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BS1 <예썰의 전당> [23회] 삶을 위로하다, 밀레. 2022년 10월 16일 방송 다시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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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썰의 전당 스물세 번째 이야기는 농민의 삶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낸 화가 ‘장 프랑수아 밀레’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어오는 요즘, 예썰의 전당이 준비한 작품은 바로 장 프랑수아 밀레의 ‘만종’이다. 지금 이 계절과 가장 어울리는 작품인 ‘만종’은 한 때 ‘이발소 그림’이라 불렸을 만큼 모두에게 익숙하고도 정겨운 그림이다. 그런데 이 유명한 ‘만종’에 의외의 썰들이 숨어있다는데. 명작 ‘만종’은 물론 ‘이삭을 줍는 여인들’, ‘씨 뿌리는 사람’ 등 밀레가 남긴 작품 속 숨은 의미는 무엇일까?
장 프랑수아 밀레(Jean-François Mille, 1814-1875), '상반신 자화상', 19세기, 회색지 흑필, 54.5×43cm
장 프랑수아 밀레(Jean-François Millet, 1814-1875)는 빈곤한 프랑스 농민의 고단한 일상을 우수에 찬 분위기와 서사적 장엄함을 담아 그린 사실주의 화가이다.
“일생 전원밖에 보지 못했으므로 나는 내가 본 것을 솔직하게, 되도록 능숙하게 표현하려 할 뿐이다.”
밀레는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스스로 농사를 지어 본 경험 때문인지, 프랑스 농민들을 가장 프랑스적으로 그린 화가라고 평가된다. 또한 그는 흔히 바르비종파의 대표적인 화가로 불린다. 바르비종은 파리 근교 퐁텐블로 숲 근처의 작은 마을로, 1820년대 후반부터 많은 화가들이 시골 풍경을 그리기 위해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이들은 19세 초 정치적 혼란과 산업화로 인한 급격한 도시화에 지쳐 자연을 갈망하고 자연 속에서 안식을 찾고자 했는데, 이들을 일컬어 바르비종파라고 한다.
장 프랑수아 밀레(J. F. Millet, 1814~1875), 만종(晩鐘, The Angelus:프랑스어, L'Angélus),
1857-1859년, 유화, 오르세 미술관 파리
‘만종’은 1859년 살롱전 출품작으로, 해가 저물 무렵 젊은 농부 부부가 저녁 기도 종소리를 듣고 삼종 기도를 올리는 장면을 경건하게 묘사한 작품이다. 수평선에 있는 교회의 종이 울리는 것과 함께 하루 일과의 끝을 알리는 기도이다. Millet는 'Angelus에 대한 아이디어는 우리가 들에서 일할 때 교회 종이 울리는 소리를 듣고 할머니가 항상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Angelus기도를 바치기 위해 일을 멈추게 했던 것을 기억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종교적인 경건함과 평화로움이 느껴지는 이 작품은 보는 이들을 매료시키며 19세기 후반 전국적으로 복제되기 시작했다.
밀레는 미국의 화가이자 미술 수집가가 되려는 사람인 토마스 골드 애플턴(Thomas Gold Appleton)의 의뢰로 제작되었다. 이 그림은 오늘날 바르비종 학파의 미술품 가격을 19세기 후반에 기록적인 액수까지 끌어올린 것으로 유명하다.
✵ 예썰 하나. 수확에 대한 감사? 죽은 아기를 향한 추모? 밀레의 ‘만종’에 숨겨진 충격적인 비밀! 동서양을 막론하고, 시대를 초월해 지금까지도 사랑받는 밀레의 ‘만종’. 이 그림은 교회에서 울리는 저녁 종소리를 들으며 오늘 하루의 수확에 대해 감사 기도를 드리는 모습을 담고 있다. 그런데 경건함마저 느끼게 하는 이 그림을 보고 ‘공포’를 느낀 화가가 있다는데. 그 주인공은 스페인의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다. 달리가 ‘만종’을 재해석한 ‘황혼의 격세유전’은 그 괴기스러운 표현력 탓에 보는 이들을 모두 경악하게 한다. 그는 심지어 그림 속 감자 바구니는 사실 죽은 아기의 관을 그린 것이라는 주장을 펼쳤다고. ‘만종’의 감자 바구니를 둘러싼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
✵ 예썰 둘. “밀레 같은 화가가 되고 싶었다” 한국미술의 거장, 박수근이 밀레의 작품에 열광한 이유는? 밀레의 작품은 살바도르 달리 외에도 많은 예술가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그 중 대표적인 이가 한국미술의 거장 박수근이다. '나무', '빨래터' 등 서민의 삶을 한국적인 감성으로 풀어낸 그림으로 유명한 박수근은 어릴 적 밀레의 ‘만종’을 보고 화가로서의 꿈을 키웠다. 그의 작품에는 밀레에 대한 존경심이 고스란히 녹여져 있다. 극장 간판을 그리며 생계를 꾸려야 했던 무명 시절에도 밀레의 작품을 여럿 수집할 정도로 열혈 팬이었던 박수근. 그는 왜 밀레의 작품에 매료된 것일까.
박수근(朴壽根, 1914-1974), ‘나물 캐는 여인들’, 1950년
미석(美石) 박수근(朴壽根, 1914-1974)은 ‘국민화가’ ‘민중화가’ ‘서민화가’라는 수식어처럼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다. 박수근은 1914년 2월 21일 강원도 양구 읍내의 정림리에서 태어났다. 7세 때 가세가 기울어 병든 아버지와 동생들을 돌봐야 했지만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그는 12세 때 프랑스 화가 밀레(Jean-Francois Millet, 1814-1875)의 ‘만종(晩鐘, The Angelus)’을 보고 훌륭한 화가의 꿈을 키웠다.
