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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돌이라도
빛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진다"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 KBS1 <예썰의 전당> [24회] 지금 이 순간 마법처럼, 클로드 모네. 2022년 10월 23일 방송 다시보기
✵ ‘예썰의 전당’ 스물네 번째 주제는, ‘신의 눈’을 가진 빛의 화가 모네. 모네는 자신의 눈에 비친 순간의 인상을 화폭에 담고자 했다. 전통에 얽매인 당시 미술계는 관습에서 벗어난 모네의 그림을 조롱했으나, 때는 변화와 격동의 시대 19세기 유럽. 모네는 눈 앞에 펼쳐진 순간에 집중했고, 현대에 인상주의의 창시자이자 거장으로 자리매김한다. 생의 끝까지 순간의 찬란함을 포착한 모네의 끈질긴 시선! 모네가 포착한 ‘지금 이 순간’은 어떤 모습일지 지금부터 만나보자.
백내장 앓고 난 후(1922) - 추상화 느낌 - 화면을 지배하는 노랗고 붉은 색감 = 물에 비친 빛
백내징 앓기 전(1988) - '일본식 다리의 수련', 풍경화 느낌
✵ 예썰 하나, 수련 그림만 250여 점! 고흐에게 해바라기가 있다면, 모네에겐 수련이 있다 빛의 화가, 모네가 사랑할 수밖에 없던 꽃이 있다는데, 이는 바로 수련이다. 수련은 빛에 따라 꽃잎을 피우고 오므리기에 모네에겐 더없이 좋은 대상이었던 것. 모네는 자신이 손수 가꾼 지베르니 정원에서 30여 년 동안 약 250 점의 '수련'을 그렸다. 같은 장소, 같은 대상이니 비슷한 그림일 거라 생각한다면 오산! 모네의 그림은 수련처럼 빛에 따라 수없이 변화한다. 백내장에 걸려서도 '수련' 연작을 놓지 않은 모네는 자신의 눈에 비친 그대로를 담아 붉은빛의 '수련'이라는 독특한 그림을 남기기도 하는데! 찬란한 '수련' 속에 담긴 다채로운 ‘예썰’을 꺼내본다.
밤에는 잠들어 있다가 빛을 받아 피어나는 수련 ⓒ 고앵자
밤에는 잠들어 있다가 빛을 받아 피어나는 수련 ⓒ 이영일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 〈수련이 있는 연못〉,
19세기 말(1917~1920, 100x200.5㎝, 국립중앙박물관 이건희컬렉션
▼ 위 작품과 비슷한 수련 작품이 소비더 경매에서 7,040만 달러(약 800억 원)가 현재 약 1000억원 호가 예상
오묘한 색깔들이 팔레트가 아닌
눈에서 섞으면서...
클로드 모네, ‘푸르빌의 절벽 산책로’, 1882년, 시카고 미술관
✵ 예썰 둘, 모네의 작품을 조롱해 탄생한 단어 ‘인상주의’? 1차 산업혁명이 일어나 기차와 공장이 증기를 내뿜고, 최초의 사진술이 발명되는 듯 변화와 격동의 시기였던 19세기 유럽. 이 격동의 시대 속에서 시시각각 변하는 매 순간을 그리고자 한 화가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당시 미술계에 이들의 등장은 불편한 이단아였으며 ‘유치한 벽지보다 못하다’는 평까지 듣는다. 인상주의라는 명칭 또한 모네의 그림을 향한 조롱에서 탄생했다는데! 새로운 눈으로 새로운 시대를 포착했던 인상주의는 미술을, 그리고 세상을 어떻게 바꿔놓았을까.
영국의 국민화가, '조지프 말러드 윌리엄 테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 1775-1851)', 1775-1851년
철도= 1차 산업 혁명의 상징, 풍부한 석탄을 바탕으로 세계 최초의 증기기관을 발명한 영국
윌리엄 테너, '비, 증기 그리고 속도', 1844년
- 편리해진 자원의 이동과 대량 생산이 가능해지면서 산업 혁명을 주도한 영국
보불 전쟁(1870-1871) 화가로서 혼란스러웠던 시기
실험적이였던 인상주의의 시작
전시회의 모든 작품은
본질보다 인상을 그렸다
풍경은 없고 순간의 인상만 있을 뿐이다.
