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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스크랩 [심상훈의 부자팔자] 이순신과 유성룡 . 人無遠慮 必有近憂
잠실/맥(조문희) 추천 1 조회 131 15.07.06 11:1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심상훈의 부자팔자]

‘붓 대신 칼’ 잡은 이순신, 작은 선택이 큰 역사 이뤘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준 8자 : 유성룡이 이순신에게 ①

 

인무원려 필유근우(人無遠慮 必有近憂)

- 사람이 장래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가까운 날에 근심을 겪게 된다(<논어>)

 

 [한자 풀이] 人 사람 인, 無 없을 무, 遠 멀 원, 慮 생각 려, 必 반드시 필, 有 있을 유, 近 가까울 근, 憂 근심 우

 

이번 호에는 아버지가 아닌 친구 또는 선배가 준 8자에 대한 얘기를 하고자 한다. 비록 부자팔자는 아닐지라도, 학문적으로 스승 격이었던 동년배나 선배가 들려준 여덟 글자의 이야기를 풀어가고자 한다.

첫 번째가 임진왜란의 영웅인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1545~1598)과 서애(西厓) 유성룡(1542~1545)의 이야기다.

 

이순신은 음력 3월 8일생이다. 양력으로는 4월 28일생이다. 지금의 서울인 한성부(漢城府) 건천동(乾川洞, 현 서울 중구 인현동1가 40번지)에서 덕수 이씨 11대손 정(貞)과 초계 변씨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위로 형이 둘 있었다. 이름이 희신(羲臣), 요신(堯臣)이다. 아우가 우신(禹臣)이다. ‘신(臣)’자 돌림이었다.

 

돌림자 앞에 붙여진 한 글자들, 즉 희·요·순·우는 중국 고대의 삼황오제(성군)에서 따온 것이다. 부친 이정이 사형제에게 각각 성군의 이름을 붙인 까닭이 있다. 현명한 임금, ‘성군의 신하’로 살아갈 수 있는 시대가 오길 희망해서다. 그런 간절한 마음을 아들들 이름에다 녹아낸 것이다.

 

중국 삼황오제 중 가장 성군인 '순(舜)' 이름을 따다

 

이정은 영혼에 상처가 많았다. 그의 아버지, 즉 이순신의 조부 이백록(李百祿)은 청운의 꿈도 펼치기도 전에 천수를 다하지 못했다. 조선 중종 때에 발생한 기묘사화(1519)가 원인이었다. 당시 개혁파 수장이었던 조광조를 따르는 명단에 올라 억울한 죽음을 당한 것이다.

 

이때부터다. 이정은 벼슬길 진출을 아예 포기했다. 과거시험에 응시하는 꿈도 꾸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현명한 임금(聖君)이 보이지 않아서였다.

 

그러다 중종이 죽었다. 조선 12대 왕 인종(仁宗)이 즉위했다(1544년). 인종은 성군의 자질이 다분했다. 그렇기에 같은 해에 임신한 아내(초계 변씨)가 사랑스럽고 무엇보다 복중(腹中) 태아에 대한 기대치가 높았다. 다시 희망이 이정을 찾는 듯했다.

 

1545년, 봄이 왔다. 3월 8일에 셋째가 태어났다. 이정은 기뻤다. 아내도 그랬다. 그렇지만 아비의 기쁨은 아주 잠깐이었다. 성군이라 여겼던 인종이 젊은 나이(31세)에 서거했기 때문이다. 이윽고 12살 명종이 즉위했다. 명종의 생모 문정왕후(TV 인기드라마 <여인천하>에서 배우 전인화가 열연했던 주인공)의 수렴첨정이 시작됐다. 세상이 변했다.

 

다시 이정에게 희망은 죽었고 절망이 엄습했다. 영혼의 상처가 더 커졌다. 아물지 않았고 ‘도로아미타불’이 되었다. 양반으로 딱히 하릴도 없어졌다. 과거를 본들 무슨 소용이랴. 책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쳇바퀴 같은 무료한 일상의 삶이 반복되었다. 그렇게 방황하던 중에 방향이 보였다. 아버지의 역할이었다. 이것만은 제대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퍼뜩 든 것이다.

