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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오계(世俗五戒)
신라 진평왕 때 승려 원광이 화랑에게 일러 준 다섯 가지 계율을 말한다.
世 : 세상(一/4)
俗 : 속돌 속(亻/7)
五 : 다섯 오(二/2)
戒 : 경계할 계(戈/3)
세속오계는 신라시대 화랑이 지켜야 했던 다섯 가지 계율이다. 원광법사가 사량부의 화랑 기산과 추항이 가르침을 청하자 내려준 계율이다. 사군이충, 사친이효, 교우이신, 임전무퇴, 살생유택이 그 내용이다. 유교와 불교와 도교 등 세 가지 사상이 전래되기 전부터 신라에 존재하던 풍류와 화랑도 등의 고유사상을 기반으로 하여 공동체의식과 철저한 의리 정신과 숭고한 희생 정신과 그리고 선량한 인간의 정신을 담은 세속오계가 나온 것이다. 그 당시 신라인들이 가지고 있던 시대정신이 당대의 석학인 원광의 탁월한 식견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정리 표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정의
세속오계(世俗五戒)는 신라시대 화랑이 지켜야 했던 다섯 가지 계율을 말한다. ‘화랑오계(花郎五戒)’라고도 한다.
내용
1. 연원
원광법사(圓光法師)가 사량부(沙梁部)에 사는 귀산(貴山)과 추항(箒項)에게 가르친 것에서 비롯되었다. 600년(진평왕 22) 원광이 중국 수나라에서 돌아와 운문산(雲門山) 가실사(嘉瑟寺)에 있을 때 두 사람이 평생의 경구로 삼을 가르침을 청하자, 사군이충(事君以忠), 사친이효(事親以孝), 교우이신(交友以信), 임전무퇴(臨戰無退), 살생유택(殺生有擇) 등 다섯 가지 계율을 가르쳤다. 그 뒤 두 사람은 이를 잘 지켜서 602년 백제와의 아막성(阿莫城) 전투에서 화랑의 일원으로 싸우다 순국하였다.
2. 사상적 배경
이 계율은 특히 화랑들에 의하여 잘 지켜졌고 화랑도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기도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이 오계가 화랑들만의 것이었다고는 볼 수 없다. 또한, 원광이 가르쳤다고 해서 그의 독창적인 견해라고 할 수도 없다. 이는 그 당시 신라인들이 가지고 있던 시대정신이 당대의 석학인 원광의 탁월한 식견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정리 표현된 것이라 하겠다.
신라인들의 이러한 이념의 연원을 밝혀주는 것으로는 '삼국사기' 권4 진흥왕조에 실린 최치원(崔致遠)의 난랑비서(鸞郎碑序)가 있다. 여기에는 “우리나라에 현묘(玄妙)한 도(道)가 있었으니 풍류(風流)라 이른다. 그 교(敎)의 기원은 선사(仙史)에 자세히 실려 있거니와, 실로 이는 삼교(三敎)를 포함한다”라는 구절이 있다.
또한 화랑도는 원광이 세속오계를 가르치기 24년 전인 576년(진지왕 1)에 마련되었는데 이에 앞서 이미 ‘풍류’라는 도가 있었고, 당시까지 비록 유교와 불교와 도교 등 세 가지 사상이 전래되지는 않았으나 이미 신라사회에는 이들 사상을 포함하였다고 할 만한 고유사상이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기록상으로도 유교의 경우는 682년(신문왕 2)에야 국학(國學)이 정식으로 설립되었고, 불교는 527년(법흥왕 14)에 공인되어 아직 얼마 되지 않았으며, 도교 또한 전래되었다는 기록이 없다. 세속오계의 사상적 연원이 된 신라의 고유사상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는 그 당시까지 신라사회를 지배하며 발전해 온 사상적 특성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신라는 지증왕대에 이르러 비로소 정식으로 국호를 제정하고 왕권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이때까지 신라는 신의 뜻에 따라 국정을 운영하는 제정일치(祭政一致)체제의 철저한 신권국가였다. 개국설화에서 나타나듯 신라는 시조왕 박혁거세 탄생의 신이성(神異性)을 믿고 그를 임금으로 봉대(奉戴)함으로써 신의를 따르려 하였으며, 이러한 사상은 그 뒤 왕위승계에 있어 세습제를 따르지 않고 박, 석, 김 3성 중에서 인물 본위로 왕위를 승계하도록 한 사실에서도 분명히 이어진다.
당시 신라인들이 뚜렷하게 간직하였던 이러한 사상을 후세에서는 ‘고신도사상(古神道思想)’이라고 부르거니와, 이 사상은 멀리 고조선 초기의 단군신화에서 비롯되었으며 당시 동북아시아 일대에 보편적으로 퍼져 있던 무속신앙의 형태를 갖추면서 이어져 왔다.
신라의 경우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남해차차웅조(南解次次雄條)에 임금 자신이 무속신앙의 중심인물이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더욱 분명하다. 이렇듯 무속신앙의 형태를 갖추며 이어진 고신도사상의 특징과 사회적 기능은 어떠한 것인가? 이러한 사상적 바탕과 신앙적 형태는 상보작용(相補作用)을 하면서 그 특징과 사회적 기능을 더욱 뚜렷하게 나타낸다.
그 특징으로는 하늘의 뜻[神意]을 받드는 데 있어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개개인의 무구청순(無垢淸純)한 신앙적 심성과, 어떠한 일보다도 소중한 것으로 간주되던 하늘과 조령(祖靈)을 모시는 제의(祭儀)에 대한 지극한 정성(精誠), 그리고 이러한 청순한 심성과 지극한 정성을 통해 이룩된 천신(天神)과 무(巫)와 사람[人]의 종적 관계가 동족공동체라는 횡적 관계로 파급되어 조성된 공고한 공동체 의식 등을 들 수 있다.
3. 사회적 기능
그리고 이러한 특징으로 말미암아 이룩된 사회적 기능으로는 ①고결한 정의감과 신앙적이기까지 한 철저한 의리사상, ②천민(天民) 또는 천손(天孫)이라는 긍지 아래 경천보본(敬天報本)하고 숭조여천(崇祖如天)하였던 투철한 경천숭조사상, ③멸사봉공의 희생정신이 크게 진작된 가운데 군신(君臣)이 더불어 보국안민하고자 하는 동족공동체 의식 등을 꼽을 수 있다.
이상의 여러 가지 사실들은 구체적으로 정치제도 면에까지 작용하여 협동에서의 조화와 개인 심성에서의 순백(純白)을 바탕으로 이룩된 화백제도(和白制度)를 창출하기에 이른다. 이는 당시 신라인들의 사상적 진면목을 여실히 보여 주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세속오계의 바탕이 되었다 하겠다.
4. 세부 내용
세속오계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사군이충’과 ‘사친이효’는 유교적인 충효를 각각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든가 ‘충신출어효자지문(忠臣出於孝子之門)’이라고 한 유교적 관점에서 보면 이 경우 충효는 그 순서가 뒤바뀌어 있다. 여기서 유교의 일반적인 사상과 달리 효보다 충을 앞세웠던 당시 신라인들의 강렬한 공동체의식을 엿볼 수 있다. 이는 김유신(金庾信)과 그의 아들 원술(元述)과의 사이에 얽힌 이야기에서도 드러난다.
‘교우이신’ 역시 평범한 차원에서 유교적인 신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에 나타난 내용이나 사다함(斯多含)의 예에서 보듯이, 약사우(約死友)하고 이것을 충실히 지켜낼 수 있는, 유교 일반적인 관점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종의 신앙적인 차원의 것이었다.
‘임전무퇴’는 강렬한 공동체 의식과 멸사봉공하자는 숭고한 희생 정신의 표현인데, 관창(官昌)이나 김흠운(金欽運)의 경우가 이에 대한 좋은 예라 하겠다. 마지막으로 ‘살생유택’은 불교적이라고 하겠으나, 불교에서의 ‘불살생(不殺生)’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냉혹한 현실 속에서도 인간성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실제적인 사상을 나타내고 있다.
의의와 평가
세속오계는 고신도사상적 무속신앙을 통하여 신과 인간이 합일할 수 있는 차원에서 이룩된 순수성을 바탕으로 강력한 공동체의식과 철저한 의리정신, 숭고한 희생정신, 그리고 선량한 인간의 정신을 나타내고 있다. 이는 단순히 신라인들의 시대정신을 표출하는 데 그치지 않고, 화랑도사상의 구체적 실천 덕목을 약여(躍如)하게 부각시키고 이념적 체계를 가다듬게 함으로써 화랑도 발전에 결정적인 구실을 하였다.
이리하여 직접적으로는 신라로 하여금 삼국통일의 위업을 성취하고 세계사상 유례가 드문 천년왕조의 영광을 누리게 하였고, 간접적으로는 후대에 와서 민족사의 흐름 속에서 거세게 밀어닥친 외래문화의 물결 속에서도 우리 민족 특유의 순수선량하고도 의연한 민족성을 이어오는 데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그리고 민족적 전통사상의 도도한 흐름을 타고 고려왕조의 처절한 항몽정신(抗蒙精神)과 조선왕조의 의리사상, 한말의 의병정신, 그리고 일제하에서의 독립정신 등으로 이어지는 불굴의 민족정기의 맥락은 모두 이 세속오계의 정신을 통해 튼튼하게 다져진 것이라 하겠다.
삼국사기 열전 제5 귀산(貴山)
귀산의 가계
귀산(貴山)은 사량부(沙梁部) 사람이다. 아버지는 아간(阿干) 무은(武殷)이다.
(註)
●귀산(貴山): ?~602년. 신라 진평왕대의 인물로 왕경(王京) 사량부(沙梁部) 출신이다. 삼국유사 권제4 의해제5 원광서학조에서는 모량부(牟梁部) 출신이라 하였다. 아버지는 아간(阿干) 무은(武殷)이다. 어려서부터 깊이 사귀어온 추항(箒項)과 함께 수(隋)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가실사(加悉寺)에 머무르고 있던 원광법사(圓光法師)로부터 세속오계(世俗五戒)를 받고, 이 계율을 지키기로 다짐하였다. 진평왕 24년(602) 8월 백제군이 아막성(阿莫城)을 공격할 때 아버지를 따라 소감직(小監職)으로 출전하였다. 되돌아올 때 백제의 복병이 갑자기 공격하자, 무은은 말에서 떨어지고 병사들은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때 귀산이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물러나지 않고 말을 아버지에게 주고 즉시 소장(小將) 추항과 더불어 힘을 다해 싸우다가 온몸에 칼을 맞고 죽었다. 진평왕은 그의 시신을 신하들과 함께 아나(阿那)의 들판에서 맞이하여 통곡하고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르고 나마를 추증하였다. 본서 권제4 신라본기제4 진평왕 24년 8월조에는 단지 귀산과 추항이 전투에서 사망하였다고만 기술되어 있다. 귀산의 행적에 대해서는 귀산열전이 자세하다. 본서의 찬자가 귀산열전이나 이것의 원전을 참조하여 신라본기에 아막성 전투에서 귀산과 추항이 죽었다는 사실을 첨입하였다고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다만 본서 권제27 백제본기제5 무왕 3년 8월조에도 아막성 전투에 관한 기록이 전하는데, 귀산 열전의 기록과 내용상 다소 차이가 있다. 따라서 백제본기의 기록과 귀산열전의 원전은 달랐다고 볼 수 있다. 백제본기 기록은 구삼국사(舊三國史)의 백제 기록이 원전으로 추정되고, 귀산열전의 원전은 귀산의 행적을 기술한 신라의 전승자료로 이해된다.
●사량부(沙梁部): 신라 왕경의 행정구획인 6부 가운데 하나이다. 포항 냉수리 신라비(503)를 비롯한 6세기 대의 여러 금석문에는 ‘사훼부(沙喙部)’로 나온다. 사량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본서 권제1 신라본기제1 유리이사금 9년조 참조.
●아간(阿干): 신라시대 제6관등으로, 아찬(阿湌)의 다른 이름이다. 아척간으로도 불렸다.
●무은(武殷): 신라 진평왕대의 장군으로 귀산(貴山)의 아버지이다. 본서 권제45 열전제5 귀산(貴山)조에 따르면, 아막성 전투에 참여할 당시의 관등은 급간(級干)이었으나 뒤에 아간(阿干)까지 승진하였다고 한다.
뜻을 세우다
귀산은 어렸을 때에 같은 부(部) 사람 추항(箒項)과 친구가 되었다. 두 사람이 서로 말하기를, “우리들은 교양과 인격이 높은 사람과 더불어 놀기로 기약하였으니, 먼저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닦지 않는다면 아마도 치욕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어찌 어진 이의 곁에 나아가서 도를 듣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註)
●추항(箒項): ?~602년. 진평왕대의 인물이다. 귀산과 같은 동리에서 살았고 그와 함께 원광법사에게 가서 세속오계를 받았다. 소장(小將)으로 아막성(阿莫城) 전투에 나갔다가 후퇴하지 않고 용감히 싸우다가 죽었다. 진평왕은 그에게 대사(大舍)를 추증하였다. 귀산과 추항은 명확한 기록이 없으나, 귀산열전의 내용으로 보아 화랑도의 낭도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먼저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닦지: 정심(正心)과 수신(修身)은 대학(大學)의 팔조목(八條目)에 속한다. 그 경문(經文)에 “欲修其身者 先正其心” “心正以後身修” 등의 표현이 있다.
