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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7일
[1968년] 광화문 네거리에 충무공 동상 제막
← 충무공 탄신 4백23주년을 하루 앞둔 1968년 4월 26일 서울 광화문 네거리에 충무공 동상이 세워지고 있다.
충무공탄신 4백23주년을 하루 앞둔 1968년 4월 27일 서울 세종로 광화문 네거리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 동상이 제막됐다. ‘애국선열 조상(彫像)건립위원회’ 주관으로 열린 이날 행사에 박정희 대통령 내외와 각계인사가 참석, 선열의 열을 되새겼다.
구리로 만든 충무공 동상은 서울대 미대 학장을 지낸 고(故) 김세중씨가 13개월에 걸쳐 만든 작품으로, 좌대(座臺) 높이 12m, 동상 높이가 9m에 달했다. 30평 화강석 좌대에 세워진 동상의 전면양쪽에는 청동주물의 독전고가, 좌대 하충부분에는 청동주물의 길이 3m 되는 거북선이 놓였고 좌대뒷면에는 이은상씨의 명문이 새겨졌다.
당초 세종로에 세워지는 동상이니 만큼 세종대왕을 세우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일제가 훼손한 조선왕조의 축(=정기)을 되살리는 데는 이순신 장군이 최고라는 의견이 최종적으로 받아들여져 충무공 동상을 세우게 됐다고 한다.
그로부터 36년간 우리들은 각 시대마다 다른 표현과 방법으로 광화문 네거리 이순신 동상 주변에 모여 이 나라가 잘되기를 바라며 입을 모아 민주주의를 갈구해왔다.
2004년 2월, 서울시의 광화문~세종로 네거리의 광장 조성 계획이 발표되면서 한 때 이순신 장군 동상이 시청 앞 광장으로 옮겨질 뻔 했으나 점증하는 시민과 전문가의 반대 여론과 서울의 대표적인 기념물이라는 점 등이 고려돼 당초 시의 계획이 사실상 백지화됐다. 오늘도 충무공 이순신은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조선
[1894년] 동학농민군, 전주성 함락
← 동학혁명 백산 창의비, 전북 김제시 백산면
1894년 4월 27일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에 입성했다. 갑오농민전쟁은 1894년 1월에 일어난 고부민란에서 비롯되었다. 1892년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이 만석보의 고율수세를 비롯해 온갖 부당한 세금을 거두어들이면서 농민들을 착취한 것이 그 직접적인 배경이었다. 1894년 1월 11일 농민군은 고부관아를 습격했다. 그러나 조선 정부가 미봉책으로 일관하자, 3월 전봉준은 손화중·김개남과 함께 농민군을 조직해 서울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4월 2일 장성에서 홍계훈이 이끄는 장위영병을 격파하고 전주성을 함락했다. 전주성 함락 소식에 놀란 정부가 4월 29일 청에 원병을 청하자, 농민군은 외세의 출병 구실을 없애기 위해 폐정개혁안을 제시했다. 정부측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6월 10일 정부군과 농민군 사이에 전주화약이 체결되었다./브리태니커
[1955년] 일본, 외국인 지문날인 실시
1955년 4월 27일 일본은 외국인들에 대한 지문날인을 처음으로 실시했다. 지문날인은 외국인의 인권을 부당하게 억압하려는 제도이다. 1947년 일본은 외국인등록령을 제정해 재일본한국교포를 외국인으로 간주한다는 특별규정을 만들어 이에 응하지 않는 재일한국인과 외국인등록령 위반자에 대한 강제퇴거를 가능하게 하는 법적 규제를 만들었다. 1952년 외국인등록령이 외국인등록법으로 바뀌면서 지문날인 조항이 만들어졌다. 재일교포를 중심으로 지문날인 거부운동이 확산되자, 1988년 6월 지문전사(指紋轉寫)를 행한다는 신외국인등록법이 시행되었다. 1999년 8월 일본 정부는 모든 외국인들의 지문날인 제도를 전면 폐지했다./브리태니커
[1759년] 울스턴크래프트(Mary Wollstonecraft) 출생
← 울스턴크래프트, John Opie가 1797년경에 그린 유화(부분)
1759년 4월 27일 태어남 / 1797년 9월 10일 죽음
"여성은 남성의 편리한 노예일지 모르나, 이러한 종속관계는 남성과 여성 모두를 타락시키는 변함없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울스턴크래프트는 여성참정권 운동에 앞장선 영국의 작가이다. 사납고 술주정뱅이였던 아버지가 아이들을 무일푼의 상태로 남겨두자, 19세의 나이로 집을 뛰쳐나와 교사로 일하면서 프랑스어와 독일어를 독학했다. 1792년 여성의 사회적 지위에 관한 <여성의 권리옹호 A Vindication of the Rights of Woman>를 출간했다. '열등한 이성을 지닌 여성의 남성에의 종속은 곧 자연법'이라고 주장한 장 자크 루소의 견해에 대해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이성을 갖고 있으며, 여성이 복종해야 할 대상은 아버지나 남성이 아니라 이성'이라고 주장했다. 36세의 젊은 나이로 출산 후유증 때문에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으나, 그녀의 저작은 특히 딸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셸리를 포함해 여러 여성 문인들을 고무시켰다./브리태니커
[1907년] 독립운동가 이진영(李進榮) 출생
1907. 4. 27 경북 영천~1950.