 

그래서일까, 삼황오제(복희씨·신농씨·헌원씨·소호·전욱·제곡·요·순) 중에서도 가장 이상적이었던 성군 ‘순(舜)’을 취하여 셋째 아들의 이름으로 지은 것이다. 둘째 아들에게도 이상적인 성군 ‘요(堯)’를 붙인 바 있다.

아버지로서 이정은 둘째와 셋째에게 기대가 컸다. 이름 지은 뜻에서 대강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어려서부터 학문적 성취가 깊었던 순신은 이정에게 있어 최고가 되었다.

 

이정은 두 아들이 속됨을 좇는 궐당(闕黨)처럼 식견이 얕아지고, 출세에 빠른 욕심을 내는 것을 항상 경계하라고 일렀다. 중국 북송(北宋)시대 역사가 사마 광(司馬 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에 등장하는 위(魏)나라 사람 왕창(王昶)을 보는 듯하다. ‘왕창의 자식 훈계’처럼 보여서다. 왕창은 자식들 이름을 각각 외자로 지었다. ‘묵(?)·침(沈)·혼(渾)·심(深)’이 그것이다. 네 글자 뜻이 모두 ‘깊다, 고요하다’라는 의미로 쓰인다. 이렇듯 네 글자로 이름을 지은 까닭을 설명하는 편지가 <자치통감>에 나온다.

 

“내가 이 네 글자를 이름으로 지은 것은 너희들에게 명예를 고려하고 정의를 생각하라는 뜻이므로 이를 어겨서는 안 된다. 무릇 만물은 빨리 성취하면 일찍 망하고, 늦게 나아가면 잘 마칠 수 있다. 아침에 피는 꽃은 저녁에 시들지만, 무성한 소나무·잣나무 잎은 겨울에도 쇠락하지 않는다. 그래서 군자는 궐당(厥黨)을 경계로 삼는 것이다.”(사마광 지음, 박종혁 엮어옮김, <자치통감>, 서해문집 펴냄)

 

‘궐당’이란 말은 <논어(論語)>에 보인다. 헌문(憲問)편 마지막 장에 등장한다. 궐당에 사는 한 소년이 공자의 심부름을 맡으면서 조속히 학문을 성취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실상 학문에는 관심이 없었고, 학문한 사람처럼 남들에게 보이길 좋아했다. 이 때문에, 이로부터 일찍 성공을 바라는 자(欲速成者)를 일러 모두 ‘궐당’이라고 꼬집은 것이다.

 

소년 시절의 이순신은 건청동에서 자랐다. 유성룡(柳成龍), 원균(元均)과도 어울렸다. 이 시절을 지난 2004년에 KBS TV에 방영되었던 역사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1555년으로 그려냈다.

 

순신이 우리 나이로 11살이 되던 해다. 드라마에서 순신은 유성룡과 원균을 형님이라고 했다. 유성룡은 세 살 위(1542년생)였다. 둘째형 요신과 친구다. 하지만 원균은 순신에 비해 나이가 다섯이나 많았다(1540년생). 유성룡과 요신보다도 두 살이나 많았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일까, 드라마는 유성룡과 원균을 친구로 등장시켰다. 이 역사적 허구는 시청자에게 재미를 주기 위해서지 싶다. 여하튼 이때만 하더라도 유성룡이 문(文)에서 이순신보다는 앞길에 있었고, 원균이 무(武)에서 이순신보다는 앞길에 있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어린 시절에 나이 차와 체격 등을 아주 무시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당시의 양반가 자제들은 보통 12살 안팎이 되면 <논어>와 <맹자(孟子)> 등 사서(四書)를 뗐다고 한다. 이순신도 그랬을 것이다.

 

선비 이순신, 종이와 붓 대신 말 타고 활을 쏘다

 

순신이 한성(서울)을 언제 떠난 것일까. 즉 외가가 있는 충남 아산(牙山)으로 언제 내려 간 것일까. 이에 대해 순신이 여덟살이라는 말도 있고, 16세라는 설도 있다. 둘 다 정확치 않다. 믿을 수 없다. 하지만 아산으로 내려간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곳에서 소년의 티를 벗으며 부모와 함께 기거했다. 그러면서 낮에는 농사일과 잡일 등으로 생계를 돕고 밤이면 책을 읽었다. 과거시험을 준비했다. 문인의 길을 걷고자 했다. 어느새 스무 살이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1565년)에 이순신의 나이가 21세가 되어, 전남 보성 군수 방진(方震)의 딸과 혼인한다. 혼인하기 전까지는 문인의 길을 걷다가 혼인을 한 다음에 무인의 길로 방향을 튼다. 왜 그랬을까.

