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불교를 믿고 불자라는 이름으로 불교를 신행합니다. 그런데 누가 막상 “당신이 믿는 불교는 어떤 종교입니까,
당신은 왜 절에 다니고, 왜 불교를 믿습니까.”라고 묻는다면 딱 떨어지게 대답하기 어려워합니다.
왜 그럴까요. 이는 부처님께서 팔만사천 법문을 설하신 이유와 비슷합니다.
당신은 왜 불교를 믿습니까?
부처님께서는 이 세상 중생들의 근기가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근기에 따라서 팔만사천 법문을 방편으로 설하셨습니다.
응병여약, 병에 따라 약을 처방하셨습니다.
머리가 아픈 사람에게는 두통약을 줘야지 위장약을 준다고 낫지 않습니다. 배 아픈 사람도 마찬가지지요.
그와 같이 중생들의 근기에 따라 마음 가운데 앓고 있는 병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응병여약으로 법문을 설하셨습니다.
스님들도 근기에 따라 각자 좋아하는 경전이 있습니다.
이 절 스님은 이 경전이 제일 좋으니 이 공부를 하라 하고, 저 절에 가면 저 경전을 공부하라 합니다.
근기가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이것을 위해 불교를 믿고, 불교는 이러한 종교다.”라고 똑 떨어지게 말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제악막작諸惡莫作하고 중선봉행衆善奉行하면서 자정기의自淨其意하는 것이 시제불교是諸佛敎니라.
이 속에 불교의 모든 가르침이 모두 담겨 있습니다.
전부 16자입니다. 칠불통계게七佛通戒偈라고 합니다.
칠불통계게란 과거칠불過去七佛, 즉 일곱 부처님께서 공통으로 “이것이 불교다.” 하고 설해 놓은 말씀입니다.
저는 이 가르침이 팔만사천 경전을 똘똘 뭉쳐서 16자에 설파해 놓은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제악막작하고 중선봉행하라. 모든 죄를 짓지 말고 선하고 착한 일이라고 하거든 남김없이 다 받들어 행하라는 뜻입니다.
더 줄여서 말하면 죄짓지 말고 착하게 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당신은 왜 절에 다닙니까? 왜 불교를 믿습니까?”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할 수 있겠지요.
“죄짓지 않고 착하게 지내려고 절에 다니고, 가르침을 믿습니다.”
그러면 상대가 이렇게 되물을 수도 있습니다. “당신은 정말로 하나도 죄를 짓지 않고 착하게만 삽니까?”
이렇게 질문한다면 사실 대답할 말이 없습니다.
죄짓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세상이 인간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인 부부간에도 서로 속이지 않고 살기는 어렵습니다.
나 때문에 속일 수도 있지만 친정, 시댁, 자식 때문에 속일 일이 생깁니다.
남편이, 아내가 잘못한 걸 알지만 모르는 척해주는 것도 속이는 것이지요. 그래서 죄짓지 않고 산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그렇다면 제악막작諸惡莫作 중선봉행衆善奉行을 어떻게 행하면 될까요.
죄짓지 않고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죄도 짓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짓지 않을 수 있고, 좋은 일도 하려고 해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를 믿고 수행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정진입니다.
정진을 무척 어렵게 생각하는데 어려울 것 하나 없습니다. 노력하는 것이 정진입니다.
화두를 참구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정진이고, 염불을 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것도 정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제악막작 중선봉행하기를 노력해야 합니다.
나의 본래모습을 바라보면 나를 알게 된다
그렇다면 죄를 짓지 않고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요.
그것도 부처님의 가르침이고 불교이긴 합니다.
그렇게만 살아도 천상계와 인간계에 태어나서 한량없는 복락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나를 구제하고 내 영혼을 제도할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내 영혼을 구제하고 제도해서 영원히 생사윤회에서 해탈할 수 있을까요.
스스로 그 마음을 고요히 닦아나가야 합니다. 즉 자정기의自淨其意입니다.
그것이 바로 시제불교是諸佛敎, 모두 부처님의 가르침이고 불교입니다.
즉, 칠불통계게 16자에 모든 가르침이 다 있습니다.
착하게 살면 복을 짓는다지만 복도 업입니다. 나쁜 일이 악업이라고 하면 좋은 일은 선업입니다.
선업도 업이기에 윤회의 원인이 됩니다.
우리는 자성을 증득하고 깨닫기 전까지는 생사윤회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내가 내 자성을 증득하고 깨달아야만 생사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본래모습이나 마음자리는 우주법계가 창조되기 이전부터 지금까지 성성적적하게 존재해왔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그 많은 세월 동안 육도문중을 전전하며 윤회전생한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불교를 믿는 것입니다.
