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앞에서 한번 기술한 것처럼 조셉 프로파치의 프로파치 패밀리는 그가 죽은 후 그 다음 다음 보스의 이름을 따 콜롬보 패밀리로 불리게 된다. 조셉 프로파치는 1962년에 암으로 죽었고, 그 자리는 언더보스였던 조셉 말리오코에게 돌아갔으나 조셉 말리오코도 심장병 등으로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아 다음 해인 1963년에 죽게 되며, 말리오코가 죽은 뒤 프로파치 패밀리의 보스로는 조셉 콜롬보가 위원회에 의하여 임명된다. 그런데 콜롬보가 보스로 임명되기까지는 뉴욕의 5대 가문의 일이 서로 복잡하게 뒤얽힌 사연이 있었다.
조셉 말리오코
조셉 콜롬보
보나노 패밀리는 원래 살바토레 마란자노가 보스로 있던 조직을 마란자노 사후 조셉 보나노가 물려받은 것이다. 찰스 루치아노의 승인이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조셉 보나노는 1924년에 쿠바의 하바나를 경유하여 미국에 불법 입국한 사람으로, 미국에 온 이후 처음에는 시카고 패밀리에서 활동하다가 1920년대 말, 뉴욕에서 카스텔라마레세 전쟁이 벌어지자 살바토레 마란자노의 편에 서기 위하여 뉴욕으로 왔다. 보나노는 마란자노와 같은 시실리의 카스텔라마레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란자노가 제거된 후 보나노는 루치아노의 허락으로 마란자노가 이끌던 사업을 그대로 맡게 되어 뉴욕의 강력한 보스의 하나로 떠올랐다. 그의 고리대금업과 도박사업의 영역은 미국 내는 물론 국경 밖으로도 미쳐, 캐나다의 몬트리올로부터 태평양의 하이티 섬에까지 걸쳐 있었다고 한다. 찰스 루치아노가 투옥되고 루이스 부챌터가 토마스 듀이로부터 심한 추적을 받고 있을 무렵, 조셉 보나노는 시실리로 날아가 잠시 몸을 숨기기도 한다. 1938년의 일이다. 그는 몇 년 후 돌아왔고 1945년에는 합법적인 미국의 시민이 된다. 찰스 루치아노가 이탈리아로 추방된 이후에 보나노는 같은 시실리의 카스텔라마레 출신인 조셉 프로파치와 연합하여 프랭크 코스텔로-알버트 아나스타샤의 세력과 거의 대등하게 뉴욕의 지하세계를 다스렸다. 이어 뉴욕 5대 가문의 대전쟁이 있었고, 1959년에 비토 제노베제가 수감되자 뉴욕의 세력 균형은 극심하게 변한다.
마침내 1962년이 되어 카스텔라마레세 전쟁 이래 오랜 동지였던 조셉 프로파치가 죽자 보나노는 갬비노-루케제 연합에 대하여 상대적인 열세를 느끼게 되었고, 그러한 상황을 역전시키기 위하여 보나노는 갬비노와 루케제에 대한 히트를 계획하게 된다. 갬비노-루케제 연합이란 앞에서도 말했듯이, 카를로 갬비노와 토마스 루케제가 각각 그들의 아들과 딸을 결혼시킨 사돈지간이었기 때문이다.
