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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호암지 원문보기 글쓴이: 탄금대
19번도로[8구간] 원주시 귀래면에서 충주시
탄금대까지....
![]() 지난번같이 오늘도 아침 일찍 출발을 서둘렀다. 새벽 4시가 조금지난
시각에 출발을 하면 이번구간 출발지에 해가 뜰무렵에 도착할 수 있어 그때부터 여행을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일 첫 번째 이유는
도로에 차가 없어 운전도 편하고 밀리지도 않는다는 것에 매료되었다 고나 할까? 그리고 지난번 귀래에서 귀가하며 들른 거돈사지와 법천사지는 시간상
진행 중이고 이번 여행때 이곳 귀래까지 오며 들른 청룡사지는 며칠 전 올렸다.
이제 아침 7시쯤 귀래에 도착해 지난번 귀래초교는 들르고 끝을 냈으므로
오늘은 삼거리에서 바로 출발을 한다. 충주를 향하여...이 도로는 평상시에도 한가한 도로인데 새벽시간이라 거의 차량통행이 없다고 해야 맞을 것
같다. 귀래면소재지에서 법동교를 건너고 바로 도계교를 만나는데 이름에서 말하듯이 강원도와 충청도의 도계에 소재하기에 도계교가된 것 같다. 이곳도
역시 귀래면에서 소태면까지 우회 직선도로 공사로 여기저기 파헤쳐저 어지럽기 짝이 없다. 벌써 다리구간은 완성되어있었다.
![]() [원주시 귀래면소재지 삼거리앞길...]
![]() [원주시 귀래면의끝인 도계교를 건너면 충청북도 소태면이 되고...]
![]() [지금 공사가 한창인 소태재...]
![]() [소태재에 위치한 구룡휴게소와 주유소...]
옛날에는 이곳지명이 구룡리 이기에 구룡휴게소가 있던 것으로 아는데 지금은
소태면을 따서 소태휴게소라 한 것이 별로 낯설지는 않다. 아마도 다음번에 이길을 통과할 때에는 시원하게 뚫려있을 것 같은 소태재를 뒤로 하고
내리막을 서서히 내려선다. 아마 다음번 여행때도 새로 난 도로 보다는 구도로로 가는 여행방식을 선호하게 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구룡리
삼거리를 지나 소태면소재지로 가는 즉 청룡사로가는길인 양촌 삼거리에서 지도를 보니 십리도 안되는 거리이다.
그양 이곳으로 왔으면 시간도 거리도 절약되지만 이번여행의 목적은
19번도로를 완주하는데 목적이 있기에 약 25키로정도를 돌아 귀래면으로 달려온 셈이 된다. 멀리 구룡송전 생활문화관이라 쓰여진 집이 있어 들어가
보았는데 지금은 사용을 하지 않는 곳같이 느껴지는 건물이 두채 있었다. 다시 돌려 나와 삼거리에서 우회전해 약 3키로정도 달려가니 야종삼거리가
나온다. 이곳에 불정사라는 커다란 표지판이 있어 찾아들어갔으나 3키로를 달려도 나타날 기색이 없어 바로 앞에 엄정면이 보이지만 되돌려
나왔다.
조금 내려서면 커다란 남한강을 가로지르는 목계교가 나온다. 이곳에서부터
표지판에 명승지나 유적들이 잔뜩 표기되기 시작이다. 이곳표지판에도 중원고구려비를 가리키는 밤색표지판이 같이한다. 거리상으로는 이곳에서
약7~8키로만 가면 되는데 탄금대를 먼저 들르고 가야하기에 뒤돌아보며 평평한 충주의 땅을 달려본다. 남한강이 안보일즈음 왼쪽에 엄정초교
목계분교장이라 안내판이 손짓을 한다. 좌회전해 자그마한 길로 들어서는데 너무 특이해 사진으로 남겨두었다.
![]() [목계초교 들어가는 입구에 옛 면사무소 들어가는 기분이...]
![]() [엄정면 소재 목계초교...]