유치한 벽지보다 못하다.
-르 시리바리(1974년 04월 28일)
18세기 루이 15세 시대 본격적으로 시작한 살롱전은 당시 화가들의 성공을 위한 정식 코스
튜브 물감 발명, 미국화가 '존 고프 랜드(John Goffe Rand, 1801-1873)', 1841년
✵ 예썰 셋, 피로 물든 세계대전을 위로하기 위해 모네가 포착한 일상의 아름다움. 일상적인 대상에서도 다채로움을 포착해내는 모네의 시선은 건초더미에까지 닿는다. 모네는 매 순간 변화하는 건초더미의 인상을 담고자 연작을 그렸고, 이는 우리에게 스쳐 지나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빛깔이 반짝이고 있음을 일깨워준다. 연작, 그중에서도 백미는 프랑스 ‘오랑주리 미술관’에 걸린 '수련' 연작이다. 최소 6m, 최대 17m의 이례적인 크기를 자랑하는 이 연작은 모네 생의 마지막 작품이다. 그림은 평화로운 빛과 색채로 가득 차 있으나, 그 배경엔 고통이 있다는데. 당시 모네는 백내장으로 시력을 잃어가고 있었고, 세상은 제1차 세계대전의 충격으로 신음하고 있었다. 그동안 수많은 수련을 그려온 모네. 피로 물든 세상을 위로하는 작품으로 '수련' 연작을 그린 이유는?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작품 8점 전시, 한 작품 크기 100×2m,프랑스 파리 오랑주리 미술관
모네는 신의 눈을 가진 유일한 인간이다.
― 폴 세잔
클로드 모네는 인상주의 회화의 창시자, 지도자,
확고한 지지자였던 프랑스의 화가입니다.
서양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하고
인기 있는 인물 중 한 명으로
명성을 유지했습니다.
―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
빛을 그리는 화가 (The Impressionists)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흰색 수련 연못’, 1899년, 캔버스에 유채, 89×93cm, 러시아 푸슈킨 미술관 소장
✺ 클로드 모네(Claude Monet)의 혼이 담긴 정원 <지베르니(Giverny)>
"내가 화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마 꽃 때문일 것이다!
나는 언제나 꽃과 함께할 것이다.
나에게 빛과 대지는 곧
끌림이자 회화의 모든 주제다."
오스카 클로드 모네(Oscar-Claude Mone, 1840-1926)가 혼신의 힘을 다해 가꾸고, 작품 활동의 모티브가 된 모네의 정원 '지베르니'는 그가 파리를 떠나 시골 마을 아르장퇴유(Argenteuil)(1817), 푸아시(Poissy), 베퇴유(Vetheuil)를 거쳐 지베르니(1883)에서 29년의 정원생활과 함께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다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어찌 보면 지베르니는 모네가 세상에 남겨준 최고의 작품 중 하나인지도 모르겠다.
인상파 화가들은 바깥에서 작품 활동을 많이 해서인지 시력에 문제가 생긴 경우가 많은데 모네도 그랬다. 백내장으로 두 번의 수술을 받았고, 수술 후 황시증((黃視症:사물이 노랗게 보이는 현상)을 앓기도 했다.
모네는 “자기 그림 이해하려면 백 마디 설명보다 자신이 직접 가꾼 정원을 보는 게 낫다.”라고 말할 정도로 정원 꾸미기에 진심이었으며 정성을 쏟아 가꾼 지베르니의 곳곳을 그림으로 남겼다. 그는 "나는 꽃 덕분에 화가가 되었다."라고 말할 정도로 꽃과 식물을 사랑했다.
파리에서는 엄격하고 무뚝뚝한 모네가 지베르니에만 가면 온화하고 열정적으로 변했다고 하니 꽃을 정말 사랑했고 자신 작품의 아름다움과 명료함을 온전히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 바로 자신의 정원이라고 생각했다.
모네에게 정원이란 경제적으로 힘들고 어려움을 겪는 동안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는 안식처 같은 곳이었다. 식물을 가꾸고 그림을 그리고 자연과 예술에 대한 애정을 조화시킬 수 있는 피난처이기도 했다. 모네는 정원을 가꾸며 작품 세계도 함께 발전했다.
