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천은 의구한데 인걸(금과 석탄 캐던 노동자)은 간데없고
<지난 글에 이어>
아침 7시 잠에서 깼다. 침구를 정리하고 숙소 밖으로 나갔다. 블랙볼의 아침 공기는 잘 익은 가을 배를 한 입 베문 것처럼 시원했다. 거리에는 차 한 대, 사람 한 명 보이지 않았다. 마을 한쪽에 자리 잡은 공원을 한 바퀴 돌았다. 공원 앞 너머에는 내가 3박 4일 동안 걸어야 할 파파로아 능선이 논산훈련소 유격대 조교처럼 두 손을 허리춤에 차고 나를 내려보고 있었다.
‘630205 올빼미, 쫄지 말고 어서 오시게.’(630205는 내 생년월일이다.)
동네 잡화상에 반가운 농심 너구리라면 한 개
동네 잡화상에 들렀다. 가판대 한쪽에 농심 너구리라면 한 개가 보였다. 가격은 4달러 50센트. 이 깊은 산속까지 ‘매이드 인 코리아’ 제품이 들어와 있는 게 신기했다. 가게 한복판에는 난로가 서 있었다. 초등학생 때 난로 위에다 도시락을 올려놓았던 옛 추억이 떠올랐다. 너구리라면은 다른 등산객에게 양보하고(가격이 비싸 안 산 것은 절대 아니다) 초콜릿 같은 주전부리 몇 개를 배낭에 채웠다.
8시 45분, 셔틀버스가 숙소 앞에 도착했다. 기사는 어제 나를 그레이마우스에서 이곳 블랙볼까지 데려다준 그 젊은 마오리 청년이었다. 오늘도 손님은 나 홀로. 배낭과 내 몸만 싣고 파파로아 트랙의 입구인 스모크 호 주차장으로 향했다. 비포장 산길을 15분 정도 달리자 넓은 광장이 나타났다. 주차장에는 7인승 승합차(밴) 한 대뿐이었다.
스모크 호 주차장은 그냥 평범한 주차장이 아니다. 블랙볼과 그레이마우스와 웨스트 코스트와 뉴질랜드의 경제 기초를 놓은 산업 일꾼들의 피와 땀이 서려 있는 곳이다. 1964년 블랙볼 광산이 완전히 문을 닫기 전까지 이곳은 광부들의 캠프로 사용됐다. 수 킬로미터 혹은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광산에 들어가기 전 몸을 풀며 채비를 하던 곳이었다. ‘Smoke-ho’는 ‘짧은 휴식, 담배를 피우기 위한 곳, 휴식 중 먹는 간단한 음식’을 뜻한다. 뉴질랜드와 호주에서 주로 쓰이는 영어다.
트랙 들어서자마자 듬성듬성 ‘검은 금’(석탄) 보여
마오리 청년 기사와 악수를 하고 본격적인 산행에 나섰다. 첫날 걸어야 할 구간은 스모크 호 주차장부터 세스 클라크 산장(Ces Clark Hut)까지 10.3km, 4~5시간 코스다. DOC 안내 책자에는 파파로아 트랙 55.1km를 2박 3일에 걸쳐 끝내는 게 좋다고 나와 있다. 첫날 일정인 스모크 호 주차장에서 문라이트 톱스 산장(Moonlight Tops Hut)까지 20km(7~8시간)를 하루에 충분히 마칠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내가 누구인가. 어떤 이유를 대서라도 등산객을 재울 목적으로 세워진 산장을 외롭게 하는 법이 없는 산장 찐팬(애호가) 아닌가. 나는 DOC의 안내를 무시하고 첫날 일정을 이틀로 만들었다. 덕분에 상대적으로 더 여유 있게 파파로아 트랙을 즐길 수 있었다.
트랙에 들어서자마자 길옆으로 듬성듬성 ‘검은 금’이 보였다. 크고 작은 블랙 볼(Black Ball, 석탄)들이 거친 흙빛을 띠며 등산객을 맞았다. 파파로아 트랙의 특징은 ‘검은 금길’을 따라 걷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산길은 너도밤나무(beech)와 나한송(podocarp) 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었다.