원광법사에게 뜻을 구하다
이때 원광법사(圓光法師)가 수(隋)나라에 들어가 유학하고 돌아와서 가실사(加悉寺)에 있었는데, 당시 사람들이 높이 예우하였다. 귀산 등이 (그) 문하에 이르러 옷자락을 걷어잡고(摳衣) 나아가 말하기를, “(저희들) 세속 선비는 미련하여 아는 것이 없습니다. 원컨대 한 말씀을 주셔서 종신토록 지킬 교훈으로 삼도록 하여 주십시오”라고 말하였다.
(註)
●원광법사(圓光法師): 성은 설씨(薛氏) 혹은 박씨(朴氏)로 13세에 출가하여 30세에 삼기산(三岐山) 금곡사(金谷寺)에서 수도하던 중 깨달은 바가 있어 진평왕 11년(589)에 진(陳)나라로 가서 금릉(金陵: 난징[南京]) 장엄사(莊嚴寺)에서 민공(閔公)의 제자에게서 강설(講說)을 들었는데, 민공은 장엄사의 승민(僧閔)으로서 양(梁)나라의 3대 법사(法師)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성실종(成實宗)의 대가였다. 이후 원광은 성실론(成實論), 열반경(涅槃經), 아함경(阿含經)을 깊이 공부하다가 589년에 수(隋)나라 군사가 진나라 수도인 양도(揚都: 양주(揚州))를 침략하였을 때에 수나라 군대에게 사로잡혔다가 겨우 목숨을 건진 이후, 수나라의 수도인 장안(長安)의 흥선사(興善寺)로 가서 머물렀다. 진평왕 22년(600)에 신라 사신 제문(諸文)·횡천(橫川)을 따라 귀국하여 가실사(加悉寺)에 주석(住錫)하였다. 이때에 귀산(貴山)과 추항(箒項) 두 청년이 원광법사를 찾아와 종신토록 교훈을 삼을 수 있는 말을 해달라고 부탁하자, 그들에게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지어 주었다. 진평왕 30년(608)에 수나라에 군사를 청하는 걸사표(乞師表)를 지었고, 진평왕 35년(613) 7월에 수나라 사신 왕세의(王世儀)가 신라에 왔을 때 황룡사(皇龍寺)에서 개최한 백고좌회(百高座會)를 주도하였다. 선덕왕 10년(641)에 99세의 나이에 입적하자, 명활산(明活山)에 장사지내고, 삼기산 금곡사에 부도(浮屠)를 세웠다. 여래장경사기(如來藏經私記), 대방등여래장경소(大方等如來藏經疏) 등의 여래장경(如來藏經)에 대한 저술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수(隋)나라: 수나라는 남북조시대를 끝내고 중국을 다시 통일한 나라이다. 581년 양견(楊堅: 문제(文帝))이 건국하였고, 589년에 남조의 진(陳)을 멸망시키고 중국을 다시 통일하였다. 문제는 중국의 통일 이후 중앙집권체제의 정비에 힘썼고, 제2대 황제인 양제(煬帝)는 총 길이 1,782㎞에 이르는 대운하를 파서 물건을 쉽게 운송할 수 있도록 하였다. 양제는 고구려를 정복하였다가 실패하였는데, 고구려에 대한 무리한 정복과 대규모 토목 공사 등으로 인해 수나라는 당(唐)나라를 건국한 이연(李淵)에 의해 618년에 멸망하였다.
●가실사(加悉寺): 삼국유사 권제4 의해제5 원광서학에 따르면, 원광법사가 수나라에 돌아와 가슬갑(嘉瑟岬)에 머물렀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가슬갑이 곧 가실사를 말한다. 한편 일연(一然)은 가슬갑에 대하여 설명하기를 “가슬갑을 고시사(古尸寺)라고도 하는데 그곳은 바로 운문사(雲門寺)이다”라고 하였다. 따라서 가실사는 지금의 경상북도 청도군의 운문사 혹은 그 부근의 절이라고 할 수 있다. 가슬갑(嘉瑟岬)에는 ‘岬’자가 들어가 있는데, 갑은 두 산 사이의 지대를 가리킨다. 즉 두 계곡이 합쳐지거나 두 계류가 합류되는 지점으로 각 교통로가 합치되는 지형이라 할 수 있다. ‘岬’자가 들어간 사찰들의 위치는 당시 교통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지형적으로 사람들의 접근이 어렵지 않은 산록 저단부에 자리잡고 있다.
●옷자락을 걷어잡고(摳衣): 구의(摳衣)는 공경의 뜻을 표하기 위하여 아랫도리 옷의 자락을 양손으로 걷어잡고 서서히 나가고 물러섬을 말한다.
원광법사에게 세속오계를 받다
법사가 말하기를, “불계(佛戒)에는 보살계(菩薩戒)가 있는데, 그 종목이 열 가지이다. 너희들이 (세속의) 신하로서는 아마도 이를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 세속오계(世俗五戒)가 있으니, 첫째는 임금 섬기기를 충(忠)으로써 하고, 둘째는 어버이 섬기기를 효(孝)로써 하며, 셋째는 친구 사귀기를 신(信)으로써 하고, 넷째는 전쟁에 나가서는 물러서지 말며, 다섯째는 생명 있는 것을 죽이되 가려서 할 것이다. 너희들은 이것을 실행함에 소홀히 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註)
●보살계(菩薩戒): 대승계(大乘戒) 혹은 불성계(佛性戒)라고도 한다. 불교의 계율에는 소승계와 대승계가 있는데, 보살계는 대승불교에서 보살이 지켜야 할 10가지의 계율이다. 보살 10계는 불살계(不殺戒), 불도계(不盜戒), 불음계(不淫戒), 불망언계(不妄言戒), 불고주계(不酤酒戒), 불설과죄계(不說過罪戒), 불자찬훼타계(不自讚毁他戒), 불간계(不慳戒), 불진계(不瞋戒), 불방삼보계(不謗三寶戒) 등이다. 신라에서는 원광이 귀국한 진평왕 20년(600)을 전후한 시기에 보살계가 수용되었다.
●세속오계(世俗五戒): 원광이 평생의 교훈을 받고자 찾아온 귀산과 추항에게 제시한 세속인으로서 지켜야 할 다섯 가지 계율이다. 이는 화랑들의 계율이 되었는데, 사군이충(事君以忠), 사친이효(事親以孝), 교우이신(交友以信), 임전무퇴(臨戰無退), 살생유택(殺生有擇)이다. 세속오계의 성격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은 여러 설이 있다. ①국가, 가정, 사회생활에 당시 가장 필요로 하는 덕목을 제시한 것으로 불교적인 가르침이기 이전에 민족적 의식이 강하게 반영되었다는 설, ②그 내용이 불교의 오계(五戒)와 매우 다르고 오히려 유교의 오륜(五倫) 등에서 취한 것이 대부분이라 하여 그 정신적 근간이 유교적 성향이라는 설, ③비단 화랑 집단 성원만의 덕목이 아니라 6~7세기 신라사회가 요구하는 시대정신으로 유교의 오륜이나 불교의 오계의 영향을 받아 성립된 것을 부인할 수 없으나 자기 전통을 가진 주체성에 입각하여 취사 선택한 것이었다는 설, ④6~7세기의 신라의 공동체 윤리라는 설 등이 있다. 세속오계 가운데 충(忠)과 효(孝)와 신(信)은 전통사상으로 내려온 풍류도에 입각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당시 신라가 당면한 국가적, 현실적 요청을 가미하여 우선 순위를 정한 것으로 여겨진다.
살생유택의 의미를 이해하다
귀산 등이 말하기를, “다른 것은 이미 명을 받은 대로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른바 살생유택(殺生有擇)만은 잘 알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원광법사가 말하기를, “6재일(六齋日)과 봄철과 여름철에는 살생하지 아니한다는 것이니, 이것은 때를 가리는 것이다. 부리는 가축을 죽여서는 아니 되니, 말· 소· 닭· 개를 말한다. 작은 동물은 죽이지 않는 것이니, 고기가 한 점도 되지 못하는 것을 말함이다. 이것은 물건을 가리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면 그 쓰이는 것만 필요하니, 많이 죽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것은 세속(世俗)의 좋은 계율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귀산 등이 “지금부터 이후로 받들어 좇아 감히 명을 떨어뜨리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다.
(註)
●육재일(六齋日):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재계일(齋戒日)이니, 8, 14, 15, 23, 29, 30일이 그것이다. 이 6일에는 사천왕(四天王)이 사람의 선악을 엿보는 날이라고 하여 특히 조심한다.
●세속(世俗)의 좋은 계율: 살생유택(殺生有擇)을 구체적으로 설명한 말이다. 6재일(齋日)과 봄과 여름에는 살생하지 않으며, 가축이나 작은 생명체를 필요 없이 죽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이른다. 한편 이를 오계(五戒) 자체를 총체적으로 설명한 말로 해석할 수도 있다. 세속오계(世俗五戒)는 글자 그대로 세속적인 계명으로, 대개 유가의 덕목인 충(忠)· 효(孝)· 신(信)· 용(勇)· 인(仁)에 기초한다. 오계 중 임전무퇴(臨戰無退)는 용(勇)이고, 살생유택(殺生有擇)은 인(仁)이라 할 수 있다. 불가에서는 살생을 10악업(惡業)의 하나로 여겨 엄금(嚴禁)하고 있다. 그러나 세속적인 계명인만큼 살생을 하되, 불가의 속기일(俗忌日)인 6재일에는 하지 말 것과 동물이 번식하는 춘하절에도 하지 말 것을 이르는 것이다. 이는 택시(擇時)라 할 수 있다. 또 가축이나 미물을 함부로 죽이지 말 것은 택물(擇物)이라 할 수 있다. 이 가운데 6재일을 제외하고는 모두 유가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원광은 유학에도 겸통(兼通)하고 국책(國策)에도 순응하던 고승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세속적인 5계(戒)를 주었던 것이라고 해석된다.
아막성 전투에 참가하다 ( 602년 )
진평왕(眞平王) 건복(建福) 19년 임술(壬戌, 602) 가을 8월에 백제가 크게 군사를 일으켜 아막성(阿莫城)을 포위하였다. 진평왕이 장군 파진간(波珍干) 건품(乾品), 무리굴(武梨屈), 이리벌(伊梨伐), 급간(級干) 무은(武殷), 비리야(比梨耶) 등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군을 막게 하였다. 귀산과 추항은 함께 소감(少監)으로 나갔다.
(註)
●건복(建福): 신라 진평왕대의 연호이다. 진평왕 6년(584)부터 선덕왕 2년(633)까지 사용되었다.
●진평왕(眞平王) 건복(建福) … 군사를 일으켜: 본 기록은 본서 권제4 신라본기제4 진평왕 24년조와 본서 권제27 백제본기제5 무왕 3년조에 다 같이 수록되어 있다. 신라본기의 기록은 백제의 아막성 공격, 신라의 승리, 귀산과 추항의 전사 사실을 간략히 전하고 있는데, 백제본기와 귀산열전의 경우 이에 대한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백제본기와 귀산열전을 비교해 보면, 아막성 전투의 진행 과정에서 약간 상이한 점이 발견된다. 신라가 4성을 쌓고 백제의 영역을 침범하자, 무왕이 4만 대군을 동원하여 그 4명을 공격한 내용은 백제본기에만 서술되어 있고, 귀산열전에는 보이지 않는다. 신라본기와 귀산열전의 기록에는 총 2차례 전투가 나타나는 것에 반해, 백제본기의 기록에는 총 3차례 전투가 벌어진 것으로 되어 있다. 4성 축조 및 백제 영역 침범의 주체가 신라임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은 백제본기에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백제본기 기사를 작성하는데 참고한 원전은 신라인들의 손을 거쳐 그 당대인들의 인식이 반영된 것으로 여겨진다. 다만 백제본기와 귀산열전의 경우 전투과정과 전투 횟수 뿐만 아니라 귀산과 추항이 활약한 천산 서쪽 전투의 내용 또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따라서 양측 기사의 원전 자료는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아막성 전투 관련 사료는 당대 신라인들의 인식이 반영된 것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각각의 사료 안에서 백제계 원전과 신라계 원전을 확실하게 구분하기는 어렵다. 아막성전투의 전개 과정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신라본기, 백제본기, 귀산열전 모두를 고려하여, 합리적인 방향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가장 자세한 백제본기의 기록에 따르면, 백제는 좌평(佐平) 해수(解讐)가 보기(步騎) 4만 명을 거느리고 신라로 진격했다고 한다. 백제가 아막성 전투를 일으킨 이유로는 ①영토 확장 ②운봉의 교통로 장악 ③옛 가야 지역 확보 ④왕권 강화 ⑤대양성(대야성?) 진출을 통한 삼국 항쟁의 주도권 확보 ⑥고구려와 왜와 백제의 신라 정벌 의도 ⑦신라의 소백산맥 이서 진출 등이 제시되어 있다.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겠지만, 군사적 측면에서 볼 때 무왕의 대야성 진출 의도가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아막성(阿莫城): 본서 권제27 백제본기제5 무왕 3년(602) 8월조에는 아막성을 또는 모산성(母山城)이라고도 불렀다고 전하고, 또한 본서 권제34 잡지제3 지리1 강주 천령군조에 “운봉현(雲峰縣)은 본래 모산현(母山縣)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라고 전한다. 이를 통해 아막성을 모산성, 아영성이라고도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아막성의 위치는 남원~운봉 일대에서 찾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 지역에는 삼국시대 산성지만 21곳이 있다. 이들 중 아막성의 후보로 주목되는 곳은 복성이재 근처의 성리산성(城里山城)과 팔량치 근처의 선상리산성(城山里山城)이다. 최근에는 산성의 규모, 입지, 신라의 세력 판도, 두 산성의 기능 차이를 통해 성리산성으로 보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아막성에서 600년에서 651년 사이에 2회의 전투가 벌어졌는데, 602년 아막성 전투와 616년 모산성(母山城) 전투이다. 모산성은 아막성의 이칭으로, 두 전투는 14년 차이로 발생하였다. 아막성은 신라와 백제 양국의 주요 쟁지(爭地)였다고 볼 수 있다. 아막성 전투의 역사적 의미는 일찍이 일본학계에서 주목받았다. 일본서기(日本書紀) 권제22 추고천황(推古天皇) 8~11년 기사를 토대로 아막성 전투를 국제적 성격의 사건으로 이해하였다. 602년 4월~603년 7월 왜(倭)의 축자(築紫) 주둔, 602년 아막성 전투, 603년 8월 북한산성 전투는 왜의 임나(任那) 구원 촉구에 백제와 고구려가 가담하여 발생한 사건이라 보는 것이다. 최근 국내에서도 일본학계의 선행 연구를 수용하여 왜의 임나 구원 촉구로 왜와 백제와 고구려가 연계하여 신라를 고립시켰다는 연구가 제시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왜의 주도로 성립되었다는 백제와 고구려와 왜 연합설은 일본서기 기사의 사료적 신뢰성과 백제-고구려 관계로 볼 때 설득력이 떨어진다. 왜의 축자(築紫) 출병과 아막성 전투는 고구려의 개입 없이 백제의 주도로 이루어진 사건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임전무퇴를 실천하다 사망하다
백제가 패하여 천산(泉山)의 못가로 물러가 군대를 숨기고 신라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군사가 진격하다가 힘이 다하여 이끌고 돌아왔다. 그때 무은이 후군이 되어 군대의 맨 뒤에 섰는데, 복병이 갑자기 나와 갈고리로 무은을 떨어뜨렸다. 귀산이 큰소리로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들었는데, 스승이 ‘선비는 군대를 맞아 물러서지 않는다’고 하였다. 어찌 감히 패배하여 달아나겠는가”라고 하였다. 적 수십 인을 쳐 죽이고 자기 말로 아버지를 보내고 추항과 함께 창을 휘두르며 힘껏 싸웠다. 모든 군사가 그것을 보고 분발하여 적을 쳤다. 넘어진 시체가 들판에 가득하였고 한 필의 말, 한 대의 수레도 돌아간 것이 없었다. 귀산 등도 온몸에 칼을 맞고 돌아오는 중에 죽었다.
