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同哲學會 논 문 집
「
」 제14집 2001. 9.
후기 고대 및 중세 초기에서의 비잔틴 철학에 대한 소고
전 광 식
후기 고대 및 중세 초기에서의 비잔틴 철학에 대한 소고*
* 이 논문은 1999년도 한국학술진흥재단의 대학교수 해외파견 연구지원에 의하여 연구되었음.
*
고전 헬라철학의 수용을 중심으로
** 고신대학교 신학과 교수
전 광 식**
요 약 문
본 연구는 후기고대와 중세초기를 중심으로 알렉산드리아학파에서 Plethon까지의 비잔틴사상가들이 어떻게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신플라톤주의를 수용하고 해석했는 지를 논구한 것이다.
비잔틴 철학이란 로마제국이 비잔티움으로 천도한 기원 후 3세기말부터 1453년 그 멸망에 이르기까지의 비잔틴제국에서 일어난 철학을 일컫는다. 이 제국은 서양세계를 지탱해 온 로마적 정치체제, 기독교적 종교, 헬라적 문화로 이뤄진 사회였고, 라틴문화를 계승한 서방과는 그 사상적, 문화적 성격이 판이했다. 이 제국의 철학은 후기고대에 그 주도권을 Athene에서 넘겨받아 Alexandria와 Byzantium을 중심으로 융성, 발전하게 되었다. 비잔틴 철학은 그 초기단계에서 기독교신학과 신플라톤주의사이에서 위상정립에 갈등을 가졌고 이러한 갈등은 비잔틴의 전사상사를 통해 줄곧 내려갔다. 신플라톤주의는 Pseudo-Dionysios의 문헌들과 그로 인한 Proklos의 철학, 그리고 Porphyrios등의 사상이 후대에 큰 영향을 주었는데, 이것은 가끔 비잔틴교회가 이단으로 몰고 비판한 신학자들의 사상 속에 담긴 이교적 요소로 지적 받기도 했다. 플라톤의 문헌에 대해서도 9세기이후의 비잔틴사상사에서 중단 없이 연구되었고,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도 Porphyrios의 Isagoge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소개되고 연구되었다. 그러나 이미 Cappadokia교부들 이래로 이러한 이교철학사상은 \'밖으로부터 온 철학\'(He exothen philosophia)이라는 부정적인 명칭을 받게되었고, 그것에 대조적으로 기독교복음은 \'참된 철학\'(He alethe philosophia)으로 지칭되었다.
비잔틴철학의 의미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점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고전 헬라철학의 사상 및 문헌의 보존 및 전수, 둘째, 신비주의 및 부정신학 전통의 형성과 중세 스콜라 철학에 대한 영향, 셋째, 근세 르네상스 발발에의 직접적인 배경역할, 넷째, 동방정교 신학의 태동과 발전에 기여, 다섯째, 헬라철학사상 및 동방기독교의 요소를 회교권에 전달함 등이라고 할 수 있다.
※ 주요어 : 비잔틴, 신플라톤주의, 플라톤주의의 역사,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역사, Porphyrios, Proklos, Damaskus,
Ⅰ. 서론 : 비잔틴 철학의 정체성과 의의
\'비잔틴 철학(philosophia byzantina)\'이란 로마 제국이 비잔티움으로 천도한 기원 후 3세기말부터 동서분립(395년)을 거쳐 1453년 그 멸망에 이르기까지의 비잔틴제국, 즉 동로마제국에서 일어난 철학을 일컫는다. 이 제국은 서양세계를 지탱해 온 세 가지 기둥이라 할 수 있는 로마적 정치체제, 기독교적 종교, 헬라적 문화로 이뤄진 사회였고
) Georg Ostrogorsky, Die Geschichte des byzantinischen Staates, 1952
, 라틴문화를 계승한 서방과는 그 사상적, 문화적 성격이 판이했다. 특히 이 제국의 철학은 후기고대에 그 주도권을 Athene에서 넘겨받아 Alexandria와 Byzantium을 중심으로 융성, 발전케 되었다. Alexandria의 철학아카데미는 주후 6세기에 그 사상적 발전과 학문연구에 있어 정점에 달했으며 9세기에서 15세기까지는 콘스탄티노플이 철학과 신학을 주도했다.
그간 여러 학자들이 지적해 온 바대로
) 예컨데,B. Tatakis, La Philosophie byzantine,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Paris 1949, 2rd 1959; 이것은 1977년에 이르러 아테네에서 희랍어판으로 출간되었다. . . , , . . . , 1977.나 C.Cavarnos, Byzantine Thought and Art, 4rd, Belmont 1988, 13등이 이 점을 줄곧 언급해 왔다.
초기의 연구가들은 비잔틴철학의 독자성을 인식하거나 인정할려고 하지 않고 단지 Platon과 Aristoteles사상의 반향(反響)내지 각주(脚註-A.H.Whitehead 식의 표현을 빌리면)정도로 간주했다. 하지만 20세기중반이후의 연구가들은 비잔틴철학의 독창성내지 자율성을 내세우고 있다. Brehier도 위에서 언급한 Tatakis저서의 서문에서 비잔틴제국 내에는 사상의 완전한 자율적 운동들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 Tatakis, op.cit.v.
Cavarnos도 비잔틴철학의 자율성을 두 가지 사실의 측면에서 내세운다. 그 하나는 비잔틴철학의 기초가 플라톤 사상이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아니라 기독교라는 점이라고 본다. 그에 의하면, 따라서 비잔틴철학의 기초는 계시이고, 이것에 정초하여 비잔틴철학자들이 도입해온 헬라철학은 여기에서 새로운 의미를 지닌다고 보았다. 다음으로 그가 말하는 기초는 이 비잔틴철학은 서방라틴계(Latin West)사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이 독립적으로 발전되었다는 점이다.
) C.Cavarnos, op.cit. 14
하지만 Cavarnos의 이런 주장은 몇 가지 이의(異議)에 부딪힌다. 우선 그가 내세우는 논거들은 비잔틴철학의 자율성의 근거는 될지 몰라도, 그것의 독창성을 확보해 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첫 번째 사실은 기독교철학의 모든 형태에 해당되고, 또 그것과 두 번째 논거는 서방라틴계철학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사실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상기한 바대로 그는 Tatakis가 Johannes Damaskos를 다루고 또 Gregory of Sinai, Gregory Palamas, Nicholas Cavasilas 같은 hesychast 운동의 신비적 신학자들과 그들의 논적(論敵)들인 Barlaam과 Akindynos등을 다루는 등 너무 신학적인 사상가들을 중심으로 서술했다고 비판했으면서도
) ibid.15
자기자신은 글의 대부분을 헬라교부들에게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헬라교부들의 경우도 그들의 저작들에 상당한 철학적 사상이 함유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철학자와 신학자의 범주 중 하나를 택일한다면 그들은 여전히 후자의 카테고리에 들어간다고 봐야 할 것이다. 또 그는 따라서 그에게도 다른 이들에게서와 마찬가지로 Ammonios 이후의 알렉산드리아 신플라톤주의자들의 사상이 전혀 다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비잔틴 철학의 독창성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가장 주요한 이유는 그것에는 고대헬라에서와 같은 어떤 독특하고 고유한 형이상학적 체계나 세계관, 그리고 인식이론이나 윤리론 등을 창출하고 전개한 개별학자나 학파가 없고 또 그런 저작들이 없다는 데 연유한다. 그러면 왜 이렇게 장구한 세월의 사상사가운데서도 어떤 독창적 철학에의 창조적 작업이 없었는가에 대한 전통적인 논리는 대략 다음과 같다. 무엇보다 먼저 비잔틴사회전체를 장악하고 통제하고 있던 동방정교의 사회적 및 사상적 헤게모니는 교회의 가르침으로부터 독립되고 자유로운 사상체계의 출현을 근원적으로 봉쇄하는 분위기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그 주요한 외적 분위기와 사회적 여건을 이루었던 것이다. 나아가 비잔틴 제국의 학자들은 자신들의 학문적 과제를 무엇보다 먼저 고대헬라 철학의 본질적 요소들을 보존하고, 그것들과 기독교 사상간의 종합을 이루는 것에 두었던 것이다. 또한 수사학이 지배적인 학계의 상황과 Johnnes Damaskos이후 철학이 \'ancilla theologiae\'노릇을 하게 된 데서라고 할 수 있다.
) cf. Otto Mazal, Byzanz und das Abendland, Graz 1981, 307
그러면 우리는 아래의 논의에서 비잔틴 철학이 어떠한 전체적인 특성을 지니며, 그리고 특히 고전헬라철학들을 어떻게 수용하고 있는지 다양한 각도에서 조명해보고자 한다.
Ⅱ. 기독교교리와 신플라톤주의사이에서의 비잔틴철학
비잔틴 철학자들은 한편으로는 그들의 체계가 기독교 사상에 영향을 받았든지 아니면 아예 기독교적 철학을 전개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고, 반면에 다른 한편으로 교회측으로부터는 그들의 사상이 기독교 교리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혐의를 줄곧 받아왔다.
) W.Treadgold, A History of the Byzantine State and Society, Stanford 1997, 687.
심지어 그다지 엄하지 않았던 Constantine IX 치하에서조차 Constantine Psellus와 John Xiphilinus는 이단(異端)이라는 고소를 받았으며 그로 인해, 그들은 교수직에서 물러나 수도승이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공적으로는 정죄 받지 아니하여 얼마 후 Psellus는 교수직으로 되돌아왔고, Xiphilinus는 대주교가 되었다. 하지만 Psellus의 철학 교수직을 계승한 John Italus는 가혹한 종교재판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 재판의 공식적 이유는 그의 사상이 지니고 있는 이교성으로 인한 것이었으나 그 실질적인 계기는 그가 교회 내부에 있던 황제에 대한 비판을 지지함으로서 Alexius I 세의 비위를 거슬리게 한 데 있었다. 1082년, 전임 대주교인 Cosmas와 당시 대주교인 Eustratius Garidas의 염원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공회(公會)에서 유죄평결을 받았다. Italus가 비록 신플라톤주의적 용어를 부주의하게 사용하여 비난과 고소를 야기시켰을지라도 그가 지신이 정죄 당한 죄목인 이교적 사상을 신봉했던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이러한 경우는 약 2세기반 뒤의 Barlaam재판에서도 잘 보인다. Palamas와의 교리적이고 사상적인 대립과 투쟁에서 공의회는 Palamas의 손을 들어주었다.
