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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오계(世俗五戒)
신라 진평왕 때 승려 원광이 화랑에게 일러 준 다섯 가지 계율을 말한다.
世 : 세상(一/4)
俗 : 속돌 속(亻/7)
五 : 다섯 오(二/2)
戒 : 경계할 계(戈/3)
세속오계(世俗五戒), 혹은 오계(五戒)는 신라(新羅) 진평왕(眞平王) 때 원광법사(圓光法師)가 귀산(貴山)과 추항(箒項)의 요청을 받아 알려준 다섯가지 수신계(修身戒)이다. 오늘날 화랑도(花郞道)의 윤리적 지침 및 실천 이념으로 알려져 있다.
유교의 대표적인 사회윤리로서 유교의 기본 덕목이자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기본 원칙으로 지금까지 우리 나라를 비롯한 동양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사군이충(事君以忠) : 충성으로써 임금을 섬긴다.
사친이효(事親以孝) : 효도로써 어버이를 섬긴다.
교우이신(交友以信) : 믿음으로써 벗을 사귄다.
임전무퇴(臨戰無退) : 싸움에 임해서는 물러남이 없다.
살생유택(殺生有擇) : 산 것을 죽임에는 가림이 있다.
원광법사(圓光法師)의 성(姓)은 설씨(薛氏), 혹은 박씨(朴氏)라고도 한다. 경주(慶州) 출생, 13살 때 입산(入山), 589년 3월 당(唐)나라에 들어가 유학하고, 600년에 귀국하였다.
608년에는 신라가 고구려를 정벌코자 수(隋)나라에 청병할 때, 왕명으로 걸사표(乞師表, 파병요청서)를 써 주었으며, 613년에 황룡사(皇龍寺)에서 백고좌(百高座) 도량(道場)을 베풀고 고승(高僧)을 청하여 경을 읽을 때, 원광법사(圓光法師)는 제일 상수(常修)로써 설법했다.
그리고 귀산(貴山)과 추항(箒項) 두 청년에게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일러주어 신라 불교를 흥왕케 하였을 뿐 아니라, 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국민의 정신적 기틀을 마련해 주었던 것이다.
원광이 수(隋)나라에서 구법(求法)하고 귀국한 후, 화랑 귀산(貴山)과 추항(箒項)이 찾아가 일생을 두고 경계할 금언을 청하자, 원광이 이 오계(五戒)를 주었다고 한다.
스물 다섯살에 중국 수(隋)나라로 가 공부를 하여 불교에 통달한 원광은 공자(孔子)의 가르침인 유교에 관해서도 많이 알고 있었다.
신라 진평왕(眞平王) 때 원광은 나라의 부름을 받고 신라로 돌아와 임금을 도와 나라 일을 거들었다. 원광은 속이 깊고 아량이 넓어 타인을 꾸짖는 법이 없었을 뿐 아니라 언제나 웃는 얼굴로 사람들을 대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그를 원광법사라(圓光法師)고 불렀다.
한펀 그 시절 사량부(沙梁部)라는 마을에 귀산과 추항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그림자처럼 따라 다닐 정도로 아주 친했다. 둘은 언제나 함께 무술을 연마하고 수양을 닦았는데, 귀산은 나중에 화랑(花郞)이 되었다.
어느 날 귀산이 추항에게 말했다. “이보게 추항, 우리가 우물 안 개구리처럼 우리끼리만 몰려다닐 게 아니라 큰 어른을 찾아가 더 높고 깊은 진리를 깨우치기로 하세.” “그러세. 그럼 지금 당장 찾아 나서 보세.” “어느 분을 찾아뵐까 ?” “그렇지. 원광법사처럼 경지에 오른 분도 없지.”
당시 원광법사는 왕궁에서 물러나 가실사(嘉悉寺)에 머물고 있었다. 그래서 귀산과 추항은 이튿날 가실사로 향했다.
귀산과 추항은 원광법사 앞에 나란히 서서 합장한 후에 아뢰었다. “법사님, 저희가 일생동안 마땅이 지켜야 할 교훈을 좀 일러 주십시오.”
원광법사는 그들이 멀리서 자신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일부러 여기까지 왔다는 것을 알고는 더욱 반갑게 맞아 주었다. “먼 길 오느라 고생이 많았네. 진리란 그렇듯 고생 끝에 얻어지는 것이지 가만히 앉아서는 얻을 수가 없는 것이라네. 자네들이 일생동안 지킬 교훈을 달라고 했으니, 내 다섯 가지 교훈을 주겠네.”
원광법사가 입을 열자 귀산과 추항은 눈빛을 반짝이며 스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불법에는 반드시 지켜야 할 열 개의 계율이 있네. 그러나 그것은 승려가 아니고는 지키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지. 그러므로 자네들과 같이 세속에 있는 사람이라면 그 중 다섯 가지만 지켜도 충분할 것이네.
첫째는 사군이충(事君以忠)인데 이것이 임금을 섬기되 충성을 다하라는 것이고, 둘째는 사친이효(事親以孝), 이는 어버이를 섬기되 효도로써 섬기라는 것이며, 셋째는 교우이신(交友以信), 즉 친구를 사귀되 믿음으로써 사귀라는 것이고, 넷째는 임전무퇴(臨戰無退), 이는 싸움터에 나가서는 물러서지 말라는 것이네. 다섯째는 살생유택(殺生有擇), 즉 산것을 죽일 때는 가려서 하라는 것이네.
원광법사의 가르침을 받은 두 사람은 과연 법사답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다섯가지 계율이 바로 세속오계(世俗五戒)인데 이는 나중에 화랑도(花郞道)의 기본 정신이 되기도 했다.
원광은 종교가일 뿐만 아니라, 애국적인 정치가이기도 하며, 문장에도 뛰어나 유창한 필치로 적은 걸사표(乞師表)에 따라 수(隋)나라 임금이 38만명의 병력을 보내 오기도 했다.
삼국유사(三國遺事)도 삼국사기(三國史記)와 같이 사군이충(事君以忠), 사친이효(事親以孝), 교우이신(交友以信), 임전무퇴(臨戰無退), 살생유택(殺生有擇)으로 되어 있으나,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에는 사군이충(事君以忠), 봉친이효(奉親以孝), 교우이신(交友以信), 임전불퇴(臨戰不退), 살생유택(殺生有擇)으로 되어 있어 조금 차이가 있으나 전체의 뜻에는 별 다름이 없다.
화랑 정신이라 하면 당연히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여길 정도로 세속오계는 화랑정신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원광법사가 귀산과 추항에게 전한 다섯 가지 계율은 우리의 고유한 사상과 가치관을 바탕으로 하여 유(儒), 불(佛), 선(仙) 3교(三敎)가 융합되어 표현된 것으로 보인다.
세속오계(世俗五戒)의 정신은 삼국사기의 열전에 나타난 여러 가지 일화에서 볼 수 있듯이, 원광법사의 가르침이 있기 전에도 많은 화랑들이 실천해 왔던 것이지만 귀산과 추항이 이 가르침을 충실히 지키다가 장렬하게 전사함으로써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원광법사의 세속오계는 화랑도만을 위해 전수한 것은 아니었지만 차츰 화랑의 계율처럼 인식되었고, 나중에는 화랑뿐만 아니라 모든 국민이 이를 중시하게 되었으니, 세속오계의 정신은 당시 사회가 요구한 보편적 도덕률인 동시에 일반화된 가치관이었음을 알 수 있다.
원광법사는 도량이 넓고, 성품이 조용하였으며, 고요한 것을 좋아하였다고 한다. 말할 때는 항상 얼굴에 웃음을 띠고 성내는 법이 없었으며, 학문에 대한 재능도 뛰어나 유학과 노장학은 물론 제자백가(諸子百家)와 역사에 깊이 통하지 않음이 없었다고 한다.
그가 출가하여 삼기산(三岐山) 금곡사(金谷寺)에서 수도할 때 산신으로부터 중국으로 불법(佛法)을 구하러 가라는 권유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이것은 원광이 활동하던 시대가 고유종교의 바탕 위에 불교가 수용되어 가는 과정을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원광은 일찍이 중국의 진(陳)나라에 유학하여 열반경(涅槃經)과 성실론(成實論)을 배웠고, 10여년 후에는 수(隋)나라에서 섭론종(攝論宗)과 열반경(涅槃經)을 강의하였는데, 20여년간의 유학과 수도를 통하여 학문과 불법 모두 높은 수준에 이름으로써 그 명성을 중국에 크게 떨쳤다고 한다.
진평왕(眞平王) 22년(600)에 원광이 귀국하자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두 기뻐하며 환대하였고, 왕도 그를 만나보고 성인처럼 공경하여 마지 않았다.
608년 고구려가 자주 변방을 침범하므로, 왕이 고구려를 치기 위해 수(隋)나라에 걸사표(乞師表)를 보내려고 하자 원광은 “자기가 살려고 남을 멸하는 것은 승려의 할 바가 아니나, 제가 대왕의 나라에 살면서 어찌 감히 명령을 따르지 않겠습니까?”하고 곧 글을 지어 바쳤다.
세속오계로 국민을 교화하고, 걸사표를 지어 국난극복에 적극 동참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그는 현실 인식이 투철하고 책임감이 매우 강한 지성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사상적 바탕에는 왕도(王道)와 불도(佛道)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호국불교의 정신이 깔려 있고, 이것은 후대로 내려오면서 한국 불교의 전통이 되었다.
