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804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성령강림절 후 제11주)
이마에 주름을 덜 짓고, 걱정 하나 덜어내며
출16:2-4, 9-15; 엡4:1-16; 요6:24-35
오늘 출애굽기 본문은 광야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신 기적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를 탈출해서 나온 뒤 한 달 정도 지났을 때입니다. 이집트에서 가져온 양식이 다 떨어지고, 척박한 광야 길을 걷는 그들의 몸과 마음은 지쳤습니다. 목적지는 보이지 않고, 앞으로 얼마를 더 가야하는지 알 수 없는 막막한 상황이었습니다.
엘림을 지나 시내 산에 이르는 중간 지점까지 왔을 때,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에게 노골적으로 불평을 터뜨렸습니다. “차라리 우리가 이집트 땅 거기 고기 가마 곁에 앉아 배불리 음식을 먹던 그 때에, 누가 우리를 주님의 손에 넘겨주어서 죽게 했더라면 더 좋을 뻔 하였습니다. 그런데 당신들은 지금 우리를 이 광야로 끌고 나와서, 이 모든 회중을 다 굶어 죽게 하고 있습니다.”(출16:3)
이스라엘 민족에게 사막에서의 자유란 이집트에서의 노예 생활보다 나을게 없었습니다. 불안정한 생활에 겁먹은 그들에게 믿음의 결핍이 적나라하게 드러났습니다. 광야는 자유를 만나고 누리면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깊이 깨달을 수 있는 은총의 자리입니다. 하지만, 신앙이 결핍되었을 때에는 불평과 반목, 저항의 늪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각각의 고유한 인격이 아닌, 한 무리로 묘사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자기 자신의 어려움을 호소하고 간구하기보다 집단 속에 숨어서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 불만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과 직접 관계 맺지 못하고, 하나님 주변을 서성이고만 있습니다. 신을 자신과는 동떨어진 초월적 존재로만 생각하다 보니, 신앙행위가 하나님을 향해 있지 않고, 사람을 향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인간적인 두려움이 너무 커서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자신들과 신을 연결해줄 중재자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려움 앞에서 하나님께 자신의 언어로 직접 소리 내어 말하지 않고, 자기 안에 일어나는 생각이나 불평을 혼자 웅얼거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하지 못한 그들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을 모세를 통해 간접적으로만 알 수 있었습니다. 어떤 일을 직접 대면하고 씨름하는 과정이 생략될 때, 그 일의 결과에만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인간의 피, 땀, 눈물이 생략된 만나와 메추라기에는 신비는 사라지고, 기적이 마술처럼 왜곡되어 보입니다. 다음에 어려움이 오게 되면, 그 사람은 마술적인 결과만 바라면서 그렇지 못한 현실에 불평할 수밖에 없습니다.
광야는 우리 존재의 기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깨달을 수 있는 은총의 자리입니다. 광야는 우리가 처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되는 자리입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불완전함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고, 그 부족함이 주님의 은총으로 채워지는 자리가 바로 광야입니다. 그러므로 광야는 우리가 기도하고 간구해야할 자리입니다. 광야는 우리의 기도가 이루어지게 되는 자리입니다. 광야는 우리의 삶이 땅과는 상관없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도록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자리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광야에서 우리가 누구인지 진정한 정체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음에 아로새겨져 있던 그들의 신원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그들은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로 조상들을 먹이신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떠올렸습니다. 메시야가 오면 그들에게 다시 만나를 내릴 것이라는 예언대로 예수가 정말로 그들의 메시야인지 그들은 확인하고 싶어 했습니다.
오병이어와 물 위를 걸으신 두 가지 이적이 있던 다음날입니다. 본문은 예수를 찾아 추적하던 사람들을 하나의 ‘무리’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본문과 마찬가지로 요한복음에서 예수를 쫓는 사람들은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지 않고, 집단 속에 자기를 감추고 있습니다. 당신을 찾아온 무리에게 예수님은 그들이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먹고 배가 불러서 자신을 찾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되신 하나님은 이제 우리 인간이 관계 맺을 수 있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당신의 이야기 속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일하지 말고, 영생에 이르도록 남아 있을 양식을 얻으려고 일하여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줄 것이다.”(요6:27)
성만찬의 신비를 사람들에게 처음 말씀하셨을 때,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과 당신을 쫓던 무리를 바라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때와 같은 눈길로 지금 여기에 앉아있는 우리를 찬찬히 한명씩 바라보시며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십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내게로 오는 사람은 결코 주리지 않을 것이요, 나를 믿는 사람은 다시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6:35) 주님은 여러분 각자가 무리의 익명성 속에 숨지 않고, 하나의 고유한 인격으로 당신 앞에 나와 친밀하게 관계 맺길 원하십니다.
토마스 머튼 신부님이 자신의 일기에 요한복음 6장을 묵상한 내용이 있어서 잠시 인용하겠습니다. 신부님은 요한복음 6장이 자신을 위해 쓰인 말씀이고, 이 말씀이 너무나 엄청나서 이것을 연구하려 하지만 그저 가만히 숨 쉬는 것 밖에는 할 수 없다고 합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신부님은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매일 미사를 더 잘 드린다는 것은 매일 이마에 주름을 한 번 덜 짓고, 머릿속에 걱정하나를 덜어내고, 마음속 두려움의 그림자를 하나 덜어내면서, 매일 더 단순하게 미사를 봉헌하는 것입니다.”