비잔틴 철학은 일반적으로 보아 알렉산드리아교부들인 Clement와 Origenes이래 줄곧 광의적 의미에서의 플라톤주의의 영향가운데 있어 왔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신플라톤주의적인 Ammonios학파에서 주석적 작업으로 화려하게 부활한 이래 콘스탄티노플의 Leontius와 Photius를 거쳐 15세기에 이르기까지 비잔틴사상에서 일정한 위치를 차지하며 내려온다. 반면 스토아철학도 그것의 유물론적 일원론으로 인해 기독교적인 비잔틴 사상에 전적인 수용과 동화는 되지 않지만, 비교적 비종교적인 경향으로 인해서 수도원적 수행의 원리나 윤리적 덕목수립 등에 일정한 영향은 준다.
하지만 비잔틴 철학의 가장 주요한 배경은 상기한 바대로 플라톤주의라 할 수 있다. 갑바도기아 교부들은 한편으로는 헬라철학 전반에 대해 \'밖으로부터 온 철학\'이라 하여 분명한 선을 긋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개념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뿐 아니라 그 사상의 틀들을 가지고 교리의 합리적 설명을 전개해 나간다. 창조-타락-영혼의 상승에 대한 Gregory of Nyssa의 설명은 명백하게 성경적 패러다임과 Plotinos의 Triad를 혼합한 것이며, Gregory of Nazianzus의 삼위일체론도 monad-dyad-triad라는 신피타고라스적 구도로 서술되고 있다.
이렇게 플라톤주의 내에서도 후대로 갈수록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이 강화되는데, 그것은 특히 Pseudo-Dionysios Areopagita의 문헌이 나온 이래로 그러했다. Eriugena에서 Thomas Aquinas에 이르는 서양중세와 Maximos the Confessor에서 Psellos와 Italos를 거쳐 Plethon에 이르는 비잔틴 중세를 공히 신플라톤주의의 시대로 만든 것은 이 Corpus Dionysiacum의 역할이라 아니할 수 없다. 기독교적 가르침과 Proklos의 신플라톤주의를 병합한 이 Corpus는 동서의 전 중세를 통하여 교회적 위계질서와 수도적 삶, 부정신학(theologia negativa)과 신비주의적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 cf. L.G.Westerink, Philosophy and Theology, Byzantine, in: Dictionary of Middle Ages, Vol.9, New York 1978, 는 이 Corpus를 \' an amalgam of the Platonism of the Cappadocians with Athenian Neoplatonism\'이라고 칭했다.
중세 비잔틴에서는 Symeon, Gregory Palamas, Nicolas Kabasilas 등이 이 Pseudo-Dionysios의 영향하에 신비주의 사상을 전개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비잔틴철학의 이러한 신플라톤주의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6세기 이후의 비잔틴 제국에는 공식적이고 공개적인 신플라톤주의 학파가 없었음은 물론 어떠한 철학학파 내지 철학학교도 없었다. 물론 그 직전에는 알렉산드리아에 신플라톤주의적인 아카데미 지부가 하나의 학교로서 하나의 학파를 이루고 있었다. 이 학파의 수장은 Ammonios(그는 대략 470-520A.D. 어간에 이 직에 머물렀다)였는데, 아테네학교가 문을 닫은 이래로 이 알렉산드리아학교는 아카데미는 물론 헬라철학의 마지막 보루(堡壘)였다. 하지만 이 학교도 Ammonios이후 Elias와 David을 거쳐 A.D. 565년 이후 Stephanus에 이르러 문을 닫게 되었다.
) Stephanus가 알렉산드리아학교의 문을 닫고 황제의 초청에 따라 새로이 설립된 기독교적 대학인 콘스탄티노플 대학의 학장으로 갔다는 얘기는 신빙성에 의문이 있다.
그 밖에 우리는 Procopius, Aeneas, Zacharias of Mythlene등이 중심이 된 Gaza학파를 들 수 있는 데, 이 학파는 윤회설적 논리나 세계의 영원성 등에 대한 신플라톤주의의 주장에 대해 변증을 시도한 기독교 철학적 활동을 전개했으나, 그 본래에 있어서는 철학학파라기보다는 하나의 수사학파(修辭學派)의 성격이 강했다고 볼 수 있다.
) L.G.Westerink,op.cit, 565
하여튼 Gaza학파를 하나의 철학적 학파의 범주에 넣는다고 하더라도 비잔틴세계에서는 초기의 이 두 학파 외에 어떠한 철학적 체계를 개발하고 지속적으로 전개시킨 철학학파나 학교가 공식적으로 없게 되었다. 따라서 비잔틴철학은 서양 중세에서의 스콜라 사상의 경우처럼 표면상 \'신학자\'라고 불리는 철학자들이 있을 뿐이고, 그들이 주석하고 또는 집필한 철학서들만 있을 뿐이다. 물론 우리는 비잔틴 세계에서도 철학전문학교는 없었지만 철학이 여전히 중요한 과목으로 일반교육과정에서 가르쳐져 왔고, 또 신학자들이 줄곧 철학적 개념들과 방법론을 도입했으며, 나아가 이제 언급한 것처럼 개별적으로 Platon이나 Aristoteles의 저서 같은 고전 철학서들을 주석하고 또 자기스스로 철학적 성격을 지닌 책들을 집필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사상계에서의 기독교적 신학의 주도는 이렇게 비잔틴철학의 운신의 폭을 협소하게 하면서 동시에 그 철학과 철학함의 경향과 성격을 그런 쪽으로 자연스럽게 유도해갔다. 적어도 6세기 이후의 철학은 신학이라는 테두리 안에 머물면서 다양한 개념 및 부정신학(apopathic theology)을 제공하므로 그 나름대로의 역할분담을 하게 되었다
) 6세기이전의 Nicea공의회(325A.D.)에서도 Arius파에 대한 비판으로서 예수그리스도의 속성에 대한 용어로 \' \'(유사본질)대신에 택한 \' \'(동일본질)는 물론, 그후의 교의적 진술에 쓰인 \' \', \' \'등에서 그 예들을 찾을 수 있다.
. 철학의 이러한 활동에 대해 서방에서와 마찬가지로 비잔틴 세계에서도 Philo와 알렉산드리아교부들에게서 빌린 \'신학의 시녀\'(ancilla theologiae)라는 용어가 적어도 Johannes Damaskos의 Dialectica까지는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이후 중세 비잔틴 시대에서는 철학이나 논리학이 서방에서처럼 신학의 직접적인 도구 내지 배경이 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그 이유 가운데 중요한 것은 교부시대 이후의 비잔틴 신학은 서방세계에서처럼 교의학적 체계를 수립하는데 주력하지 아니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비잔틴 신학자들은 기독교 진리에 대한 조직적인 변증법적 연구에 별 관심이 없었다. 물론 이들은 성상숭배 및 파괴 등과 관련된 교리적 논쟁이나 수도적 삶의 이론수립을 위해서는 철학을 도입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헬라철학에 대한 비잔틴 신학자들의 공식적 입장을 감안하면 이 \'시녀\'라는 용어보다 \'간헐적인 필요악(必要惡)\'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 모른다.
하지만 헬라철학이 정교적 신앙과 교리, 나아가 신앙윤리에 해(害)와 위험이 된다고 판단할 때, 이 철학은 \'간헐적인 필요악\'에서 \'상시적인 불필요악(不必要惡)\'으로 바뀌게 되었다. 철학에 대한 이러한 이원론적 태도가 무엇보다 신플라톤주의의 철학서(哲學書)들에 대한 비잔틴학자들의 태도에서 잘 드러난다.
Ⅲ. \'참된 철학\'( )과 \'밖으로부터 온 철학\' ( )
\'참된 철학과 밖으로부터 온 철학\' 이라는 개념은 비잔틴 사상계에서 보편적으로 쓰인 표현으로서 이것은 기독교사상이 주도적으로 그것의 관점에서 사용되어 왔다. \'참된 철학\'( )은 \'내적인( , )\' 또는 \'신령한( )\' 철학이며, \'밖으로부터 온 철학\' (\' )은 \'외부의( , , )\' 철학 또는 \'세속적( )\' 철학이다.
굳이 우리가 고전헬라철학사에서 이러한 표현을 찾으려면 Proklos같은 후기 신플라톤주의자들에서 보여지는 \'헬라적 신학\'( )과 \'야만적 신학\'( )이라는 표현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때의 개념은 전자는 mythologia orphica를, 후자는 oracula chaldaica를 의미한다. 하지만 Proklos 같은 경우에는 \'밖으로부터 온 신학\'인 oracula chaldaica를 더 중요시하면서 자기사상의 근간으로 삼고 있다.
) cf. Marinos, Vita Procli, Die Proklosbibliographie von Marinos, ubers. mit Anmerkungen, von A.R.Noes,Heidelberg 1938, Marinos에 따르면 Syrianos는 자신의 말년에 이르러 그의 양제자인 Proklos와 Domninos를 불러 오르픽종교시(詩)와 갈대아신탁 가운데 어느 하나를 택하면 그것을 설명하겠다고 했다. 그 때 양제자는 동일한 선택을 하지 않고 Domninos는 오르픽시를 택하고, Proklos는 신탁을 택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스승의 급작스런 서거로 이 약속은 이행되지 않았고, Proklos가 후임수장으로 올랐을 때 그는 이 갈대아신탁에 대한 주석적 작업과 연구에 착수했던 것이다. 전광식,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사, 서울:서광사 2001
그러나 교부들의 사상과 비잔틴 세계에서 보이는 \'참된 철학과 밖으로부터 온 철학\'의 개념에서는 명시적으로나 공식적으로는 예외 없이 후자를 폄하적(貶下的) 내지 부정적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그에 반해 \'참된 철학\'은 기독교신학 내지 철학을 지칭하면서 그것의 진리됨을 적극적으로 제시하고 선양하는 형태로 쓰이고 있다. 복음(福音, )과 기독교진리를 \'참된 철학\' 내지 \'신적인 철학(philosophia divina)\'라고 주장한 것은 아마 교부(敎父) Justinus 이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Migne, Patrologia Graeca, Vol.6, col. 381,469ff. Justin은 기독교적 가르침인 이 \'신적인 철학\'은 \'신적 지혜 또는 로고스\'에 의해 영감된 것으로 인간의 모든 지혜를 능가하는 위대한 것\'이라고 변증한다.
. 그 외에 우리는 동방교부들의 글에서 \'천상(天上)의 철학\', \'그리스도에 의한 철학\', \'거룩한 철학\' 등을 발견한다. 그리고 이런 개념사용은 Cappadokia 교부들에 의해 체계적인 논의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 기독교의 교리내지 신학을 \'철학\'이라고 일컫는 것은 종교개혁시기의 칼빈같은 이들에게서도 여전히 사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칼빈은 Institutes of Christian Religion 등에서 \'philosophia christiana\', \'philosophia sacra\', \'philosophia Christi\', \'philosophia Pauli\' 등의 용어를 \'신학\'의 대용어로 쓰고 있다. 전광식,\' 칼빈에게서의 기독교철학\', in: --, 학문의 숲길을 걷는 기쁨, CUP 1997을 참조하라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우선 유념해야 할 것은 이 \'철학\'이라는 개념은 많은 경우에 순수한 의미의 철학 사상만이 아니라 학문과 문화전반을 지칭한다고 봐야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참된 철학\'이란 기독교의 복음과 교리, 그리고 기독교적 삶의 전반을 가리킨다고 봐야하며, \'밖으로부터 온 철학\'은 철학과 문학, 종교와 삶 등 헬라문화전반을 가리킨다고 봐야한다.