세속오계에 나타나 있는 화랑정신을 덕목별로 살펴보자
◈ 사군이충(事君以忠): 임금을 섬김에는 충성으로 해야 한다는 뜻이다.
신라는 반도의 동남방에 치우쳐 있을 뿐 아니라, 국가적 체제나 각종 제도의 정비가 삼국 중에서 가장 늦었기 때문에 고구려나 백제와의 경쟁에서 불리한 처지에 있었다.
영토 확장을 둘러싸고 주변국과 마찰이 잦았던 6~7세기는 신라 역사상 유례없는 국난기였다. 백제와 고구려, 중국을 상대로 국가의 존망이 걸린 전쟁을 자주 치러야 했기 때문이다.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의 정신력이라고 할 수 있다. 신라군이 숫적으로 열세에 있으면서도 상대를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필승의 신념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를 지닌 까닭이며, 화랑도들이 굳세고 용감했던 것도 생존을 위한 자기 방어의 수단이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미시랑(未尸郞) 진자사조(眞慈師條)에서 진흥왕(眞興王)이 나라를 흥하게 하기 위하여 풍월도(風月道)를 먼저 일으켜야 한다고 하여 화랑제도를 제정하였다고 하는데, 이것은 교육을 통해 먼저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여 유사시에 적재적소에 등용함으로써 진충보국(盡忠報國)하게 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실제로 삼국통일을 전후한 시기에 화랑정신으로 굳게 뭉친 젊은이들이 국난극복을 위해 앞장서서 활약한 사실이 삼국사기 열전에 많이 나타나 있는 것으로 보아, 화랑도를 중심으로 한 용장의열(勇壯義烈)이 삼국통일의 초석이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임금을 충성으로 섬기는 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제주의 시대에서는 당연한 국민적 도리로 인식되었다. 그것은 국왕이 곧 국가를 상징하며,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임금을 충성으로 섬겨야 한다는 생각은 국왕 개인에 대한 충성이라기 보다는,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국가 체제나 권력에 대한 충성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눌지왕(訥祗王) 때의 박제상(朴堤上)이 “국왕이 근심이 있으면 신하가 욕을 당한다”고 하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왕제을 찾아 나선 것이 이러한 사상을 잘 드러내 준다고 하겠다.
김흠운(金歆運), 김영윤(金令尹), 비녕자(丕寧子), 소나(素那), 사다함(斯多含), 관창(官昌), 검군(劒君), 귀산(貴山), 취항(箒項), 찬덕(讚德), 해론(奚論) 등 수많은 화랑과 용장의열(勇壯義烈)의 빛나는 행적으로 미루어 볼 때, 그들은 왕실과 국가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것을 최고의 영광과 명예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사군이충(事君以忠)의 계율은 불교적 사상과도 무관하지 않다. 그것은 화랑도가 제정되어 융성기를 맞이하던 때가 바로 신라 불교가 성장하고 발전해 가던 시기와 동시대이며, 이 시대의 불교는 토속신앙과 융합하여 왕실 중심의 호국 신앙적 색채를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삼국통일기나 국난기에 고승 대덕(大德)들이 나라를 지키는 데 앞장선 사실에서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세속오계를 전수한 원광의 신분이 승려였다는 것이 사군이충의 가르침 속에 불교적 사상이 내재되어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유교적인 면의 충(忠)은 우선 자신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盡己之謂忠,盡心曰忠)에서 출발한다. 자신에게 최선을 다하면 타인에게는 용서하는 마음이 되고 국가에는 헌신하는 마음이 되므로, 충은 곧 나라를 안정시키는 기반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충은 전제국가의 권력자인 왕도 적극 권장하였고, 현대국가의 주권자인 국민도 그것을 중요한 덕목으로 인정하고 있다.
자기에게 충실한 마음이 국가에 대한 헌신적 봉사로 발전하게 되어, 위정자들은 신하에게 바라는 바가 되고 신하들은 도의적으로 지켜야 할 의무가 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불교나 유교의 사상은 사군이충의 이념을 충실히 하는 데 기여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임금에게 충성해야 한다는 가르침이 순전히 외부에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고대 씨족이나 부족 사회 때부터 내재해 오던 공동체적 결속력과 자기 희생적 봉사정신이 충(忠) 사상으로 승화, 발전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 사친이효(事親以孝): 부모를 효성으로써 섬겨야 한다는 뜻이다.
지극한 효성으로 많은 사람의 가슴 속에 깊은 감동을 주는 효녀 지은(知恩)의 이야기가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전해 지는데, 그 주인공이 가난한 서민인 점으로 보아 이러한 효 사상은 신분의 귀천을 떠나 보편적으로 실천되었던 덕목임이 짐작된다.
유교에서는 효가 모든 덕목보다 우선하였기 때문에 효경(孝經)에서는 “무릇 효는 모든 덕의 근본이요, 모든 가르침이 여기서 생겨난다.”고 하였다.
소학(小學)에, 먼저 효도(孝道)를 하고 여력(餘力)이 있으면 시서(詩書)와 무예(武藝)를 익히고 효행(孝行)을 한 다음에 학문(學問)을 하라고 한 것을 보더라도 효(孝)가 백행(百行)의 근원(根源)이고 만행(萬行)의 근본(根本)임을 알 수 있다. 사람은 본능(本能)에 의하지 않고 자각적(自覺的)으로 도(道)와 예(禮)를 실천할 수 있는 자질(資質)을 타고 났다. 그러나 노력(努力)하지 않고서는 그것을 실천(實踐)할 수 없으므로 범속(凡俗)한 사람은 성인(聖人)의 가르침을 본받아 도(道)와 예(禮)를 실천(實踐)하기 위해 힘썼다.
‘자식(子息)이 부모(父母)에게 효도(孝道)하면 그를 본받아 자식(子息)도 효도(孝道)를 할 것인데, 자신(自身)이 불효(不孝)하고 어찌 자식(子息)이 효도(孝道)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라는 옛 선현(先賢)의 말씀에서 효(孝)는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천(實踐)하는 것이 중요하며, 특히 솔선수범(率先垂範)해야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또‘부모(父母)를 사랑하는 자는 감히 남에게 나쁜 짓을 하지 않으며, 부모(父母)를 공경(恭敬)하는 자는 감히 남에게 태만(怠慢)하지 않는다’는 말을 통해, 효(孝)가 수신(修身)과 성의정심(誠意正心)의 산물(産物)로서 인격(人格)을 닦는 첫걸음인 동시에 인격을 완성하는 마지막 걸음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불교(佛敎)에서도 효자보은경(孝子報恩經)이니 효자담경(孝子談經) 같은 효자(孝子)에 대한 고사(古事)를 기록(記錄)한 책(冊)이 있다. 또한 효(孝)에 대한 위경(僞經)으로서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이나 우란분경(盂蘭盆經) 등이 나왔다는 사실은 특히 효(孝)의 윤리(倫理)를 인간세(人間世)의 근본(根本)으로 하는 중국(中國)에 있어서 불교(佛敎)의 중효사상(重孝思想)을 유교(儒敎) 못지 않게 알리려는 노력(努力)이 있었다. 이렇게 효(孝)는 유교(儒敎)의 만덕지본(萬德之本), 백교지유(百敎之由)일뿐 아니라 불가(佛家)의 만계지종(萬戒之宗), 백법지지(百法之至)이기도 하다.
◈ 교우이신(交友以信)
교우이신(交友以信)이란 벗을 믿음으로써 사귀라는 뜻이다.
‘신(信)’은 ‘충(忠)’과 함께 화랑정신(花郞精神)의 가장 중요한 덕목(德目)의 하나가 되고 있다. 충(忠)이 종적(縱的)인 덕목(德目)이라면, 신(信)은 횡적(橫的)인 덕목(德目)으로서 날줄과 씨줄처럼 짜여져 서로 보완관계(補完關係)를 이루고 있다. 유가(儒家)의 오륜(五倫)에서는 붕우유신(朋友有信)이 다섯번째인데 비하여, 세속오계(世俗五戒)에서는 교우이신(交友以信)이 세번째로 되어 있는 것을 보더라도 신라인(新羅人)이 신의(信義)를 얼마나 존중(尊重)했는지 알 수 있다. 특히 화랑도(花郞道)는 동지(同志) 사이에 맺은 약속(約束)을 매우 중시(重視)하여, 신의(信義)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생명까지도 기꺼이 바쳤다.
사다함(斯多含)은 신라(新羅) 24대 진흥왕(眞興王) 때의 화랑(花郞)으로서 15,6세의 어린 나이로 자원(自願)하여 가야국(伽倻國) 정벌(征伐)에 출전(出戰), 빛나는 공훈(功勳)을 세웠다. 17세 되던 해에 생사(生死)를 함께 하기로 언약(言約)한 무관랑(武官郞)이 병(病)들어 죽자, 크게 슬퍼하며 7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고 통곡(慟哭)하다가 세상을 떠나니 많은 사람이 그의 죽음을 애통(哀痛)해 하였다고 한다. 김춘추(金春秋)가 고구려(高句麗)에 담판(談判)을 하러 갔다가 감옥(監獄)에 갇혔을 때, 김유신(金庾信)이 그를 구하기 위해 적지(敵地)로 간 것도 죽음을 함께 하기로 맹서(盟誓)한 언약(言約)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우리는 이같은 예(例)를 통해 신라사람, 특히 화랑도(花郞道)들이 약속(約束)과 신의(信義)를 얼마나 중시(重視)했으며, 그들의 우정(友情)이 얼마나 깊었는지 잘 알 수 있다.
