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2819
7월12일 [연중 제15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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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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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fbTUam-dE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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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이제 세상 모든 만물의 최고 정점이자 중심에 예수님께서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자신들의 야욕을 채우기 위해, 전체적인 맥락은 완전 무시한 채 앞뒤로 꼬리를 자르고, 남의 문장을 악용하는 사악한 무리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전체적인 맥락, 문제의 핵심과 본질을 먼저 파악한 후, 각 부분을 보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역시 전체적인 맥락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메시지의 핵심이요 본질이 무엇인지 먼저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음의 문장만 놓고 보면 다들 깜짝 놀라실 것입니다. ‘아니 주님께서 어찌 이리 심한 말씀을~’ 하는 느낌이 드실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마태오 복음 10장 34~35절)
세상 사람들이 주님을 찾고, 교회 공동체를 찾는 가장 큰 이유는 폭풍우 속 같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잔잔한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한 것일 것입니다. 또한 가족끼리의 화목과 사랑일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왔다고 말씀하십니다. 가족끼리 서로 갈라지고 원수가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참으로 납득하기 힘든 예수님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어지는 바로 다음 문장을 보시면 완벽하지는 않겠지만 살짝 의구심이 풀릴 것입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오 복음 10장 37~38절)
예수님의 이 세상 육화강생을 통해 이제 이 세상은 새로운 질서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간 세상의 권력자들, 강대국의 황제나 왕들, 대통령이나 수상들이 온 세상을 좌지우지해왔습니다.
가정이나 사회 안에서도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를 비롯한 어른들, 연장자들이나 상급자들이 위계질서 안에서 윗자리를 차지하며, 군림하고 지배해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의 도래와 함께 새 하늘 새 땅이 펼쳐졌습니다. 세상 모든 만물의 최고 정점이자 중심에 예수님께서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만물은 그분을 중심으로 돌아가며, 예수님은 새로운 질서 안에 최고의 선이요 최고의 가치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제 우리의 우선적인 선택은 명확해졌습니다. 세상 모든 존재, 세상 모든 만물에 앞서 가장 우선순위로 선택할 대상은 곧 예수님이 된 것입니다.
더 이상 부모님이나 아들딸들을 사랑하거나 존중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이 전혀 아닙니다. 이제 틈만 나면 부모님이나 자녀들과 날을 세워 싸우라는 말씀이 절대 아닙니다.
존경스러운 부모님에 대한 극진한 효심의 발휘나 사랑스런 자녀들을 향한 뜨거운 애정의 표현은 한 인간 존재로서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목숨 다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노력해야할 측면입니다.
강조점은 이것입니다. 부모님을 향한 효심, 자녀들을 향한 사랑, 그 이상의 마음으로 주님을 공경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 그 어떤 가치보다도 더 우선적으로 주님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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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Hp8pjztwXN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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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 그릇의 크기는 어떻게 성장하는가?>
오늘 복음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만약 대학에서 강의 내용을 모두 이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교수들만큼이나 클 수밖에 없습니다. 교수들을 다 담을 그릇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보석을 감정할 수 있다면 보석의 가치를 넘어선 사람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없다면 그 보석은 그냥 돌덩이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 그릇의 크기입니다. 각자는 각자의 그릇 크기를 지니고 있습니다. 내가 다섯 탈렌트 받은 사람인지, 두 탈렌트 받은 사람인지 혹은 한 탈렌트 받은 사람인지가 내 그릇 크기에 달린 것이고 그만큼 주님께 받는 상의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나의 그릇 크기는 어떻게 정해지는 것일까요?
BTS 신곡 ‘버터’(Butter)가 발표되자마자 미국 빌보드 싱글 순위 6주 연속 1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BTS가 속한 ‘빅히트’ 엔터테인먼트는 방시혁이란 인물이 있습니다. 그는 박진영과 함께 JYP 엔터테인먼트를 설립했으나 왠지 그와 잘 맞지는 않았었던 것 같습니다. 특별히 박진영이 ‘원더걸스’를 미국에서 성공시키기 위해 갖은 노력과 에너지를 쏟아부으며 가수들을 고생시키는 것이 마음에 안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의 2019년 서울대 졸업 축사에서 보면 그는 가수들을 매우 사랑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수들이 자신들이 속한 회사를 위해 그렇게 혹사당하는 것이 매우 부당하게 여겨졌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는 그가 ‘분노’로 성공에 이르렀다고 말합니다. 이 분노는 왜 생기는 것일까요? 나의 밥그릇에 밥알이 하나나 두 개만 담기면 화가 나지 않을까요? 그는 무언지는 모르지만 큰 그릇이었기 때문에 분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분노의 목적은 사랑이었습니다. 그는 가수들이 처한 현실이 너무나도 불만이었던 것인지 그의 멤버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음악으로 만들기를 권했습니다. 남이 만들어 그대로 그 틀에 맞추는 음악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야기와 리듬, 퍼포먼스를 최대한 살리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는 특별히 ‘알엠’(RM)이란 리더를 알아보았고 그를 중심으로 멤버를 모았으며 ‘뷔’(V)라는 멤버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일부러 데뷔 직전까지 그의 존재를 숨기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들을 모으고 키운 데는 방시혁이 재능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이 있었음을 무시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렇듯 자신이 성장하려면 사람을 알아볼 수 있는 눈과 그 사람들을 한 데에 모아 훌륭한 요리를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재료를 잘 고를 줄 아는 사람이 요리도 잘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요리는 재료를 잘 고를 줄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나의 가치는 이렇게 내가 받아들이는 것들로 좋은 요리를 만들어 세상에 내놓는 것으로 증명됩니다.
제가 평가하는 것이 맞는지는 모르겠으나 BTS를 통해 방시혁이란 인물의 가치가 세계에서도 인정받게 된 원인을 정리해보겠습니다. 방시혁 씨가 요리사라면 그는 그 요리를 통해 많은 이가 행복하기를 원했습니다. 재료도 행복하고 그것을 먹는 이들도 행복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행복함의 기대치가 커서 그것에 미치지 못하면 분노하였습니다. 내가 만드는 요리가 더 맛있을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을 더 많이 기쁘게 할 수 있는데 그러지 못하게 하는 것들에 대해 분노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재료로 더 많은 사람이 행복하게 되었을 때 자신의 행복도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는 꿈이 없고 그날그날 그냥 살았다고 합니다. 만약에 그가 꿈이 있었다면 요리는 행복할 수 없었을 것이고 그것으로 다른 이들도 행복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의 꿈은 그저 행복이었습니다. 내가 만든 요리가 잘 되어 요리 자체도 행복해하고 또 그것을 먹는 이들도 행복해하는 것을 보며 자신도 행복하고 싶은 마음이 그의 꿈이었습니다. 그 행복의 욕망이 컸기 때문에 그는 그릇도 큰 사람이 된 것입니다.