파파로아 트랙의 역사는 금을 찾아 나선 광부로부터 시작한다. 1850년대부터 뉴질랜드 남섬에 금광 개발 붐이 불었다. 당시 뉴질랜드의 주인이었던 마오리들이 가장 값지게 생각하는 녹옥(pounamu, greenstone)이 이곳에서도 많이 발견됐다. 그 뒤 오타고 지역에 못지않은 금이 웨스트 코스트 지역에서 나오자 자연스럽게 수많은 광부가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금 캐러 가세♬♬. 금 캐러 가세♬♬.”
“금 캐러 가세”…1881년 크로이시스 트랙 만들어져
수 천 명의 광부는 이런 노래를 부르며 파파로아와 인근 산을 누볐다. 1881년 크로이시스 트랙(The Croseus Track)이 만들어졌다. 지금의 파파로아 트랙 앞 구간과 현재 공사 중인 파이크 29 메모리얼 트랙(Pike29 Memorial Track, 2022년 말 완공 목표)을 중심으로 한 구간이다.
19세기 말 그때만 해도 이곳은 말이 짐을 지고 오르기에는 경사가 너무 높고 거칠었다. 노동자들은 이 험한 산에 길을 만들어 금과 우라늄, 석탄을 실어 날랐다. 나도 한번 잘 살아 보겠다는 인간의 예쁜 욕망 앞에서 자연도 못 이기는 척 손을 들어주었다.
크로이시스(BC 595~546)는 오늘날 터키 서쪽에 위치한 리디아(Lydia)라는 나라의 왕이었다. 그는 누구도 부럽지 않은 엄청난 부자였다. 영어 사전에 ‘rich as Croesus’는 표현이 있을 정도다. ‘크로이시스만큼이나 부자인’이라는 뜻이다. 현대판 일론 머스크나 이재용이라고 보면 된다.
한 시간을 걷자 ‘호텔1’이 나왔다. ‘1st Hotel Site 1868’이라고 쓰여 있었다. 오래전 광부들이 머물렀던 숙소의 흔적을 남기고 싶어서 세워 놓은 알림 표시판이었다. 나는 호텔이 손님을 위해 마련해 놓은 나무 의자에 앉아 스모크 호(간식 까먹는 시간) 행사를 치렀다. 순간 내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보다 더 연세가 많으셨을 노동자들을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노동자)은 간데없고….”
30분을 더 걷자 ‘호텔 2’(2nd Hotel Site 1898)가 보였다. 이번에는 무심한 표정으로 통과. 첫날 목적지인 세스 클라크 산장 도착 한 시간 전에 가든 걸리(Garden Gully)로 빠지는 길이 눈에 뜨였다. 첫날 일정이 짧아 평소와는 다르게 부록 길(Off the Track) 걷기에 나섰다. 왕복 30분도 안 되는 쉬운 길인 데다 파파로아 트랙의 중요한 역사적 장소라 글쟁이로서 건너뛰는 게 마음이 편치 않았다.
가든 걸리, 1930년에 지어진 산장 외롭게 존재감 드러내
가든 걸리는 1902~1904 탄광 지역으로 개발되었던 곳이다. 10여 년간 발굴 사업에 나섰지만 수확물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1930년대 전 세계적으로 몰아닥친 경제공황이 뉴질랜드까지 번지자 정부는 보조금을 줘 가면서 이 지역을 살리려고 애를 썼다. 수백 명의 노동자가 금을 캐내는 작업에 참여했다.
