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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학科 같은 해 同門修學임에도
외교관 上下관계로 30여 년 보내기
유태현 - "그건 너! 바로 너! 軍때문이야!"
저는 지금도 베트남의 고지대 전원 도시 달랏에서
병아리 같은 학생들의 재롱에 도끼 자루 썩는 줄 모르고 있습니다.
방장님과 현승일 총장님을 모시고 인사동 한식집에서 송별 오찬을 가진 게
엊그제 같은데 9월이면 10년이 됩니다.
강산이 변한다는 10년이 별거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영양가도 없고 시사성도 없는 제 글을 두 번, 세 번 재록하시는 방장님의 뜻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본색 탄로 나는 것이 두려워
모르는 척 엎드려 있었는데 6년 전에 단역이라도 맡아 보겠다고 한 약속을
다시 환기 시켜 주시니, 더 이상 수쿠리 노릇하기가 어려워 만용을 부려 보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수쿠리’는 알면서도 모르는 척, 자기 속을 안 내보이고
음흉을 떠는 별로 바람직하지 못한 인간상을 나타내는, 어릴 때 가끔 듣던 말인데
사전에 안 나오는 것으로 보아 제 고향 지역 방언인 것 같습니다.)
포커에서 하이-로우(high–low) 게임이 판이 커지고 활기가 나듯
글방에도 로우 패에 해당하는 글이 가끔 실리는 것이 구색을 맞추는 의미가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용기를 내는데 도움이 되었고요.
방장님과 글방 식구들의 지도로 DNA에 없는 글 솜씨를 늦게나마 갈고 닦으면
치매 예방에도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욕심도 작용했으니
친절한 지도와 가차 없는 질정이 있기를 기대합니다.
우선 방장님의 실수(?)를 바로 잡는 것으로 시작하겠습니다.
외교협회 (전~현직 외교관의 모임)에는 임홍재 대사와 임재홍 대사가 따로 있습니다.
두 분 다 재가 경외하는 동료이고 해박한 전문 지식과 원만한 인품 등
공통점이 많고, 한글 이름의 조합이 같지만 엄연히 다른 분들입니다.
그런데 방장님께서 실수인지, 소생을 불러내기 위한 고단수 전술인지 모르지만
두 분을 섞어 놓는 요술을 부리셨습니다.
임홍재(任洪宰) 대사는 내 밥값도 좀 하라는 생각으로 글방에 제가 추천했는데
웬 영문인지 얼씬도 하지 않으니 그렇다 치고,
임재홍(林裁弘) 대사는 자칭 물대사라는 필명(?)으로 글방에 데뷔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본인 사진 설명에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붙여 초상권 침해 정도가 아니라
훼손을 당했는데도 미동을 안 하시니 아마도 유 모의 나태함 때문에 생긴 일이니
결자해지 하라는 뜻이 아닌가 짐작됩니다.
사실은 작년 8월엔가 글방에 요술 글이 처음 올라 왔을 때
뭔가 해야 되겠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마침 제가 손자들 보러 장기 여행 중이어서
돌아온 후 하겠다고 미뤘다가 스트레스 엄청 받으면서 몇 달이 지나갔습니다.
하루 빨리 두 분을 원위치 시키시기 바랍니다.
지적할 게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방장님이 저를 소개할 때 꼭 반기문 총장의 입학 및 졸업 동기라는 표현을 사용하시는데
한국에서는 별로 중요시 하지 않는 졸업 동기라는 말을 병기하시는 뜻을
짐작합니다만 사실과 다릅니다.
반 총장과 저는 입학은 같이 했지만 외국에서 중시하는 졸업 기준으로는
제가 엄연한 3년 선배입니다. 반 총장이 재학 중에 군대를 때웠기 때문이지요.
