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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가을수양회 주제 2강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말씀/창15장
요절/창15: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요새 ‘회귀’를 주제로 한 판타지 소설의 인기가 높습니다. 저도 회귀한 주인공을 다룬 [재벌집 막내아들] 이라는 드라마를 재미있게 봤습니다. 배우들의 맛깔 나는 연기도 볼만했지만 미래를 아는 주인공과 미래를 몰라 불안에 떠는 사람들이 대비되어 재미를 높였습니다. 드라마의 핵심은 미래를 알기에 거침없이 행동하는 주인공입니다. 시청자는 주인공에 몰입해 대리만족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처지는 불안에 떠는 사람들입니다. 주인공의 할아버지로 나오는 회장은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면서 불안에 시달립니다. 그 시점에서 그는 처음 사업을 시작했던 곳으로 갑니다. 거기서 사업 초기 함께 했던 오래된 차량을 수리하면서 마음을 다잡습니다. 그리고 피하고 싶었던 사업 발표를 잘 마무리합니다. 불안을 느낄 때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약속을 받았지만 불안에 사로잡힌 아브람이 나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런 그를 처음 약속으로 인도하시고 믿음을 갖도록 도우십니다. 말씀을 통해 약속의 의미를 새기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이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שָׂכָר, reward)이니라.” 창세기 14장을 보면 아브람은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해 엘람의 동맹군과 적대관계가 되었습니다. 집에서 훈련된 318명으로 기적 같은 승리를 거두고 조카 롯도 구해냈습니다. 하지만 엘람에 비하면 아브람은 작은 부족장일 뿐이었습니다. 승리의 기쁨은 잠시였고 곧 두려움이 몰려들었습니다. 엘람이 작정하고 공격하면 아브람은 견딜 수 없을 것이 분명했습니다. 이런 아브람에게 하나님은 “나는 네 방패”라고 선언하십니다. 지금껏 아브람은 여러 번 위기를 넘겼습니다. 아내를 빼앗긴 적도 있었고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해 큰 싸움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의 보호(방패)가 있었기에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방패’가 되어주시겠다는 말씀은 믿었습니다. 겨우 318명으로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상급(reward)을 말씀하시자 입술이 튀어나왔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창세기 12:2절에서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당시 나이가 75세였는데 지금은 85세입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또 언제 자녀를 주신다는 말씀도 안하셨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약속을 구체적으로 확인시켜 주십니다. 4절을 보십시오.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그리고 그 약속이 얼마나 큰 결과로 돌아올지 말씀해 주십니다. 5절을 보십시오.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밤에도 별보기 어려운 도시에 살다가 은하수를 보면 깊은 감동을 받을 것 같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이런 걸 직접 보면 경외감과 함께 없던 믿음도 생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브람에게는 일상적인 장면입니다. 하나님은 일상적인 대상에 의미를 부여하시고 볼 때마다 약속을 생각하도록 하셨습니다. 할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남성들은 할례를 볼 때마다 선택받은 백성임을 기억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일상적인 빵과 포도주를 통해 자신을 기억하고 기념하도록 하셨습니다. 아브람은 약속이 희미해질 때마다 밤하늘을 보며 다시 약속을 붙들 수 있었습니다. 이런 신앙의 일상성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스라엘이 전통적인 옷, 조상들의 이름을 유지하는 것도 이런 이유입니다. 우리 교회도 연말에 말씀 뽑기를 하고 코팅해서 나눠주는데 개인적으로 좋은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번씩 꺼내서 말씀을 볼 때마다 신년에 가졌던 마음을 되새겨 볼 수 있습니다. 어떤 방식이든 일상에서 약속과 말씀을 되새길 수 있는 자신만의 방식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아브람이 밤하늘을 보며 약속을 기억했듯이 우리도 일상에서 말씀을 새기고 약속을 믿으며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5절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는 약속은 창세기 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의 시각적 버전입니다. 사실 큰 민족을 이룬다는 약속은 웅장하지만 이미지가 그려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별들이 하나둘씩 나타나다가 새벽이 되어 밤하늘을 가득 메우는 모습은 시간적이고 시각적인 효과를 줍니다. 아브람의 자손은 점차 늘어나 하늘을 가득 채우는 별처럼 많아지고 반짝이게 될 것입니다.