일명 우자강(于自强). 1933년 6월 조선의열단 국내공작원 송병철(宋炳喆)의 주선으로 상하이[上海]로 망명했다. 그해 8월 난징[南京]에 있던 조선의열단 산하 조선혁명정치군사간부학교 제2기생으로 입교하여 6개월간 군사교육을 받았다. 1934년 3월 허난 성[河南省]의 황푸 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 뤄양 분교[洛陽分校]에 입교하여 정치훈련과 전술 및 내무·교양 관계의 훈련을 받고 졸업한 후, 난징·상하이 등지에서 의열단 지하운동에 가담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1938년 1월 중국 중앙군 특별훈련반에 입대하여 군사교육을 받은 후 한커우[漢口]에서 선전공작원으로 활동했다. 1938년 봄 김원봉 등을 중심으로 하는 조선민족혁명당이 통일전선체인 조선민족전선연맹을 조직하고 같은 해 9월 동 연맹의 무장군으로 조선의용대를 창설하자, 통신처(通訊處) 의창주임(宜昌主任)에 임명되어 활동했다. 일제가 중국 내륙에 깊숙이 침략해옴에 따라, 1940년 11월 조선의용대 확대간부회의에서는 적후방작전의 확대와 그를 위한 화북(華北)로의 북상이 결정되었다. 이에 1941년 1월 10일 화북조선청년연합회가 결성되고, 상당수의 의용대원들은 뤄양에 집결하여 팔로군 지역으로 이동하자, 그해 7월까지 충칭[重慶]의 의용대는 김원봉 등 소수의 지도부만 제외하고 모두 화북지대로 편입되었다. 그해 5월 충칭의 잔류대원들이 임시정부 산하 한국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됨으로써, 그는 광복군총사령부 총무부 경리과에서 근무하다가 제1지대 본부구대장을 역임했다. 1943년 7월 광복군 총사령부에 소속되어 활약하다가 8·15해방 후 국군에 입대했으며, 6·25전쟁 당시 화순전투에서 전사했다. 1977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브리태니커
[1902년] 독립운동가 채세윤(蔡世允) 출생
1902. 4. 27 전북 옥구~1973. 3. 11.
일명 근우(槿宇). 일찍이 조국독립의 뜻을 품고 노령 연해주로 망명했다. 1920년 한인자유보병대대(韓人自由步兵大隊)에 참가했으며, 1921년 사할린 의용대 소대장이 되어 활동했다. 같은 해 6월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이 일어나자 북만주 영안(寧安)으로 돌아가 신민부(新民府) 조직에 참여하여 별동반장(別動班長)이 되었으며, 1925년 동녕지구(東寧地區) 군지대(軍支隊) 소대장으로 임명되어 항일전에서 활약했다. 1926년에는 빈강지구(濱江地區) 유격반장(遊擊班長)이 되어 황덕환(黃德煥)·최진만(崔晋萬) 등과 함께 친일단체인 해림민회(海林民會)를 습격, 회장 배두산(裵斗山)을 사살하는 등 반민족자 응징활동을 벌였다. 하얼빈[哈爾濱]에서 무기를 구입하여 옮기다가 발각되어 동지들과 함께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28년 다롄[大連] 지방법원에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뤼순[旅順] 감옥에서 복역했다. 1968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받았다./브리태니커
[2002년] 수원 영통동 여성 연쇄살인사건 발생
← 용의자 허모씨가 경찰에서 고개를 숙인 채 조사받고 있다.