(註)
●천산(泉山): 현재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다. 그러나 신라에서 아막산성을 탈취한 후 그 근처에 천산(泉山), 소타(小陀), 외석(畏石) 옹잠(甕岑)의 4성(城)을 쌓은 점과 못 등의 늪이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이나 아영면에 위치한 지명으로 추정된다. 현재의 남원시 운봉읍 동북쪽 16리의 황산(荒山)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한 편이다.
●백제가 패하여…기다리고 있었다: 본서 권제27 백제본기제5 무왕 3년 8월조에는 '解讎不利'라고 되어 있고, 본문에는 '百濟敗'라고 되어 있다. 어느 쪽을 따르건 백제군의 전황이 좋지 않았음을 반영하고 있다. 백제군을 이끌던 해수는 주도권을 장악하지 못하자 성전(城戰)을 포기하고, 천산(泉山)의 서쪽 진펄로 신라군을 유인하여 야전(野戰)에서 승부를 보려 하였던 것이다.
●그때 무은이…떨어뜨렸다: 본서 권제27 백제본기제5 무왕 3년 8월조에는 무은이 승기를 타고 갑졸(甲卒) 1,000명을 거느리고 백제군을 추격하여 대택(大澤)에 이르렀고 이어 백제군의 복병을 만나 말에서 떨어졌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본 기록에는 신라군의 맨 뒤, 즉 후군(後軍)이 되어 있다가 복병을 만나 말에서 떨어졌다고 되어 있다. 백제본기에 따르면, 무은은 갑졸 1,000명을 거느리고 신라군 본대에 앞서 추격했다고 하므로 복병을 감지 못한 책임이 있다고 보인다. 반면 신라군의 후군으로 있다가 복병에 당했다면, 그 책임은 감소할 수밖에 없다. 무은이 귀산의 아버지라는 점과 전투 이후 무은이 진급했다는 점에서 볼 때, 백제본기의 내용이 실상에 더 가깝다고 짐작된다. 한편 무은이 실제 신라군의 선봉이 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무은이 선봉이 되어 먼저 백제군의 매복지에 들어섰고, 신라군 본대가 뒤따라 온 상황에서 백제군의 매복 공격이 시작되었을 수도 있다. 백제군의 매복을 감지한 신라군이 급히 회군하게 될 경우, 선봉에 섰던 무은의 부대가 후군이 되어 백제군의 추격을 차단할 수밖에 없다. 신라군 본대의 안전을 위해 무은의 부대가 끝까지 싸웠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무은이 선봉 부대로서 백제군의 매복을 인지하지 못했던 것은 실책이더라도 백제군의 매복 공격을 차단하고 역공의 여건을 보장하였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선비는 군대를 맞아 물러서지 않는다: 이는 귀산이 원광법사에게 전수받은 세속오계 가운데 임전무퇴(臨戰無退)를 그대로 실천한 발언이라 할 수 있다.
●적 수십 인을…힘껏 싸웠다: 소감이었던 귀산이 아버지 무은을 돌려보내고, 추항과 함께 임전무퇴의 정신을 실현하면서 백제군과 맞서 싸웠다. 이는 순국주의(殉國主義)를 강조한 신라의 의도가 반영되어 있는 자료가 전승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아버지를 살려보내고 스스로 전사한 극적인 내용이었기 때문에 기록으로 남겨졌을 것이다.
●넘어진 시체가…없었다: 당시 시체가 들판에 가득하였고, 백제로 돌아간 말이나 수레가 하나도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본서 권제27 백제본기제5 무왕 3년 8월조에는 백제 군사가 패배하고, 해수(解讎)는 겨우 위기를 모면하여 단신으로 돌아왔다고 되어 있다. 이 전투에서 해수 혼자 돌아왔다는 백제본기의 서술과 본 기록의 서술은 상당 부분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 백제의 장군 해수가 거느린 군사는 기병과 보병 4만 명이었고, 신라 군사는 기병 1천 명이었다. 백제의 전 병력이 투입되었다기 보다는 선발대가 크게 패한 것으로 보이며, 신라군의 경우도 무은이 이끌던 1천 명 이외에 매복병이나 증원병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귀산과 추항이 추증되다
진평왕이 여러 신하와 함께 아나(阿那)의 들판에서 맞이하여 시체 앞에 이르러 통곡하고 예(禮)로써 장례를 치르게 하였다. 귀산에게는 나마(奈麻) 관등을, 추항에게는 대사(大舍) 관등을 추증하였다.
(註)
●아나(阿那)의 들판: 지금의 경상남도 함안지역 주재성 근처로 비정되고 있다. 아나(阿那)는 남산 신성비 제1비에 보이는 아량(阿良)의 다른 표현이다. 아량은 지금의 함안지역으로 이해되고 있다. 진평왕은 왜군이 출병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가야 지역민의 민심을 달래고 한편으로 전쟁을 독려하기 위해 함안으로 가 있었다고 추정된다.
●나마(奈麻): 신라 17관등 가운데 제11등으로 나말(奈末), 내말(乃末)이라고도 한다.
●대사(大舍): 신라 17관등 가운데 제12등으로 한사(韓舍)라고도 한다.
●진평왕이…추증하였다: 귀산이 참가하여 사망한 아막성 전투는 신라와 백제에 있어 모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신라의 4성 축조와 백제 영역 침범이 602년 8월 이전에 이루어졌고, 그로 인하여 백제가 4만 병력을 동원하여 아막성 공격을 단행하였다. 즉 신라의 공세적 방어전략에 대한 백제의 강력한 응전이라 할 수 있다. 신라의 입장에서는 소백산맥 방어선이 강화되고 확장되었다는 점이다. 아막성 포위전을 극복한 신라는 아막성 서쪽에 4성을 축성하여, 방어체계가 강화되었다. 또 운봉고원을 장악함으로써 공세적 방어가 더욱 영향력을 발휘하며 주도권을 가지게 되었다. 백제의 입장에서는 무왕 초년 대야성 진출 의도가 봉쇄되었다는 점이다. 백제는 관산성 전투 이후 축적된 국력을 토대로 대규모 병력을 동원했지만 크게 패배하고 말았다. 이후 624년 속함성 등 6성 전투에 가서야 신라에 대한 대규모 반격이 가능할 정도로 타격을 입었다.
세속오계(世俗五戒)
1. 개요
세속오계(世俗五戒)는 삼국사기의 귀산 열전에 기록된 다섯 가지 계율로, 신라 진평왕 때 가실사(加悉寺)에 머무르던 원광법사에게 귀산(貴山)과 추항(箒項) 두 청년이 찾아와서 '평생 마음에 새길 경구를 가르쳐 달라'는 요청을 받고 제시해 준 것이다. 원광이 직접 이 오계를 창안한 것인지 아니면 이전부터 존재하던 오계를 강조해서 이야기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드물게 줄여서 '오계'라고 부르기도 한다.
2. 내용
사군이충(事君以忠): 충성으로써 임금을 섬기어야 한다.
사친이효(事親以孝): 효로써 부모를 섬기어야 한다.
교우이신(交友以信): 믿음으로써 벗을 사귀어야 한다.
임전무퇴(臨戰無退): 싸움에 나가서 물러남이 없어야 한다.
살생유택(殺生有擇): 살아있는 것을 죽일 때에는 가림이 있어야 한다.
3. 사상적 배경
언뜻 보기에는 원광법사라는 스님이 가르쳤고, 충효를 말하고 있어서 유교와 불교의 깊은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이지만, 이 시기 신라 사회에서 유교와 불교는 아직 그 뿌리는 깊이 내렸다고 보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신라에서 '왕'이 군주의 호칭으로 확립된 것이 지증왕 때이며, 이전까지 사용했던 각종 호칭(특히 차차웅)이 신권정치의 특성을 강하게 지니고 있던 것을 생각하면 오히려 신라에서는 아직도 샤머니즘적인 무속신앙이 지배적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러한 신라 특유의 신앙을 고신도사상(古神道思想) 혹은 풍류(風流)[5]라고 불렀는데, 세속오계는 이러한 당시 신라인 특유의 사상이 압축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4. 해석
사군이충과 사친이효는 유교적 미덕인 충과 효를 강조하고 있는 항목이나, 흥미로운 점은 정통 유교와 반대로 충이 효보다 앞서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에서 신라인들이 지니고 있던 강한 공동체 의식을 찾을 수 있다. 교우이신 역시 단순한 우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까지도 함께 할 것을 약속하는 유교의 그것보다 훨씬 강한 성격이었다. 살생유택은 불교의 영향이 깊이 드러나는 대목이지만 불교에서 흔히 말하는 불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이라는 냉혹한 현실 속에서도 최대한 인간다움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임전무퇴는 전쟁이 많았던 6~7세기 삼국통일전쟁 시기에 매우 중요시되었던 사상으로, 원광법사에게 세속오계를 전수받은 귀산과 추항은 이 계율에 따라 훗날 벌어진 백제와의 아막성 전투에서 물러서지 않고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이에 사기가 고무된 신라군은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 승리하여 신라군의 대승으로 끝났고. 백제군은 말 한 필, 수레 한 대조차 돌아가지 못했고 지휘관인 해수는 단신으로 달아났다고 한다.
진평왕은 귀산과 추항을 각각 나마와 대사로 사후 추증하였다. 어떻게 보면 반굴, 관창의 선배격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으며, 삼국사기 열전에는 이렇게 7세기 신라의 인물 중 불리한 전투에서 분투해 전사한 후 아군에게 용기를 주는 식의 이야기를 지닌 인물들이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그리고 이를 지키지 못하고 도망쳐서 살아남은 김원술[9], 김흥원 등은 임전무퇴를 지키지 못한 것이 평생 치욕으로 남게 된다. 세속오계에 대한 서술은 삼국사기의 인용 고문헌 중 김대문의 화랑세기에 근거를 둔 이야기로 추정된다.
5. 평가
세속오계는 고신도사상적 무속신앙을 통하여 신과 인간이 합일할 수 있는 차원에서 이룩된 순수성을 바탕으로 강력한 공동체의식과 철저한 의리정신, 숭고한 희생정신, 그리고 선량한 인간의 정신을 나타내고 있다. 이는 단순히 신라인들의 시대정신을 표출하는 데 그치지 않고, 화랑도사상의 구체적 실천 덕목을 약여(躍如)하게 부각시키고 이념적 체계를 가다듬게 함으로써 화랑도 발전에 결정적인 구실을 하였다.
이리하여 직접적으로는 신라로 하여금 삼국통일의 위업을 성취하고 세계사상 유례가 드문 천년왕조의 영광을 누리게 하였고, 간접적으로는 후대에 와서 민족사의 흐름 속에서 거세게 밀어닥친 외래문화의 물결 속에서도 우리 민족 특유의 순수선량하고도 의연한 민족성을 이어오는 데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그리고 민족적 전통사상의 도도한 흐름을 타고 고려왕조의 처절한 항몽정신(抗蒙精神)과 조선왕조의 의리사상, 한말의 의병정신, 그리고 일제하에서의 독립정신 등으로 이어지는 불굴의 민족정기의 맥락은 모두 이 세속오계의 정신을 통해 튼튼하게 다져진 것이라 하겠다.