모네는 생애 후반부에 왕성하게 활동을 했다. 정원에서만 예술적 영감을 찾을 수 있다며 수시로 정원에 나가 빛과 날씨의 변화를 관찰하고, 하루종일 정원에서 이젤을 펴놓고 그림에 전념했다. 봄이면 꽃이 피기를 기다리고 여름이면 지칠 때까지 그리고 겨울이면 그동안 완벽하한 탐구를 위해 수집해온 시각 정보를 더듬어가며 작품 활동을 계속했다.
1870년 모네는 ‘카미유-레오니 동시외(Camille Léonie Doncieux, 1847–1879)’와 결혼하고, 1867년 장남 장이 태어났다. 카미유가 모델 출신이라는 이유로 모네의 가족은 결혼을 반대했지만, 모네는 이를 무릅쓰고 카미유와 결혼했다.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인상 : 해돋이, 1872~1872년, 캔버스에 유채, 48×63cm, 마르모탕 미술관 소장
1874년에 출품한 <인상(印象)>, <일출(日出)>이란 작품의 제명에서 인상파란 이름이 생겨났다. ‘색조의 분할’이나 ‘원색의 병치’를 시도하여 인상파 기법의 전형을 개척하였다. 1872년 작품으로 제1회 '무명 예술가 협회전'에 출품한 후 대충 무성의하게 그렸다는 혹평을 받았다. 이 그림은 영국의 윌리엄 터너(W(illiam Turner, 1775-1851)의 영향을 많이 받은 그림이다. 대충 무성의하게 그렸다는 혹평을 받았지만 인상파의 태동을 알리는 그림이 되었다.
클로드 모네, ‘일본 옷을 입은 마담 모네’, 1875년, 캔버스에 유채, 231.5×142cm, 보스턴 미술관 소장/
클로드 모네, 루이 조아킴 고디베르 부인, 1868년, 캔버스에 유채, 217×138.5cm, 오르세 미술관 소장
1876년 모네는 백화점 소유주 에르네스트 오슈데(Ernest Hoschedé)로부터 작품 의뢰를 받는다. 오슈데의 아내 알리스(Alis)는 훗날 모네에게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 된다. 후원자인 오슈데는 사치스러운 생활로 결국 파산하게 되고, 모네의 수입도 덩달아 급감하게 된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카미유(Camille)의 건강까지 악화된다. 1878년 카미유는 둘째 미셸을 낳고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모네는 사랑하는 카미유를 떠나보내며 그녀의 임종 순간을 그림으로 남겼다. 카미유가 세상을 뜨고 오슈데는 사업도움 차 파리로 떠나고, 알리스는 모네 옆에서 실질적인 도움과 함께 정서적으로도 많은 지원을 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모네는 푸아시로 이주했지만 산업화와 늘어나는 인구로 이곳에서도 정을 붙이지 못하고 다시 자신의 여생을 함께하게 될 지베르니로 이주했다.
클로드 모네(Claude Mone, 1840-1926), 베퇴이유의 화가의 정원(The Artist's Garden at Vetheuil),
1881년, 워싱턴 국립 미술관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야외에서 인물 그리기 습작. 양산을 쓰고 왼쪽으로 몸을 돌린 여인’,
1886년, 캔버스에 유채, 131×88cm, 오르세 미술관 소장
1890년 2만 2천 프랑에 지베르니(Giverny)의 집과 뜰을 샀다. 지베르니는 파리에서 북서쪽으로 76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마을로 처음 이주하여 모네와 알리스의 가족은 총동원되어 정원을 가꾸기 시작한다. 정원이 마음에 드는 모습을 갖출 때까지 모네는 그림 그릴 장소를 찾아 여행을 했다. 네덜란드를 방문했을 때에는 튤립 구근을 재배하는 기술을 터득해, 자기 정원을 가꾸는데 적용하기도 했다.
모네는 사실적 묘사보다 시각적 느낌을 표현하는데 더 치중한 작가이다. 모네는 연작을 많이 한 대표적 작가인데, 그의 루앙 대성당이나 수련, 일본식 다리 등이 그렇다.