이 약속 앞에 아브람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6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의’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성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아브람이 믿음을 통해 다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었다는 것입니다. 10년 동안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아브람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서 온전히 믿었고 그 약속 또한 확신한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은 처음 약속을 새롭게 하십니다. 7절을 보십시오.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니라” 이 말씀은 10년 전 언약을 다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에 아브람은 약속의 증거를 요구합니다(8절 “그가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을 소유로 받을 것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고대의 맹세방식을 이용해 약속을 확인시켜 주십니다(9-12절, 17절)(9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숫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가져올지니라 10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가져다가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11 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쫓았더라 12 해 질 때에 아브람에게 깊은 잠이 임하고 큰 흑암과 두려움이 그에게 임하였더니 17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제물을 쪼갠 것은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몸도 그렇게 될 것이니 반드시 지킨다는 뜻입니다. 큰 흑암, 두려움, 해가 져서 어두울 때 - 이 구절들은 모두 인간이 가진 한계와 의심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횃불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기다림에 지치고 의심이 찾아올 때 임하시는 하나님이 이 장면에 그려져 있습니다. 아브람은 85세에 언약을 다시 확인했지만 이삭은 15년 후에야 태어납니다. 지금까지 10년을 기다렸지만 15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기다림 속에서 아브람은 시행착오를 겪고 의심하고 체념합니다. 그러다 불가능한 상황(아브람 100세)에서 이삭이 태어나자 아브람의 믿음은 크게 성장합니다. 얼마나 성장했을까요? 어렵게 얻은 이삭을 하나님께 바칠 정도로 성숙해집니다. 신앙 안에서 시행착오가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의심, 실망, 좌절 끝에 하나님을 만날 때, 의심과 좌절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때 견고한 믿음의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이 의식을 통해 하나님은 약속의 확실성을 아브람에게 심어주셨습니다. 서론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힘든 시기에 초심으로 돌아가는 건 세상에서나 신앙에서 모두 중요합니다. 아무리 힘든 상황이라도 아무것도 없었던 처음보다 어렵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부르심을 받았을 때 아브람에게는 조카 롯 외에 아무도 없었고 가진 땅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가나안 땅 일부를 차지했고 목자 수가 많아서 조카 롯이 분가를 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많지는 않아도 전쟁을 치룰 군사력도 갖춘 상태입니다. 자녀만 없을 뿐 다른 축복들은 이미 주어진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없는 자녀에 집중할 때 다른 축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브람은 처음 약속이 희미해진 상태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를 7절 말씀과 언약의식을 통해 초심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임재(횃불), 함께하심도 보여주셨습니다. 눈에 보이는 의식을 진행하고 횃불을 목격하면서 아브람은 첫 약속이 확실하고 여전히 진행 중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현재 누리는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결국에는 자녀도 주어질 것이고 별과 같은 자손들로 퍼져나갈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초심을 찾으면 그동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입니다. 우리도 믿음이 흔들리고 어려운 상황에 부딪혔을 때 처음으로 돌아가 약속을 확인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받은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보이면 아브람처럼 하나님께 투정도 부릴 수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우리를 섬세하게 인도해 주십니다. 약속을 생각나게 해주시고 새로운 이정표를 보여주십니다. 저는 이곳 진주까지 오게 되리라고는 꿈에서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다른 목자님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지만 신앙생활 초기 하나님이 주셨던 개척에 대한 약속과 비전이 저를, 그리고 여러분을 이곳까지 인도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물론 개척 후 많은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작은 공동체인 현재를 보면 실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 부르심을 받았는지, 처음은 어땠는지를 돌아보면 약속이 진행 중임을 알게 됩니다. 우리도 아브람처럼 약속을 놓지 않고 믿으면 하나님의 때에 진주에 뭇별과 같은 역사를 이루실 것을 믿습니다.
