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의 풍모들이 어느새 초로의 시점이니 동반의 세월도 빛의 속도다. 서랍을 열고 연필꽂이로 숨어 행태를 짯짯이 찍어나 볼까. 출근 한 시간 전까지는 원형 불빛에 몰입하는 시인의 몰골이었다가 작업 종료 직후 목로집 부대찌개 앞에서는 드라이한 술꾼으로 변신하지 않던가. 가로 15센티 세로 25센티 종이 하우스를 넘기다 보면, 겨우 식자재 사연으로 대기하다가 뚜껑을 여는 순간 사무치는 페이소스 문자들의 아우성을 만나면서 그 결의가 더욱 굳어버렸다. 기껏해야 7초 함성의 주역이었던 치킨센터 주인이 오래된 동반자 풍경으로 나타나는 이유도 담장 속에 숙성시킨 자양분 탓이리라. 그러면서 가끔은 그가 드리운 토란잎 그늘 아래서 개미집 되어 느긋하게 박자도 맞추고 싶은 것이다._강병철(시인, 소설가)
사람이 지구상에 모습을 드러낸 후 물 위를 걸었던 이가 몇인지 알 수 없지만 사실 그 원리는 간단하다. 내딛은 발이 물에 빠지기 전에 다음 발로 무게중심을 넘기면 그만이다. 느긋하게 한쪽 발을 믿고 의지하는 순간, 물에 흠뻑 젖는 것은 그 한쪽 발만이 아니다. 그러니까 매서운 의심의 눈초리로 주변과 자신을 돌아보면서 한곳에 머무르지 않는 빠른 발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물 위를 걷는 사람이다. 한밤, 아니 어느 아침이나 저녁, 이 시집과 마주한 이는 한 시인이 물 위를 걷는다는 사실을 알아챌 것이다. 사물의 한 꺼풀 뒤에 꽂혀있는 눈초리로 견고한 것들을 의심하면서 사건과 관계들을 빠르게 훑는 발걸음을 만날 테니까._김병호(시인, 과학저술가)
■ 차례
제1부 맛의 기억형성·11/7초 영웅·12/시옷과 쌍시옷·14/새벽안개를 파는 편의점·16/꼭 필요한 사용설명서·18/층간소음의 유래·20/공공의 적·22/나무의 이동·24/홈런볼의 궤적·26/개의 이름·30/발등이 되고 싶은 발바닥·31/늙은 눈·32/ㄱ과 ㄴ사이·33/턱을 괴다·34
제2부
기억의 열쇠·39/가스레인지와 냉장고의 대화·40/전자레인지와 냉동실의 공존·42/참치 통조림의 일생·44/냉장고 뒤에 김치냉장고·46/세상의 거의 모든 통조림·48/황도의 자세·50/김밥의 혁명·52/다르지만 같은 삼각김밥·54/새벽 운동장에서 새의 역할·55/이종 잡스러운 스포츠 개꿈을 꾸다가·56/세상의 모든 그네·58/리모컨을 찾는 시간·60/반납을 독촉함·62/라면 신세계·64
제3부
소리를 찾다·69/빈집·70/땅의 질식·71/뱉고 옮기고·72/극장이 깜깜한 이유·73/우울한 채소·74/꽃의 순서·76/푸른 멀미·77/약·78/식물의 노래·80/사랑의 임계점·81/사랑의 전설이 그네를 타고 뒤뚱뒤뚱·82
제4부
시집과 소설집과 산문집을 내는 작가에 고함·89/퇴근 1시간 전에 퇴근을 생각함·90/출근 1시간 전에 출근길을 생각함·92/늙은 피부·94/물방울 속 낙타·96/슬하(膝下)·98/관광객과 여행자를 태운 고속관광버스·99/시인의 의자·100/눈물·101/바람의 DNA·102/일부 단어에 대한 시론·106/문장론 1·108/문장론 2·110
해설·111 시인의 말·127
■ 시집 속의 시 한 편
아파트 입구에 24시간 간판불이 꺼지지 않는 편의점이 검문소처럼 놓여있다 잠시 자동차 속도를 늦추고 머뭇거리는 차의 대부분은 담배 맥주 스타킹을 사면서 스스로 검열대에 선다 아파트가 잠들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편의점이 새벽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컵라면 뚜껑 사이로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새벽 다섯 시
편의적이지 않지만 편의상 너는 안개다
―「새벽안개를 파는 편의점」 전문
■ 시인의 말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고개를 돌려보면 그 자리에 서 있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고개를 돌려보면 그 자리에 서 있다
어느새 거리는 좁혀져 있다
산책길에서 만나는 나무가 이동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지난해보다 한 뼘쯤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 궁금하다 앞으로 149년은 행간을 누비며 나무의 동태를 관찰해야 할 듯
2015년 여름에 정덕재
정덕재
충남 부여에서 자랐다. 배재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한남대 국문과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으며,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화과 전문사를 마쳤다. 199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해 시집으로 『비데의 꿈은 분수다』가 있다. 다큐멘터리와 시사프로그램 작가로 활동했으며 영상제작 기획과 스토리 콘텐츠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