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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강 정철의 생애와 문학 세계
Ⅰ.송강 정철의 생애
정철의 자(字)는 계함(季涵)이며, 호(號)는 송강(松江)이다. 부친 유침(惟침)과 모친 죽산(竹山) 안씨(安氏) 사이에서 4남3녀 중 넷째 아들로 중종31년(1536)에 서울의 장의동에서 태어났다. 그가 10세 되던 해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정순붕,허자 등이 매형인 계림군 유(瑠)에게 없는 죄를 뒤집어 씌워서 죽이니 화가 정씨일가에게도 미쳐 큰형인 정랑공 자(玆)는 체포되어 매를 맞고 귀양을 가는 도중에 죽었으며, 부친 판관공(判官公) 역시 구금되었다가 겨우 죽음을 면하고 관북 정평으로 귀양을 갔다가 이듬해 연일(延日)로 귀양지를 옮겼다. 이때까지 송강은 생활의 안정을 얻지 못하고 학문을 하지도 못하였다. 부친은 그로부터 5년후(명종6년)에 왕자 탄생의 은사(恩赦)로 석방되어 선친의 산소가 있는 전남 창평 당지산하에 거처하게 되었는데 송강도 부친을 따라 27세(명종17) 문과에 합격할 때까지 여기서 지냈다. 송강은 이 때에 송강반(松江畔)의 기암누정(奇巖樓亭), 성산번반(星山번畔)의 죽총(竹叢), 명봉산상(鳴鳳山上)의 군학(群鶴)들과 벗 삼으면서 작가적 소질을 키웠고, 또 이 무렵부터 당대의 유명한 문장가와 유학자들에게 학문을 배우고 교유하였다. 송강의 일생은 관계 생활(官界 生活), 배소 생활(配所生活), 은거 생활(隱居 生活)로 나눌 수 있는데 연대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선조8(1575)년에 심의겸, 김효원의 언쟁에서 발단된 대립이 동인,서인의 분파로 발전하고,황해도 재령에서 발생한 「노식주인변(奴弑主人變)」을 계기로 서인이 득세하였으나, 그는 조정에 서는 것을 불쾌히 여겨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이것이 환해풍파(宦海風波)의 시작이었다.
?? 선조11(1578)년 정월에 조정으로 나왔다가 동인의 거두 이발과의 불화로 벼슬에서 물러나 다시 낙향했다.
?? 선조13(1580)년 정월에 강원도관찰사에 임명되어 처음으로 외직(外職)으로 나갔다. 이 때 관동 가경(佳景)의 주인이 되어 마음껏 시주(詩酒)를 즐김과 동시에 선정을 베풀었는데 〈관동별곡〉과〈훈민가〉가 지어진 것도 이 무렵이다. 강원도 관찰사 재직 1년만에 노수신의 비답(批答)으로 8월에 벼슬을 그만두고 창평으로 내려갔다. 그 해 12월에 다시 전라도 관찰사에 임명된 것을 비롯하여, 이듬 해 9월에 승정원도승지 겸 예문관대제학, 12월에 예조참판, 함경도 관찰사, 다음 해 3월에 예조참판, 6월에 형조판서, 8월에 예조판서, 그 다음 해(1584) 49세 되던 해 8월에 대사헌에 제수되었다.
??선조18(1585)년 다시 사간원과 사헌부로부터 논척을 받아 부득이 조정에서 물러나와 고양(高陽)에 와있다가 창평으로 내려왔는데, 이 때부터 4년 동안은 비록 정치적으로는 불우하였지만 작가로서의 생활은 절정기였다. 자연미에 마음껏 몰입하여 감정을 시상으로 승화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시국에 대한 개탄속에서 더욱 진한 전율로 느껴오는 연군지정에 온 몸
을 작품 속에 녹였다. 그의 작품 중에 적지않은 양이 이 시기에 지어졌고, 〈사미인곡〉〈속미인곡〉도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넷째아들인 기암이 택당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선조20∼21년에 대점(현재, 전남 담양군 고서면 고읍리)에서 창작된 것으로 보인다.