행복을 목표로 삼으면 분명 분노가 생겨납니다. 분명 지금의 시스템이 그 목표를 방해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면 서로가 다 행복하고 승리할 수 있을 텐데 그렇지 못한 현실에 분노가 생기는 것입니다. 나를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분노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 만들어진 음식과 그것을 먹을 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는데도 그것을 하지 못하는 시스템에 화가 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채찍을 만들어 성전의 사람들을 내쫓은 것이 그런 분노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언자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나의 그릇의 크기는 내가 얼마만큼 그 받아들인 것으로 이웃을 행복하게 하고 싶은가에 달려있습니다. 더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하고 싶다면 그렇게 만들어줄 더 큰 예언자들을 내 그릇에 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예언자들이 받을 상도 받게 될 것입니다. BTS는 방시혁의 예언자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받는 상을 함께 누립니다. BTS는 사람을 즐겁게 해주는 일을 하지만 우리는 사람의 영혼을 구원해 주는 일을 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보다 행복한 일이 없습니다.
영화 ‘식객’에서는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순종에게 대령숙수가 음식을 해 바쳤고 그 음식을 먹으며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를 주제로 합니다. 그 음식이 무엇이었는지를 밝히는 것이 그 대령숙수의 칼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그 음식은 대단한 것이 아니라 서민들의 음식인 ‘육개장’이었습니다.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이 탕에는 조선의 모든 것이 담겨있습니다. 평생 묵묵히 밭을 가는 소는 조선의 민초요, 고추기름에는 맵고 강한 조선인의 기세가, 어떤 병충해도 이겨내는 토란대에는 외세의 시련에도 굴하지 않아야 할 이유가, 고사리에는 들풀처럼 번지는 생명력이 담겨있습니다. 나라를 잃고 상심한 임금에게 대령숙수는 조선의 정신을 아뢰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받아들이는 강론이나 유튜브 강의 등은 여러분들이 받아들이는 예언자들입니다. 여러분들은 그것들로 요리를 해서 누군가를 구원하여 행복으로 이끌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행복하게 하려고 더 좋은 요리들을 만들려고 더 좋은 예언자들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러면 분명 그 예언자들이 받을 상을 여러분들이 다 받게 될 것입니다. 더 많은 영혼을 구원할 꿈을 꿉시다. 그것이 분노하게 만들겠지만 결국 그 분노가 여러분 행복의 그릇을 성장시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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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0,34-11,1 : 너희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려 할 때, 우리가 아무런 어려움 없이 주님의 뜻을,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34절)고 하신다. 주님께서는 말씀이라는 칼을 통하여 하느님을 따르는 일치 곧 참 평화를 이루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시다.
우리가 말씀의 힘을 통해 세례의 물로 새롭게 될 때에, 우리는 죄와 죄의 근원으로부터 갈라서게 된다. 그리고 죄 많고 불성실했던 과거의 나를 벗고 몸과 마음이 성령으로 새로워지면 우리는 죄스런 옛 삶의 습관들을 혐오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가족들 간의 분열이란 바로 내 마음 안에 일어나는 갈등이라 하겠다. 선포된 복음은 평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분열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 세상이 하느님께 대한 신앙 때문에 서로 갈라져 있다. 어떤 집안에는 믿는 사람들과 믿지 않는 사람들이 같이 살고 있다. 여기서의 갈등은 악한 평화를 깨뜨리기 위한 필연적인 것이다. 예수님은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37절) 이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서 부모님을 자식들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 부모나 자식들은 그분 안에서 함께 할 것이라는 뜻이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38절) 그리스도께 속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죄스런 버릇들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이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39절)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 옛 악습을 끊어버림으로써 새로운 생명에로 태어나게 된다. 즉 완전히 변화된 내가 된다는 것이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다.”(40절)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41절) 예언자를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 안에 계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의인을 받아들이는 사람도 이 같은 상이 주어진다. 그는 바로 그들 안에 계시며 그들을 파견하신 그들을 맞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는 예언자와 의인에 합당한 영예를 받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가장 작은 행위라고 하더라도, 즉 그들 신앙의 겉모습만 보고서 그에 마땅한 친절을 베풀었다 해도 희망을 품은데 대한 상을 빼앗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시원한 물 한 잔”(42절)의 의미는 바로 이것이다. 주님께서는 사랑을 베푼 사람의 믿음에 상을 주시는 것이지, 사랑을 받은 사람의 위선에 상을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원한 물 한 잔은 아무리 가난한 사람도 줄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이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지시하신 뒤, 그들이 당신께서 명하신 것을 실천할 기회를 주시고자 그들을 떠나셨다. 우리는 오늘의 복음을 잘 묵상하고 주님께서 명하신 것을 실천하는 삶을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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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광주대교구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아침에 눈을 뜨며 ‘5분만 더 잘까?’ 하는 고민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성경을 보고 강론을 준비하면서 어떻게 쓸까 고민합니다.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토론하고 고민합니다. 온종일 우리는 고민과 갈등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러한 고민은 대개 나 자신이 좀 더 편하려는, 더 쉽게 살아가려는, 더 많은 것을 차지하려는 싸움이며, 곧 유혹이라 볼 수 있습니다. 반대로 더 많이 희생하고, 더 많은 것을 내놓기 위한, 남들보다 더 힘들어지는 고민과 갈등은 대부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의 행복과 평화를 위한 이기적인 고민을 먼저 하다 보면 예수님의 가치와 시선에 대한 고민은 뒷전으로 밀려나 버립니다. 그래서 자신만을 위한 선택을 고민 없이, 당연한 듯 받아들이고 실행에 옮깁니다. 나아가 그러한 고민이 없는 삶을 평화라 여기며 소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평화는 버리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타인을 짓밟고 힘으로 누르는 평화를 버리라고 하십니다. 그분께서는 거대한 힘 앞에서 두렵고 무서워 타협이라는 명목으로 도망치고 비굴해지는 평화를 바라지 않으십니다. 세상의 가치와는 다른, 예수님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예수님처럼 살려고 노력하고 고민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고민은 우리에게 ‘칼’과 같습니다. 우리의 삶을 날카롭게 찌르며 고통을 줍니다. 때로는 그 고민의 칼 때문에 주위 사람들을 힘들게 하기도 하고, 의견이 달라 대립하며 갈라서기도 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 칼 때문에 우리를 원망하며 우리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기도 합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무겁고 감당하기 힘들지만 끝까지 짊어지고 가야 할 우리의 십자가입니다. 그 끝에 더 큰 두려움이 있다 하더라도 끝까지 짊어지고 가야 할 우리의 몫인 것입니다. 때로 그 십자가의 무게가 고민의 칼로 다가올 때는 예수님의 삶을 바라보았으면 합니다.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신 길의 끝이 죽음이 아닌 부활이었음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더 고민하고 더 노력해야 하는 쉽지 않은 길이지만, 오늘도 묵묵히 걸어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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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버림과 따름>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
이 말씀은, “나는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왔는데, 내가 주는 평화를 거부하고 칼을 선택하는 사람이 있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천사 군대가 나타나서 이렇게 찬미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 예수님은 이 세상에 ‘참 평화’를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을 받아들이면 그 ‘참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믿음’과 ‘회개’와 ‘용서’는 ‘참 평화’를 얻는 길입니다.) 그런데 죄 속에서 살면서, 회개하지도 않고, 예수님을 믿지도 않고, 복음을 받아들이지도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참 평화’를 거부하는 사람들입니다. ‘참 평화’를 거부하는 것은 ‘칼’을 선택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칼’은 ‘참 평화가 없는 상황’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칼’을 선택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를 거부하는 것이고, 하느님 나라에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상 지옥에서 사는 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마태 10,35-36)