) A.-M. Malingrey, "Philosophia" Etude d\'un groupe de mots dans la litt rqture grecque, des Pr socratiques qu IVe si cle apr s J.C.Paris 1961, 217-21; cf. Gregory Nazianzenus, Orationes, 36,12, in: SC318,266.
물론 우리는 그것과 동시에 이 개념이 철학과 종교 등이 공히 제시하고 있는 형이상학적인 문제를 주로 지칭하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하여튼 \'참된 철학\'은 구체적으로 구전 또는 문서로 내려왔거나 또 당시의 교회에 의해 공표되고 가르쳐 온 기독교적 교리, 사상, 그리고 방법론 등 기독교적 가르침 전체를 의미하고, 또 수도원적 삶이나 규율들을 의미한다. 비잔틴학자들은 특히 기독교적 삶의 최상적이고도 완전한 형태인 금욕적이고도 수도원적인 삶을 철학이라는 용어로 표현했다.
) cf. Eusebius, Ecclesiastical History, Book II, Ch.17, Book VI,Ch.9; Chrysostom, Patrologia Graeca, Vol.49, cols. 189-190.
따라서 Gregory Nazianzen이 \'철학이야말로 최상의 것이요, 단지 극소수에 의해서만 취해지는 가장 어려운 소명(召命)\'
) P.G. Vol.35, Col.765
이라고 할 때, 이 수도적인 삶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한편 서방기독교에서의 이 용어는 무엇보다 계시신학 내지 기독교교의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반면에 \'밖으로부터 온 철학\'은 플라톤주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신플라톤주의 등 헬라주요철학 등의 저작들과 사상들을 의미함은 물론 이교 내지 이단사상을 뜻하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신플라톤주의를 지칭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비잔틴 사상가들에게 있어 참된 철학의 대표자들은 누구보다 Gregory Nazianzen을 위시한 갑바도기아의 교부들이며, 외부 철학의 권위는 Proklos를 중심으로 Platon, Aristoteles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하여튼 비잔틴사상가들에게 \'밖으로부터 온 철학\' 은 언어나 논리에서 온 단순한 \'이 세상의 지혜\'인데 비해, \'참된 철학\'은 지혜 그 자체( )인 하나님에게서 온 하늘의 지혜요 신령한 지혜이다. Basil에 의하면, 전자는 철학자들의 토론에서 나온 이성의 논증인 데 비해, 후자는 성령님의 말씀에 대한 단순한 신앙이다.
) Basil, In Hexaemeron, I, 10, in: SC 26,130; III,8, in:SC 26, 232-34
따라서 그에 의하면 이러한 철인(哲人)들의 생각을 교부들의 교의와 사도적 전통 위에 두는 것은 큰 오류라고 한다.
) Basil, Epistolae, 90,2, in: Saint Basil, Lettres, ed. Y.Courtonne, , Paris 1957-66, I, 195-96
또 Gregory Nazianzen도 \'우리의 철학은 외양(外樣)은 비천해 보여도 그것의 감춰진 본질에서는 고상하고 따라서 하나님에게로 인도된다\'
) P.G., Vol.35, Col.1204
고 했다. 그리고 그를 이어서 Gregory of Nyssa도 복음과 성경의 가르침은 오류가 없지만 이러한 \'바깥 철학\'의 논리는 사실이 아닌 사화(詞話)에 불과하므로 그것 자체가 이미 오류에 차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철학에 작별을 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 Gregorius Nyssenus, Contra Eunomium III,8,43 in:W.Jaeger, II,255 ; III,3,6,56, in: Jaeger, II,206
비잔틴 세계에서의 이교철학에 대한 기독교 사상의 이러한 우위성 확보는 사상의 무대가 알렉산드리아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진 직후에 곧장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 동서방의 여러 지역에서 탁월한 철학자들과 수사학자들이 모여들어 콘스탄티노플은 제국의 학문적 중심지로서의 면모를 갖추었지만, 그곳은 과거의 아테네나 알렉산드리아와는 달리 철학같은 헬라고전문화에 대해 기독교신앙이 압도하는 형국이 이루어졌다. 그것은 Gregory of Nazianzen이 잘 관찰하고 있다.
) Gregorius Nazianzenus, Orationes, 42, 11, in: PG 36,472
말하자면 기독교사상이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고 그 도시뿐만 아니라 제국전체의 주인노릇을 하게 된 것이었다. 따라서 갑바도기아 신학자들은 그 연원(淵源)과 내용에 있어서 기독교 교리는 이교철학과는 근본적으로 다르고 또 그것과 무관하다고 설파한 것이다. 말하자면 이들은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무슨 상관이냐(Quid Athenae Hierosolymis)?\'
) Tertullianus, De praescriptione haereticorum, VII,9 in: Corpus Christianorum, Series Latina Turnhout 1953ff. I, 193.
라고 외친 서방의 Tertullianus처럼 \'도대체 콘스탄티노플이 아테네 또는 알렉산드리아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주장하는 듯하다.
말하자면 그들은 기독교복음이 신플라톤주의 같은 이교철학과 무관하며, 교회가 플라톤의 아카데미와 무관하며, 또 그리스도는 피타고라스와 무관하며, 하나님은 제우스와 무관하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밖으로부터 온 거짓된 철학인 데 비해, 복음의 진리는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한 참된 철학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터툴리안 처럼 헬라철학을 사탄과 결부시키는 극단적인 입장으로는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다만 구약 전도서(傳道書)의 서두에서 솔로몬이 읊조리고, 신약에서 사도(使徒) 바울이 교훈 한 것처럼, 그것을 무익하고 헛된 것이라고 했다. Contra Eunomium에서 Gregory of Nyssa는 철학을 위시한 헬라학문 전체를 \' \'(헬라적 무익함)이라고 공박했다.
) Gregorius Nyssenus, Contra Eunomiun, III,2, 35 in: W. Jaeger, ibid. II, 63
하여튼 이 개념에는 무엇보다 먼저 기독교신학의 변증적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즉, 그 개념은 기독교의 진리됨을 역설하면서 동시에 고대헬라철학의 이교성(異敎性)과 이질성(異質性), 그리고 오류가능성을 암시하는 뜻을 담고 있다. 나아가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나 신플라톤주의 같은 헬라철학에 대한 비판만 아니라 모든 불순한 교리와 이단사설(異端邪說)에 대한 순수한 교리 내지 진리적 교의의 배격 내지 승리의 뜻이 담겨 있다. 여기에서 순수한 교리내지 교의적 진리는 성경적 근거를 지니면서도 그것은 동방정교와 그것의 공식적 신학사상을 뜻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여튼 \'밖에서 온 철학\'내지 \'거짓된 철학\'에는 고전철학과 이단사상이 함께 포함되어 있으므로 비잔틴신학자들의 문헌에는 \'철학적\'인 것과 \'이단적\'인 것은 종종 함께 또는 교오적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 예컨데, Gregorius Nyssenus, Homiliae in Cantica Canticorum,XIII, in: Jaeger, 6,376
이단의 그릇된 신앙과 교리는 바로 그릇된 철학적 사유의 성취요 결과이기 때문이다.
) Gregorius Nazianzenus, Orationes, 29,21, in: SC250,224 cf. J.Pelikan, Christianity and Classical Tradition, New Haven& London, 1993, 173.
이러한 사고가 현실적으로 잘 노정된 것이 바로 상기한 Italos사건이다.
또한, 그 양자를 동일한 \'철학\'의 차원에서 비교하는 것은 교부들로 하여금, 특히 갑바도기아 신학자들로 하여금 자연신학을 발전시키도록 유도한 점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기독교 진리를 철학과 비교하고 그것에 견주어 논리적으로 풀고 합리적으로 제시하기 위해서는 신앙의 유비(analogia fidei)못지 않게 존재의 유추(analogia entis)도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갑바도기아 교부들을 위시한 대부분의 비잔틴 기독교 사상가들이 계몽시대나 근·현대의 자연신학자들처럼 신학의 전 체계를 자연신학적 체계로 구성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은 지적되어야 한다.
Ⅳ. 비잔틴철학에서의 권위
중세 서방세계에서의 스콜라 사상은 신학 내지 철학에서의 어떤 권위(auctoritas)를 내세우곤 했다. 권위는 스콜라 신학에 있어서 사유(ratio)내지 변증법(dialectica)과 묵상(meditatio)내지 직관(institutio)과 더불어 신학의 중요한 방법론이었다. 이런 권위는 강의(lectio)에 뒤이어 온 세미나적 토론(disputatio)에서는 물론, 고전에 대한 해석과 교리채택 등에서 모든 논의의 종지부를 찍는 것이 되었다. 신학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우선은 외형상 성경(聖經)이 가장 권위 있는 것이었으나 그것의 해석에 있어서는 과거 공의회의 결정, 교부들의 해석, 교황청의 공식적 견해 등이 권위가 되었고, 개인적 권위로서는 특히 Augustinus와 Thomas Aquinas의 이론이 대표적인 것이었다. 천주교에서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권위가 그대로 통용되고 있다. 철학에 있어서는 대학이 설립된 중기 이후에는 Aristoteles이 대표적인 권위였고, 그에 대한 해석으로는 Avveroes가 권위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와 견주어 볼 때, 동방의 비잔틴 세계에서는 신학이나 철학에 있어서 서방보다 권위의 역할이 그다지 결정적이지 않음을 볼 수 있다. 비잔틴 철학계에서의 권위는 우선 그것의 초기 역사에서는 Platon과 Aristoteles를 꼽을 수 있다. 그리고 Pythagoras사상도 제3의 권위로서 종종 인용되고 인정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세 가지 권위는 대체적으로 보아 Proklos의 체계 같은 신플라톤주의라는 프리즘을 통해 해석되고 종합된 형태로 그 권위가 행사되었다.
이러한 예를 우리는 위에서 논의한 철학의 여섯가지 개념에 대한 David의 규정에서 잘 찾아볼 수 있다. David뿐 아니라 그 이전의 Elias, Ammonios, 그리고 Proklos에 이르는 후기 신플라톤주의 철학자들은 한결같이 이 세 사상가의 권위를 후대로 중개해 주고 있다.
후기고대에 있어서 이 세 철학자는 어떤 의미에서 \' \'였다고 볼 수 있다.