밀레 작품 속에서 되찾은 자존감
"보통 사람들의 자존감"
✵ 예썰 셋. “이건 농부가 아니야!” 밀레의 대표작 ‘이삭 줍는 여인들’이 혹평을 받은 이유는? 밀레의 또 다른 대표작 ‘이삭 줍는 여인들’은 한때 논란에 휘말린 적이 있다. 평화롭게만 보이는 이 작품은 “이삭 줍는 세 여자들이 너무 거만하다”며 예술계를 분노케 했고, 평론가들 사이에서 논쟁의 대상이 됐다. 이는 당시 농부에 대한 인식은 물론, 연이은 혁명으로 요동치던 시대의 모습과도 관련이 있다는데. 유독 밀레의 작품이 논란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내게 파리는 혼잡하고 탁한 공기로 숨이 막히는 도시다.
어젯밤 꿈에 나온 할머니, 어머니, 누나는
실을 잣다가 내 생각을 하며 울고 있었다.
-농촌에서 자란 미술 유망주, 밀레의 1837년 파리에서 일기
● 자연주의 - 자연의 풍경을 보이는 대로 묘사하여 있는 그대로의 본질을 보려 한 바르비종파의 예술 사조
장 프랑수아 밀레(Jean-François Mille, 1814-1875), ‘이삭 줍는 여인들’,
1857년, 캔버스에 유채, 83.5×110㎝, 오르세 미술관 파리
1857년, 밀레는 〈이삭 줍는 여인들〉을 출품하면서 다시 한 번 비평가들에게는 불온한 농민화로 혹평을, 진보적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하층민의 운명의 세 여신’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밀레의 ‘서사적 자연주의의 정수’라는 평을 듣는 이 작품은, 추수가 끝난 들판에서 이삭을 줍고 있는 나이 든 농촌 여인 셋을 그린 것이다. 황금빛 햇살에 물든 들판과 여인들은 엄숙하고 장엄해 보인다. 그러나 이삭을 줍는 행위는 사실 당시 빈농에게 지주들이 베푸는 선심 행위로, 빈농층의 고단한 일상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빵 한 조각 살 수 없을 만큼 궁핍한 생활을 하던 밀레는 이 그림으로 비로소 작품으로 생계를 이어 나갈 수 있게 되었다.
● 〈이삭 줍는 이인들〉이 쏘아 올린 작은 공
이삭 줍는 세 여자들의 너무 거만하다
본인들이 빈곤의 세 여신이라도 되는 양 거드르름을 피우니 말이다
그저 누더기를 걸쳐 들판에 세워놓은 허수아비들일 뿐이면서
자유, 평등, 박애
혁명을 상징하는 3색을
세 여인의 모자에 숨겨놓은 밀레
장 프랑수아 밀레(Jean-François Mille,1814-1875), ‘괭이를 든 남자’, 1860년 - 점점 더 불편해지는 농민화
장 프랑수아 밀레(Jean-François Mille, 1814-1875), ‘씨뿌리는 사람’,
1950년, 캔버스에 유채, 101.6×82.6cm, 보스톤 미술관
씨를 뿌리는 농부를 통해 노동의 고단함을 암시하는 한편, 대지와 투쟁하며 살아가는 농부들의 모습을 숭고하고 장엄하게 표현했다. 〈씨 뿌리는 사람〉도 많은 논쟁을 낳았다. 그동안 그림의 주제로 대접받지 못했던 평범한 농부가 화면 전면에 등장해 ‘혁명적인 암시’를 풍긴다는 이유였다. 보수주의자들은 불안해했으며, 사회주의자들은 찬사를 보냈다. 그러나 밀레는 이런 분위기에 편승하지 않았다. “설사 나를 사회주의자로 여긴다 해도 인간을 그리는 것이야말로 나를 가장 자극하는 것이다.”라며 평범한 노동의 존귀함과 그에 대한 연민을 표현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이 그림에서 밀레는 농부와 시골 풍경을 근대 프랑스의 대표적인 이미지로 제시하고 있으며, 농부의 행위를 통해 자연의 순환과 힘, 전통적이고 소박한 삶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훗날 빈센트 반 고흐가 모사한 것으로도 유명한 작품이다.
"불평등한 현실에 대한
고발의 기록"
장 프랑수아 밀레(Jean-François Mille, 1814-1875),, '첫걸음', 1858년
힘든 노동을 끝내고 돌아온
농부를 맞이 해주는 딸
고된 노동을 버티게 하는 힘의 가족
장 프랑수아 밀레(Jean-François Mille, 1814-1875), ‘낮잠’,
종이에 파스텔, 1866년, 29.2×41.9cm, 미국 보스턴 미술관밀레
"나는 농민으로 태어나
농민으로 죽을 것이다
내 땅을 지키며 한걸음도 떠나지 않을 것이다"
-장 프랑수아 밀레(Jean-François Mille, 1814-1875)
[참고문헌 및 자료출처: KBS1 <예썰의 전당> [23회] 삶을 위로하다, 밀레, Daum·Naver 지식백과/ 글과 사진: 이영일 ∙ 고앵자, 채널A 정책사회부 스마트리포터 yil207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