화랑도(花郞道)가 무리를 이루어 수련(修鍊)을 많이 하였던 금강산(金剛山) 일대의 통천지방(通川地方)에는 금란산(金蘭山), 금란굴(金蘭窟) 등 금란(金蘭)이라는 이름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으니, 이를 보더라도 화랑도(花郞道) 사이에 교우이신(交友以信)의 덕목(德目)이 매우 강조(强調)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금란(金蘭)이란 역경(易經)에‘두 사람이 마음을 같이 하면 그 날카로움이 쇠라도 능히 끊을 수 있으며, 마음을 같이 하는 말은 그 향기가 난초와 같이 맑다(二人同心 其利斷金 同心之言 其臭如蘭)’고 한데서 연유(緣由)한 것으로, 우정(友情)의 중요성(重要性)과 그 아름다움을 일컫는 말이다.
◈ 임전무퇴(臨戰無退)
임전무퇴(臨戰無退)란 싸움터에 나가서는 물러서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다.
세속오계(世俗五戒)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귀산(貴山)과 취항(箒項)이 아막성전투(阿莫城戰鬪)에서 임전무퇴(臨戰無退)의 정신으로 용감히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戰死)한 것이 계기(契機)가 되었던 것이다. 화랑도(花郞道)가 제정(制定)된 6세기 중엽(中葉)부터 삼국통일(三國統一)을 이룩하게 되는 7세기 중반까지 약 백여년 동안 신라(新羅)는 크고 작은 전쟁을 여러 차례 치러야 했다. 빈번히 벌어지는 전투에서 승리(勝利)하기 위해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勇氣)와 기필코 승리하겠다는 신념(信念)이 절실(切實)히 요구(要求)되었고, 이 같은 필요에 의해 전쟁(戰爭)터에 나가서는 용감(勇敢)하게 싸워야 한다는 정신이 강조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임전무퇴(臨戰無退)의 교훈(敎訓)은 그 당시 사회와 국가가 요구한 절실한 시대정신이었을 것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열전(列傳)에는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정신으로 몸을 던져 용감히 싸우다가 죽은 화랑(花郞)과 용장의열(勇壯義烈)들의 기록(記錄)이 많이 있다.‘위로 국가를 위하고 아래로 지기(知己)를 위하여 죽는다’고 한 비녕자(丕寧子)나‘의리없이 사는 것은 의리를 위해 죽는 것보다 못하다’고 한 해론(奚論),‘장부는 모름지기 전쟁터에서 죽는 것이니, 어찌 자리에 누워 집사람의 손에서 죽어 옳으랴’고 한 소나(素那)와‘전진함이 있되 후퇴함이 없는 것이 사졸의 본분이니, 장부가 싸움에 임해 죽을지언정 어찌 무리를 따라 쫓겨 가랴’고 한 김영윤(金令尹) 등, 임전무퇴(臨戰無退)의 정신(精神)으로 끝까지 싸우다 장렬(壯烈)하게 전사(戰死)한 예(例)가 수없이 많다.
임전무퇴(臨戰無退)의 계율(戒律) 속에는 국가(國家)의 존립(存立)이 개인의 삶보다 우선(于先)하며, 대(大)를 위해서는 소(小)를 희생(犧牲)할 줄 알아야 한다는 가치관(價値觀)이 나타나 있다. 개인의 삶은 국가라는 큰 울타리 속에서 보호(保護)되고 유지되므로, 나라가 위기(危機)에 처할 때는 국민이 목숨을 바쳐서라도 마땅히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라인이 지녔던 이같은 확고한 국가관(國家觀)과 사생관(死生觀)이 삼국 통일의 중요한 요인이 되고 밑거름이 되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 살생유택(殺生有擇)
살생유택(殺生有擇)이란 생명체(生命體)를 죽일 때는 가림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전수(傳授)받을 때, 귀산(貴山)과 추항(箒項)이 살생유택(殺生有擇)에 대하여 다시 물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아마도 원광(圓光)이 승려(僧侶) 신분(身分)이면서도 살생(殺生)을 금하라고 가르치지 않고 다만 선택하라고 한 것이 뜻밖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에 대해 원광(圓光)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육재일(六齋日)과 봄, 여름철에는 살생(殺生)치 아니한다는 것이니, 이것은 때를 택하는 것이다. 부리는 가축(家畜)을 죽이지 않는다는 것이니 말, 소, 닭, 개와 같은 류(類)를 말한 것이며, 작은 생물을 죽이지 않는 것이니 고기가 한 점도 되지 못하는 것을 말함이다. 이것들은 물건을 택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오직 그 소용되는 것을 많이 죽이지 아니할 것이니, 이것이 가히 세속(世俗)의 선계(善戒)라고 할 것이다.”
살생유택(殺生有擇)의 계율(戒律)에서 우리는 원광(圓光)의 현실주의적(現實主義的) 불교관(佛敎觀)과 실용적(實用的)인 가치관(價値觀)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모든 생명체(生命體)를 가엾게 여겨 가급적이면 살생(殺生)을 피하는 것이 원칙(原則)이지만, 부득이한 경우에는 그 시기(時期)와 종류(種類)와 수량(數量)을 적절(適切)하게 선택(選擇)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육재일(六齋日)과 봄 여름을 피하고, 작고 어린 것을 피하며, 필요 이상으로 죽이지 말라는 가르침 속에는 생명존중(生命尊重) 사상(思想)과 함께 현실적(現實的) 효용성(效用性)을 중시(重視)하는 삶의 지혜(智慧)가 담겨 있다.
육재일(六齋日)이란 불교(佛敎)에서 매월(每月) 재계(齋戒)해야 하는 날로서 8일, 14일, 15일, 23일, 29일, 30일이 이에 해당되는데, 이날은 살생(殺生)을 금(禁)하고 근신(謹身)했다고 한다. 생명(生命)을 빼앗는 것이 근본적(根本的)으로 죄(罪)가 된다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봄철과 여름철에 살생(殺生)을 하지 말라는 것은 그때가 만물(萬物)이 소생(蘇生)하고, 생장(生長)하며, 번식(繁殖)하는 시기(時期)이므로 종족(種族) 보존(保存)을 위해서도 살생(殺生)은 피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작고 어린 것을 죽이는 것도 생명의 질서(秩序)와 자연(自然)의 섭리(燮理)를 거스르는 잔혹(殘酷)한 행위(行爲)일 뿐 아니라, 경제적(經濟的)인 측면(側面)에서도 손해(損害)가 되는 까닭이다.
유가(儒家)에서도 이러한 사상(思想)은 변함이 없으니, 동식물(動植物)을 가려서 살생(殺生)하는 것이 윤리적(倫理的)인 면 뿐 아니라 실제 생활에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맹자(孟子)에 그물은 반드시 4촌(寸)의 그물 눈을 가진 것을 사용하였으며, 물고기가 한 자를 넘지 못하면 시장(市場)에 팔 수 없었고, 초목(草木)의 잎이 말라 떨어진 이후에야 도끼를 들고 산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許諾)하였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모든 생명체(生命體)는 근본적(根本的)으로 귀천(貴賤)이 없으며, 독자적(獨自的)으로 살아갈 권리(權利)가 있다. 그러므로 나무와 풀, 벌레와 짐승, 인간(人間)과 자연(自然)이 조화(調和)를 이루며 함께 어우러져 사는 것이 조물주(造物主)의 뜻이요, 우리의 의무(義務)일 것이다. 살생유택(殺生有擇)의 정신(精神)은 예나 지금이나 꼭 필요한 덕목(德目)이라 하겠다.
원광법사(圓光法師)에는 아주 신기(神技)한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처음에 중(僧)이 되어 불법(佛法)을 배우던 중, 나이 삼십에 이르러 한가한 곳에서 수도(修道)를 하려하여 삼기산(三岐山)에 홀로 거처(居處)하였다. 이런 수도생활(修道生活)에 들어간 지 4년이 지날 무렵에 한 중(僧)이 와서 그 근처(近處)에 따로 절을 짓고 있는지가 2년이 되었을 때의 일이었다. 이 새로 들어온 중(僧)은 수도(修道)를 하는 방행(方行)이 강맹(强猛)함을 좋아했고, 따라서 자연히 주술(呪術)을 좋아 닦고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법사(法師)가 밤에 독좌(獨坐)하여 송경(誦經)하고 있을 때였다. 홀연히 한 신(神)이 나타나서 법사(法師)의 이름을 부르며,“잘도한다. 잘도 한다. 그대의 수행(修行)이야말로 대개 수행하는 자는 많지만 법(法)과 같이 하는 자는 드물다.”고 칭찬(稱讚)을 하면서 나타났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이상한 부탁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지금 이웃에 있는 중(僧)을 보니 곧장 주술(呪術)을 닦으나 얻는 바는 없을 것이고, 그 시끄런 소리가 남의 정념(靜念)을 방해(妨害)한다. 또 그 처소(處所)가 나의 다니는 길을 방해(妨害)하기 때문에, 지나다닐 때마다 매양(每樣) 미운 마음이 날 정도이다. 법사(法師)는 나를 위하여 그에게 말하여 다른 곳으로 옮기도록 했으면 한다.”고 말하곤 사라졌다.