목계초교는 나무나 교실의 위상으로 보아 오래된 학교로 보인다. 아니 요즘
내가 돌아다니는 학교는 6~70년은 되야 오래됐다 할 수가 있는 것 같다. 2003년까지는 엄정초교 목계분교로 수업을 하다가 2003년 9월에야
정식으로 목계초등학교로 분교가 통합되었다 한다. 목계초교를 작별하고 조금가면 조금 커다란 개울을 만난다. 논강천이라 되어있는데 바로 물도리동같이
돌아가는 곳에 독가바위가 있다고 하는데 산을 돌며 아무리 찾아봐도 독가바위를 찾을 수는 없었다.
민가도 없고 일하시는 분들도 안보여 그냥 다리를 건너 더 커다란
원곡천다리를 또 건너 조금 가니 엄정면 가는 길을 알리는 표지판이 요란하다. 좌회전을 해 조금 들어가니 이곳도 새도로 포장공사와 진입로를
원곡천변에 넓게 새로 만드느라 여념이 없다. 아마도 이곳에 아까 내려오며 찾던 불정사가 있는 모양인데 아무리 봐도 개울가 모래사장만 보이고
공사장만 보여 찾을 수가 없었다. 다시 구부러져 내려오는 원곡천 다리 앞에 서니 내창장이라 쓰인 커다란 석조물이 눈길을 끈다.
읽어보니 이곳이 커다란 창고가 있어서 안에 있는 창고라해 내창이라 불렀고
이곳의 장 이름을 내창장이라 불렀다고 이야기 해준다. 안쪽으로 엄정초교가 자리하고 있어 그곳을 가려면 면사무소 앞을 지나야 한다. 마침 3,
8일이 아니라 장은 서있지를 않지만 복잡은 면할 수 있지만 아쉽기는 하였다. 지금도 장이 서면 굉장하다고 주민들은 자랑을 늘어 놓으신다. 정말
길은좁고 굉장히 복잡한 마을인 것으로 봐서 이곳에 장이서면 꼼짝도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충주시 엄정면에 세워진 내창장유래 안내 석조물...]
![]() [안내석조물밑에 쓰여진 내창장의 유래...]
![]() [충주시 엄정면소재 엄정초등학교 교정...]
엄정초등학교의 역사도 찬란하다. 1915년 일제통치시대에 용산리
보통학교로 개교를 하고, 1941년에 엄정국민학교로 개교가 되었다 한다. 그리고 목계분교가 2003년에 목계초등학교로 분교가 통합되었다고 하니
위의 목계분교가 이젠 정식으로 목계초등학교가 된 것이다. 생각보다는 교실수가 적어 물어보니 5학년만 한 학년 학생수가 40여명이고
나머지는 전부 20여명씩 이라고 하니 전부 170여명이 된다고 알려준다.
엄정초교에서 다시 엄정면을 통과 19번도로로 나와 충주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오른쪽에 꽤 큰 내가 흐른다. 영덕천이라 하는데 아마 마을이름과 동일한 천 이름인 것 같다. 삼거리 이름도 영덕 삼거리, 이곳에 있는
휴게소이름도 영덕휴게소이다. 이곳은 잠사 충주시 산척면을 통과하게 된다. 이곳에서 좌회전하면 "박하사탕"으로 유명해진 삼탄역주변과 박달재를 넘게
되는 삼거리이다. 나는 직진을 하여 넓게 만들어지고 있는 곳을 지나면 다시 금가면 도촌리가 되고 만다.
![]() [제천으로 갈리는 영덕3거리에 영덕휴게소...]
휴게소에서 지나 다시 충주시 금가면쪽으로 달리면 금방 금가초등학교를 만날
수가 있다. 금가초교도 1924년 보통공립학교로 개교를 한후 벌써 78회 졸업을 마쳤다고 한다. 학생수는 남, 녀 합쳐서 59명이고 3학년의
경우는 여학생5명, 남학생은 한명이다. 얼마나 시골스러운 학교일지는 생각해봐야겠지만 겉으로 봐서는 도시의 학교와 다를 것이 없어 조금은 의아심이
생긴다. 아직은 8시쯤이니 등교하는 학생은 보이지 않지만 몇 명의 아이들을 만나고 싶어지는 그런 학교이다.