 

무인으로 방향을 튼 이유를 말하자면 크게 두 가지로 분석할 수 있다.

 

하나는 순신의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못한 사정을 십분 고려해서다. 경제적인 이유가 가장 컸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또한 아버지의 영향 탓이다. 조정에 들어가는 것이 성격이나 기질에 맞지 않았다. 무엇보다 임금을 모시고 정치를 하는 것에 전혀 뜻이 없었기 때문이다. 순(舜) 임금 같은 성군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판단해서 그랬는지도 모를 일이다.

 

다른 하나는 이렇다. 이게 좀 더 설득력이 있다. 그것은 처갓집 영향 탓이다.

 

장인 방진은 당대에 유명한 무인 출신이었다. 보성 군수를 지냈다. 그렇기에 집안 형편도 여유가 있고 좋았다. 게다가 순신은 처가살이를 했다. 자연, 아내 상주 방씨와 장인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선비가 종이와 붓 대신에 말 타며 활을 쏘는 무인이 되고자 한 것이다.

당시의 무과 시험은 많은 비용이 들었다. 주로 말을 타고 활을 쏘고 창을 쓰는 것이 정식 시험과목이었는데 준비물(말, 활, 창)을 모두 개인이 사서 구비해야만 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문과 시험이 아니라 무과 시험을 준비하는 것이 ‘현실적이다’라는 결단을 내렸을 것이다.

 

‘22세부터 무예를 배우기 시작했다’는 내용이 여러 기록에서 보인다. 그러니 1년 동안이나 문인의 길과 무인의 길을 두고 최종 결론을 얻기까지 심사숙고를 꽤나 했던 것 같다. 드디어 28세 때, 첫 무과 시험에 응시했으나 낙마 사고로 다리에 골절을 입고 낙방한다. 4년 뒤인 32세 때(1576), 식년 무과에 응시하여 병과에 합격한다. 그해 12월에 동구비보(압록강 상류지역)의 권관이 되어 무관생활을 시작한다.

 

39세 되던 해 11월 오랑캐를 토벌한 공을 인정받아 훈련원 참관으로 승진을 하나 부친의 별세 소식을 듣고 천리길을 밤낮으로 달려 귀향, 3년상(喪)을 치르기 위해 휴관(休官)한다.

 

탈상한 42세 때, 사복시주부가 되었다가 조산보 만호로 승진하는데 ‘유성룡의 추천’이 있었다고 한다. 수차례 전공을 세웠으나 조정에서는 유성룡 말고는 이순신이란 이름 석자를 몰랐다. 45세(1589)가 되어서야, 무관으로는 처음, 문인이 독차지했던 정읍 현감자리에 오른다. 그럼에도 조정의 그 누구도 이순신을 주목하려 들지 않았다. 단, 한 사람만 빼놓고 말이다. 그 한 사람이 바로 어릴적 같이 놀았던 서애(西厓) 유성룡(1542~1545)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준 8자 : 유성룡이 이순신에게 ②

 

<징비록(懲毖錄)>은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이 임진왜란을 겪은 반성의 기록문이다. 징비(懲毖)는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하다’라는 뜻이다. <시경(詩經)>의 송(頌)편에서 따온 말이다.

송편에 ‘소비(小毖)’라는 제목의 시가 있는데, 첫 구절에 ‘내가 지금 깨우치고 경계하는 건 후환에 대비하기 위함이라네(予其懲, 而毖後患)’라는 말이 나온다. 여기에서 징(懲), 비(毖) 두 글자를 따온 것이다. 이 ‘징비’라는 말을 유성룡은 평생 동안 가슴에 새기면서 살았다.

