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겨울이 되어 첫눈이 내리는 어느 토요일 오후
고등학교 친구 가운데 아직 시집을 가지 않은 친구를 만나 우산도 없이 눈을 맞으며 첫눈의 감흥에 젖어 수다를 떨며 시내를 지나가던 중 우연히 고모부를 만났다.
어디를 다녀오시던 고모부가 먼저 경숙을 보시고
“너! 경숙이 아니냐?” 하신다.
“고모부! 안녕하세요? 어디 다녀오시는가 봐요?”
경숙도 고모부를 보고 반갑게 인사를 한다.
“그래! 너 못 본 지 꽤 오래됐구나. 눈이 이렇게 오는데 우산도 없이 어디를 가냐?”
“첫눈이 좋아 목적도 없이 그냥 친구랑 쏘다녀요.”
순간 고모부에 얼굴이 어두워지는 것을 경숙은 눈치채지 못한다.
“그러다 감기라도 들면 어쩌려고 그러냐?”
고모부는 30이 다 된 아가씨가 눈을 맞고 다니는 것이 못마땅하신가 보다.
“걱정마세요. 고모부 아직은 건강하니까요.”
고모부의 걱정하시는 마음이 전해지는 것 같아 경숙은 웃으며 고모부를 안심시킨다.
“알았다. 집에 가기 전에 우리 집에 들러라. 너에게 할 말이 있다.”
“네! 알겠어요. 고모부!”
그날 저녁때 경숙이 친구와 헤어지고 나서 7시쯤 고모네 집에 갔을 때 고모부는 집에 안 계셨다.
고모와 군대 다녀와 대학에 복학하여 다니는 동생 모두 오랜만에 찾아온 경숙을 반갑게 맞아 주었지만 정작 경숙을 부르신 고모부는 집에 안 계신 것이다.
고모 댁에는 경숙이 김정수와 선보는 이야기가 있을 때 약혼 상태에 있던 오빠는 장가를 들어 따로 집을 얻어 나가 살고 고모와 동생 그리고 고모부 세 식구가 살고 있다.
고모에게 고모부는 어디 가셨냐고 물었더니 회사에서 아직 안 오셨다는 대답이다.
경숙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자기에게 할 말이 있다고 집에 들으라고 하신 고모부가 아직도 집에 오시지 않으셨다니 무슨 일인가 해서다.
그래서 고모에게 낮에 고모부를 만난 이야기 그리고 고모부가 자기를 집으로 오라고 하셨다는 말을 했더니
“그럼 곧 들어오시겠지, 뭘 그렇게 오자마자 서두르냐. 서서히 놀면서 기다려보려무나.” 하신다.
경숙이 고모네 집에 도착하고 1시간여쯤 지나서 고모부가 들어오신다.
고모부는 경숙을 보시고
“벌써 와서 기다리고 있구나. 미안하다 기다리게 해서.”
“온 지 오래됐어요. 약속하셨다며 왜 이렇게 늦었어요? 애 기다리게.”
고모가 한마디 하신다.
“그럴 일이 좀 있었어. 많이 기다린 모양이구나.?”
“아니에요. 오랜만에 동생이랑 이야기하며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어요.”
“그렇다면 다행이고.”
그때 고모가
“여보! 당신 저녁 드셔야죠?”하고 물으신다.
“아니야, 밖에서 먹었어. 차나 한잔 내와. 경숙이와 한잔하게.”
60이 가까운 고모는 고모네 형편 정도면 으레 가정부나 파출부를 두는 편이지만 고모부와 아들 하나의 뒷바라지는 자기 혼자도 충분하다고 가정부라도 두라는 고모부의 권유에도 혼자 가정을 꾸려 가시며 그렇게 해서 여유가 생기는 것으로 사회봉사를 하신다.
고모부가 주위의 존경을 받는 것도 이런 고모의 내조가 있기 때문이다.
