뜨고 그대 경주에 간다면 경주에 이르기 전에 내가 먼저 그대의 눈을 멀게 하리라. 잠시라도 눈을 뜨면 포석정에는 언제나 비운의 왕이 술잔을 기울이고 저 세월의 창날이 왕의 가슴을 눈부시게 찌르는 모습을 그대는 보고 말리라. 그제야 눈을 감은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이미 밝은 날은 붉게 사라지고 외마디 소리치는 왕은 스스로 가슴을 먼저 베어 끄떡없이 서 있으니 그대 다시는 본디 모습으로 돌아올 수 없으리라.
가슴에 맺혔다가 시냇물로 흘러내리는 연분홍 넋을 고즈넉이 바라보며 마상의 잔을 높이 들어 근심을 휘날리는 저 왕이 누구인지 마주하면 그대는 한 번 더 눈이 멀어버리리라. 그대는 찬란하고 드높았으므로 탄식으로 얼룩졌던 진정 외면했던 이승의 또 다른 그대 얼굴을 마주하리니 언제나 봄날은 천년의 말을 달리고 뒹구는 가슴으로 마냥 달려와 박히는 얼룩얼룩한 꽃잎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대 그림자는 사직을 끌어안듯
날마다 가슴 깊이 선혈을 흘리니 어찌 눈을 뜨고 그 얼굴을 마주 볼 수 있으랴. 그대 봄 경주에 가려거든 눈을 결코 뜨지 말라. 내가 그대의 눈을 먼저 멀게 하기 전에 봄 경주 지극한 아름다움 앞에서 눈을 감으라. 그대 천우신조로 알 수 없는 공덕으로 눈이 멀지 않았다 해도 감포 앞바다, 대종천, 감은사 앞 수로로 이어지는 물길을 달리는 어리고 푸른 용들을 만나면 그대는 그만 이 속진의 허물을 벗고 함께 배를 해딱이며 어린 용들을 따라 동쪽 바다 물거품으로 떠나버려도 나는 모르겠네. - 하략 -
문형렬
1955년 10월 15일생 / 1975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등단 / 영남일보 논설위원 역임 / 제4회 현진건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