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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朝人物考四十六
김봉상[金鳳祥]의 묘갈명(墓碣銘) -이황(李滉)
통사랑 영릉참봉 김봉상(金鳳祥) 묘갈명(通仕郞 英陵參奉 金鳳祥 墓碣銘) - 이황(李滉)
나의 친구 이조 참의(吏曹參議) 김 계응[金季應, 계응은 김난상(金鸞祥)의 자(字)]이 그의 백씨(伯氏) 고(故) 영릉 참봉(英陵參奉) 군(君)의 행적을 편차(編次)하여 묘갈명(墓碣銘)을 나 이황(李滉)에게 요청한 지 몇 년이 되었는데, 이황은 늙고 병들어 탈이 많아서 즉시 응하지 못하자 김 계응이 간곡히 요구하기를 더욱 열심히 하였으므로, 이황은 진실로 일찍이 군의 사람됨을 알고 있는 터라 김 계응의 부탁에 대하여 그 무슨 말로써 사양할 수가 있겠는가?
삼가 살펴보건대, 군의 휘(諱)는 봉상(鳳祥)이고, 자(字)는 백응(伯應)이며, 청도현(淸道縣) 사람이다. 고려(高麗) 평장사(平章事) 영헌공(英憲公)은 휘 지대(之岱)인데, 그의 먼 조상이다. 그 뒤에 오산군(鰲山君) 김한귀(金漢貴) 이하 4대(代)가 모두 현달(顯達)하여 벼슬이 좌참찬(左參贊)에 이른 휘 점(漸)이 있었고, 이분이 휘 유손(裕孫)을 낳았는데, 그는 가선 대부(嘉善大夫)에 추증(追贈)되었고 나주 목사(羅州牧使)를 지냈다.
목사가 휘 영우(靈雨)를 낳았는데, 그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 첨지중추부사가 휘 현(俔)을 낳았는데, 그는 강이 습독관(講肄習讀官)을 지냈으니, 이분이 군의 아버지이다. 어머니는 의인(宜人) 안동 전씨(安東全氏)인데, 그는 생원(生員) 전윤서(全允序)의 따님이다. 군은 홍치(弘治) 병진년(丙辰年, 1496, 연산군 2) 7월 모일(某日)에 태어났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었으나 능히 자력(自力)으로써 공부를 하여 재주와 학업이 일찍이 이루어져서 남보다 뛰어난 사람이라는 명성(名聲)이 있었는데, 임오년(壬午年, 1522, 중종 17)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성균관[泮宮]에 들어가 있으면서 대저 재예(才藝)를 비교할 때면 항상 전열(前列)에 처하여 화려한 소문이 더욱 드러났으나, 매번 천거(薦擧)할 때마다 언제나 유사(有司)에게 화협하지 못하였으므로, 이기(利器)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억울함을 당하였다고 일컬은 지가 오래 되었다.
무술년(戊戌年, 1538, 중종 33) 어머니 상(喪)을 당하여, 상중(喪中)에 있을 때에 슬퍼하면서 상례(喪禮)를 다하였다. 신축년(辛丑年, 1541년 중종 36년)에 태학생(太學生)으로서 천거되어 사재감 참봉(司宰監參奉)이 되었으며, 계묘년(癸卯年, 1543, 중종 38) 선원전(璿源殿)으로 옮겨졌는데, 이해에 지방에서 선발한 유생(儒生)들과 또한 강경(講經)에 나갔으나 다시 억울함을 당하였다.
갑진년(甲辰年, 1544, 중종 39)에 또 영릉 참봉(英陵參奉)으로 옮겨졌는데, 이듬해 을사년(乙巳年, 1545, 인종 원년) 3월에 교동(喬桐)에 가서 선영(先塋)을 보살피다가 병을 얻어 집으로 돌아와서 마침내 졸(卒)하니, 향년(享年)이 50세였다. 그해 5월에 선영 곁에 장사지냈는데, 이곳이 교동현(喬桐縣) 남우동(南牛洞)이다.
군은 사람됨이 영민(穎敏) 온화하고 단아(端雅)하며, 도량은 넓고 너그러워서 진실하여 교만하거나 거짓됨이 없으며, 선(善)한 것을 좋아하고 악(惡)한 것을 미워하는 것이 천성(天性)에서 나와 정의로움을 행함에 있어 자신이 좋아하고 바라는 것처럼 하였으므로, 그 지켰던 바 지조가 권세와 이익에 마음이 돌려져 빼앗기지 않았으며, 그 뜻을 대단히 크게 가져 옛일을 흠모(欽慕)하고 절개를 숭상하였다.
