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10월 9일 테러 참사를 몇 초 앞둔 순간 버마(현 미얀마) 랑군(현 양곤) 아웅산 국립묘지에 도열한 수행원들의 모습. 왼쪽부터 함병춘 대통령 비서실장, 이계철 주 버마대사, 서상철 동자부 장관, 김동휘 상공부 장관, 이범석 외무부 장관, 서석준 부총리. 이들은 모두 사망했다. 중상을 입은 최금영 연합통신 사진부장이 사진기 테스트를 위해 촬영한 사진으로 폭발사고 당시 촬영자의 피와 화약흔 때문에 사진 일부가 하얗게 바랬다.
이 사진은 10월15일에 연합통신에 의해 전국 신문에 배포되어 일제히 게재되었다. 폭발 참사 수초 전 앞줄의 각료급 인사들이 금방 닥칠 비극적 운명 앞에서 태평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사진이었다. 최재욱 청와대 공보 비서관은 둘째 줄 왼쪽 끝에 서 있었다.
꽝』하는 폭음과 함께 머리에 심한 충격을 받고 쓰러졌다가 일어나 보니 주위는 연기와 먼지로 자욱했고 도열했던 수행원들은 모두 처참한 모습으로 쓰러져 있었다.』
제1부 대폭발 (대폭발 아수라장 아웅산묘소)
MBC 텔리비전의 보도국 카메라 취재부 임채헌, 이재은 두 기자는 『곧 대통령이 도착한다.』는 연락을 받고 묘소 바깥으로 대여섯 걸음을 옮겼을 때 등 뒤에서 「꽝」하는 폭발음을 들었다. 『돌아다보니 먼지 때문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엉겁결에 몇 걸음 뛰어 갔다가 다시 돌아보니 천장이 완전히 내려앉았고 수행원들이 그 밑에 깔려 있는 것이 보였다. 파묻힌 피투성이의 수행원들 가운데 반수는 즉사한 것 같았다.』 두 기자는 그런 아수라장 속에서도 직업 정신을 잃지 않고 열심히 현장을 촬영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대 참극의 현장이었다. 무너져 내린 천장, 서까래, 카페트와 대리석 위를 적시는 선혈, 비명, 화약 냄새, 먼지, 연기…. 치명상을 입지 않! 사람들은 피를 흘리면서 아웅산 묘소의 반대편 출구로 뛰쳐나갔다.
모든 것이 찰나 속에서 빚어졌다. 진혼나팔 소리조차 듣지 못한 사람도 있었고 심지어 폭음도 기억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저 번쩍하는 섬광만 본 사람도 많았다. 송 기자는 두 묘소 경호원이 팔짱을 끼고 일으킬 때 겨우 정신을 차렸다. 구멍 뚫린 지붕, 깨어져 나가 바닥에 흩어진 대리석 장식물들, 시커멓게 타고 있는 서까래더미가 시야에 들어 왔다. 윗몸을 무너진 천장 더미 속에 파묻힌 채 엎어져 있는 사람들도 여럿 보였다.
찢어진 런닝셔츠 차림으로 밖에서 대기 중이던 승용차로 달려가 오르는 사람도 있었다. 최규철 기자는 정신이 들자 묘소 바깥의 버마인 경호원들에게 『헬프 미!』라고 소리쳤다. 경호원들은 경계 자세만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그 대신 우리 경호원들이 민첩하게 움직여 죽거나 다친 사람들을 승용차에 싣기 시작했다.
한편 전두환 대통령은 묘소로부터 약4·8㎞ 떨어진 영빈관에서 예정보다 늦게 출발했다. 안내를 맡은 버마 외상이 늦게 도착한 때문이었다. 아웅산 국립묘소는 랭군시 번화가와 주택 지역 사이 구릉지대에 자리 잡고 있고 그 주변은 숲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곳을 향해 대통령 일행을 태운 차량 행렬이 다가가고 있을 때 폭발이 일어난 것이었다. 그 때 대통령 차량 행렬은 묘소에서 약1·5㎞ 떨어져 있었다. 그 1.5㎞는 바로 생과사의 간격이었고 버마 외상의 안내 지각이 만든 「불행 중 다행」이었던 것이다.
묘소에서의 폭발음은 조용한 일요일 오전의 랭군시내를 울렸다. 주(駐)버마 일본(日本) 대사관의 좌구간희(佐久間喜) 참사관은 묘소로부터 북쪽으로 약6백m 지점에 살고 있었다. 『갑자기 꽈당하는 폭음이 들리면서 집채와 유리창이 진동했다. 놀라서 바깥으로 뛰어나갔다. 근처 주민들도 일제히 뛰쳐나와 무슨 일이냐고 웅성거렸다. 30분쯤 지나자 폭발 사건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오후가 되어서야 피해자들이 한국 외교 사절임을 알게 되었다』
제1부 대폭발 (육군병원 - 북새통의 인간애)
영빈관에서는 全대통령이 묘소로 출발한 직후인 오전 10시10분쯤 이순자여사가 다과 회장으로 들어와 교민 부인들이 마련한 다과 모임이 시작되었다. 이순자여사가 간단하게 인사말을 끝낸 뒤 참석자들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비서관 한 사람이 들어와 『대통령께서 찾으신다.』고 했다. 이 여사는 『지금 말 인가요』라고 물은 뒤 비서관과 함께 바깥으로 나갔다. 주빈이 나간 뒤 한 시간이나 기다려도 소식이 없어 그 자리에 있던 이희익 여사(이계철 대사 부인)가 얼굴을 아는 어느 청와대 비서관에게 물었다. 『사고가 있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무슨 사고냐』고 다그쳐도 자세히 설명해주지 않았다.