카드 빚에 쪼들린 20대 2명이 승용차를 택시처럼 위장해 몰고 다니며 사흘간 20대 여성 5명을 납치·살해하는 엽기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범인들은 승용차에 택시 표시등을 훔쳐 달고 수원 시내를 돌아다니며 2002년 4월 27일 오후 11시쯤 영통동에서 박모씨를 태운 뒤 목졸라 숨지게 하는 등 29일 새벽까지 20대 여성 5명을 차에 태워 살해했다. 이들은 현금 255만원을 빼앗고 일부 피해자를 성폭행하기도 했으며, 범행 후 승용차 뒷좌석에 3구, 트렁크에 2구 등 시체 5구를 싣고 다녔다.
경기 용인경찰서는 4월 30일 범인 허모씨를 구속하고 공범인 김모씨를 수배했다. 이들은 이날 0시40분쯤 용인시 기흥읍 삼성전자 반도체공장에 주차된 엘란트라 승용차 번호판을 훔치다 출동한 사설경비업체 직원들에게 붙잡혔다. 이들은 이후 현장에 도착한 경찰관의 감시 소홀을 틈타 순찰차를 몰고 150여m 가량 도망쳤으며 경찰은 이 과정에서 허씨만 붙잡고 김씨는 놓쳤다. 김씨는 5월 1일 포항에서 경찰에 다시 붙잡혔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경찰은 수사 중 5명 외에 용인에서 여성1명을 살해한 뒤 암매장한 사실도 추가로 밝혀냈다./조선
[2004년] 리비아 국가원수 카다피 15년 만에 유럽 방문
← 리비아 국가원수 무아마르 카다피.
'국제 테러국'의 오명을 씻고 개방을 가속화하려는 리비아의 국가원수 무아마르 카다피(Qaddafi, Muammar al-, 1942~ )가 2004년 4월 27일 15년 만에 첫 유럽 방문에 나섰다. 카다피 국가원수는 27일 가장 먼저 유럽의 심장부인 EU 본부를 찾았다.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의 EU본부에서는 로마노 프로디 유럽집행위원회(EC) 위원장을 비롯한 많은 인사들이 이 역사적인 방문객을 반갑게 맞이했다.서 벨기에 브뤼셀에서 로마노 프로디(Prodi) 유럽집행위원회(EC) 위원장과 회담을 갖고 관계 정상화에 의견을 같이 했다.
그는 이어 프로디 위원장과 회담 후 합동 기자회견을 갖고, 리비아가 유럽과 아프리카의 가교 역할을 맡아 세계 평화 증진에 있어 지도적 역할을 담당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또 유럽·미국 기업들이 리비아의 석유산업에 투자·개발해줄 것을 요청했다.
카다피의 브뤼셀 방문은 리비아의 ‘회개’의 대가로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18년 만에 경제 제재를 완화한다고 발표한 지 사흘 만에 이뤄졌다. 미국은 1986년 미군 관리들이 주로 드나드는 서베를린의 디스코텍이 리비아 테러범에게 폭파된 이후 경제 제재 및 여행 금지 조치를 취해 왔다.
그러나 최근 리비아는 핵무기 등 대량살상무기(WMD)를 포기하고 팬암 등 서방 항공기 폭파사건을 배상키로 합의하는 등 달라진 모습을 보였고, 서방의 경제 제재 해제가 초읽기에 들어갔다. /조선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 박정희 당선
← 제7대 대통령에 당선된 박정희 대통령이 취임선서를 하고 있다.