('때웠다'는 이런 표현, 죄송합니다만 아주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학보 혜택이 없어진 당시로서는 재학 중 입대가 흔한 일이 아니었는데
반 총장은 매우 현명한 결정을 한 거지요. 어째서 현명한 결정이었는지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방장님도 언젠가 울분을 토로하신 적이 있듯이, 군사정권 초기에 5년 동안
외무고시를 실시하지 않고 고급 외교관을 군 출신으로 채운 적이 있지요.
(외교에는 전문가가 따로 없고 영어만 좀 할 줄 알면 아무나 할 수 있다는
질 낮은 정치군인들의 이러한 위험한 사고 잔재가 아직까지도 남아 있어 심히 우려됩니다만).
계속 되는 학원 소요로 학기의 반 이상을 대학은 군인들에게 내준 채
주인인 학생은 학교 출입도 못하고, 배운 게 없으니 시험을 못 보고,
리포트로 성적을 내는데 교과서를 베껴 내면 A학점이 나오는,
그런 시기에 우리가 대학을 다녔지요.
제 경우 졸업 후 입대하여 1등병이 될 무렵 드디어 외무 고시가 생겼는데
그 후에도 어느 대통령의 표현대로 만 3년을 썩고 나와
제2 외국어는 알파벳부터 새로 시작하여 어렵사리 시험에 합격하였습니다.
한편 반 총장은 여영부영 대학생활 대신 신성한 국방의무를 치르고
복학 후 시험이 생겨 넉넉하게 재학 중에 합격을 했기 때문에
외교부는 저보다 3년 선배이며, 이후 두 사람은 항상 상하 관계로 30 여년을 보냈습니다.
제가 주미대사관 참사관 시절 반 총장은 공사 급 총영사.
제가 외무부 본부 총무과장 시절 반 총장은 미주국장,
제가 청와대 의전 비서관 시절 반 총장은 의전 수석… 이런 식으로요.
그 후 총영사와 차관, 대사와 장관으로 간격이 점점 넓어졌는데
이유는 두 사람의 함량 차이에서 찾는 것이 합리적일 것 같습니다.
학교 관련 반 총장과 저는 또 다른 인연이 또 있습니다.
반 총장은 하버드에서, 저는 프렛쳐 스쿨(Fletcher School of Law and Diplomacy)에서
연수 유학을 했는데 두 학교는 학점 교환 신청이 가능하고
도서관 등 시설을 같이 이용할 수 있습니다.
국제정치 관련 강의가 없는 하버드에 적을 둔 외교부 직원들은
대부분 프렛쳐에서 몇 과목을 수강하곤 했는데 그런 연유로 반 총장과 저는
프렛쳐에 공통 은사를 몇 분 모시고 있습니다.
크게 보아 유학도 동문인 셈인데, 거기서는 제가 2년 선배이기 때문에
학점 경쟁할 일은 없었습니다.
용기를 낸 김에 베트남에 관한 졸문 하나 같이 보낼 생각이었는데
그러다간 몇 주일 몇 달 더 걸릴 것 같아 후기를 약속하기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글방에 나오는 제 사진을 보니 10년이 별게 아닌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오늘 날짜로 업데이트한 아래 사진을 보냅니다.
방장님과 글방 식구 여러분들의 새해 만복을
기원합니다.
2019.1.7.
달랏에서 유태현 배상
P.S:
쓰고 보니 반 총장과 제가 졸업 동기가 아니라는 설명이 불필요하게 길어졌고,
특히 유학 부분 내용이 부적절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방장님의 참고로만 하시고 삭제나 수정을 하셔도 좋으니
편하게 처리하시기 바랍니다.
<駐베트남 대사, 샌프란시스코 총영사, 외무부 영사국장역임/서울대 문리대
외교학과 졸(반기문 총장과 입학 졸업동기)/베트남 거주 중/천안 産>
오만과 편견
오지명
안녕하세요, DC의 김명희 선생님!
스타에게 보낸 편지에 답장을 받는 기분으로 어제는 참 행복했습니다.
제가 평소 김 선생님의 팬 이였음은 공공연히 글방에서도 몇번 표현한적은 있지만,
이렇게 응답을 받으리라곤 꿈에도 생각못했습니다.
