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 보라(Come and see)(요1:43-46)
2014.8.3(김상수목사)
“43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44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46 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가로되 와 보라 하니라”(요1:43-46)
세월호 사건과 그와 연관된 유병언씨 일가에 대한 수사가 장기화 되고 있다. 몇 일전 뉴욕타임즈 일면에 '몰락으로 이끈 탐욕(Greed before the fall)'이라는 제목으로 유병언씨의 죽음에 대한 기사가 크게 났다. 뉴욕타임즈는 수만 명의 신도가 그를 따르고, 국내외에 200채가 넘는 아파트와 재벌 수준의 많은 기업을 거느리고, 파리 베르사유 궁전의 오랑주리 박물관에서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까지 초청하면서 사진전시회를 열었던 것을 거론하면서, 이러했던 유병언씨가 매실 밭에서 홀로 쓸쓸히 죽어간 것은 탐욕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성경적으로 본다면 유병언씨의 탐욕은 우상숭배요, 그 배후에는 어둠의 영인 마귀 사단이 있으며, 이런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엡5:3-5). 결국 유병언씨와 그 추종자들이 믿은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맘몬의 영이다. 그동안 하나님인양 속이고 나타난 어둠의 영에게 철저히 속고 이용당한 것이다.
그런데 이번 세월호 사건은 되돌아볼수록 안타까운 점들이 참 많이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안타까운 것은 잘못된 안내방송이다. 선장과 선원들이 배를 빠져나오기 전에 ‘탈출하라!’는 안내방송 한 마디만 했더라면 많은 학생들이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한 마디를 하지않고 자신들만 빠져나왔다. 심지어 배에서 빠져나오기 전에 배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움직이지 말고 있으라’는 잘못된 방송만 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살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죽고 말았다.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수많은 말들을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의 한 마디, 그 한 마디가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만약 우리들이 큰 길을 건너기위해서 신호등 앞에 서있는데, 어린아이가 위험한 차도로 걸어 나간다면 어떻게 하는가? 당연히 “얘! 안 돼! 이리와!”라고 소리치며, 손을 내밀어 붙잡지 않겠는가? 이것이 생명을 살리는 한 마디다. 영적으로 볼 때,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의 상태가 이 어린아이와 같다. 이것이 복음전파의 긴급성이다.
오늘 본문은 빌립이 나다나엘을 예수님 앞으로 인도하는 장면이다. 이 말씀을 보면 빌립으로부터 메시야를 만났다는 말을 들은 나다나엘의 첫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지금으로 말한다면 전도할 때, 반대의견에 직면한 것이다. 46절 상반절을 보라.
“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1:46 상반절)
우리들도 이런 유사한 상황을 직면할 때가 있다. 어렵게 용기를 내서 예수님이나 교회에 대한 말을 꺼냈더니, 기껏 상대방으로 부터 “왜 예수만 믿어야해?”,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조상도 없나?”, “하나님이 계시다면 세상이 왜 이렇게 불의해?”, “돈 없으면 교회도 못 다녀”, “개독들”, “난 절에 다녀요” 등과 같은 말들을 듣게 되는 수가 있다. 이럴 때 전도경험이 많은 분들이나 지식이 있는 분들을 차근차근 설명을 잘해주겠지만, 그렇지 못한 분들은 정말 당황하게 된다.
오늘 본문에 보면 그때 빌립은 긴 설명을 하지 않고 “와 보라(Come and see)"는 자신있고 확신에 찬 한 마디를 말했다. 그래서 나다나엘이 이 말을 듣고 예수님께 나아가게 된다.
“.....빌립이 가로되 와 보라(Come and see) 하니라”(요1:46 하반절)
우리들도 유창한 설명은 못해도 최소한 빌립처럼 “와 보라”라는 정도의 말은 오래된 신자든 초신자든 간에 누구나 할 수 있다. 이 한 마디가 생명을 살린다. 일단 교회에 나와서 목사님의 말씀을 들어보게 하는 것이다. 또 성경공부에 참석시켜서 기초부터 배우게 할 수도 있다. 사실 가만 생각해보면 직접와서 보게 하는 것 만큼 확실한 것도 없다. 자신감이 없으면, 와보라는 말을 하지 못한다. 그런 면에서 “와 보라” 방법은 가장 쉬우면서도, 가장 확실한 방법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우리들이 이처럼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나 교회에 대한 말을 꺼낼 때, 우리는 단순히 소리를 전달하는 스피커요 나팔일 뿐인 것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나팔일 뿐이고, 나팔수는 성령님이시다. 아무리 언변이 좋고, 교회 오래 다녔다고해서 상대방의 마음을 쉽게 열고, 신앙이 초보인 사람은 못여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마음을 열고, 듣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사도행전 16장 14절에서도 빌립보에서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바울이 말을 잘해서 루디아가 마음을 연 것이 아니다. 주님께서 그녀의 마음을 여셨다. 다같이 함께 읽자.