경숙은 고모가 차를 끓이시는 것을 도와드리고 차가 다 끓자 차상을 들고 들어와 고모부에게로 와서 차를 따랐다.
경숙이 고모에게 같이 차를 드시자고 권했으나 고모부가 너에게 긴히 하실 말씀이 있어 부르신 모양이니 두 분이 재미있게 이야기하라며 자리를 피하신다.
고모가 나가신 후 차를 마시며 잠시 시간이 지나고 고모부가
“경숙아! 네가 그동안 참 고생이 많았다. 아버지 일로 해서 또 가정의 생활까지 돌보느라 마음고생에서부터 몸 고생까지.”
“아니에요. 자식으로서 마땅히 하여야 할 일을 했지요.”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니 대견하고 다행스럽다. 네 아버지를 만날 때마다 너의 이야기 하며 부모 잘못 만나 고생하는 네가 안쓰럽다며 안타까워하시더라.”
고모부의 그 말을 듣자 가슴이 뭉클해지며 그동안 가정을 떠맡아 오며 힘들었던 일이 모두 눈같이 녹아내린다.
곁으로는 표현하지 않으시지만 언제나 자식을 걱정하시는 부모의 마음을 다시 한번 진하게 느꼈기 때문이다.
“며칠 전에 아버지를 만났을 때 이제까지 그동안 농사가 부실하고 네 동생 대학 등록금 때문에 미루어 왔지만 이제 농사도 어느 정도 틀을 잡았으니 너를 시집보내야겠다며 나 보고 중매를 서달라고 하더구나. 그래서 알아보았지만 당장은 어디 좋은 혼처가 안 나온다. 그래서 생각해 보았는데 결혼 전까지 동양화 공부를 좀 하는 것이 어떠냐? 너는 어려서부터 미술에 소질이 있었잖니. 동양화를 배워두면 결혼 후에도 소일거리로 괜찮을 것 같은데.”
경숙은 초등학교와 중학교 때는 학교 대표로 사생대회에 나가 입선도 했고 고등학교 때에도 1학년 때까지도 그림을 그렸고 한때는 대학에 가서 미술을 전공할까도 생각했었지만, 아버지의 권유로 상대를 갔다.
그리고 대학에서도 미술동아리 활동을 하며 그림을 그리다가 졸업하고 취직하면서부터 회사 일과 집안일을 돌보느라 붓을 놓아버렸지만, 아직도 미술도구는 집에 그대로 있다.
그렇지만 붓을 놓은 지 6〜7년 그동안 전연 그림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었는데 뜬금없이 고모부가 동양화를 배우라고 하시니 처음에는 당황했다.
“실은 아까 너를 만나고 난 후 동양화가로 이름이 있는 000씨를 찾아가 네 이야기를 하고 1년 치 수강료도 주고 왔다. 000씨는 나와 친분이 있어 지금 자기에게서 가르침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세 명이나 있어 안 된다고 하는 것을 부탁해서 억지로 응답을 받았다. 그러니 다음 주 월요일부터 다니도록 해라.”
“그렇지만 고모부 저에게는 물어보시지도 않고.”
“그래 물론 고모부가 너무 일방적이라고 네가 생각하겠지만 아까 눈을 맞고 다니는 너를 보고 고모부의 마음이 짠했다. 얼마나 마음 붙일 곳이 없으면 다 큰 처녀가 눈을 맞고 다니나 하고. 그래서 내가 일방적으로 결정하여 일을 저지른 것이다.”
“고모부 말씀은 고맙지만, 수강비가 만만치 않을 터인데---.”
“누가 너 보고 그런 걱정하라고 하냐? 고모부 형편이면 그쯤은 너에게 해 줄 수 있으니까. 걱정마라.”
“고모부 고맙습니다.”
“그래! 화방이 있는 곳은---.”
그동안 아버지 일로 김정수와 그렇게 되고 또 집안 형편 때문에 결혼 못 하고 있는 경숙을 많이 안쓰러워 하시어 마음 붙일 곳이라도 만들어주시려는 고모부의 생각에 고마운 마음은 하늘 같지만, 경숙은 난감했다.