1971년 4월 27일 실시한 제7대 대통령선거에서 민주공화당의 박정희 후보가 6백34만2천8백28표를 획득, 신민당의 김대중 후보가 얻은 5백39만5천9백표보다 94만6천9백28표를 앞질러 대통령에 당선됐다. 당초 7명의 후보가 난립했으나 통사당의 김철 후보와 민중당 성보경 후보가 중도 사퇴, 5명이 경쟁했다.
이번 선거는 사실상 민주공화당과 신민당의 각축전이었다. 선거때 박 후보는 공화당이 주도한 경제성장의 비전을 제시했고, 김 후보는 박대통령의 영구집권 기도를 규탄하고 향토예비군제를 폐지하겠다고 공약해 상당한 반응을 얻었으나 조직의 열세로 득표로 연결되지 못했다. 또 5월 25일 실시된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총 2백4석 중 민주공화당이 전국구 의원 27명을 포함해 1백13명, 신민당은 전국구 의원 24명을 포함 89명이 당선돼 양당체제로 돌입했다. /조선
[1959년] 류사오치[劉少奇] 중국 국가주석 선출
← 중국 문화혁명기간중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던 전 국가주석 유소기.
중국의 전국인민대표회의가 1959년 4월 27일 만장일치로 류사오치[劉少奇, 1898~1969]를 국가 주석으로 선출했다. 1921년 공산당 창당이래 강경파인 류사오치는 저명한 노동조직가로 알려져 왔다.
그는 1927년에 공산당 중앙위원이 되었고 1934년에는 정치국원으로 승진했다. 1943년 중앙서기처 서기, 인민혁명군사위 부주석, 1949년 중앙인민정부위 부주석을 거쳐 1954년 중국공산당 제1기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헌법 초안의 제안설명을 하여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에 선출됐다. 1956년에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부주석,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이 됐다.
그는 공산당의 조직과 이론 정립에 중심적인 역할을 했고 정치권력 면에서도 마오쩌둥[毛澤東, 1893~1976] 다음에 있었다. 그러나 사회주의 건설에 있어 그의 기술 우선, 엘리트 존중 등의 사고방식이 점차 마오쩌둥의 사상과 차이를 보여, 1966년 마오쩌둥이 주도하는 문화대혁명의 1차 표적이 되었다. 결국 1969년 10월 제8기 중앙위 확대 제12차 총회에서 ‘당으로부터 영구 제명과 당 내외의 일체 직무 해임’이 결의되어 축출됐다. /조선
[1948년] 남북협상(남북요인회담-15인회담·4김회담 등 개최)(27일~30일)
1948년 4월 19일부터 26일까지 평양 모란봉 극장에서 미리 준비된 남북연석회의에 김구는 소극적이나마 참여했지만 다소 늦게 출발했던 김규식은 건강을 핑계 삼아 참석하지 않았다. 한편 4월 27일부터 30일까지 두 차례의 남북제정당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 즉 남북요인회담이 열렸다. 남북 지도자 15인(남측의 김구, 김규식, 조소앙, 조완구, 홍명희, 김붕준, 이극로, 엄항섭〔이상 우익〕, 허헌, 박헌영, 백남운〔이상 좌익〕, 북측의 김일성, 김두봉, 최용건, 주영하〔북은 모두 좌익〕)이 회담하여 양군 즉시 철퇴, 전조선정치회의 소집후 선거실시, 단독선거 반대 등에 합의했다. 또한 요인회담이 열리던 사이에 두 차례 4김(四金)회담이 있었으나 별다른 정치적 결정은 못 내렸다. 단지 김구·김규식은 1) 남한에 대한 송전계속, 2) 연백수리조합 개방, 3) 조만식 월남허용 등을 김일성에게 피력했으며 김일성은 1), 2) 항은 수락했으나 3) 항은 서로 간에 합의를 못 얻었다. 북한은 백범이 남한으로 귀환하자마자 전기와 농업용수를 모조리 끊어버렸다. 결과적으로 남북협상은 단선을 반대하는 회합으로 귀착되었다. 국가기록포털 contents.archives.go.kr /Google
[1935년] 손기정, 서울에서 개최된 마라톤에서 2시간25분14초로 세계신기록 수립