이에 법사(法師)가 가서 말하기를“내가 어제밤에 신(神)의 말을 들으니, 스님이 다른 곳으로 옮겼으면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재앙(災殃)이 있을 것 같다.”고 말을 건넸다. 그러자 스님은 대답(對答)하기를“수행이 높은 사람도 마귀에게 홀리는가?! 법사(法師)가 어찌 여우 귀신의 말에 근심을 하는가?(法師何憂狐鬼之言乎)”라고 하였다.
이 이야기에는 주인공(主人公)이 세 명이 등장(登場)하고 있다.
그 하나는 원광법사(圓光法師)이고, 또 하나는 삼기산(三岐山)의 신(神)으로 묘사(描寫)된 여우이고, 또 하나는 바로 원광법사(圓光法師) 옆에서 수련(修練)을 하고 있는 비구(比丘)스님이다.
흥미(興味)있는 것은 이 삼기산신(三岐山神)인 여우에 대해서 비구스님이 정체(正體)를 잘 알고 있으면서 도전적(挑戰的)인 자세(姿勢)를 나타내고 있다는 점이다. 나중에 보겠지만 이 삼기산신(三岐山神)은 화약(火藥)에 관한 최고의 경지(境地)에 간 신(神)임이 들어나고 있다. 그런데 이 비구스님이 도대체 어떤 공부(工夫)를 했길래, 짜증이 날 정도로 시끄러운 소리를 낸다고 이사(移徙)해 줄 것을 요청(要請)하는 것이었을까? 십중팔구(十中八九)는 화약(火藥)을 터트리며, 이를 계속 발전(發展)시키는 공부(工夫)를 하고 있었으리라는 점이다.
그래서 이 화약(火藥)의 대가(大家)인 삼기산신(三岐山神)이 거주(居住)하는 곳에 와서‘네가 터득(攄得)한 것 나도 할줄 안다’는 도전적(挑戰的)인 행위(行爲) 말하자면 화약(火藥)을 계속 터트리는 일에 삼기산신(三岐山神)은 그만 짜증이 났었고, 원광법사(圓光法師)에게“애숭이가 시끄럽게 하니 좀 멀리 사라지게 충고(忠告) 좀 해달라.”고 부탁(付託)을 한 것이 이 이야기의 전반부(前半部)의 내용인 것이다.
아무튼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계속된다.
그날 밤에 또 신(神)이 와서 말하기를“비구(比丘)가 무엇이라고 대답(對答)하더냐?”법사(法師)가 신(神)의 노기(怒氣)를 두려워하여 대답(對答)하되,“아직 말하자 못하였으나 만일 굳이 말한다면 어찌 감히 듣지 않으리오?”고 하였다. 그러자 신(神)이 말하기를“내가 이미 (두 사람이 서로 대화한 내용을) 들었다. 법사(法師)는 어찌하여 없는 말을 보태어서 말하는가? 다만 잠자코 내가 하는 바를 보라.”하고 나가버렸다.
그날 밤중에 벼락과 우레 소리가 났었다. 그 이틑날 가보니 산(山)이 무너져 중(僧)의 살던 절을 묻어 버린 대 사태(事態)가 난 것이었다. 신(神)이 와서“법사가 보기에 어떠하냐?”대답(對答)하여“매우 놀랐다.”고 하였다. 그러자 신(神)은 놀라운 말을 하기 시작한다.
“내 나이 3,000년에 가깝고 신술(神術)이 이 세상 신(神)들 가운데서도 가장 장(壯)하다. 이만 일은 적은 것이니 어찌 놀랄거리가 되랴. 또 장래(將來)의 일도 알지 못하는 것이 없고 천하(天下)의 일도 통달(通達)치 못함이 없다.”고 이야기를 꺼내고 있다는 점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 원광서학(圓光西學)에 나오는 이 이야기가 흥미(興味) 있는 것은 원광법사(圓光法師)에게 나타난 신(神)이 분명 화약(火藥)을 써서 산을 무너트리고 있음을 묘사(描寫)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위력(威力)이 산이 무너질 정도로 화약(火藥)임을 말하고 있음이 들어나는데, 더욱 흥미있는 것은 나중에 이 기록(記錄) 끝에 이미 이 신(神)의 정체(正體)가 검은 여우 임이 밝혀지고 있는데, 원광법사(圓光法師) 옆에서 수련(修練)하다가 원광법사(圓光法師)의 충고(忠告)를 어겨 결과적(結果的)으로 절과 더불어 묻혔던 비구 스님 역시 이미 검은 여우 임을 알고 있었기에,“법사(法師)가 어찌 여우 귀신에게 홀리는가”하고 말을 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이야기의 전반부(前半部)가 화약(火藥)의 신(神)인 삼기산신(三岐山神)에 도전장(挑戰狀)을 낸 비구니와의 사건에 의해 원광법사(圓光法師)와 삼기산신(三岐山神)이 인연(因緣)이 맺어지게 되는 과정을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정작 가장 놀라운 이야기는 이 삼기산신(三岐山神)의 나이가 3,000년 즉 고조선(古朝鮮) 초기(初期) 때부터 있었던 신(神)이라고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신(神)이 가지고 있는 신비(神秘)한 도술(道術)을 우리는 조선 신도(神道)라고 칭할수 있겠다. 아무튼 이런 인연(因緣)에 의해 만난 원광법사(圓光法師)에게 삼기산신(三岐山神)은 적극적(積極的)으로 중국(中國)에 건너가 불법(佛法)을 배울 것을 권유(勸誘)하기 시작한다. 그 말의 내용은 이러했다.
“지금 생각건대 법사(法師)가 이곳에 있어, 비록 자신에게 이로운 행실(行實)은 있겠으나, 남을 이롭게 하는 공(功)은 없으니, 현재(現在)에 이름을 높이 들어내지 않으면 미래(未來)의 승과(勝果)를 거두지 못할 것이다. 어찌 불법(佛法)을 중국(中國)에서 배워 와서 지금으로부터 먼 미래의 혼미(昏迷)한 동해(東海) 주변(周邊)의 사람들을 지도하지 않느냐”하였다. 이에 원광법사(圓光法師)가 말하기를 “중국(中國)에 도(道)를 배우고자함은 본시 소원(所願)이나 해륙(海陸)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자연 통하지 못할 뿐이다.”고 하니 신(神)이 중국(中國)에서 가서 행할 계교(計巧)를 상세히 이끌듯 그 공부에 귀의(歸依)케 하였다. (神詳誘歸中國所行之計)
이런 원문(原文)에서 제일 염두(念頭)에 두어야할 것은 바로 권유(勸誘)하듯 귀의(歸依)케 하였다는 내용이다. 이는 스승과 제자로 두 사람이 맺어져 있음을 뜻한다. 그런데 원광법사(圓光法師)에게 삼기산신(三岐山神)이 중국(中國)에서 써먹을 계교(計巧)를 가르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가 피력(披瀝)되어 있는데 그 내용이 무척 놀라운 것이라는 점에서 우리의 눈을 번쩍 뜨게 한다.
수행(修行)의 효과(效果)가 개인(個人)이 아니라, 사회적(社會的)인 이로움을 위해서 자신은 가르침을 주는 것이며, 특히 원광법사(圓光法師)가 당대(當代)에 이름을 드높히 올려야만, 먼 훗날 그 결과를 거두게 하는 그런 공부를 가르치고, 더욱이 그 효과는 먼 훗날 혼미(昏迷)한 동해인(東海人)을 지도(指導)하기 위함이다.(導群迷於東海)로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즉 삼기산신(三岐山神)이 말하고 있는 것은 원광법사(圓光法師)에게 가르침을 주는 이유는 지금은 불법(佛法)의 세상이니, 중국(中國)에서 불법(佛法)을 배워 일단 세계적(世界的)인 승려(僧侶)로써 명성(名聲)을 쌓으라. 그러면, 그때부터 법사(法師)의 행실(行實)을 본 사람들이, 나 삼기산신(三岐山神)으로부터 전수(傳授)된 비법(秘法) 화약(火藥)에 대한 내용을 사람들이 기억(記憶)하고, 이것이 앞으로 동해(東海)의 주변(周邊)에 있는 사람들이 지닌 혼미(昏迷)함을 제도(濟度)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놀랍게도 이 삼기산신(三岐山神)이 나중에 보여준 화약(火藥)의 힘은 우리들이 원자폭탄(原子爆彈), 수소폭탄(水素爆彈)이라고 하는 것과 동일(同一)하며, 또 이 원폭(原爆)의 최초(最初) 희생자(犧牲者)가 일본(日本)이기 때문에, 그의 예언(豫言)은 그야말로 동해인(東海人)에게 하는 이야기임이 들어나는 것이다. 오늘날은 북한(北韓)의 핵(核) 문제까지도 관련(關聯)되어 있기 때문에, 이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記錄)은 참으로 기이(奇異)하다 하지 않을수 없는 것이다.
아무튼 이처럼 삼기산신(三岐山神)과 원광법사(圓光法師)는 스승과 제자 사이로 맺어졌으며, 삼기산신(三岐山神)에게 공부(工夫)를 마친 원광법사(圓光法師)는 중국(中國)으로 유학(留學)을 떠나게 된다.
법사(法師)가 그 말대로 하여 중국(中國)에 가서 11년을 머물면서 삼장(三藏)에 널리 통하고, 겸하여 유학(儒學)을 배웠다.