 

지난 호에서 이순신이 45세(1589년)가 되어서야 유성룡의 추천을 받아 무관으로서 처음 정읍 현감에 올랐다고 언급한 바 있다. 사실 정읍 현감은 종6품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문관들이 가는 자리이기에 무관 이순신에겐 의미가 남달랐다. 게다가 모처럼 가족과 함께 지낼 수 있기에 특별했다.

역사학자 이덕일은 자신의 책 <난세의 혁신리더 유성룡>(역사의아침 펴냄)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선조 22년(1589) 10월 유성룡은 이조판서가 되었고, 그로부터 두 달 후 이순신은 정읍 현감이 되었다. 과거 급제 후 14년 만에 현감이 된 이순신은 평소 마음의 빚을 갚기로 마음먹는다. 요사(夭死)한 두 형 이희신(李羲臣)·이요신(李堯臣)의 아들인 조카들 일이었다. 그는 어머니와 조카들을 정읍으로 데리고 갔다. 그러자 너무 많은 식솔을 데려간다며 남솔(濫率, 처자를 많이 데려가는 것)이란 비난이 일었다.

<행록>은 이순신이 눈물을 흘리며, “내가 차라리 남솔의 죄를 지을지언정 이 의지할 데 없는 어린 것들을 차마 버리지 못하겠습니다”라고 말하자 듣는 이들이 의롭게 여겼다고 전한다. 유성룡도 마찬가지였다.

 

이순신의 두 형 희신·요신은 다 그보다 일찍 죽었다. 이순신은 두 형의 어린 자녀들을 자기 친자식같이 어루만져 길렀다. 출가시키고 장가보내는 일도 반드시 조카들이 먼저 하게 해주고 자기 자녀는 나중에 하게 했다.(<징비록>)

 

유성룡과 이순신이 평생 가슴에 새긴 두 글자

 

이순신도 유성룡처럼 평생 동안 가슴에 박은 두 글자가 있다. ‘천지(天只)’가 그것이다.

 

연구에 따르면 <난중일기(亂中日記)>에는 첫날부터 전체를 통하여 ‘天只’라는 글자가 100여 회 이상 보인다. 天只는 ‘엄마’를 말한다. 천지의 어원 역시 <시경>에서 비롯된 것이다.

용풍(?風) 첫 장에 나오는 ‘백주(柏舟)’라는 시에 보인다.

 

‘하늘 같은 우리 엄마 내 마음 모르시나요(母也天只, 不諒人只)’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여기에서 두 글자(天只)를 빼다가 일기에 즐겨 쓴 것이다. 시를 읽고 유성룡이 취한 두 글자가 ‘남성적’이라고 한다면, 이순신이 즐겨 쓴 두 글자는 ‘여성적’이라고 해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유성룡이 ‘충신(忠臣)’이 되고자 했다면 이순신은 ‘효자(孝子)’로 남고자 했다는 얘기다. 나랏일로 바쁜 중에도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을 갖길 바라는 이순신과 나랏일로 바쁜 중에도 ‘조정과 함께’하며 의논하는 데 더 노력한 유성룡은 다른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한 쌍의 연인처럼 ‘같은 곳을 바라보는 눈’을 가졌다는 점에서 두 사람 다 난세의 조선을 구한 영웅이자 리더로서 하등 손색이 없다. 이덕일의 책을 더 읽어보자.

 

유성룡은 이순신을 계속 정읍 현감으로 놔둘 수 없었다. 빨리 군문으로 돌려보내야 했다. 전운이 감돌았기 때문이다. 선조 24년(1591) 2월 이순신은 진도 군수(종4품)로 승진했다가 곧바로 종3품 가리포(加里浦) 첨사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다시 전라좌수사로 승진했다. 전라 좌수사는 정3품 당상관이다. 그야말로 눈부신 승진이니 대간에서 논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간원에서 아뢰었다.

 

“전라 좌수사 이순신은 (정읍) 현감으로서 아직 (진도) 군수에 부임하지도 않았는데 좌수사에 초수(超受: 뛰어넘어 제수하는 것)하시니 그것이 인재가 모자란 탓이긴 하지만 관직의 남용이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체차시키소서.”(<선조실록>, 24년 2월 16일)

 

그러나 선조는 “지금은 상규에 구애될 수 없다”라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본의 동태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유성룡은 이렇게 말했다.