??선조23(1590)년에 다시 좌의정에 올랐으나 이듬해 2월 건저문제(建儲問題)로 동인의 무고와 양사(兩司)의 논계(論啓)를 입어 파직 당하고 진주로 유배되었다가 강계로 유배지를 옮 겼다.
??선조25(1592)년 임진왜란이 돌발하자 석방되었는데 왕이 부르는 분부를 받고는 통곡하고서 왕의 행재(行在)를 뒤쫓아 왕가(王駕)를 모셨다. 이듬해 사은사로 명나라에 갔다가 돌아왔는데 왜군이 물러가고 더 이상 출사의 필요가 없다고 보고했다가 논란이 일어나 그를 공박할 구실로 삼으려하자 관직을 그만두고 강화 송강촌으로 물러나와 지내다가 빈한과 회한 속에서 이 해(선조26,1593) 12월18일에 다사다난했던 생의 막을 내리니 향년 58세였다. 숙종10년(1684)에 시호를 문청(文淸)이라 내렸고 남긴 저서로는 〈송강집〉7책과 〈가사〉1책이 전하고 있고, 후손과 그 측근자들이 비장하였던 〈송강집 습유〉및〈습유 부록〉이 전하고 있다.
Ⅱ. 문학 세계
송강 정철의 문학 세계는 당대의 자연적, 사회적 환경과 사우(師友)의 영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송강은 을사사화로 말미암아 15세까지는 거의 학문을 배우지 못하고 있다가 16세 되던해 부친의 귀양살이가 풀려, 부친을 따라 선조의 묘소가 있는 호남 창평으로 내려와서 비로소 안정된 생활을 누릴 수 있게 되었으며, 27세 문과에 급제할 때까지 이곳에서 다감한 소년 시절을 보내게 되었다. 성산의 기슭아래 우거진 죽총(竹叢), 송강(松江), 창계(蒼溪)의 기석(奇石), 구렁 위의 누정(樓亭), 이른 봄의 설중매, 겨울이 오면 언제나 볼 수 있는 명봉산 위의 학의 무리, 이러한 자연의 풍경은 그의 뇌리에 깊게 인상지어져 〈식영정 이십영〉<성산별곡〉〈전후미인곡〉등의 국문 시가와 수 많은 한시 창작의 모태가 되었다. 이러한 자연 환경과 당시에 처한 사회상이 그의 선천적 재능과 어우러져 일찌기 시심(詩心)이 싹텄고, 여기에 사우의 영향이 더하여져 문학관이 형성되었는데, 한과 연모의 시가와 풍류의 시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1. 한(恨)과 연모(戀慕)의 시가
1)정한(情恨)·자탄(自歎)의 시가
정이 많기에 한도 많아 한 평생 현실과 자연 사이에서 어느 한 곳에도 안주하지 못하고 갈등의 모래성만 쌓다가 그것마저 허물어질 때 송강은 자학의 길을 걷게된다.
유령은 언제 사람고 진(晉)적의 고사(高士)로다 계함은 긔 뉘러니 당대의 광생(狂生)이라 두어라 고사광생을 므러 므삼하리
을사사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가정적 파탄을 맛본 송강의 눈에 비친 현실은 암흑 그 자체였다. 그래서 자신을 '당대의 광생'이라고까지 비하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는 여기서 그치지 아니하고 인생무상의 경지까지 도달한다.
일뎡 백년산들 긔아니 초초(草草)한가 초초한 부생(浮生)애 므사일을 하랴하야 내자바 권하난 잔을 덜먹으려 하난다.
