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我)’를 버려야 도(道)에 든다.
발심해서 공부하는 사람은 참으로 만나기 어려운 불법을 만나서
분골쇄신(粉骨碎身)하더라도 뼈가 빠지도록 공부해야 한다.
공부하는 근본 자세는 자기 ‘아(我)’라는 놈을 버리고
참다운 지도자를 찾아가서 지도받아야 한다.
구정(九鼎) 조사 이야기
(월정사 옆에 구정 조사의 부도(浮圖)가 있다.)
오대산에 무염 스님(無染 800-888)이라는 큰스님이 계셨다.
구정 조사가 무염 스님이 큰스님이라는 말을 듣고 공부 배우러 갔다.
무염 스님은 공부 얘기는 없고 “솥이 잘 못 걸렸으니 이 솥을 좀 잘 걸어 봐라.” 한다.
구정 스님이 가만히 보니까 솥이 반듯이 잘 걸려 있는데, 어째서 잘 못 걸렸다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솥을 다시 걸라고 하니 할 수 없이 솥을 뜯어서 다시 잘 걸었다.
“솥을 다 걸어 놨습니다.” 하니
“아니야 이리 걸면 안 돼, 다시 걸어라.” 한다.
이번에는 삐딱하게 걸어 봤다.
“아니다 틀렸다. 다시 걸어라.”
구정 조사가 이리저리 암만 걸어도 “아니다”하여 아홉 번을 다시 걸었다.
솥을 아홉 번을 걸었다고 해서 구정 조사가 됐다.
그런데, 솥을 아홉 번을 거는데 뜻이 있는 것이 아니다.
공부 배운다고 찾아왔으니 내 말을 어느 정도 믿고 듣는지를 보기 위해서 시험을 한 것이다.
보통 사람 같으면 달아났을 텐데, 구정 조사는 오직 도(道)를 배우는 것이 목적이므로
솥을 천 번 걸고, 만 번 걸고 거기에 있는 게 아니다.
도(道)를 배우는 데에 있어서는 ‘나(我)’라는 것을 전부 버려야 한다.
위법망구(爲法忘軀) 해야 한다.
공부를 하는 사람은 구정 조사와 같은 발심을 해서 공부를 해야 성취할 수 있다.
아(我)를 가지고 돌아다니면 싸움-꾼 밖에 되지 않는다.
성취한 게 무엇이냐면 요지생사불상간(了知生死不相干)이라.
생사를 완전히 해탈해서 영원토록 자유자재한 대무애경계를 증(證)해서
이후부터는 절대로 생사(生死)에 미(迷)하지 않고 중생이란 이름을 완전히 떼어 버렸더라.
완전히 성취하고 난 뒤에는 행역선좌역선(行亦禪坐亦禪)이니
가도 선(禪)이고 앉아도 선(禪)이고 어묵동정(語默動靜) 말할 때나,
잠잠할 때나, 동(動)할 때나, 정(靜)할 때나 언제든지 그대로 정혜(定慧)가 원명(圓明)해 있더라.
보통 사람은 생각할 때,
나는 깨치지 못 해도 가나오나 화두는 그대로 있고 언제든지 ‘이 뭣 고’는 그대로 있거든,
이것이 참선 아니냐? 혹 이리도 볼 사람이 있을는지 모르는데,
이것은 참선이 아니고 전체가 망상(妄想)이다.
선(禪)이라 하는 것은 일체 망(妄)을 완전히 떠나서
참말로 오매(寤寐)가 일여(一如)하고 오매(寤寐)가 일여 한데서
확철히 깨쳐서 대원경지(大圓鏡智)가 현발되어야 한다.
- 성철 스님 - 백일법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