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도 준비가 필요하다
우리 집엔 노견이 있다. ‘사랑이’라는 이름을 가진 말티즈종이다. 2009년 11월 3일에 태어난 소형견으로 올해로 15년째 함께 살고 있다. 사람 나이로 치면 76세라고 하니 어르신을 모시고 사는 셈이다. 요즘 15년간 우리 가족과 함께 살아온 반려견 ‘사랑이’가 떠날 준비하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
살아오면서 이별의 아픔을 수없이 겪어온 탓에 이별의 아픔처럼 큰 상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또 다른 이별의 아픔을 스스로 만들고 싶지 않은 탓에 나는 한사코 분양받기를 거부했었다. 아마 오륙 년 정도 버텨온 것 같다. 그러다가 2009년 겨울, 대학교 3학년인 우리 집 큰놈이 휴학을 결정한 후 제 생일 선물로 강아지를 키우게 해달라고 졸랐다. 물론 분양받을 비용은 마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제 동생하고 모은 돈이 분양할 비용으로 쓰일 모양이었다.
처형 집에서 그냥 가져다 키우라고 해도 마다하고 포기했는데 삼십여만 원을 주고 분양을 받아온다는 것이 내키지는 않았지만, 아이들이 소원이라고 강아지 노래를 부르는데 도무지 버텨낼 수가 없었다. 입양을 허락한 결정적인 이유는 집사람 때문이기도 했다. 몇 해 전 큰 수술 후 심하진 않지만, 우울증 징후가 보여 그 녀석을 늘 가까이에 있는 벗이 되도록 해주고 싶은 이유도 있었다. 나 또한 그놈을 늦둥이라 생각하고 정을 나눠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기도 했다.
그해 겨울, 조카 결혼식 차 광주에 갔을 때 주먹만 한 말티즈를 분양받아 왔다. 딸애는 미리 인터넷을 통해 사진을 받아보고 서로 의사소통이 이루어져 그날 분양을 하겠다고 약속을 한 것이었다. 분양받으러 가는 날은 함박눈이 내렸다. 눈은 차갑지만, 우리에게 포근한 이미지를 안겨주는 것이다. 어쩌면 분양받을 강아지가 우리 집에 축복을 함께 가져올 것 같다는 예감이 들기도 했다.
나는 아파트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고 딸애는 엘리베이터 앞까지 마중 나가 분양 절차를 마친 후 조심스럽게 안고 나왔다. 딸애는 그날처럼 행복해 보인 적이 또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밝은 표정이었다. 세상을 다 가진 흐뭇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한 걸음 한 걸음을 옮겨 뒷자리에 앉았다. 입양 전 미리 이름을 지어놓고 담요 사이로 보이는 불안해하는 얼굴을 보며 "열무야, 열무야! 이제 우리 열무 새집으로 가는 거야" 하며 어릴 적 인형과 혼잣말로 대화하며 소꿉놀이를 하듯 호들갑을 떤다. 아니, 하필 그 많은 이름을 두고 ‘열무’가 뭐란 말인가. 배추김치, 열무김치, 총각김치 같은 ‘열무’라니. 난 그 이름이 못마땅했지만 반대하지는 않았다. 그냥 특이하게 부를 만한 이름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식구와 함께 집으로 간다는 것, 첫애를 낳아 병원에서 퇴원해 아이를 안고 집으로 가던 그날에 느꼈던 묘한 감정을 그 순간에 느꼈던 것이다. 결혼하여 신혼인 우리 부부만 살던 집에 새로운 생명이 우리 식구로 들어온다는 것이 이상하게도 이루 말할 수 없는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켰었다. 아내가 첫 아이를 낳고 병원에서 퇴원하기 전, 나는 먼저 집에 와서 보일러 온도를 높이고 군데군데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새 식구를 맞이할 준비를 했었다. 그때 그 벅찬 느낌을 이십여 년이 지난 후, 분양받은 강아지로 인해 다시 갖게 된 것이다.
그 녀석 이름이 '사랑이'로 결정된 것은 '열무'라는 어처구니없는 이름에 못마땅해하던 아내가 자연스럽게 ‘사랑이’라고 부르기 시작하면서였다. 한동안 아내는 "사랑아, 사랑아!" 부르고 아이들은 "열무야, 열무야!" 불렀다. 그러다가 내가 "사랑아, 사랑아!"하고 부르니까 자연히 '열무'보다는 '사랑이' 쪽으로 이름이 굳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날 이후, 우리 집 반려견 ‘사랑이’ 때문인지 강아지에 대한 정보에 관심이 커졌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인터넷 뉴스와 TV 뉴스를 통해 본 유기견 문제는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 작고 귀여울 때는 사랑을 흠뻑 주다가 점점 그 마음이 식어버리고 유지비가 만만치 않게 되자 몰래 인적이 드문 섬에 데려가서 두고 오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심지어 보고 찾아올까 봐 코만 남기고 비닐 테이프로 칭칭 동여매서 버린 강아지를 사진으로 보았을 때 우리 인간들의 잔인함이야말로 하늘을 찌르는 듯하다고 생각했다. 그 당시 싱어송라이터 ‘이적’의 뮤직비디오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을 보며 영상에 등장하는 버려진 유기견 처지에서 노랫말을 들으니 너무 가슴이 아팠다. 주인이 기다리라고 한 말을 믿고 온몸이 꽁꽁 얼어도 하염없이 주인을 기다리다 죽어가는 유기견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이 노래는 원래는 부모에게 버려진 아이의 심정을 가사로 쓴 것이라는 뮤직비디오에서는 겨울에 버려진 유기견을 주인공으로 한 것이었다.