 

“이때 왜가 침범하리라는 소리가 날로 급해졌으므로 임금은 비변사에 명령해서 각기 장수가 될 만한 인재를 천거하라고 하셨다. 내가 순신을 천거했다. 순신은 드디어 정읍 현감을 뛰어넘어 수사(水使)로 임명되었다.”(<징비록>)

 

임진왜란 발발 한 해 전의 일이었다. 유성룡은 이순신과 함께 권율도 천거했다고 한다. 천거되기 전에 이순신과 권율은 하급 무관이어서 조정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유성룡의 통찰력, 즉 앞을 내다보는 혜안과 준비성 때문에 나라의 큰 후환을 대비할 수 있었으니 이 어찌 ‘징비’가 아니겠는가.

 

정읍을 떠나 좌수영(전남 여수) 본진에 도착한 이순신은 여느 수사들과 달리 전쟁을 미리미리 준비하기 시작했다. 왜적의 내침에 대비하고자 영내 각 진의 군비를 점검하는 것은 물론이고 병사들과 호흡을 맞추며 군기를 엄정하게 다잡았고 해전에 사용할 거북선 건조에 박차를 가했다.

 

이듬해 임진년(1592) 3월 거북선이 완성되었다. 거북선에 지자포와 현자포를 장착했다. 사정거리를 향해 쏘는 가상훈련은 계속되었다. 4월에도 마찬가지였다. 거북선의 화포 발사 훈련은 평상시와 다를 바 없었다.

같은 달 15일, 부산 앞바다에 왜선이 등장했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것이다. 이미 적을 섬멸할 준비를 마친 이순신의 좌수영은 조용했다. 여느 봄날처럼 궂은비가 내리고 있었다.

 

다음은 <난중일기>의 기록이다. 임진년 4월 17일 일기다.

 

 

"궂은비가 오더니 늦게 갰다. 영남 우병마사(김성일)가 공문을 보냈는데, “왜적이 부산을 함락시킨 뒤 그대로 머물면서 물러가지 않는다”고 했다. 늦게 활 쉰 순을 쏘았다.

그대로 번을 서는 수군과 새로 번을 드는 수군이 잇달아 방비처로 왔다."

(이순신 지음, 노승석 옮김, <교감 완역 난중일기>, 민음사 펴냄)

 

 

종일 내리던 빗줄기가 가늘어지더니 오후 늦게 날이 갰던 것 같다. ‘왜적 부산 함락’이라는 공문을 확인한 다음에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다. 이순신은 활터로 나간다. 별 동요가 없어 보인다. 근심이나 초조의 문구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장자(莊子)>에서 말한 최고의 싸움닭을 뜻하는 ‘목계(木鷄)’ 수준을 방불케 한다.

 

1%가 99%를 이긴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왜군은 조선을 파죽지세로 몰아붙이며 승승장구했다. 유성룡은 선조와 조정을 이끌고 국경선이 있는 의주까지 피난을 가야 했다. 거의 조선이 끝장날 판이었다. 육지에서는 그랬다.

하지만 바다에서의 싸움, 해전(海戰)은 양상이 달랐다. 조선 수군이 연전연승(連戰連勝)한다는 승전보가 피난 중인 조정에도 들려왔기 때문이다.

 

왜군은 뜻밖의 상황이 펼쳐지자 크게 당황했다. 당시 일본의 최고 권력자인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당황해하며 ‘이순신을 없애라’는 특명을 내리기도 했다. 1%(조선 수군)가 99%(왜적)를 이기는 기적을 만든 것이다. 하지만 ‘1% 승리’는 그리 오래가진 못했다.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이순신이 지휘하는 해전이 연승을 거두자 전선의 상황은 조선에 유리한 국면으로 뒤바뀌었다. 조정이 정치를 다시 시작했다.

 

당시 상황을 보자. 이순신의 인기는 드높았다. 반면에 선조와 조정은 인심을 잃었다. 이순신 개인의 ‘신뢰’가 선조와 조정을 앞지른 탓이 무엇보다 컸다. 이순신에게 괘씸죄가 적용됐다. 이렇듯 참군인은 정치인을 당할 수 없다.