13절부터 21절을 보겠습니다. “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14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15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16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18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19 곧 겐 족속과 그니스 족속과 갓몬 족속과 20 헷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르바 족속과 21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의 땅이니라 하셨더라” 이 구절들을 통해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두 가지를 알려주십니다.
첫째, 하나님의 영원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4백년 후의 일을 구체적으로 알려주십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고 유한한 인간의 역사를 이루는 분이심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영원하신 분이라면 100년을 간신히 사는 우리 생각, 기대와는 다르게 우리 삶과 역사를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당시 아브람은 자손이 별과 같이 많아지고 수천 년이 지난 후대에도 기억될 믿음의 조상이 될 것을 믿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약속을 이루셨고 자신을 증명하셨습니다. 또 아브람이 두려움에 사로잡힐 때 만나주신 것을 보면 하나님은 섬세하신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믿으면 지금의 상태가 만족스럽지 못하고 하나님의 응답이 더디다고 느껴져도 믿음 안에서 여유를 가질 수 있습니다.
둘째, 신앙의 역사성입니다. 역사를 몰라도 살아가는 데는 큰 지장이 없습니다. 하지만 역사의식이 없으면 우리 시대와 사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세대갈등을 예를 들어 살펴보겠습니다. 세대갈등이라는 현실만 보면 이분법적이고 서로 조화하기 어려운 상태로 보입니다. 저만 하더라도 자녀들에게 잔소리를 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어린 세대가 감당하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면 진짜로 힘들어집니다. 하지만 세대갈등이 최근 시작된 게 아니라 역사가 기록되기 시작한 B.C 3천년 경 수메르 시대부터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어떨까요? 저도 윗세대에게 다루기 힘든 X세대였지만 지금은 윗세대, 꼰대가 되었습니다. 역사는 늘 돌고 돈다는 것을 알면 MZ 세대도 다르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그럼 당연히 다른 세대를 대하는 방식, 생각이 달라질 것입니다. 이것이 역사를 이해할 때 가질 수 있는 안목이자 힘입니다.
신앙도 다르지 않습니다. 신앙의 긴 역사 속에서 우리를 바라보면 많은 것이 달라집니다. 현재의 나를 생각하면 힘이 빠지지 않을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삶에서나 신앙에서나 내세울 것 없고 늘 부끄럽다고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신앙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 믿음의 역사를 이루어 오셨습니다. 놀라운 믿음의 사람들은 소수였고 그런 사람들도 부족한 점이 많았습니다. 아브람은 위대한 신앙인이었지만 그의 삶이 완벽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낯선 땅, 풀리지 않는 자녀 문제 때문에 불안과 체념으로 많이 흔들렸습니다. 살아남기 위해 아내를 누이라고 두 번 속였고, 여종을 통해 아들을 얻었습니다. 약속을 믿었지만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약속을 이루셨고 신앙의 역사 속에서 아브람을 믿음의 조상으로 새겨놓으셨습니다. 이것은 아브람 개인의 능력이 아닙니다. 그의 결단이 가져온 역사적인 결과입니다. 이렇게 역사적으로 보면 나 한 사람의 중요성이 보입니다. 지금 우리는 아무것도 아닐 수 있습니다. 이룬 것이 없고 스스로 보잘 것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긴 신앙의 역사 속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의 결단을 하나님이 받으셔서 지금 놀라운 일을 이루실 수도 있고 우리가 도운 양들이나 자녀들을 통해 믿을 수 없는 역사가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역사 속에 기억된 귀한 존재들입니다. 자신을,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이런 시선으로 바라볼 때 좀 더 여유를 가질 수 있습니다. 또 그렇게 되어야 신앙 안에 있는 자유와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 이런 자유와 기쁨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소감 : 학창시절 하나님의 함께 하심에 대한 간증을 많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것을 깊이 체험하지 못했고 열심히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열심을 내는 신앙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손에 잡히는 게 없을 때 믿음과 열심 모두 사라졌습니다. 