“두아디라 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행16:14)
한국교회 초기에 최권능목사님은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고 다녔다고 한다. 그런데도 그 한 마디에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돌아왔다. 어떤 권사님은 집집마다 다니면서 “이 집 예수믿소?”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안믿소!”라고 하면, “믿으십시다!”라고 하고, “믿소!”라고 하면 “더 잘믿으십시다!”라고 했다고 한다. 어느 날 그 권사님이 어떤 집 문을 두드리며 “이 집 예수믿소?”라고 했더니, 마침 일찍 퇴근해 있던 집주인 대학교수가 “안믿소”라고 했다. 그래서 권사님은 “예수 믿으십시다”라고 했더니, 그 교수가 자기도 모르게 “그러십시다”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모두가 그들을 도구 삼아서 성령님께서 친히 증거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마귀는 전도해야할 이유보다는 전도하지 못할 이유에 우리의 신경을 더 집중하게 만든다. 너무도 많은 성도들과 전도자들이 여기에 속아서 복음의 안내방송 스위치를 꺼버린다. 그 사이에도 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간다.
그런가하면 또한 마귀는 복음방송을 못하게 할 뿐 아니라, 잘못된 방송은 더욱 부추 키게 하기도 한다. 바로 이단들이다. 이단은 영적으로 잘못된 안내방송이다. 방송 안한 것 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잘못된 방송이다. 이단들은 천국 가는 길인 것처럼 말 하면서 사실은 지옥 가는 길로 사람들을 안내한다. 마귀는 이런 사람들을 갖고 놀다가 결국에는 유병언씨처럼 비참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복음을 전해야 한다. 사람들을 주님 앞으로 데려와야 한다. 주님이 오순절에 성령을 보내주신 중요한 이유가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라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제가 아는 어떤 장로님이 계시다. 그 장로님으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다. 그 장로님이 고등학교시절에 그 교회 부목사님이 학생회가 너무 부흥이 안돼서 사임 압력을 받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래서 그 부목사님이 학생회 학생들에게 한번만이라도 친구들을 모아달라는 부탁을 했다. 그 말을 듣고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이 한 가지 지혜를 주셨다고 한다. 그것은 자기가 저축한 돈을 다 찾아서 버스표를 사서 나눠주는 것이다. 그래서 학교에서 반마다 돌아다니면서 일일이 버스표 나눠주고, 이번 주일에 우리교회에 “꼭 와 보라”는 말을 했다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그 다음 주일에 150명의 학생들이 교회에 나와서 예배실이 가득 찼다는 것이다. 그날 부목사님은 울고 담임목사님도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이 장로가 될 정도의 오랜 시간이 흘렀다고 한다. 몇 해 전 동창모임이 있었는데 어느 친구가 찾아와서 “야! 000! 너 장로 됐다지, 너 기억 나냐? 버스표 주고 교회 한번만 와보라고 했던 일! 그날 내가 처음으로 교회 나가서 그후로 예수 믿게 되었는데, 나 지금은 목사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또 어떤 친구는 나는 장로됐다. 나는 집사다 하는 사람이 여럿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때 그 장로님은 응답받은 대로 친구들에게 자기 통장을 깨서 단지 버스표를 나누고, “와 보라”는 한 마디만 했을 뿐이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인생을 바꾸셨다.
이것이 전도요, 이것이 생명을 살리는 한 마디요, 이것이 성령님의 역사다. 우리도 버스표 나눠주는 일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은가? 만약 우리들이 죽어가는 영혼들을 향해 ‘여기에 살 길이 있다!’는 소리를 외치지 않는다면, 그것은 세월호 선장이나 선원들과 다를 바가 없다.
혹자는 ‘내 생명이 우선 급하지 남의 생명이야....’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이것도 나만 살겠다고 팬티차림으로 도망친 세월호 선장과 같은 관점일 뿐이다. 우리는 나만 살지 말고, 생명의 방송을 해서 함께 살아야 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도 사람들에게 “와 보라”고 말하자. 생명의 버스표와 같은 것들을 나눠주자. 불신자들, 잃은 양들을 향한 생명의 말, 그 한 마디가 바로 천국 초대장이요, 죽음의 폭포를 향해 질주하는 영혼에게 던져지는 생명의 밧줄이다. 이러한 사람이 되기를 위해 이 시간 성령님의 충만한 기름부음을 간구하자.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