 

이순신의 수군에 연전연패한 일본은 전선의 부족으로 본국으로부터 군비조달이 어려워지고 수륙병진책도 추진할 수 없었다. 또한 의병활동과 명나라의 참전으로 육지에서의 전쟁도 일진일퇴를 거듭하게 되자 일본은 명나라와 지루한 종전 협상을 벌이게 된다.

 

이에 따라 전쟁이 소강상태에 빠지자 선조는 일부 사람들의 모함과 일본 간첩 요시라의 간계에 넘어가 1597년 2월 26일, 이순신을 함거(죄인을 호송할 때 사용하던 수레)에 가두어 한양으로 압송했다. 한 달여 후인 4월 1일 가까스로 석방된 장군은 도원수 권율의 휘하에서 백의종군하라는 명을 받는다. 당시 장군은 장군이 아니었다. 그는 일개 군졸로 싸움터에 나가야 했다. (중략)

석방된 지 약 3개월 후인 7월 18일, 장군은 통한의 소식을 들어야 했다. 원균의 조선 수군이 칠천량 해전에서 전멸하다시피 패했다는 비보였다. “통곡함을 참지 못했다”라고 장군은 그때의 심정을 토로했다.

(지용희 지음, <경제전쟁시대 이순신을 만나다>, 디자인하우스 펴냄)

 

 

[심상훈의 부자팔자] 위기극복의 '아바타', 이순신과 유성룡

 

아버지가 아들에게 준 8자 : 유성룡이 이순신에게 ③

 

 

1%가 99%를 이긴다. 이것은 기적이다. 하지만 1% 때문에 나머지 99%가 무너진다. 이것은 왕왕 일어나는 상식이다. 이순신에 뒤를 이어서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이 딱 그랬다.

원균은 단 한 사람(이순신)만을 제외하고는 300척의 전선과 무기, 군수품, 인력 등 모든 것을 인계 받았다. 하지만 칠천량( (漆川梁))에서 하나도 남김없이 다 잃고 만다. 참패였다. 자신도 전사했다.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이 이 비보를 듣고 “통곡함을 참지 못했다”라고 토로한 심정을 알 만했다.

 

칠천량 해전 패배 속에서도 다행히 조선수군에는 전선 12척이나마 남아 있었다. 12척 전선이 남겨진 이유는 경상우수사 배설이 지휘권을 가지고서 사전에 몰래 도망쳤기 때문이다. 칠천량 해전의 승리로 기세가 오른 일본은 순식간에(30여일) 조선의 전 국토를 점령하며 유린해 왔다. 이 긴박한 상황에 닥치자 선조와 조정은 몹시 당황했다. 뾰족한 대안이 없었다. 다시 ‘이순신’에게 기대할 수밖에.

 

당시에 권율 휘하로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명을 받은 곳은 진주 땅(운곡)이었다고 한다. 선조의 교지가 이순신에게 전해졌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짐은 이와 같이 이르노라. 어허, 나라가 의지하여 보장을 삼는 것은 수군뿐인데, 하늘이 아직도 화를 거두지 않아(중략) 3도 수군이 싸움에 모두 없어지니 근해의 성읍을 누가 지키며, 한산진을 이미 잃었으니 적이 무엇을 꺼릴 것이랴?

 

생각하건대, 그대는 일찍이 수사 책임을 맡던 그날 이름이 났고, 또 임진년 승첩이 있은 뒤부터 업적을 크게 떨쳐 변방 군사들이 만리장성처럼 든든히 믿었는데, 지난 번 그대의 직함을 갈고 그대로 하여금 백의종군하도록 했던 것은, 역시 사람의 모책이 어질지 못함에서 생긴 일이었거니와, 오늘 이와 같이 패전의 욕됨을 당하게 되니,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

 

이제 특별히 그대를 상복 입은 그대로 기용하는 것이며, 또한 그대를 백의(白衣)에서 뽑아내어 다시 옛날같이 전라좌수사 겸 충청·전라·경상 3도 수군통제사로 임명하노니."

