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사언 어머니의 母情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움이나 위대함도 어머니의 삶보다 더 아름답거나 위대하지 못하다. 세상을
다 준다해도 바꿀 수 없는게 사람목숨인데 양사언 어머니는 자식을 위해 기꺼히 목숨을 버렸다.
몇년 전 중국 태산(泰山)에 올랐다. 높이 1532m의 그리 높지 않은 산이었다. 그래도 중국 5악(五
岳)에 속한 명산이라 찾는 사람이 많았는지 정상에는 숱한 역사적 인물들 흔적이 틈틈이 새겨져
있었다.
나는 일행 가운데 한사람인 명지대학교 홍(洪)모 교수에게 물었다.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
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를 높다 하더라. 이시조는
우리가 잘아는 양사언(楊士彦)의 태산가란 시조이다. 여기에 나오는 태산 이 바로 이 산이지요?
홍교수는 마침 양사언의 문학과 생애를 공부하여 먹고 산다며 그렇다 했다.
그 교수가 들려준 말들 가운데 양사언 어머니 이야기가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양사언의 본관은 청
주다. 돈녕주부 양희수(楊希洙)의 둘째로 태어났는데, 그의 어머니가 신분이 천한 후실이었다. 반
상의 구분이 엄격했던 조선시대이다보니 그녀가 양반 첩실이 되었다가 자식을 위해 목숨을 버린
과정이 오늘 이야기의 주제이다.
양사언의 아버지인 양희수가 전라도 영광군수로 부임해 가던날이다. 때는 봄날이라, 간밤 축하연
에서 마신 술 때문에 아침을 걸렀더니 쉽게 배가 고팠다. 그래서 어느 민가를 찾았는데, 마침 어른
들은 들일 나가고 과년한 처녀 혼자 집을 보고 있던터라 그 처녀로부터 한끼니 대접을 받았다.
양군수는 처녀에게 한끼니를 대접을 받고 너무 고마워 몸에 지녔던 청선(靑扇)·홍선(紅扇) 두개
부채를 주며 농담조로 말했다. 이는 고맙다는 표시로 네게 채단(綵緞)으로 주는 것이니 받으라!
여기서 채단이란 결혼 전 신랑측이 신부집에 보내는 예물이 아니던가? 처녀는 놀라서 채단을
어찌 맨손으로 받으리오! 하더니, 급히 방으로 들어가 붉은 보자기를 갖고 나와 두개의 부채를 받
아 고이 싸서 안고 들어갔다.
부임지에서 군수 양희수는 그럭 저럭 세월을 보내며 수령의 본분을 다하고 있는데, 어느날 부채
를 받은 소녀의 아버지가 찾아와 말했다. 나이 찬 제 딸년이 달리 시집을 가지 않겠다며 사또와의
혼사를 고집하니 살펴 주시요!라고 아뢴다. 요샛말로 책임을 지라는 것이었다.
양희수는 도리 없이 날을 잡아 문제의 부채처녀를 아내로 맞았는데, 이미 정실 부인에 양사준(楊
士俊)이라는 아들 까지 있었다, 그럼에도 처녀는 소실이 되는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첩실이
된 처녀는 사언·사기(士奇) 두 아들을 낳으니, 양희수는 신분이 다른 세 아들을 두게 되었다.
모두 재주가 뛰어나 사람들은 중국의 소식(蘇軾)·소순(蘇洵)·소철(蘇轍) 3형제와 비견 된다고 칭
송했다. 그후 세월이 흘러서 정실부인이 죽었다. 양희수는 첩실이었던 양사언 어머니를 후처로
삼아 아들들을 돌보게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조선의 국법상 첩의 신분으로 낳은 아들은 영원
한 첩자식이었다.
마침내 양사언의 아버지도 세상을 떴다. 장례를 치르던 날 온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였는데 모두
모인 이자리에서 양사언의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탄식한다. 그리고 정실부인의 맏아들 양사준
에게 간곡히 청했다. 내가 양씨가문에 들어와 아들을 낳아 그들이 모두 재주있고 총명하며 풍채가
당당하나 신분이 미천한 첩 자식이라 안타깝소.
이 첩 또한 서모라는 이름이니 만약에 죽는다면 우리 큰아드님께서는 석달 밖에 상복을 입지 않을
것이다, 그리 되면 내가 낳은 두 아들은 서자소리를 영원히 면하지 못할 것이오. 그러니 내가 지금
목숨을 끊어 영감님과 함께 묻힐터이니 아들들이 3년상을 같이 치러주면 나는 첩실에서 벗어나고
내 아들들도 서자라는 흠을 벗지 않을까 싶으오!
약속만 해 준다면 지금 나는 기꺼히 죽어 영감님 곁에 누울 수 있겠오! 이윽고 양사언의 어머니는
순식간에 가슴속에 품었던 단검을 꺼내 서슴없이 목숨을 끊고 말았다. 아들들이 쓴 멍에를 풀어 주
고자 하나 뿐인 목숨을 버린 그 어머니의 모습이다. 참으로 비장하고 섬뜩한 모정이다 . 그리고 두
아들은 드디어 신분상 광명을 찾았다.
양사언은 조선 명종1년(1546) 대과에 장원급제하여 이름을 떨쳤다. 양사기는 명종7년(1552) 과
거에 급제, 호조좌랑을 거쳐 7개 고을 수령을 역임하며 청백리로 이름을 날렸다. 양사언은 안평대
군.한석봉·김정희와 더불어 조선 4대 서예가이며 문장가다. 그는 안변군수를 끝으로 선조17년(15
84) 68세 나이로 숨졌다.
양사언의 형 양시준은 첨정(僉正)까지 올랐는데, 성품이 인자하고 행실이 발라 청백리로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양사언이 남긴 금강산시(詩) 한편도 소개한다. 서리 녹아 내린 물 골짜기로 흘러가
고 바람에 진 낙엽 산으로 돌아 가네 어느덧 세월 흘러 한해가 저물어 가니 벌레들도 모두 숨어
움츠리네.
한편 현대판으로 가슴을 따뜻하게 해 주는 얘기 한토막이 영국에서 들려온다, 그건 바로 어머니
의 사랑은 영원하다는 기사다. 98세의 어머니(Ada Keating)가 80세의 아들(Tom Keating)은
노노(老老)모자이다. 이어머니와 아들은 지금까지 함께 살아왔다. 그러다가 아들이 신체가 부자
유스러워지자, 지난해에 양로원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아들이 있는 양로원으로 올해에 98세인 어머니도 입주한다. 그 이유를 묻는 기자에게, 아
들이 걱정돼서라고 한다. 밥은 잘먹는지 잠은 잘자는지 또 불편한것은 없는 계속 옆에서 도와주고
싶다는 것이다. 백세가 다 되어 가는데도 여전히 자식 걱정만 하는것 이것이 모정이다.
이 이야기는 현재 영국의 Liverpool에 살고있는 어머니 애다 키팅(Ada Keating)과 아들 톰 키팅
(Tom Keating)의 이야기다. 이번설에 우리도 자신을 한번 뒤돌아 보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글/하동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