한잔 먹새근여 또 한잔 먹새근여 곳것거 수놓고 무진무진 먹새근여 … 중 략 … 누론 해 흰달 가난 비 굴근눈 쇼쇼리바람 불제 뉘한잔 먹쟈할고 하믈며 무덤우에 잔납이 파람 불제야 뉘우찬달 엇디리 <장진주사(將進酒辭)에서>
내가 잡아 권하는 잔을 왜 사양하느냐? 허무한 인생이지마는 죽은 뒤에 후회나 없도록 술이나 먹자는 것이다. 송강의 정탄(情歎)은 '인생무상'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보고 듣는 모든 것이 설움과 한의 껍질로 뒹군다. 변방의 외로운 기러기, 하얀 구렛나루에 묻어나는 그리운 고향 소식,이별의 고통, 이 모든 것에서 정한과 탄식이 묻어나지 않은 것이 없다.
가을다간 변방에 기러기 슬피 우니 가고픈 고향이라 망향대에 올랐구나 은근도하다 시월달 함산 국화는 중양(重陽) 위해 아니피고 길손 위해 피어주네 〈함흥객관대국(咸興客館對菊)〉
가을이 다 지난 쓸쓸한 변방에서 기러기가 슬피 울어 향수에 못이겨 망향대에 올랐더니 중양절에 피어야 할 국화가 지금에 피어나 나를 반겨준다고 하여 국화와 자연을 동일시한 자연과의 교감을 보여주고 있다.
거울 속에 비쳐보니 올해도 백발뿐이로다 꿈에는 밤마다 집에 돌아가지 않는 날이 없는데
강마을 오월에 꾀꼬리 소리 들리면 배나무 천 그루 꽃이다지네 <서감(書感)>
늘상 그리워 하면서도 가지 못하고 밤마다 꿈길에서만 밟아보는 고향인데 허무하게 봄은 또 지나가고 거울에 비친 모습은 더욱 초췌해 가기만 하는 서러움이 나타난다
2) 연군지정의 시가
송강의 연군지정은 매우 격정적이다.
"이 몸 삼기실제 님을 조차 삼기시니 한생 연분이며 하날묘랄 일이런가 ··· 평생애 원하요대 한대녜자 하얏더니 늙거야 므사일로 외오두고 글이난고… 어와 내 병이야 이 님의 타시로다. 찰하리 싀어디어 범나뵈 되오리라. 곳나모 가지마다 간대죡죡 안니다가 향므든 날애로 님의 오새 올므리라 님이야 날인줄 모라셔도 내 님조차려 하노라." (<사미인곡>중에서)
이 몸이 세상에 날 때 님을 쫓아서 났으니 한 평생 님과 함께 살다가 죽어야 함이 천리(天理)이나 이생에서도 몇 번씩이나 내침을 당해야 하는 설움을 송강은 맛보아야 했다. 그러나 님과의 연분의 끈은 질기고 질겨서 님이 나를 내칠 때마다 님을 향한 그리운 정은 더욱 끓어 올라서 차라리 죽어져서 범나비가 되어 꽃나무 가지마다 앉았다가 그 향기를 님의 옷에 옮기겠다는 애절한 정의 표현이야말로 송강 시가의 정수를 이룬다.
"뎨가난 뎨각시 본듯도 한뎌이고, 천상백옥경을 엇디하야 니별하고 해다뎌 져믄날의 눈을보라 가시난고, 어와 네여이고…… 어와 허사로다. 이님이 어대간고…… 님겨신 창밧긔 번드시 비최리라. 각시님 달이야 카니와 구잔비나 되쇼서" (<속미인곡>중에서)
임금의 사랑을 잃은 것이 자기가 교태를 너무 과히 부린 것이라 하여 스스로를 반성하고 달이 되어 님계신 창밖을 비추겠다는 다짐하고 각시님에게는 궂은 비나 되라고 하였는데 사미인곡의 <범나뷔>나 속미인곡의 <달>이나 자기의 분신을 나타내었고 특히 궂은 비나 되라고 한 것은 그 뜻을 심화시킨 것이라고 하겠다. <관동별곡>에서도 연군지정은 나타난다.