세속오계(世俗五戒)
세속오계(世俗五戒), 혹은 오계(五戒)는 신라(新羅) 진평왕(眞平王) 때 원광법사(圓光法師)가 귀산(貴山)과 추항(箒項)의 요청을 받아 알려준 다섯가지 수신계(修身戒)이다. 오늘날 화랑도(花郞道)의 윤리적 지침 및 실천 이념으로 알려져 있다.
유교의 대표적인 사회윤리로서 유교의 기본 덕목이자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기본 원칙으로 지금까지 우리 나라를 비롯한 동양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사군이충(事君以忠) : 충성으로써 임금을 섬긴다.
사친이효(事親以孝) : 효도로써 어버이를 섬긴다.
교우이신(交友以信) : 믿음으로써 벗을 사귄다.
임전무퇴(臨戰無退) : 싸움에 임해서는 물러남이 없다.
살생유택(殺生有擇) : 산 것을 죽임에는 가림이 있다.
원광법사(圓光法師)의 성(姓)은 설씨(薛氏), 혹은 박씨(朴氏)라고도 한다. 경주(慶州) 출생, 13살 때 입산(入山), 589년 3월 당(唐)나라에 들어가 유학하고, 600년에 귀국하였다. 608년에는 신라가 고구려를 정벌코자 수(隋)나라에 청병할 때, 왕명으로 걸사표(乞師表, 파병요청서)를 써 주었으며, 613년에 황룡사(皇龍寺)에서 백고좌(百高座) 도량(道場)을 베풀고 고승(高僧)을 청하여 경을 읽을 때, 원광법사(圓光法師)는 제일 상수(常修)로써 설법했다.
그리고 귀산(貴山)과 추항(箒項) 두 청년에게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일러주어 신라 불교를 흥왕케 하였을 뿐 아니라, 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국민의 정신적 기틀을 마련해 주었던 것이다. 원광이 수(隋)나라에서 구법(求法)하고 귀국한 후, 화랑 귀산(貴山)과 추항(箒項)이 찾아가 일생을 두고 경계할 금언을 청하자, 원광이 이 오계(五戒)를 주었다고 한다.
스물 다섯살에 중국 수(隋)나라로 가 공부를 하여 불교에 통달한 원광은 공자(孔子)의 가르침인 유교에 관해서도 많이 알고 있었다. 신라 진평왕(眞平王) 때 원광은 나라의 부름을 받고 신라로 돌아와 임금을 도와 나라 일을 거들었다. 원광은 속이 깊고 아량이 넓어 타인을 꾸짖는 법이 없었을 뿐 아니라 언제나 웃는 얼굴로 사람들을 대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그를 원광법사라(圓光法師)고 불렀다.
한펀 그 시절 사량부(沙梁部)라는 마을에 귀산과 추항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그림자처럼 따라 다닐 정도로 아주 친했다. 둘은 언제나 함께 무술을 연마하고 수양을 닦았는데, 귀산은 나중에 화랑(花郞)이 되었다.
어느 날 귀산이 추항에게 말했다. “이보게 추항, 우리가 우물 안 개구리처럼 우리끼리만 몰려다닐 게 아니라 큰 어른을 찾아가 더 높고 깊은 진리를 깨우치기로 하세.” “그러세. 그럼 지금 당장 찾아 나서 보세.” “어느 분을 찾아뵐까 ?” “그렇지. 원광법사처럼 경지에 오른 분도 없지.”
당시 원광법사는 왕궁에서 물러나 가실사(嘉悉寺)에 머물고 있었다. 그래서 귀산과 추항은 이튿날 가실사로 향했다. 귀산과 추항은 원광법사 앞에 나란히 서서 합장한 후에 아뢰었다. “법사님, 저희가 일생동안 마땅이 지켜야 할 교훈을 좀 일러 주십시오.”
원광법사는 그들이 멀리서 자신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일부러 여기까지 왔다는 것을 알고는 더욱 반갑게 맞아 주었다. “먼 길 오느라 고생이 많았네. 진리란 그렇듯 고생 끝에 얻어지는 것이지 가만히 앉아서는 얻을 수가 없는 것이라네. 자네들이 일생동안 지킬 교훈을 달라고 했으니, 내 다섯 가지 교훈을 주겠네.”
원광법사가 입을 열자 귀산과 추항은 눈빛을 반짝이며 스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불법에는 반드시 지켜야 할 열 개의 계율이 있네. 그러나 그것은 승려가 아니고는 지키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지. 그러므로 자네들과 같이 세속에 있는 사람이라면 그 중 다섯 가지만 지켜도 충분할 것이네. 첫째는 사군이충(事君以忠)인데 이것이 임금을 섬기되 충성을 다하라는 것이고, 둘째는 사친이효(事親以孝), 이는 어버이를 섬기되 효도로써 섬기라는 것이며, 셋째는 교우이신(交友以信), 즉 친구를 사귀되 믿음으로써 사귀라는 것이고, 넷째는 임전무퇴(臨戰無退), 이는 싸움터에 나가서는 물러서지 말라는 것이네. 다섯째는 살생유택(殺生有擇), 즉 산것을 죽일 때는 가려서 하라는 것이네."
원광법사의 가르침을 받은 두 사람은 과연 법사답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다섯가지 계율이 바로 세속오계(世俗五戒)인데 이는 나중에 화랑도(花郞道)의 기본 정신이 되기도 했다. 원광은 종교가일 뿐만 아니라, 애국적인 정치가이기도 하며, 문장에도 뛰어나 유창한 필치로 적은 걸사표(乞師表)에 따라 수(隋)나라 임금이 38만명의 병력을 보내 오기도 했다.
삼국유사도 삼국사기와 같이 사군이충(事君以忠), 사친이효(事親以孝), 교우이신(交友以信), 임전무퇴(臨戰無退), 살생유택(殺生有擇)으로 되어 있으나,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에는 사군이충(事君以忠), 봉친이효(奉親以孝), 교우이신(交友以信), 임전불퇴(臨戰不退), 살생유택(殺生有擇)으로 되어 있어 조금 차이가 있으나 전체의 뜻에는 별 다름이 없다.
화랑 정신이라 하면 당연히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여길 정도로 세속오계는 화랑정신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원광법사가 귀산과 추항에게 전한 다섯 가지 계율은 우리의 고유한 사상과 가치관을 바탕으로 하여 유(儒), 불(佛), 선(仙) 3교(三敎)가 융합되어 표현된 것으로 보인다.
세속오계(世俗五戒)의 정신은 삼국사기의 열전에 나타난 여러 가지 일화에서 볼 수 있듯이, 원광법사의 가르침이 있기 전에도 많은 화랑들이 실천해 왔던 것이지만 귀산과 추항이 이 가르침을 충실히 지키다가 장렬하게 전사함으로써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원광법사의 세속오계는 화랑도만을 위해 전수한 것은 아니었지만 차츰 화랑의 계율처럼 인식되었고, 나중에는 화랑뿐만 아니라 모든 국민이 이를 중시하게 되었으니, 세속오계의 정신은 당시 사회가 요구한 보편적 도덕률인 동시에 일반화된 가치관이었음을 알 수 있다.
원광법사는 도량이 넓고, 성품이 조용하였으며, 고요한 것을 좋아하였다고 한다. 말할 때는 항상 얼굴에 웃음을 띠고 성내는 법이 없었으며, 학문에 대한 재능도 뛰어나 유학과 노장학은 물론 제자백가(諸子百家)와 역사에 깊이 통하지 않음이 없었다고 한다.
그가 출가하여 삼기산(三岐山) 금곡사(金谷寺)에서 수도할 때 산신으로부터 중국으로 불법(佛法)을 구하러 가라는 권유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이것은 원광이 활동하던 시대가 고유종교의 바탕 위에 불교가 수용되어 가는 과정을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원광은 일찍이 중국의 진(陳)나라에 유학하여 열반경(涅槃經)과 성실론(成實論)을 배웠고, 10여년 후에는 수(隋)나라에서 섭론종(攝論宗)과 열반경을 강의하였는데, 20여년간의 유학과 수도를 통하여 학문과 불법 모두 높은 수준에 이름으로써 그 명성을 중국에 크게 떨쳤다고 한다.
진평왕(眞平王) 22년(600)에 원광이 귀국하자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두 기뻐하며 환대하였고, 왕도 그를 만나보고 성인처럼 공경하여 마지 않았다.
608년 고구려가 자주 변방을 침범하므로, 왕이 고구려를 치기 위해 수(隋)나라에 걸사표(乞師表)를 보내려고 하자 원광은 “자기가 살려고 남을 멸하는 것은 승려의 할 바가 아니나, 제가 대왕의 나라에 살면서 어찌 감히 명령을 따르지 않겠습니까?”하고 곧 글을 지어 바쳤다. 세속오계로 국민을 교화하고, 걸사표를 지어 국난극복에 적극 동참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그는 현실 인식이 투철하고 책임감이 매우 강한 지성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사상적 바탕에는 왕도(王道)와 불도(佛道)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호국불교의 정신이 깔려 있고, 이것은 후대로 내려오면서 한국 불교의 전통이 되었다. 세속오계에 나타나 있는 화랑정신을 덕목별로 살펴보자
◈ 사군이충(事君以忠): 임금을 섬김에는 충성으로 해야 한다는 뜻이다.
신라는 반도의 동남방에 치우쳐 있을 뿐 아니라, 국가적 체제나 각종 제도의 정비가 삼국 중에서 가장 늦었기 때문에 고구려나 백제와의 경쟁에서 불리한 처지에 있었다. 영토 확장을 둘러싸고 주변국과 마찰이 잦았던 6~7세기는 신라 역사상 유례없는 국난기였다. 백제와 고구려, 중국을 상대로 국가의 존망이 걸린 전쟁을 자주 치러야 했기 때문이다.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의 정신력이라고 할 수 있다. 신라군이 숫적으로 열세에 있으면서도 상대를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필승의 신념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를 지닌 까닭이며, 화랑도들이 굳세고 용감했던 것도 생존을 위한 자기 방어의 수단이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미시랑(未尸郞) 진자사조(眞慈師條)에서 진흥왕(眞興王)이 나라를 흥하게 하기 위하여 풍월도(風月道)를 먼저 일으켜야 한다고 하여 화랑제도를 제정하였다고 하는데, 이것은 교육을 통해 먼저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여 유사시에 적재적소에 등용함으로써 진충보국(盡忠報國)하게 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실제로 삼국통일을 전후한 시기에 화랑정신으로 굳게 뭉친 젊은이들이 국난극복을 위해 앞장서서 활약한 사실이 삼국사기 열전에 많이 나타나 있는 것으로 보아, 화랑도를 중심으로 한 용장의열(勇壯義烈)이 삼국통일의 초석이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임금을 충성으로 섬기는 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제주의 시대에서는 당연한 국민적 도리로 인식되었다. 그것은 국왕이 곧 국가를 상징하며,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임금을 충성으로 섬겨야 한다는 생각은 국왕 개인에 대한 충성이라기 보다는,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국가 체제나 권력에 대한 충성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눌지왕(訥祗王) 때의 박제상(朴堤上)이 “국왕이 근심이 있으면 신하가 욕을 당한다”고 하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왕제을 찾아 나선 것이 이러한 사상을 잘 드러내 준다고 하겠다.
김흠운(金歆運), 김영윤(金令尹), 비녕자(丕寧子), 소나(素那), 사다함(斯多含), 관창(官昌), 검군(劒君), 귀산(貴山), 취항(箒項), 찬덕(讚德), 해론(奚論) 등 수많은 화랑과 용장의열(勇壯義烈)의 빛나는 행적으로 미루어 볼 때, 그들은 왕실과 국가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것을 최고의 영광과 명예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사군이충(事君以忠)의 계율은 불교적 사상과도 무관하지 않다. 그것은 화랑도가 제정되어 융성기를 맞이하던 때가 바로 신라 불교가 성장하고 발전해 가던 시기와 동시대이며, 이 시대의 불교는 토속신앙과 융합하여 왕실 중심의 호국 신앙적 색채를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삼국통일기나 국난기에 고승 대덕(大德)들이 나라를 지키는 데 앞장선 사실에서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세속오계를 전수한 원광의 신분이 승려였다는 것이 사군이충의 가르침 속에 불교적 사상이 내재되어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유교적인 면의 충(忠)은 우선 자신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盡己之謂忠,盡心曰忠)에서 출발한다. 자신에게 최선을 다하면 타인에게는 용서하는 마음이 되고 국가에는 헌신하는 마음이 되므로, 충은 곧 나라를 안정시키는 기반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충은 전제국가의 권력자인 왕도 적극 권장하였고, 현대국가의 주권자인 국민도 그것을 중요한 덕목으로 인정하고 있다.
자기에게 충실한 마음이 국가에 대한 헌신적 봉사로 발전하게 되어, 위정자들은 신하에게 바라는 바가 되고 신하들은 도의적으로 지켜야 할 의무가 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불교나 유교의 사상은 사군이충의 이념을 충실히 하는 데 기여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임금에게 충성해야 한다는 가르침이 순전히 외부에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고대 씨족이나 부족 사회 때부터 내재해 오던 공동체적 결속력과 자기 희생적 봉사정신이 충(忠) 사상으로 승화, 발전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 사친이효(事親以孝): 부모를 효성으로써 섬겨야 한다는 뜻이다.
지극한 효성으로 많은 사람의 가슴 속에 깊은 감동을 주는 효녀 지은(知恩)의 이야기가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전해 지는데, 그 주인공이 가난한 서민인 점으로 보아 이러한 효 사상은 신분의 귀천을 떠나 보편적으로 실천되었던 덕목임이 짐작된다. 유교에서는 효가 모든 덕목보다 우선하였기 때문에 효경(孝經)에서는 “무릇 효는 모든 덕의 근본이요, 모든 가르침이 여기서 생겨난다”고 하였다.