예수님은 이 세상을 ‘원수 같은’ 사람이 하나도 없는 세상으로 변화시키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런데 사람들 가운데에는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는’(요한 3,19)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생명과 평화를 거부하고, 살던 대로 그냥 살겠다고 고집을 부립니다. 가정 안에서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 사이에 분열이 생기고, 마치 원수처럼 되어서, 믿는 사람이 박해받는 일이 생깁니다. 그렇지만 그런 일은 ‘예수님 때문에’ 생기는 일이 아니라, 일치와 사랑과 평화를 거부하는 사람들 때문에 생기는 일입니다. 사람들 사이에 생긴 분열과 갈등을 ‘예수님 탓’으로 돌리면 안 됩니다. <그런데 만일에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들이 선교활동을 할 때에 슬기롭고 순박하게(마태 10,16) 하지 않고, 지나치게 공격적으로, 또 어리석고 거칠게 한다면, 박해를 자초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 분열과 갈등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신앙인은 언제나 항상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해야 합니다. 선교활동은 전투가 아니라 ‘사랑의 봉사’입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7)
이 말씀을 겉으로만 보면, 가족 제도와 가족에 대한 사랑을 부정하는 말씀으로 오해하기가 쉽습니다. 여기서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은 실제 가족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세속적인 인간관계를 뜻하는 말입니다. (넓은 뜻으로 신앙의 반대쪽에 있는 ‘세속’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은, “세속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가 주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라는 뜻입니다. <가족은 가장 먼저 사랑해야 할 사람이고, 함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야 할 ‘영적 동반자’입니다. 하느님(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과 가족에 대한 사랑은 모두 하나입니다.>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8)
이 말씀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라는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는, “누구에게나 각자 자기 몫의 십자가가 있고, 아무도 그 십자가를 면제받지 못한다.”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물론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거부하거나 회피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왜 꼭 십자가가 필요한가?” 라고 물을 수도 있는데,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통해서 더욱 강하게 단련되고 더욱 깨끗하게 정화되기를 바라신다.”가 대답입니다.(1베드 1,7)> 어떻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십자가를 주시지는 않는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사람에 따라서 다른 사람보다 더 무겁고 힘든 십자가를 져야 하는 경우가 있지만, 그래도 하느님께서는 지고 갈 수 있는 십자가만 주십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지고 가는 일은 순전히 개인의 힘만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고, 공동체가 함께 하는 일입니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0,39)
이 말씀은, “‘현세의 삶’에 대해서만 집착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서 그 집착을 버리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허무하게 사라질 것만 추구하고 그것을 가지려고 욕심내는 사람은 그것을 얻든지 얻지 못하든지 간에 그것과 함께 허무하게 사라질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행복을 얻기를 바란다면, 그 생명과 행복만을 희망하면서 그것만을 목표로 삼고 살아야 합니다. 신앙인은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며, 보이지 않는 세상이 있음을 믿는 사람입니다. 신앙생활은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영원한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삶’을 향해서 나아가는 생활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삶’은 죽은 다음에나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 지금 이곳에서 시작되어서, 그곳에서 완성됩니다. 신앙생활은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영원한 생명과 행복을 누리는 생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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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신부님들과 함께 ‘포코노’에 다녀왔습니다. 아름다운 폭포와 계곡이 있는 곳입니다. 저는 자전거도 가지고 갔습니다. 저녁을 먹고 운동 삼아 자전거를 탔습니다. 그런데 실수로 그만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일어나서 자전거를 끌고 돌아오는데 안경이 없었습니다. 저는 넘어지면서 안경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시 가서 안경을 찾았는데 없었습니다. 다음 날에도 안경을 찾았는데 없었습니다. 한국에 안경을 주문하였고, 뉴욕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숙소의 주인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청소하다가 안경을 보았다고 합니다. 저의 안경이었습니다. 주인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택배로 보낼 수 있는지 부탁하였습니다. 주인은 뉴욕에도 집이 있으니 사무실로 가져다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주인에게 ‘당신은 눈먼 이의 눈을 뜨게 해 준 예수님 같습니다.’라고 감사의 인사를 전했습니다.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말처럼 안경을 잃어버렸는데 안경이 하나 더 생겼습니다. 비록 넘어졌지만 크게 다치지 않은 것도 감사할 일입니다.
저는 안경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늘 그렇듯이 당연히 안경을 쓰고 밖으로 나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숙소에서 안경을 찾을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넘어진 자리에서만 안경을 찾았습니다. 그곳이 밝은 곳이라고 해도 안경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안경은 숙소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여인들에게 천사들이 이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왜 살아 있는 사람을 죽은 사람이 있는 곳에 찾습니까? 그분은 예전에 말씀하신대로 갈릴래아에 있습니다. 그러니 제자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하십시오.” 부활하신 예수님은 무덤에 없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셨고, 표징을 보여주셨던 갈릴래아에 계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다시 가난한 이들 곁에 계셨습니다. 제자들이 갈릴래아에 갔을 때 비로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셨고, 성령을 주셨습니다.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두려움은 담대함으로 바뀌었습니다. 고통도, 시련도, 박해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문득 생각합니다. 우리는 진리를 어디에서 찾고 있을까? 영원한 생명을 어디에서 찾고 있을까? 예수님께서는 화려하고 웅장한 궁궐에서 태어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초라한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를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 잡던 어부들을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유하고, 권력을 가진 이들과 함께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 병든 이, 소외된 이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명예와 권력을 통한 성공을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와 희생을 통한 부활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유했지만 나누지 않았던 부자는 하느님 나라에 가지 못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했던 나자로가 아브라함과 함께 하느님 나라에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섬김을 받으실 자격이 충분했지만 섬기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제자들도 그렇게 발을 씻어 주라는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길가에서는 안경을 찾을 수 없었던 것처럼 물질과 자본이 가득한 곳에서는 진리를 찾을 수 없습니다. 소유와 욕심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찾을 수 없습니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진리는 겸손과 섬김을 통해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하느님의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억압을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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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회(부산 분도명상의 집) 박재찬 안셀모 신부님]
오늘 복음은 두 가지 담론으로 요약됩니다. 첫째 하느님을 그 무엇에 앞서 사랑할 것. 둘째 예수님의 제자들을 사랑할 것. 그런데 위기 앞에 우리는 하느님을 선택하기를 주저합니다.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다른 사람의 십자가는 수월하게만 보입니다. 이기적인 가족은 늘 이익만 보고 예수님처럼 사랑하고자 하는 나는 늘 손해만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어 그분께 모든 것을 맡겨 드릴 때 우리는 하늘의 상급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이 주는 평화와 기쁨을 맛볼 것입니다. 욕심은 결국 더 큰 욕심이 되어 우리를 삼킨다는 것을 기억하며 마음을 비우고 온전히 주님을 따를 수 있는 용기를 청하며 이 미사를 온 정성을 다 해 봉헌하도록 합시다.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첫 번째로 떠 오른 것은 "평화를 주러 오신 예수님이 왜 가족들간에 분열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실까?"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더 이 말씀에 머물다 보면, “그래 참 맞는 말씀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이 길에 우리는 평화보다는 분열을, 사랑보다는 미움을, 그리고 꽃 길보다는 십자가의 길이 더 많을 것 같습니다. 서로 다른 신앙 때문에 가족이 분열되는가 하면, 우리 내면에서도 하느님의 뜻과 나의 욕망 사이에서 분열이 일어납니다. 예상하지 못했던 외적 고통이나 내적 시련, 맞지 않는 사람이나 감당하기 힘든 사건으로 매일의 십자가는 끊임없이 다가 옵니다.
