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3월 4일 일요일, 날씨: 전형적인 싱가포르 날씨
역시 부지런을 떨며 자꾸 밖으로 나가면 뭔가 얻는 것이 있는 것 같다. 어제 라운드하느라 새벽 4시도 안 되어 일어났고 몸도 피곤해서 오늘만큼은 늘어지게 늦잠을 자고 싶었지만 약속을 했으니 8시 반에 꾸역꾸역 일어나 짜파게티까지 끓여 먹었다. 차양이 제일 넓은 바캉스용 모자를 쓰고 싶었는데 운동화를 신어야 하니 추리닝 바람이 되고 본의 아니게 당장 모내기하러 나가는 농부 패션이 되고 말았다. 나가기 직전 전신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 아차 싶었지만, 약속 시간에 늦을까봐 그냥 출발했는데 가는 내내 좀 부끄러웠다.
지하철에 타자마자 웬이글한테 카톡을 보내니 동네 지인과 함께 온다고 센토사 골프장 안에서 보자고 했다. 찾아가는 방법은 커녕 이번 대회 이름조차도 몰랐던 나는 웬이글만 쫓아가면 되겠지 했다가 허겁지겁 웹검색을 했고 하버프론트역 A 출구에서 수현을 만나 셔틀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무료인 이 셔틀 버스는 15-20분 간격으로 있었다. 한국인이 많이 눈에 띄었는데 어떤 꼬맹이는 "아빠, 우리 다니엘 강하고 친구지?"하며 들으란 듯이 자랑했고 가족들은 대답 대신 웃었다.
수현과 웬이글은 이미 티켓이 있다고 했는데 나는 혹시 티켓이 매진이라도 돼서 사지 못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 슬쩍 걱정이 되었다. 입구에 도착하니 그럴 걱정은 없어 보였다. 마지막 결승날이었고 오전 11시쯤 된 시간이었는데 생각보다 한산한 편이었다. HSBC 카드가 있거나 60세 이상이면 할인도 되었고 시즌 티켓을 사서 연일 입장할 수도 있는 것 같았다. 난 아무런 할인 혜택 없이 주말 티켓을 샀는데 그래도 37달러였으니 생각보다 저렴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들어가서 가장 가까운 곳에서 드라이버샷을 준비하는 선수들을 구경했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다부진 몸매의 선수가 갤러리에 별로 신경쓰지 않는 듯 내 바로 코앞에서 한국인 남자 캐디와 속닥이며 드라이버샷을 준비하는데 난 너무나 신기했다. 한국말을 하기에 한국인 선수구나 싶었다. 먼저 어떤 외국인 여성이 드라이버샷을 했는데 소리가 꽤 둔탁했다. 그 다음 이 한국 여성이 드라이버샷을 했는데 역시가 소리가 명쾌하지 않고 둔탁했다. 공은 어디로 날아가는지 잘 보이지 않았다. 드라이버샷이 불만족스러웠는지 작은 소리로 IC를 연발하며 다시 내 코앞으로 돌아온 이 선수는 땀을 많이 흘렸고 몇 개의 뾰루지 자국을 짙은 화장이 어설프게 가리고 있었다. 남자 캐디는 땀을 닦으라며 수건을 건네주었다. 그때쯤 수현이 "저기 박성현이다" 했고 우리는 이후 박성현/주타누간/새그스트롬 조만 따라다녔다. 그때가 한 12번홀이었을 것이다.
수현은 주타누간이 생각보다 체격이 굉장히 아담하다고 했는데 정말 그랬다. 박성현은 얼굴이 무척 작았고 체격도 생각보다 호리호리했다. 아는 선수가 별로 없는 나는 평소 스윙 동영상으로 자주 접했던 인물이라 그런지 실제 바로 눈앞에서 박성현을 보니 흥분과 기쁨을 감추기 힘들었다. 선수들이 샷을 준비하는 순간부터는 방해되지 않도록 어떤 작은 소음도 내면 안 되기 때문에 우뚝 멈춰 서서 열심히 쳐다본 다음 이동하면서 수현에게 엄청 재잘댔다. 페어웨이에서 커다란 빨간 우산을 들고 걸어서 자기 공 앞에 이른 박성현은 그 자리에 서서 메이크업 수정을 하는 게 저 멀리서 보였다. 별로 타지 않고 새하얀 피부 표현은 그 덕분인가? 화장품을 뭐 쓰는지 묻고 싶었다. ㅋ 어쨌든 모두의 공 앞에 가보니 박성현의 공이 제일 앞에 있었고 몇 걸음 뒤에서 다른 두 명이 세컨샷을 준비했다. 이때는 처음 보는 거라 "역시 박성현이 롱기~" 했는데, 이후 여러 홀을 보니 항상 박성현이 드라이버샷을 제일 멀리 보내는 것은 아니었고 세 명 공의 거리 차이도 그리 크지 않았다. 종종 박성현 보다 드라이버샷을 멀리 보냈던 북유럽풍 이름의 양인 여성은(나중에 찾아보니 스웨덴 선수) 한 번 공이 많이 빗나가서 스태프들이 광고판을 움직여야 하기도 했다.
