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적인 효는 없다
노병철
병원 관계자들이 많이 당황했었다. 효를 국가 교육의 근본으로 삼는 나라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병원에서는 입원 보증금이라는 것을 받았다. 궁여지책이었다. 노인네는 입원해 있는데 입원을 시킨 자식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당연히 입원비는 밀린다. 연락해도 잘 받지도 않고 자식들끼리 책임을 내미락 네미락 한다. 이게 초창기 요양병원에서 벌어진 일이다. 지금도 별반 나아진 것은 없다. 병원 구석에선 자식들끼리 병원비로 다투는 것을 흔히 본다.
그래도 요즘은 국민연금이라도 받는 사람이 많이 늘어나서 조금은 나아졌다. 앞으로 더 나아지리라고 본다. 우리 나이 때 사람은 정년퇴직했어도 보험이란 걸 조금씩은 넣어 둔 세대이기 때문이다. 자식들에게 소위 말하는 민폐(?) 안 끼치고 병원에 입원해 있을 수 있는 기본적 경제력을 유지하는 세대라는 의미이다. 있는 재산 다 팔아 자식 공부시켜놓고 그 자식에게 노후를 맡기고자 했던 빈털터리 부모 세대는 이제 지나가고 있다. 자구책을 마련해서 더는 더러운 꼴 안 보고 생을 마감하고 싶은 것이다.
변호사 친구 말로는 패륜범죄가 장난이 아니란다. 그래서 자식들을 상대로 한 부양료 청구 소송이 잇따라 발생하고 있다고 한다. 평생을 죽도록 일해서 자식들을 먹이고 가르치고 키운 부모의 은덕은 없고 그냥 방치한단다. 현대판 고려장이다. 재산이 조금 있으면 재산 나눠주지 않는다고 난리란다. 그래서 줘도 문제 안 줘도 문제라는 말이 나온다. 심지어 시골에 있는 연로한 노인네 이름으로 카드 발급받아 흥청망청 사용하고는 파산신청을 한단다. 부모를 이용한 사기행각이나 다름없는 짓을 서슴지 않고 행한다.
‘쓸모없는 노인네’
요즘 젊은 세대들이 가진 노인을 보는 고정관념이다. 왜 이렇게 한심한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을까. 이유는 딱 하나이다. 자업자득. 그렇게 키웠기에 그렇게 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효’라는 것을 가르친다고 되지 않는다고 본다. 자기가 부모에게 어떤 행동을 했는지 돌이켜 보면 자식이 그대로 하고 있다고 보면 틀림없는 것이다. 부모보다는 자식부터 챙겼던 우리네 삶을 한번 돌이켜 보자. 여태 살면서 애들 생일이라고 모임에 못 온다는 이야기는 들어봤어도 부모 생신이라 모임 빠지고 시골 내려간다는 것은 잘 들어보지 못했다. 그저 편한 대로 해왔다. 이해하리라 생각하고. 그런 행동을 자식들이 보고 배웠으니 더 할 말이 뭐가 있을까.
“ 제발 정신 좀 차려요. 그 성질머리 때문에 언제 큰일 한번 날 거야.”
중학생쯤 되는 애들이 모여 담배를 피우고 있기에 소리를 쳐서 혼을 냈노라 이야기를 했더니 식구들이 놀라서 하는 말이다. 다들 고개 돌리고 지나가는데 왜 혼자 객기를 부려 화를 자초하는 것이냐는 거다. 요즘 애들이 무섭단다. 뉴스에 노인들이 젊은 애들에게 얻어터지는 것을 보지도 못 했냐고 타박한다. 더 기가 막힌 소리는 아파트 경비 아저씨에게 들었다. 담배 피우다 내게 꾸중 들은 애 중 한 엄마가 경비실에 찾아와 왜 자기 애도 아니면서 소리치고 다니냐며 나를 찾겠다고 CCTV를 보자고 했단다.
앞으로 자식에게 얻어터지는 부모가 더 생길 것이다. ‘효’는 절대 거저 생기는 것이 아니다. 어른 없는 효가 없다. 어른이 어른 구실을 못 하면 젊은 애들에게 구박이나 받게 된다. 옹심이 나서 헛소리나 하는 노인네 취급을 안 받고 살려면 지금부터라도 내 부모나 이웃 노인부터 챙기는 것을 자식들에게 보여줘야 할 것 같다. 자식이 나를 무시하고 있는 것을 본다면 내가 부모에게 어떻게 했는지 되새기면서 지난날을 반성해 볼 일이다. 젊을 때 술 마시고 도박이나 하다가 바람나 가족 내팽개치고 집 나가서 늙어 병들어 가족 품에 안긴다는 이상한 이야기에 빠져 ‘효’를 엉뚱하게 해석하지도 말아야 할 것이다. 절대적인 ‘효’는 이제 없다.
첫댓글 제가 손자돌보미 하면서 느낀 것은 아이들은 부모 하는 것 그대로 따라한다는 것입니다. 왕성한 활동 그 에너지는 어디서 샘 솟는지 신기합니다. ㅋ
급 공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