(하략) (이순신 지음, 노승석 옮김, <교감 완역 난중일기>, 민음사 펴냄)

 

 

교지를 읽다가 보면 부아가 치민다. ‘삼도수군이 싸움에 모두 없어’진 것을 알면서도 ‘무슨 할 말이 있’다고 천지(天只)인 어머니를 잃은 ‘그대를 상복 입은 그대로 기용하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색을 낸단 말인가.

 

여하튼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이 되어 전선 12척을 회령포에서 인수받은 것은 1597년 8월 18일 정유년의 일이었다. 세계 해전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기적 같은 승리를 일군 ‘명량대첩’이 있기 전, 한 달 전이었다.

 

이순신이 우수영 앞바다에 쓴 ‘이기는 팔자’

 

세계 해전사에 길이 빛나는 불가사의한 승리! 명량대첩(鳴梁大捷)을 두고 불과 13척 전선으로 왜선 130척이 아니고 200척을 이겼다느니, 이게 아니고 333척을 이겼다느니, 무슨 말이냐 500척이나 이겼다는 설이 분분하다. 아무튼 대승을 거둔 것이다. 여기에 이의를 달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울돌목(鳴梁). 바다의 천혜의 조건을 활용한 기막힌 방략(방법과 전략)이 거둔 대승이었다. 하지만 놓쳐서는 안 되는 게 있다. ‘이순신이 바다에 쓴, 이기는 팔자(八字)’가 그것이다. 명량해전이 일어나기 전날 장군은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팔자(八字)로 말했다. 정유년 9월 15일 일기 내용을 보자.

 

 

"맑음. 조수(潮水)를 타고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우수영 앞바다로 진을 옮겼다. 벽파정 뒤에 명량이 있는데 수가 적은 수군으로써 명량(鳴梁)을 등지고 진을 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약속하되, “병법에 이르기를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려고 하면 죽는다(必死則生 必生則死)’고 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一夫當逕 足懼千夫)’고 했는데, 이는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는 일이 있다면 즉시 군율을 적용하여 조금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고 재삼 엄중히 약속했다.

이날 밤 꿈에 신인이 나타나 가르쳐 주기를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이렇게 하면 지게 된다(如此則大捷 如是則取敗)”고 하였다. "

(이순신 지음, 노승석 옮김, <교감 완역 난중일기>, 민음사 펴냄)

 

 

앞에 두 번이나 연달아서 등장하는 팔자(八字)는 병법서 <오자(吳子)>에서 모두 인용한 것이다.

 

범병전지장 입시지지(凡兵戰之場 立屍之地) 필사즉생 행생즉사(必死則生 幸生則死)

-오자(吳子)의 ‘치병(治兵)’편-

 

“무릇 병사가 전장과 시체가 널리 곳에서는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요행으로 살기를 바라면 죽는다”라는 뜻이다. 요행을 뜻하는 ‘행(幸)’이 반드시를 의미하는 ‘필(必)’ 자로 고쳐졌다.

 

일인투명 족구천부(一人投命 足懼千夫) - 오자(吳子)의 ‘여사(勵士)’편-

 

“한 사람이 목숨을 던지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라는 뜻이다. 일인투명(一人投命)이 일부당경(一夫當逕)으로 바뀌었다.

 

이순신이 우수영 앞바다에 쓴, 두 개의 팔자 덕분일까. 명량해전은 이순신에게 승리를 안겨줬다. 다시 조선 수군이 제해권을 주도적으로 갖게 된 것이다. 이순신은 마지막 노량해전에서도 바다에 팔자를 쓰고 최후를 맞이한 바 있다. 그가 최후로 한 말이 그렇다. 다음이 그것이다.

 

전방급신 물언아사(戰方急愼 勿言我死)

 

“전쟁이 급하니 삼가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얘기다.

 

얘기는 총탄에 맞아 핏물이 번지는 것을 보고 달려온 이순신의 조카와 송희립에게 당부한 말이다. 당시에 이순신이 “갑옷만 제대로 챙겨 입었더라면 죽지 않을 수 있었다”라는 풍문이 나로 하여금 ‘자살설’에 끄덕끄덕 공감하게 만든다. 어쩌면 이 조차도 ‘장래를 생각한 선택’이었지 싶다.

