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월 5일 주님공현 대축일 전 금요일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3-51
그 무렵 43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기로 작정하셨다.
그때에 필립보를 만나시자 그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이르셨다.
44 필립보는 안드레아와 베드로의 고향인 벳사이다 출신이었다.
45 이 필립보가 나타나엘을 만나 말하였다.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
46 나타나엘은 필립보에게,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하였다.
그러자 필립보가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47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이 당신 쪽으로 오는 것을 보시고 그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48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하고 물으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하고 대답하셨다.
49 그러자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50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에게 이르셨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51 이어서 그에게 또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분
나는 어리석게도 지금도 공부를 하려고 책을 항상 끼고 살고 있습니다. 잊어버린 고문(古文)을 공부하려고 사전을 찾기도 하고, 아름다운 노래를 들으면 가사를 다시 번역하려고 며칠 동안 매달리기도 합니다. 성경을 보면 그 안의 말씀을 새기느라고 여러 번을 반복해서 읽다 보면, 전혀 복음의 말씀으로 와 닿지 않고 문장이나 문자에 얽매여 그 표현의 오묘함에 자신을 잊고 많은 시간을 허비하기도 합니다. 새로운 상식을 알게 되면, 다른 것과 연계해서 생각하느라고 정신을 잃을 정도입니다. 이런 버릇이 나를 이상한 방향으로 몰고 간다는 것을 알면서도 고치지 못하고 그 안에 푹 빠져 있기도 합니다. 새로운 지식의 그 달콤함은 정말 매력 있는 것입니다.
‘독상고루, 망진천애로’(獨上高樓, 望盡天涯路)라는 말이 있습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이 말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홀로 높은 누각에 올라, 하늘 끝의 먼 길을 모두 다 바라본다.>라고 옮길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고 외로움 속에서 먼 곳에 있는 그리운 사람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 것이기도 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멀리 보내놓고 매일 언제 올 것인가 그리워하는 마음이나, 사랑하는 연인을 그리워하며 높은 누각에 올라 연인이 있는 방향을 향해서 하늘과 맞닿은 지평선이나 수평선을 바라보면서 그리는 말입니다. 또한 학문을 추구하는 사람이 남달리 높은 경지에 올라 진리를 탐구하는 것을 찬양하는 말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학식이 높아 세상 모든 것을 바라보면서 사는 사람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한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지식이 많아서 사람들에게 전하기도 하고, 아는 바를 가르치면서 추앙받고 싶은 것이 인간적인 욕심이자 명예이기도 합니다. 어떤 일을 할 때에도 그 분야에서 가장 권위가 높은 사람이 되고 싶기도 하고, 전문가로서 우뚝 서고 싶은 것이 가장 큰 꿈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 분야에서 가장 권위자가 되고자 했지만 그런 꿈을 일찍 버려야 했습니다. 나는 잡다한 것에 많이 쏠려서 결국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나이를 먹었기 때문입니다. 새가 높은 곳으로 비상하여 세상의 모든 것을 세세하게 살펴보듯, 높은 산의 정상에 올라 세상의 모든 것을 내려다보듯,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기도 하였는데 그것은 한 낮의 꿈 조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어떤 것을 알아도 그것이 진리가 아니면 한 가닥의 스쳐 지나가는 얘기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매일 계획을 세워도 곧 그 계획이 잘못 된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내가 볼 수 있는 것도 코앞에 있는 것을 보고 떠든 얘기임을 알게 됩니다. 아무리 깊이 묵상해도 그 본질의 빙산의 일각도 되지 못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정말 초라한 자신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치 높은 산에 올라 광활하게 펼쳐져 있는 세상을 보면서 경이로움을 느낄 때 내가 보이지 않듯이 말입니다.
오늘 필립보는 나타나엘에게 많은 말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말로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정말 설명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주님을 설명해서 알아듣게 할 수 있겠습니까? 나도 매일 망설입니다. 내가 느낀 주님을 처음에는 잘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했습니다.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시인의 깊은 영감과 시상을 알거나 느끼지도 못하면서 공감할 수 있을 것으로 착각하기도 하였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나타나엘처럼 갈릴래아처럼 아주 보잘 것 없는 고을에서 메시아가 나올 리 없다고 믿고 있는 사람에게 무슨 설명을 해 주어야 하겠습니까? 내 가족들에게도, 사람들에게도 나는 어떤 말을 하지 못합니다.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고, 자신들의 편견과 고집으로 내 말을 묵살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는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고 말하고 살았습니다. 정말 저주 받은 사람들처럼 세상의 모든 것과 등을 지고 살았습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그 고집과 편견이 가장 심한 사람들 중에 구교우도 있고, 교회의 지도자에 속한 평신도들도 아주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신학과 성서에 박학한 성직자들도 교회운영과 대인관계에 있어서 편견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 예수님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은 절대로 심상치 않습니다. 사람들은 어떤 설명을 해도 듣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말을 새겨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필립보는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라고 했을 것입니다. 나타나엘은 그 필립보의 말을 따라서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깊은 마음까지도 자신보다 더 잘 알고 계시는 예수님을 보고, 말씀을 듣고 믿음을 고백합니다. 모든 것을 하늘에서 내려다 보실 수 있는 예수님을 의심 없이 믿는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나의 신앙은 어떤지 생각해 봅니다. 마음에서 가득히 들끓어 오르는 모든 것을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분노도 나를 집어 삼키고, 편견도, 고집도, 억지 주장도,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말도 뱀의 혀처럼 그렇게 토해내고 살았습니다. 전혀 높은 곳에서, 하느님의 눈으로, 하느님의 사랑으로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말하지도 못하고 산 것 자신의 삶을 반성합니다.