"소양강 나린 믈이 어드러로 든단 말고 고신거국에 백발도 하도할샤. 동주밤 계오 새와 북관정의 올나하니 삼각산 제일봉이 하마면 뵈리로다. 태백산 그림재랄 동해로 다마가니 찰하리 한강의 목멱의 다히고져"
임금을 떠나 관찰사로 봉직하는 가운데서도 항상 그리워하는 정을 잊지 못하는 송강임을 알 수 있다.
시조도 예외일 수는 없다.
봉래산 님겨신대 오경(五更)틴 나믄소래 셩넘어 구름디나 슌풍의 들리나다 강남의 나려옷가면 그립거든 엇더리
창평에 머물면서도 오점(五點)이 되면 궁궐 북소리의 환청을 듣고 그리워하는 모습이 나타나 있다.
쓴나몰 데온믈이 고기도곤 마시이셰 초옥(草屋) 조븐줄이 긔더욱 내분이라 다만당 님그린 타사로 시름계워 하노라
시골에 파묻혀 빈곤한 생활을 하면서도 그것에는 불평이 없으나 연군지정은 금할수 없다는 것이다.
한시에도 연군지정은 애절하게 스며있다.
서울을 떠나도 마음은 자주가는구나. 서글픈 시절 구렛나루만 더부룩한데 남녘으로 천리 돌아가는 꿈은 그 언제나 멎으리 <거국(去國)>
변방의 임지에서도 임을 그리워하는 고신의 쓸쓸하고 안타까운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배꽃 피는 시절 봄비는 부슬부슬 내리고 눈에 드는 것은 전쟁의 모습 뿐 문을 닫는다. 저멀리 변방 하늘 임금님은 어떠하신지 늙은 신하의 눈물 날로 옷을 적신다. <도영유현(到永柔懸)>
이화의 순결을 짓밟고 비가 내리는 것은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전란으로 인하여 시달리는 당시의 시대상을 상징직으로 암시해주고 있다. 처절한 상황 속에서 몽진(蒙塵)가 계시는 임금님에 대한 연군의 정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한 곡조 길게 불러 님을 그린다. 이 몸 늙었다 마라 마음은 새로우니 명년 창가에 매화가 피면 꺾어서 보내리라 강남의 첫 봄 소식 <대첩주석호운(大帖酒席呼韻)>
몸은 늙었지만 님만 생각하면 마음만은 항상 새로와진다. 그래서 강남제일춘을 알리는 매화를 님에게 꺾어서 부치고 싶다는 노신의 연군의 심정이 맺히지 않은 곳이 없다.
송강 시가의 가장 큰 주류가 연군임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3) 교우지정의 시가
송강의 사우관계는 매우 광범하다. 이들과의 구체적인 관계를 나타낸것으로 시조 2수와 몇편의 한시가 있으나 가사는 없다.
재너머 성권농 집의 술닉닷 말 어제듯고 누은쇼 발로 박차 언치노하 지즐타고 아해야 네 권농겨시냐 정좌수 왓다 하여라
호주가인 송강이 성혼의 집에 술 먹으러 가는 장면을 노래한 것으로서 흥겹고 진솔한 작가의 면모가 엿보인다.
남산뫼 어다메만 고학사 초당지어 곳두고 달두고 바회두고 믈둔난이 술조차 둔난양하야 날을오라 하거니.
송강이 고경명의 초대를 받고 지은 듯한 노래로 역시 호주가로서의 흥겨운 일면이 나타나 있다. 한시에는 교우지정을 노래한 것이 많은데 다정(多情)과 다한(多恨)이 날줄과 씨줄이 되어 엮어져서 송강 시가의 저층에 자리 잡고 있음이 확연히 드러난다.
뒤쫓아 광릉 땅에 다다르니 신선을 실은 배는 이미 아득하구나 가을 바람에 강물은 가득 사념 뿐인데 석양에 홀로 정자로 오른다. <별퇴도선생(別退陶先生)>
평소 흠모하던 퇴계 선생의 남귀일(南歸日)에 전송하러 나왔다가 늦어 보지를 못하고 멀어져 가는 배를 보면서 좀 더 일찍 나오지 못했음을 후회하면서 상념을 안고 홀로 정자에 올라 추념의 정을 새긴다.