소학(小學)에, 먼저 효도를 하고 여력이 있으면 시서(詩書)와 무예를 익히고 효행을 한 다음에 학문을 하라고 한 것을 보더라도 효가 백행의 근원이고 만행의 근본임을 알 수 있다. 사람은 본능에 의하지 않고 자각적으로 도와 예를 실천할 수 있는 자질을 타고 났다. 그러나 노력하지 않고서는 그것을 실천할 수 없으므로 범속한 사람은 성인의 가르침을 본받아 도와 예를 실천하기 위해 힘썼다.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면 그를 본받아 자식도 효도를 할 것인데, 자신이 불효하고 어찌 자식이 효도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라는 옛 선현의 말씀에서 효는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며, 특히 솔선수범해야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부모를 사랑하는 자는 감히 남에게 나쁜 짓을 하지 않으며, 부모를 공경하는 자는 감히 남에게 태만하지 않는다’는 말을 통해, 효가 수신과 성의정심의 산물로서 인격을 닦는 첫걸음인 동시에 인격을 완성하는 마지막 걸음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불교에서도 효자보은경(孝子報恩經)이니 효자담경(孝子談經) 같은 효자에 대한 고사를 기록한 책이 있다. 또한 효에 대한 위경(僞經)으로서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이나 우란분경(盂蘭盆經) 등이 나왔다는 사실은 특히 효의 윤리를 인간세의 근본으로 하는 중국에 있어서 불교의 중효사상을 유교 못지 않게 알리려는 노력이 있었다. 이렇게 효는 유교의 만덕지본(萬德之本), 백교지유(百敎之由)일뿐 아니라 불가(佛家)의 만계지종(萬戒之宗), 백법지지(百法之至)이기도 하다.
◈ 교우이신(交友以信): 벗을 믿음으로써 사귀라는 뜻이다.
‘신(信)’은 ‘충(忠)’과 함께 화랑정신의 가장 중요한 덕목의 하나가 되고 있다. 충(忠)이 종적인 덕목이라면, 신(信)은 횡적인 덕목으로서 날줄과 씨줄처럼 짜여져 서로 보완관계를 이루고 있다. 유가의 오륜(五倫)에서는 붕우유신(朋友有信)이 다섯번째인데 비하여, 세속오계(世俗五戒)에서는 교우이신(交友以信)이 세번째로 되어 있는 것을 보더라도 신라인이 신의를 얼마나 존중했는지 알 수 있다. 특히 화랑도는 동지(同志) 사이에 맺은 약속을 매우 중시하여, 신의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생명까지도 기꺼이 바쳤다.
사다함(斯多含)은 신라 24대 진흥왕(眞興王) 때의 화랑으로서 15,6세의 어린 나이로 자원하여 가야국(伽倻國) 정벌에 출전, 빛나는 공훈을 세웠다. 17세 되던 해에 생사를 함께 하기로 언약한 무관랑(武官郞)이 병들어 죽자, 크게 슬퍼하며 7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고 통곡하다가 세상을 떠나니 많은 사람이 그의 죽음을 애통해 하였다고 한다. 김춘추(金春秋)가 고구려에 담판을 하러 갔다가 감옥에 갇혔을 때, 김유신(金庾信)이 그를 구하기 위해 적지로 간 것도 죽음을 함께 하기로 맹서한 언약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우리는 이같은 예를 통해 신라사람, 특히 화랑도들이 약속과 신의를 얼마나 중시했으며, 그들의 우정이 얼마나 깊었는지 잘 알 수 있다.
화랑도가 무리를 이루어 수련을 많이 하였던 금강산 일대의 통천지방(通川地方)에는 금란산(金蘭山), 금란굴(金蘭窟) 등 금란(金蘭)이라는 이름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으니, 이를 보더라도 화랑도 사이에 교우이신(交友以信)의 덕목이 매우 강조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금란(金蘭)이란 역경(易經)에 ‘두 사람이 마음을 같이 하면 그 날카로움이 쇠라도 능히 끊을 수 있으며, 마음을 같이 하는 말은 그 향기가 난초와 같이 맑다(二人同心 其利斷金 同心之言 其臭如蘭)’고 한데서 연유한 것으로, 우정의 중요성과 그 아름다움을 일컫는 말이다.
◈ 임전무퇴(臨戰無退): 싸움터에 나가서는 물러서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다.
세속오계(世俗五戒)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귀산(貴山)과 취항(箒項)이 아막성전투(阿莫城戰鬪)에서 임전무퇴(臨戰無退)의 정신으로 용감히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한 것이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화랑도가 제정된 6세기 중엽부터 삼국통일을 이룩하게 되는 7세기 중반까지 약 백여년 동안 신라는 크고 작은 전쟁을 여러 차례 치러야 했다. 빈번히 벌어지는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와 기필코 승리하겠다는 신념이 절실히 요구되었고, 이 같은 필요에 의해 전쟁터에 나가서는 용감하게 싸워야 한다는 정신이 강조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임전무퇴(臨戰無退)의 교훈은 그 당시 사회와 국가가 요구한 절실한 시대정신이었을 것이다.
삼국사기 열전에는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몸을 던져 용감히 싸우다가 죽은 화랑과 용장의열(勇壯義烈)들의 기록이 많이 있다. ‘위로 국가를 위하고 아래로 지기(知己)를 위하여 죽는다’고 한 비녕자(丕寧子)나 ‘의리없이 사는 것은 의리를 위해 죽는 것보다 못하다’고 한 해론(奚論), ‘장부는 모름지기 전쟁터에서 죽는 것이니, 어찌 자리에 누워 집사람의 손에서 죽어 옳으랴’고 한 소나(素那)와 ‘전진함이 있되 후퇴함이 없는 것이 사졸의 본분이니, 장부가 싸움에 임해 죽을지언정 어찌 무리를 따라 쫓겨 가랴’고 한 김영윤(金令尹) 등, 임전무퇴의 정신으로 끝까지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 예가 수없이 많다.
임전무퇴의 계율 속에는 국가의 존립이 개인의 삶보다 우선하며, 대(大)를 위해서는 소(小)를 희생할 줄 알아야 한다는 가치관이 나타나 있다. 개인의 삶은 국가라는 큰 울타리 속에서 보호되고 유지되므로,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는 국민이 목숨을 바쳐서라도 마땅히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라인이 지녔던 이같은 확고한 국가관과 사생관이 삼국 통일의 중요한 요인이 되고 밑거름이 되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 살생유택(殺生有擇): 생명체를 죽일 때는 가림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전수받을 때, 귀산(貴山)과 추항(箒項)이 살생유택(殺生有擇)에 대하여 다시 물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아마도 원광(圓光)이 승려 신분이면서도 살생을 금하라고 가르치지 않고 다만 선택하라고 한 것이 뜻밖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에 대해 원광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육재일(六齋日)과 봄, 여름철에는 살생치 아니한다는 것이니, 이것은 때를 택하는 것이다. 부리는 가축을 죽이지 않는다는 것이니 말, 소, 닭, 개와 같은 류를 말한 것이며, 작은 생물을 죽이지 않는 것이니 고기가 한 점도 되지 못하는 것을 말함이다. 이것들은 물건을 택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오직 그 소용되는 것을 많이 죽이지 아니할 것이니, 이것이 가히 세속의 선계(善戒)라고 할 것이다.”
살생유택의 계율에서 우리는 원광의 현실주의적 불교관과 실용적인 가치관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모든 생명체를 가엾게 여겨 가급적이면 살생을 피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부득이한 경우에는 그 시기와 종류와 수량을 적절하게 선택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육재일(六齋日)과 봄 여름을 피하고, 작고 어린 것을 피하며, 필요 이상으로 죽이지 말라는 가르침 속에는 생명존중 사상과 함께 현실적 효용성을 중시하는 삶의 지혜가 담겨 있다.
육재일(六齋日)이란 불교에서 매월 재계해야 하는 날로서 8일, 14일, 15일, 23일, 29일, 30일이 이에 해당되는데, 이날은 살생을 금(禁)하고 근신했다고 한다. 생명을 빼앗는 것이 근본적으로 죄가 된다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봄철과 여름철에 살생을 하지 말라는 것은 그때가 만물이 소생하고, 생장하며, 번식하는 시기이므로 종족 보존을 위해서도 살생은 피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작고 어린 것을 죽이는 것도 생명의 질서와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잔혹한 행위일 뿐 아니라,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손해가 되는 까닭이다.
유가에서도 이러한 사상은 변함이 없으니, 동식물을 가려서 살생하는 것이 윤리적인 면 뿐 아니라 실제 생활에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맹자(孟子)에 그물은 반드시 4촌(寸)의 그물 눈을 가진 것을 사용하였으며, 물고기가 한 자를 넘지 못하면 시장에 팔 수 없었고, 초목의 잎이 말라 떨어진 이후에야 도끼를 들고 산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였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모든 생명체는 근본적으로 귀천이 없으며, 독자적으로 살아갈 권리가 있다. 그러므로 나무와 풀, 벌레와 짐승, 인간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며 함께 어우러져 사는 것이 조물주의 뜻이요, 우리의 의무일 것이다. 살생유택(殺生有擇)의 정신은 예나 지금이나 꼭 필요한 덕목이라 하겠다.
원광법사(圓光法師)에는 아주 신기한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처음에 중(僧)이 되어 불법을 배우던 중, 나이 삼십에 이르러 한가한 곳에서 수도를 하려하여 삼기산(三岐山)에 홀로 거처하였다. 이런 수도생활에 들어간 지 4년이 지날 무렵에 한 중(僧)이 와서 그 근처에 따로 절을 짓고 있는지가 2년이 되었을 때의 일이었다. 이 새로 들어온 중(僧)은 수도를 하는 방행이 강맹(强猛)함을 좋아했고, 따라서 자연히 주술(呪術)을 좋아 닦고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법사(法師)가 밤에 독좌하여 송경(誦經)하고 있을 때였다. 홀연히 한 신(神)이 나타나서 법사의 이름을 부르며, “잘도한다. 잘도 한다. 그대의 수행이야말로 대개 수행하는 자는 많지만 법(法)과 같이 하는 자는 드물다”고 칭찬을 하면서 나타났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이상한 부탁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지금 이웃에 있는 중(僧)을 보니 곧장 주술(呪術)을 닦으나 얻는 바는 없을 것이고, 그 시끄런 소리가 남의 정념(靜念)을 방해한다. 또 그 처소가 나의 다니는 길을 방해하기 때문에, 지나다닐 때마다 매양 미운 마음이 날 정도이다. 법사는 나를 위하여 그에게 말하여 다른 곳으로 옮기도록 했으면 한다”고 말하곤 사라졌다.
이에 법사가 가서 말하기를“내가 어제밤에 신(神)의 말을 들으니, 스님이 다른 곳으로 옮겼으면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재앙이 있을 것 같다”고 말을 건넸다. 그러자 스님은 대답하기를 “수행이 높은 사람도 마귀에게 홀리는가?! 법사가 어찌 여우 귀신의 말에 근심을 하는가(法師何憂狐鬼之言乎)?”라고 하였다.
이 이야기에는 주인공이 세 명이 등장하고 있다. 그 하나는 원광법사(圓光法師)이고, 또 하나는 삼기산(三岐山)의 신(神)으로 묘사(描寫)된 여우이고, 또 하나는 바로 원광법사 옆에서 수련을 하고 있는 비구(比丘) 스님이다. 흥미있는 것은 이 삼기산신(三岐山神)인 여우에 대해서 비구스님이 정체를 잘 알고 있으면서 도전적인 자세를 나타내고 있다는 점이다. 나중에 보겠지만 이 삼기산신(三岐山神)은 화약에 관한 최고의 경지에 간 신(神)임이 들어나고 있다. 그런데 이 비구스님이 도대체 어떤 공부를 했길래, 짜증이 날 정도로 시끄러운 소리를 낸다고 이사해 줄 것을 요청하는 것이었을까? 십중팔구는 화약을 터트리며, 이를 계속 발전시키는 공부를 하고 있었으리라는 점이다.
그래서 이 화약의 대가(大家)인 삼기산신(三岐山神)이 거주하는 곳에 와서 ‘네가 터득한 것 나도 할줄 안다’는 도전적인 행위 말하자면 화약을 계속 터트리는 일에 삼기산신(三岐山神)은 그만 짜증이 났었고, 원광법사(圓光法師)에게 “애숭이가 시끄럽게 하니 좀 멀리 사라지게 충고(忠告) 좀 해달라”고 부탁을 한 것이 이 이야기의 전반부의 내용인 것이다.
아무튼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계속된다. 그날 밤에 또 신(神)이 와서 말하기를 “비구(比丘)가 무엇이라고 대답(對答)하더냐?” 법사(法師)가 신(神)의 노기를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아직 말하자 못하였으나 만일 굳이 말한다면 어찌 감히 듣지 않으리오?”고 하였다. 그러자 신(神)이 말하기를“내가 이미 (두 사람이 서로 대화한 내용을) 들었다. 법사는 어찌하여 없는 말을 보태어서 말하는가? 다만 잠자코 내가 하는 바를 보라”하고 나가버렸다.
그날 밤중에 벼락과 우레 소리가 났었다. 그 이틑날 가보니 산이 무너져 중(僧)의 살던 절을 묻어 버린 대 사태가 난 것이었다. 신이 와서 “법사가 보기에 어떠하냐?” 대답하여“매우 놀랐다”고 하였다.