이도 저도 아닌 상태에서 졸업하고 병원 수련에 들어갔는데 제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간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잠 못 자는 시간이 반복되면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었습니다. 거기에다 일이 꼬여서 그나마 편하다는 3, 4년 차에 1주일에 3일 당직을 서야 했습니다. 교수님들은 힘든 상황을 알면서도 “도와줄까?”라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습니다. 도와주는 사람 없이 혼자 고생한다는 생각에 불만이 극에 달했습니다. 교수님을 포함한 병원 사람들의 꼴도 보기 싫었습니다. 집에서도 늘 불평, 불만이 많아 분위기가 안 좋았습니다. 게임으로 스트레스를 풀면서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참다못한 옥합 목자가 기도하라고 저를 교회로 내쫓았습니다. 투덜거리며 광주 3부 홀에 올라가보니 아무도 없었습니다. 기도할 마음이 있었던 건 아니라서 시간만 때우려고 구석에 엎드려 있는데 문득 누가 옆에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누가 소리도 없이 옆에 왔나 봤는데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시 눈을 감았는데 누군가의 존재감이 계속 있었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기도가 시작되었고 주마등처럼 병원 수련시간이 머리를 스쳐갔습니다. 저는 늘 혼자 고생한다고 생각했는데 그 순간 함께하셨던 하나님의 손길이 보였습니다. 그 많은 환자를 아랫 연차와 둘이 보면서도 특별한 사고 없이 지나갔고 많은 환자들을 경험하면서 신경과 의사로서 좀 더 채워졌습니다. 병원 일만 제외하면 다른 문제없이 순탄했음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열심을 낼 때가 아니라 가장 힘들고 가장 믿음이 없던 시기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열심을 내는 자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약속을 믿는 모든 자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그러자 마음에 평화와 감사가 찾아왔습니다. 불평, 불만이 사라진 건 아니었지만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면 요동치는 마음이 다시 잠잠해졌습니다. 사실 광주에서 진주로 오는 것도 제 의지와는 무관하게 일어났습니다. 전라도 지역에 공중보건의 자리가 나지 않아 이곳으로 오게 되었고 경상대 의대 교수로 오신 김안드레 목자님의 개척역사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진주로 올 때는 기대보다는 걱정이 앞섰습니다. 아직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낯선 곳에서 신앙생활, 직장생활 하는 것이 불안했습니다. 하지만 집을 구하고 직장을 찾는 과정에서 계속되는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교회를 계약할 때도 드보라 목자님을 통해 좋은 조건으로 계약할 수 있었습니다. 비록 기대처럼 놀라운 역사가 이루어지진 않았지만 신실한 한 사람 한 사람이 합류하면서 작지만 좋은 토대가 이루어졌습니다. 진주에 와서도 저의 믿음은 오르내림을 반복했습니다. 그럼에도 함께 하신다는 약속을 확신했고 체험했기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말씀을 준비하면서 저에게 확신이 없음을 다시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믿지만 후대에 믿음의 역사가 일어날 것을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목자로서 부르심을 받았지만 그냥 정해진 것만 할 뿐 하나님께서 진주에 놀라운 역사를 이루실 것을 믿지 못했습니다. 제가 진주로 올 때 받았던 말씀들을 기억하고 적극적으로 역사에 동참해야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뭇별과 같은 역사를 우리 가운데 이루시기를 기도합니다.
결론 : 믿음은 약속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믿음의 길이 흐려지고 잘 보이지 않을 때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현재를 바라보면 하나님의 축복이 진행 중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브람이 밤마다 별을 보며 약속을 기억하고 새겼듯이 우리도 일상의 삶에서 약속을 되새기고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신앙은 의심, 시행착오와 함께 갑니다.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고 늘 형통했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위대한 신앙인들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나의 부족함이 아니라 약속을 통해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걸어가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우리의 양들과 자녀들을 통해 뭇별과 같은 역사를 이루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