) cf. Damascus, Vita Isidorii, III,16-19 는 그의 스승 Isidoros가 옛 사람들의 모든 이론을 상세히 살핀 후에 그것들 가운데서 단지 두 철학자만, 즉 플라톤과 피타고라스만 신격화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플라톤이 \' υ \', 아리스토텔레스가 \' \', 그리고 피타고라스가 \'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와 함께 Plotinos는 \'dimitus Plato\'(반쪽 플라톤)이고, Proklos는 \' secondus Plato\' (제2의 플라톤) 이라는 서방의 평가와 유사하게 전자가 약간의 권위를, 후자는 그것보다 더한 권위를 지닌 것으로 인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비잔틴사상의 초기 역사에서 그것의 기독교적 철학은 무엇보다 다음과 같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이 그것의 진리와 일치하든지 아니면 근접한다고 생각하여 그들을 철학자들 가운데 권위에 두었던 것이다.
그들은 플라톤에게서는 무엇보다 현상계와 이데아계를 구분하는 이원론적 세계관, 세계를 창조한 창조주개념, 그리고 그의 신적 섭리론, 현상계가 영원한 이데아세계에 참여하고 있다는 분유( )이론, 인간이 신적인 영혼과 지상적인 육체로 지음 받았고 그 영혼은 불멸하며 지정의(知情意)로 되어 있다는 그의 인간관과 자유의지론, 그 가운데서 이성(理性)이 최고의 기능이 된다는 관점, 지혜, 용기, 절제, 정의라는 사추덕(四樞德)에 대한 이론, 덕의 통일성, 악의 통일성에 대한 이론, 종교적 삶에 대한 엄격한 율법적 요구, 내세에서의 심판 등을 찾는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그들은 세계가 부동의 원동자인 신을 지향하고 있다는 사상, 발전 내지 진보에 대한 이념, 실체, 양, 질, 관계 등과 같은 범주론(範疇論), 질료와 형상간의 구분, 육체의 entelechie로서의 영혼의 우위사상, 선과 악은 영혼의 경향과 습관(hexeis)에 놓인다는 관점, 그리고 도덕적 가치는 두 극단사이의 중용(中庸)이 된다는 이론 등을 본다. 이러한 양자의 철학사상은 알렉산드리아교부들에게서 시작하여 갑바도기아의 교부들을 거쳐 후기 고대와 중세시기에서의 전(全)비잔틴 사상에 영향을 준다.
) C. Cavarnos, Byzantine Thought and Art, 25ff.
그러나 역시 알렉산드리아에서부터 비롯되었지만 후기로 갈수록 어떤 다른 권위보다 더 강력한 권위를 행사했던 것이 Proklos사상을 위시한 신플라톤주의이다. 비잔틴 철학자들은 이 플라톤주의의 개정판(改訂版)이 지니고 있는 형이상학적 체계와 다양한 Triad에 큰 매력을 지니게 되었다. 특히 - - 같은 본체론적 Triad와 - - 같은 변증법적 Triad는 비잔틴의 기독교적 사상에 여러 가지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신플라톤주의적인 세계도피와 기독교적 금욕주의는 상호 유사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이미 알렉산드리아의 Ammonios학파에서 활발하게 주석되고 연구되던 Porphyrios의 Isagoge는 서방학계에서와 마찬가지로 비잔틴 사상계에서 줄곧 도입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신플라톤주의의 \'완결적 체계\'라고 볼 수 있는 Proklos의 사상은 비잔틴철학의 전역사를 통해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권위라고 할 수 있다. The Elements of Theology
) Proclus, The Elements of Theology, ed, trans. and introd, by E.R.Dodds, 2rd Oxford 1963
와 Theologia Platonica등의 저서들에서 전개한 그의 체계는 한편으로는 Plotinos-Porphyrios-Iamblichos등으로 내려온 Triad를 매우 정교하면서도 심도 있게 개발한 변증법적 및 존재론적 구도를 보여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Oracula Chaldaica에서 취한 주술적이고 신비주의적인 내용을 보이고 있다. 이 Proklos의 사상은 무엇보다 Ps.-Dionysios의 저작들을 통하여 비잔틴세계에서의 부정신학의 발전에 결정적인 토대를 제공하였고, 또 금욕과 수도를 통한 영혼의 상승으로 신에게의 근접과 합일을 내세운 비잔틴의 수도신학(修道神學)수립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특히 세 가지 신적 Triad인 - - 에 대한 Proklos 등의 사상은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이 나오게 된 배경은 되지 않았지만, \' \' 등의 용어는 신플라톤주의적 기원에서 빌린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 cf. Proclus, op.cit. Prop.26, 30, 34, 35
하지만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가 공히 영원하고(coeternal) 공히 실체적(cosubstantial)이라는 관점은 신플라톤주의 사상과 유사하다고 하더라도 이 삼위 하나님이 공히 동등하다는(coequal) 진리는 오로지 성경에서 비롯된 것이다. 신플라톤주의에 따르면 최상의 실체인 일자(一者) 그 자체는 그것에서 유출된 이성이나 영혼과 공히 실체적이고 공히 영원하지만 그러나 그것들보다 분명 더 우위에 있다.
) ibid. Props. 7, 18, 20, 24, 34, 36ff.
이런 점에서 기독교의 삼위일체론과 신플라톤주의의 Traid는 근본적으로 다르며 후자는 정통기독교보다 이단인 아리안주의(Arianism)가 도입한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비잔틴의 기독교 철학이 갖는 신학적 권위는 서방의 스콜라 철학에서보다는 훨씬 미약하지만, 굳이 거론하자면 Maximos the Confessor와 Johannes Damaskos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우리는 그 이전 시대의 갑바도기아의 세 교부들과 알렉산드리아의 Origenes와 Clement를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갑바도기아의 교부들 가운데 특히 Gregory Nazianzen은 비잔틴세계에서 \' \' 라고 불리었다. 물론 그 칭호에는 권위적 특성이 전혀 부여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비잔틴세계에서 서구에 있어서 Augustinus나 Thomas Aquinas에게 붙인 동일한 명칭과는 같은 류의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권위적인 명칭이라기보다 칭송적인 명칭이라고 할 수 있는 데, 비잔틴의 후학들이 그런 명칭을 붙이게 된 것은 Nazianzen이 무엇보다 기독교의 가장 난해한 교리인 삼위일체(三位一體)론을 명쾌하게 설명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 cf. Arthur J. Mason(ed.), The Five Theological Orations of Gregory of Nazianzus, Cambridge 1899, pp.xv-xvi.
비잔틴 세계에서는 Nazianzen외에 다른 두 명의 신학자들에게도 이 칭호를 사용했는데, 하나는 사도(使徒) 요한이요, 다른 하나는 Symeon이었다. 그것은 전자가 아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로고스(Logos)에 대해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고, 후자가 하나님에 대해서, 그리고 그와의 신비적인 연합의 단계와 조건들에서 고상한 시로 집필하였기 때문에 그런 칭호를 붙인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여튼 비잔틴 세계에서 교리적으로, 사상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주고 일종의 신학적 권위로 존숭된 이들은 Maximos와 Damaskos라 할 수 있다. Maximos(580-662 A.D.)에게 \'the Confessor\'라는 칭호를 붙이게 된 것은 그가 단성론자(單性論者)들과 싸우면서 정통 신앙을 끝까지 고수하고 고백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의 사상도 독창적인 것은 아니라 할 수 있다. 그는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는 데, 특히 Pseudo-Dionysios의 사상을 가장 초기에 가장 열렬히 추종한 이들 중에 한 명이었다. Ps.-Dionysios의 저작들에 대한 그의 주석들은 비잔틴 세계에서는 신플라톤주의 사상을 동방정교에 중개해 주었고, 서방에서는 Corpus Dionysiacum을 라틴어로 번역한 John Scotus Eriugena 등에 의해 활용되었다.
) Pseudo-Dionysios사상과 후대의 기독교신학의 관계에 대해서는 J.Stiglmayr, Das Aufkommen der pseudo-dionysischen Schriften und ihr Eindringen in die christliche Literatur bis zum Laterankonzil 649, Feldkirch 1895, Maximos 와 Eriugena의 사상적 연관성에 대해서는 J. Draeseke, Maximos und Johannes Scotus Eriugena, in: Theologische Studien und Kritiken 1911, SS.20-60, 204-29를 참고하라.
이 Maximos의 사상은 Michael Psellos나 Gregory Palamas같은 후대의 비잔틴 신학자들의 저작에서 중요한 권위로 인정되고 많이 인용된다.
) cf. Michael Psellus, Theologia Vol.I, ed. P. Gautier, Leipzig 1989; Gregory Palamas, The Triads, ed. with introd. by J.Meyendorff, Mahwah/N.J. 1983
Johannes Damaskos(675-750A.D.)는 무엇보다 주저인 (지식의 샘)를 통하여 비잔틴의 철학과 기독교리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철학 및 신학의 체계적 서술서인 이 저서의 앞부분은 Philosophische Kapitel ( )인데, 이것은 Aristoteles의 논리학과 형이상학에 정초하고, Porphyrios와 Ammonios Hermeiou, 그리고 David의 철학에의 정의와 구분 등을 빌려 학문의 입문격으로서의 논리학과 철학의 문제를 간명하면서도 심도 있게 다루었다. 그리고 후반부를 차지하는 De Fide Orthodoxa는 이슬람과 성상파괴론자들을 비판하고, 하나님, 창조, 성육신과 기독론 등과 관련한 동방정교의 신조를 설명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 이 뒷편의 교리부분은 주로 Theodoret of Cyrrhus의 사상에 근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저서는 비잔틴에서의 철학의 표준서로서는 물론 교리의 표준서로서도 권위를 가지게 되었다. Damaskos는 그밖에도 Nestorian, Jacobian, Manichean 등의 이단들을 공박하는 비판서들을 썼고 동방정교에서의 성상이론의 기초를 놓았다. 그런데 Maximos와 Damaskos는 이러한 신학적 및 철학적 작업에서 갑바도기아 교부들의 문헌들에 많이 의거하고 있으며, 또 Ps.-Dionysios등 신플라톤주의 철학자들의 사상 내지 글들을 직·간접적으로 폭넓게 인용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들의 저작들을 통하여 그 이전의 교부들이나 이교철학자들이 비잔틴 사상사에서 배후적 권위로 역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덧붙여서 우리는 비잔틴 제국에서의 금욕적 및 수도적 사상에서는 John Klimacos의 Scala Paradisi가 가장 넓게 읽혀지면서 가장 큰 영향을 주었음을 볼 수 있다. 수도승들은 물론 평신도들 사이에서도 넓게 읽힌 이 수도적 삶의 교과서는 Syriac, Armenian, Arabic, Georgian, Old Slavonic, 그리고 라틴어 등 다양한 언어로 번역되면서 그 영향권을 비잔틴권 밖으로도 확대시켜갔다. 그 저서는 비잔틴수도원에 있어서의 \'그 책\'이라 할 수 있다.