부인네들은 영문을 몰라 궁금해 하고 있는데 오전11시30분쯤 누군가가 『큰 사고다』 『아웅산 가는 길에 폭발물이 묻혔다』고 전해 주었다. 이희익 여사를 비롯한 부인들은 각각 집으로 돌아갔다. 이 여사는 『남편은 늘 대통령 곁에 있기 때문에 별일 없을 것이다』고 안심한 상태였다고 한다. 대사관저로 돌아와 보니 우리 경호원 2명이 지키고 있었다. 『폭발 사고로 많은 사람이 다쳤다』고 경호원은 말했다. 이 여사는 교민 부인들에게 집에 있는 솜과 의약품을 병원으로 가져가자고 전화를 건 뒤 랭군 시내 제2 육군 병원으로 달려갔다. 랭군시내 의료 상황을 잘 아는 이 여사였기 때문에 의약품 걱정부터 한 것이었다.
수십 명의 사상자들이 들이닥친 제2 육군 병원은 혼란에 빠졌다. 이 병원은 민간인들도 치료해 주는 곳인데 처음 사상자들이 밀려올 때는 의사도 보이지 않았다. 피투성이의 사상자들은 병원 바닥에 놓여 졌고 여기저기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위생병들이 나와 입원 중이던 버마 인들을 내보내고 부상자들을 병상에 눕히기 시작했다. 30분쯤이 지나서야 당직의사 2명이 나타났으나 의료 기재, 약품까지 달려 응급 처치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교민, 수행원, 경제인들이 개인적으로 갖고 있던 마이신 등 의약품을 내놓았다. 소독 약품이 모자라 물로 상처를 씻을 지경이었고 가위가 없어 붕대를 면도칼로 자르기도 했다. 미얀마 인들은 부상자들에게 『아이 엠 쏘리』를 연발하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3시간쯤 지나서 랭군시내병원의 의사·간호원들이 소집돼 몰려오면서 본격적인 치료가 시작되었다. 부상자 가운데 가장 상태가 중한 이기백 합참의장과 이기욱 재무부 차관이 먼저 수술실로 옮겨졌다. 다른 부상자들은 입원실 현장에서 바로 수술을 받아야 했다. 작달막한 버마 여군 간호원들의 흰 가운은 어느새 땀과 피로 뒤범벅이 되고 있었다. 이 북새통 중에도 송진혁 기자는 직업 정신을 잊지 않았다. 얼굴과 양손에 2도 화상을 입고 발목을 다쳤던 송 기자는 병원으로 그를 찾아 달려온 김재혁씨(주식회사 한양 의 회장 비서실장)에게 폭발 경위를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김씨는 중앙일보 기자 출신으로 뉴욕특파원까지 지낸 사람이었다. 당시 그는 수행경제인단에 들어 있었는데 송 기자의 체험담을 정리, 중앙일보에 송고, 10일치 신문에 어떤 다른 매체보다도 자세한 폭발현장 기사를 실을 수 있게 했다. 그 다음날치 일본 신문들도 송기자의 송고 기사를 번역, 게재하였다.
대사 부인 이희익 여사가 제2 육군 병원에 도착해 보니 사망자들은 심한 화상을 입었거나 너무나 피격 정도가 지독하여 대부분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양복 호주머니에 새겨진 이름이나 지갑 속의 명함을 보고 신원을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이 여사는 다른 부상자들을 돌보느라고 정신이 없었는데 사고 후 4시간쯤이 지나서야 대통령 비서관에게 『대사가 어디 있느냐』고 물을 여유가 생겼다. 선뜻 대답을 못하는 것을 보고 이 여사가 다그치자 『좀 다쳤다』는 것이었다. 부상자들 중에서는 남편이 보이지 않았다. 불길한 생각이 든 이 여사는 시체 안치실로 뛰어갔다. 그러나 신원 확인이 쉽사리 되지가 않았다. 양말과 구두까지 뒤졌으나 찾을 수 없었다. 딸 혜영! 양에게도 찾아보라고 했으나 마찬가지였다.