명상의 집에서 여러 사람들의 면담을 하다 보면, 어떻게 그 힘든 세월을 살아왔나 싶을 정도로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살아 온 분이 있는가 하면, 정말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왜 저렇게 힘들어 할까 싶을 때도 있습니다. 결국 자신을 내려 놓지 못해서 벌어진 일인데 왜 그렇게도 집착하고 있는지 안타까울 때도 있습니다. 고집은 왜 그렇게도 쎈지….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삶을 살아가며 각자가 마주하게 되는 감당하기 힘든 십자가가 있기 마련인 것 같습니다. 어떤 이는 ‘남편 혹은 아내가 저의 십자가입니다. 어떤 이는 자식이나 부모가 저의 십자가 입니다.’ 라고 합니다. 고통 없이, 부활 하신 주님과 함께 늘 기쁨과 평화가운데 살아가면 좋겠는데, 왜 이리 우리 삶에는 고통이 찾아 오는 것일까요?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유명한 아동 작가인 정채봉 작가에게 물었습니다. “사람에게 고통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요?” 정채봉 작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몸만 자라고 마음은 자라지 않겠지요. 지금 고통스럽다면 마음이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상처가 있다면 두터운 새살이 돋아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거친 자갈 길을 걷고 또 걷는다면 머지 않아 평평한 신작로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뒤 따라 오는 누군가는 평안하고 즐겁게 그 길을 걷게 되겠지요. 지금은 불편하고 불안한 터널이라 하더라도 끝이 없는 터널은 없습니다.”
자매 형제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기 위해서는 하느님을 가장 중심에 두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심지어 당신을 따르다 보면 가족이 갈라져 원수가 될 수도 있고,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져야 하며 심지어 목숨을 잃을 각오를 가져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살다 보면, 늘 다른 이의 십자가는 작아 보이고, 나에게는 왜 이런 무거운 십자가를 주시는지 원망하고 불평할 때가 많습니다. 십자가를 통한 부활의 의미는 이미 머리로 잘 알지만, 막상 닥친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두려움과 좌절을 체험하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갈 수 있을까요? 십자가를 통해 우리 마음과 영혼이 어떻게 자라날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말씀에 이미 그 답이 있습니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이 말씀은 마치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모순처럼 들립니다. 이 둘은 같은 것이라고 했는데 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더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걸까요?
이는 예수님을 가장 중심에 두고 살다 보면 처음에는 가족 간에 분열이 생길 수 있지만, 결국 예수님을 더 많이 사랑하는 이는 예수님의 그 사랑으로 가족들을 사랑하게 될 것이니 예수님을 중심에 두고 제대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라는 의미입니다. 가족의 고통과 무지, 고집불통 사고들, 나태함과 느닷없이 다가 오는 시련들은 십자가일 수 있지만 오히려 그것을 통해 성장과 구원을 얻게 되니 그 십자가를 지고 목숨 바쳐 예수님을 사랑하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해결하라”고 하시지 않고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 그 자체 안에 이미 변화와 성장의 은총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진정 사랑할 때 참된 사랑과 평화를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매 형제 여러분, 십자가를 지는 이 삶에 고통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처럼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마음으로 당신 제자들을 받아 들이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저희 수도자들을 사랑해 주시는 여러분에게 주님께서 큰 상을 내리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라는 이유로 시원한 물 한 잔만이 아니라, 명상의 집 공사를 위해 기쁜 마음으로 기도해 주시고 나눔을 해 주시는 여러분에게 예수님께서는 반드시 그 상급을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저는 명상의 집에 와서 여러분들을 통해 참 많은 위로와 사랑을 받고 있어 행복하고 감사합니다. 제가 잘 나서가 아니라 모두가 예수님 때문이라는 것을 알기에 늘 겸손하게 저도 그것을 받고 나누려고 노력을 합니다. 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저 저는 도구에 불과 합니다. 제 것이 아니기에 여러분을 통해 주님께 다시 돌려 드리는 것입니다.
물론 때때로 지나친 요구와 오해를 하기도 하고, 자신의 방식대로 마구 바꾸려 하거나, 자신의 봉사와 사랑을 인정하고 받아 달라고 때를 쓰기도 합니다. 더운 날, 시원한 물 한 잔이면 충분한데, 뜨거운 물을 마시라고 강요하며 왜 내가 준 것은 싫어하느냐고 불평을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신만을 위한 사랑의 나눔을 하는 분들도 차차 예수님께 마음을 돌려 주님 사랑을 배워 가시니 그것도 은총인 것 같습니다. 모든 이의 모든 것이 되어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지만, 주님의 도구로 산다는 것은 이러한 미숙한 이들과 잘 어울려 사는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도 하느님 앞에 그저 미숙한 사람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그래서 은총. 이 은총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중심에 두고 하느님을 그 무엇에 앞서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도 은총이요, 때로는 미숙한 사랑이라도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것도 은총입니다. 모든 것이 은총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더 이상 주님이 주시는 상급을 바라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미숙한 사랑을 넘어 제대로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을 깨우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은총을 깨닫고 그 안에서 살아갈 때 십자가는 내가 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예수님께서 이미 함께 지고 계심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지금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고 그것을 견디어 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면 자신의 영혼이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부활을 향한 희망입니다. 희망을 잃지 마십시요. 희망은 절대 우리를 버리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희망을 버릴 뿐입니다. 십자가는 부활을 향한 우리의 삶입니다. 우리의 삶에 바라는 것들이 사라지고, 억울해도 조금은 견디어 내고, 답답해도 기다리며 주님께 믿음을 두고 그저 지금에 감사하고, 지금을 사랑으로 채워갈 때, 우리삶은 이미 주님께서 주시는 하늘의 상급으로 충만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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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베네딕토 성인은 서방 수도 생활의 아버지라고 불립니다. 하느님만을 찾아 세상을 떠나서 수비아코의 동굴에서 3년 동안 은수 생활을 한 성인은 자기를 따르고자 하는 제자들을 위해 공동체 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동방의 금욕 생활과 서방의 지혜들을 모아 공동체 규칙서를 만듭니다. 그분이 가르친 기도와 노동, 그리고 지적 활동은 단순함과 지혜, 용기와 부드러움, 자유와 순종을 조화시키는 서방의 수도 생활뿐만 아니라,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중요한 지침을 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를 당혹케 합니다. 사랑은 우리 삶의 가장 중요한 근거요 기둥인데, 이에 대한 예수님의 요구는 더 단호하고 근본적입니다.