갈산의 해바라기를 꺽어다가 스님편에 서해로 부칩니다. 서해로 가는 길이 지리해도 색깔은 능히 고치지 않으리라. <봉승기율곡(逢僧寄栗谷)>
멀리 해주 땅에 숨어사는 지기(知己) 율곡에게 안부를 전하는 시이다. 해바라기를 선물로 보냄으로써 벗에게로 향하는 자신의 마음을 암시함과 동시에 정성이 가득하다.
사옹 돌아간지 몇 년 봄인가 ? 한길 깊은 산 초목은 무성하네 문하 소년 벌써 백발이 되었구나 이 생애 원래 꿈 속의 사람인 것을 <알조계묘(謁曹溪廟)>
스승을 여의고 몇 해가 지나서도 잊지 못해 추모하는 시인의 모습에서 인생무상을 절로 느낀다.
한 열흘간의 금사사 생활이 고국 그리는 마음에 삼추와 같구나 밤물결의 맑은 기운은 분명한데 돌아가는 기러기는 슬피 우는구나 오랑캐가 있어 자주 칼을 보고 사람이 죽어 거문고를 끊고자 했으나 평생의 출사표 난리를 또 만남에 길게 읊노라 <금사사(金沙寺)>
금사사에서 머무는 동안 지기 조중봉과 고제봉 등의 전몰 소식을 듣고 밤에 일어나 지은 시다. 백아의 고사를 쫓아 거문고 줄을 끊어야 했으나 출사표를 바친때라 그러지도 못하는 안타까움이 나타난 우정과 우국의 심정이 표출된 명시이다. 송강 문학의 양축을 이루는 특징의 하나는 서정성이다. 즉, 탄식, 눈물, 체념, 안타까움, 외로움, 쓸쓸함, 원망 등으로써 인본적 휴머니즘을 유감없이 드러내었다.
2. 풍류의 시가
1) 취흥의 시가
송강은 유달리 술을 좋아하였고 이 취흥 때문에 신선의 세계를 마음대로 넘나들 수 있었고,
시가의 세계도 넓어졌다. 북두성을 기울여 창해수를 부어내는 선천적인 호기는 유교가 모든 제도를 지배하던 당시에도 그의 시가 세계를 신선의 세계로까지 이끌었다.
므사일 일우리라 십년지이 너랄조차 내한일 업시셔 외다마다 하나니 이제야 절교편(絶交篇)지어 전송호대 엇더리
일이나 일우려 하면 처엄의 사괴실가 보면 반기실새 나도조차 나니더니 진실로 외다옷 하시면 마라신달 엇디리
내말 고디드러 너업사면 못살려니 머혼일 구잔일 널로하야 다 닛거든 이제야 남괴려 하고 넷벗 말고 엇디리
이 노래들은 술을 지은 노래로써 남달리 술을 좋아하는 송강의 개성이 잘 나타나 있으며, 특히 술과 서로 문답하는 문답체의 노래에는 해학성이 엿보인다.
재너머 성권농 집의 술닉닷 말 어제듯고 누은쇼 발로 박차 언치노하 지즐타고 아해야 네 권농 겨시냐 정좌수 왓다 하여라.
선우음 참노라 하니 자채옴의 코히새예 반교태 하다가 찬사랑 일홀셰라 단술이 못내괸 젼의란 년대마암 마쟈.
인나니 가나니 갈와 한숨을 디디마소 취하니 씨니 갈와 선우음 웃디마소 비온날 니믜찬 누역이 볏귀본 달 엇더리.
역시 술을 보고서 반가워하며 사실적 묘사와 함축미, 해학미가 잘 드러난 노래이다. 시가에서 취흥이 잘 나타난 부분은 <관동별곡>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명사길 니근말이 취선을 빗기시러 바다할 겻태두고 해당화로 드러가니 백구야 나디마라 네 벗인 줄 엇디아난."