고모부의 권유가 너무 급작스럽고 또 그림 붓을 놓은 지도 너무 오래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모부가 이렇게까지 하시는데 못 다니겠다고 할 수가 없어 다니다 정 못 하겠어서 그만둘 때 그만두는 한이 있더라도 한 번 다녀 보리라 마음을 먹고 다음 주 월요일 약속된 시간에 화방에 나갔다.
화방에서는 묵향이 그윽하게 풍긴다. 그 화방 안에서 60대의 개량 한복을 입은 사람이 붓을 들고 동양화를 그리고 있다.
그 사람은 그림에 심취해서인지 사람이 들어와도 모르고 있다.
경숙은 들어서며 말을 붙이려 했으나 그 사람이 워낙 그림에 빠져있어 잠시 기다리다 그 사람이 붓을 바꾸려고 하는 틈을 타서
“안녕하세요? 이 경숙입니다.”
하고 인사를 했다.
그 사람은 힐끔 경숙을 쳐다보고 아무 말 없이 계속 그림을 그린다.
인사를 하고는 무슨 말이든지 할 줄 알고 기다리던 경숙은 멀쑥하여지고 너무 사람을 무시하는 것 같아 그냥 갈까 하다가 고모부를 생각해서 참는다.
또 한 동안을 기다리다 지쳐 바쁘시지 않을 때 다시 오겠다는 인사를 막 하려고 하는데
“자네가 이 경숙인가?”
하고 그 사람이 갑자기 되묻는다.
“네! 제가 이 경숙입니다.”
얼떨결이 경숙이 대답을 했다.
“그래? 철규하고는 어떤 사이인가?”
철규는 고모부의 이름이다.
“제가 조카딸입니다. 최자 철자 규자 되시는 분은 저의 고모부 되시는 분입니다.”
“그 자네 고모부 되는 사람이 토요일 저녁에 갑자기 찾아와서 자네를 내게 맡겼어. 그 사람과의 친분 때문에 할 수 없이 자네를 받긴 했지만 지금도 내게는 세 사람의 제자가 있어. 자네보다 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인데 모두 열심히 하고 있어, 그러니까 자네도 열심히 해. 그렇지 않아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날로 쫓아버릴 테니까. 각오 단단히 하고 시작하란 말이야. 따라올 수 없을 것 같으면 처음부터 시작하지 말고.”
화가 선생님의 엄포를 들으며 경숙은 은근히 오기가 났다.
얼마나 대단한 분인데 이렇게 처음부터 엄포를 놓는가 하고, 그리고 잘못하면 고모부를 뵈을 낮이 없어지겠구나, 하는 생각에 고모부를 봐서라도 열심히 하여야겠다고 마음을 먹으며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런데 제자 분들이 세 분이나 되신다며 다 어디 갔습니까?”
하고 물었다.
“왜 궁금한가?”
“궁금한 것보다 보이지 않아서요.”
“별 개 다 궁금하군. 나중에 알게 돼.”
화가 선생님의 말대로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그 화방에서는 선생과 학생이 단독으로 만나서 그림 공부를 하는데 학생들의 공부 시간이 각각 달라 약속된 시간에 한 사람씩 와서 배우고 있었다.
동양화는 서양화의 기법과 달라 처음에 붓을 잡는 법, 붓을 쓰는 법, 화선지를 다루는 법, 먹을 가는 법을 배우며 선생님에게 꾸지람도 많이 듣고 혼도 많이 났지만 그림에 대하여는 소질이 있었던 경숙은 차츰 익숙해지고 선생님의 생각보다는 잘한다는 칭찬을 들으며 선생님이 지도로 요구하는 것을 따라 할 수 있게 되었다.
첫댓글 즐~~~~감!
감사 합니다
무혈님!
의림지24님!
다녀가심에 감사 드립니다
천고 마비의 계절에 행복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