걸리(Gully, 도랑) 옆에는 1930년에 지어진 산장이 한 채 외롭게 존재감을 드러냈다. 금 채취를 위해 사용했을 여러 기계가 세월의 녹과 함께 늦여름 오전의 따듯한 햇볕을 받고 있었다. 산장 문을 살며시 열었다. 세 평이나 채 될까 말까 한 산장 내부는 온통 검은색뿐이었다. 철판 지붕도, 나무 벽도, 간이침대도 다 검었다. 그 사이 어느 누가 놓고 간 듯한 물 한 통이 보였다. 하얀 통에 담긴 하얀 물. 그건 검은색(어려웠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에 더 빛날 수 있었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한 시간 넘게 걸음을 이었다. 몇 차례 얕은 고개를 넘고 또 넘었다. 첫날 머물 산장이 눈에 들어왔다. 전망이 황홀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산장은 ‘겸손하게’ 허름했지만, 그 앞에 사방으로 펼쳐진 하늘과 숲(파파로아)과 강(그레이)과 바다(태즈먼)는 ‘위대하게’ 장엄했다.
70대와 50대 사제 등산객의 ‘아름다운 동행’
산장은 간이 숙소 같았다. 그 뒤 몇 시간 동안 이 산장을 거쳐 간 사람이 있었지만 대부분은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잠시 들른 경유자들이었다. 매트리스를 깔고 쉴 준비를 했다. 나는 이렇게 사람이 별로 없는 산장이 더 좋다. 굳이 영어로 힘들게 내 마음을 표현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세스 클라크 산장은 내가 1986년 육군 병장 말년 휴가 때 찾은 지리산 노고단 산장처럼 보였다. 당시 50대로 보이던 함씨 성을 가진 사람이 산지기로 있었는데 그가 보여준 거룩한 산 사랑 정신 때문에 그 뒤 나도 종종 어설픈 산행을 하게 되었다.
이 산장은 1986년에 지어졌다. 산지기 세스 클라크(1932~1986)의 이름을 따왔다. 세스 클라크는 블랙홀 토박이였다. 그는 한평생 이곳 광산에서 일을 하다가 직업을 산지기(ranger)로 바꿨다. 크로이시스 트랙 길이 나 같은 일반 등산객에게 다시 열린 것도 그의 덕분이다. 파파로아 산맥을 가로지르는(블랙볼-배리타운 Barrytown) 길을 만들고 싶었던 세스 클라크, 그는 길을 돌보다가 바로 이 산장 몇 미터 앞에서 목숨을 잃었다. DOC는 그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이 산장을 헌정했다.
산장에서 너구리라면(내가 따로 가지고 간 라면이다)을 끓여 먹고 늦은 낮잠을 한두 시간 즐기다가 해거름 무렵에 일어났다. 묵직한 음성을 띤 두 남자의 출현 탓이었다. 묵직한 음성을 지닌 남자 1은 일흔이 넘어 보였고, 묵직한 음성을 지닌 남자 2는 나보다 서너 살 어려 보였다.
나중에 얘기를 들어 보니 둘은 넬슨(Nelson)에서 온 사제(스승과 제자) 간. 40여 년 전 칼리지 스승과 제자로 만나 지금까지 ‘우정’을 지켜오고 있다고 했다. 남자 1은 크로이시스에 많이 못 미치겠지만 그래도 부자 편에 드는 남자 2 집의 시간제 정원사로 일하고 있다. 한동안 말레이시아 국제학교에서 영어 교사로 있었다는 남자 1은 내게 너무 쉬운 영어로 3박 4일 파파로아 트랙 산길 여행에 통역사가 되어 주었다.
산장 바깥에서 삼라만상의 오묘한 변화 만끽해
저녁을 먹고 바깥으로 나갔다. ‘바깥’이라야 거친 야산을 빼곤 산장 건물과 붙은 베란다가 거의 전부다. 그런데 열댓 평도 될까 말까 한 이 좁은 공간에서 삼라만상의 오묘한 변화를 다 볼 수 있다. 저녁의 주황빛 노을과 아침의 황금빛 일출이 크로이시스가 가진 재물보다 더 값지게 빛났다. 자연이 빚어내는 세계는 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 예술적 가치가 높다. 당연히 솔로몬의 옷보다 더 곱다. 그래서 창조주의 솜씨를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다음 글에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