명사십리 해당화 속으로 들어갈 때의 광경으로 자신을 취선에 비겼다. 술과 자연에 도취되어 비스듬히 말에 실려 비틀대면서 갈매기를 보고 벗을 하자고 말하지만 갈매기는 벗이 되어 주지 않는다.
"뉴하주 가득부어 달다려 무론 말이 영웅은 어대가며 사선은 귀 뉘러니, 아모나 만나보아 넷긔별 뭇쟈하니 선산 동해예 갈길도 머도멀샤."
뉴하주를 가득 부어 마신 다음 흐뭇한 기분으로 영웅과 사선의 기별을 묻는 송강의 풍류적인 면모가 드러나 있다.
한시에서도 취흥은 많이 나타난다.
산촌에 술이 막 익었는데 천리 길에 친구가 왔도다.
촌심 얘기해도 다함이 없고 정원 나무엔 석양을 재촉한다.
오랜 병에 사귐을 폐하니 사립문에 눈 바람이 두들긴다. 산간에 좋은 일 생겼으니 해는 저물고 술은 항아리에 가득하네 <대점봉최희직기2수(大岾逢崔希稷棄二首)>
눈바람이 쓸쓸히 날리는 산촌에서 병고에 시달리면 외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모처럼 벗이 찾아와 술로서 회포를 푸는 정경이 따사롭기만 하다.
저녁 달이 술잔에 거꾸러지며 봄바람이 내 얼굴에 뜨도다 하늘과 땅 사이 한 외로운 칼을 차고 길게 휘바람 불며 다시 누에 오르도다. <대월독작(對月獨酌)>
교우만이 벗은 아니다. 송강에게는 모든 것이 다 벗이다. 칼을 차고 누에 올라 홀로 달과 마주하여 술잔을 기울이는 송강의 호기가 드러난 시다. 송강의 시세계와는 좀 거리가 있는 독특한 작품이다.
동강이 보내준 국화주를 보니 색깔은 가을 물결처럼 맑아서 멀리 빈 것 같네 새벽에 산을 대하여 한 잔을 드니 앉아있는 여왼 몸에 봄바람이 이네 <동강송주(東岡送酒)>
새벽에 일어나서 설산을 대하고 맑은 술을 마시는 선비의 모습. 이 술은 단순한 취흥의 경지를 넘어서 냉엄과 지조를 지나 구도적인 자세로까지 승화하고 있다.
사람들이 모두 이 정자에 오르더라도 구름은 즐기며 술은 즐기지 않네 좋아하고 싫어함이 다 다른데 술을 즐기는 자는 나와 주인뿐이네 <열운정(悅雲亭)>
사람들은 모두 열주를 못하고 열운을 하는데 시인만은 유독 열주를 한다. 이것은 열주를 통하여 열운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자연을 살피는 혜안이 있다.
꽃은 시늘어도 붉은 작약이요 사람은 늙었어도 정돈녕이라네 꽃도 대하고 술도 대하니 의당 취하고 깨지 말아야지 <대화만음(對話漫吟)>
지는 꽃과 늙어가는 인생을 대비시켜 자학적인 안타까움을 표현한 시로서 모든 무상함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술에나 취해 보자는 간절함이 보인다.
2) 상자연(賞自然)의 시가
송강 문학의 풍류는 취흥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상자연에서도 찾을 수 있다. 선조 18년 (1585)이후 양사의 논척을 받아 퇴향하여 있을 때에는 정치적으로는 매우 불행하여 시련과 실의가 교차된 시기였으나 문학적으로는 뛰어난 재질을 마음껏 발휘할 황금기였다고 하겠다. 고임을 받으면 나아가 벼슬하고 내치면 산림에 묻히는 것이 선비의 한결같은 진퇴의 도였으니 부침성쇠(浮沈盛衰) 우여곡절이 심한 송강 생애에 있어서 강호죽림은 최후의 안식처요, 은둔처요, 영원한 고향이었다. 때로는 강호호반에, 때로는 북변 죽림에서 제경(帝京)의 옥당(玉堂)을 그리워하여 야야몽혼상옥당(夜夜夢魂上玉堂)하는 연군주일념(戀君主一念)에 울기도 하고 혹은 당쟁의 와중에서 정적의 논척을 받을 때마다 유회기죽림(幽懷寄竹林)의 은일 생활을 동경해 마지 않는 이중성의 갈등에서 그의 자연친애사상은 점점 깊어가서 또 하나의 송강의 멋을 낳았다.