이런 원광서학(圓光西學)의 이야기는 결국 원광법사(圓光法師)가 중국에 유학(留學)하는 것은 모두 이 삼기산(三岐山)의 신(神)으로 설명(說明)이 되어 있는 사람의 지도(指導)와 후원(後援)에 의해서 일어났음을 일수가 있는데, 우리는 그가 배운 공부가 결국은 화약(火藥)에 대한 내용과 아울러서 여러 도술(道術)이었음을 눈치 챌 수가 있는 것인데, 그중에 원광법사(圓光法師)가 완벽히 터득(攄得)한 것은 바로 오늘날 표현으로 말하자면 홀러그램(hologram:j입체영상)을 만들어내는 공부(工夫)였음이 들어난다. 여러 공부(工夫)를 마치고 호구산(虎丘山)에 들어갔을때, 한 신자(信者)가 강의(講義)를 신청(申請)해서 강의(講義)를 하기 시작하자 그 명성(名聲)이 알려져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었음을‘가시덤풀을 헤치고 바람을 메고 오는 자가 서로 이어 고기비늘과 같았다’라고 말을 할 정도에 이르렀던 것이다.
때마침 이때 중국(中國)은 수(隋)나라의 통일과정(統一過程)이었다.
자연 수군(隋軍)이 양도(揚都)에 처들어 가는 과정에서 원광법사(圓光法師)는 난병(亂兵)을 만나서 살해(殺害)를 받게 될 위기(危機)에 처해 있었다. 그런데 이때 수군(隋軍)의 대장(大將)이 사탑(寺塔)이 불타는 것을 바라보고 뛰어가 구하려고 한즉, 도무지 불타는 광경(光景)은 없고 오직 원광(圓光)이 탑(塔) 앞에 결박(結縛)되어 장차 피살(被殺)되려고 하였다. 대장(大將)이 괴상히 여기어 곧 풀어놓으니 위기(危機)에 임하여 원광법사(圓光法師)가 신통능력(神通能力)을 부리는 재주가 비범(非凡)함이 들어난다고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묘사(描寫)되어 있는 것이다.
원광법사의 홀러그램 창출 능력은 또한번 삼국유사에 묘사되어 있다.
원안(圓安)이 일찍이 원광법사(圓光法師)의 사실을 적기를“본국왕(本國王)이 병환(病患)이 들어 치료(治療)하여도 멸하지 아니하므로 원광(圓光)을 청하여 궁중(宮中)에 들어와 따로 있게 하고 밤에 두 차례로 심오(深奧)한 법을 설(說)케 하고 계(戒)를 받아 참회(懺悔)하게 하니 왕이 크게 신봉(信奉)하였다.
어느때 초야(初夜)에 원광(圓光)의 머리를 보매 금색(金色)이 찬란(燦爛)하고 일륜(日輪)의 상(像)이 그의 몸을 따라 왔다. 왕후(王后)며 궁녀(宮女)가 또한 함께 보았다. 이로부터 승심(勝心)을 다시 일으켜 병소(病所)에 머믈게 하니 오래지 않아 병(病)이 차도(差度)가 있었다고 기록(記錄)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원광법사(圓光法師)가 삼기산신(三岐山神)에게 화약(火藥)에 대한 공부(工夫)를 하였다는 것은 신라(新羅) 사회에 유명한 소문(所聞)이었던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이는 이미 원광법사(圓光法師)가 삼기산(三岐山)에 수도(修道)하고 계실적에 비구스님이 삼기산신(三岐山神)에게 도전(挑戰)할 정도로 이미 삼기산(三岐山)에는 화약(火藥)에 최고(最高)가는 도인(道人)들과 신(神)들이 있다는 소문(所聞)이 났었고, 따라서 원광법사(圓光法師)가 중국(中國)에 유학(留學)가기 전에 삼기산(三岐山)에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그가 화약(火藥)에 대한 고인(高人)이라는 것을 자연히 공표(公表)하는 것과 같았던 것이다.
세계적(世界的)인 승려(僧侶)인 원광(圓光)이 귀국(歸國)하자, 젊은이나 늙은이를 막론하고 기뻐하였으며 신라왕(新羅王) 진평왕(眞平王) 자신이 직접 대면해 공경(恭敬)하고 성인(聖人)과 같이 우러러 보았다.(老幼相欣 新羅王金氏面申虔敬 仰若聖人)고 삼국유사(三國遺事)는 전하고 있는데, 이 원광법사(圓光法師)에게 직접 계(戒)를 요청(要請)한 사람은 화약(火藥)을 다루는 사람인 귀산(貴山)과 추항(箒項)임이 들어나기 때문이다.
이런 원광법사(圓光法師)가 귀국(歸國) 후에 제일 먼저 찾아본 사람이 바로 삼기산(三岐山)의 신(神)인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하겠다. 왜냐하면 삼기산(三岐山)의 신(神)이 중국(中國) 유학(留學)을 권유(勸誘)했을 뿐만 아니라, 실제 원광법사(圓光法師)가 중국(中國)에서 부린 도술(道術)인 홀러그램(hologram) 창출(創出) 능력(能力)을 이미 예(例)를 들은 절이 불타는 모양을 수군(隋軍) 대장(大將)에게 보인 것 따위 바로 삼기산신(三岐山神)에게 배웠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원광법사(圓光法師)가 귀국(歸國)후에 삼기산(三岐山)의 신(神)을 만났을 때의 일을 삼국유사(三國遺事)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법사(法師)가 신(神)에게 감사코자, 전(前)에 거주(居住)하던 삼기산(三岐山)의 절에 갔더니 밤중에 신(神)이 또 와서 이름을 불러 말하기를“해륙의 도정을 어떻게 같다 왔느냐?”하거늘 대답(對答)하여“신(神)의 홍은(鴻恩)을 입어 평안(平安)이 도착(到着)하였소이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삼기산신(三岐山神)은“나도 또한 같은 신(神)에게 계(戒)를 준다.”고 함이 기록(記錄)되어 있다. 다시 말하여 삼기산신(三岐山神)으로 내려오는 고조선(古朝鮮) 이래의 신도(神道)라는 법맥(法脈)과 불법(佛法)을 원광법사(圓光法師)는 둘다 이어가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 두 법맥(法脈) 다시 말하면 불법(佛法)의 세계(世界)와 신도(神道)의 세계(世界)가 윤회(輪廻)와 세대(世代)를 넘어 계속 서로 돕자는 생생상제(生生相濟)의 약속(約束)을 하게 된다.
(神曰 吾亦授戒於神 仍結生生相濟之約)
이는 실로 인류 역사상(歷史上) 가장 놀라운 약속(約束)임에 분명하다.
이처럼 원광법사(圓光法師)는 삼기산신(三岐山神)에게 화약(火藥)을 다루는 신도(神道)의 수행인(隨行人)으로써의 계율(戒律)을 받은 것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그 계율(戒律)의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전혀 언급(言及)이 되고 있지는 않고 있다. 이런 수계(受戒)를 받은 후, 원광법사(圓光法師)는 삼기산신(三岐山神)에게 무척 어려운 청(請)을 하게 된다.
그것은 신도(神道) 가문(家門)의 스승이 되는 삼기산신(三岐山神)의 진면목(眞面目)을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이 청(請)은 따지고 보면 묘(妙)한 부탁인 것이다. 신도(新道) 가문(家門)에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다양한 형태(形態)도 둔갑(遁甲)을 할 수 있음은 물론, 어떠한 모습일지라도 홀러그램(hologram)으로써 예(例)를 들면 절이 불타고 있는 모습등을 쉽게 보여 줄수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원광법사(圓光法師)의 요청(要請)을 스승의 최고의 능력(能力)을 보여 주십시오로 해석(解釋)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이를 원문(原文)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법사(法師)가 청(請)하되“신(神)의 진용(眞容)을 볼 수 있겠습니까?” 하니, 신(神)이 말하기를 “내일(來日) 동쪽 하늘가를 바라보라.”고 하였다. 법사(法師)가 이튿날 바라보니 큰 팔뚝이 구름을 뚫고 하늘 끝에 접하여 있었다. (又請曰 神之眞容 可得見也 神曰 法師若見我形 平旦可望東天之際 法師明日望之 有大臂貫雲 接於天際 (우청왈 신지진용 가득견야 신왈 법사약견아형 평단가망동천지제 법사명일망지 유대비관운 접어천제)
이는 구름을 뚫고 나갈 정도의 폭약(爆藥)은 분명 원수폭(原水爆)에 해당하는 화약(火藥)이 아닐 수 없다. 놀라운 것은 저 고조선(古朝鮮) 초기부터 있었던 삼기산신(三岐山神)이 원광법사(三岐山神)에게 “중국에 유학하러 가라!”고 권유(勸誘)한 본 뜻은 세계적(世界的)인 승려(僧侶)라는 명성(名聲) 아래, 후세(後世)의 동해인(東海人)들이 혼미(昏迷)함을 구제하려는 것에 그 뜻이 있었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원폭(原爆)의 피해를 입은 일본인(日本人)은 바로 동해(東海) 주변(周邊)에 있는 사람들이 아닌가. 또 북한(北韓)의 핵(核) 역시 동해(東海) 주변(周邊)이 아닌가. 이런 면에서 볼 때, 삼기산신(三岐山神)은 좁게는 동해인(東海人), 넓게는 미래(未來)의 인류(人類)에게 중요한 예언(豫言)을 한 것이다.