더군다나 인물평까지 해주시면서 그걸 '결례' 라고 표현하시는 그 수줍어하심과 겸손하심이,
제가 늘 이상형으로 생각해오던 영국의 여류 작가 제인 오스틴(Jane Austen) 의 그것과
흡사하여 한동안 선생님의 글월을 물끄러미 쳐다봤네요.
어디서 또 그런 흔적 발견할수 있나 싶어서요.
선생님의 글은 따뜻하면서도(이번 글 '윤회' 에서처럼) 포근합니다.
그러면서도 어떨땐 찬바람을 휑~ 불며 떠납니다. 도도하고 쌀쌀맞은 여인처럼요.
근데 그게 사람을 미치게 하는거 아세요? 아무나 쉽게 가질수 있는 매력이 아니거든요.
제가 이 상반된 여인의 매력을 처음 접했던것은, 대학때 교재로 접한
제인 오스틴(Jane Austen)의 "오만과 편견" 이였습니다.
저는 그 책을 처음 영문으로 읽고, 세상이 다 노랗게 보였습니다.
'아니, 어디서 이런 문체? 그것도 그 시대에?..'
책을 읽으면서 심장이 뛰 고 있다는 걸
느꼈던 게 그때가 처음이 아니였나 싶고, <오만과 편견> 표지
그후 닥치는대로 영국의 여류작가 에밀리 브론테,
샬롯 브론테 작품을 섭렵했던것 같습니다.
친구들은" 야, 오지명! 허구헌날 그것만 읽으면 너도 제2의 제인 오스틴처럼
한국 문단을 빛내야 되는거 아냐?"
"야, 하드보드책이 낡으니까 은근히 멋잇다..자고로 일단 책은 비싼걸 사야 돼.."
쓸데없는 농담 짓거리가 귀에 들리지도 않은채,
저는 어느새 " 히드클리프~! 히드클리프~! " 를 외치는 폭풍의 언덕에 서 있었고
이미 부인이 있는 백작 로체스터를 사랑하는 제인 에어가 되어있었습니다.
그리고 Darcy의 오만과 편견에 애써 태연한척 ,인습에 사로잡히지 않고
재치가 넘치는 당당한 엘리자베스가 되어있었죠.
김 선생님께서 보잘것없는 제 사진을 보시고 말씀해주신,
21세기의 새로운 한국여성의 모습이 엿보인다고 하신것은,
아마도 제 얼굴에 그런 수줍은듯 쌀쌀맞으나, 그토록 가슴에 품고 다녔던
제인 오스틴의 소설속 주인공의 모습이 은연중 비친게 아닐까 싶습니다.
왜 어떤것에 너무 탐닉 하다보면 그 사람의 외양도 그런것과 많이 비슷해 지드시요.
저는 어느덧 고독이 무섭지 않고, 고독을 즐길줄 아는 여유로운 30대의 끝자락에 와 있습니다.
갖고 싶은것 다 가질수 있다고 믿었지만, 그것은 젊음이 남기고간 흔한 어리석음이였으며,
제 얼굴이 깨끗하고 맑은 모습으로 비춰졌다면, 아마 그것은 철없이 흘려보냈던 지난날을
무심히 회상하는, 제 특유의 표정 때문이 아니였을런지요.
제 삶은 제가 꿈꾼대로 흘러갔던게 아니라, 저를 원하는 사람들이 저를 어디론가
끌고 갔던것 같습니다. 거기가 어딘지도 모른채, 굿판의 신들린 무당처럼 춤을 추라면
춤을 춰야했고, 작두를 타라면 작두를 타야했지요.
굿판이 끝나면 제 마음은 늘 헛헛했습니다.
지금도 종로 한복판을 걷는게 무섭습니다. 특히 파고다 공원 사거리,
시사 영어사 앞을 지날때면 누군가가 꼭 저를 부를것 같습니다.