그러자 신(神)은 놀라운 말을 하기 시작한다. “내 나이 3,000년에 가깝고 신술(神術)이 이 세상 신(神)들 가운데서도 가장 장(壯)하다. 이만 일은 적은 것이니 어찌 놀랄거리가 되랴. 또 장래의 일도 알지 못하는 것이 없고 천하의 일도 통달치 못함이 없다.”고 이야기를 꺼내고 있다는 점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 원광서학(圓光西學)에 나오는 이 이야기가 흥미있는 것은 원광법사에게 나타난 신(神)이 분명 화약을 써서 산을 무너트리고 있음을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위력이 산이 무너질 정도로 화약임을 말하고 있음이 들어나는데, 더욱 흥미있는 것은 나중에 이 기록 끝에 이미 이 신(神)의 정체가 검은 여우 임이 밝혀지고 있는데, 원광법사 옆에서 수련하다가 원광법사의 충고를 어겨 결과적으로 절과 더불어 묻혔던 비구 스님 역시 이미 검은 여우 임을 알고 있었기에,“법사가 어찌 여우 귀신에게 홀리는가”하고 말을 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이야기의 전반부가 화약의 신(神)인 삼기산신(三岐山神)에 도전장을 낸 비구니와의 사건에 의해 원광법사(圓光法師)와 삼기산신(三岐山神)이 인연이 맺어지게 되는 과정을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정작 가장 놀라운 이야기는 이 삼기산신(三岐山神)의 나이가 3,000년 즉 고조선 초기 때부터 있었던 신(神)이라고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신(神)이 가지고 있는 신비한 도술을 우리는 조선 신도(神道)라고 칭할수 있겠다. 아무튼 이런 인연에 의해 만난 원광법사에게 삼기산신은 적극적으로 중국에 건너가 불법을 배울 것을 권유하기 시작한다.
그 말의 내용은 이러했다. “지금 생각건대 법사가 이곳에 있어, 비록 자신에게 이로운 행실은 있겠으나, 남을 이롭게 하는 공은 없으니, 현재에 이름을 높이 들어내지 않으면 미래의 승과를 거두지 못할 것이다. 어찌 불법을 중국에서 배워 와서 지금으로부터 먼 미래의 혼미한 동해 주변의 사람들을 지도하지 않느냐” 하였다.
이에 원광법사가 말하기를 “중국에 도(道)를 배우고자함은 본시 소원이나 해륙(海陸)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자연 통하지 못할 뿐이다”고 하니 신(神)이 중국에서 가서 행할 계교(計巧)를 상세히 이끌듯 그 공부에 귀의(歸依)케 하였다. (神詳誘歸中國所行之計)
이런 원문에서 제일 염두에 두어야할 것은 바로 권유하듯 귀의(歸依)케 하였다는 내용이다. 이는 스승과 제자로 두 사람이 맺어져 있음을 뜻한다. 그런데 원광법사에게 삼기산신이 중국에서 써먹을 계교를 가르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가 피력되어 있는데 그 내용이 무척 놀라운 것이라는 점에서 우리의 눈을 번쩍 뜨게 한다.
수행의 효과가 개인이 아니라, 사회적인 이로움을 위해서 자신은 가르침을 주는 것이며, 특히 원광법사가 당대에 이름을 드높히 올려야만, 먼 훗날 그 결과를 거두게 하는 그런 공부를 가르치고, 더욱이 그 효과는 먼 훗날 혼미한 동해인을 지도하기 위함이다(導群迷於東海)로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즉 삼기산신이 말하고 있는 것은 원광법사에게 가르침을 주는 이유는 지금은 불법의 세상이니, 중국에서 불법을 배워 일단 세계적인 승려로써 명성을 쌓으라. 그러면, 그때부터 법사의 행실을 본 사람들이, 나 삼기산신으로부터 전수된 비법 화약에 대한 내용을 사람들이 기억하고, 이것이 앞으로 동해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지닌 혼미함을 제도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놀랍게도 이 삼기산신이 나중에 보여준 화약의 힘은 우리들이 원자폭탄, 수소폭탄이라고 하는 것과 동일하며, 또 이 원폭의 최초 희생자가 일본이기 때문에, 그의 예언은 그야말로 동해인)에게 하는 이야기임이 들어나는 것이다. 오늘날은 북한의 핵 문제까지도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이 삼국유사의 기록은 참으로 기이하다 하지 않을수 없는 것이다.
아무튼 이처럼 삼기산신과 원광법사는 스승과 제자 사이로 맺어졌으며, 삼기산신에게 공부를 마친 원광법사는 중국으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법사가 그 말대로 하여 중국에 가서 11년을 머물면서 삼장(三藏)에 널리 통하고, 겸하여 유학을 배웠다.
이런 원광서학(圓光西學)의 이야기는 결국 원광법사가 중국에 유학하는 것은 모두 이 삼기산의 신(神)으로 설명이 되어 있는 사람의 지도와 후원에 의해서 일어났음을 일수가 있는데, 우리는 그가 배운 공부가 결국은 화약(火藥)에 대한 내용과 아울러서 여러 도술이었음을 눈치 챌 수가 있는 것인데, 그중에 원광법사가 완벽히 터득한 것은 바로 오늘날 표현으로 말하자면 홀러그램(입체영상)을 만들어내는 공부였음이 들어난다. 여러 공부를 마치고 호구산(虎丘山)에 들어갔을때, 한 신자(信者)가 강의를 신청해서 강의를 하기 시작하자 그 명성이 알려져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었음을‘가시덤풀을 헤치고 바람을 메고 오는 자가 서로 이어 고기비늘과 같았다’라고 말을 할 정도에 이르렀던 것이다.
때마침 이때 중국은 수(隋)나라의 통일 과정이었다. 자연 수군(隋軍)이 양도(揚都)에 처들어 가는 과정에서 원광법사는 난병(亂兵)을 만나서 살해를 받게 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런데 이때 수군(隋軍)의 대장이 사탑(寺塔)이 불타는 것을 바라보고 뛰어가 구하려고 한즉, 도무지 불타는 광경은 없고 오직 원광이 탑 앞에 결박되어 장차 피살되려고 하였다. 대장이 괴상히 여기어 곧 풀어놓으니 위기에 임하여 원광법사가 신통능력을 부리는 재주가 비범(非凡)함이 들어난다고 삼국유사에는 묘사되어 있는 것이다. 원광법사의 홀러그램 창출 능력은 또한번 삼국유사에 묘사되어 있다.
원안(圓安)이 일찍이 원광법사의 사실을 적기를 “본국왕(本國王)이 병환이 들어 치료하여도 멸하지 아니하므로 원광을 청하여 궁중(宮中)에 들어와 따로 있게 하고 밤에 두 차례로 심오한 법을 설(說)케 하고 계(戒)를 받아 참회하게 하니 왕이 크게 신봉(信奉)하였다. 어느때 초야에 원광(圓光)의 머리를 보매 금색이 찬란하고 일륜(日輪)의 상(像)이 그의 몸을 따라 왔다. 왕후며 궁녀가 또한 함께 보았다. 이로부터 승심(勝心)을 다시 일으켜 병소(病所)에 머믈게 하니 오래지 않아 병(病)이 차도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원광법사가 삼기산신에게 화약에 대한 공부를 하였다는 것은 신라 사회에 유명한 소문이었던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이는 이미 원광법사가 삼기산에 수도하고 계실적에 비구스님이 삼기산신에게 도전할 정도로 이미 삼기산에는 화약에 최고가는 도인들과 신(神)들이 있다는 소문이 났었고, 따라서 원광법사가 중국에 유학가기 전에 삼기산에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그가 화약에 대한 고인이라는 것을 자연히 공표하는 것과 같았던 것이다.
세계적인 승려인 원광이 귀국하자, 젊은이나 늙은이를 막론하고 기뻐하였으며 신라왕 진평왕(眞平王) 자신이 직접 대면해 공경하고 성인과 같이 우러러 보았다(老幼相欣 新羅王金氏面申虔敬 仰若聖人)고 삼국유사는 전하고 있는데, 이 원광법사에게 직접 계(戒)를 요청한 사람은 화약을 다루는 사람인 귀산(貴山)과 추항(箒項)임이 들어나기 때문이다.
이런 원광법사가 귀국 후에 제일 먼저 찾아본 사람이 바로 삼기산의 신(神)인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하겠다. 왜냐하면 삼기산의 신(神)이 중국 유학을 권유했을 뿐만 아니라, 실제 원광법사가 중국에서 부린 도술인 홀러그램 창출 능력을 이미 예를 들은 절이 불타는 모양을 수군대장에게 보인 것 따위 바로 삼기산신에게 배웠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원광법사가 귀국후에 삼기산)의 신을 만났을 때의 일을 삼국유사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법사가 신에게 감사코자, 전에 거주하던 삼기산의 절에 갔더니 밤중에 신이 또 와서 이름을 불러 말하기를 “해륙의 도정을 어떻게 같다 왔느냐?” 하거늘 대답하여 “신의 홍은(鴻恩)을 입어 평안이 도착하였소이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삼기산신은 “나도 또한 같은 신에게 계(戒)를 준다”고 함이 기록되어 있다. 다시 말하여 삼기산신으로 내려오는 고조선 이래의 신도라는 법맥과 불법을 원광법사는 둘다 이어가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 두 법맥(法脈) 다시 말하면 불법의 세계와 신도의 세계가 윤회(輪廻)와 세대를 넘어 계속 서로 돕자는 생생상제(生生相濟)의 약속을 하게 된다. 이는 실로 인류 역사상 가장 놀라운 약속임에 분명하다.
이처럼 원광법사는 삼기산신에게 화약을 다루는 신도의 수행인으로써의 계율을 받은 것이다. 삼국유사에는 그 계율의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전혀 언급이 되고 있지는 않고 있다. 이런 수계(受戒)를 받은 후, 원광법사는 삼기산신에게 무척 어려운 청을 하게 된다.
그것은 신도(神道) 가문의 스승이 되는 삼기산신의 진면목을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이 청은 따지고 보면 묘한 부탁인 것이다. 신도 가문에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다양한 형태도 둔갑을 할 수 있음은 물론, 어떠한 모습일지라도 홀러그램으로써 예를 들면 절이 불타고 있는 모습등을 쉽게 보여 줄수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원광법사의 요청을 스승의 최고의 능력(能力)을 보여 주십시오로 해석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이를 원문(原文)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법사가 청하되 “신의 진용을 볼 수 있겠습니까?” 하니, 신이 말하기를 “내일 동쪽 하늘가를 바라보라”고 하였다. 법사가 이튿날 바라보니 큰 팔뚝이 구름을 뚫고 하늘 끝에 접하여 있었다(又請曰 神之眞容 可得見也 神曰 法師若見我形 平旦可望東天之際 法師明日望之 有大臂貫雲 接於天際).
이는 구름을 뚫고 나갈 정도의 폭약은 분명 원수폭에 해당하는 화약이 아닐 수 없다. 놀라운 것은 저 고조선 초기부터 있었던 삼기산신이 원광법사에게 “중국에 유학하러 가라!”고 권유한 본 뜻은 세계적인 승려라는 명성 아래, 후세의 동해인(東海人)들이 혼미함을 구제하려는 것에 그 뜻이 있었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원폭의 피해를 입은 일본인은 바로 동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아닌가. 또 북한의 핵 역시 동해 주변이 아닌가. 이런 면에서 볼 때, 삼기산신은 좁게는 동해인, 넓게는 미래의 인류에게 중요한 예언을 한 것이다.
“앞으로 내가 사용했던 핵무기 때문에 반드시 동해 사람들이 피해를 보게 될것이다. 따라서 화약에 대한 올바른 견해와 계율을 원광법사를 통해서 전해지는 이야기를 통해서 후세에 영원히 보여주기 위해서 제자인 원광에게 홀러그램의 비법을 전수했던 것이다.”라는 행간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 지구상에는 신비한 예언이 있지만 예를 들어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과 에드가 케이스(Edgar Cayce)의 예언 등이 있지만, 인류는 핵무기를 가지게 될 것이다. 따라서 화약에 대한 계율이 필요하다는 의미에서 예언을 내리고 효과적인 대처방안을 강구한 기록은 매우 드문데 바로 삼기산신은 예외였던 것이다.
이런 위력 핵폭탄을 통해 구름까지 닿을 정도의 팔뚝을 내민 위력을 보인 다음의 이야기를 삼국유사는 다음과 갈이 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날 밤에 신이 와서 또한 와서 이르기를 법사는 “내 팔뚝을 보았느냐?” 대답 하여 “보았는데 매우 기이 하더이다”라고 하였다. 이로 인하여 삼기산을 속칭 비장산(臂長山)이라 한다. 이 신도(神道)의 세계의 스승과 제자는 실로 짧은 두 번의 만남 즉 원광이 중국으로 떠나기 직전과 귀국한 직후의 만남을 합하여 두 번의 만남을 가진 뒤 별리의 슬픔을 서로 나누는 대화가 삼국유사에는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그 내용이 또 신이 이르되, “비록 이 몸이 있다 하여도 그 무상한 해 즉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므로 내가 머지않아 이 몸을 그 고개에 버릴 터이니 법사는 와서 기리 가는 혼을 보내 달라”고 하였다. 기약한 날을 기다려 법사가 가보니 옷 나무 칠같이 검은 늙은 여우 한 마리가 있어 헐떡이고 숨을 쉬지 못하다가 곧 죽었다.
삼기산신이 변해서 검은 여우로 변해서 본모습을 들어낸 채 죽었다는 것은 구미호(九尾狐)에 대한 잘못된 이미지를 남의 비위 특히 남자의 비위를 잘 맞추면서, 결국에는 몰래 실속있는 것을 다 빼가는 나쁜 이미지를 품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분명 부정적인 이미지를 준다.