일찍이 충암(冲菴) 김정(金凈) 등 여러 선배를 따라다니면서 공부를 하여 도의(道義)의 서론(緖論)를 얻어들을 수가 있어서, 개연(慨然)히 스스로 분발하여 이 학문에 종사(從事)하였으므로, 그가 찾아서 연구하고 복응하여 행한 것이 모두 과정(課程)이 있었는데, 기묘 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게 되자 두 아우를 데리고 충주(忠州)의 보련산(寶蓮山) 아래에 종적(蹤迹)을 감추어 밭을 갈고 글을 읽으면서 몸을 끝마치려고 생각하였으나, 집안이 가난하고 어버이가 늙었기 때문에 끝내 실행하지 못하였다.
군의 두 아우는 김귀상(金龜祥)ㆍ김난상(金鸞祥)인데, 그들은 군과 더불어 모두 효우(孝友)가 돈독하였다. 모부인(母夫人)이 일찍이 과부(寡婦)가 되어 병환이 많았는데, 형제가 어머니를 받들어 마음을 즐겁게 해주고 음식을 잘 봉양함과 의약(醫藥)을 이바지하였던 것은 애를 써서 힘을 다하였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미치지 못할 바였다.
그들이 옆에서 시중들 때에 어머니의 명령을 받들고 순종(順從)하면서 화락(和樂)하게 하였으며, 의복 금침(衾枕)과 맛있는 반찬을 반드시 시기에 알맞게 하고, 약물(藥物)은 반드시 친히 그 맛을 보았는데, 그 약재(藥材)가 중국산의 희귀(稀貴)한 것이 많아서 황급하게 준비하기가 어려웠으나, 친구들이 구하느라 고민하는 것을 보면 앞을 다투어 그를 위하여 도와주었다.
그의 향촌(鄕村)에서 생산되는 약재는 더러 서로 거느리고 몸소 산에서 캐기도 하고 또는 산사(山寺)에 가서 손수 솔잎을 꺾어 솔술[松醪]을 담구었다가 오래도록 계속하여 올려서 효험(效驗)을 보기를 기대하였는데, 병환이 위중한 날을 당하며 몸소 함께 절구질하여 준비하는 한편 가묘(家廟)에서 기도를 하였으니, 그 어버이를 섬길 적에 고달픈 정성을 다한 것이 모두 다 이와 같았다.
일찍이 형제들이 따로 나누어 살지 않으려는 뜻을 가지고 모부인에게 고하기를, “가문(家門)이 쇠약하고 복조(福祚)가 야박하기가 이와 같은데, 만약 다시 형제가 떨어져 살아서 굶주리거나 배불리 먹는 것과 추위에 떨거나 따뜻하게 사는 것을 더불어 서로 같이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어찌 천륜(天倫)을 다하는 의리이겠습니까?
하물며 우리 집안은 이미 자매(姉妹)가 없고 형제 3인뿐이니, 진실된 마음을 갖고 서로 믿음을 준다면 그 함께 사는 데에 어찌 어려움이,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모부인이 기뻐하여 ‘척포 두속(尺布斗粟)’의 가요1)로써 권장하고 경계하기를 더하였다.
이리하여 서로 약속하고 같은 집에서 함께 살아갈 계획을 세우고, 일용(日用)에 필요한 여러 가지 물품들을 더불어 서로 고르게 가지지 아니함이 없으니, 온 집안사람들이 감히 하나의 물건이라도 마음대로 쓰거나 스스로 사유(私有)하지 아니하였다.
그 윤리(倫理)를 바로잡고 은혜와 사랑을 독실하게 한 것은 대개 이미 옛날 장진(張陳)의 남긴 뜻2)을 지녔다고 사람들이 모두 칭찬하였는데, 어찌하여 하늘이 착한 사람에게 복을 내려 주는 것이 이치에 어그러짐이 많아서 군 같은 재주와 기량(器量)으로써 큰 뜻을 품었다가,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단 말인가?
군의 막내아우(김난상(金鸞祥))는 이미 현달(顯達)하였다가 곧 퇴락하여 해도(海島)에서 귀양살이를 19년 동안이나 하였는데, 임금의 은혜를 입어 조정(朝廷)에 돌아왔을 때는 중씨(仲氏, 김귀상(金龜祥))가 세상을 떠난 지 또 이미 여러 해가 되었으므로, 형제간에 서로 빛나는 즐거움을 누렸던 시간이 일찍이 많지 않았는데도 영원히 잃어버렸으니, 그 비감(悲感)이야 당연히 어떠했겠는가?
비록 그렇다고 하더라도 무릇 군이 지녔던 뜻과 한 집안의 남긴 법도(法度)를 김 계응이 능히 뒤따라서 회복시키기를 신중히 하고 있으니, 군은 여기에서 명명(冥冥)한 가운데에서 유감(遺憾)이 없을 것이다.