) Patrologia Graeca 88, trans. by C.Luibhuid & N.Russell, New York 1982, Climacus의 Scala Paradisi가 수도적 삶에서 애독되고 권위를 행사했다는 것은 그것에 관한 옛 그림과 삽화에서 잘 드러난다. cf. John R. Martin, The Illustration of The Heavenly Ladder, Princeton 1954
Paris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는 중세비잔틴의 한 Codex에는 John Klimacos가 Johannes Damaskos 및 Maximos the Confessor와 더불어 권위 있는 초상의 모습으로 나타나 있다. Codex의 제일 위에는 Klimacos가 나오고 그 밑으로 Damaskos, 그리고 제일 밑에는 Maximos the Confessor가 나타나 있다. 그것은 아마 다른 두 신학자들에 비해서 Klimacos가 더 권위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 Paris, Bibl.Nat.Cod. gr.923. Fol.146r, in: The Illustration of The Heavenly Ladder of John Climachus, by John R. Martin, Princeton 1954, CXI, Illust.298.
V. 비잔틴철학의 형성에 대한 신플라톤주의의 역할과 영향
고대사상의 황혼기에 이르러 Stoa학파나 또 Epikuros학파, 또 견유학파(Kynismus)나 회의주의학파, 그리고 피타고라스주의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옛 체계\'(the old systems)들은 사상계에서 별 의미가 없어지고, 대부분 고사(枯死)되어갔다. 고대의 체계들 가운데 우리는 단지 플라톤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주의만 이 전환기의 위기를 극복하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래도 후기고대와 중세의 전 기간을 통하여 생존했음을 본다
) cf. O.Mazal, op.cit. 308
. 그리고 그것은 서방에서뿐만 아니라 동방의 비잔틴과 이슬람세계에서도 중요한 영향력을 줄곧 행사해 왔으며, 그 영역을 아르메니아나 조지아 등 동방으로 더욱 확장시켜갔던 것이다. 그런데 외형적으로는 \'플라톤주의\'의 옷을 걸쳐 입었으면서도 이 양자의 요소를 수렴하여 후기 고대에 있어 고대 사상의 마지막 창조적 체계를 산출한 것이 신플라톤주의이다. 이것은 이 두 사상에 피타고라스적 요소와 갈대아신탁(oracula chaldaica)의 이념 등을 혼합한 체계로서 이 두 체계의 영역을 비집고 독자적인 영향권을 확장해 갔던 것이다. 이 신플라톤주의는 고대의 말기에 신흥적인 기독교에 대항한 고대 이교사상의 마지막 보루라고 할 수 있다.
후기 고대와 중세에 있어서 기독교와 신플라톤주의의 관계는 동서를 막론하고 굴곡이 심하고 복잡하다. 물론 엄밀히 말한다면 서방세계에서의 그 관계가 심각한 갈등과 반목이 없이 내려온 반면, 동방의 비잔틴 세계에서는 양자가 내적 조화와 외적대립이 되풀이되어 이어져왔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관계 속에서도 동서양진영에서 기독교가 교권적 및 사상적 주도권을 장악하고 주체가 되어 객체화된 신플라톤주의를 수용했든지 아니면 배격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후기고대에 있어서 알렉산드리아 학파가 등장하기 이전의 신플라톤주의는 Plotinos에서 Porphyrios를 거쳐 Proklos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기독교를 강하게 비판하고 반(反)기독교적 태도를 유지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학파에서는 비기독교인들은 물론 기독교인들도 학생으로 참여했다. 따라서 David의 Prolegomena Philosophiae등에서 잘 보여지는 대로 철학교육의 내용도 적어도 그 기초는 어느 한곳으로 편향되지 않고 중립적인 견지를 지향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학파의 수장(首長)의 자리도 Olympiodoros 이후에는 기독교인들에게 넘어간 것으로 보인다. 명확하게 증명되지는 않지만 Olympiodoros를 계승한 Elias, David, Stephanus등은 그 이름이 기독교인임을 암시해주고 있다.
비잔틴 사상사에서의 신플라톤주의는 다음과 같은 세 갈래로 내려가면서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는 Ammonios Sakkas/ Plotinos에서 Origenes을 거쳐 갑바도기아 교부들에게 영향을 준 줄기이다. 두 번째는 Proklos에서 시작해서 Ps.-Dionysios를 통하여 Maximos나 Synesius of Kyrene, Symeon과 Gregory Palamas, 그리고 Psellos와 Italos, Eustratius, Nicholaus Kabasilas 등에게 영향을 준 줄기이다. 세 번째는 Porphyrios에게서 시작하고 알렉산드리아학파를 거치면서 Aristoteles사상이 가미된 모습으로 Johannes Damaskos과 Leontius of Constantinople과 George Pachymeres 등의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준 줄기이다. 이 세 가지의 갈래 가운데 뒤의 두 가지는 상호간에 혼합되어 계승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신플라톤주의 첫 번째 열매에 해당하는 Gregory Nazianzen, Basil, Gregory Nyssa등 갑바도기아 교부들은 알렉산드리아의 Origenes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고 있는데, 이 후자는 Plotinus의 동료로서 함께 Ammonios Sakkas에게서 배운 동문(同門)이었다. 따라서 Origenes에게 있던 신플라톤주의적인 요소는 간접적으로 갑바도기아 교부들에게 영향을 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물론 Origenes의 사상은 당대의 신플라톤주의 외에 플라톤 사상자체와 또 중기-플라톤주의(Middle-Platonism)와도 밀접한 관계에 서 있다. Basil의 저작들 가운데 주저중 하나인「성령론」과 특히 그의 후기 저서들은 Plotinos에게 상당한 영향을 받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인간의 본성에 대해 쓴 Nemesius도 그의 저서 첫 장에서 Plotinos의 인간관을 비판하는 것을 보아서 이 초기 신플라톤주의 사상을 잘 알고 있는 듯 하다.
신플라톤주의의 두 번째 갈래는 Proklos에게서 시작하는 데, 이 줄기는 중세 서방세계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줄곧 그 정체(正體)가 오해된 가운데서 은밀한 중에, 그러나 매우 강력하게 영향을 준다. 그의 여러 저작들 가운데 후대에 강력한 영향을 준 것들로는 Elementatio Theologiae와 Theologia Platonica를 거론할 수 있는데, 특히 후자는 Pseudo-Dionysios Areopagita에게 직접적으로 연결되며 Corpus Dionysiacum에 대한 주석을 통해 비잔틴 세계는 물론 라틴 중세에도 큰 영향을 주고 있다. 아레오바고에서 회심한 사도 바울의 제자로 위장한(사도행전 17:34) Pseudo-Dionysios는 De Divinitate Nomina, De Mystica Theologia, De Hierarchia Celesti, De Hierarchia Ecclesiae 등의 저서를 남겼는데, 이 저서들은 바울의 제자라는 그 저자의 명성과 교회적이고 신비적인 그 내용으로 인해서 비잔틴사상계에 큰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비록 532년 Hypatius of Ephesus가 그 저서들의 저자적 신빙성에 의문을 표했지만 Johannes Scythopolis의 주석은 물론 Maximos가 쓴 Ambigua도 그 저작의 권위를 변호하였다. 따라서 그 후 줄곧 이 Ps.-Dionysios의 저작들은 비잔틴세계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후대에 증명된 바로는 그의 상기한 저작의 일부분은 Proklos가 쓴 Elements of Theology에서 그대로 발췌한 것이었고 또 여러 요소들이 그로부터 빌린 것임이 입증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Ps.-Dionysios의 글들은 비잔틴 사상계에 Prokos적인 신플라톤주의를 별다른 반대 없이 나르게 되었던 것이고, 기독교 사상가들도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그것들을 수용했던 것이다. 이 두 번째 갈래는 비잔틴 사상에 무엇보다 부정신학(theologia negativa)을 형성시켰고, 신비주의 사상을 수립하게 하여 그것으로 중세의 전 기간을 통하여 전승되게 하였던 것이다.
세 번째 갈래는 신플라톤주의는 물론 고대 헬라철학 전체의 마지막 단계라고 할 수 있는 알렉산드리아학파에 의해 정초된 것으로서 이것은 Ammonios와 Olympiodoros이후 특히 Elias, David, Stephanos 등에 의해 발전되었다. 이 형태의 신플라톤주의는 무엇보다 Aristoteles저작들을 주석하고 깊이 연구하여 그의 이론들을 Porphyrios나 Proklos같은 전통적인 신플라톤주의 사상과 접목시킨 비교적 절충주의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여기에서 비롯된 철학의 정의 내지 구분 등 갖가지 백과사전적인 내용들과 학문적인 개념들은 Johannes Damaskos등을 위시한 비잔틴사상가들을 통하여 그대로 내려온다. 비잔틴 사상가들은 이 알렉산드리아학파에서 빌린 철학의 정의나 개념들을 사용하여 기본적인 기독교교리의 표현은 물론 수도적 삶의 원리와 실제들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일례로서 철학에 대한 David의 여섯 가지 정의가운데, Damaskos는 \'지혜에의 사랑\'을 가지고 \'참 지혜인 하나님에의 사랑이 참된 철학\'이라는 결론을 이끌어 내었고, Klimacos도 천상(天上)에 이르는 서른가지 사다리가운데 여섯 번째 사다리인 \' \'는 David의 \'죽음에의 연습\'에서 빌린 것으로 보이고, 그리고 마지막단계인 서른 번째 사다리에서는 \'믿음, 소망, 사랑\'을 통해 \'신에게의 동화(同化)\'를 논의한다.
이 신플라톤주의 사상은 중세 후기에 이르기까지 줄곧 영향을 주는 데, 때로는 Pachymeres에게 같은 이들에게서 보이듯이 아리스토텔레스 사상과 결합된 형태를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Metochites 같은 사상가들에게서 보이듯이 그것과 대립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Metochites의 제자인 Nikeporos Gregoras는 Synesios의 On Dreams에 대한 주석 등을 통하여 신플라톤주의사상을 Psellos등에게 전해주기도 한다.