우리의 사랑이 그분께 합당하려면 하느님만을 선택하고 그리스도만을 위해서 우리를 온전히 봉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가장 위대하고 소중하지만, 때로 그 사랑의 기준이 잘못 되었을 때 우리 삶을 흔드는 장애가 되기도 합니다. 부모와 자녀, 그리고 부부 사이를 이어 주는 위대한 사랑의 끈은 우리 삶의 가치를 지켜 주고, 하느님의 사랑을 발견하는 데도 큰 도움을 주지만, 우리는 그 사랑을 잘 지키려고 늘 그리스도의 빛 안에서 그 사랑을 정화시키는 노력을 해 나가야 합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오늘 예수님께서 주시는, 약간 가혹해 보이기도 하지만, 너무 명확한 우리 신앙의 지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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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염철호 요한 신부님]
제1독서에서 요셉을 알지 못하는 이집트의 새 임금은 자기 백성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지혜롭게 다루어야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의 수가 너무 많아져서 자신들에게 큰 해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에 파라오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강제 노동을 시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억압을 받으면 받을수록 더 번성하고 널리 퍼져 나갔습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이 하느님 계획 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구약 성경에서 ‘지혜롭다’는 것은 하느님의 뜻에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보니 파라오는 모든 것을 참 지혜롭게 대처한 듯합니다. 왜냐하면 파라오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 곧 “너의 후손은.. 그들의 종살이를 하고 학대를 받을 것이다.” (창세기 15장 13절)라는 말씀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파라오는 자신도 모르게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파라오는 마지막까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 속에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가족들이 서로 갈라서게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집안 식구가 서로 원수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가족끼리 싸우라는 말씀이 아니라, 우리를 주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것이면 가족이라도 과감히 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사실, 가족을 사랑하고 그들을 마지막까지 지키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입니다. 다만, 자기 가족만을 위하여 예수님을 버린다면, 진리를 외면한다면, 그것은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들마저 죽음에 빠트리는 일이 됩니다.
이렇게 보니 오늘 복음은, 가족을 진정 사랑하는 길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충실하여 가족의 모든 구성원이 주님의 뜻에 따라 살도록 이끄는 것임을 이야기하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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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최승일 스테파노 신부님]
<평화를 바라는 사람은 누구인가?>
오늘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아주 이상하게 들리는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분명히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부활하신 당신의 평화를 주셨는데, 오늘 복음 말씀에서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오셨다고 말씀을 하고 계시니 이를 도대체 어떻게 알아들어야 하겠습니까?
우선 이 말씀은 세상이 주는 평화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평화는 분명히 다르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세상이 말하는 평화는 “전쟁이나 분쟁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평화인 것이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평화는 전쟁이나 분쟁이 없는 적당히 고요하고 적당히 타협함으로써 얻게 되는 거짓 평화가 아니라,
예수님 당신 때문에 그리고 복음 말씀 때문에 이를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아들과 아버지가 맞서고, 또 딸은 어머니와, 며느리는 시어머니와 서로 맞서게 되는 “칼”을 주러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칼은 전쟁이나 분열을 상징합니다. 이로써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평화는 적당히 타협함으로써 전쟁이나 분열이 없는 상태의 평화가 아니라, 불의와 거짓 즉 하느님의 사랑을 거스르는 악의 세력과 싸워 투쟁해서 얻게 되는 그런 평화를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다 평화를 간절히 원하며 살아가고는 있습니다만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이 평화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당신은 지금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까?”
라고 물어본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예, 그렇습니다”라고 대답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평화를 원하면서도 평화를 누릴 수 있는(얻을 수 있는) 방법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평화를 누릴 수 있겠습니까? 먼저, 평화를 바라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평화를 빌어주는 너희에게 되돌아 갈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평화를 바라는 사람이란, 하느님의 평화를 받기에 합당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고, 복음을 받아들일 만큼 성숙한 사람, 주님의 메시지를 듣고 기뻐할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평화의 큰 적은 우리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있는 것입니다.
죄가 많기 때문에, 그리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이웃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는 삶을 살려 하기보다는 우선 자신만을 위하는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욕심을 내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늘 불안하고 평화로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혹은 순전히 인간적인 도움이나 잔재주에만 미련스럽게 매달리는 옹고집 때문에 우리에게 평화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신앙을 새롭게 해야만 합니다. 신앙이란 사랑으로 마음을 확 풀고 자기 자신을 송두리째 하느님의 품안에 내어 맡기는 것을 뜻합니다.
어머니의 품안에 모든 것을 내어 맡기고 안겨있는 아기의 모습을 보십시오. 얼마나 평화롭습니까? 그리고 무수한 독신 남녀들(성직자와 수도자들)이 예수님께 대한 사랑 외에 어떠한 사랑도 맛보려 하지 않고 살고 있으며,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순교자들이 그 분을 사랑한 나머지,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아끼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남녀가 모든 것을 버리고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오 25, 40) 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불쌍한 사람들을 돕기 위하여 생명과 재산을 내던졌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분명히 아닌 것입니다. 오직 주님의 평화를 바라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며, 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가까이는 가족들과도 불화를 맛보아야 하고, 세상 사람들에게는 놀림감이 되는 “칼”을 맞게도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며, 그로인해서 맛보게 되는 주님의 평화인 것입니다.
친애하는 평화방송 애청자 여러분,
진정으로 평화로우시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오십시오. 평화의 주님에게로 모든 것을 벗어 던지고 빨리 나아오십시오. 그러면 원하는 평화를 반드시 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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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파견하시면서 하신 말씀하십니다.
“나는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
분명, 예수님께서는 “평화의 왕”일진데, 어째서 평화에 칼이 필요한가? 그것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의 평화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병든 환자에게는 수술이 필요한 까닭입니다. 우리 심장에 꽂혀 우리의 안주와 이기심을 도려내고, 세상에 꽂혀 세상의 불의와 부정을 절단하는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우리 가슴에 꽂혀 우리를 살리는 칼이요, 이 세상에 던져져 이 세상을 살리는 칼입니다. 죽이기 위한 칼(살인검)이 아니라, 살리기 위한 칼(활인검)입니다.
그래서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십니다. 평화로운 사람이 행복한 것이 아니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마태 5,9) 곧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행복하다”
그렇습니다. 당신의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칼을 주십니다. 이처럼, 말씀은 우리에게 혁명을 요청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복음서>는 한 권의 혁명서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성령을 받고 뒤집혀진 혁명가들입니다. 그리고 “참 행복선언”을 선언하는 진복팔단은 혁명선언서입니다. 그것은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혁명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강론(2013.11.15)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그리스도인이 혁명가가 아니라면, 그는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은총의 혁명가가 되어야 합니다. 참으로 아버지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은총은 우리를 혁명가가 되게 만듭니다.”
이 혁명은 진리의 말씀인 쌍날칼에 의해 실행되는 혁명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사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속셈과 생각을 갈라냅니다.”(히브 4,12)
‘내 칼을 받아라.’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의 칼’을 선사하십니다. 그것은 ‘타인에게’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던져라’고 주는 칼입니다. 자기 자신의 심장에 던지라고 주는 칼입니다. 사실, 중병에 걸린 환자에게 필요한 것은 금은보석의 값비싼 선물더미가 아니라, 그를 수술할 수 있는 칼인 것입니다. 병든 몸에다 금은보석으로 치장했다 해서 결코 행복해 지는 것이 아니듯, 병자는 칼로 병을 도려내는 수술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예수님께서 던지신 칼이야말로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살리기 위한 칼입니다. 평화를 이루기 위한 칼이요, 말씀을 이루기 위한 쌍날칼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칼이 자신의 가슴에 꽂아야 할 일입니다. 사랑의 불화살인 이 칼에 기꺼이 찔림 당해야 할 일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내 목에 칼을 견주시고, 말씀하십니다.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은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0,39)
이처럼, “제자의 길”은 그야말로 도전입니다. 결코 양다리를 걸칠 수도, 두 주인을 섬길 수도 없는, 아니 자신의 목숨마저 내 걸어야하는 도전입니다. 그것은 사도 요한의 권고대로,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1요한 3,18)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그 어느 것도, 제 자신마저도 결코 당신보다 앞세우지 말라 하심이오니,
오늘 제게 말씀의 칼을 꽂으소서! 그 칼로 저의 심장을 가르고 저를 수술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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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나는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
주님!