![]() [충주시 금가면 소재 금가초등학교 교정...]
금가초교가 있는 금가면은 지금 개발이 한창인곳이다. 길도 새로 포장되고
있고 또 넓혀지고 있다. 그리고 면근처에도 넓은길과 또 새로 부지가 마련되고 있는 듯 했다. 약간 언덕이져서 위험한 것으로 보이는 커다란 신호등
4거리를 그냥 지나치는 바람에 아쉽게도 넓혀지기 전 금가면 앞에서 작은 구도로로 들어가야 만날 수 있는 대미초등학교를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또
금가면을 지나 이상하게 나누어진 행정구역 때문에 대미초교는 길건너에 있기에 충주시 동량면에 소재하는 것으로 되있다.
또 이곳에서 1키로 정도 지나면 다시 목행교를 기점으로 목행대교를
넘어서면 충주시 목행동으로 변한다. 이곳은 한창 개발이 되어가는 곳이기에 하루가 달리 변하는 것 같다. 지난번 왔을 때와 또 다른 모습으로
다가선다. 구도로 쪽으로 안전하게 차를 세우고 옛 정취가 물씬 풍기는 구 목행교에 초점을 맞추어본다. 아직은 튼튼한 다리이지만 직선화하는 개발에
밀려 구도로의 한편에 밀려 주로 화물차들이 많이 건너 다니는 길이 되어 버렸다.
![]() [구도로를 지나는 구 목행교의 정취...]
![]() [구 목행교 앞에서 내려다본 남한강변의 텃밭들...]
이 도로를 조금 내려서면 원주에서 잠깐 만난 기차길을 이곳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원주에서 오는찻길은 아니지만 충주에서 제천으로 가는 기찻길이라 반갑기만 하다. 기찻길을 지나 양평의 양수리와 같이 기차와 나란히
커다란 도로로 달리게 된다. 마침 기차가 같이가 준다면 더욱 반갑겠지만 아무지 둘러봐도 기차가 보이지는 않는다. 다시 충주시 목행동을 건너
완전히 아파트촌으로 변한 금능동으로 들어서면 탄금대를 알리는 표지판이 겹겹이 눈에 띈다.
칠금동 버스터미널 네거리에서 우회전하면 기찻길 밑으로 커다란 길이 나서고
그길로 가면 탄금대로 오르는 가파르지는 않지만 언덕길이 나선다. 벌써 주변이나 길가를 보면 관광촌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입구 바로 전에
조성되는 농원들이 많은 곳이 있는데 이곳에 시인 신경림의 생가라해 아무리 몇바퀴를 돌며 찾아봤으니 입구의 200미터라는 표지판만 보이고 이내
못찾고 탄금대로 향하였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빨간지붕의 생가엔 지금은 시인과 상관없는 할머님 한분이 살고 계신다고
한다.
![]() [충주시 남한강변 탄금대 공원안의 안내도...]
탄금대라함은 "1400여년전 신라 진흥왕 때 악성(樂聖)
우륵(于勒)이 가야금을 탄주하던
곳이라 전한다. 본래 대문산이라 부르던 작은 산으로 밑으로 남한강과 접하면서도 기암절벽에 송림이 우거져서 경치가 좋은 곳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보면, 우륵은
가실왕(嘉悉王) 당시의 가야 사람으로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가야금을 가지고 신라에 귀화하였다. 진흥왕이 기뻐하여 우륵을 충주에 거주케 하고는 신라 청년 중에서
법지(法知)·계고
(階古)·만덕(萬德)을 뽑아보내
악(樂)을 배우게 하였다.
우륵은 이들의 능력을 헤아려 각기 춤과 노래와 가야금을 가르쳤다 한다.
