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의 의무
(눅 17:5-10)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지구의 멸망, 인류의 멸망이라는 말이 현실로 다가오는 위기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기후 환경 위기는 전 세계에 재난을 불러오고 있습니다. 사회 양극화는 공동체의 분열을 일으킵니다. 인간의 오만함과 미움, 폭력은 전쟁을 불러일으킵니다. 멸망의 경고는 들려오는데 어느 누구도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습니다. 아마 사람들 마음속으로는 멸망의 차례를 계산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가난한 나라가 가장 먼저, 그리고 큰 고통을 겪을 것입니다. 작은 나라, 힘 없는 나라가 지도에서 먼저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나라 안에서도 가난한 사람, 힘 없는 사람이 큰 고통을 겪을 것입니다. 지방이 사라지고 생산 활동이 중단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부자들, 힘 있는 사람들, 큰 나라는 조금 더 버틸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곧 위기를 맞게 될 것이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라질 것입니다.
나는 아직 버틸 수 있다, 기회가 있다, 다른 나라는 사라져도 우리나라는 오래 남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릇된 판단입니다. 멸망의 속도가 지금보다는 훨씬 빠를 것입니다. 둑이 무너질 때, 처음에는 손으로 막을 수 있을 만큼 크게 위험하지 않지만, 무너지기 시작하면 사람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속도와 힘으로 무너져내립니다. 결국 지구는 살면 같이 살고, 죽으면 같이 죽는 공동운명체입니다. 아주 작은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곧 같은 운명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우리가 무관심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누구 잘못을 판단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대로라면 멸망하기 때문에 지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입니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이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수천 명이 희생되었다고 합니다. 작년에 시작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끝나지 않았는데, 다른 전쟁으로 인류가 고통 받고 있습니다. 전쟁으로 파괴되고 희생 되는 고통 뿐만 아니라, 경제 위기가 닥칠 수도 있습니다. 러시아의 침공으로 농작물과 천연가스 가격이 치솟기도 했습니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전쟁은 석유 생산국이 많은 중동 지역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석유 파동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세계 경제가 휘청일 수 있습니다.
각 나라들이 어느 한쪽 편을 들면서 대결하게 된다면 세계 대전으로 번질 수도 있습니다. 평범한 시민들은 이런 위기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답답합니다. 모든 나라가 평화롭게 지내며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으려고 지도자를 선출하지만 지도자들은 자기 할 일을 하지 않고, 시민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지구 멸망의 길로 이끌고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반복될까요? 어느 역사학자가 책을 쓰고 있을 때 어린 딸이 아빠에게 묻습니다. ‘아빠, 역사는 무엇에 쓰는 것이에요?’ 아빠는 대답합니다. ‘사람들이 역사에서 배우고, 진보하는 것이지.’ 그러자 딸이 다시 묻습니다. ‘그런데 왜 전쟁은 그치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죽어야 해요?’ 그 말에 아빠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쓰고 있는 책에 이 이야기를 실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역사에서 배우는 것이 없다고 결론지었습니다.
역사가 주는 교훈이 없기 때문에 배우는 것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망각의 동물이기 때문에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물론 망각은 신이 주신 최고의 선물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고통을 잊지 않는다면 인간은 살아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망각이 필요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인간은 함께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자연과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많은 것을 가지려고 자연을 파괴하고, 경쟁하고, 정복하는 것은 결국 함께 파괴되고, 멸망할 뿐입니다. 지금 당장은 많은 것을 가지고 풍족한 삶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오래 가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요즘 유행하는 말인 ‘지속 가능한 삶’은 다른 사람, 다른 나라,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연을 보호하는 것이 공동체를 보호하고, 나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 다른 나라를 존중하고, 협력하는 것이 나를 존중하는 길입니다.
나의 삶과 우리나라의 미래를 위해 지도자를 선출합니다. 임명직이든 선출직이든 국민의 세금으로 월급을 받는 공무원을 ‘공복’이라고 합니다. 공공의 종이라는 뜻이지요. 스스로 말하기를 국민을 섬기겠다고 공약을 합니다. 서민의 삶을 이해한다며 시장에서 떡볶이를 먹기도 하고 과일을 사기도 합니다. 거리에서 지나가는 차를 보며 큰절을 하기도 하지요. 종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선되거나 임명되고 나면 다른 사람이 됩니다. 종이 아니라 군림하는 자가 되고, 주인이 되고, 왕이 되려고 합니다. 국민을 협박하고, 국민의 뜻을 무시합니다. 임명직 공무원은 주인이 국민이 아니라 임명권자인 줄 착각합니다. 임명권자에게는 잘 보이려고 하면서 국민이 요구하는 것은 외면합니다. 요즘 국회 인사청문회를 보면 가관입니다. 장관 되겠다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드러납니다. 자격 없는 사람들이 수두룩합니다. 그런데도 임명됩니다. 국민의 종이 아니라 군림하는 자가 되고 있습니다. 대통령에게 충성했으니 보상 받는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는 국민의 세금으로 월급 받는 자리입니다. 주인은 국민입니다.