보나노는 프로파치의 후임인 조셉 말리오코와 함께 작전을 상의하였고 말리오코는 가문의 믿음직한 카포레짐인 조셉 콜롬보에게 그들의 히트를 일임했다. 목표는 카를로 갬비노와 토마스 루케제를 비롯하여 버팔로의 스테파노 마가디노, 캘리포니아의 프랭크 디시모네 등이었다. 스테파노 마가디노와는 그간 사이가 나쁘지 않았으나 당시 보나노는 캐나다의 토론토로 사업을 확장하기를 원하고 있었고, 그곳은 스테파노 마가디노의 사업 영역이었기 때문에 그를 히트의 대상에 포함시킨 것이었으며, 프랭크 디시모네를 선택한 것은 그가 사업상 갬비노 패밀리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셉 콜롬보는 보스로부터 이 일을 위임받는 순간, 이 작전은 거의 실행 불가능하며 이 명령을 이행한다는 것은 곧바로 자살행위임을 깨달아 배반을 결심하게 된다. 콜롬보는 제노베제 패밀리의 보스인 토마스 에볼리에게 중재를 부탁하였고, 에볼리의 집에서 갬비노 등과 회동하게 된다. 1964년 9월 18일의 일이었다. 이 자리에는 갬비노와 루케제 뿐 아니라 시카고의 샘 잔카나도 참석하고 있었다고 한다.
콜롬보는 그들에게 일의 전말을 털어놓았으며, 그들은 다른 루트를 통하여 콜롬보의 진술이 사실임을 확인하게 된다. 그들은 음모를 미리 알려준 대가로 콜롬보는 그 목숨을 살려주기로 하고, 다음으로 조셉 보나노에 대한 처리를 상의하였는데, 시카고의 보스 샘 잔카나는 보나노의 무조건 처형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오래 전부터 보나노와 함께 사업을 해왔던 토마스 루케제는 그를 살려주기를 원하였고, 루케제의 의견이 카를로 갬비노에게 받아들여져 결국 보나노는 목숨만은 살려주는 것으로 최종 결론이 내려진다.
1964년 10월 21일, 조셉 보나노는 뉴욕의 파크 거리와 37번가가 만나는 곳에 자리하고 있는 그의 아파트에 들어가려는 찰나 그의 직속 부하인 마이크 자파라노(Mike Zaffarano)에 의하여 납치되고, 그로부터 약 1년간 버팔로의 스테파노 마가디노의 저택에 감금되어 생활하게 된다. 보나노는 그의 사업 일체를 다른 가문에 넘기고 자신은 일선에서 은퇴할 것을 굳게 약속한 뒤에야 겨우 풀려날 수 있었는데, 이 당시 그의 사업은 갈취와 고리대금업, 마약사업, 도박사업 등을 모두 합하여 1년에 약 20억 달러의 규모였다고 한다.
콜롬보는 이 히트의 일을 미리 갬비노 등에게 흘려준 대가로 조셉 말리오코가 죽은 뒤 한동한 공석이던 프로파치 패밀리의 모스로 임명된 것이다. 위원회에서 콜롬보가 보스로 임명되는 데 가장 큰 힘을 발휘한 사람이 카를로 갬비노였으므로 갬비노가 콜롬보 패밀리에까지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 이유였다. 카를로 갬비노는 바야흐로 뉴욕의 지하세계에서 가장 큰 권위를 가진, 바로 보스 중의 보스라고 일컬을 수 있었다.
그 후에도 한참동안 프로파치 패밀리로 불리던 이 가문은 이후 콜롬보가 이탈리아계 미국인 공민권 운동(Italian-American Civil Rights League)을 적극 전개하면서 언론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게 되어, 콜롬보의 이름이 세간의 유명세를 타게 되면서부터 콜롬보 패밀리로 이름이 바뀌어 불리게 된다.
이탈리아계 미국인 공민권 운동의 마크
조셉 콜롬보는 1960년대 말, 이탈리아계 미국인 공민권 연맹이라는 것을 만들어 내었다. 미국에서는 모든 이탈리아인들이 마치 다 마피아인 것처럼 취급되고 있어 그들이 시민으로서의 당연한 권리 행사에 심한 지장을 받고 있으므로 이러한 현실을 바꾸어 보겠다는 것이 이 운동의 목적이었다. 그리고 콜롬보의 속셈은 그 조직의 이면에 그의 사업을 숨기겠다는 것이었다. 위원회의 다른 사람들은 콜롬보의 이와 같은 움직임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나 콜롬보의 뒤에는 갬비노가 있었으므로 겉으로 드러난 불평은 할 수가 없었다.