박성현은 "남달라"라는 문구가 쓰인 모자와 가방 등을 착용한 팬층도 많이 이끌고 다니는 것 같았고, 박성현 자신도 그런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듯했다. 다른 선수들의 퍼팅이나 스윙 때는 조용한데, 박성현이 스윙이나 퍼팅을 하면 환호와 박수가 많은 편이었다. 당시 다른 두 선수는 7언더였고 박성현 혼자 5언더였는데 우리가 보기 시작한 홀에서 박성현 혼자 버디를 했고, 그 다음 홀도 연속 버디를 했다. 한 번은 혼자 버디 퍼팅을 마친 박성현이 다른 두 명이 아직 퍼팅을 준비할 때 갑자기 공을 들고 이동해서 무슨 일인가 했더니 바로 옆의 다음 홀로 이동한 것이었다. 나처럼 어수룩한 초짜 갤러리는 박성현을 쫓아 옆 홀로 이동했는데, 다른 두 명의 선수가 갤러리 이동으로 인해 퍼팅에 방해를 받지 않았을지 모르겠다. 별로 표정이 없는 듯했지만, 혼자 연속 버디를 한 박성현은 좀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았다. 우리 같은 아마추어도 버디를 한 후 다음 홀은 망하기 일쑤인데, 프로 선수들도 그런 기복이 있는지, 그 다음에는 아쉽게 파를 하더니 그 다음 홀에서도 짧은 퍼팅이 빗나가며 또 버디를 놓쳤다. 한편 개미 허리의 스웨덴 여성은 이때부터 버디를 하며 기분이 무척 좋아 보였다. 이동하면서 깔깔깔 웃기도 하고. 또 한 번은 드라이버샷을 준비할 때였나, 박성현이 갤러리를 천천히 쳐다보기도 했다. 제일 가까운 거리에서 헤벨레하고 서있는 나와 잠깐 눈도 마주쳤는데 순간 너무 부끄러워 내가 먼저 눈을 돌려버렸다. 박성현은 아마 "저 우스꽝스러운 모자를 쓴 아주머니도 내 팬클럽 소속인가 보군" 했을지도 모르겠다. 에구구...
수현도 나도 이런 골프 대회에 구경온 것은 처음이라 중간에 물 마실 겨를도 없을 줄은 몰랐다. 선수들이 계속 이동하고 스윙이나 퍼팅을 준비할 때는 갤러리들이 부스럭거리는 소리도 내면 안 되니 가방을 열 겨를도 없기 때문이다. 특정 선수를 쫓아다니면 힘드니 마지막 홀 그늘에 앉아 구경하는 것이 편하다는 조언을 들었고, 실제로 그렇게 할 계획이었으나 처음 본 박성현의 모습을 놓치기가 너무 아쉬웠다. 그리고 체력적으로 18홀 라운드한 것처럼 땀도 많이 나고 3인분의 각종 간식이 든 무거운 가방 때문에 무척 지쳤지만, 매홀마다 선수들의 미묘하게 달라지는 모습과 기분까지 목격할 수 있어 좋았다. 수현과 나는 이 세 명이 마지막 홀을 끝냈을 때 귀가하기로 합의했다. 하버프론트 본가에서 맛있는 점심이나 먹자고 했다. 물 마실 겨를도 없으니 웬이글의 카톡도 뒤늦게야 확인했다. 미쉘위를 따라다닌 모양이었다. 닥터노도 만났다고 했다.
수현이 사준 갈비탕을 맛있게 먹고 집에 돌아와 잠시 대자로 뻗어 있었다. 머릿속에선 오늘 본 참신한 영상들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대회 홈페이지에서 확인하니 처음에 본 그 아이씨 여성은 장하나였다. ㅋㅋ 생각해 보니 프로들은 참 조용하게 플레이했다. 다른 선수들의 스윙이나 퍼팅마다 굿샷~ 나이스 퍼팅~ 등을 외치지도 않았고 박수치는 갤러리들이 있으면 공 한 번 살짝 들어 감사를 표시할 뿐이다. 아주 만족스러운 스윙이나 퍼팅 때는 자신의 캐디와 기쁨을 나누었다. 어쨌든 내가 정말 잘하고 싶은 것을 무지막지하게 잘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정말 아름답고 큰 감동을 주는 것 같다. 바로 오늘 내가 경험한 것이 참교육이 아닐까? ㅎㅎ 난 이런 행사가 있는지조차 몰랐고 큰 관심 없었는데, 어제 새벽 재잘재잘 오늘의 일정 얘기를 꺼내고 같이 가자고 해준(같이 가지는 않았지만) 웬이글이 갑자기 고맙게 느껴진다. ^^
봉팔이의 일기 끝~
첫댓글 재미있었습니다^^
HSBC취재전문기자보다 더 생생하고, 갤러리의 눈으로 본 눈맞춤 르포였습니다^^
블루스타 님도 어제 재밌게 보셨지요? ^^ 거기서 저희랑 마주칠 수도 있었네요~ 뭐 제 행색이 우스워 다행이기도 하지만 ㅋㅋ
같이 못해 아쉬웠어 ㅎㅎ
걸프친거 만큼 땀흘리고
마지막 18번 홀 미쉘위 그림같은 버디로 너무나 만족했음 ㅎㅎ
내년에도 꼭 같이 ㅎㅎ
다음 경기는 내년이야? 흠,, 오래 기다려야 하는구먼... 쯥
ㅋㅋ 누님. 제목에는 3/4(토)라고 했네요. 중요하지 않은 곳에 딴지쨍이 1인 데니 ㅋ
ㅎㅎ 별 관심 없는 줄 알았는데 ㅋ 데니의 소중한 지적 아주 감사합니다! 바로 수정했으요 ㅋㅋ
재미있으셨군요.
박성현선수의 팬클럽 남달라는 정말 남다르게 난리이군요. 지난 대회에서도 그러더니.... 지나친 팬심은 다른 갤러리들에게 민폐인데....
넹 아주 재미있었어요! 다음엔 더 효율적으로 즐길 수 있을 것 같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