그는 이곳을 우거지(寓居地)로 삼고 풍치를
상미하며 산상대석(山上臺石)에 앉아 가야금을
타니, 그 미묘한 소리에 사람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로 연유하여 이곳을 탄금대라 불렀다.고 전한다. 이곳은 달천강과 남한강이
합류되는 지점이기도 해 더욱 아름다운곳이다.
![]() [거문고의 악성 우륵선행 추모비...]
![]() [조웅장군 기적비...]
![]() ["혼 목" 1994년 김희경작품...]
![]() [탄금대기 라고쓰인 탄금대비...]
이 비는 남한강 언덕에 열두대라고 하는 100척이나 되는 절벽이 있는데
신립이 전시에 12번이나 오르내리며 활줄을 물에 적시어 쏘면서 병사들을 독려하였다고 하는 곳이다. 이곳에는 신립의 충의심을 기리기 위해 군수
김용은(金容殷)이 건립하고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이 찬한 탄금대비라고 하며 충주의 자랑으로 중앙의 요충지이고 또 청풍명월의 고장이며
임강수, 김생등 예술을 꽃피운 그런곳이기도 하며, 신립과 함께 임경업의 얼이 서려있는 곳이기도 하다고 알려준다.
![]() [우륵 악성이 거문고를 탄 탄금정...]
광무10년(1906)에
충주공립보통학교(현교현초등학교)를 이곳에 건축하고 운동장으로 사용키 위해 상연정을 메우게 되며 육각정은 사직산으로 옮기고 임시 석영으로
사용하다가 , 1955년 당시 충주읍장이었던 박승두가 이 정자가 사직산에 이건되어 있던 것을 탄금대 열두대 위로 옮긴 것이다. 목조로 된 이
정자는 낡아서 1976년 6월 이 자리에 현재의 탄금정을 세우고 6각형이던 천운정은 1977년 호암지 3번 국도 옆 동산에 콘크리트 건물로
6각정 정자가 다시 지어졌다. 고 http://c0c.wo.ro에서 전해준다
![]() [신립장군 순국지지...]
이곳은 임진왜란 당시 도순변사(都巡邊使)
신립(申砬)이 8,000여명의
군졸을 거느리고 와 배수진을 치고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군대를 맞아 격전을
한 전적지이기도 하다. 신립은 전세가 불리하여 패하게 되자 천추의 한을 품고 강에 투신 자살하였다. 탄금대 북쪽 남한강 언덕에 열두대라고 하는
100척이나 되는 절벽이 있는데 신립이 전시에 12번이나 오르내리며 활줄을 물에 적시어 쏘면서 병사들을 독려하였다고 하는 곳이다. 라고
네이버에서 알려준다.
![]() [열두 대라는 바위...]
![]() [열두 대에서 내려다본 남한강 용섬...용머리는 찾았는데...]
![]() [충주 대흥사 전경...]
대흥사는 탄금대 북쪽 계곡의 끝 부분 가물이
내려다 보이는 곳임 추장공 신립장군순절비각 옆에 있다. 종파는 대한불교태고종이며 1955년 오법우 스님이 창건하였다.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2간에 23.5평의 규모 팔작지붕이다. 요사체가 2동이며 종각이 있고 대웅전 앞에는 4개의 석등과 석탑 석비가 있다. 대웅전 옆에는
이절의 창건자인 오우법스님의 부도탑이 있다. 대흥사의 석탑은 9층석탑인데 아름답기가 그지없다. 하늘을 찌를 듯 서있는 탑신이 아름다워 다시 탑신
꼭데기만 한번더 찍어 올렸다.
![]() [충주 대흥사 대웅전...]
![]() [대흥사 9층석탑과 종각...]
![]() [대흥사 쌍석등과 미륵불...]
![]() [대흥사 9층석탑 상위부분과 쇠종의 아름다움...]
![]() [대흥사 종각앞 목어고...]
![]() [대흥사 산신각...]
![]() [충장공 신립장군 순절비각과 비...]
