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 동포들이 한국에 정착하면서 가장 곤혹스러워 하는 부분 중 하나가 간판에 적혀 있는 외국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곳에서
태어나 여태껏 살아 온 사람도 ‘헤어 샵’이 ‘미용실’임을 모르는 경우가 허다한데 북에서 온 사람들이 모르는 건 당연하다.
텔레콤, 뱅크, 컨설팅 등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외래어가 주변에 너무 흔해 이를 순 우리말로 표기할 엄두조차 못 낼 판이다. 이런
외래어 표기 현상은 연예계, 문화, 예술계에서 더욱 두드러지는 양상이다. 젊은 가수, 탤런트, 배우 이름 중 상당수는 외국어를 그대로 옮겼거나
모방형태로 쓰고 있다.
한 때 청소년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서태지’ 란 가수가 있었다. 그의 본명은 정현철이다. 그런데 그의 이름이 Stage(무대)란
영어 발음을 한국어로 옮겨 쓴 것이란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姓이 서 씨이고 이름이 태지 인걸로 아는 사람이 많다. 노래 가사도
그렇고 극중의 대사까지도 영어가 혼용돼 있어 금방 알아듣고 이해하지 못하면 소외되기 십상이다.
이렇게 외래어 사용 추세가 폭증하고 있는 배경에는 몇 가지 원인이 있다. 해당 용어를 우리말로 정확히 표현할 방법이 없어 외국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다. 자동차의 ‘엔진’이라 든 지 ‘휠’ 같은 말은 딱히 우리말에 맞는 단어가 없다.
다음은 외국에서 오래 거주한 사람이 우리말에 익숙지 못해 대화 도중 부지불식간에 튀어나오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 태어나
어릴 적에 외국으로 이민한 청소년이 고국에 다시 왔을 때 언어가 어눌한 것에 대해선 별로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다.
문제는 외국에 체류한 지 고작 수 년 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곧 잘 대화 속에 외래어가 섞여 나오는 사람이다. 생활 습관에서라기보다
과시욕 때문에 이런 버릇이 생겼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보다 더 큰 문제는 세계화를 마치 ‘외국어 사용 시대’로 착각하고 있는 요즘의
추세다. 특히 이런 경향이 공공기관에서 더욱 두드러진다는 사실은 매우 걱정스러운 일이다.
‘원스톱 고객만족’,’울산시 인센티브’,’태스크 포스팀 구성’,’지역 R&D 역량강화’,’하수관거 BTL’등은 상당한
경륜이나 학식이 없으면 이해 할수 없는 말들이다. 지난 2006년 ‘아시아 태평양 경제협력체’ 회의가 부산에서 열렸을 때 행사 주최 측은
회의장 일원의 이름을 ‘누리 마루’라고 했다. ‘온 누리’라고 할 때 사용하는 ‘누리’는 세상을 의미하는 순 우리말이다. ‘마루’는
‘산마루’에서 어원을 참고 할 수 있듯이 ‘꼭대기, 정상’을 뜻하는 말로 통한다. 이 두 어원을 합친 ‘누리 마루’는 ‘세상의 꼭대기,
정상’이란 뜻이 돼 아름다운 우리말을 그대로 구현한 셈이다.
4·19 혁명 직후 우리 것을 찾고자 하는 분위기에 편승해 ‘이화 여자 대학교’를 ‘배꽃 계집 큰 배움 집’으로 고쳐 썼다가
흐지부지 된 적이 있었다. 한문에 능했던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반발로 시작됐던 이 움직임이 유야무야 된 것은 동기가 정치적 이였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지나치게 감정적이고 순리에 맞지 않는 ‘우리말 쓰기’는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온다는 단적인 예다. 하지만 이런 정치적·사회적 분위기과
상관없이 우리말을 사용코자 하는 움직임이 요즘은 아예 사라졌다. 한글날이 다가오면 의례적으로 잠시 등장할 정도다.
울산시가 ‘울브라이제이션’이란 외국어를 가끔 쓴다. 아마 세계화를 의미하는 ‘글로블라이제이션’에다 울산의 ‘울’을 보태서 조립한
용어인 모양인데 아쉽다. ‘한글 도시’란 곳이 이 정도이어선 안 되는 것 아닌가. ‘배꽃 큰계집 배움 집’ 까진 아니더라도 ‘누리 마루’ 정도로
고쳐보려는 노력은 필요하지 않을까.
기사입력: 2017/03/14 [15:45] 최종편집: ⓒ 광역매일
http://www.kyilbo.com/index.htm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