고등학교 재학시절부터 마라톤 선수생활을 시작하여 1935년 일본에서 열린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1차 예선대회에서 우승한 후, 같은 해 4월과 5월 서울에서 열린 국내 마라톤 대회에서 모두 우승했다. 그해 11월 일본에서 열린 베를린 올림픽 대회 최종예선을 겸한 전(全)일본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여 올림픽 대표로 선발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대표선수로 선발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나 이를 잘 견디어내 숱한 스포츠 일화를 남겼다. 1936년 제11회 베를린 올림픽 대회에서 2시간 29분 19초의 세계신기록으로 우승, 한국인으로서는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했다. bymin.hihome.com /Google
[1882년] 미국의 사상가, 시인 에머슨(Emerson, Ralph Waldo) 사망
← 에머슨, Leopold Grozelier가 제작한 석판화(1859)
1803. 5. 25 ~ 1882. 4. 27
보스턴 출생. 7대에 걸쳐서 성직(聖職)을 이어온 목사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하버드대학교 신학부를 졸업하고 1829년 유니테리언파(派) 보스턴 제2교회의 목사가 되었으나, 그의 자유스런 입장에 대해 교회가 반발하여 1832년 사임하였다. 그후 유럽으로 건너가서 W.워즈워스, D.H.콜리지 등과 만나고, 특히 T.칼라일과는 깊은 교우 관계를 맺고, 그를 통하여 배운 칸트 철학 때문에 그의 사상이 선험철학주의(先驗哲學主義)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는 과학이 미래의 종교를 좌우하는 열쇠가 된다는 것을 확신하였다. 칼라일과 콜리지로부터 독일 관념론에 관한 영향을 받고 1835년에 귀국한 후 《자연론(自然論) Nature》(1836)을 공간(公刊)하고 개인의 진리탐구에 과거 문화의 권위를 거부할 것을 선언하였다. 아울러 자연과의 접촉에서 고독과 희열을 발견하고 자연의 효용으로서 실리(實利)·미(美)·언어(言語)·훈련(訓練)의 4종을 제시하였다.
이듬해 하버드대학교의 파이 베타 카파 학단(學團)에서 행한 유명한 <미국의 학자:The American Scholar>(1837)의 강연과 케임브리지대학교 신학부에서 한 강연 <신학부 강연 Address before the Divinity School, Cambridge>(1838)에 의하여 급진사상가로서 인정을 받았다. 전자는 ‘생각하는 인간’으로서의 이상상(理想像)을 그려서 유럽 문화로부터의 지적 독립과 자기신뢰를 설명하였고, 후자는 직관에 의한 진리의 인식을 주장한 것이다. 그 뒤에 집필한 《에세이집 제1》(1841) 《에세이집 제2》(1844)도 여러 가지 각도에서 같은 문제를 논하고 혹은 그 응용을 시도한 것이다. 그를 중심으로 조직된 ‘초월주의자 클럽’을 중심으로 하여 1836∼1847년에 걸쳐 초월주의운동(超越主義運動)을 추진하였는데, 그것은 신플라톤주의, 독일 관념론, 동양의 신비주의의 영향하에서 정신을 물질보다도 중시하고 직관에 의하여 진리를 알고, 자아의 소리와 진리를 깨달으며, 논리적인 모순을 관대히 보는 신비적 이상주의였다.
시인으로서는 철학적인 시에 뛰어났고 동양 사상의 영향을 보여 주는 《브라마》 《나날[日日]》 등의 작품이 유명하다. 초월주의자 클럽에서는 기관지로 《다이얼》(1840~1844)을 간행하였다. 그들 중의 한 사람은 사회운동의 시도로 보스턴 근교에 있는 ‘브루크 농장’을 세웠는데, 이것은 일종의 공산적(共産的)인 ‘새마을’이었으나 그는 직접 관계하지 않았다. 에세이집 이후의 주요작품으로는 플라톤, 몽테뉴 등 6인의 위인(偉人)을 논술한 《대표적 위인론》(1850)과 유럽 여행의 인상을 기초로 한 《영국 국민성론 English Traits》(1856) 《처세론 The Conduct of Life》(1860) 《사회와 고독 Society and Solitude》(1870) 및 2권의 시집(1847∼1867) 등이 있다. 그 밖에도 10권에 달하는 《일기》(1909∼1914)와 영국 여행 때의 강연을 모은 《대표적 인물 Representative Men》(1849)이 있다. /naver
[1869년] 서울 동대문 중건 완성
← 서울흥인지문(서울興仁之門)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1호로 지정되었다, 통칭 동대문이라고 한다. 서울 도성에 딸린 8문 중의 하나로서 정동(正東)에 있으며 원래의 이름은 흥인지문(興仁之門)이다.