어딘가에 숨어있을 그 굿판의 환영(幻影)이 " 이봐, 어디갔다 이제 왔어..?" 하며
제 뒷덜미를 잡을까봐요. 이런걸 보고 occupational hazard라고 한다지요.
아무튼, 김 선생님!
저희 이런 얘기..마티니 라도 한잔 앞에두고 얘기해야 되는거 아닌가요?
링컨책 출간준비 하시느라 정신없으시죠? 그래도 건강 늘 신경쓰셔야 하구요
(확실히 체력이 되야 뭐든 하겠더라구요)
저도 책이 참 많이 기다려집니다.
언제 한번 서울에 나오실 있으시면 꼭 뵐수있기를 고대해 봅니다.
그때 제인 오스틴, 에밀리 브론테 자매 얘기, 밤새도록 해주실거 믿고
저 아이패드(i Pad) 안갖고 나갈겁니다. (검색 불필요)
선생님, 선생님을 알게되서 너무 행복합니다.
글방에서 건진 수확중 제겐 제일 큰 수확이였던것 같습니다.
(수확이란 표현이 너무 경망스러우시다면, 차라리 영어로 fruitful 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모든게 삼촌이 운영하시는 글방의 위력이였음을 다시한번 인정하게 됩니다.
이번 미국 대선에는 선생님께서 찍으신 후보가 당선된다면 더욱 기쁘시겠네요.
저는 다음 생에 다시 태어 난다면 뭐로 태어 나고싶은줄 아세요?(선생님의 글, '윤회'에
근거하여) 제발이지 다음 생에서 만큼은 땅덩이 큰 나라에서 태어나고 싶습니다.
미국 대선특보를 TV에서 보니까, 미 전역을 구획을 정하고 컴퓨터 그래픽 처리를
하면서 여기선 누가 우세고, 저기선 누가 열세고.. 땅덩이가 워낙 크니까
그렇게해도 멋잇더라구요. 이건 뭐..구획을 나누고 자시고 할것도 없는
작은 땅덩이에서 웬 싸움은 그리도 끊이없이 하는지.
선생님!
좋은글, 많이 기대하겠습니다.
아, 참! 그리고 마르코 카페에도 시간나면 들려주세요.
신우재 '마사모' 글방 회장님께서 카페 총책임장을 맡고 계신데,
저도 예전에 제 개인 카페 하나 만들려다 지쳐서 결국 나가떨어졌는데 (생각보다 힘듭니다.)
글방 회장님께서는 어떻게 소리소문도 없이 금새 만드셨더라구요.(감탄감탄!!)
남편 이석배가 안경태를 치켜올리면서 하는 말,
(주로 별것도 아닌 일에 심각하게 안경태 올리며 말하는 버릇이 있어요.)
"카페 처음 생기면 초반에 멤버 확~ 잡아야 하는거 알지? 그러니까 당신이 수고 좀 해~!"
카페가 무슨 시장경제(market economy) 인줄 아나봅니다.
그래서 요즘 저도 제 깜량껏(?) 하고 있습니다. 드나들다 보니 재미도 솔솔있구요.
아이들이 다 잠들어야 비로서 제 시간이 되기에, 카페에 글 좀 올려볼까..하는 시간이면
새벽 1시, 2시예요. 그래도 마음은 행복합니다.
자주 드나들고 싶지만 조만간 큰 녀석이 큰 시험을( 시험 이랄것 까지는 아니고,
콩쿠르 같은거) 앞두고 있어서 심적으로 거의 철야기도 하는 애미의 심정입니다.
그래도 그런 삶에 잠시 쉬어갈수 있는곳이 바로 마르코 카페가 아닌가 싶네요.
음악도 들을수 있고, 세상 사는 얘기도 접할수 있고...
선생님도 요즘 책 출간 때문에 부쩍 바쁘시겠지만, 틈틈히 시간 나시면
카페에도 들려주세요. 거기서 저 만나시면 또 새로운 기분이 드실지도 모른답니다.
참, 선생님, 그거 아세요?
선생님이 이 글방에다 쓰신 글, 마르코 카페로 금새 옮겨져요.