군은 양천(陽川) 사람 충순위(忠順衛) 김중진(金仲珍)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후사(後嗣)가 없으며, 계실(繼室)은 수안 김씨(遂安金氏)로 전(前) 부장(部將) 김언광(金彦光)의 따님인데, 부장은 안동 권씨(安東權氏) 장흥령(長興令) 권흠(權欽)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무진년(戊辰年, 1508, 중종 3) 8월 모일에 의인(宜人)을 낳았다.
의인은 부도(婦道)에 부족함이 없어 육친(六親)으로부터 칭송을 받다가 공보다 9년 뒤에 돌아가니, 향년(享年)이 47세였고, 군의 무덤에 부장(附葬)하였다. 아들 두 사람이 있는데, 장자(長子)는 김호신(金虎臣)이고 차자(次子)는 김호변(金虎變)이다. 장자는 세 아들을 두었는데, 김태수(金鮐壽)ㆍ김인수(金仁壽)ㆍ김계박(金繼朴)이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높고 빛나는 김군(金君)은 영헌공(英憲公)의 먼 후손(後孫)인데,
효우(孝友)는 하늘에서 내려주고 재주와 덕행은 세상에 소문났네.
정성으로 어버이를 섬기고 의리로써 가문(家門)을 지켰도다.
죽순(竹筍)은 눈물로 인하여 돋아났고3) 가시나무[荊樹]를 어찌 사사로이 나누리요?4)
큰 날개로써 푸른 하늘을 날아서 함께 높이 올라가기를 바랐는데,
어찌해 운수(運數)가 기박하여 머뭇거리며 힘든 일이 많았던고?
향수(享壽)는 겨우 중년의 나이었으며,
관직은 능참봉(陵參奉)에 그쳤도다.
계씨(季氏)는 다시 멀리 귀양 가서 형제(兄弟)의 급난(急難)한 소식 들려 왔고
중씨(仲氏)는 혼자서 외롭게 지내면서 벼슬 멀리하다가 영혼(靈魂) 떠나버렸네.
이치는 궁극(窮極)하면 반드시 미치는 법이어서 마침내 임금의 은혜를 입게 되어,
계씨가 비로소 돌아오니 유명(幽明)도 이에 기뻐하였도다.
이에 전에 한 일 뒤따르고 계승하여,
죽은 이를 위로하고 살아남은 이 수합해서 마치 군이 살아 있을 때처럼 한 집에 모여 함께 식사했네.
군의 뜻 추락하지 않아 군의 가문(家門) 명성 높게 나니,
지난 일 무슨 유감(遺憾)이 있으리요?
경사(慶事)가 후손에게 전하여지는데.
[각주]
1) 한 문제(漢文帝) 때 이복(異腹) 동생인 회남왕(淮南王) 유장(劉長)이 반역(叛逆)을 꾀하다가 촉(蜀) 땅의 엄도(嚴道)로 귀양가게 되어
그곳에서 먹지 않고 굶어 죽었는데, 사람들이 ‘한 자의 베[尺布]라도 오히려 꿰매어 같이 입어야 될 것이고 한 말의 곡식[斗粟]이라도 오
히려 절구질하여 함께 먹어야 될 것인데, 형제 두 사람이 넓은 천지간에 서로 용납할 수 없었네.’라는 노래를 불러 한 문제 형제의 불화
(不和)를 조롱한 고사(故事).
2) 장진(張陳)은 한(漢)나라 초기의 장이(張耳)와 진여(陳餘)를 지칭한 말. 이들 두 사람이 처음에는 생사(生死)를 함께 할 만큼의 교분(交
分)이 있었으나, 뒤에 틈이 생겨 서로 원한을 품어 결국 양립(兩立)할 수 없게 되었는데, 이것을 교훈으로 삼아 영원 우애를 돈독히 한다
는 뜻.
3) 삼국 시대(三國時代) 오(吳)나라 맹종(孟宗)의 어머니가 죽순(竹筍)을 즐겨 먹었는데, 겨울철 죽순이 돋아나지 않을 때에 어머니가 죽
순을 먹고 싶어하므로, 맹종이 대나무 숲에 들어가 슬피 울며 탄식하자 죽순이 갑자기 돋아났다는 고사(故事).
4) 한(漢)나라 때 전진(田眞) 3형제가 재산을 균등하게 나누려고 의논하면서 집 앞의 가시나무[荊樹] 한 그루도 베어서 세 토막으로 나누려
고 하자, 가시나무가 갑자기 불에 탄 듯이 말랐으므로, 형제들이 놀라서 “나무의 근본은 하나의 뿌리이다.”라고 하고, 형제가 하나의 근
본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재산을 나누지 않기로 하자, 가시나무가 다시 살아나서 무성하였다는 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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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仕郞英陵參奉金君墓碣銘 幷序。
吾友吏曹參議金君季應, 撰次其伯氏故英陵參奉君之行蹟, 徵碣文於滉者有年矣。 滉老病多故, 未卽應, 季應懇責愈不怠。 滉固嘗知君之爲人矣, 於季應之囑, 其何說之辭?