오후 4시가 되자 누군가가 『대사가 죽었다』고 알려 주었다. 다시 시체 안치실로 들어가려는데 버마 헌병이 가로막았다. 아무리 사정해도 들여보내 주지 않았다. 마침 그 때 전두환 대통령이 산유 미얀마 대통령과 함께 병원에 도착, 부상자들을 위로하게 되었다. 전대통령은 이 여사에게 『음료수라도 들라』면서 마음을 우선 가라앉히도록 권했다. 이 여사는 얼마 뒤 시체 안치실 바깥에서 창문을 통해 시트로 덮인 시체 중 「이계철」이라고 쓰인 이름표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여사는 끝내 남편 얼굴을 보지 못하고 말았는데 뒤에 이렇게 울먹였다. 『남편 얼굴을 차마 보여 주기 어려울 만큼 크게 다치셨던가 봐요. 관계자들의 말로 미루어 보면 대사는 병원으로 옮겨 진 ! 후 4시간 정도는 운명하지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살아계신 모습을 몇 시간이나마 실컷 볼 수 있었다면…』
제1부 대폭발 (일요일 오후에 비보 오다 1편 )
아웅산묘소 폭발 참사소식이 외무부에 전해진 것은 한국 시간으로 9일 오후 1시10분께였다. 폭발이 일어나고 10분쯤 지난 시각이었다. 전두환 대통령의 미얀마 방문과 때맞추어 외무부는 본부와의 신속·원활한 통신을 위해 버마 대사관에 외신관을 파견해 놓고 있었다. 이 외신관이 사건 제1보를 보낸 것이었다. 내용은 『경호상의 문제가 발생했으니 외무부 간부들은 대기해달라』는 것이었다. 그 때까지는 사건의 성격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외무부 사령탑을 맡고 있던 노재원 차관은 그날 방한 일정을 마치고 귀국하는 이탈리아의 거물 정객 안드레오티를 김포공항에서 전송한 뒤 시내로 나와 점심을 먹고 있다가 카폰을 통해 버마참사 소식에 접했다. 그는 국·실장의 비상소집을 지시한 뒤 정부 종합청사 9층 총리실로 올라갔다.
김상협총리가 참사소식을 들은 것은 오후 2시 좀 지나서였다. 시내에서 일단 공관으로 돌아온 김총리는 총무처에 비상 국무회의 소집을 지시했다. 1차 비상 국무회의는 오후 3시20분께부터 50분까지 총리 집무실에서 열렸다. 오후 3시에 김총리가 집무실에 들어선 데 이어 박종문농수산, 이정오 과기처 장관, 노외무, 금진호 상공부 차관, 이희성 교통부 장관, 김성배 서울시장, 김정례보사부 장관, 조영길 총리 비서실장 등이 잇따라 도착했다. 연락이 잘 닿지 않았던 일부 국무위원들은 회의가 거의 끝나갈 무렵 헐레벌떡 참석, 취재진에게 『무슨 일이 생겼느냐』고 묻기도 했다.
국무회의가 끝난 뒤 이진희 문공부 장관은 10층 중앙청 기자실을 찾아와 사건 발생에 관해 간략한 첫 공식 발표를 했다. 이 장관은 발표를 마친 뒤 총리실로 다시 내려가 관계 국무위원들과 한 동안 논의를 한 뒤 오후 4시50분께 사상자 명단을 발표했다. 이 발표는 랭군 발 사상자 수와 차이가 났는데 조금 뒤에 한국측 사망자 15명, 부상자 16명으로 바로잡혀졌다.
폭발 현장에 우리 기자들이 있었는데도 사건 기사를 본사로 보내는 데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우선 랭군에서 통신 수단을 확보하기가 매우 곤란했다고 한다. S신문의 K기자가 가장 먼저 본사로 상황을 보고했다고 한다. 이날은 일요일이라 우리나라 기자들은 거의 쉬고 있었으므로 오후 3시께까지 상황을 모르고 있다가 텔리비전에서 오후 4시를 넘어 문공부 장관이 발표하는 것을 보고 상황을 알게 된 기자들도 많았다.
오후 4시 직전 문공부에서 각 언론사에 중대 발표가 있다고 연락을 취함으로써 종합 청사로 기자들이 몰리게 되었다. 이 폭발 사건은 랭군 발 AP통신을 통해 제일 먼저 세계로 퍼져 나갔다. 오후 2시40분에 나간 이 1보는 목격자들의 증언을 종합한 것이 였다. 사망자가 생겼다는 내용은 없었다. 교토 통신 서울 지국 구로다 기자는 AP통신을 받은 일본본사로부터 확인 요청을 접수한 직후 텔리비전에서 이 문공부 장관이 발표하는 것을 그대로 받아 일본으로 송고했다. 오후4시 이후에는 세계 매스컴이 거의 서울발 외신을 받아 보도하기 시작했다.
군은 이날 정부의 공식 발표가 있기 전에 전군에 비상령을 내렸다. 외출과 외박을 금지시키고 외출나간 장병들은 귀대토록 했다. 치안 본부는 비상 국무회의가 열리기 15분 전인 오후 2시45분 갑호 비상령을 내렸다. 이 비상령에 따라 비번, 휴가 중인 경찰관들까지 비상근무에 총동원되었다. 경찰은 신속하게 대처했다. 9월15일에 내려진 추석 비상 근무령이 ASTA, IPU 총회로 이어지면서 해제되지 않고 있었던 데다가 경찰서장들이 집무실에서 24시간대기 근무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응이 빨랐다. 주요 관공서와 방송국 신문사 등 공공 기관에 제복 경찰이 배치되면서 한가 하던 일요일 오후의 서울은 아연 긴장 속에 휘말리게 되었다.