클로드 모네(1840-1926), 모네, 양산을 든 여인, 모네 부인과 아들
(Woman with a Parasol, Madame Monet and Her Son), 1875년, 워싱턴 국립 미술관
모네(Claude Monet 1840-1926)는 25세가 되던 해에 동료 프레데릭 바지유가 데리고 온 18세 모델 카미유 결혼하였다. 카미유와의 결혼생활에 깊은 만족과 행복감으로 창작열에 불타게 되어 그리게 된 작품이 <파라솔을 들고 있는 여인>이다. 1875년 그린 이 작품은 카미유와 아들 장을 모델로 그린 작품으로서, 청명한 하늘과 바람 부는 언덕에 초록색 파라솔을 들고 있는 카미유가 신비롭게 표현된 역작이다. 구름이 떠 있는 하늘을 거칠고 빠른 붓놀림으로 그렸다. 하늘의 솜털 같은 흰 구름 아래에서 카미유의 얼굴을 감싸고 있는 베일은 바람에 날려 날아가고 새하얀 드레스와 함께 초원에 흔들거리는 구름은 그녀의 파라솔 아래 초록색으로 물결친다. 또한 아들 장은 귀여운 모자를 쓰고 두 뺨은 붉게 물들어 있다.
모네는 풍경을 배경으로 인물을 그리면서 빛에 따라 변하는 인물의 모습을 그리고 싶어 했다. 화창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양산을 든 그림자에 얼굴을 어둡게 표현했고 그녀의 흰 드레스는 거의 빛을 받지 못하고 있다. 모네의 위치에선 역광이기 때문이다. 모네는 빛의 떨림과 대기의 움직임을 표현하고자 했다. 파란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이 가냘프게 떨리듯 그린 것이 그런 이유 때문이다. 구름에 표현된 지그재그의 선으로 인해 구름이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카미유가 서 있는 들판의 풀들도 살랑살랑 휘날린다. 그림이 완성된 4년 후 카미유는 32살의 젊은 나이에 자궁암으로 사망한다.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임종을 맞은 카미유’, 1879년, 캔버스에 유채, 90×68cm, 오르세 미술관 소장
모네에게 지베르니는 힘과 회복의 원천이었다. 1892년 오슈데가 죽은 지 1년 후 알리스와 모네는 결혼한다. 알리스는 모네 옆에서 충실한 동반자이자 조언자, 매니저 등의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진다. 또한 지베르니의 집안 인테리어는 알리스의 의견이 많이 반영되어 꾸며진 것이라고 한다.
모네는 상상속 자연을 반영하여 오랜 시간 공들여 지베르니를 변화시켰고 마침내 정원이 그의 작품 세계를 바꾸어 놓았다. 모네는 자신의 정원을 가꾸기 위해 미학 서적보다 더 많은 원예 서적을 읽었고, 근처에 연못이 있는 땅을 추가로 구입해 물의 정원을 꾸몄다.
클로드 모네, 빌 다브레 정원에 있는 여인들, 1867년, 캔버스에 유채, 25.5×20.5cm, 오르세 미술관 소장
강의 물길을 바꾸어 물이 연못으로 들어왔다가 빠져나가게 하는 수로를 건설하기 위해 시에 수로 변경을 신청했으나 마을 주민들이 백합 등 이국식물이 강을 오염시킬까 봐 걱정해 신청이 거부되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밤에는 연못물의 순환을 제한하겠다고 타협안 제시해 결국 허가 받아냈다.
물의 정월을 꾸미면서 그곳에 일본식 다리를 만들었다. 당시 모네는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당시 우키요에가 인기를 끌고 있었다. 지베르니 모네 집에는 모네가 직접 수집한 일본 판화 작품이 많이 전시되어 있다. 물의 정원에 있는 다리도 아마 당시 프랑스로 전해진 판화 작품에서 본 다리일 것이다. 게다가 모네는 카미유에게 일본 옷을 입게 하고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클로드 모네, 생타드레스의 정원, 1867년, 98×130cm, 캔버스에 유채, 미국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1901년 모네는 연못의 면적을 세배로 늘리고, 다리도 추가로 건설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연못에 수련을 심고 물의 정원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를 했다.