Ⅵ. 비잔틴철학에서의 플라톤주의의 전통
서양사상사에 있어서의 플라톤의 중요성과 비중은 그간 Emerson이나 Whitehead 같은 근·현대의 학자들에 의해 충분히 인정되어 왔다. Ralph Waldo Emerson은 그의 에세이 \'The Representative Philosopher: Plato\' 에서 \'사유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늘상 쓰여지고 논의되어져 온 모든 것은 플라톤에게서 나왔다... 플라톤은 철학이요, 철학은 플라톤이다. 바로 여기에 인류의 영광과 수치가 있다\'
) Ralph Waldo Emerson, Representative Men, Boston 1881, 43-4
라고 했다. 그리고 Whitehead도 \'유럽철학적 전통에 대한 가장 안전한 일반적 특징화는 그것이 플라톤에 대한 일련의 각주(脚註)로 되어 있다는 것\'
) Alfred North Whitehead, Process and Reality, New York 1929, 63
이라고 말했다. 플라톤의 중요성에 대한 이들의 과찬이 조금 지나친 감은 없지 않다고 할지라도 이들의 견해는 상당히 일리가 있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에서 문제시 하고자 하는 것은 Whitehead같은 경우에 플라톤이 지니는 의미를 유럽에만 국한시켰다는 점이다. 사실 플라톤의 비중은 동방지역, 즉 비잔틴 지역에서도 결코 서방보다 약하지가 않다. 우리가 플라톤이 헬라인이고 따라서 타지에서보다 그 본토인 헬라에서는 어떠했는지를 감안하면 말이다.
) cf. Constantine Cavarnos, The Hellenic-Christian Philosophical Tradition, Belmont 1989, 11ff.
주후 529년 Justinian I 가 아테네에 있는 플라톤의 아카데미를 폐쇄시킨 이후에도 플라톤의 사상은 비잔틴 세계에 줄곧 이어져 내려왔다. 비잔틴사상사에서는 헬라철학사상전반이 그러하지만 특히 플라톤주의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줄곧 부침(浮沈)을 거듭했다.
누구보다 알렉산드리아학파의 클레멘트와 오리게네스에게 나타난 신학적 플라톤주의는 그 후 Basil, Gregory of Nyssa, Gregory of Nazianzus등 갑바도기아의 신학자들에게 계승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특히 Gregory of Nyssa는 학자들에 의해 종종 \'기독교 플라톤주의자\'라고 불리워졌다. 이들 모두에게 있어서 육체의 속됨과 부정함, 육체로부터의 영혼의 탈피에 대한 이상, 신적인 은혜보다 금욕적인 자기수양과 영혼상승을 통한 구원 등은 성경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기보다 플라톤주의의 한결같은 전승에 해당한다. 또한 그 이후 후기고대비잔틴에서의 대표적인 신학자들인 Maximos Homologetes ( ∼662)와 Johannes Damaskos( ∼750)에게서 우리는 David를 비롯한 알렉산드리아 철학자들의 영향 뿐 아니라 플라톤과 같은 고대 헬라사상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물론 여전히 존속되어온 철학입문 수업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뿐 아니라 플라톤의 철학도 간헐적으로 소개되어 온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다가 9-10세기의 마케도냐 르네상스시대(makedonische Renaissance)에 이르러 고대 저자들에 대한 연구가 다시금 불붙게 되었다. 이미 9세기초 Leon Philosophos는 Platon을 알고 설명했으며, Photios의 Bibliotheca도 플라톤을 위시한 많은 고전철학자들에 대한 유익한 정보들을 제공하고 있다. 포티우스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관심도 많이 있었지만, 플라톤을 더욱 존경한 것처럼 보이며, 그를 \'ho megas Platon\'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 Photiou tou Patriarchou, Lexeon Synagoge, ed. Richardus Porsonus, London 1922, Vol.1, 142
Arethas von Kaisareia도 플라톤의 텍스트들을 보존·전수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하였는데 그는 전반적인 고전연구 부흥을 주도하였다.
9세기 이후 비잔틴에서는 플라톤에 대한 연구가 중단 없이 지속되었다. 그 결과로서 11세기에는 Michael Psellos와 같은 중요한 플라톤 학자가 등장할 수 있었으며, 그는 플라톤주의적 요소를 정교신학에 도입하여 그것과 통합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특히 Proklos를 위시한 신플라톤주의자들에 대한 큰 관심과 연구는 자연히 중세 비잔틴에서의 플라톤주의의 전통을 흥왕시키게 되었다.
비록 주로 신플라톤주의자들을 통하여 알았더라도 Psellos는 플라톤의 대화록들을 직접적으로 알고 있었고, 또 이따금씩 \' \'이라고 부르는 등 플라톤주의에 대한 자신의 친밀감을 표명하기도 하였다. 하여튼 Psellos는 플라톤의 사상에 대한 큰 존경심을 가지고 부분적으로는 그의 철학을 정교사상에 융합하는 시도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융합의 시도는 Johannes Mauropus의 유명한 시(詩)에도 잘 드러나는데 그는 여기에서 기독교 도덕에 근접해 있는 철학자들인 플라톤과 Plutarch를 은혜로운 재판관이 되도록 그리스도에게 간구하고 있다.
) Gedicht Nr. 43 edd. Bollig-De Lagarde, Herbert Hunger, Die hochsprachliche profane Literatur der Byzantiner, Munchen 20f.
Psellos 의 제자인 Johannes Italos도 자기 시대에서의 신플라톤주의와 플라톤주의를 대표하는 사상가였다. 하지만 신플라톤주의와 같은 이교철학을 지나치게 신봉하고 그것을 가르친다는 이유로 Italos에 대한 재판이 일어난 이래 12세기에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가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후 Palaiologen시대에 이르러 철학전반의 부흥이 일어나면서 플라톤주의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다시금 활발하게 일어나게 되었다. 후기비잔틴 플라톤주의의 대표자들은 Theodoros Metochites( ∼1332) 와 Nikephoros Chumnos( ∼1327)라 할 수 있는데, Chumnos는 플라톤 사상의 특색중 하나인 이데아론을 배격하였다. 그 후 14세기에 이르러 인문주의자들과 Hesychasten 및 Palamiten간의 논쟁의 분위기는 플라톤주의를 다시금 위축되게 하였으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이미 라고 있던 서구학문을 도입하려던 시도는 좌초되게 되었다. 그러다가 비잔틴제국의 말기에 이르러 Georgios Gemisthos Plethon ( ∼1452)은 이교철학의 회복을 다시금 불러일으키게 되었고, 아탈리아 인문주의자들과의 그의 접촉은 플라톤주의의 르네상스를 야기하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그로 인해 1462년 Florenz에 플라톤의 아카데미가 복원되게 되었다. Plethon의 제자인 추기경 Bessarion은 플라톤주의 부흥에 큰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Plethon의 사상은 플라톤주의에 Plotin과 Proklos의 신플라톤주의를 혼합한 것이었으므로 그의 사상은 신비주의로 흐르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신비주의는 비잔틴의 몰락이후에도 서방세계에서 꽃을 피워 스콜라주의적인 합리주의를 대치(代置)했으며, 근세의 낭만주의(浪漫主義)에 이르기까지 줄곧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음을 볼 수 있다. 비잔틴의 전 사상사를 걸쳐 플라톤주의는 한편으로는 직접적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platonici\'였던 신플라톤주의자들의 저작들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면면히 내려왔다. 그러나 학자들은 플라톤주의를 설명하는 다양한 개념들과 사상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였고, 그것들을 영성화 하였다. 말하자면 플라톤주의는 \'비잔틴화(化)\'되어갔던 것이다.
플라톤의 사상가운데 비잔틴 학자들에 의해 가장 많이 도입되었던 것은 아무래도 kosmos noetos와 kosmos aisthetos같은 이원론적 세계관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4세기에서 15세기까지의 교부들의 저작들을 포함하고 있는 Philokalia를 보면 당장 알 수 있다. 여기에 나오는 Antonius, Markus, Hesychios of Jerusalem, Johannes Damaskos, Symeon the New Theologian, 그리고 Gregory Palamas 에게 돌려지는 글들에는 이 플라톤적 개념이 사용되고 있음이 드러난다. 특히 Symeon은 플라톤의 이데아인 eide(형상)를 하나님의 마음에 있는 존재라고 불렀고, 3세기 뒤에 등장한 Gregory Palamas도 같은 견해를 표방했던 것이다.
또한 비잔틴 사상가들이 플라톤의 인간론 및 심리론에서 가장 흔하게 도입하는 사상은 영혼의 삼분설이다. Gregory of Nyssa, Athanasios the Great, Hesychios, Neilos, Maximos the Confessor, Thalassios, Johannes Damaskos, Symeon the New Theologian, Gregory the Sinaite, Gregory Palamas, Nikodemos the Hagiorite 등은 플라톤과 함께 인간의 영혼을 logistikon, thumoeides, epithumetikon으로 삼대분하면서 이성이 지혜에 의해 나머지 두 부분을 다스려야한다는 데에 공감한다. 이때 플라톤이 말한 지혜는 인간의 지혜요, 인간이성의 실행을 통하여 획득되어지는 지혜이다. 그러나 비잔틴의 기독교사상가들은 이성이 다스리는 역할은 하지만, 그것은 무엇보다 먼저 높은 지혜인 하나님의 계시된 율법과의 조화를 이루며 실행되어져야 한다고 보았다.
아울러 그들은 플라톤이 거의 언급하지 않은 이성의 두 가지 기능을 강조하고 있는데, 그것은 곧 내적 성찰과 기도이다. 비잔틴 사상가들에게 있어서 이 두 가지는 수도적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실천이 되었다. 하지만 이것들의 뿌리도 전적으로 기독교적이라 할 수 없고, 신플라톤주의적인 이념과 직결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기개적인 측면을 두고서도 그들은 플라톤과 달리 그것은 욕망을 통제시키는 과제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울의 가르침과 같이
) 에베소서 6장 12절
악한 영을 대적하는 과제를 부여받은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가장 낮은 부분에 해당하는 욕망에 대해서도 그것은 이성과 기개에 의해 제어될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도록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비잔틴학자들은 플라톤 윤리의 사추덕(四樞德)인 지혜, 용기, 절제, 정의를 말하면서도, 그것들은 모두 믿음, 소망, 사랑과 같은 고차원적인 기독교적 덕목의 전제조건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Symeon에게 있어서 \'믿음, 소망, 사랑\'은 세 가지 pneumatikai aretai이고, Klimakos에게 있어서는 이것들은 천국으로 가는 계단의 마지막 단계에 오는 것이다. 그들은 플라톤처럼 무지는 악으로 보고, 지혜는 선으로 간주하였으나, 이 지혜에 \'위로부터\'오는 신적인 지혜를 포함시킨다. 그리고 이들은 참지혜를 신앙과, 무지를 불신앙과 결부시키기도 한다.
이와 함께, 덕을 보는 심미론적 방식과 미에 대한 강조도 플라톤에게서 보인다. 우리는 이미 Johann Chrysostom에게서 \'영혼의 미(kallos)\'라는 표현을 발견하고
) PG, Vol.52,3, PartII, col.413
Klimakos에게서나, Photios
) PG,Vol.101, cols.337D, 392C, 1093C emd
와 Symeon에게서도 찾는다. 그리고 후기 비잔틴학자들인 Nikephoros Theotokis, St.Nikodemos the Hagiorite, St.Nectarios of Aegina등에게서 덕목들을 미(美)의 형태들로 보는 관점을 발견한다.