어쩌면 이런 모습은 정치인에게서만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흔히 교회에서 직분 받은 사람을 가리켜 ‘주님의 종’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의 종으로 충성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종이라고 하면서 교인들에게는 주인 노릇 하려는 종들이 많습니다. 주의 종으로 주의 일을 하니 귀한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목회자뿐만 아니라, 직분자라면 이런 생각을 가질 것입니다. 보상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12:37에서 주인이 돌아올 때 깨어있어 주인을 맞이한 종을 주인이 섬길 것이라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하나님 나라에서 보상 받는 것입니다. 주의 종은 주님을 섬깁니다. 주님의 자녀들도 섬겨야 합니다. 옛날 부흥회가 유행할 때 강사가 한 마디 합니다. ‘주의 종을 잘 섬기는 교회가 복을 받는다, 주의 종을 잘 대접해야 한다.’ 그러나 앞에 앉은 어른이 말합니다. 그는 세례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인데, 종이 하나님의 자녀를 섬겨야지.’ 주의 종이라고 하면서 주의 자녀들에게 주인 노릇 하려는 종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런 유혹을 받았을 것입니다. 인정 받고, 대접 받고, 보상 받고 싶은 것입니다.
누가복음 14장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식사 초대를 받았습니다. 이때부터 제자의 삶, 섬김의 삶에 대한 가르침이 계속됩니다. 제자의 삶은 17:1-2절에도 가르침이 계속됩니다. ‘실족케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자는 화가 미칠 것’이라고 하시며 ‘작은 자 하나를 실족케하는 것보다 연자맷돌을 메고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낫다’고 하십니다. 실족하게 할 수도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실족하게 하면 안 된다고 강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연자맷돌을 매고 바다에 던져지는 것은 벌을 받는 것입니다. 그보다 더 위험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는 공동체에서 잘못한 이를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회개하면 무한용서하라는 것입니다. 거짓 회개냐 진짜 회개냐 따지지 않고 용서해야 합니다. 만일 거짓 회개면 하늘에서 벌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는 용서해야 합니다.
제자의 삶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래서 청을 합니다. ‘주여,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가장 좋은 청을 하였다고 봅니다. 복을 비는 것도 아니고 제자로 살아갈 수 있는 믿음을 달라고 청하니 주님도 마음으로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양이 아니라 질입니다. 많은 믿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온전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겨자씨만 한 믿음으로도 산을 옮길 수 있습니다. 온전한 믿음은 생명 있는 믿음입니다. 온전한 믿음으로 종이 되고 제자가 되는 삶에 대해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종이 밖에서 수고하고 와서 집안일을 하였다고 주인이 보상해주거나 대접해주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주의 종으로, 일꾼으로 일한 다음에 보상을 기대할 것이 아니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이라’고 대답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물론 종은 열심히 일하였고, 대단한 일을 해서 주인에게 많은 이익을 남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종은 여전히 종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종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군림하고 주인 노릇 하는 것을 보면 교만하게 느껴집니다. 국민을 섬기는 영원한 종이 아니라, 보상 받고 대접 받고 인정 받으려는 거짓 종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나 주님의 종은 겸손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종의 본을 보여주십니다. 모든 이를 섬기며, 자기 목숨까지 내어놓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섬기는 일은 귀한 일이고, 아무나 할 수 없는 특별한 일입니다. 그렇다고 종이 하나님의 자녀들의 주인이 되려고 하고, 군림하면서, 섬김과 대접을 받으려고 한다면 그것은 종의 본분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주의 종은 영원한 종이어야 하고, 모든 사람을 섬기는 모든 이들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주의 자녀이면서 주님이 분부하신 다른 이들을 섬기는 사명을 우리는 감당해야 합니다. 물론 보상을 기대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어떤 보상도 약속받은 것이 없습니다. 섬기라는 명령만 받았을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인 것입니다.
이런 삶을 주님은 제자의 삶이라고 가르쳐주십니다. 참된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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