'1897년 모네가 처음 수련을 그리려고 시도했을 때는 대상을 수련에 한정했고 절제된 색조로 표현된 수련 잎이나 물과 대비를 이루며 밝은 색채를 터뜨리는 꼿의 효과에 집중했다. 그러나 새 작품에서는 연못 전체를 조망하면서 물에 떠 있는 대상의 형태를 전체의 일부로 표현하고 있다. 연못과 못가의 경계를 이루는 나무와 나뭇잎, 하늘을 떠다니는 구름이 물에 비친 모습과 항상 움직이는 수련을 묘사하는 것은 물의 본질을 드러내는 작업이기 때문에 모네는 이에 더 강한 흥미를 느꼈다.' (‘모네가 사랑한 정원’-데브라 맨코프 112쪽)
클로드 모네, 아르장퇴유 부근의 개양귀비꽃, 1886년, 캔버스에 유채, 65.5×81.5cm, 오르세 미술관 소장
“나는 빛과 반사에 심취했다. 결국 그것 때문에 시력이 망가졌지만 말이다.” 야외에서 그림을 많이 그리는 인상파 화가들이 시력에 문제가 생겼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모네도 예외는 아니었다. 1912년 모네는 백내장 진단을 받았다. 의사로부터 수술을 권유받았지만 혹시라도 시력을 잃을까 봐 미루며 작품 활동을 하다 결국 세 번의 백내장 수술을 받았으나 황시증과 청시증 등의 후유증을 겪으며 “차라리 장님이 되어 예전에 항상 보던 아름다움을 기억하는 게 낫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알리사의 죽음, 백내장 진단, 1차 세계대전 발발, 신경 쇠약을 앓던 장남 쟝의 사망, 둘째 아들 미셸과 장 피에르 오슈데(의붓아들)의 전쟁 동원 등 모네는 심적으로 많은 어려움과 침체기를 거치면서 다시 작업을 시작하고는 자신의 두 번째 수련 작품을 국가에 기증하기로 한다.
클로드 모네, ‘아르장퇴유의 철도교’, 캔버스에 유화, 60×98.4cm
기증 조건으로 두 가지를 제시했는데, 흰색 벽에 수련 작품만 걸어달라는 것과 자연광이 들어오는 곳에 전시해 달라는 것이었다. 결국 오랑주리 미술관의 길고 좁은 타원형 방 두 개에 전시하기로 하고 마지막 작품 활동에 매진한다. 그러나 모네는 자신의 그림이 오랑주리에 전시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1926년에 사망한다.
모네 사망하고 지베르니는 아들 미셸이 물려받았으나, 의붓딸 불량슈가 1947년 죽을 때까지 정원사 한 명과 함께 지베르니를 지키고 가꾸며 죽을 때까지 살았다.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파리의 생 라자르 역’, 1877년, 캔버스에 유채, 75.5×104cm, 시카고 미술관 소장
블랑슈가 죽고 나서 정원은 방치되었고, 1960년 미셸이 차사고로 사망하자, 이 부지는 프랑스 정부 소유가 되었으나 집과 정원은 심각하게 황폐화되었다. 그 후, 각계각층 인사들의 노력을 통해 20년에 걸쳐 복원해 1980년 9월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지금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몰려드는 관광객들로 지베르니는 사랑받는 관광명소가 되었다.
그래도 모네는 행복한 화가였다. 죽은 후에 이름을 알리는 화가도 있고, 죽어서도 무명의 화가로 잊히는 화가도 많은데 모네는 살아생전에 유명세를 탔고, 오래도록 살면서 많은 작품을 통해 많은 사랑도 받았으니 화가로서는 성공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이다.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네덜란드의 튤립, 1886년, 캔버스에 유채, 65.5×81.5cm, 오르세 미술관 소장
[참고문헌 및 자료출처: KBS1 <예썰의 전당> [24회] 지금 이 순간 마법처럼, 클로드 모네/ Daum·Naver 지식백과/ 글과 사진: 이영일 ∙ 고앵자, 채널A 정책사회부 스마트리포터 yil207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