<우리는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습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3,11-21
사랑하는 여러분, 11 여러분이 처음부터 들은 말씀은 이것입니다. 곧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2 악마에게 속한 사람으로서 자기 동생을 죽인 카인처럼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가 무슨 까닭으로 동생을 죽였습니까? 자기가 한 일은 악하고 동생이 한 일은 의로웠기 때문입니다.
13 그리고 형제 여러분, 세상이 여러분을 미워하여도 놀라지 마십시오.
14 우리는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는 것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죽음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습니다.
15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모두 살인자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알다시피, 살인자는 아무도 자기 안에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16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17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 그에게 마음을 닫아 버리면,
하느님 사랑이 어떻게 그 사람 안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18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
19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해 있음을 알게 되고, 또 그분 앞에서 마음을 편히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20 마음이 우리를 단죄하더라도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보다 크시고 또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21 사랑하는 여러분, 마음이 우리를 단죄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축일1월 5일 성 시메온 (Simeon)
신분 : 수도승, 주행자
활동 연도 : 389?-459년
같은 이름 : 시므온
성 시메온은 389년경 로마제국의 속주인 실리시아(Cilicia)와 시리아(Syria)의 경계에 있는 시스(Sis, 오늘날 터키 남부 아다나[Adana] 북동쪽의 코잔[Kozan])에서 목동의 아들로 태어나 세례를 받았다. 교육받을 형편이 되지 않아 어려서부터 목동 생활을 하던 그는 13살 때 환시를 체험했는데, 후에 그 환시가 자신이 기둥 위에서 생활하게 될 예언이었다고 스스로 해석했다. 403년경 텔레다(Teleda) 인근의 에우세보나(Eusebona) 수도원에 입회했으나 더 철저한 고행 생활을 하고자 412년 수도원을 나와 안티오키아(Antiochia) 교외의 데이르 세만(Deir Seman, 혹은 Telanissos)으로 가서 독수자로서 은수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3년 뒤에 근처 칼라아트 세만(Qalaat Seman) 산 정상으로 올라갔다. 그가 산 위로 올라간 것은 그의 성덕 이야기에 감동한 군중들이 너무 많이 몰려들었기 때문이었다.
422년경 그는 세속을 완전히 떠나 하늘 가까이에서 살고 싶은 마음으로 돌기둥 위에 올라갔다. 군중을 피하고자 처음에는 3m 정도 높이의 기둥을 만들어 그 위에서 지냈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평생을 기둥 위에서 살았다. 그가 올라가서 고행 생활을 하던 돌기둥은 모두 네 개였는데, 마지막으로 올라간 돌기둥은 무려 20m 높이에 달했다. 그는 가로세로 2m를 넘지 않는 돌기둥 꼭대기의 좁은 공간에서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고행 생활을 계속했다. 거의 잠을 자지 않거나 조금씩 자는 고행을 비롯해 야생동물의 가죽옷을 입고 지내며 40년 가까이 사순절마다 하루도 빠짐없이 완전한 단식을 실천했다.
돌기둥 위에 사는 성인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져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왔다. 살아생전에 이미 성인으로 공경을 받았던 그는 매일 두 차례 찾아오는 이들을 위해 기둥 위에서 설교했다. 그의 설교는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개종하거나 잃었던 신앙심을 되찾았고, 고위 성직자와 황제까지도 그의 말을 경청하며 자문을 청하기도 했다. 최초의 주행자(柱行者)였던 그가 선종한 후 그를 본받고자 많은 이들이 기둥 위에 올라가 고행 생활에 도전했다. 콘스탄티노플의 돌기둥 위에서 살았던 성 다니엘(Daniel, 12월 11일), 안티오키아(Antiochia) 출신의 성 시메온(Simeon Stylites the Younger, 5월 24일) 등이 유명하다. 시리아 할라브주(州)의 주도인 알레포(Aleppo, 아랍어로 할라브[Halab])에서 북서쪽으로 60km 떨어진 칼라아트 세만에는 성 시메온 기둥 성인(St. Simeon Stylites the Elder)을 기념하는 기념관이 있다. 그가 올라가서 살았던 기둥을 중심으로 십자형으로 네 개의 성당이 건립되었는데, 오랜 세월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오늘 축일을 맞은 시메온 (Simeon) 형제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