요즘엔 애완견이라는 말 대신에 반려동물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반려동물(伴侶動物)은 1983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 관한 국제심포지엄'에서 '애완동물' 대신 사용하도록 권장된 용어로 현재 미국·유럽·일본 등에서 사용되고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인생의 또 다른 반려자로 함께 살아간다는 의미의 '반려동물'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살아가면서 기쁨도 주고 아픔도 주고 슬픔도 주는 것이 반려자이다. 모든 것을 함께 한다는 의미를 담은 반려견이라는 말이 난 마음에 든다.
사랑이가 우리 집에 온 후부터 아내의 표정도 많이 밝아진 것 같다. 모두 학교에 가고 나면 온종일 말 한마디 붙일 사람이 없었을 것인데 사랑이가 오고 난 후부터 사랑이는 아내의 친구가 되어준 것이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거나 털을 빗질해 주면서 오순도순 속삭이듯 혼잣말로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예방접종은 물론 매달 한 번씩 심장사상충 예방 백신을 사다가 목덜미에 발라주어야 한다. 약간만 이상이 있어도 동물병원으로 데려가다 보니 그 비용이 만만치 않은 건 사실이다. 아마 아이 하나 키우는 비용이 더 적게 들겠다고 한 아내 말이 맞는 것 같다. 그러나 그 비용보다도 사랑이가 우리에게 준 사랑이야말로 억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소중한 것일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 아버지 기일이라 아버지 집에 갔는데 동생이 애지중지하던 ‘순돌이’란 녀석이 보이지 않았다. 아마 다른 방에 있겠거니 했는데 동생이 ‘순돌이 떠났어요’하는 것이다. 가슴이 철렁했다. 워낙 동생이 애지중지하는 녀석이라 내가 그림으로 그려준 적이 있어 그 모습이 선하다. 올해로 11년째 함께했던 녀석인데 갑자기 떠나보낸 후 동생은 상심이 컸던지 한 달이 지났는데도 그 녀석 생각 때문에 지금도 힘들다고 했다. 동생이 쓰는 방에 내가 그려준 순돌이 그림이 영정사진이 되어 걸려있다. 나는 그런 동생의 모습이 우리 가족들과 오버랩되면서 우리 사랑이 생각에 더 가슴이 아팠던 것 같다.
우리 사랑이도 며칠 전 고비를 맞이했던 적이 있었다. 친구들 모임에서 일본 여행을 다녀온 탓에 직장에 다니는 딸에게 맡기고 다녀왔는데 그날 이후 아무것도 먹지 않고 허리도 펴지 못하고 꼬리를 내린 채 자지러지는 소리를 내는 것이다. 병원에 전화하고 데리고 가는데 항문 쪽에서 피가 터져 패드를 벌겋게 물들여 심각한 상황임을 느꼈다. 급히 엑스레이 촬영을 하고 처치를 마친 수의사의 진단 결과를 불안한 마음으로 들었다. 노견이라 여러 가지 문제가 발견되었다고 엑스레이 촬영 사진을 보여주며 심각한 상황이라고 한다. 척추 일곱 군데가 문제가 있는데 디스크가 빠져나와 척추끼리 붙어버린 상황이고, 아무것도 먹지 못해 뱃속에 변이 차 있지 않아 변도 볼 수 없었을 것이라고 한다. 게다가 결석이 양쪽에서 발견되었다고 갑자기 심각한 상황이 올 수 있다고 한다. 노견이라 수술도 불가능하고 결석도 빼낼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한다. 만약 디스크 수술을 하려면 대학동물병원에 가야 하는데 워낙 부위가 광범위해서 수술 여부조차도 장담할 수 없다고 한다.
작년에도 입원하여 ‘자궁축농증’으로 전신 마취를 하고 자궁을 들어내는 큰 수술을 받았는데 또 큰 수술을 받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아무것도 안 먹으면 더 위험해질 수 있으니까 먹고 싶어 하는 것 모두 챙겨주라는 수의사의 말이 이별을 준비하라는 말처럼 들려 가슴이 아팠다.