그리고 마르코 카페에다 올린 글도 이 글방으로 다시 옮겨지고요.
저도 뭐가 뭔지 잘 모르겠어요.ㅎ
그럼 다시 만날때까지 안녕히 계세요.
오지명 드림
<前'시사영어'토익-토플 강사/이석배(現컬럼비아大 경제학과 교수/서울대 경제학과
교수 역임)의 처/방장의 누님 김경자의 셋째딸>
- 2012.11.8字 마르코글방 카페의 <열린글방>에서 轉載:방장 6년 전 오늘(2016. 2. 8) 글방을 빛낸 글#1~#2再錄 #1 "어린 것들 곱게 자라는 이빨 보듯, 새해는 그렇게 맞을 일이다!" 박정삼 설날 아침 떡국 맛있게 드시고 건강 복, 웃음 복, 많이 받으세요. 설날, 시 한 수로 歲拜에 대신합니다.. 박정삼 ................ 설날 아침에 김종길 매양 추위 속에 해는 가고 또 오는 거지만 새해는 그런대로 따스하게 맞을 일이다. 얼음장 밑에서도 고기가 숨쉬고 따뜻한 미나리 싹이 봄날을 꿈꾸듯 새해는 참고 꿈도 좀 가지고 맞을 일이다 오늘 아침 따뜻한 한 잔 술과 한 그릇 국을 앞에 하였거든 그것만으로도 푸지고 고마운 것이라 생각하라 세상은 험난하고 각박하다지만 그러나 세상은 살만한 곳 한 살 나이를 더한 만큼 좀 더 착하고 슬기로울 것을 생각하라 아무리 매운 추위 속에 한 해가 가고 또 올지라도 어린 것들은 잇몸에 돋아나는 고운 이빨을 보듯 새해는 그렇게 맞을 일이다 <그랜드레저코리어(GLK) 창설사장, 국정원 2차장, 국민일보 편집국장, 한국일보 홍보부장, 한국일보 경제부기자 역임(한국일보 견습 26기)/광주일고~서울대 문리대 철학과 졸> #2 “여기는 어느 나란지 분간할 수 없다”는 李箱의 詩語 속엔 죽음이 예지돼 있지요! 김명희 Chicago의 조광동 선생님, 지난번에 이곳 눈사태에 대하여 Regards 해 주신 것 감사합니다. 시카고에도 눈이 엄청 오는 곳인데. 옛날에 시카고에 갔더니 바람이 눈을 집어서 얼굴을 때리는데 어찌나 아팠던 지요. 눈을 뜰 수가 없었습니다. 시카고 바람 엄청 쎄고 무척 춥고 그래도 사람들은 따뜻합니다. 시카고는 제가 뉴욕 다음으로 좋아하는 도시입니다. 서정주 시인이 자화상을 쓴 것이 23세였다는 것을 post 해주신 신복룡 선생님, 신우재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되니 그의 자화상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자화상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나 궁금하여 다른 두 시인의 자화상에도 들어가 보았습니다. 이상(李箱) 시인은 그의 자화상에서 “여기는 도무지 어느 나라인지 분간할 수 없다”라 했습니다. 출생부터 (1910생) 한국말과 일본어를 하며 자란 이상은 자기가 도무지 어느 나라 사람인지 분간할 수 없다는 투정입니다. “여기는 폐허다”, “풀이 말라버리듯이 수염은 자라지 않은 채 거칠어갈 뿐이다”에서 우리는 그의 좌절을 봅니다. “자라지 못하는 수염”, 이것은 생명력의 부재지요. 일본 식민지하에서 주권을 잃고 생명력을 잃어가는 조선 젊은이들의 현실이었습니다. 머리가 좋아 일본학교를 다녔다는 그가 “너는 조센진!” 하는 급우의 경멸의 눈길을 어떻게 처리하였을까. 그의 섬세하고 섬광 같은 기질 (temperament)을 생각해봅니다. 그의 땅은 황폐되어갔을 뿐입니다. 그의 자화상에는 죽음이 예지되어 있습니다. ^천형의 벌을 몸에 지니고 다니던 문둥이 시인 한하운은 시《나》에서 ”하늘과 땅과/그 사이에 잘못 돋아난/ 버섯이올시다 버섯이올시다”라 했습니다. 