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25일 새벽, 고이 잠든 대한민국을 소련제 탱크와 자주포 그리고 야크전투기를 앞세우고 노도와 같이 기습 침공을 감행해 아무런 전투장비도 없는 국군은 후퇴를 거듭해 국토는 초토화되고 부산과 대구만 남은 국운이 풍전등화와 같은 누란의 위기에 처하게 됐습니다. 이 때 미군의 참전으로 9.18 수도 서울 수복과 함께 압록강까지 진격 통일을 목전에 두고 있을 때 뜻밖에 중공군의 참전과 인해전술로 막대한 인명피해를 내며 후퇴를 거듭해 또 다시 서울을 빼앗기는 1.4후퇴를 맞이하게 됐을 때 입니다.
그 때 서울에 살고 있던 나의 4형제 중 맏형은 미제24사단 통역장교로 복무 중 중공군 침공으로 후퇴 작전 중에 전사, 실종됐습니다. 둘째형과 나의 쌍둥이 동생은 나보다 먼저 1개월 전인 1950년 11월 중순경 징집되어 군에 입대 둘다 6사단 7연대에 작은형이 그리고 6사단 19연대에 쌍둥이 동생이 배속됐습니다. 그 해 12월 중순경 나는 시력이 나빠 제2국민방위병으로 징집됐습니다.
뇌종부대 금화지구 복무중인 정해각
대구육군병원에 입원중인 부상병 작은 형 정해권
둘째형과 나의 쌍둥이 동생은 백 인엽 장군의 6사단 7연대에 작은 형이, 19연대 병력계에 쌍이 동생이 배속되어 근무중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을 앞둔 중공군의 7.13 대공세의 인해전술로 금화지구 교암산 전투에서 둘째형은 부상을 당하여 후송되어 대구 육군병원에서 치료 후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쌍둥이 동생은 같은 해 7월 16일 교암산 전투에서 전사했습니다. 이때 동생의 나이는 17세에 입대, 3년 후 20세에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지요.
1953년 7월 16일 교암산 전투에서 전사한 정해림
1953년 7월 휴전이 임박해짐에 따라 중공군은 유리한 지역을 확보하기 위해 한국군이 방어하고 있던 금성동남지구를 점령하기 위해 5개 사단 병력을 동원 7월 13일 부터 18일 까지 6일간의 피비린내 나는 대격전을 벌였습니다. 6사단 19연대가 방어하고 있던 교암산 지역에 중공군 2개 사단(제199사단, 제201사단)이 공격해와 그 때의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던지 6사단 19연대는 전멸하다시피 되어 겨우 20여명만 생환했다고 합니다.
제6사단 19연대 병력계, 공격을 앞두고 화천지구에서 뒷줄 좌측 세번째 고 정해림
제2국민병으로 복무하고 있던 나는 극도로영양실조로 인하여 죽엄의 문턱까지 갔다가 겨우 살아남아서 1951년 9월경에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그후 나는 중단됐던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3년이나 늦은 나이로 고등학교 2학년에 복학, 졸업 후 S대학에 진학, 졸업 후 1961년 3월경 국가공무원에 임명됐습니다. 바뿐 공무로 인하여 모든 것을 잊고 지내던 중 동작동에 국군묘지가 생기어 어느 날 불현듯 전사한 동생이 생각이나 찾아 가 봤으나 찾을 길이 없어 가져간 화환만 무명용사 탑에 헌화하고 돌아왔습니다. 그 후 용산에 전쟁기념관이 개설되어 그 곳에 가서 6사단 전사자명부를 찾아 봤으나 역시 찾지 못하여 쓸쓸이 되돌아 왔으나 해마다 현충일이 돌아오면 왠지 마음이 무거워짐을 어쩔 수 없었습니다.
국립현충원 현충문
이럭저럭 세월이 흘러 동생이 전사한지 57년째가 되는 2010년 3월에 장모님께서 100세를 사시다 소천 하셨습니다. 장모님께서는 독실하신 기독교신자로 일제 강점기부터 예수님을 믿어 용인 시골 마을에 개척교회를 세우시고 시무권사로 봉사하여 오시다 서울에 아들과 함께 하시면서도 틈틈이 그 교회를 돌보신 분이셨습니다. 언제나 저를 보시면 교회 잘 나가지 하시면서 저를 위해 기도를 하셨습니다.
국립현충원 현충탑
장모님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그런지 제 처남은 명문 S대와 동 대학원을 나오고 처남댁도 같은 대와 대학원에서 수학박사 학위를 받은 명문 집안인 규수로 네비게이토 일을 전념하다 한국 네비게이토 대표를 역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장모님의 문상객 중에는 네비게이토 회원이 많이 왔습니다. 문상객과 인사 중에 한국전쟁기념관에 근무하고 있다는 분을 만나게 되어 전사한 쌍둥이 동생 이야기를 했더니 3일 후에 찾았다고 연락이 와 한국전쟁기념관 홈페이지 전사자 명부를 검색했더니 모든 기록이 정확하게 일치돼 나오더군요. 그런대 국립서울현충원 홈페이지 전사자명부에는 검색이 안 되어 민원실에 항의 했더니 정해림을 정해임으로 오기되어 이름만으로 찾을 수 없게 되어있더군요.
국립현충원 위령실 위패
그래서 육군본부와 현충원에 오기된 전사자 성명 정정 민원을 인터넷으로 내고 국립서울현충원 찾아 갔습니다. 현충원의 직원의 안내를 받아 현충탑 내 위패봉안관에 들어가니 제44판 8면 222번에 오기된 정해임이란 이름의 위패가 있더군요. 이 충헌탑 위패봉안관에는 시신을 못 찾은 전사자 약14만 5천명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고 합니다. 전사한지 57년 만에 고인의 위패 앞에 묵념과 기도를 드리고 나왔습니다.그후 오기된 이름을 바로잡았습니다.
국군 유골발굴단이 발족되어 전국 각처전투지에서 유골을 발굴해 DNA검사를 통해 유족과의 DNA를 대조하여 유골의 시원을 밝혀낸다고 혈액의 채혈을 권하여 피를 뽑아 주고 왔습니다. 6월 6일 현충일에 전사자의 사진 영정을 만들고 큰 아들 내외와 우리 부부는 위패봉안관에 가서 헌화 추모기도를 드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해마다 위패봉안관을 찾아 갔습니다.
그후 육군 본부에서 기별이 와서 6.25 전쟁 때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일을 불과11일 앞두고 16일에 교암산 전투에서 전사한 쌍둥 동생 고 정해림에대한 1954년 10월 15일자 서훈기록에 의거 화랑무공훈장을 66년이 지난 2019년 10월 22일 쌍둥이 형인 제가 국방부에서 대리 수상했습니다. 감개무량하며 세월의 무상함을 다시한번 느꼈습니다. 감사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