오후 4시를 넘어서 일본의 매스컴은 서울발 기사로 이 테러 사건을 일제히 머리기사로 보도하기 시작했다. 랭군에 특파원을 두지 못하고 있는 일본의 신문들은 서울발 기사로 주요 지면을 채우면서 랭군의 자국 대사관과 상사로 국제 전화를 걸어 그곳의 분위기를 간접적으로 전했다. 공동 통신만이 랭군에 휴가 가 있던 하노이 특파원 이또리끼시 기자를 이용할 수 있었다. 중공도 논평 없이 「랭군 참사」를 전했고 KAL기 격추 사건 때와는 달리 북괴 평양 방송도 재빨리 이 사건을 보도했다. 소련에 의해 동포 2백69명이 살육 되었을 때는 침묵을 지키고 있던 북괴가 모든 선전 기관을 동원, 『폭탄 세례를 받았다』는 식의 악담으로 동족의 비극에 환호성을 지른 것, 그 자체! 가 비극이었다.
일본의 매일신문은 10일자 사회면에서 『아이고 서울, 또야!』라는 커트제목을 뽑고 비극이 겹친 서울의 표정을 꼼꼼하게 전달했다. KAL 격추 뉴스 때는 워싱턴과 동경이 주된 뉴스공급원이 되었으나 이번 참사에서는 랭군보다도 서울이 핵심 뉴스 공급처가 되었다. 그것은 랭군에 외신 기자들이 많이 주재하고 있지 않은데다가 미얀마 당국의 엄격한 보도 관제와 취재 제한으로 1차적인 소스 접근이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미국 정보기관도 미얀마에서만은 정보 수집 네트웍이 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히려 동남아의 정보 센터인 방콕이 랭군을 앞지르는 뉴스 공급지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한국의 방송·신문·통신사는 이날 오후 기자들을 비상소집, 호외를 연달아 내면서 철야 근무 체제로 돌입했다. 우리 언론은 전두환 대통령이 랭군에서, 사과 겸 위문 차 영빈관으로 방문한 산유 버마 대통령에게 『이번 사건은 북괴의 소행이다』 고 밝힌 것을 크게 보도하면서 북괴의 범행으로 처음부터 단정하고 나왔다.
제1부 대폭발
강자 네윈, 용서를 빌다
랭군의 영빈관으로 버마 대통령 우 산유가 허겁지겁 달려와 『뭐라고 죄송한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다.』고 사과한 것은 10월9일 오전 11시50분(현지 시간)쯤, 폭발 1시간20분 뒤였다. 이 자리에서 전대통령은 부상자들에 대한 신속, 완벽한 치료와 사망자 들의 조속한 본국운구, 범인들에 대한 철저한 수사를 요구, 다짐을 받았다. 오후 3시40분 께 전대통령은 산 유 대통령의 안내로 제2 육군 병원을 방문, 시체 안치실에서 분향하고 부상자들을 위로한 뒤 영빈관으로 돌아왔다.
여기서 전대통령은 한 거물의 이례적인 방문을 받았다. 바로 버마 실권자인, 사회주의계획당의장 네윈 이었다. 네윈은 이 자리에서 『저의 사죄의 말씀을 받아 주십시오. 이번 불상사로 대한민국이 입은 피해를 보상하기에는 무슨 말로도 부족하다고 생각하며, 버마 정부와 국가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고 70대의 노 정치가는 정중하게 사과했다.
여기서 잠깐 '네윈'에 대해 알아 볼 필요가 있다. 네윈은 오늘의 미얀마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버마의 정치구조는 이렇게 되어 있다. 네윈은 의장으로서 사회주의 계획당을 통솔하고 당은 군을 관할하며 군은 행정부를 통제한다. 소련처럼 15명으로 구성된 당 정치국이 최고의 국가 통치 기관이다. 네윈은 얼마 전 대통령직에서 물러났으나 변함없이 실권자로 남아 있다. 지난 62년 무혈 군부 쿠데타로 집권한 그는 22년째 철권통치를 계속하고 있는데 다혈질적인 성격으로 유명하다. 최근 그는 한밤중에 자택에서 뛰쳐나와 직접 젊은이들의 팝송 파티를 해산시킨 적이 있다. 또 랭군의 어느 골프장에선 중국계 미얀마인과 시비를 하다가 주먹질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지난 5월 네윈은 이번 폭발 참사와도 간접적인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는 중요한 숙청을 단행했다. 당내 서열 3위인 당 사무총장 틴우를 해임한 것이었다. 틴우의 직접 사임 이유는 그가 전 국가 정보국장이며 자신의 계열인 보위 장군의 부인이 보석 밀수에 관련됐을 때 보위 장군을 감싸고 돌았다는 것이었다. 실제 숙청 이유는 틴우 총장이 네윈의 후계자로 두각을 나타내는데 위협을 느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네윈은 끊임없이 제2인자를 제거하면서 자신의 권력 기반을 유지하였다. 틴우 총장은 1950년대 미국 정보기관에서 정보 장교 교육을 받은 뒤 네윈의 부관으로서 그 뒤 27년 동안 네윈의 가장 가까운 측근으로 일해 왔으며 주로 군 정보기관을 장악하고 있었다. 틴우의 두 형은 전장에서 죽었는데 그의 어머니가 특별히 네윈에게 부탁하여 틴우는 대 게릴라전선 지휘관을 한번도 맡지 않고 줄곧 정보기관에만 있었다고 한다.
