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잠에서 깨어난 혼미한 정신에도 나를 초대하는 낭랑한 새소리가 들린다. 밖으로 나오니 여름 태양이 오렌지색으로 영글어 빛발이 하늘을 꽉 채운 듯하다. 그 빛으로 생명들은 자신이 가진 속성을 다 펼쳐서 전성기에 다다라 있다. 해를 향해 손을 일렁이는 무성한 나뭇잎들을 올려다보니 그 꼭대기에서 새가 "뽀~옥 뽀~옥, 뾱 뾱 뾱." 허공을 향해 말을 건네자, 바로 "뾰~옥, 뾱." 하는 수줍은 대답이 들린다. 무더운 한낮에 청량한 대화 소리를 들으니 무료한 산책길이 한결 가뿐하다.
땅껍질을 뚫고 올라온 연초록 풀잎들이 아기처럼 애교를 떨더니, 어느새 땅을 뒤덮고 바람에 흔들거리며 태연하게 침묵하고 있다. 침묵의 소리를 들으려고 귀를 기울여보지만 내 한정된 감각으로는 어림없다. 땅이 한시도 쉬지 않고 태양에 다가가서 오늘 제일 긴 만남의 시간을 갖는 하지夏至이다. 생명체들은 햇빛을 받는 순간마다 생명력을 향상시켜 꿈을 펼치기 위해서 자신을 가다듬어왔다. 원추리는 푸르른 잎 사이로 목을 길게 뻗어 얼굴을 활짝 열고 해를 향해서 강렬한 주황빛을 뿜어내면서 지나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능소화도 지지대를 타고 기어올라서 빛이 정점에 다다르는 시간에 여섯 개의 잎을 나팔 모양으로 벌리고 태양을 향해서 환하게 웃고 있다. 화려하게 최고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는 그들의 환희에 나도 가슴이 들뜬다.
길옆으로 온몸에 구멍이 숭숭 뚫린 돌하르방 두 분이 나란히 앉아서 오가는 사람을 지켜보고 있다. 고향에서 안녕과 질서를 수호해주는 터줏대감으로 초자연적이면서도 친근한 존재로 사랑을 받았을 것이다. 먼 타향에 와서는 보는 사람들이 마음에 따라 존재의 의미가 달라지리라. 나는 그 큰 눈이 사람들의 속내를 보고 있는 듯해서 가슴 한편이 서늘해진다. 푸른 이끼로 장식된 우둘투둘한 모자를 쓰다듬으며 인사를 건네 보지만 내색이 없다.
하지를 닮은 젊은이가 스쳐가며 두 할아버지에게 잔잔한 미소를 보낸다. 그의 싱그러움에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진다. 그의 탄탄한 몸에서 아름다운 생명력의 아우라가 번져 나온다. 그는 자신의 신체가 완전함에 이르렀음을 알지 못하고 더 가득차기 위해서 노력할 것이다. 인간은 높은 곳을 지향해서 살아가는 것이 체질화되어서 정상의 순간에 이른 것도 인식하지 못하고 더 오르려다 추락하기도 한다. 그는 준비한 스펙으로 결핍을 채울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지고 사회로 진입하고 있으리라. 외부에 과시할 것들에 에너지를 쏟는 것에만 몰두하지 말고, 존재 의미를 알아가려고 애쓰면서 마음의 터를 넓히는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나의 기원을 그의 등 뒤에 얹어본다.
산다는 것은 매 순간 꿈과 기대가 충돌하는 선택의 기로에서 망설이며, 몸과 마음에서 솟아나는 욕망의 꿈틀거림과 그것을 제어하려는 자아와의 싸움이 아니던가. 그런 내적인 갈등을 품고 생존 현장에서 묵시적 경쟁에 부응해야 하는 하루하루가 생활이다. 그 속에서 칭찬이나 비난에 즉각 반응하는 대신에 마음속에 잘잘못을 헤아리는 분별력을 길러서 다른 사람에게 휘둘리지 않아야 평안이 깃든다. 이런 내홍內訌이 안정되기 위해서 잠시 멈추어 서서 내면의 자아와 대화하면서 자신을 믿고 사랑해야 한다. 자연은 한 철이면 원숙기에 다다르는데, 인간은 효소를 익히듯이 수시로 마음을 비워서 순리의 길을 따라가면서 스스로 자문자답하기를 계속해야 숙성된 경지에 이르는 것 같다. 그래서 자유로워지면 다른 사람에게 곁을 내줄 그늘이 생긴다.
강가에 이르렀다. 여름철에는 물도 차올라 보는 마음도 넉넉해진다. 강물 속에서 하늘과 구름이 낮잠을 자고 있다. 물속에 깊이 잠겨 있는 하늘이 아주 높다. 그 안에서 해도 땀을 씻고 있는데, 그 열을 받아서 하늘 끝까지 가려는 꿈을 꾸던 물방울이 자신의 몸을 아주 작게 털어내서 가볍게 떠올라 공기와 어울린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곳까지 떠오르다가 투명한 기류에 막혀서 그 유동하는 힘을 뚫으려고 맞서보지만 곧 자신의 한계를 깨닫게 된다. 한계는 빨리 알아차리는 것이 좋다. 그래서 같은 실패를 맛본 이웃과 함께 여러 모양으로 모이고 흩어지기를 반복하며 퍼즐 맞추기 놀이를 하는 구름이 되었다가 바람에 밀려 다시 아래로 내려온다.
이것은 가까워지고 멀어지기를 반복하는 해와 지구가 보여주고 있는 우주의 법칙에 따른 것이다. 움직이는 모든 것들은 정상을 향해 가지만 그곳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은 아주 짧아서 바로 내리막길로 접어들어야 한다. 이것을 잊어버리고 미련 때문에 머뭇거리면 남은 시간이 불행해진다. 그래서 만물은 멈추지 않고 순환한다.
"순환!'
이것이야말로 가장 공정한 질서이다. 끊임없이 새로운 것이 만들어지지만 그 또한 사라진다. 한결같이 지속되면 존재의 의미가 퇴색해버린다. 세상에 불변하는 것은 없다. 모두 쉬지 않고 흐르는 시간에 의해서 변하고, 그것이 세상을 순환하게 만드는 순리가 된다. 그러나 나라를 잃고 숨 죽여 살았던 사람들 마음속에, 뜻하지 않은 질병으로 온 세계인이 어울려 살던 일상 안에 머물지 못하고 외톨이가 되어 불안감으로 우울할 때에 실패로 인해 앞이 안 보이는 절망 속에서도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말이 마음속에 살아 있으면 희망의 불씨를 살려 다른 시도를 할 수 있다.
돌아오는 길에 돌하르방 앞에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속내가 어땠는지 물어보았다. 말없이 먼 곳을 바라보는 그의 모습이 초연하여 내 물음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그에게 살짝 몸을 기댄다. 억겁의 세월 동안에 휘몰아치는 풍파를 견디면서 다스려서 숙성한 얼굴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