하지만 비잔틴의 기독교사상가들은 플라톤이 지니고 있던 재생과 윤회설, 인간을 영혼으로 보는 관점 등은 철저히 배격하고자 했다. 그 밖의 그의 사상은 거의 대부분 그대로 전수하면서도 그것들 대다수를 기독교적으로 재해석했든지 아니면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플라톤의 \'기독교화\' 옆에 플라톤의 \'신플라톤주의화\'가 놓여진다.
Ⅶ. 비잔틴 철학에서의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의 전통
플라톤에 대해서 동서방은 비교적 일치하는 관점을 지니고 있는데 비하여,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서는 동과 서가 관점도 다르고 또 그것을 다루어 온 역사도 달랐다. 라틴 서방에서는 4세기까지는 그래도 아리스토텔레스가 관심과 연구의 대상이 되었었지만,
) 어거스틴의 고백록( De Confessione )은 그가 20세에(374년경) 그때 당시 \'Predicamenta\' 라고 불린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을 읽었다고 보고한다.
그 이후부터 아랍어으로 된 그의 작품들이 라틴어로 번역되던 13세기까지는 \'감춰진\' 세월을 보내었다.
그에 비해 헬라 동방은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전혀 다른 역사를 지닌다. Theophrastos 죽음 이 후 2세기 동안을 예외로 한다면 그의 철학에 대한 관심과 연구는 중단 없이 오늘에까지 이른다. 그리고 동방에서는 서방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아리스토텔레스를 무오한 \'그 철학자\'로 보는 것이나, 아니면 그의 모든 교리를 다 틀리다고 몰아붙이는 극단적인 주장에 빠지지 않고, 온건하고 중간적인 입장을 견지한다.
) Constantine Cavarnos, The Hellenic-Christian Philosophical Tradition, 38
말하자면 동방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중세 서방에서처럼 절대적인 권위의 자리에 있지를 못했던 것이다. 이곳에서 그는 그저 Pythagoras, Heracleitos, Socrates, 그리고 Platon과 같이 한명의 위대한 철학자에 불과했고, 따라서 그저 \'현명한 아리스토텔레스\', 또는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등으로 불리어졌던 것이다.
비잔틴 학자들은 서방에서처럼 그를 플라톤 사상의 적대자로 간주하지 않았고, 또 그를 빌려 플라톤을 비판하고자 하지도 아니했다. 다만 그를 플라톤이 빠졌던 오류에 빠지지 않은 철학자로 보았고, 때로는 그에게서 유익한 것도 취하고, 때로는 그의 사상을 전면적으로 배격하기도 하였다.
플라톤주의와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주의도 비잔틴 사상계에서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신플라톤주의자들 가운데, Proklos가 후대의 사상사에 Platon철학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면, Porphyrios는 Aristoteles 학문을 전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De Categoriae를 해석한 그의 Isagoge는 동서방에 걸쳐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으로 하여금 철학수업과 연구의 초석을 형성하도록 하였다. 서방세계는 Isagoge에 대한 Boethius의 라틴어 번역을 도입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Organon을 학문 연구의 입문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동방의 비잔틴에서는 이미 알렉산드리아의 신플라톤주의학파에 속한 Ammonios
) 현재까지 알려진 문헌에서 볼 때는, Ammonios 의 주석이 가장 오래된 Isagoge 주석으로 알려져 있다. Ammonios in Porphyrii Isagogen sive V voces ed. Ad. Busse, Berlin 1891
, Elias, David 등이 Isagoge 에 대한 주석을 남겨 후대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을 잘 소개하였고,
) Porphyrios 의 Isagoge에 대한 신플라톤주의자들의 주석에 대해서는 Adolf Busse, Die neuplatonischen Ausleger der Isagoge des Porphyrius, Berlin 1892 을 참고하라.
그들을 이어서 Theodoros Prodromos와 Johannes Tzetzes같은 이들도 동일한 저작에 대한 주석을 남겼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에 대한 주석은 그것을 소개한 이 포피리우스의 저작에 대한 것 보다 훨씬 더 다양함을 볼 수 있다.
후기고대와 비잔틴의 사상사를 통해서 그의 논리학에 대해 주석을 남긴 학자들을 거론하면 Syrianos, Asklepios, Ammonios, Simplikios, Johannes Philoponos, Themistios, Olympiodoros, Elias, David, Stephanos, Sophonias 등을 들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포피리우스의 논리적 저작들에 대한 주석적 작업과 연구는 당시의 체계화된 철학수업의 방법론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서론적인 도입, 강독, 주해, 그리고 문제점 제기와 답변 찾기와 같은 방법론적인 절차를 보여준다. 이런 과정을 통해 엄밀한 개념의 사용, 치밀한 논리전개와 사유훈련이 수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 Otto Mazal, Byzanz und das Abendland, Graz 1981,309
그리고 이런 것들은 고전철학에 대한 연구와 같은 일반 학문에 있어서만 아니라 이미 Johannes Philoponos 에게서 보여지듯이 기독교신학의 연구에서도 도입되었다. 그것이 서방의 스콜라 철학에서 dialectica같은 사변적인 방법론을 파생시켰듯이 비잔틴 세계의 신학적 작업에서도 엄밀한 연구의 기초를 형성하였던 것이다. 물론 역사적 전개과정을 보면, 중세초기에 비잔틴 세계를 거쳐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과 주해서들이 아랍지역으로 건너가서 그곳의 철학을 융성시키다가 다시금 12∼3세기 중세서방세계로 넘어가 Corpus Aristotelicum의 찬란한 르네상스 시대를 개막시키게 된다.
하지만 이보다 앞서 비잔틴 사상계는 중세에 접어들면서 교회적 필요나 신학적 요청이 없이 비교적 자율적인 철학연구가 활발히 일어나 아리스토텔레스사상도 흥왕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 시대에 있어서의 괄목할만한 학자들의 경우를 볼 수 있는데, 먼저 Photios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고, Arethas도 플라톤 못지 않게 아리스토텔레스를 잘 알고 있었다. 9세기에 이르러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전집이 비잔틴학계에 등장하게 되었다. 또한 Psellos는 그의 제자 Italos와 함께 철학적으로는 플라톤과 Proklos에게 경도되어 있었지만 그래도 Corpus Aristotelicum을 익히 알고 활용하고 있었다. 비잔틴 사상계에서의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의 전성기는 12세기라고 할 수 있는데, 누구보다 Eustratios von Nikaia와 Michael von Ephesos에게서부터 일어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비잔틴학계에서 많이 애독된 13세기 Nikephoros Blemmydes의 논리학과 물리학교과서는 아리스토텔레스 체계에 기초한 것이었다.
Palaiologen시대에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비슷한 정도로 애용되었는데, 당시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을 대표한 사상가는 Georgios Pachymeres라 할 수 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편람(compendium)을 발간하였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paraphrases가 여러 학자들에 의해 많이 발간되었는 데, 이들 가운데는 13세기 후반의 Sophonias, 14세기의 Leo Magentenos, 그리고 Theodore Metochites를 꼽을 수가 있다. 하지만 이 Metochites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보다 플라톤과 신플라톤주의 사상을 더 따르면서 물리학의 불확실성은 물론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의 문제점들을 지적하면서 그것을 변호하는 Nikephoros Choumnos와 학문적인 논쟁을 벌렸다. 반면에 Choumnos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에서 신플라톤주의 심리학의 정통성을 공격하였다. Georgios Metochites도 여러 가지 아리스토텔레스 저작들을 주해하였고 그 외에도 우리는 많은 아리스토텔레스 주석가들을 찾을 수가 있다. 그밖에 학자들 가운데에서도 Georgios Scholarios(총대주교 Gennadios II)같은 이는 많은 아리스토텔레스 저작들을 손수 필사하여 후대에까지 남기고 있다.
르네상스시대에는 플라톤주의자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간에 논쟁이 재연되었는데, 그들가운데 대표적인 이들은 GennadiosII를 위시하여 Georgios Plethon, Theodoros Gazes, Bessarion, Michael Apostolios, Georgios Trapezuntios 등이 있다.
이러한 비잔틴의 사상사는 전체적으로 보아 아리스토텔레스를 선별적으로 수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서 배격하고자 했던 것은 세계의 비피조성과 영원성, 그리고 하나님은 창조주가 아니며 섭리를 행사하지 못한다는 것 등이었다.
그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가장 비판한 것은 초기 Philoponos에게서 잘 보여지는 것처럼 물질세계는 시작이 없고, 창조되지 아니하였으며, 그리고 영원하다는 그의 가르침이다. 비잔틴의 기독교 사상가들은 물질이란 하나님과 같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무로부터 창조되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들이 그의 사상에서 유익한 것으로 취한 것은 형상과 질료간의 구분, 하나님에 대한 관념, 열 가지 범주, 그리고 도덕적 우월성 내지 덕에 대한 이론 등이다. 후대 동방이나 서방의 학자들이 이 철학자에게 빚진 것은 무엇보다 다양한 학문적 개념들이다.
비잔틴의 사상가들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유명한 구도인 형상(形相)과 질료(質料)의 원리는 받아들이지만, 인간의 영혼이 육체의 형상(eidos)이라는 그의 견해는 거부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영혼이란 비질료적인 실체(ousia)에 불과하다. 14세기의 기독교 저술가인 Nicholas Cavasilas에게서 eidos 내지 morphe의 극명한 사용을 찾아볼 수 있는데,
) PG, Vol.150, cols.523C-D, 537D
그를 비롯한 비잔틴의 여러 사상가들은 이 용어들을 아리스토텔레스가 물리적인 실재를 두고 사용한 방식 그대로 사용한다.
하나님에 대해서 사용한 energeia(현세태)와 dynamis(잠세태)라는 개념은 후에 Gregory Palamas 등에게서 보이는 데, 이것은 그가 Barlaam과 논쟁할 때 잘 드러난다. Barlaam이나 서방의 Thomas Aquinas 같은 이들에게서는 하나님의 essentia와 energia는 다를 바 없지만, Palamas나 다른 Hesychast들에게는 하나님의 본질은 인간이 파악할 수도, 사유할 수도, 또 참여할 수도 없는 고유성이고, 반면에 그의 비창조적이고 영원한 에네르기는 하나님의 영광의 구현으로, 초감각적인 빛으로서 묵상될 수 있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10가지 범주는 Clemens of Alexandria에게서부터 그 이후 Johannes Damaskus, Photius, 그리고 Nikephoros Blemmydis 등에 의해서 상세히, 그리고 체계적으로 논구 되었다. 이러한 범주적 개념들은 교리를 전개하거나 논쟁에 있어, 또 철학적인 논의를 할 때, 매우 유용하게 활용되었으며, 종종 교리적인 내용을 담는 개념적인 틀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들은 또한 윤리론에 있어서 덕(德)은 곧 중용(中庸)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은 받아들이면서도 익살(eutrapelia)은 광대짓과 상스러움의 중용으로서 하나의 덕이라는 주장에 강하게 반대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영혼의 품격을 푸는 것은 일종의 악(惡)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가 하나의 둔감(anaisthesia)적인 악으로 보는 완전한 금욕을 가장 칭송한다.