틴우는 버마 군 정보국을 동남아에서 가장 유능한 정보기관으로 키웠다는 평을 받았다. 그러나 미국 CIA에서 교육받은 전력으로 해서 친미파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었다. 이번 아웅산 참사를 버마 정보기관이 사전에 예방하지 못한 것도 틴우-보니 인맥의 숙청으로 군정보국이 대혼란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란 분석이 유력하다. 어쨌든 미얀마의 강자 네윈이 직접 전 대통령에게 수사에 대한 적극 자세를 천명함으로써 버마 치안 당국이 일부의 우려대로 적당히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했다. 전대통령은 9일 오후 4시15분 랭군 공항에 도착, 철저한 수사를 당부하는 출발 성명을 발표한 뒤 KAL특별기편으로 귀국길에 올랐다. 전대통령은 10일 새벽 3시40분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상복을 입은 김상협 총리 등 국무위원들의 영접을 받았다.
네윈 (미얀마 대통령. 尼溫, Ne Win, U)
shu Maung이라고도 함. 1911. 5. 24 미얀마 파웅달레~2002. 12. 5 양곤. 미얀마의 군인·정치가. 1962~88년까지 미얀마를 통치했다. 1929~31년 양곤의 유니버시티 칼리지에서 공부했고 1930년대 중반 미얀마 독립을 위한 반영(反英) 투쟁에 참가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이 미얀마를 침공하자 '30인 동지회'의 한 사람으로 하이난에서 일본군 군사훈련을 받았다. 1943~45년 일본의 지원을 받는 미얀마 군 장교로 복무했으나 곧 환멸을 느끼고 지하저항군의 조직을 도왔다. 1948년 1월 4일 미얀마가 영국에서 독립한 뒤 군 부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우 누 행정부가 미얀마를 마비시켰던 인종분규를 진압하는 데 실패하자 네윈은 과도내각의 총리를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았다(1958). 1960년 총선거에서 우 누가 다시 선출되고 내각이 구성되면서 사퇴했으나, 1962년 3월 2일 쿠데타를 일으켜 우 ! ㈇ 투옥하고 거의 군출신으로만 이루어진 혁명 평의회를 구성했다. 네윈은 군사독재로 주요산업체의 국유화를 핵심으로 하는 사회주의 경제계획을 시행하는 한편 미얀마 경제에 대한 인도·중국·파키스탄 무역상들의 영향력을 제거했지만, 급속한 산업화를 이루려는 야심찬 계획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또한 중립적인 외교정책을 추구하면서 외부세계와의 관계를 단절하여 미얀마를 고립시켰다. 1964년 미얀마는 1당독재국가가 되었다. 네윈이 창설하고 군부가 지배하는 미얀마 사회주의계획당(MSPP)만이 유일정당으로 허용되었다. 1972~73년 네윈과 그의 동료들은 미얀마에 1당독재를 인정하는 새로운 헌법을 제정했고, 1974년 네윈을 대통령(1974~81)으로 하는 새 정부가 구성되었다. 네윈은 MSPP 의장으로서 미얀마의 확고부동한 통치자가 되었다. 1980년대 후반 미얀마는 네윈의 사회주의·고립주의 정책으로 인하여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 속했다. 정부의 부패와 잘못된 관리로 대부분의 경제활동이 지하암시장에서 이루어졌고 한때 세계 유수의 쌀 수출국이었던 미얀마는 식량부족에 허덕이기 시작했다. 1987년말 전국 주요도시에서 대대! 岵 반정부 폭동이 일어났다. 1988년 7월 네윈은 MSPP 의장직에서 물러났고 , 1당통치가 계속되어야 할지 아니면 다당제 민주주의로 대체되어야 할지를 결정할 국민투표를 실시하기로 약속했다. 1988년, 결국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은퇴했으나 가족과 함께 풍족한 생활을 누리며 정·재계에 영향력을 행사해 실질적인 정책을 좌우했다. 2002년 3월 그의 사위와 손자 등 3명이 현 정부에 대한 쿠데타를 시도하다 실패하자 그는 가택연금조처를 당했고 가택연금 도중 사망했다.