충장공신립장군순절비(忠壯公申砬將軍殉節碑)는
탄금대 대흥사 뒷편에 있다. 비의 받침돌으 거북 형태로 만들고 앞 뒤 길이가 260cm에 달하고 폭이 147cm이며 화강암으로 만들었다. 거북
형태로 조각한 수법은 간단하며 치졸하다. 빗돌은 높이가 197cm이며 너비가 79.5cm, 두께는 28.5cm로 대리석으로 만들었다. 앞면에는
한자로「忠壯公申砬將軍殉節碑」라 쓰고 뒷면에는 전부 한글로 비문을 쓰고<>안에 한자를 넣어 뜻을 명확히 하였다.
대체로 비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띄어쓰기는 하지
않았다. 비(碑)의 우측면에 사람(서번 박재륜), 글자를 쓴 사람(유재 김성규), 세운사람(충주시장 김태수)을 기록하였다. 蓋石(개석)은
이수형태로 너비 100cm, 두께 51cm, 높이 100cm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앞면과 뒷면에 각각 용 두 마리를 양각하였으나 그 조각 수법이
치졸하다. 고 http://c0c.wo.ro에서 알려준다.
![]() [전 이승만대통령의 친필로 쓰여진 충혼탑 전경...]
이 탑은 서기 1955년 11월에 대한민국
상이군인용사회 충청북도 충주분회와 대한민국제대장병보도회(현 재향군인회)에서 광복 이후 전몰한 충주 중원지역의 장병과 경찰관 군속 군노무자
1568위의 넋을 추모하기 위하여 충혼탑을 건립하였으며 매년 현충일에 제향을 올린다. 건립예산은 200만환이며 건립위원회 위원장 김영호 부위원장
이낙진 오동필 총무군장에 장세진 외 11명의 임원들로 구성되었다. 충혼탑에 모신 영령들은 모두 충주지역 출신자로
1,568위(位)이다.
![]() [1568위의 호국영령들의 위비가 모셔진 실...]
![]() [권태응 항일시인의 감자꽃 노래비...자주색꽃피면 파보나마나
자주색감자...]
![]() ["학" 1994년 안재열작품...]
![]() [팔천고혼 위령탑...]
임진왜란은 조선시대 우리가 겪은 큰 전란중의
하나로 왜군은 1592년 4월 14일 부산, 동래를 거쳐 물밀 듯이 진격하였다. 조정에서는 지형조건상 죽령과 조령을 지키는 일이 급선무라고
생각하고 순변사 이일을 경상도에 내려 보냈다고 한다. 이때 신립도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고자 본인도 싸우겠다고 의사를 밝히니 이에 왕은 그를
도순변사로 임명, 보검을 내려주었고 그는 유성룡이 모집해준 군관 80여명 만을 데리고 충주일대로 내려오면서,
각지에서 젋은 농민들까지도 모아 8,000여명의
군졸을 이끌고 4월 26일 충주에 도착하여 4월 28일 신립장군은 휘하 장졸 8,000여명을 이끌고 이곳 탄금대 주변에서 배수진을 치고 왜적의
무리를 맞아 사력을 다하여 고전분투 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천추의 한을 품은채 휘하 장졸들과 함께 장열히 최후를 마친 전적지이다. 라고
http://c0c.wo.ro에서 알려준다.
![]() [팔천고혼 위령탑 정면의 모습...]
이번 8구간의 여행은 여기서 접는다. 귀래면에서 탄금대까지의 거리는 얼마 안되는 거리지만 볼 것도 많고
느낄 것도 많은 그런 여행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번여행지의 여러 가지 알림판 역할을 해준 http://c0c.wo.ro 싸이트에 고마움을 표하며
또 요즈음 드라마로 인기있는 성웅 이순신과 맞물리는 임진란의 신립장군을 다시한번 생각케 해준 곳이기도 하다. 이글을 쓰고 있는 오늘(2005년
4월 28일)은 이순신장군의 탄신일이다. 한강에선 거북선이 떠다니고 아산과 각 이순신 적전지에서 많은 행사가 5월 1일까지 행하여 진다고 한다.
많이 참여하시기를 바라며 이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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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