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읍 남서쪽을 에워싼 능선서 펼쳐지는 조망이 일품인 옥천 마성산(497 m)은 옥천역에서 남서쪽으로 가장 가까운 산이다. 정상이 옥천역에서 직선거리로 3.5km 거리에 불과하다. 충남 금산군 제원면과 충북 영동군 양산면 경계를 이루는 천태산(714.7m)이 마성산의 모산이다. 천태산 북쪽으로 대성산(704.8m)과 장룡산(654.5m)을 거쳐 솟은 산이 마성산이다.
옥천군 옥천읍 교동리에 위치한 마성산은 사방이 산줄기로 둘러싸여 분지 속에 우뚝하게 솟아 있는 봉우리다. 높이가 409m로 주변 산에 비해 유별나게 도드라져 조망이 탁월한 것이 특징이다. 게다가 산 바로 옆으로 금강과 대청호가 만나며 고요한 물이 휘감아 돈다. 또한 마성산에서 북쪽으로 이어진 능선은 동쪽에 벼랑이 형성되어 있다. 이 구간의 전망은 확실히 남다르다. 나뭇잎이 떨어지면 호반 조망이 더욱 좋은 곳이다.
옥천에는 마성산이 세 개다. 취재팀이 답사한 교동리의 마성산 외에도 두 개가 더 있다. 사람들은 편의상 옥천읍 죽향리에 위치한 335m봉을 동마성산, 옥천군 군서면에 위치한 497m봉을 서마성산이라 부른다. 옥천에서 마성산을 찾을 때는 이를 혼동하지 않도록 한다.
♣옥천 육영수 생가
고(故) 박정희 대통령의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1925년 11월 29일에 태어난 장소.…… 1600년대 김정승 이후 송정승 및 민정승이 거주하여 삼정승의 집이라 불리던 가옥을 육영수 여사의 부친인 육종관씨가 민정승의 자손 민대감에게서 1920년 매입하였다고 한다. 6,047㎡의 대지 위에 …….
육영수 여사는 옥천지방의 독농가(篤農家) 육종관의 2녀로 출생하였으며, 이름있는 문벌이었고 우리나라 전통적인 부덕(婦德)을 갖춘 현대여성이었다. 특히 불우한 사람을 위해서 봉사와 희생으로 일관된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1974년 8월 15일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열린 제29회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조총련계 문세광이 쏜 총탄에 맞아 사망하여 8월 19일 국민장으로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1600년대 김정승 이후 정승들이 살던 곳으로 조선시대 상류계급의 전형적인 양식의 건축구조를 갖추고 있었던 곳이며, 육영수 여사가 태어난 곳으로 가치있는 자료이다.
♣정지용 시인의 생가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면 하계리에서 한의사인 정태국과 정미하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12세 때 송재숙(宋在淑)과 결혼했으며, 1914년 아버지의 영향으로 로마 가톨릭에 입문하여 '프란치스코'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옥천공립보통학교를 마치고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해서 박종화·홍사용·정백 등과 사귀었고, 박팔양 등과 동인지 〈요람〉을 펴내기도 했으며, 신석우 등과 문우회(文友會) 활동에 참가하여 이병기·이일·이윤주 등의 지도를 받았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이선근과 함께 '학교를 잘 만드는 운동'으로 반일(半日)수업제를 요구하는 학생대회를 열었고, 이로 인해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가 박종화·홍사용 등의 구명운동으로 풀려났다.
1923년 4월 교토에 있는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에 입학했으며, 유학시절인 1926년 6월 유학생 잡지인 〈학조 學潮〉에 시 〈카페 프란스〉 등을 발표했다. 1929년 졸업과 함께 귀국하여 이후 8·15 해방 때까지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영어교사로 재직했고, 독립운동가 김도태, 평론가 이헌구, 시조시인 이병기 등과 사귀었다. 1930년 김영랑과 박용철이 창간한 〈시문학〉의 동인으로 참가했으며, 1933년 〈가톨릭 청년〉 편집고문으로 있으면서 이상(李箱)의 시를 세상에 알렸다. 같은 해 모더니즘 운동의 산실이었던 구인회(九人會)에 가담하여 문학 공개강좌 개최와 기관지 〈시와 소설〉 간행에 참여했다.
1939년에는 〈문장〉의 시 추천위원으로 있으면서 박목월·조지훈·박두진 등의 청록파 시인을 등단시켰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이화여자대학으로 옮겨 교수 및 문과과장이 되었고, 1946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의 중앙집행위원 및 가톨릭계 신문인 〈경향신문〉 주간이 되어 고정란인 '여적'(餘適)과 사설을 맡아보았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했던 이유로 보도연맹에 가입하여 전향강연에 종사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터지고 피난길에 오르지 못한 채 서울에 남아있게 된다. 그리고 인천상륙작전이 끝나고 수복한 서울에서 그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오랫동안 그는 납북되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어 왔으나 2003년 문학평론가 박태상이 공개한 자료에 의해 그가 납북되던 중 1950년 미군의 동두천 폭격에 휘말려 사망하였다는 것이 확인 되었다.
시인 정지용은 초기엔 모더니즘과 종교적(로마 가톨릭) 경향의 시를 주로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보다는 널리 알려진 작품 <향수>에서 보이듯이 후기엔 서정적이고 한국의 토속적인 이미지즘의 시를 발표함으로써 그만의 시 세계를 평가 받고 있으며 전통지향적 자연시 혹은 산수시라 일컫는다.
그의 대표 작품 중 향수는 1995년에 통기타 가수인 이동원과 박인수 서울대학교 교수가 듀엣으로 곡을 붙여 불렀으며, 이 노래는 앨범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에 실렸다.
작은 초가집에는 그의 시와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