영원히 생사윤회에서 벗어난 대자유, 대해탈인이 되는 법을 공부하기 위해서입니다.
대해탈인이 되기 위해서는 견성見性해야 합니다. 견성은 열심히 공부하고 수행해서
내 마음에 끼어 있는 번뇌 망상을 부수고 가라앉히고 제거해 나의 본래모습을 바로 보는 것입니다.
본래모습을 바로 보면 나를 알게 됩니다. 나를 아니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직 내가 나를 모릅니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으로 태어나서 내가 나를 몰라요.
기껏 안다는 것이 부모님에게 얻어서 쓰다가 버리고 갈 김 아무개, 이 아무개라고 이름 붙은 유형색신을 ‘나’라고 압니다.
물질로 이루어진 이 몸뚱이를 나로 믿고 그 육체를 끌고 다니고 있는 참나, 주인공은 잊어버리고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알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자성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빛은 구름에 가려져 있을 뿐
나를 볼 수 없는 허물은 나에게 있습니다.
우리 중생들은 번뇌 망상을 내 생각으로 알면서 번뇌의 앞잡이가 되어 생활합니다.
번뇌의 구름이 자성을 차단하고 있으므로 자성을 바로 보지 못합니다.
한 예로 태양은 항상 쉬지 않고 밤낮없이 열과 빛을 고루 비추고 있습니다.
그런데 비가 오거나 구름이 낀 날은 해를 볼 수 없어요. 그때 우리는 “오늘은 해가 나지 않았다.”라고 말합니다.
태양은 그대로 있는데 구름에 가려져 보이지 않을 뿐이지요. 그런데 햇빛이 없다고 말합니다.
빛을 가리고 있던 구름만 벗겨지면 우리는 밝은 햇빛을 바로 볼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이 참나를 가리고 있는 번뇌의 구름만 벗겨지면 나의 본래 성품을 볼 수 있어요.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벗길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내가 나를 알려고 하지 않고 나를 바로 보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번뇌 망상을 내 생각으로 알고 번뇌의 앞잡이가 되어서 육체의 종노릇만 하면서 살아요.
그러니 구름에 가려 자성이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으니까 자성을 볼 수 없어요. 보지 못했으니까 자성의 존재를 알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번뇌 구름을 걷어내고 본래모습을 바로 볼 수 있을까요.
나의 본래모습, 자성을 바로 법을 배우고 공부해야 합니다. 이런 법문을 듣는 것도 공부입니다.
우리의 본래 모습,
진성의 실상을 『반야심경』에서는 불생불멸不生不滅 불구부정不垢不淨 부증불감不增不減이라고 했습니다.
나지도 않기 때문에 죽지도 않습니다.
더하지 않아서 덜하지 않고 깨끗하지 않고 더럽지 않은, 항상 여여한 것이 우리 본래모습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자리를 망각하고, 생사의 육체만 집착하여 이놈을 나라고 믿고 알고 생활하게 됩니다.
망상의 앞잡이로 살면서 지은 업에 대해 과보를 받게 됩니다.
그 과보를 받기 위해서는 육체가 필요합니다.
그러면서 또 업을 지어요. 그 업의 과보를 받으려면 다시 새 육체가 필요하지요.
그렇게 육도문중을 도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은 그런 윤회 속에서 어떤 복을 지어서, 받기 어려운 사람 몸을 받은 것이고 만나기 어려운 불법을 만난 것입니다.
이제 불교가 무엇이냐 물었을 때 무엇이라고 대답하겠습니까.
사람으로서 죄짓지 않고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면서 마음을 닦아 성불하려는 것이 불교입니다.
여러분 이제 어디 가서 “불교란 이런 것입니다.” 하고 포교 잘할 수 있겠지요?
도반 한 명씩 데리고 절에 오십시오.
많이 모여서 더 많은 큰스님 법문을 함께 들을 수 있도록 노력하길 부탁합니다. 감사합니다.
묘허 스님: 1957년 상주 남장사에서 한산당 화엄 선사를 은사로 득도했다. 1963년 불교전문강원 대교과를 졸업했다.
1965년 월하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한 이후, 성암강백 화상 밑에서 대교이력 및
『전등록』을 이수하고 이후 제방에서 정진했다. 통도사 보광선원 수선안거이래 11하안거를 성만했다.
1979년 신탄진 신흥사 주지를 역임했으며,
현재 대전 신흥사, 김해 원명사, 단양 방곡사, 경기도 광주 대법사,
대구 불광사, 용인 백령사 회주스님으로 주석하고 있다.
첫댓글 나무아미타불 -9090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