謹按君諱鳳祥, 字伯應, 淸道縣人。 高麗平章事英憲公諱之岱, 其遠祖也。 其後有鰲山君漢貴, 以下四世皆顯。 仕至左參贊諱漸。 是生諱裕孫, 贈嘉善大夫、羅州牧使。 牧使生諱靈雨, 僉知中樞府事。 僉知生諱俔, 講肄習讀官, 是爲君之考。 妣宜人安東全氏, 生員允序之女。
君以弘治丙辰七月日生。 少孤, 能自力爲學, 才業夙成, 翹楚有聲譽。 壬午, 中司馬試, 在泮宮, 凡有較藝, 率居前列, 華聞益著, 而每擧輒不諧于有司, 抱利器負屈稱者久之。 戊戌, 丁內艱, 居喪, 哀毁盡禮。 辛丑, 以太學生薦爲司宰監參奉。 癸卯, 移璿源殿。 是年, 與卿選, 亦旣講經而復見屈。 甲辰, 又遷于英陵。 乙巳三月, 往展先壟于喬桐, 得疾歸, 遂卒, 享年五十。 五月, 葬于先壟之側, 寔桐縣南牛洞也。
君爲人, 穎敏愷悌, 氣宇曠坦。 眞實無矯僞, 好善疾惡, 出於天性, 爲義若嗜欲。 其所操守, 不爲勢利所回奪, 其志嘐嘐然慕古而尙節。 嘗從金冲庵諸先輩遊, 得聞道義緖論, 慨然自奮, 從事於此學, 其探究服行, 皆有課程。 及己卯禍作, 擬欲携二弟, 遯跡於忠州之寶蓮山下, 耕讀以終身, 家貧親老, 竟不果焉。 君之二弟曰龜祥、鸞祥, 與君皆孝友篤至。 母夫人早寡多疾患, 兄弟所以養志體供醫藥者, 苦心殫力, 多人所不及。 其侍側, 承順愉怡, 衣衾膳旨, 必適必時, 藥物必親嘗。 其藥多唐産稀貴, 遑遑難備, 朋知見悶者, 爭爲之補助。 其鄕村, 或相率躬採於山, 又往山寺, 手剉松葉爲松醪, 積久繼進, 期於見效。 當其疾劇日, 身共舂具, 禱于家廟, 其事親盡瘁, 皆此類也。 嘗以兄弟不分異之義, 諗于母夫人曰: “門衰祚薄如此, 若復兄弟離居, 飢飽寒煖, 不與之同, 其何以盡天倫之義? 況吾家旣無姊妹, 兄弟三人赤心相孚, 其於同居, 豈有難乎?” 母夫人喜, 以尺布斗粟之謠加勸戒。 於是相約爲同堂共爨之計, 日用百需, 莫不與之相均, 一家人不敢專一物以自私焉。 其正倫理篤恩愛, 蓋已有古者張、陳之遺意, 人皆稱之, 奈之何天所以降佑善人者多舛, 以君之才器抱志而早世? 君之季弟, 旣顯而旋替, 有海島十九之謫, 及其蒙恩還朝也, 則仲氏之下世, 又已累歲矣。 棣萼相輝之樂, 曾未多時而永失之, 其爲悲感當如何也? 雖然, 凡君之有志與一家之遺法, 季應能追而復之惟謹, 君於是乎可以無憾於冥冥中矣。
君娶陽川人忠順衛金仲珍女, 無後。 繼室曰遂安金氏, 前部將彦光女也。 部將娶安東權氏長興令欽之女, 戊辰八月日生宜人。 宜人婦道無慊, 稱之六親, 後於公九歲沒, 享年四十七。 附葬于君塋焉。 男二人: 長曰虎臣, 次曰虎變。 長有三子: 曰鮐壽, 曰仁壽, 曰繼朴。 銘曰:
顯顯金君, 英憲雲孫。 孝友天畀, 才行世聞。 誠以事親, 義以持門。 筍因泣生, 荊豈私分? 鴻羽靑冥, 共期騰騫。 胡奈數奇, 事多邅屯? 壽僅中身, 官止寢園。 季復遐謫, 飛急鴒原。 仲也踽踽, 遠官羈魂。 理極必反, 終被王恩。 季始來歸, 幽明載欣。 迺追迺述, 慰歿收存。 宛如君在, 合堂同飧。 君志不墜, 君門以芬。 往者奚憾? 慶垂來昆。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