내가 강아지 키우기를 한사코 반대했던 이유는 어릴 적 아픈 기억 때문이었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무렵, 우리 집에서 키우던 ‘메리’라는 강아지가 있었다. ‘메리’는 우리 식구 중에서 나와 가장 많이 지냈던 탓인지 무척이나 나를 따랐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시간이면 언제나 동네 어귀에 있는 당산나무 앞까지 마중 나와서 내가 오는 쪽을 바라보며 내 발걸음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처럼 실내에서 키우는 애완견 같은 꼬마 강아지가 아니어서 몇 달이 지나자 금방 어른이 되어버렸다. 어른이 된 ‘메리’는 저를 닮은 다섯 마리 새끼를 낳았다. 첫 배라서 인지 일주일도 안 되어 두 마리는 죽고 세 마리만 남게 되었다. 어머니는 그 귀여운 것들을 우리들의 동의도 얻지 않고 시골 장에 내다 파셨다. 시골에서야 강아지도 가축의 하나로 가계에 보태기 위해 내다 판 것이겠지만 너무나 속이 상한 일이었다. 그때만 해도 정이 덜 들어선 지 아쉽긴 했지만 슬픔은 덜했다. 그런데 몇 달 뒤 학교에 갔다가 집에 오는데 동네 어귀에 마중 나와야 할 ‘메리’가 보이질 않았다. 집에 있겠지 하고 집으로 가봤는데 어머니도 ‘메리’도 없었다. 해가 어둑어둑해질 무렵, 어머니가 머리에 짐을 이고 장에서 돌아오셨다. 옆에 촐랑거리며 따라올 줄 알았던 ‘메리’는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물어봤더니 돈이 필요해서 5일장인 곡성 장에 내다 팔았단다. 그리고 그 돈으로 내 책가방을 사 왔다고 내 앞에 새 가방을 내려놓으셨다. 어머니는 닳아서 구멍이 난 내 가방을 보고 새 가방으로 바꿔주고 싶어서 ‘메리’를 팔아 그 돈으로 가방을 사 온 것이다. 난 가방을 본 순간 너무 화가 나서 그 가방을 마당에 던져버렸다. 그리고 우리 ‘메리’ 다시 찾아오라고 집이 떠나가라고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울기 시작했다. 우리 ‘메리’를 팔아 그 돈으로 가방을 사 오신 어머니가 한없이 밉고 원망스러웠다. 아마 그 이유로 며칠 동안 학교도 나가지 않은 것 같다. 얼마나 서운했던지 부스럭 소리만 나도 문을 열어봤다. 우리 ‘메리’가 눈앞에 아른거려 잠을 잘 수도 밥을 먹을 수도 없었다. 아마 안타까운 마음을 지울 때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그런데 또 강아지라니…….도무지 허락할 수가 없었는데 결국 내가 손을 들고 말았다. 아마 은근히 나도 옛 ‘메리’에게서 느끼던 정을 또다시 느껴보고 싶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사랑이’를 우리 식구로 맞이하고 십 오 년의 세월이 흘렀다. ‘사랑이’로 인해 불편한 점도 하나둘이 아니지만, 그 불편함을 감내하고라도 죽을 때까지 함께할 생각이다. 이별을 준비해야 할 시점이 다가오고 있다. 이제는 산책하러 나가도 멀리 가지 못한다. 요즘 하루하루를 이별을 생각하며 살고 있다. 그러나 쉽지 않다. 이별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우리 막둥이 ‘사랑이’가 없다면 우리에게 사랑이 사라질 것만 같아 불안하다. 15년간 우리에게 남긴 사랑이 어디 한 둘이겠는가. 집안 여기저기에 우리 ‘사랑이’에 관한 물건들이 여기저기 놓여있다. 그 물건마다 제각각 이야기가 숨어있다. 언젠가는 아프게 이별을 해야 하리라. 겨울이면 나무들이 안타깝게 붙잡고 있던 잎을 어쩔 수 없이 놓아주듯 언젠가 그날이 오면, 아프지만 놓고 싶지 않아도 놓아주어야 하리라. 아프게 떠나보내고 기억 속 ‘사랑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붙잡고 있어야 하리라. 덜 아파할 수 있도록 이별도 준비가 필요하다. 우리 ‘사랑이’를 보내야 할 시간이 많이 남아있지 않은 것 같아 불안하다. 이별을 위한 모래시계의 시간은 쉼 없이 떨어져 점점 줄어들고 있다. 견딜 수 있을 만큼의 아픔을 위해 앞으로 함께할 수 있는 남은 동안, 우리 가족의 사랑을 받으며 그동안 행복했음을 느낄 수 있도록 더 많은 관심을 보여주자. 서로가 아프지 않게 아낌없이 더 사랑하자. 이별도 준비가 필요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