1396년(태조 5)에 건립되고 1453년(단종 1)에 중수되었으며, 1869년(고종 6)에 이르러 이를 전적으로 개축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화강암의 무사석(武砂石)으로 홍예문(虹蜺門)을 축조하고 그 위에 중층의 문루를 세웠으며 문 밖으로는 반달 모양의 옹성(壅城)을 둘리고 있으나 이것도 1869년(고종 6)에 다시 개축한 것이다. 문루의 아래층은 주위 4면을 모두 개방하였으나 위층은 기둥 사이를 모두 창문과 같이 네모나게 구획하여 각각 한 짝 열개의 판문(板門)을 달았다. /naver
[1791년] 미국의 무선부호(전신기) 발명가 모스(Morse, Samuel) 출생
← Original Samuel Morse telegraph
모스 [Morse, Samuel F(inley) B(reese), 1791. 4. 27 ~ 1872. 4. 2]
1791년 4월 27일 매사추세츠주 찰스타운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 제디다이어는 유명한 조합교회(組合敎會) 목사인 동시에 지리학자였다. 예일대학교에서 수학하고 초상화가가 되었으며, 내셔널 디자인 아카데미의 초대 교장과 뉴욕대학교의 미술교수를 지내기도 했다. 1832년 이탈리아에서 미술연구차 유학하다가 돌아오던 선상(船上)에서 최신 전자기학(電磁氣學)에 관한 내용을 알게 되어, 전신기를 만들어 보기로 결심, 대학 동료인 L.D.게일과 공장주(工場主) A.베일의 협력을 얻어 독자적인 알파벳 기호와 자기장치(自記裝置)를 1837년에 완성하였다. 그 기호가 개량된 것이 모스부호이다.
처음에는 국가자금과 유럽에서의 특허권 획득에 실패했으나, 1843년 워싱턴~볼티모어 간의 시험선(試驗線) 가설비 3만 달러의 예산을 획득하여, 이듬해 5월에 유명한 ‘하느님이 만드신 것’이라는 말을 베일 앞으로 송신하였다. 1856년, H.시블리가 웨스턴유니언 전신회사를 설립한 다음부터 모스는 특허를 통해 처음으로 그의 발명의 보상을 받았다. /naver
[1521년] 페르디난드 마젤란, 필리핀 막탄섬에서 전사
← 스페인 탐험가 페르디난드 마젤란.
포르투갈 출신의 스페인 탐험가 페르디난드 마젤란이 1521년 4월 27일 필리핀 막탄섬에서 원주민과 전투중 전사했다. 대탐험을 시작한 지 5개월 만이었다.
마젤란이 역사상 최초의 세계일주를 위해 스페인의 세빌랴를 출항한 것은 1520년 11월 28일이었다. 탐험 앤티워프 출신 상인의 경제적 지원과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1세의 허락을 받고 시작한 탐험에는 다섯척의 선박과 270명의 승무원이 동원됐다. 이듬해 11월 28일 남미 남단과 푸에고 제도 사이를 통과해 태평양에 이른 마젤란은 수개월동안 서진을 계속해 1921년 3월경에 괌섬과 필리핀을 발견했다. 필리핀 세부에서는 군주와 주민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고 스페인 왕에 대한 충성을 서약하게 했다.
그러나 마젤란은 이날 섣불리 막탄섬을 공격하다가 부하 12명과 함께 전사했다. 나머지 선원들이 세빌랴에 도착한 것은 1522년 9월 8일이었고 생존자는 18명이었다. 비록 마젤란 자신은 세계일주를 하지 못했지만, 그는 인류 최초의 세계일주 항해의 지휘자였다./조선
[BC 399년] 소크라테스(Socrates) 독배 마시고 사망
←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소장돼 있는 1787년 자크 루이 다비드 작 ‘소크라테스의 죽음’.