제게는 값비싼 선물더미가 아니라,
수술을 할 수 있는 예리한 칼이 필요합니다.
칼을 주소서, 진리의 말씀인 쌍날칼을 주소서!
어떤 칼날보다 날카로운 당신의 말씀을 주소서!
제 속을 꿰찔러 관절과 골수를 가르고,
마음의 속셈과 생각을 가르소서!
오늘 제 심장에 당신의 칼을 꽂으시어 저를 살리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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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10,34)
'숨겨져 있는 평화!'
'마태10,34'의 말씀을 문자적 의미로만 받아들인다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떠나갈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이 말씀 안에 숨겨져 있는 깊은 영적의미와 숨겨져 있는 평화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성령을 약속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 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14,27)
오늘 복음에서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라는 말씀에 숨어있는 깊은 영적의미를 요한복음 14장 27절에서 찾아보았습니다.
'칼'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결단, 단호함, 끊어버림'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다른 평화입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는 십자가 없는 평화이지만,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십자가 뒤에 숨겨져 있는 평화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직접 보여주신 '십자가의 역설'이며, 부활과 참평화는 십자가 바로 그 너머에 있다는 역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주시는 참평화를 얻으려면 먼저 십자가의 역설을 믿고 받아들이는 과감한 결단과 단호함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죄악들과 우상들, 곧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들을 과감하게 끊어내야 합니다.
그 너머에 참평화가 있다는 것이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전하는 강한 메시지라고 묵상했습니다.
세상 가치나 힘과 권력과 적당히 타협하거나, 이념 논리에 빠져 너와 나를 끊임없이 가르는 가운데에서 누리는 '거짓 평화' 속에 살지 말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참평화'를 얻기 위해 애쓰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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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으로 사람을 알지요>
마태오 10,34-11,1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버림과 따름.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들이 받을 상)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다 지시하시고 나서, 유다인들의 여러 고을에서 가르치시고 복음을 선포하시려고 그곳에서 떠나가셨다.
<사람으로 사람을 알지요>
사람이
사람을
받아들이지요
사람을
받아들으니
사람이지요
참된 사람이
참된 사람을
받아들이지요
참된 사람을
받아들이니
참된 사람이지요
착한 사람이
착한 사람을
받아들이지요
착한 사람을
받아들이니
착한 사람이지요
고운 사람이
고운 사람을
받아들이지요
고운 사람을
받아들이니
고운 사람이지요
곧은 사람이
곧은 사람을
받아들이지요
곧은 사람을
받아들이니
곧은 사람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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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나라 고조 유방이 항우를 물리치고 천하를 제패하는 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백전백승의 명장 한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략이 대단하고 용맹하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그런데 그가 젊었을 때는 그런 모습을 볼 수 없었습니다. 젊었을 때, 동네 건달이 “내 가랑이 밑으로 지나가라.”라면서 시비를 걸었습니다. 이때 한신은 어떻게 했을까요? 가랑이 밑을 지나가는 것을 치욕으로 받아들이면서 거절하고 싸웠을 것 같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엎드려서 가랑이 밑을 지나갔습니다.
이 순간 한신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지금 큰일을 도모하고 있는데, 이런 사소한 일에 마음을 쓸 필요가 없다.’ 가랑이 밑으로 지나간 것을 본 사람들은 한신을 향해 ‘겁쟁이’라고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생각대로 이 일은 별것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한신이 수모를 겪으면서도 뒷날의 큰일을 위해 당장의 분함을 참았던 것이 ‘과하지욕(袴下之辱)’이라는 고사성어로 남게 되었습니다. 큰일을 위해 작은 희생은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작은 희생을 자신의 전부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큰일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제대로 판단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주님께서는 평화가 아닌 칼을 주러 왔다는 의외의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면서 집안 식구끼리 서로 원수가 된다고 하시지요.
사랑을 강조하셨던 분이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큰일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주님을 따르는 것이 가장 중요한 큰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가 주님 따르는 것을 제일 큰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이웃 사랑보다도 가족 사랑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욕심과 이기심 채우는 것이 큰일이라는 착각 속에 빠져 있기도 합니다.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가족, 여기서 더 나아가 자기 자신까지도 주님을 따르는 데 걸림돌이 된다면 과감하게 버리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때로는 사랑하는 가족과도 맞설 수가 있는 것이며, 이러한 이유로 예수님께서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오셨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큰일을 다시 정리해보았으면 합니다. 주님이 아닌 다른 일은 큰일이 되지 않습니다. 주님과 관계된 모든 것만 진정한 큰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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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망록>(문정희)
남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남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가난한 식사 앞에서 기도를 하고
밤이면 고요히 일기를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구겨진 속옷을 내보이듯 매양 허물만 내보이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사랑하는 사람아
너는 내 가슴에 아직도
눈에 익은 별처럼 박혀 있고
박힌 별이 돌처럼 아파서
이렇게 한 생애를 허둥거린다
제 심정을 표현한 것 같습니다. 마음과 다른 행동을 하고 있는 저였습니다. 그만큼 부족하다는 증거가 되겠지요. 더 열심히 주님을 바라보면서 사랑하며 살겠다는 다짐을 하게 하는 문정희 시인의 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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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칼을 주러 왔다>
칼은 좋은 것입니다.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좋은 것에 쓰지 않고 엉뚱하게 쓰이기도 합니다. 좋은 것이지만 잘못 쓰임을 받으면 좋지 않은 것이 되고 맙니다.
칼은 칼로 존재하는데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서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 만들어진 목적에 따라 잘 사용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를 당황하게 만듭니다. 더군다나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고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고 하니 정말 귀가 막힐 일입니다.
어찌 구원자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나요? 사랑 자체이신 분이 이리 무서운 말씀을 하시나요?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는 이렇게 옵니다. 죄악을 거부하는 '결단의 칼'을 써야 합니다. 매 순간 선을 선택하는 결단의 칼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운명은 분명 다르게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주님께서는 구원을 원하시지만, 칼을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서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한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칼의 의미를 잘 알아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구원의 투구를 받아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에페6,17)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4장 12절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어떠한 피조물도 감추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 받아들여 참된 경외심과 두려움을 갖는 사람과 그릇된 욕망을 가진 사람을 갈라놓는다는 말씀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로 향할 것인가? 아니면 돌아설 것인가? 이에 대한 태도는 집안 식구가 다 각각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서로의 견해가 다르고 받아들이는 믿음의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원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라고 해야 합니다. 갈라진 마음이나 어정쩡한 결단으로는 결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서로의 마음이 상하고 적대감을 갖게 될 수도 있습니다. 실제 악이 기승을 부릴 때는 부모와 자식 간이나 형제 간, 부부 간처럼 가까운 사이여서 도저히 악이 끼어들 수 없을 것 같은 관계 곳곳에 끼어듭니다.