) C. Cavarnos, Byzantine Thought and Art, Belmont 1968, 26f.
하여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개념들은 비잔틴의 신학적 및 철학적 저술가들의 글에 지속적으로 내려갔다고 할 수 있다.
Ⅷ. 결어
우리는 상기의 논의에서 비잔틴 철학의 성격에 대해 그것을 헬라철학의 단순한 연장으로도 또는 전적인 자율성과 독창성을 지닌 것으로도 볼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이중적 성격의 규정은 무엇보다 먼저 사상과 역사의 본질에서 비롯된다. 한편으로 우리는 사상이란 자체가 자유로운 정신의 활동에 근거하므로 사상의 역사는 단순한 연장과 같은 물질적 요소를 지니지 않는 점을 알고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역사라는 것은 늘 과거와의 대화 속에 전개되고 그것과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사상사(思想史)란 그 본질상 타율성과 자율성을 다 구비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비잔틴 철학자들은 한편으로는 초기부터 고전헬라 철학서들의 주석과 해석에 주력해 왔고, 또 그 철학적 개념들을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사용했으며, 그 사상을 교리형성 등 제반 문제에 활용해 왔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 비잔틴철학은 정교적(正敎的) 신학 내지 입장과 전혀 동떨어지게 전개될 수 없었고, 또 특히 수도적 삶과 관련하여 발전되어 왔음에 그 독특함이 놓인다. 그리고 헬라철학도 신플라톤주의주의를 중심으로 플라톤사상, 아리스토텔레스철학, 피타고라스주의, 스토아사상등 과거의 사상적 주류(主流)들이 새로운 종합의 형태로 이 비잔틴 철학에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런 점들은 그것의 독특성을 형성한다고 볼 수 있다.
철학사 내지 문화사에 있어서의 이 비잔틴 철학의 중요성과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비잔틴 철학은 고전헬라철학의 사상뿐 아니라 문헌을 잘 보존해 주었다. 비잔틴 철학자들은 고전 헬라철학자들은 물론 수학자, 천문학자, 자연과학자들의 문헌을 자연적인 손상과 인위적인 파손으로부터 보존하면서 그것들을 필사(筆寫)하였고, 나아가 주석하고 연구하였던 것이다.
) 비잔틴제국의 역사동안에 서구에서는 교회적이고 외교적인 목적(교권과 황제권과의 협상문제등)을 위해 사용한 것 외에는 고전헬라문헌들이 거의 연구되지 아니하였다. 서방기독교계의 가장대표적인 사상가들인 교부시대의 Augustinus와 중세스콜라신학의 Thomas Aquinas를 두고 보더라도 그들은 명성에 걸맞지 않게 헬라어를 읽지 못했다. 물론 비잔틴제국에서도 12세기까지는 학자들이 중요한 전문용어를 제외하고는 서방의 라틴어를 거의 알지 못했다. 물론 Michael Psellos같은이는 읽지만 16세기 이르러서야 비로서 라틴문헌이 광범위하게 읽혀진다.
특히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전수되어 인류 역사에 지대한 공헌을 한 Platon과 Aristoteles, 그리고 신플라톤주의자들의 광범위한 문헌들은 이들의 보존에 결정적으로 의거하고 있다. 후기고대에 있어 알렉산드리아학파의 아리스토텔레스 저작에 대한 주석적 연구들은 가장 대표적인 예에 해당한다.
이들의 문헌주석과 연구에 대해 Milton V. Anastos같은 이는 \'Platon과 Aristoteles, 그리고 그들의 계승자들에 대해 Byzantine학자들이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면 이 철학자들은 오늘날 제대로 알려지지 못했을 것이고 철학의 전역사(全歷史)도 꽤나 다른 형태로 흘러왔을 것이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헬라철학적 문헌들의 이러한 보존은 비잔틴제국 내에서의 다른 언어를 통한 번역작업에서도 이뤄졌다. 이를테면, 시리아어,아르메니아어,죠지아어,아랍어,콥틱어, 그리고 에디오피아어 등으로의 번역이었는데, 이런 번역들은 역시 다양항 언어로 씌어진 동방기독교문헌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되었다.
둘째, 비잔틴 철학은 중세 스콜라 철학 및 신학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고, 또 신비주의 철학 및 부정신학의 전통을 형성하였다. 이를테면 Aristoteles의 논리학과 존재론을 기반으로 사상체계를 확립한 Johannes Damaskos는 스콜라 철학자인 Petrus Lombardus, Albertus Magnus, 그리고 Thomas Aquinas의 사상 확립에 선구가 되었다. 또 5세기경 Syria에서 나온 Pseudo- Dionysios Areopagita의 많은 저작들은 최초의 스콜라 철학자였던 Eriugena에 의해 번역되어 말기의 Nicolas Cusanus에게 이르기까지 스콜라 철학의 전 역사를 통해 신비신학(theologia mystica)과 부정의 사유방식(via negativa)등으로 깊은 영향을 주게 되었던 것이다.
셋째, 비잔틴 철학은 근세 서구의 르네상스 발발에 결정적인 사상적 배경이 되었다. 르네상스의 철학과 문예는 중세 서방의 스콜라 사상에서 온 것이 아니라 동방의 비잔틴 철학과 문헌에서 온 것이고, 따라서 그것에게 이 비잔틴문화는 \'동방의 빛\'(Lux ex oriente)이었던 것이다. 15세기 중엽 비잔틴 제국의 쇠퇴와 더불어 Bessarion, Georgios, 그리고 Plethon 등과 같은 많은 철학자들이 서방으로 왔다. 특히 르네상스를 주도한 Cosimo de\' Medici는 이탈리아로 온 Plethon에게 피렌체에 플라톤 아카데미를 세우도록 후원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비잔틴 철학은 서양사상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고대 헬라사상과 중세 스콜라철학, 헬라 고전문화와 르네상스 문화를 연결해 주는 이음새 역할을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고전의 보존과 해석, 문헌연구방식의 정초, 신비주의 사상의 개발, 교의체계와 그 작업에서의 철학도입 등으로 중요하면서 독자적인 사상사적 의의를 지니는 것이다.
물론 이상의 세 가지 의의(意義)는 비잔틴 철학에 대한 서구 중심적 관점이요 의미부여라 할 수 있다. 사실 지금까지의 비잔틴사상 연구도 대체적으로 서방적 시각일변도로 편향되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세 가지 외에 동방세계자체에서 갖는 그것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넷째, 비잔틴 철학은 동방 정교신학의 태동과 발전에 중요한 요인이 되었고, 또 그것과 더불어 전개 되어갔다. 플라톤 철학, 아리스토텔레스 주석, 신플라톤주의 사상으로 이루어진 비잔틴 철학은 성상(聖像)파괴문제에서부터 Italos의 파문에 이르기까지 줄곧 동방정교 신학의 정통과 이단시비에 연루되어왔다. 이렇게 비잔틴철학은 정통적이건 이단적이건 간에 알렉산드리아와 콘스탄티노플에서 러시아의 모스크바에 이르는 광범위한 정교권(正敎圈)의 교의형성과 신학에 영향을 주었다. 따라서 우리는 Basil과 두 Gregory의 갑바도기아학파 (the Cappadocian School)와 Johannes Damaskos의 저작들에서부터 근세말 러시아의 Solowjew나 Bulgakov의 사상에 이르기까지 고대헬라사상의 비잔틴적 번안(飜案)을 찾는다.
다섯째, 비잔틴 철학은 동서방의 기독교권 내에서만 가교(架橋)역할을 한 것이 아니라, 헬라철학사상 및 동방기독교 신학의 요소들을 회교권에 전달하는 데에도 이음새 역할을 했다. 사실 비잔틴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은 이미 콘스탄틴 대제(大帝)이전부터 동서관문의 상업적 및 군사적 요충지로 인식되어 왔었다. 그것은 아시아와 유럽의 경계에 놓여있고, 또 흑해(the Black Sea) 와 지중해 사이에 위치해 있다. 비잔틴 제국은 수도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제국 자체가 유럽과 아시아의 중간에 있으므로 그 지정학적 위치는 자연스럽게 사상과 학문 같은 문화적 교류도 중개하게 되었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 저작들과 신플라톤주의 사상이 회교권으로 유입되고, 또 그것이 정교신학과 함께 아르메니아(Armenia) 와 조지아(Georgia), 그리고 러시아 등으로 확산된 것은 이 비잔틴철학의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비잔틴제국을 통하여 고전헬라철학은 동방의 세계로 진출하여 명실공히 세계적 사상으로서의 기반을 구축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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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제목을 기입해야 합니다>
- Jeon Kwang-sik -
This article is a study on the byzantine philosophy in the later antiquity and the early medieval times, how it had accepted and interpreted the main elements of the greek philosophy as Platonism, Aristotelianism, and Neoplatonism. The byzantine empire consisted of Roman political system, Christian religion, and Hellenic culture.
The Byzantine philosophy designates the philosophy which had been occurred in the Byzantium from the time of transition of its capital city from Rome to Constantinople at the end of third century to A.D. 1453.
The scholars of the empire made use extensively of the ideas they inherited from their predecessors. Some of them took Plato as their principal figure, others preferred Aristotle, and most of them made use of Neoplatonism. They assumed normally an ambivalent attitude toward the classical philosophies, especially toward Neoplatonism.
On the one hand, the byzantine christian philosophers were fascinated by it as metaphysical system and used its main works as Porphyry\'s Isagoge, Proclus\' Elements of Theology etc. On the other hand, they regarded it just as \'philosophy from the outside( He exothen philosophia ), while the christian gospel as \'the true philosophy\'(He alethe philosophia ) had been considered. Generally speaking, most of byzantine philosophers were not original thinkers, but there had been also some creative thinkers as John Damascus, Psellus, Pletho etc.
The byzantine philosophical scholars took a place of importance in the history of thought for the preservation and transmission of the works of the greek philosophers, the development of the mysticism and theologia negativa, the motivation to the outgoing of Renaissance, the contribution to the formation of the greek orthodox theology, and tramsmission of the greek philosophical thought to the Islamaic world.
첫댓글 철학이라.... 생각만해도 골치가 아오
하루에 같은 게시판에 글 5개 이상 올리지 말라고 했는데, 왜 자꾸 5개씩 올리십니까. 짜증납니다. -_-;
아그럼 4개씩만 올릴께요 5개이상이라 그러셔서 5개면 되는줄 알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