“앞으로 내가 사용했던 핵무기(核武器) 때문에 반드시 동해(東海) 사람들이 피해(被害)를 보게 될것이다. 따라서 화약(火藥)에 대한 올바른 견해(見解)와 계율(戒律)을 원광법사(圓光法師)를 통해서 전해지는 이야기를 통해서 후세(後世)에 영원히 보여주기 위해서 제자(弟子)인 원광(圓光)에게 홀러그램(hologram)의 비법(秘法)을 전수(傳受)했던 것이다.”라는 행간(行間)의 의미(意味)가 있는 것이다.
이 지구상(地球上)에는 신비(神秘)한 예언(豫言)이 있지만 예(例)를 들어 노스트라다무스(Nostradamus)의 예언(豫言)과 에드가 케이스(Edgar Cayce)의 예언(豫言) 등이 있지만, 인류(人類)는 핵무기(核武器)를 가지게 될 것이다. 따라서 화약(火藥)에 대한 계율(戒律)이 필요하다는 의미(意味)에서 예언(豫言)을 내리고 효과적(效果的)인 대처방안(對處方案)을 강구(講究)한 기록(記錄)은 매우 드문데 바로 삼기산신(三岐山神)은 예외(例外)였던 것이다.
이런 위력(威力) 핵(核) 폭탄(爆彈)을 통해 구름까지 닿을 정도의 팔뚝을 내민 위력(威力)을 보인 다음의 이야기를 삼국유사(三國遺事)는 다음과 갈이 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날 밤에 신(神)이 와서 또한 와서 이르기를 법사(法師)는“내 팔뚝을 보았느냐?”대답(對答)하여“보았는데 매우 기이(奇異)하더이다.”라고 하였다. 이로 인하여 삼기산(三岐山)을 속칭 비장산(臂長山)이라 한다. 이 신도(神道)의 세계(世界)의 스승과 제자는 실로 짧은 두 번의 만남 즉 원광(圓光)이 중국으로 떠나기 직전과 귀국(歸國)한 직후의 만남을 합하여 두 번의 만남을 가진 뒤 별리(別離)의 슬픔을 서로 나누는 대화(對話)가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수록(收錄)되어 있다.
그런데 그 내용이 또 신(神)이 이르되,“비록 이 몸이 있다 하여도 그 무상(無常)한 해(害) 즉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므로 내가 머지않아 이 몸을 그 고개에 버릴 터이니 법사(法師)는 와서 기리 가는 혼(魂)을 보내 달라.”고 하였다. 기약(期約)한 날을 기다려 법사(法師)가 가보니 옷 나무 칠(漆)같이 검은 늙은 여우 한 마리가 있어 헐떡이고 숨을 쉬지 못하다가 곧 죽었다.
삼기산신(三岐山神)이 변해서 검은 여우로 변해서 본모습을 들어낸 채 죽었다는 것은 구미호(九尾狐)에 대한 잘못된 이미지(Image)를 남의 비위(脾胃) 특히 남자(男子)의 비위(脾胃)를 잘 맞추면서, 결국에는 몰래 실속(實速)있는 것을 다 빼가는 나쁜 이미지를 품고 있는 현대인(現代人)들에게 분명 부정적(否定的)인 이미지를 준다.
그러나 고대(古代)의 구미호(九尾狐)의 개념(槪念)은 오늘날과는 전혀 달랐었다. 산해경(山海經) 해외동경(海外東經)에 기록(記錄)되어 있듯이“청구국(靑丘國)이 그 북쪽에 있는데 그 곳의 여우는 다리가 넷이고, 꼬리가 아홉이다. 이는 천하가 태평할 때면 세상에 나타나고 상서로움을 예고하는 것이 참으로 기이했다.”로 표현(表現)되어 있는 것이다.
요컨대, 세계평화(世界平和)의 상징(象徵)이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화백(和白) 민주주의(民主主義)를 실현(實現)할 때, 일반시민들이 앉는 푸른 언덕의 나라 오늘날 표현(表現)으로 하면 직접적(直接的) 민주주의(民主主義)로써 세계평화(世界平和)를 실현(實現)할 때, 나타내는 성스런 짐승으로 인식(認識)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면에서,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삼기산신(三岐山神)이 구미호(九尾狐)처럼 묘사(描寫)되고 있는 것은 결국은“세계평화를 위해서 원폭(原爆)이 있는 환경 속에서도 인류(人類)의 상서스러움을 예언(豫言)하는 뜻에서 원광법사(圓光法師)에게 자신의 팔뚝을 원폭(原爆) 광경(光景)을 보여준 것임을 밝히는 장면을 묵시적(黙示的)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인 것이다.
이런 삼기산신(三岐山神)과 원광법사(圓光法師)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가 전개(展開)된 연후에, 세속오계(世俗五戒)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는 점에 우리는 눈을 돌려야 한다.
왜냐하면,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적혀있는 내용은 원광법사(圓光法師) 자신은 조선신도(朝鮮神道) 원폭(原爆)을 비롯한 일체의 화약(火藥)을 전수 받았고 또 신도(神道)의 계율(戒律)을 받았지만, 그 내용은 전해져 내려오지 않고 있다.
요컨대, 화약(火藥)에 대한 계율(戒律)에서 세속인(世俗人)이 지켜야할 오계(五戒)가 있는 반면, 조선(朝鮮) 신도(新道) 내부(內部)에서 지켜야하는 신도(神道)의 계율(戒律)이 따로 있었던 것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 원문(原文)에는 화랑오계(花郞五戒)란 말이 없다. 단지 세속오계(世俗五戒)란 말이 있을 뿐인 것이다. 원광법사(圓光法師)가 화약(火藥)과 관련된 삼기산신(三岐山神)의 제자(弟子)라는 것은 워낙 신라사회(新羅社會)에 유명(有名)한 일화(逸話)였기 때문에, 원광(圓光)은 화약(火藥)을 다루는 세속인(世俗人)에게 오계(五戒)를 내린 것에 불과한 것이 삼국유사(三國遺事) 기록(紀錄)에는 들어나는 것이다.
이제 이 세속오계(世俗五戒)를 받은 귀산(貴山)과 추항(箒項)등 신라(新羅) 화랑(花郞)들은 그 이름이 곧 그들의 사회적 의지나 사회적 역할과 관련해서 이름을 붙이는 관습(慣習)이 있었다. 이런 면에서 보면, 귀산(貴山)은‘산맥(山脈)의 흐름을 귀(貴)하게 여겨야한다’는 뜻이고, 또 추항(箒項)은‘산의 고개와 같은 목을 쓸어버린다’는 이름이다.
이런 이름을 보아서 이들은 오늘날로 말하자면 공병(工兵) 역할(役割)을 하는 것임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이런 역할(役割)이기 때문에 자연히 그들은 화약(火藥)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고, 군(軍) 복무(服務)를 하더라도 화약(火藥)을 써야하는 입장에 있었으리라고 여겨지는 것이다. 따라서 세속오계(世俗五戒)라고 칭해지는 것은 바로 포괄적(包括的)인 모든 화랑(花郞)이 아닌, 화약(火藥)을 다루는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계율(戒律)이었음이 뚜렷이 나타난다고 하겠다.
이 기록(記錄)에서 이들이 사량부(沙梁部) 사람이라고 소개(紹介)되어 있는데, 특별히 유의(有意)하여야한다. 왜냐하면, 신라(新羅)의 여섯 기능(技能) 부족(部族) 가운데 사량부(沙梁部)란 바로 신라(新羅)로 몰려드는 외국(外國)의 귀족(貴族) 자체(自體)들 끼리 친분(親分)을 적극적(積極的)으로 맺어주는 부족(部族)으로써 이를 총괄(總括)하는 직책(職責)이 바로 갈문왕(葛文王)이었기 때문이다.
신라왕(新羅王)들은 이 사량부(沙梁部)에 의해서 친밀집단(親密集團)이 된 두 부족장(部族長)이 결혼(結婚)을 해야만 성골(聖骨)로 인정(認定)하고, 성골(聖骨)에서만 왕(王)을 선출(選出)하는 것이 관례(慣例)였다.
두 왕(王)이 싸우면, 그 휘하(麾下)의 백성(百姓)은 고래 싸움에 새우 등터지는 격으로 많은 피해를 보기 때문에, 우리는 외부(外部)로부터 흘러 들어온 왕들도 받아 주는 이민(移民) 자유국(自由國)이다. 단 우리는 왕들끼리 싸우는 것을 싫어하는 화백(和白) 민주주의(民主主義)를 펼치는 나라이다. 따라서 우리는 왕족(王族)끼리 화해(和解)의 결혼(結婚)을 할 경우만 이를 성스런 뼈다귀(성골(聖骨)로 인정(認定)하는 것이고, 이들에게서 왕(王)을 선출(選出)한다는 정치(政治) 인류학적(人類學的)인 지혜(智慧)를 신라(新羅) 사회(社會)는 지녔던 것이다.
아무튼 이런 외부(外部)에 흘러 들어온 부족장(部族長)들끼리의 결혼(結婚)이 성립(成立)하려면, 그 전에 부족(部族)의 귀족자제(貴族子弟)들이 서로 친교(親交)함이 있어야 하고, 이럴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화약을 다루는 공병(工兵)들의 상호교류(相互交流) 방식이 아닐수 없다.