성직자가 아닌 여러분들도 이 말씀을 삶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매일 매일 점점 더 단순함과 기쁨으로 평범한 일상에서 해야 할 일들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래야 하는 것보다 덜 열정적인 이유 한 가지는 우리가 스스로를 너무 진지하게 여겨서 우리의 영이 불구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머튼 신부님은 설명합니다. 우리가 온전히 의지하는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기대해야만 할 때,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면서, 기대에 못 미치는 자신이나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비난하기를 멈추십시오. 아니, 스스로에게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만 알아차리면 비난은 저절로 멈춥니다. 매일 점점 더 단순함과 기쁨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얼굴을 덜 찌푸리고, 걱정과 두려움을 알아차릴 때마다 그것들을 하나씩 내려놓는 것입니다. 걱정과 불안 속에 빠져있는 대신, 생명의 빵이신 주님의 말씀을 천천히 곱씹고 음미하면서, 우리 안에서 말씀이 소화되고 흡수되게 하십시오. 먹지 않고 남겨둔 만나에서는 벌레가 생기고 악취가 풍깁니다. 썩은 만나는 자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으로 변질됩니다.
마음을 열고, 온 몸의 감각을 일깨워 하나님의 현존을 가만히 느껴보십시오. 하나님의 현존이라는 말이 너무 거창하다면, 자신의 몸에서 가장 가볍고, 가장 따뜻한 곳이 어딘지 가만히 느껴보십시오. 우리 안에 가장 가볍고 따뜻한 곳이 바로 주님이 머무시는 자리입니다. 그 따뜻함과 가벼움을 의식하면서, 주님의 시선이 오롯이 나를 향해 있고, 나는 주님의 사랑의 광휘에 잠겨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주님께서 나를 바라보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내게로 오는 사람은 결코 주리지 않을 것이요, 나를 믿는 사람은 다시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유한한 우리 존재의 뿌리인 무한하신 존재에 대한 생생한 인식은 생명의 빵을 먹을 때 이루어집니다. 생명의 빵은 우리에게 실재에 대한 깨달음을 가져다줍니다.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먹어야만 우리 자신도 하나의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먹는다는 것은 그분과 하나 되는 것이고, 그분의 의식에 통합되는 것입니다. 무리 속에서 나와 예수 그리스도와 가장 깊고 친밀한 인격적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생명의 빵이신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감에 따라, 우리는 매일 점점 더 단순함과 기쁨으로 일상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생각은 경험으로 얻은 생동감을 대체하지 못합니다. 생각이 감정과 연결되지 못할 때는 정신을 좀먹는 환상과 망상, 과도한 걱정을 낳습니다. 생각은 이렇듯 집요합니다. 뿐만 아니라, 판단적이고 회의적인 초자아는 우리의 생각 위에 폭군으로 군림하면서,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느낌들을 끊임없이 만들어냅니다. 우리 모두는 소화되지 않는 되새김질 거리인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을 곱씹고 있습니다. 그것이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든 안 되든 상관없이 반복적으로 부정적인 생각에 골몰하고 불필요한 고통에 빠져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되새김질하고 소화해야 할 것은 우리의 골칫거리나 걱정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의 빵이라는 것을 깨달아 우리의 존재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진짜 생명력, 힘이 되도록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묵상하시기를 바랍니다. 밖에선 도무지 알 수 없는 신비 속으로 들어가도록, 말씀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도록,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오도록, 우리가 말씀임을 깨닫도록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고, 살아내십시오. 기도는 작은데서 큰 데로, 통제에서 신비로, 에고에서 영혼으로 나아가도록, 즉 그리스도께 나아가도록 우리를 열어가는 과정입니다.
매일 매일, 생명의 빵을 먹음으로써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 점점 더 좋은 느낌을 갖게 됩니다. 생명의 빵이신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자책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비난하지 않으며, 부정적인 생각과 느낌을 흘려보낼 수 있는 내적 자원이 되어주십니다. 예수께서 생명의 빵이라는 말씀을 그저 생각으로 쌓아두지 말고, 마음을 열어 이 말씀을 꼭꼭 씹어 삼키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삶에 생명력과 생기를 불어넣어주실 것입니다. 생명의 양식이 되어주시는 주님과 함께라면 우리 속에 더 이상 허함이나 공허함, 갈증, 외로움은 있을 자리가 없습니다. 깨어서 자기 자신에 대한 좋은 느낌들이 어떻게 감각적으로 인지되고, 자신을 변화시키는지 알아차리십시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는 혹독한 광야 생활에 불안과 불평을 쏟아내고, 빵을 먹고 배가 부르려고 주님을 찾던 이스라엘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데 서툴러 무리 속에 자신을 숨기고, 자기의 욕구를 채우려고 안달복달 하면서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느낌들에 휩싸일 때가 부지기수입니다. 우리가 온전히 의지하고 기대해야 할 주님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스스로 모든 것을 해내고 이뤄야 한다고 자신을 매섭게 몰아세웁니다.
생명의 빵을 먹는다는 것은 우리 안에 끊임없이 집요하게 일어나는 이런 저런 생각들을 잠시 멈추는 일입니다. 생각이 멈춘 순간에 찾아오는 고요함은 우리 안에 있는 따뜻하고 가벼운 자리로 우리를 이끌어 우리 안에 계신 주님과 그리고 우리의 자기(self)와 접촉되게 합니다. 주님께 오는 사람은 결코 주리지 않고, 주님을 믿는 사람은 다시는 목마르지 않습니다. 생명의 빵은 이렇게 실제로 우리의 내적 자원이 되어 우리가 스스로에 대해 좋은 느낌들을 갖고, 우리 자신을 수용하게 합니다. 우리에게 꼭 필요한 생명의 양식을 갈망하면서, 매일 이 생명의 빵을 먹고 묵상하시길 바랍니다.
다함께 기도드리겠습니다.
사랑이신 하나님, 생명의 빵을 날마다 먹음으로, 매일 점점 더 단순하고, 더 기쁘게 우리의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도록 인도해주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