제1부 대폭발 (이기욱 차관마저 운명하고)
전 대통령은 귀국 성명을 발표한 뒤 청와대로 직행, 새벽 5시10분 비상 국무회의를 열고 부상자와 사망자들의 조속한 귀국처리를 지시했다. 이 지시에 따라 대한항공 DC10 특별기가 랭군으로 비행, 10일 오전4시쯤(현지시간) 랭군에 도착했다. 장경식 국립 의료원장은 의료단을 이끌고 제2 육군병원으로 갔다. 우리 부상자들에 대한 치료 상태는 「형편 없었다.」. 환자들의 상태도 제대로 파악되지 않고 있었다. 버마 관리들은 회의를 한 뒤 우리 의료단이 치료를 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으나 시간만 끌었다. 장 원장은 회의의 중단을 요구, 급한 대로 부상자들을 살펴보았다. 기본 약품인 알콜과 탈지면이 모자라 너댓 번씩 사용한 정도였고 부상자들은 한결같이, 고통을 호소하면서도 우리 의료진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이기욱 차관(당시 생존)의 경우, 상태가 너무나! 중했다.
의료단은 부상 상태가 심하지 않은 것으로 믿고 곧바로 기내로 옮길 작정이었고 그래서 수술 도구도 기내에 두고 왔었다. 이 차관의 호흡은 약해지며 갑자기 위급한 상황으로 빠져들었다. 병원엔 인공호흡기도, 혈액 검사 기재도 없었다. 2시간 동안 수배를 한 끝에 겨우 낡은 인공호흡기를 하나 가져왔다. 이 차관은 인공호흡기의 도움으로 병세가 약간 호전 되었으나 병원기가 아닌 KAL 특별기로는 후송이 위험하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이 문제는 미군측이 C9A 병원기를 내 이 차관과 이기백 대장을 필리핀 클라크 미 공군 기지로 후송함으로써 해결되었다.
그러나 이 차관은 10월13일 새벽 클라크 기지 병원에서 부인과 친지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운명하고 말았다. 이로써 순직자는 모두 17명으로 늘어난 것이었다. 부상자 11명을 태운 특별기는 10일 밤 9시15분에 김포로 돌아왔다. 10월11일 하오 5시엔 KAL 특별기가 16위의 순직자 유해를 싣고 랭군에서 김포로 말없이 귀환, 서울대병원에 안치되었다가 부슬비 내리는 13일 합동 국민장으로 국립묘지에 묻혔다.

버마 아웅산 폭탄 테러 당시의 순방 기념우표. 1983년 10월 8일 「전두환 대통령 버마 방문기념우표」「전두환 대통령 스리랑카 방문 기념우표」「전두환 대통령 인도방문 기념우표」, 사진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전두환대통령 호주 방문 기념우표」「전두환 대통령 뉴질랜드 방문 기념우표」도 같은 1983년 10월 8일에 발행되었다. 그런데 1983년 10월 9일 첫 방문국인 버마 (현 미얀마)에서'아웅산묘소 폭파사건'이 일어났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버마 아웅산묘소에 도착하기 전에 설치해둔 폭탄이 미리 폭발하는 바람에 미리 대기 중이던 부총리 서석준 이하 여러 정부요인과 취재차 수행했던 기자 등 17명이 사망하고, 합참의장 이기백 등 13명이 중경상을 입는 세계 외교사상 유례없는 국가주도의 테러사건이었다. 전대통령 일행은 즉시 모든 방문 일정을 취소하고 귀국했다. 버마 정부는 ! 岺 2명을 체포하여 사형을 선고하고 북한과의 국교를 단절했다. 그 때문에 실제 방문한 곳은 버마 뿐이고 나머지 국가는 방문하지 못했다. 제작된 기념우표는 물론 전부 회수조치 되었다.
미얀마(버마)아웅산 묘소 암살.폭발사건 제2부
제2부 수사 동일(同一) 수법 전과자의 범행
『우리 모두가 테러를 당했다』『이젠 정말 참을 수가 없다』 『아빠를 돌려 달라』 『당하고만 있을 수야』 이런 표제들의 홍수, 정규 방송을 중단, 무거운 추모 방송을 5일간 계속한 텔리비전, 연일 이어지는 규탄 대회의 함성들. 물론 그 표적은 테러범 이었고 그 테러범이 누구냐 인가에 대해서는 全대통령 이하 대다수 국민들이 폭발 사건 직후 이미 결론을 내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땐 물증을 찾기 전이지만 그와 비슷한 사건들을 수없이 겪어본 한국인들은 본능적인 직관으로 「저들이다!」고 찍어버린 것이었다. 암살 폭발 사건의 수사가 진행되면서 국민들의 관심은 나날이 새롭게 밝혀지는 수사 과정으로 쏠렸다.
미얀마 정부는 사건 다음날 종교장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5인 사문위원회를 구성,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했고 우리 정부도 이원경 체육부 장관을 랭군으로 보내 현지 공관을 지휘, 미얀마 정부와 사태 수습에 임하도록 했다. 정부는 또 박세직 안전 기획부 차장을 반장으로 하는 13명의 폭파사건조사 요원을 현지로 파견했다. 아웅산 암살 폭파 사건은 교통사고와 같은, 지뢰를 밟은 사고와 같은 우발적 사건이 아니었다. 치밀하게 연구되는 꾸며진 사건이었다. 그런 만큼 이 사건의 전조로 보이는 연쇄적 사태 발전을 이 사건 뒤 많은 전문가들이 지적하고 나섰다. 이 사건은 가해자 측의 행적을 추적, 분석할 때 일련의 전 단계 사건들이 진화, 발전해 오다가 이번 사건에서 절정을 이룬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한편 이 사건의 무대가 된 버마 또한 「독소의 배양지」구실을 할 만한 토양을 지니고 있었으며 「사건의 발생」을 예비하는 많은 불쏘시개를 갖고 있었다. 범인과 무대, 성냥과 인화 물질, 양쪽의 조건이 합쳐져 대참사로 폭발한 것이 이번 암살 폭파였던 것이다. 지난 68년 1월21일의 청와대 습격기도 사건, 지난 70년6월의 동작동 국립묘지 현충문 폭파 사건, 지난 9월25일의 대구(大邱) 미 문화원 폭파 살상 사건과 이번 사건을 관류하는 공통된 숫법과 아이디어는 문외한이라도 퍼뜩 알 수 있다.