BC 469 ~ BC 399
아테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기원전 399년 4월 27일 독배를 마시고 숨을 거뒀다. 70세였다. 그가 독배를 마신 이유는 501명으로 구성된 아테네 배심원들 가운데 281명이 그의 유죄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죄명은 당시 그리스 사람들이 믿는 신을 믿지 않았다는 불경죄와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혐의였다.
아테네 재판 방식에는 유죄가 인정된 사람에게 항변의 기회를 준 후 다시 형벌을 정하게 되어 있었다. 소크라테스에게도 항변의 기회가 주어졌으나 "자신은 죄가 없다"는 그의 공격적인 태도는 사태를 오히려 악화시켰다. 유죄라고 인정한 281명에 다시 80명이 보태진 361명이 사형 지지자로 돌아섰다. 한달 뒤인 이날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국외로 도망치라는 친구와 제자들의 설득을 거절한 채 독배를 마셨다.
소크라테스의 비극은 역사적이고 개인적인 요인들의 우연적인 결합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아테네는 재판이 열리기 5년 전인 기원전 404년에야 끝난 펠로폰네서스 전쟁에서의 패배와 인구의 3분의 1을 죽음으로 몰고 간 두 차례의 전염병, 게다가 시칠리아 침공 실패 등으로 사회 분위기는 극도로 암울했다. 더구나 아테네 시민들이 극도로 불만스러워 했던 `30인 참주제`에 참여한 참주 가운데 악덕하기로 소문난 몇몇 사람이 소크라테스의 제자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람들은 전쟁과 폭정에 대한 쓰라린 기억이 들 때마다 소크라테스를 원망했다. 이때 우연히 찾아온 그에 대한 고발은 희생양를 찾고 있던 사회 분위기와 정확히 맞아 떨어졌고 결국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마셔야 했다. /조선
그 밖에.
2005년 롄잔 대만 국민당주석 중국 방문
2004년 제5회 광주인권상에 미얀마 민주화운동 지도자 아웅산 수지 여사 선정
2004년 국가보훈처, 이애라 선생 2004년 5월 독립운동가에 선정
2004년 한국 로봇 ‘롭해즈’, 세계로봇경진대회서 1위 입상
2004년 민주당 당직자 일괄사표, 사무처 해단식
2002년 노무현,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확정
2002년 수원 영통동 여성 연쇄살인사건 발생
2002년 민주화보상심의위원회, 1989년 동의대사건 관련자를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키로 결정
2001년 페루, 미주 대륙 최초의 고대문명 새로 발견
2000년 삼성자동차, 르노자동차에 매각
2000년 헌법재판소, 과외교육금지 위헌 결정
1993년 이만섭 국회의장 피선
1993년 소설가 황석영씨,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
1992년 한국-타지키스탄, 국교 수립
1989년 분당-일산 신도시 건설 발표
1983년 소련, 우주무기 금지협정 제의
1981년 한일은행 민영화 발표
1978년 아프가니스탄에 군부쿠데타, 칸 대통령 피살
1977년 일본 중의원, 한일대륙붕협정 비준안 통과
1972년 아프리카 가나의 초대 대통령 콰메 은크루마 사망
1972년 미국 우주선 아폴로 16호 지구 귀환
1969년 김대만 부산시장 수뢰혐의로 구속
1966년 페루여객기 안데스산맥에 추락. 49명 사망
1966년 소련 타시겐트 지방 대지진
1962년 혁명재판소, 통사당-통일민전사건 선고
1961년 시에라리온, 영국으로부터 독립
1960년 토고, 프랑스로부터 독립
1960년 허정 외무장관, 대통령직 대행
1957년 중국, 정풍운동에 관한 지침 공포
1949년 농지개혁법 국회 본회의 통과
1908년 제4회 런던올림픽 개막
1906년 영국-청 티베트조약 조인
1822년 미국 제18대 대통령(1869-1877 재임) 율리시스 그랜트 출생
1794년 청나일강 원류에 도달한 스코틀랜드 탐험가 짐 브루스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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