그러나 고대의 구미호의 개념은 오늘날과는 전혀 달랐었다. 산해경(山海經) 해외동경(海外東經)에 기록되어 있듯이 “청구국(靑丘國)이 그 북쪽에 있는데 그 곳의 여우는 다리가 넷이고, 꼬리가 아홉이다. 이는 천하가 태평할 때면 세상에 나타나고 상서로움을 예고하는 것이 참으로 기이했다”로 표현되어 있는 것이다.
요컨대, 세계평화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화백(和白) 민주주의를 실현할 때, 일반시민들이 앉는 푸른 언덕의 나라 오늘날 표현으로 하면 직접적 민주주의로써 세계평화를 실현할 때, 나타내는 성스런 짐승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면에서, 삼국유사에 삼기산신이 구미호처럼 묘사되고 있는 것은 결국은 “세계평화를 위해서 원폭이 있는 환경 속에서도 인류의 상서스러움을 예언하는 뜻에서 원광법사에게 자신의 팔뚝을 원폭 광경을 보여준 것임을 밝히는 장면을 묵시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인 것이다.
이런 삼기산신과 원광법사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가 전개된 연후에, 세속오계(世俗五戒)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는 점에 우리는 눈을 돌려야 한다. 왜냐하면, 삼국유사에 적혀있는 내용은 원광법사 자신은 조선 신도 원폭을 비롯한 일체의 화약을 전수 받았고 또 신도의 계율을 받았지만, 그 내용은 전해져 내려오지 않고 있다. 요컨대, 화약에 대한 계율에서 세속인이 지켜야할 오계(五戒)가 있는 반면, 조선 신도 내부에서 지켜야하는 신도의 계율이 따로 있었던 것이다.
삼국유사 원문에는 화랑오계(花郞五戒)란 말이 없다. 단지 세속오계(世俗五戒)란 말이 있을 뿐인 것이다. 원광법사가 화약과 관련된 삼기산신의 제자라는 것은 워낙 신라사회에 유명한 일화였기 때문에, 원광은 화약을 다루는 세속인(世俗人)에게 오계(五戒)를 내린 것에 불과한 것이 삼국유사 기록에는 들어나는 것이다.
이제 이 세속오계(世俗五戒)를 받은 귀산(貴山)과 추항(箒項)등 신라 화랑들은 그 이름이 곧 그들의 사회적 의지나 사회적 역할과 관련해서 이름을 붙이는 관습이 있었다. 이런 면에서 보면, 귀산은 ‘산맥의 흐름을 귀하게 여겨야한다’는 뜻이고, 또 추항은 ‘산의 고개와 같은 목을 쓸어버린다’는 이름이다. 이런 이름을 보아서 이들은 오늘날로 말하자면 공병(工兵) 역할을 하는 것임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이런 역할이기 때문에 자연히 그들은 화약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고, 군복무를 하더라도 화약을 써야하는 입장에 있었으리라고 여겨지는 것이다. 따라서 세속오계(世俗五戒)라고 칭해지는 것은 바로 포괄적인 모든 화랑이 아닌, 화약을 다루는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계율이었음이 뚜렷이 나타난다고 하겠다.
이 기록에서 이들이 사량부(沙梁部) 사람이라고 소개되어 있는데, 특별히 유의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신라의 여섯 기능 부족 가운데 사량부란 바로 신라로 몰려드는 외국의 귀족 자체들 끼리 친분을 적극적으로 맺어주는 부족으로써 이를 총괄하는 직책이 바로 갈문왕(葛文王)이었기 때문이다. 신라왕들은 이 사량부에 의해서 친밀집단이 된 두 부족장이 결혼을 해야만 성골(聖骨)로 인정하고, 성골에서만 왕을 선출하는 것이 관례였다.
두 왕이 싸우면, 그 휘하의 백성은 고래 싸움에 새우 등터지는 격으로 많은 피해를 보기 때문에, 우리는 외부로부터 흘러 들어온 왕들도 받아 주는 이민 자유국이다. 단 우리는 왕들끼리 싸우는 것을 싫어하는 화백(和白) 민주주의를 펼치는 나라이다. 따라서 우리는 왕족끼리 화해의 결혼을 할 경우만 이를 성스런 뼈다귀(성골聖骨)로 인정하는 것이고, 이들에게서 왕을 선출한다는 정치 인류학적인 지혜를 신라사회는 지녔던 것이다.
아무튼 이런 외부에 흘러 들어온 부족장들끼리의 결혼이 성립하려면, 그 전에 부족의 귀족 자제들이 서로 친교함이 있어야 하고, 이럴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화약을 다루는 공병(工兵)들의 상호교류 방식이 아닐수 없다.
다시 말해 이 살상력있는 화약을 어찌 다루어야한단 말인가. 만약 새로 유입된 부족들끼리 서로 교류하다가 다툼이 있을 때, 우리들이 하는 일은 화약을 다루는 사람들 끼리의 교류인데, 이 폭약으로써 싸울 수 있단 말인가 하는 고뇌가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삼국유사 원문에는 ‘바른 마음을 먹지 않으면, 욕을 면치 못할 것이 아닌가’하는 현실적인 고민을 한 것이다.
이때 원광법사가 귀국하여 가슬갑(嘉瑟岬)에 머물러 있다 함을 들었다. 그래서 귀산과 추항은 원광법사에게 찾아가기를 결심하는 장면이 삼국유사에는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는 것이다. 두 사람이 찾아가서 말하기를 “세속의 선비가 우매하여 지식이 없으니 원컨대 일언(一言)을 주시어 종신(終身)의 계(戒)를 삼게 하소서.”
이 말에서 우리가 제일 유념해야하는 말이 “우리는 지식이 없다”고 고백을 했다는 점이다. 이 말을 현대에도 적용이 된다. 도대체 우리가 핵무기를 통제할 무슨 지식이 있단 말인가. 이런 요구 앞에 내려진 것이 바로 세속오계(世俗五戒)이다. 요컨대 이는 화약을 세속에서 다룸에 있어 필요한 다섯가지 계율의 줄임말인 것이다.
원광법사는 다음과 같이 계율을 내렸다. 화약으로써 최고 통치권을 범하지 말라(사군이충 事君以忠). 화약으로써 인류에게 친밀감을 주는 인류를 키우는 문화와 자연을 파괴치 말라(사친이효 事親以孝). 화약으로써 동료를 살해하지 말라(붕우유신 朋友有信). 화약은 그 본질상 한번 사용하면 물릴 수 없으니, 사용할 때에는 반드시 성취할 것을 이루어야한다(임전무퇴 臨戰無退). 화약으로써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를 살상할 때에는 각별한 선택이 필요하다(살생유택 殺生有擇).
삼국유사에 전해져 내려오는 이 이야기는 인류가 어찌 화약을 다루어야 하는가? 함에 대한 사전의 서사(徐事)가 있었음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세속오계(世俗五戒)
세속오계는 한국 고대사에서 중요한 윤리적 지침으로, 특히 신라 시대의 화랑도와 관련이 깊습니다. 이 글에서는 세속오계를 만든 원광, 화랑 세속오계, 그리고 세속오계의 윤리적 의미에 대해 깊이 있게 탐구합니다. 세속오계는 단순히 고대의 교훈을 넘어서 현대 사회에도 여전히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이를 통해 과거와 현재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원광의 세속오계
원광(圓光)은 신라의 고승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는 화랑 세속오계를 제정한 인물로 널리 인식되고 있습니다. 세속오계는 신라의 화랑도를 교육하는 데 사용된 윤리적 지침으로, 신라 사회의 도덕적 기초를 형성했습니다. 원광이 제시한 이 지침들은 신라의 젊은 귀족들인 화랑에게 중요한 교육 내용이었으며, 그들의 정신적, 윤리적 성장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원광은 이 지침을 통해 신라 사회에 필요한 도덕적 가치와 사회적 책임을 강조했으며, 이는 신라의 중앙집권화 및 국가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세속오계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군에게 충성을 다할 것(군사무적, 君事無逆) 부모에게 효도할 것(부모유대, 父母有大) 친구와 신의를 지킬 것(형제유의, 兄弟友懿) 전투에서 물러서지 않을 것(임전무퇴, 臨戰無退) 살생을 자제할 것(살생유택, 殺生有擇) 이 지침들은 신라 사회의 근본적인 윤리적 원칙을 제시하며, 화랑도의 정신적 지표가 되었습니다.
화랑 세속오계
화랑 세속오계는 신라 시대의 젊은 귀족 전사 계층인 화랑(花郞)들을 위한 도덕적 지침이었습니다. 화랑도는 신라의 군사적, 정치적 엘리트를 양성하는 제도로, 세속오계는 이들에게 필요한 도덕적, 윤리적 가치를 교육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신라의 중앙집권화 및 국가 통합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화랑 세속오계는 신라의 젊은이들에게 충성, 효도, 용기, 신의, 자제력과 같은 덕목을 심어주었습니다.
화랑 세속오계는 신라 사회의 국가 이념과 사상을 형성하는 데 중추적 역할을 했으며, 후세에도 한국의 전통적인 가치관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특히, 화랑도의 교육은 신라의 통치자들과 지도층이 국가 운영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는 데 중요한 수단이었습니다.
세속오계의 윤리적 의미
세속오계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한 윤리적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지침들은 개인의 도덕성과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며, 현대 사회에서도 유용한 지침으로 활용될 수 있습니다. 세속오계는 단순히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현재의 윤리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지혜를 담고 있습니다.
이 지침들은 개인이 사회 구성원으로서 가져야 할 기본적인 덕목들을 명확하게 제시하며, 사회적 조화와 개인의 성장을 위한 기초를 마련합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충성, 효도, 용기, 신의, 자제력은 중요한 가치로 남아 있으며, 이는 개인의 성장 뿐만 아니라 사회적 안정과 발전에도 기여합니다.
세속오계는 다음과 같은 윤리적 가치를 강조합니다. (1)충성과 헌신입니다. 개인이 사회와 국가에 대한 충성과 헌신을 강조합니다. (2)가족과 사회에 대한 책임입니다. 가족과 사회에 대한 책임감을 강화합니다. (3)인간관계의 중요성입니다. 친구와의 신의, 상호 존중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4)용기와 자제력입니다. 위험한 상황에서의 용기와 자제력의 중요성을 부각합니다. (5)생명의 존중입니다. 생명을 존중하는 태도를 강조합니다.
요약
세속오계는 신라시대 원광에 의해 제정되어 화랑도의 중요한 윤리적 지침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는 신라 사회의 도덕적, 사회적 기초를 마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화랑도의 정신적 지표로 작용했습니다.
화랑 세속오계는 신라의 젊은 귀족 전사 계층에게 필요한 도덕적, 윤리적 가치를 교육하는 데 사용 되었으며, 이는 신라의 중앙집권화와 국가 통합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세속오계는 여전히 중요한 윤리적 가치를 지니며, 개인의 도덕성과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유용한 지침으로 활용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윤리적 가치들은 개인의 성장과 사회적 조화를 위한 기초를 제공합니다.
▶️ 世(인간 세/대 세)는 ❶회의문자로 卋(세)의 본자(本字)이다. 세 개의 十(십)을 이어 삼십 년을 가리켰으며 한 세대를 대략 30년으로 하므로 세대(世代)를 뜻한다. 삼십을 나타내는 모양에는 따로 글자가 있으므로 이 글자와 구별하기 위하여 모양을 조금 바꾼 것이다. ❷상형문자로 世자는 ‘일생’이나 ‘생애’, ‘세대’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世자는 나뭇가지와 이파리를 함께 그린 것이다. 世자의 금문을 보면 나뭇가지에서 뻗어 나온 새순이 그려져 있었다. 그래서 世자의 본래 의미는 ‘나뭇잎’이었다. 나무는 일 년에 한 번씩 싹을 틔운다. 나뭇잎이 새로 돋는 것을 보고 봄이 오는 것을 알 수 있었으며 나뭇잎이지는 것을 보며 한해가 끝나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世자는 후에 사람의 생애에 비유해 ‘생애’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世자가 가차(假借)되면서 소전에서는 여기에 艹(풀 초)자와 木(나무 목)자를 더한 葉(잎 엽)자가 ‘나뭇잎’이라는 뜻을 대신하게 되었다. 그래서 世(세)는 (1)지질(地質) 시대(時代)의 구분(區分)의 한 단위(單位). 기(紀)를 잘게 나눈 것 (2)일부(一部) 국가(國家)에서) 왕조(王朝)의 임금 순위(順位)를 나타내는 말. 대(代). 이세(二世) 등의 뜻으로 ①인간(人間) ②일생(一生) ③생애(生涯) ④한평생 ⑤대(代), 세대(世代) ⑥세간(世間: 세상 일반) ⑦시대(時代) ⑧시기(時期) ⑨백 년(百年) ⑩맏 ⑪세상(世上) ⑫성(姓)의 하나 ⑬여러 대에 걸친 ⑭대대(代代)로 전해오는 ⑮대대(代代)로 사귐이 있는 ⑯대를 잇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대신할 대(代), 지경 역(域), 지경 경(境), 지경 계(界), 지경 강(疆)이다. 용례로는 세대(世代), 세상(世上), 세상에 흔히 있는 풍속을 세속(世俗), 그 집에 속하는 신분이나 업무 등을 대대로 물려받는 일을 세습(世習), 조상으로부터의 대대의 계통을 세계(世系), 주로 명사 앞에 쓰여서 세상에서 흔히 말함의 세칭(世稱), 온 세상이나 지구 상의 모든 나라를 세계(世界), 세상의 풍파를 세파(世波), 세상의 돌아가는 형편을 세태(世態), 숨어 살던 사람이 세상에 나옴을 출세(出世), 현실을 속되다고 보는 처지에서 현실 사회를 일컫는 말을 속세(俗世), 일신 상의 처지와 형편을 신세(身世), 뒷 세상이나 뒤의 자손을 후세(後世), 현재의 세상으로 이 세상을 현세(現世), 죽은 뒤에 가서 산다는 미래의 세상을 내세(來世), 가까운 지난날의 세상을 근세(近世), 잘 다스려진 세상으로 태평한 시대를 청세(淸世), 세상에 아첨함을 아세(阿世), 이 세상에서 살아감을 처세(處世),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세상만사(世上萬事), 자손 대대로 이어져 내림을 세세손손(世世孫孫), 세상의 도의와 사람의 마음을 세도인심(世道人心),세상 물정과 백성의 인심을 세태인정(世態人情), 세상일의 형편을 세간사정(世間事情), 세상이 그릇되어 풍속이 매우 어지러움 세강속말(世降俗末), 대대로 내여 오며 살고 있는 고장을 세거지지(世居之地), 여러 대를 두고 전하여 내려옴 세세상전(世世相傳), 대대로 나라의 녹봉을 받는 신하를 세록지신(世祿之臣), 세상일은 변천이 심하여 알기가 어려움을 세사난측(世事難測), 신세대가 구세대와 교대하여 어떤 일을 맡아 본다는 세대교체(世代交替) 등에 쓰인다.