1983년 9월 22일 오후 9시33분경 대구시 삼덕동 2가 미국문화원 정문 앞에서 폭발물이 터져 대구 영남고등학교 1학년생인 허병철 군이 현장에서 숨지고 대구 중부경찰서 김철호 순경 등 4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 사고로 미 문화원 건물과 인근 한국은행 대구지점 현장에서 100m 떨어진 경북의대와 의대부속병원 등의 유리창 500여 장이 깨졌다. 수사당국은 1980년 12월 광주 미공보원 및 1982년 3월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에 이어 발생한 미문화원 사건이라는 점을 중시하고 북한의 소행으로 보고 수사했다. 당시 사건현장에 있던 허 군 친구의 증언에서도, 경찰이 간첩의 소행을 전제로한 강력수사로 인해 곤혹을 치렀다고 한다.
사건은 오후 9시25분경 숨진 허 군이 감색 천 가방을 사고현장에서 발견, 300m 떨어진 대구시경 정문 근무자에게 가지고 와서 신고했다. 또 허 군이 미 문화원 앞에는 큰 가방이 하나 더 있다고 해서 관할 중부경찰서에 연락, 김철호 순경이 허 군을 데리고 미 문화원 현관 앞 계단에 도착, 허 군이 가방을 드는 순간 가방이 터졌다.이 사건은 1983년 12월 8일 다대포 해안에서 생포된 진충남과 이상규 등 2명의 생포간첩 증언을 인용, 북한 소행임을 최종 확인됐다.

말하자면 동일 숫법 전과자의 범행이었던 것이다. 「현충문 폭파 사건」은 70년 6월22일 발생했다. 6·25 20주년을 사흘 앞둔 이날 새벽 현충문 지붕 위에 숫자 미상의 무장 공비 들이 올라가 폭발물을 설치하다가 그것을 잘못 다루는 바람에 폭발, 무장 공비 1명이 즉사 했다. 폭발물은 크레모어 지뢰와 비슷한 것이었다. 수사 당국은 당시 무장 공비가 6·25 기념일에 국립묘지를 참배하는 박정희대통령 등 정부 요인을 암살하기 위해 폭발물을 설치하려고 했던 것으로 분석했었다. 현충문은 충혼탑에 분향, 헌화하기 위해선 꼭 거쳐 가야 하는 곳이었다. 당시 박대통령은 6·25기념일에 국립묘지를 참배하는 것을 관례로 삼고 있었다.
현충문 사건과 아웅산 폭파 사건의 공통점은
①범행 장소와 대상
②폭발물 설치 장소(지붕과 천장)
③폭발물의 종류
④폭발물의 폭파 장치(시한 혹은 원격조종) 등이다.
대구 미문화원 폭파 사건을 정문 현관 앞에 놓인 2개의 고성능 폭탄 중 하나가 터지면서 발견, 신고한 고교생이 죽고 문화원 앞부분과 옆 건물 유리창이 크게 부서진 사건이었다. 터지지 않은 폭발물을 조사한 결과, 시한장치가 되어 있는 고성능임이 밝혀 졌었다. 이 사건의 범인은 아직 잡히지 않고 있다. IPU 총회를 앞두고 일어난 이 사건은 대남테러공작의 신호였는지 모를 일이다. 더구나 이번 아웅산 묘소에서 발견된 폭발물과 대구사건의 폭발물이 비슷한 점이 많다는 것이 밝혀짐으로써 동일 숫법 전과자 집단의 범행이라는 확신을 더욱 갖게 했다.
제2부 수사 증거 인멸 노린 소이탄 발견
아웅산 묘소 폭파 사건의 범인들이 조직적이고 치밀한 범행을 계획, 실천했다는 것은 처음부터 명백한 것이었다. 버마 수사 당국은 10월9일 오후부터 현장을 외부와 격리 시키고 조사에 착수했다. 우선 무너져 내린 천장에서 폭탄이 장치되었음직한 곳을 뒤지 다가 불발 폭탄 2개를 더 회수했다. 하나는 크레모어, 다른 하나는 소이탄이었다. 이 소이탄이 만약 함께 터졌다면 섭씨 4천도의 고열이 현장의 모든 건물은 물론이고 사상자들의 몸까지 태워버려 원인 조사의 실마리를 거의 인멸해버렸을 것이다. 미얀마 수사 당국은 이틀 뒤 도착한, 박세직 안전 기획부 차장이 이끄는 한국측 조사반의 도움을 받아 이들 폭발물의 계보를 밝히는 작업에 들어갔다. 그 결과는 예상한 대로였다.