그렇지만 어려움에 타협하지 말고 말씀 안에 꿋꿋하게 서 있어야 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하나씩 버려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차지하면 다른 것들은 다시 돌려받게 됩니다.
사랑하면 마음이 쓰이고, 눈길이 한 번 더 가게 마련입니다. 그것이 진전되면 그 사랑하는 이는 존재의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존재의 이유가 예수님이어야 합니다.
세상을 살면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과 인간적인 것이 끊임없이 대치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의 칼을 선택한다면 그 모든 것이 하느님 안에서 열매 맺게 되고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로 넘쳐나게 될 것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27)
예수님께서 주시는 칼은 상대방을 위해 휘두르는 칼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향해 있는 칼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이 있다면 단호하게 잘라내야 하겠습니다. 세상은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을 큰 탈 없이 계속 누리는 것을 평화라고 생각하지만, 예수님의 평화는 사랑 안에서 나온 공정과 정의가 함께하는 평화입니다. 참 평화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선한 양과 악한 양이 있습니다.
둘이 싸우면 어느 양이 이길까요?
힘이 센 양이 이깁니다.
그런데 힘센 양으로 만드는 것은 나에게 달려있습니다.
내가 어느 양에게 먹이를 제대로 주느냐에 따라 힘센 양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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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좋은 삶과 죽음>
-하루하루 날마다 한결같이-
어제 성 베네딕도 아빠스 대축일 미사에 이어 오늘은 이정우 바오로 수사님의 1주기 기일미사를 봉헌합니다. 지나고 보니 참 잘 살다가 잘 죽으신, 말그대로 평소 빠스카 신비의 삶과 죽음을 사신 바오로 수사님이심을 깨닫습니다. 1933년에 출생하셔서 2020년에 선종하셨으니 만87세 천수를 누리신 것입니다. 멀리 있는 죽음같지만 제 나이를 빼보니 남은 햇수 15년입니다. 남은 하루하루가 얼마나 소중한지요!
정말 알 수 없는 죽음의 신비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물론이고 은총에 앞서 하루하루 날마다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최선을 다하는 분투奮鬪의 삶도 은총의 좋은 죽음에 결정적임을 깨닫습니다.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라.”(성규4,47)
참 자주 인용했던 베네딕도 성인의 성규에 나오는 가르침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깨어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살 때 환상은 말끔히 걷히고 온갖 탐욕의 집착에서 벗어나 오늘 지금 여기서 본질적 투명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어제의 베네딕도 대축일날은 정영훈 아브라함 수사의 종신서원식으로 인해 참 축제같은 날이었고 오늘은 이정우 바오로 수사님 기일의 대조가 좋은 깨우침을 줍니다.
삶과 죽음의 공존입니다. 멀리 있는 죽음이 아니라 평생 도반처럼 함께 가는 삶과 죽음입니다. 죽음이 있어 삶이 소중한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오늘은 기일, 어제는 축일, 바로 하루하루 죽는 그날까지 축일같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축일처럼 살다가 축일처럼 죽는 것입니다. 사실 선종하신 분들의 장례미사는 흡사 축일미사처럼 느껴집니다. 매일 축일처럼 살기위해 제 마지막 단 하나의 유일한 소원은 살아있는 그날까지, 죽는 그날까지 잘 쓰든 못 쓰든 매일 새벽 강론을 쓰는 것입니다.
“날마다의 강론은 내 사랑이요 운명이자 유언이자 위로와 치유의 구원이다.”
게시판에 붙여 놓고 늘 새롭게 확인하는 다짐입니다. 어제의 제 두 말마디도 잘 했다 싶어 나눕니다.
“오늘처럼 살면 돼!”
바로 종신서원한 아브라함 수사를 포옹하며 한 격려의 말마디입니다. 매일 초발심初發心의 자세, 종신불톼終身不退의 자세로 종신서원 대축일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주님 말씀도 생각납니다.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도 충분하다’(마태6,34). 그러니 하루하루 충실히 살면 내일은 걱정 안해도 됩니다. 내일은 내일대로 잘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축제처럼 사는 것입니다.
“너 역시 아름답다!(You are also beautiful!)”
어제 대축일 미사에 참석했던 코스타리카 대사 부부와의 만남에서 자매에게 드린 덕담입니다. ‘수도원의 주변 환경이 참 아름답다!’는 자매의 말에 즉각적인 응답이었습니다. 꽃보다 아름다운 하느님의 모상인 영혼들입니다. 그러니 하루하루 축제처럼 아름답게, 품위있게 성인聖人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비상한 성인이 아니라 ‘참 나(眞我)의 평범한 성인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삽니까? 부활의 희망을 지니고 참 행복을 사는 것입니다. 제1독서 마카베오기 하권에 나오는 주인공 이스라엘의 임금 유다가 부활신앙의 모범입니다.
‘그는 부활을 생각하며 그토록 훌륭하고 숭고한 일을 하였다. 그가 전사자들이 부활하리라고 기대하지 않았다면, 죽은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쓸모없고 어리석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경건하게 잠든 이들에게는 훌륭한 상이 마련되어 있다고 내다 보았으니, 참으로 거룩하고 경건한 생각이었다.’(마카하12,43ㄴ-45ㄱ)
제가 좋아하는 위령미사 감사송 다음 대목도 우리의 부활신앙을 북돋웁니다.
“그리스도께서 복된 부활의 희망을 주셨기에
저희는 죽어야 할 운명을 슬퍼하면서도
다가오는 영생의 약속으로 위로를 받나이다.
주님,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오니
세상에서 깃들이던 이 집이 허물어지면
하늘에 영원한 거처가 마련되나이다.”
미사시 감사기도 제3양식 위령 미사를 드릴 때 다음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 역시 우리의 부활신앙을 더욱 북돋우기에 역시 제가 참 좋아합니다.
“성자께서 죽은 이들의 육신을 다시 일으키실 때에 저희의 비천한 몸도 성자의 빛나는 몸을 닮게 하소서. 또한 세상을 떠난 교우들과 주님의 뜻대로 살다가 떠난 이들을 모두 주님의 나라에 너그러이 받아들이시며 저희도 거기서 주님의 영광을 영원히 함께 누리게 하소서. 저희 눈에서 눈물을 다 씻어 주실 그때에 하느님을 바로 뵈오며 주님을 닮고 끝없이 주님을 찬미하리이다.”
죽음의 어둠을, 두려움의 어둠을 말끔히 몰아내는 부활신앙의 빛입니다. 이런 부활신앙을 지니고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참행복을 사는 것입니다. 참행복을 살며 주님과 일치가 깊어질수록 참행복한 죽음에 부활입니다. 모세의 십계명의 소극적 금령들은 좋은 신자가 되게 할 수 있을 지언정 성인이 되게는 못합니다.
모세의 십계명을 한없이 능가하여 우리를 성인이 되게 하는 적극적 평생 수행이 주님의 긴 산상설교중 서문에 해당되는 오늘 복음의 참행복 선언입니다. 평생 살아야 하는 평생과제가 바로 참 행복선언입니다. 세상의 가짜 행복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늘 나라를 살게 하는 참 행복입니다.