▶️ 俗(풍속 속)은 회의문자이나 형성문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 圱(속)은 고자(古字)이다. 음(音)을 나타내는 谷(곡; 골짜기, 속)과 사람(人)이 모인 곳에 생긴 풍습이라는 뜻이 합(合)하여 풍속을 뜻한다. 谷(곡)은 물이 잇달아 흘러 그치지 않는 시내, 여기에서는 그와 같이 그치지 않는 사람의 욕심을 뜻한다. 사람이 보통으로 그렇게 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기분에서 지방(地方)마다 펴져 있는 풍습, 흔히 있는 일, 범속함을 말한다. 그래서 俗(속)은 (1)시속이나 세속(世俗) (2)종속환이 등의 뜻으로 ①풍속(風俗), 관습(慣習) ②속인(俗人) ③범속(凡俗)하다(평범하고 속되다) ④평범(平凡)하다, 심상(尋常)하다, 흔하다 ⑤대중적이다, 통속적이다 ⑥저급하다, 품위가 없다, 비속하다 ⑦저속하다(품위가 낮고 속되다), 속되다 ⑧새로운 맛이 없다, 신기하지 않다 따위의 뜻이 있다.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맑을 아(雅)이다. 용례로는 예로부터 전하여 내려와 사람들이 마음속에 깊은 동감을 얻고 널리 퍼진 격언을 속담(俗談), 세간에서 두루 쓰이는 문자로서 정식의 자체가 아닌 한자를 속자(俗字), 현실을 속되다고 보는 처지에서 현실 사회를 일컫는 말을 속세(俗世), 세상의 일반 사람을 속인(俗人), 세속에서 보통 일컫는 칭호를 속칭(俗稱), 본 이름이나 학명 외에 흔히 부르는 속된 이름을 속명(俗名), 속된 학설을 속설(俗說), 속된 세계라는 뜻으로 현실 세계를 속계(俗界), 명예나 이익에 끌리는 속된 마음을 속심(俗心), 세속적인 세상을 속환(俗寰), 민간에 널리 불리던 속된 노래를 속요(俗謠), 세속적인 여러 가지 번거로운 일을 속용(俗用), 속된 물건이나 사람을 속물(俗物), 통속적으로 쓰이는 저속한 말을 속어(俗語), 살아 나가는 데 얽매인 너저분한 세상일을 속루(俗累), 인격과 성품이 저속하고 보잘것 없는 사람을 속한(俗漢), 민간의 풍속을 민속(民俗), 품격이 낮고 속됨을 저속(低俗), 낮고 천한 풍속을 비속(卑俗), 세상에 흔히 있는 풍속을 세속(世俗), 후세에 끼친 풍속을 유속(遺俗), 야만적인 풍속을 만속(蠻俗), 그 지방의 특유한 습관이나 풍속을 토속(土俗), 오래된 옛 풍속을 고속(古俗), 세속에 얽매임을 구속(拘俗), 범용하고 속되어 이렇다 할 특징이 없음을 용속(庸俗), 옛 풍속이나 묵은 풍속을 구속(舊俗), 속태를 벗고 세속을 초월함을 탈속(脫俗), 세속으로 돌아감을 환속(還俗), 아름답고 좋은 풍속을 미풍양속(美風良俗), 중도 아니고 속인도 아니라는 뜻으로 어중간한 것을 두고 이르는 말을 비승비속(非僧非俗), 어떤 고장에 가면 그곳의 풍속을 따르고 지킴을 입향순속(入鄕循俗), 아직도 속된 습관을 버리지 못하였다는 뜻으로 한번 물든 속물근성은 버리기 어렵다는 말을 미능면속(未能免俗), 습관과 풍속은 끝내 그 사람의 성질을 바꾸어 놓는다는 습속이성(習俗移性), 사람은 날 때는 다 같은 소리를 가지고 있으나 성장함에 따라 언어나 풍속이나 습관이 달라진다는 동성이속(同聲異俗) 등에 쓰인다.
▶️ 五(다섯 오)는 ❶지사문자로 乄(오)와 동자(同字)이다. 숫자는 하나에서 넷까지 선을 하나씩 늘려 썼으나 다섯으로 한 단위가 되고 너무 선이 많게 되므로 모양을 바꿔 꼴로 썼다. 五(오)는 나중에 모양을 갖춘 자형(字形)이다. ❷상형문자로 五자는 ‘다섯’이나 ‘다섯 번’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五자는 나무막대기를 엇갈려 놓은 모습을 그린 것이다. 고대에는 나무막대기나 대나무를 일렬로 나열하는 방식으로 숫자를 표기했다. 이것을 ‘산가지(算木)’라 한다. 보통 1~3까지는 막대기를 눕히는 방식으로 숫자를 구분했지만 4를 넘어가면 혼동이 생겼다. 이것을 구별하기 위해 막대기를 엇갈리게 놓는 방식으로 표시한 것이 바로 五자이다. 갑골문에서의 五자는 二사이에 X자를 넣은 방식으로 표기했었지만, 해서에서는 모양이 바뀌었다. 그래서 五(오)는 다섯이나 오(伍)의 뜻으로 ①다섯, 다섯 번 ②다섯 곱절 ③오행(五行: 우주 만물을 이루는 다섯 가지 원소) ④제위(帝位: 제왕의 자리) ⑤별의 이름 ⑥다섯 번 하다, 여러 번 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사람이 지켜야 할 다섯 가지의 떳떳한 도리를 오륜(五倫), 한 해 가운데 다섯째 달을 오월(五月), 그 달의 다섯째 날 또는 다섯 날을 오일(五日), 음률의 다섯 가지 음을 오음(五音), 다섯 가지 곡식(쌀 보리 조 콩 기장)을 오곡(五穀), 다섯 가지의 감각(시각 청각 미각 후각 촉각)을 오감(五感), 다섯 가지 빛깔 곧 푸른빛 누른빛 붉은빛 흰빛 검은빛의 다섯 가지 색을 오색(五色), 다섯 가지 계율이나 계명을 오계(五戒), 퍽 많은 수량을 나타내는 말을 오만(五萬), 다섯 가지 욕심이라는 오욕(五慾), 사람이 타고 난 다섯 가지 바탕을 오사(五事), 짙은 안개가 5리나 끼어 있는 속에 있다는 오리무중(五里霧中), 오십보 도망한 자가 백보 도망한 자를 비웃는다는 오십보백보(五十步百步), 오십이 되어 천명을 안다라는 오십천명(五十天命), 다섯 수레에 가득 실을 만큼 많은 장서라는 오거지서(五車之書), 좀 못하고 좀 나은 점의 차이는 있으나 본질적으로는 차이가 없다는 오십소백(五十笑百), 닷새에 한 번씩 바람이 불고 열흘만에 한번씩 비가 온다는 오풍십우(五風十雨) 등에 쓰인다.
▶️ 戒(경계할 계)는 ❶회의문자로 誡(계)와 통자(通字)이다. 창 과(戈; 창, 무기)部와 양손 모양의 글자로 이루어졌다. 창을 들고 대비하는 모습이 전(轉)하여 경계(警戒)하다의 뜻이 되었다. ❷회의문자로 戒자는 '경계하다'나 '경비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戒자는 戈(창 과)자와 廾(두손 받들 공)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廾자는 무언가를 잡으려고 하는 양손을 그린 것이다. 이렇게 양손을 그린 廾자에 戈자가 더해진 戒자는 창을 들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戒자는 창을 들고 주위를 경계한다는 뜻으로 '경계하다'나 '경비하다'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그래서 戒(계)는 (1)죄악(罪惡)을 저지르지 못하게 하는 경계(警戒)나 훈계(訓戒) 등의 규정으로 신라(新羅) 화랑(花郞)의 세속 오계(世俗五戒)와 같은 따위 (2)승려(僧侶)가 지켜야 할 행동 규범으로 오계(五戒), 십계(十戒), 이백 오십계(二百五十戒), 오백계(五百戒), 사미계(沙彌戒), 보살계(菩薩戒), 비구계(比丘戒) 등이 있음 (3)훈계(訓戒)를 목적으로 하여 지은 한문(漢文) 문체(文體)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경계(警戒)하다, 막아 지키다, 경비(警備)하다 ②조심하고 주의하다, 삼가다(몸가짐이나 언행을 조심하다) ③타이르다, 알리다 ④이르다, 분부(分付)하다 ⑤재계(齋戒)하다(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다) ⑥이르다(어떤 장소나 시간에 닿다), 도달하다 ⑦지경(地境: 땅의 가장자리, 경계), 경계(境界) ⑧경계(警戒), 훈계(訓戒) ⑨재계(齋戒: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부정(不淨)한 일을 멀리함) ⑩승려(僧侶)가 지켜야 할 행동 규범(規範) ⑪문체(文體)의 이름,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징계할 징(懲), 경계 잠(箴), 경계할 경(警), 재계할 재(齋)이다. 용례로는 종교나 도덕상 꼭 지킬 조건을 계명(戒命), 승려가 계를 받은 후에 스승으로부터 받은 이름을 계명(戒名), 불자가 지켜야 할 규범을 계율(戒律), 세상 사람들에게 경계하도록 함을 계세(戒世), 삼가하여 조심하고 두려워 함을 계구(戒懼), 경계하여 삼감을 계신(戒愼), 경계하여 고함으로 글월을 띄워서 일정한 기한 안에 행하도록 재촉하는 일을 계고(戒告), 타일러서 금지함을 계금(戒禁), 여색을 삼가 경계함을 계색(戒色), 마음을 놓지 아니하고 경계함을 계심(戒心), 술 마시기를 삼가고 경계함을 계음(戒飮), 경계하여 꾸짖음을 계책(戒責), 잘못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미리 조심하는 것을 경계(警戒), 지나날 잘못을 거울로 삼아 다시는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하는 경계를 경계(鏡戒), 허물이나 잘못을 뉘우치도록 나무람을 징계(懲戒), 타일러서 경계함을 훈계(訓戒), 집안의 규율을 가계(家戒), 삼가고 조심함을 긍계(兢戒), 지난 잘못을 거울로 삼아 다시는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하는 경계를 감계(鑑戒), 타이르면서 훈계함을 권계(勸戒), 계를 받지 아니함을 무계(無戒), 부정한 일을 멀리하고 심신을 깨끗이 함을 재계(齋戒), 슬며시 들러 비유하는 말로 훈계함을 풍계(諷戒), 눈 앞에서 바로 타이름을 면계(面戒), 잘못 되는 일이 없도록 스스로 경계함을 자계(自戒), 계율을 깨뜨리어 지키지 아니함을 파계(破戒), 베를 끊는 훈계란 뜻으로 학업을 중도에 폐함은 짜던 피륙의 날을 끊는 것과 같아 아무런 이익이 없다는 훈계를 이르는 말을 단기지계(斷機之戒), 한 사람을 벌주어 백 사람을 경계한다는 뜻으로 한 가지 죄와 또는 한 사람을 벌줌으로써 여러 사람의 경각심을 불러 일으킴을 이르는 말을 일벌백계(一罰百戒), 앞의 수레가 뒤집히는 것을 보고 뒤의 수레는 미리 경계한다는 뜻으로 앞사람의 실패를 본보기로 하여 뒷사람이 똑같은 실패를 하지 않도록 조심함을 이르는 말을 복거지계(覆車之戒), 서리를 밟는 경계라는 뜻으로 서리가 내리는 계절이 되면 머지 않아 얼음이 얼므로 조짐을 보아 미리 재앙에 대비하는 경계를 이르는 말을 이상지계(履霜之戒), 장래가 촉망되는 자식은 위험을 가까이해서는 안된다는 경계를 이르는 말을 수당지계(垂堂之戒), 제 분수를 알아 만족할 줄 아는 경계를 이르는 말을 지족지계(止足之戒), 제사를 지내거나 신성한 일 따위를 할 때 목욕해서 몸을 깨끗이 하고 마음을 가다듬어 부정을 피한다는 말을 목욕재계(沐浴齋戒), 계율을 어기면서 부끄러워함이 없음 또는 그 모양을 이르는 말을 파계무참(破戒無慙)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