남극노인성이 식영정의 비최여셔 창해유전(滄海柔田)이 슬카장 뒤눕다록 가디록 새비찰내여 그믈뉘랄 모란다.
남극노인성이 성산에 영원토록 비치어 자연속에서 무궁무진하게 지내고 싶다는 소망이 보인다.
새원 원쥐되여 시비(柴扉)랄 고텨닷고 유수청산을 벗사마 더뎠노라 아해야 벽제(碧蹄)예 손이라커든 날나가다 하고려.
세상의 모든 명리를 버리고 유수와 청산을 벗삼고자 하는 심정을 노래한 작품이지만, 종장에서 나타나듯이 시류에 대한 배척과 자신의 고립의식이 잠재해 있어 완전한 자연합일은 보이지 않는다.
믈아래 그림재 디니 다리우해 듕이 간다 뎌 듕아 게잇거라 너가난대 무러보쟈
막대로 흰구롬 가라치고 도라 아니보고 가노매라.
산중의 풍경을 노래한 작품으로 다리 위로 외로이 지나가는 중의 그림자가 계곡의 물에 비치고 "어디 가느냐"고 물으니 대답은 않고 막대로 흰구름을 가리키면서 묵묵히 가기만 하는 고요한 산중의 풍경이 완연히 나타나 있다. 간결한 언어 속에서 격조 높은 리듬감을 나타낸 것이 송강 고유의 재질이라고 하겠다.
한시에서도 상자연의 세계를 표현한것은 많다.
쓸쓸히 나뭇잎지는 소리에 굵은 빗소린가 하여 중을 불러 문밖을 나가보랬더니 달이 시냇가 나무에 걸려 있다 하네 <산사야음(山寺夜吟)>
잎지는 소리마저 들리는 고요한 심야의 산사에서 전전반측하다가 잎지는 소리를 빗소리인 양 착각하고 더욱 우수에 잠겨 중을 부른다. 중은 "월괘계남수(月掛溪南樹)"라고 할 뿐 비에 대한 말이 없다. 그윽한 산사의 배경속에서 청각과 시각의 이미지가 조화를 이루고 시냇가 나무에 달이 걸려 있는 정경은 한 폭의 동양화다. 순간적으로 일어난 시인의 감정이라면 당연히 문을 박차고 그 정경을 탐미하였으리라. 그러나, 중을 시켜 그 정경을 물어 보았다는 것은 송강 시가의 일반적인 특징이 "관념문학"이라는 것을 새삼 확인하게 한다.
혈망봉 앞의 절 찬 강물 돌문을 대하여 흐르고 가을 바람에 피리 한 소리 일만산 구름을 깨뜨린다. <금강산잡영(金剛山雜詠)>
금강산의 절경에 도취되어 몰아의 경지에 서 있는데 가을 바람을 타고서 어디선가 들려오는 피리 소리가 일만봉의 구름을 흩어지게 한다. 그러나 사실은 피리가 구름을 흩어지게 한 것이 아니고 피리 소리에 놀란 시인이 구름 밖의 또 다른 세계의 아름다움에 놀란 것이다.
어둠빛은 차가운 나무에서 일고 가을소리는 돌여울에 든다.
삼베옷이 이슬에 다 젖어 강뚝을 따라서 달과 함께 돌아온다. <금암(琴巖)>
달밤 을씨년스런 나무의 모습에서 한기를 느끼며 돌여울에서 가을 소리를 들으며 이슬에 젖은 달빛과 함께 강둑을 따라 돌아오는 멋, 시각과 청각의 조화, 그림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그 이상의 은자의 생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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