그는 좀 더 존재론적이었습니다. 문둥이를 거부하면 자신의 존재가 거부되는 부조리, 이것이 버섯입니다. 나무도 아니고 풀도 아닌 버섯, 사람도 아니고 짐승도 아닌, 그러나 사람으로 살아야하는 문둥이의 절망적인 항의입니다. 허공에 던져진 그의 항의는 갈 곳이 없어 돌아와 도루 문둥이가 되어 앉아버립니다. 한하운의 《나》는 문둥이고 그의 문둥이는 《나》입니다. 잘못 돋아난 무엇이어도 문둥이는 이 시인에게 영입되고 있습니다. “버섯이올시다 버섯이올시다” 그는 절규하듯 다짐합니다. 버섯의 삶에도 가슴속에는 설레는 심장이 있고 슬픔이 있고 그리운 Memory가 있습니다. 문둥이를 보듬어 안는 것은 그의 삶의 정열이었습니다. 서정주의 시 《자화상》은 “애비는 종이었다”로 시작됩니다. 실로 놀라운 선언이지요. 이것은 계급사회였던 1930년대의 한국사회에 던져진 도전의 선언입니다. 높은 가문 출신으로 경성대학이니 와세다 대학이니 하는 쟁쟁한 학력을 자랑하던 경성의 Literary Circle에는 그가 설 자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본질로 돌아옵니다. 실존의 순간입니다. 그의 옛 집에는 대추 꽃이 있고, 《대추 꽃나무》(그의 詩) 아래에서 그는 운명적인 선언을 한 것입니다. “애비는 종이었다”라는 구절은 “나는 아무 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라던 마지막 구절과 맞물립니다. 그는 23세가 되었고 성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화상을 씁니다. 시가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에 왔을 때에 서정주에게는 새로운 세계가 열립니다. 그는 새 사람이 된 것입니다. 애비가 종이라는 사실은 그의 운명이었으나 뉘우치지 않겠다는 것은 그의 선택입니다. 그는 이제 그의 운명의 주인이 된 것입니다. 비천한 집안의 출신이라는 부끄러움과 열등의식으로부터 벗어나 하늘과 땅 사이의 자유인이 된 것입니다. 그는 양반-쌍놈 사회제도의 Debilitating Cultural Trappings(사람을 조이는 문화적 군더더기)에서 벗어나 넓은 들에 혼자 서있는 잡초 같은 시인이 된 것입니다. 신우재 선생님, 서정주 《자화상》의 두 번째 절은 나중에 쓰인 것이 아닌가요? 첫 절과 두 번째 절의 기상(氣象)이 너무나 달라서요. 이런 문제를 취급한 study 같은 거 있나요? 김승웅 방장님, 혹시 양건 선생님이 아직도 글방 멤버이신가요? 옛날에 서정주 선생의 자화상에 관심이 있던 분이라고 생각되어서요. 멤버가 아니시더라도 이 글 보내주실 수 있을까요? 지혜 씨, 건강 많이 회복된듯하여 반갑습니다. 이름을 부르니 보고 싶어지네요. 이제 곧 봄이 올 것인데 따스해지면 날마다 walking을 조금씩 시작해보는 것이 어떻겠어요. 나는 산속에 눈이 녹으면 다시 하이킹에 따라다닐 거예요. 겨울 산이 좋아서요. 지난 가을에는 머루도 따 먹었답니다. Love you, 명희 <시인, 번역문학가/전 미국무성 통역/저서: "에브러햄 링컨", "이상(李箱)의 오감도 (烏瞰圖)"(英譯)/고대 철학과~조지워싱턴대 대학원 졸/DC거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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