다시 말해 이 살상력(殺傷力)있는 화약(火藥)을 어찌 다루어야한단 말인가. 만약 새로 유입(流入)된 부족(部族)들끼리 서로 교류(交流)하다가 다툼이 있을 때, 우리들이 하는 일은 화약(火藥)을 다루는 사람들 끼리의 교류(交流)인데, 이 폭약(爆藥)으로써 싸울 수 있단 말인가 하는 고뇌(苦惱)가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삼국유사(三國遺事) 원문(原文)에는‘바른 마음을 먹지 않으면, 욕(辱)을 면치 못할 것이 아닌가’하는 현실적(現實的)인 고민(苦悶)을 한 것이다.
이때 원광법사(圓光法師)가 귀국(貴國)하여 가슬갑(嘉瑟岬)에 머물러 있다 함을 들었다. 그래서 귀산(貴山)과 추항(箒項)은 원광법사(圓光法師)에게 찾아가기를 결심하는 장면이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다음과 같이 묘사(描寫)되어 있는 것이다.
두 사람이 찾아가서 말하기를“세속의 선비가 우매하여 지식이 없으니 원컨대 일언(一言)을 주시어 종신(終身)의 계(戒)를 삼게 하소서”
이 말에서 우리가 제일 유념(留念)해야하는 말이“우리는 지식(知識)이 없다.”고 고백(告白)을 했다는 점이다. 이 말을 현대(現代)에도 적용(適用)이 된다. 도대체 우리가 핵무기(核武器)를 통제(統制)할 무슨 지식(智識)이 있단 말인가. 이런 요구(要求) 앞에 내려진 것이 바로 세속오계(世俗五戒)이다. 요컨대 이는 화약(火藥)을 세속(世俗)에서 다룸에 있어 필요한 다섯가지 계율(戒律)의 줄임말인 것이다.
원광법사(圓光法師)는 다음과 같이 계율(戒律)을 내렸다.
◉ 화약으로써 최고 통치권을 범하지 말라. : 사군이충(事君以忠)
◉ 화약으로써 인류에게 친밀감을 주는 인류를 키우는 문화와 자연을 파괴치 말라. : 사친이효(事親以孝)
◉ 화약으로써 동료를 살해하지 말라. : 붕우유신(朋友有信)
◉ 화약은 그 본질상 한번 사용하면 물릴 수 없으니, 사용할 때에는 반드시 성취할 것을 이루어야한다. : 임전무퇴(臨戰無退)
◉ 화약으로써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를 살상할 때에는 각별한 선택이 필요하다. : 살생유택(殺生有擇)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전해져 내려오는 이 이야기는 인류(人類)가 어찌 화약(火藥)을 다루어야 하는가? 함에 대한 사전(事前)의 서사(徐事)가 있었음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 世(인간 세/대 세)는 ❶회의문자로 卋(세)의 본자(本字)이다. 세 개의 十(십)을 이어 삼십 년을 가리켰으며 한 세대를 대략 30년으로 하므로 세대(世代)를 뜻한다. 삼십을 나타내는 모양에는 따로 글자가 있으므로 이 글자와 구별하기 위하여 모양을 조금 바꾼 것이다. ❷상형문자로 世자는 ‘일생’이나 ‘생애’, ‘세대’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世자는 나뭇가지와 이파리를 함께 그린 것이다. 世자의 금문을 보면 나뭇가지에서 뻗어 나온 새순이 그려져 있었다. 그래서 世자의 본래 의미는 ‘나뭇잎’이었다. 나무는 일 년에 한 번씩 싹을 틔운다. 나뭇잎이 새로 돋는 것을 보고 봄이 오는 것을 알 수 있었으며 나뭇잎이지는 것을 보며 한해가 끝나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世자는 후에 사람의 생애에 비유해 ‘생애’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世자가 가차(假借)되면서 소전에서는 여기에 艹(풀 초)자와 木(나무 목)자를 더한 葉(잎 엽)자가 ‘나뭇잎’이라는 뜻을 대신하게 되었다. 그래서 世(세)는 (1)지질(地質) 시대(時代)의 구분(區分)의 한 단위(單位). 기(紀)를 잘게 나눈 것 (2)일부(一部) 국가(國家)에서) 왕조(王朝)의 임금 순위(順位)를 나타내는 말. 대(代). 이세(二世) 등의 뜻으로 ①인간(人間) ②일생(一生) ③생애(生涯) ④한평생 ⑤대(代), 세대(世代) ⑥세간(世間: 세상 일반) ⑦시대(時代) ⑧시기(時期) ⑨백 년(百年) ⑩맏 ⑪세상(世上) ⑫성(姓)의 하나 ⑬여러 대에 걸친 ⑭대대(代代)로 전해오는 ⑮대대(代代)로 사귐이 있는 ⑯대를 잇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대신할 대(代), 지경 역(域), 지경 경(境), 지경 계(界), 지경 강(疆)이다. 용례로는 세대(世代), 세상(世上), 세상에 흔히 있는 풍속을 세속(世俗), 그 집에 속하는 신분이나 업무 등을 대대로 물려받는 일을 세습(世習), 조상으로부터의 대대의 계통을 세계(世系), 주로 명사 앞에 쓰여서 세상에서 흔히 말함의 세칭(世稱), 온 세상이나 지구 상의 모든 나라를 세계(世界), 세상의 풍파를 세파(世波), 세상의 돌아가는 형편을 세태(世態), 숨어 살던 사람이 세상에 나옴을 출세(出世), 현실을 속되다고 보는 처지에서 현실 사회를 일컫는 말을 속세(俗世), 일신 상의 처지와 형편을 신세(身世), 뒷 세상이나 뒤의 자손을 후세(後世), 현재의 세상으로 이 세상을 현세(現世), 죽은 뒤에 가서 산다는 미래의 세상을 내세(來世), 가까운 지난날의 세상을 근세(近世), 잘 다스려진 세상으로 태평한 시대를 청세(淸世), 세상에 아첨함을 아세(阿世), 이 세상에서 살아감을 처세(處世),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세상만사(世上萬事), 자손 대대로 이어져 내림을 세세손손(世世孫孫), 세상의 도의와 사람의 마음을 세도인심(世道人心),세상 물정과 백성의 인심을 세태인정(世態人情), 세상일의 형편을 세간사정(世間事情), 세상이 그릇되어 풍속이 매우 어지러움 세강속말(世降俗末), 대대로 내여 오며 살고 있는 고장을 세거지지(世居之地), 여러 대를 두고 전하여 내려옴 세세상전(世世相傳), 대대로 나라의 녹봉을 받는 신하를 세록지신(世祿之臣), 세상일은 변천이 심하여 알기가 어려움을 세사난측(世事難測), 신세대가 구세대와 교대하여 어떤 일을 맡아 본다는 세대교체(世代交替) 등에 쓰인다.
▶️ 俗(풍속 속)은 회의문자이나 형성문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 圱(속)은 고자(古字)이다. 음(音)을 나타내는 谷(곡; 골짜기, 속)과 사람(人)이 모인 곳에 생긴 풍습이라는 뜻이 합(合)하여 풍속을 뜻한다. 谷(곡)은 물이 잇달아 흘러 그치지 않는 시내, 여기에서는 그와 같이 그치지 않는 사람의 욕심을 뜻한다. 사람이 보통으로 그렇게 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기분에서 지방(地方)마다 펴져 있는 풍습, 흔히 있는 일, 범속함을 말한다. 그래서 俗(속)은 (1)시속이나 세속(世俗) (2)종속환이 등의 뜻으로 ①풍속(風俗), 관습(慣習) ②속인(俗人) ③범속(凡俗)하다(평범하고 속되다) ④평범(平凡)하다, 심상(尋常)하다, 흔하다 ⑤대중적이다, 통속적이다 ⑥저급하다, 품위가 없다, 비속하다 ⑦저속하다(품위가 낮고 속되다), 속되다 ⑧새로운 맛이 없다, 신기하지 않다 따위의 뜻이 있다.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맑을 아(雅)이다. 용례로는 예로부터 전하여 내려와 사람들이 마음속에 깊은 동감을 얻고 널리 퍼진 격언을 속담(俗談), 세간에서 두루 쓰이는 문자로서 정식의 자체가 아닌 한자를 속자(俗字), 현실을 속되다고 보는 처지에서 현실 사회를 일컫는 말을 속세(俗世), 세상의 일반 사람을 속인(俗人), 세속에서 보통 일컫는 칭호를 속칭(俗稱), 본 이름이나 학명 외에 흔히 부르는 속된 이름을 속명(俗名), 속된 학설을 속설(俗說), 속된 세계라는 뜻으로 현실 세계를 속계(俗界), 명예나 이익에 끌리는 속된 마음을 속심(俗心), 세속적인 세상을 속환(俗寰), 민간에 널리 불리던 속된 노래를 속요(俗謠), 세속적인 여러 가지 번거로운 일을 속용(俗用), 속된 물건이나 사람을 속물(俗物), 통속적으로 쓰이는 저속한 말을 속어(俗語), 살아 나가는 데 얽매인 너저분한 세상일을 속루(俗累), 인격과 성품이 저속하고 보잘것 없는 사람을 속한(俗漢), 민간의 풍속을 민속(民俗), 품격이 낮고 속됨을 저속(低俗), 낮고 천한 풍속을 비속(卑俗), 세상에 흔히 있는 풍속을 세속(世俗), 후세에 끼친 풍속을 유속(遺俗), 야만적인 풍속을 만속(蠻俗), 그 지방의 특유한 습관이나 풍속을 토속(土俗), 오래된 옛 풍속을 고속(古俗), 세속에 얽매임을 구속(拘俗), 범용하고 속되어 이렇다 할 특징이 없음을 용속(庸俗), 옛 풍속이나 묵은 풍속을 구속(舊俗), 속태를 벗고 세속을 초월함을 탈속(脫俗), 세속으로 돌아감을 환속(還俗), 아름답고 좋은 풍속을 미풍양속(美風良俗), 중도 아니고 속인도 아니라는 뜻으로 어중간한 것을 두고 이르는 말을 비승비속(非僧非俗), 어떤 고장에 가면 그곳의 풍속을 따르고 지킴을 입향순속(入鄕循俗), 아직도 속된 습관을 버리지 못하였다는 뜻으로 한번 물든 속물근성은 버리기 어렵다는 말을 미능면속(未能免俗), 습관과 풍속은 끝내 그 사람의 성질을 바꾸어 놓는다는 습속이성(習俗移性), 사람은 날 때는 다 같은 소리를 가지고 있으나 성장함에 따라 언어나 풍속이나 습관이 달라진다는 동성이속(同聲異俗) 등에 쓰인다.
