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시립박물관에서 실시하는 박물관 학교(총 7회차)의 강의 주제는 '근대의 맛과 공간 탄생' 입니다.
오늘 3회차 강의는 '빵과 제과점 - 제과점 미즈모아와 이성당을 사례로' 입니다.
지난 주까지는 자동차를 이용했는데, 이번 주부터는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가보려 해요. 주차 하기가 어려워 스트레스를 너무 받아서요.
그런데 대중교통 이용이 편하지는 않다는 것. 지하철 타고, 버스 타고, 한참 걷고...
오후 2시 강의 시작인데
집에서 12시에 나가 1시 30분에 근처에 도착했네요. 간단하게 토스트 먹고.
전주에서 오신 무형문화연구원 오세미나 강사님.
연구를 많이 하신 분 같아요.
일제강점기 시절의 이즈오야(왼쪽)
현재 이성당의 모습(오른쪽)
1910년 이즈모야는 찹쌀과자인 아라레를 파는 작은 상점이었으나
1920년대에 이르러 군산의 번화가인 '메이지마치 2쵸메 85번지의 2(현재의 중앙로1가'로 확장되었으며,
군산에서 가장 큰 제과점으로 성장했습니다.
이즈모야 제과점의 특징
- 1층 제과점 입구 앞에는 쇼윈도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이곳에 빵과 과자가 진열되었다. 이러한 쇼윈도는 근대적인 판매 방식을 도입한 것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아 소비를 유도하는데 효과적이었습니다.
- 일본 상점에서는 상호나 가문을 새긴 천을 상점 입구에 걸어두는 관습이 있었는데, 이를 노렌이라고 합니다. 노렌은 햇빛을 가리고 바람을 막는 기능을 할 뿐만 아니라, 그 상점을 상징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합니다. 이즈모야의 간판과 입구 야쪽에 걸린 노렌은 시각적인 홍보 효과를 극대화하며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습니다. 간판과 노렌에 담긴 이미지와 문자는 이즈모아를 널리 알리는 중요한 수단으로, 소비자들에게 새로운 소비 경험을 제공하는 근대적 공간으로 자리잡게 했습니다.
가족이 똘똘 뭉쳐서 이즈모야를 운영하였습니다.
종업원은 약 20명, 대부분 조선인이었지요. 식당부에서 일했던 여성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남성.
조선인을 고용한 이유는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서였습니다. 물론 조선인 종업원에게는 제과 기술을 가르쳐 주지 않았고, 빵과 과자는 철저히 히로세 가족들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조선인 종업원들은 주로 단순한 허드렛일을 하였지요.
일본으로 건너가 '이즈모야' 간판을 달고 영업을 하는 모습.
제과점 이즈모야가 어떻게 해서 군산에 자리 잡아 성공을 거두었는지,
해방이 되자 그 자리에 어떻게 해서 이성당이 자리잡게 되었는지 등등
정말 유익한 강의였어요.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를 정도...
빵과 과자는 특정 계층만이 누릴 수 있는 고급 음식이어서
조선인들은 이즈모야의 빵과 과자를 먹을 수 없었고
단지 냄새만 맡았을 뿐이었지요. (종업원들에 한해)
그리고 그 종업원들은 다른 사람을 만나면
"달콤한 냄새가 나더라." 라고 말했겠지요.ㅠㅠ
지나가는 행인들은 단지 공간을 구경하는 행위를 할 수 있었을 거구요.
아무튼...여기에 다 적을 수는 없지만
너무너무 재미있고 유익한 강의였어요.
이 강의에서 처음 들은 단어
전재민 - 일본에서 살다 조선으로 돌아온 조선인들, 그들을 모아 놓은 수용소도 있었다네요. 사전적 의미는 '전쟁 때문에 재난을 입은 사람
브리꼴레르(BRICOLEUR) - 손재주꾼
올게미 - 빵 식히는 도구
작기 - 팥의 물기를 짜는 도구
다음 강의가 기대됩니다.
지성과 각성의 공간 '한국 다방 변천사'
첫댓글 조선인들은 이즈모야의 방을 먹을 수 없었다는데 어떻게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을까요?
판매가 되어야 성공을 할 수 있을텐데.
그만큼 군산에 전재민이 많았다는 소린가요?
군산에 일본인이 엄청 들어왔대요. 군산 전체 인구의 1/3 정도... 일본인과 돈 많은 조선인이 사먹었고요^^
선생님 글만 봐도 재밌어요
타고난 이야기꾼
이런 근대 이야기 참 재밌어요
목포, 군산
대표적인 수탈항이죠
목포에는 일제 강점기 유명했던 모자점이 있어요
이야기로 쓰면 재미있을듯요
군산은 한바퀴 둘러봤는데 목포는 아직...
모자점 이야기 한번 써 보세요. 다른 사람이 쓰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