1.“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2.“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3.“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4.“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5.“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6.“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7.“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8.“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이 진복팔단 꼭 마음에 새기시기 바랍니다. 이런 참 행복을 목표로 사는 사람들이 진짜 성인들이요 참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참 행복의 잣대가, 참 성덕의 잣대가 되는 평생 수행이자 과제인 진복팔단의 삶입니다. 참으로 생생한 부활신앙과 하늘 나라의 꿈과 희망은 참행복 수행의 원천이, 원동력이 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부활신앙과 더불어 참행복의 진복팔단의 수행에 항구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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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의 관계성을 하느님 중심으로 개편하라고 촉구하십니다.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마태 10,34-35)
예수님의 가르침을 문자 그대로만 들으면 마치 그분이 이 세상에 불화를 조장하고 가족 관계를 파괴하러 오신 것 같습니다. 사회의 기본이 되는 가정 공동체의 구성원인 아버지와 아들이, 딸과 어머니가,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서로 맞서고 원수가 되어 갈라서면 세상은 함께 흔들리고 불안해질 수밖에 없는데 말입니다.
"...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7)
이어지는 말씀이 앞의 알쏭달쏭한 말씀을 이해하게 도와줍니다. 즉 관계의 우선이 혈연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은 본능적으로 가족을 우선하고 챙기게 마련이지요. 태초에 하느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맺어주실 때부터 서로 끌리고 보완하는 사랑이 매개가 되어 가족이 형성되었으니까요.
그런데 남녀의 사랑이나 부모 자식 간의 사랑보다 우선하는 진정한 사랑이 있으니, 바로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과의 사랑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은 우리를 지으시고 돌보시고 보호하시고 대신 죽으시면서 사랑하십니다. 신앙인이라면 세상의 그 무엇보다 그분과의 사랑의 관계가 우선이지요.
하느님과의 사랑을 우선적으로 추구하려면 자기와 가족의 안위만 추구하는 육적인 애착에서 한걸음 나와야 합니다. 시야를 확장한다고 해서 가정이 무너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욱 공고히 성숙한 사랑으로 결속될 수 있지요.
"예언자를 예언자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을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을 상을 받을 것이다."(마태 10,41)
육적인 사랑이 성장하고 승화해 하느님과의 사랑 관계로 들어가게 되면 그와 동시에 하느님의 사람들이 눈에 보이게 됩니다. 그동안 깨닫지 못했던 하느님의 사람들, 즉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며 믿음이 끌리는 일에 투신하는 이들, 하느님의 가난한 이들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여기에 이르면 이제 우리는 스스로 예언자나 의인이 아니어도 예언자와 의인이 받을 상을 받게 됩니다. 그들을 받아들임으로써 예수님을, 그리고 종래에는 하느님을 받아들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언자와 의인이 받을 상이란, 성삼위 하느님의 거처가 되어 사랑의 존재로 변모되어 가는 것입니다.
제1독서는 이집트에 몸붙여 사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닥친 위기 상황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그들을 지혜롭게 다루어야 할 것이다."(탈출 1,10)
요셉의 치적을 모르는 새 임금이 등극하면서 이스라엘은 경계과 압박의 대상으로 전락해 버립니다. 사백삼십 년 전, 일흔 명으로 이집트에 들어간 이스라엘 자손이 이제는 이집트인들을 넘어설 만큼 더 많고 강인하게 번성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억압을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고 더욱 널리 퍼져 나갔다."(탈출 1,12)
이집트인들에게 강제 노역으로 시달리면서도 이스라엘 백성은 더욱 번성합니다. 이는 그들의 생명이 육적인 차원에 그치지 않고 하느님에게서 기인하기 때문이지요. 일찌기 하느님은 이집트로 떠나는 야곱에게 "내가 그곳에서 너를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창세 46,3)고 약속하셨으니 지금의 번성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강제 노역과 사내아기를 죽이라는 말살 정책이 구체화되기 전까지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에서 큰 어려움 없이 잘 정착하고 번성해 왔습니다. 하지만 이제 하느님의 백성에게 결별의 시간이 다가온 것입니다. 오랜 기간 이방 민족 안에서 누렸던 안락한 평화을 박차고 떠나야 하는 때가 무르익은 것이지요. 바야흐로 "칼"의 시간이 된 것입니다. 이 갈라섬, 떠남은 이스라엘이 하느님 백성으로 우뚝 서서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건너야 할 단계입니다.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칼을 주러 오셨다는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려 봅니다. 그동안 우리는 인간적으로 익숙한 혈연, 지연, 학연은 물론 서로 영광과 이익을 주고받는 관계 안에 파묻혀 주변을 돌아보지 않았고, 그 안에서 '우리만' 안락하고 평온했을지도 모릅니다. 이 정도면 평화라고 여기며 안주하고 싶었을 수도 있지요.
그런데 오늘 예수님은 '좋은 게 좋은' 그런 관계가 하느님과의 사랑을 가리우고, 하느님의 사람들을 경시하고 무관심하게 만든다면 다시 생각해야 한다고 촉구하십니다. 육적인 차원을 넘어서 영과 육의 통합을 이루어 가라고 부르심 받은 신앙인이라면 우리의 모든 관계성은 하느님 중심의 관계성으로 재편성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주님 이름에 있네.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이시네."(화답송)
이 노래가 우리 관계성의 기준이고 평화의 바탕입니다. 내 근친, 지인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인 모든 형제들을 사랑하고 받아들일 때 비로소 평화가 옵니다. 평화는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을 중심으로 존재하고 사고하고 말하고 행동할 때 강물처럼 온 세상을 감싸며 아우르고 퍼져나가는 하느님의 충만함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진정한 평화를 이루기 위해 사랑의 질서를 새로이 수립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하느님이 첫째이시고, 모든 것은 그 관계에서 파생됨을 깨닫는 지혜와, 이를 실제 삶에 적용하는 용기와 결단을 주시길 함께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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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nKZXJ35wtp0&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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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 34)
평화이신
하느님을
결코 막지
못한다.
우리 현실에서
만나게되는
칼같은
갈라섦의
날카로운
아픔이다.
하느님의
평화는
관계의 분열을
치유한다.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간절한
평화이다.
평화의 길이신
예수님을
모르기에
평화를
잃었버렸다.
평화를
잃어버리면
삶의 관계는
걷잡을 수 없이
난폭해지고
사나워진다.
평화이신
예수님을
맞아들이는
것이 참된
평화이다.
평화는
우리 힘이
아닌 하느님의
힘으로 이어진다.
분열의 삶에서
벗어나는 길은
일치이신
하느님에게서
다시 시작하는
삶이다.
칼은 나눌수록
아프지만
평화는 나눌수록
따듯해진다.
칼의 승리가
아니라
평화의
승리이다.
평화는
하느님
중심으로
옮겨간다.
하느님 중심은
삶 속에서의
올바른 사랑의
실천이다.
평화는
우리 삶의
신앙고백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나누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의
평화이다.
먼저 찾아야
할 것은
평화이다.
그리스도를
선택하는
결단의
칼 속에서
평화가 나오고
평화는
눈물을 닦아주는
거기에서 다시
만나게되는
하느님의
현존이다.
칼이 있기에
평화가 있고
평화가 있기에
칼이 있다.
칼은 평화를
벨 수 없다.
평화를 나누는
평화의 기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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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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