▶️ 五(다섯 오)는 ❶지사문자로 乄(오)와 동자(同字)이다. 숫자는 하나에서 넷까지 선을 하나씩 늘려 썼으나 다섯으로 한 단위가 되고 너무 선이 많게 되므로 모양을 바꿔 꼴로 썼다. 五(오)는 나중에 모양을 갖춘 자형(字形)이다. ❷상형문자로 五자는 ‘다섯’이나 ‘다섯 번’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五자는 나무막대기를 엇갈려 놓은 모습을 그린 것이다. 고대에는 나무막대기나 대나무를 일렬로 나열하는 방식으로 숫자를 표기했다. 이것을 ‘산가지(算木)’라 한다. 보통 1~3까지는 막대기를 눕히는 방식으로 숫자를 구분했지만 4를 넘어가면 혼동이 생겼다. 이것을 구별하기 위해 막대기를 엇갈리게 놓는 방식으로 표시한 것이 바로 五자이다. 갑골문에서의 五자는 二사이에 X자를 넣은 방식으로 표기했었지만, 해서에서는 모양이 바뀌었다. 그래서 五(오)는 다섯이나 오(伍)의 뜻으로 ①다섯, 다섯 번 ②다섯 곱절 ③오행(五行: 우주 만물을 이루는 다섯 가지 원소) ④제위(帝位: 제왕의 자리) ⑤별의 이름 ⑥다섯 번 하다, 여러 번 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사람이 지켜야 할 다섯 가지의 떳떳한 도리를 오륜(五倫), 한 해 가운데 다섯째 달을 오월(五月), 그 달의 다섯째 날 또는 다섯 날을 오일(五日), 음률의 다섯 가지 음을 오음(五音), 다섯 가지 곡식(쌀 보리 조 콩 기장)을 오곡(五穀), 다섯 가지의 감각(시각 청각 미각 후각 촉각)을 오감(五感), 다섯 가지 빛깔 곧 푸른빛 누른빛 붉은빛 흰빛 검은빛의 다섯 가지 색을 오색(五色), 다섯 가지 계율이나 계명을 오계(五戒), 퍽 많은 수량을 나타내는 말을 오만(五萬), 다섯 가지 욕심이라는 오욕(五慾), 사람이 타고 난 다섯 가지 바탕을 오사(五事), 짙은 안개가 5리나 끼어 있는 속에 있다는 오리무중(五里霧中), 오십보 도망한 자가 백보 도망한 자를 비웃는다는 오십보백보(五十步百步), 오십이 되어 천명을 안다라는 오십천명(五十天命), 다섯 수레에 가득 실을 만큼 많은 장서라는 오거지서(五車之書), 좀 못하고 좀 나은 점의 차이는 있으나 본질적으로는 차이가 없다는 오십소백(五十笑百), 닷새에 한 번씩 바람이 불고 열흘만에 한번씩 비가 온다는 오풍십우(五風十雨) 등에 쓰인다.
▶️ 戒(경계할 계)는 ❶회의문자로 誡(계)와 통자(通字)이다. 창 과(戈; 창, 무기)部와 양손 모양의 글자로 이루어졌다. 창을 들고 대비하는 모습이 전(轉)하여 경계(警戒)하다의 뜻이 되었다. ❷회의문자로 戒자는 '경계하다'나 '경비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戒자는 戈(창 과)자와 廾(두손 받들 공)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廾자는 무언가를 잡으려고 하는 양손을 그린 것이다. 이렇게 양손을 그린 廾자에 戈자가 더해진 戒자는 창을 들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戒자는 창을 들고 주위를 경계한다는 뜻으로 '경계하다'나 '경비하다'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그래서 戒(계)는 (1)죄악(罪惡)을 저지르지 못하게 하는 경계(警戒)나 훈계(訓戒) 등의 규정으로 신라(新羅) 화랑(花郞)의 세속 오계(世俗五戒)와 같은 따위 (2)승려(僧侶)가 지켜야 할 행동 규범으로 오계(五戒), 십계(十戒), 이백 오십계(二百五十戒), 오백계(五百戒), 사미계(沙彌戒), 보살계(菩薩戒), 비구계(比丘戒) 등이 있음 (3)훈계(訓戒)를 목적으로 하여 지은 한문(漢文) 문체(文體)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경계(警戒)하다, 막아 지키다, 경비(警備)하다 ②조심하고 주의하다, 삼가다(몸가짐이나 언행을 조심하다) ③타이르다, 알리다 ④이르다, 분부(分付)하다 ⑤재계(齋戒)하다(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다) ⑥이르다(어떤 장소나 시간에 닿다), 도달하다 ⑦지경(地境: 땅의 가장자리, 경계), 경계(境界) ⑧경계(警戒), 훈계(訓戒) ⑨재계(齋戒: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부정(不淨)한 일을 멀리함) ⑩승려(僧侶)가 지켜야 할 행동 규범(規範) ⑪문체(文體)의 이름,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징계할 징(懲), 경계 잠(箴), 경계할 경(警), 재계할 재(齋)이다. 용례로는 종교나 도덕상 꼭 지킬 조건을 계명(戒命), 승려가 계를 받은 후에 스승으로부터 받은 이름을 계명(戒名), 불자가 지켜야 할 규범을 계율(戒律), 세상 사람들에게 경계하도록 함을 계세(戒世), 삼가하여 조심하고 두려워 함을 계구(戒懼), 경계하여 삼감을 계신(戒愼), 경계하여 고함으로 글월을 띄워서 일정한 기한 안에 행하도록 재촉하는 일을 계고(戒告), 타일러서 금지함을 계금(戒禁), 여색을 삼가 경계함을 계색(戒色), 마음을 놓지 아니하고 경계함을 계심(戒心), 술 마시기를 삼가고 경계함을 계음(戒飮), 경계하여 꾸짖음을 계책(戒責), 잘못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미리 조심하는 것을 경계(警戒), 지나날 잘못을 거울로 삼아 다시는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하는 경계를 경계(鏡戒), 허물이나 잘못을 뉘우치도록 나무람을 징계(懲戒), 타일러서 경계함을 훈계(訓戒), 집안의 규율을 가계(家戒), 삼가고 조심함을 긍계(兢戒), 지난 잘못을 거울로 삼아 다시는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하는 경계를 감계(鑑戒), 타이르면서 훈계함을 권계(勸戒), 계를 받지 아니함을 무계(無戒), 부정한 일을 멀리하고 심신을 깨끗이 함을 재계(齋戒), 슬며시 들러 비유하는 말로 훈계함을 풍계(諷戒), 눈 앞에서 바로 타이름을 면계(面戒), 잘못 되는 일이 없도록 스스로 경계함을 자계(自戒), 계율을 깨뜨리어 지키지 아니함을 파계(破戒), 베를 끊는 훈계란 뜻으로 학업을 중도에 폐함은 짜던 피륙의 날을 끊는 것과 같아 아무런 이익이 없다는 훈계를 이르는 말을 단기지계(斷機之戒), 한 사람을 벌주어 백 사람을 경계한다는 뜻으로 한 가지 죄와 또는 한 사람을 벌줌으로써 여러 사람의 경각심을 불러 일으킴을 이르는 말을 일벌백계(一罰百戒), 앞의 수레가 뒤집히는 것을 보고 뒤의 수레는 미리 경계한다는 뜻으로 앞사람의 실패를 본보기로 하여 뒷사람이 똑같은 실패를 하지 않도록 조심함을 이르는 말을 복거지계(覆車之戒), 서리를 밟는 경계라는 뜻으로 서리가 내리는 계절이 되면 머지 않아 얼음이 얼므로 조짐을 보아 미리 재앙에 대비하는 경계를 이르는 말을 이상지계(履霜之戒), 장래가 촉망되는 자식은 위험을 가까이해서는 안된다는 경계를 이르는 말을 수당지계(垂堂之戒), 제 분수를 알아 만족할 줄 아는 경계를 이르는 말을 지족지계(止足之戒), 제사를 지내거나 신성한 일 따위를 할 때 목욕해서 몸을 깨끗이 하고 마음을 가다듬어 부정을 피한다는 말을 목욕재계(沐浴齋戒), 계율을 어기면서 부끄러워함이 없음 또는 그 모양을 이르는 말을 파계무참(破戒無慙)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