미얀마수사당국이 확보한 물증은 원격 조종용 전자 수신 회로 조종기 1대, 일본의 히다찌사 제작의 폭발물 원격 조종용 건전지 16개 등이었다. 이 히다찌사 제작의 건전지들은 북괴의 대남 공작에 자주 쓰여 한국 대공 수사관들에겐 안면이 있는 것이었다. 불발탄의 신관을 조사한 결과, 이 역시 대구 미국문화원 사건 때 남아 있었던 불발탄, 최근 일망타진 되었던 월성 및 임진강 침투 무장 간첩들이 가지고 있었던 폭탄의 그것과 같은 종류임이 확인되었다. 천장에서 터진 폭탄은 크레모어(Claymore mine 또는 M18A1 대인용 지뢰)로 밝혀졌는데 인명 살상에서 최대의 효과를 나타냈다.
단 한 발의 폭발로 20명이 죽고 47명이 다쳤다. 그것은 폭발물의 파편(볼베어링) 확산 방향이 기가막히게 정확히 우리측 수행원 대열 쪽으로 맞추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확산각 뒷편에 있었던 MBC 기자 등은 지근거리에 있었는데도 조금도 다치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폭발물을 장치한 범인들이 참배객들의 도열 위치까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었다. 폭발물의 무서운 효율성과 정교성은 앞줄에 서 있던 장차관급 인사 중에서 이기백대장만이 중상을 입고 목숨을 건졌다는 사실로도 설명이 되는 것이었다.
M18A1 Claymore Mine
크레모어(Claymore mine 또는 M18A1 대인용 지뢰)
6.25 당시 중국의 인해전술로 인해 미군이 밀리자 Norman A. MacLeod란 사람이 개발한 것. 그는 파편과 성형작약 등의 폭발물에 관련된 연구를 하던 사람이다. claymore는 스코틀랜드의 양날검으로써 긴장검을 뜻한다.
크레모어는 M18A1(한국화약) 이라는 제식명칭이 있다. 도폭약은 콤포지션 C4. 파편은 쇠구슬(철제볼) 700발이 들어 있다. 확산도는 수평각 60도이다. 높이는 2m까지 가능하다. 크기는 21.6X3.0X13.6cm. 살상반경은 50m, 유효반경은 100m, 위험반경은 250m이다. 사용시 주의할 점은 후폭풍거리인 16m 이상의 안전거리를 확보하여야 한다. 비산각 120도. 비산각이란 흩어져 날아가는 각도, 즉 폭파할 때 안에 쇠구슬이 흩어지는 각도를 말한다. 60도는 폭파할 때 직선거리로 나가는 각도다.
제 원
중량: 1.6kg
크기: 가로 21.6cm
세로 13.7cm
두께 3.0cm
유효살상거리 : 50m
준살상거리 : 100m
후폭풍의 위험반경: 16m
비산각 120도
클레모어는 폭약이 아니라 대인지뢰의 일종. 지상폭풍형의 지뢰와는 달리 일 방향 지향성 지뢰로 지뢰의 제한적인 살상력을 대규모 살상력으로 만든 것으로 후폭풍이란 총의 반동처럼 크레모어가 작동되면서 뒤쪽으로 에너지가 발생
첫댓글 내일은 한글날 이지만 우리는 이 사건도 잊어서는 안됩니다.바로 북한공산당의 만행이죠.
각하!항상 만수무강 하시구요 각하 곁에는 저희 전사모가 있다는 거 잊지마세요.
눈물이 나서 끝까지 볼수가 없네요.. 대학교수님이 말씀하시길..저 당시 내각은 단군이래 최고의 인재들로 구성되었다고 평가하셨죠..버마는 나중에 공산정부가 들어서면서 북한하고 놀아났고... 저 사건만 아니였으면 메이지유신을 능가하는 역사창조를 할뻔했는데..어휴 열받어..그래도 전두환대통령께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으신것은 감사한 일입니다.
이 글을 모셔갑니다. 오늘도 좋은날 되세요.
대한민국의 인재들이 저 사건때 많이 돌아가셨지요..그 분들이 살아있었더라면,...김영삼도 김대중도..노무현도 대통령이 될수 없었고..각하의 재임시절..이 나라는 더 발전을 했을 것입니다..절대로 잊어서는 안될것입니다.
글을 읽노라니 정말 치가 떨림니다. 다시한번 당시 작고 하신 고인께 명복을 빕니다. 부디 좋은 곳에서 편안하시길 빕니다. 우리는 북한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반공정신이 너무나 해이해져 있습니다. 각하님 내외분 부디 몸건강하셔서 저희 전사모 요원들이 각하님의 명예를 회복시켜 드릴때까지 건강하시옵소서!
돌아가신 17분의 희생은 죽을때까지 잊을 수가 없습니다.ㅠㅠ 삼고 고인들의 명복을 뒤늦게나마 빌어봅니다.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