 

전쟁이 끝나고 설사 장군이 살았다 치자. 그렇다고 하더라도 영광스런 삶이 보장 되었을까. 아닐 것이다. 선조와 조정이 또 나서서 사약을 내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장렬한 죽음을 선택했기에 나중에 충무(忠武)라는 시호를 받을 수 있었고, 영의정에 추증된 것이고 가문의 영광이 계속 이어질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유성룡과 이순신의 닮은 생각법

 

무관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일등훈장이 ‘충무(忠武)’라면 문관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일등훈장은 ‘문충(文忠)’이다. 그래서 이순신은 죽어서 충무공이 되었고, 유성룡은 죽어서 문충공이 되었다. 충무공과 문충공은 어려서부터 벗이었다. 기록은 없지만, <논어(論語)>와 <시경(詩經)>을 함께 공부했지 싶다. 그런 상상이 떠오른다.

 

63세에 유성룡은 <징비록(懲毖錄)>을 마쳤다. 이순신도 살았더라면 <천지록(天只錄)>이란 저서를 남기지 않았을까. 두 사람 모두 <시경>을 통해서 두 글자(징비, 천지)를 가슴에 평생 글자로 담은 바 있다. 닮았다.

또 먼 훗날에 벌어질 가족과 나라의 장래를 생각하는 것에서도 서로 닮은 구석이 많았다. 어디 그뿐인가. 병법서와 역사서를 즐겨 탐독했다는 점도 서로 닮았다.

 

옛일을 기억하는 것은 옛날을 위해서가 아니라 앞날을 위해서다.(정민 지음, <책 읽는 소리>, 마음산책 펴냄)

 

그렇다. 옛일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역사를 공부해야 한다. <책 읽는 소리>의 저자 정민 한양대 교수는 “옛 역사를 펼쳐 읽다가 인간 삶의 모습이 너무도 똑같이 반복되는 것을 느끼고 놀랄 때가 많다”고 했다.

 

유성룡에 대한 책을 읽다가 인간 이순신이 보이고, 이순신 관련 책을 읽다가 인간 유성룡이 보인다. 어쨌든 이순신에게 있어서 팔순 노모 초계 변씨가 하늘(天只)이었다면, 해와 달이 되어서 길을 환하게 밝혀주고 채워준 인생의 선배이자 멘토는 단연 유성룡일 것이다. 이 두 사람은 어린 시절부터 벗으로 만나 어른이 되고, 정국과 전쟁을 주도하는 인물이 되어서도 서로 잊지 않고 소통하고 정보를 공유하고 아이디어를 교환했다. 이순신 전문 연구가 박종평 작가는 “두 사람은 거울을 쳐다보듯 서로에게 배우고 교감했다”라고 교우 관계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1555년 서울 건천동(현 서울 중구 인현동1가 40번지) 시절에 유성룡과 이순신은 약속이라도 한 듯 <논어>를 펼쳤으리라. 그리고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읽고 서로 마주보며 거울을 쳐다보듯 씩~ 웃었을지도….

 

인무원려 필유근우(人無遠慮 必有近憂)

 

<논어> 속 이 팔자는 “사람이 장래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가까운 날에 근심을 겪게 된다”라는 뜻이다. <논어> ‘위령공(衛靈公)’에 보인다. 팰자가 용산에 있을 적, 그 이후로도 연구소를 옮길 때마다, 내 방의 서재 이름을 ‘인무원려 필유근우(人無遠慮 必有近憂)’에서 두 글자 원려(遠慮)를 따와 ‘원려재(遠慮齋)’라고 쓴 바 있다.

 

 

아시아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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衛靈公 第十五

 

子曰: ?人無遠慮, 必有近憂. ?

蘇氏曰: ?人之所履者, 容足之外, 皆爲無用之地, 而不可廢也. 故慮不在千里之外, 則患在?席之下矣. ?

 

공자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멀리 생각하는 것이 없으면 반드시 가까운 근심이 있을 것이다.”고 하셨다.

蘇氏가 말하였다. "사람이 밟은 것은 발을 용납하는 이외에는 모두 無用之地(쓸데 없는 땅)가 되나 버릴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각이 천 리 밖에 있지 않으면 禍가 ?席(괘석 :돗자리)의 아래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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