뜻밖에도 이 연맹 운동은 많은 이탈리아계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고, 필연적으로 콜롬보는 매스컴을 타게 되었다. 1970년 6월 29일에 있었던 연맹의 첫 번째 회합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어 5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회합 장소에 모였다. 당시 뉴욕 주지사였던 넬슨 록펠러(Nelson A. Rockfeller)는 이 운동의 정치적 중요성을 불현 듯 깨달았고, 재빨리 이 운동을 적극 지지하는 사람 중의 한 명이 되었다고 한다. 이 이탈리아계 미국인 공민권 연맹은 마치 과거의 유니오네 시실리아나 운동이 다시 출현한 것 같았다. 이때까지 프로파치 패밀리로 불리던 조직은 이러한 와중에서 언제부터인가 슬그머니 콜롬보 패밀리로 불리게 된다.
넬슨 록펠러
그러나 콜롬보는 너무 멀리 나갔다. 연맹의 활동이 확대되면서 FBi의 간섭이 더 심해진 것이다. 더 이상 이탈리아계 미국인들의 모임이 지속되어 언론의 관심이 그 정도를 더해가다가는 마피아들의 사업에 이로울 것이 전혀 없었다. 콜롬보가 자신의 위치를 되돌아 보는 것을 게을리하는 동안 드디어 그의 후원자인 카를로 갬비노도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어 버린다.
1971년 6월28일의 이탈리아계 미국인 연맹 창설 2주년 기념식은 뉴욕의 콜럼버스 서클과 이웃의 센트럴 파크에서 열리게 되어 있었고, 여기에는 뉴욕 주지사 넬슨 록펠러를 비롯한 여러 유력 정치인과 프랭크 시내트라, 새미 데이비스 주니어와 같은 연예인들도 참석하도록 예정되어 있었다.
오전 11시 30분, 콜롬보는 수만 명의 참석자들로부터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기념식장에 입장하였다. 곧 그를 취재하러 기자들이 몰려들었는데, 잠시 후 몇 발의 총성이 들리며 콜롬보는 다시 차에 실려 대회장을 빠져나갔고, 이탈리아계 미국인 공민권 연맹의 2차 기념식은 원래 계획대로 진행되지 못하고 무산되어 버린다. 콜롬보는 몰려든 기자들 중에 섞여 있던 한 히트맨으로부터 세발의 총격을 머리에 맞고 중상을 입었던 것이다. 콜롬보는 루즈벨트 병원으로 옮겨져 5시간에 걸친 대수술을 받게 되나 결국 회복하지 못하고 식물인간이 되었다.
총에 맞아 쓰러진 콜롬보
흑인이었던 히트맨, 제롬 존슨(Jerome A. Johnson)은 공식 요원의 표찰을 차고 카메라맨으로 위장해 있었으며, 다른 기자들과 함께 콜롬보에게 다가가 총을 쏘았다. 그런데 저격 직후 존슨 자신도 누군가에 의해 총에 맞아 사살되었다. 히트를 흑인에게 위탁한 것은 콜롬보의 신변 경호원들을 속이기 위한 수법이었고, 1차 히트맨을 다시 처치하여 그의 입을 막아버린 더블 콘트랙트는 마피아의 전형적인 수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제롬 존슨
콜롬보는 움직이지 못하게 된 이후로도 7년간을 더 살았지만 이미 조직의 일에 간섭할 수는 없었다. 콜롬보 이후로는 조셉 야코벨리(Joseph Yacovelli)가 조직을 맡았고 이후로 조셉 프로파치가 세력을 일으켜 놓은 콜롬보 패밀리는 뉴욕 지하세계에서 전면에 나서기 어렵게 된다. 콜롬보의 피격은 다름 아닌 카를로 갬비노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다. 갬비노는 더 이상 콜롬보의 광대 짓거리를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조셉 야코벨리
콜롬보의 장례식
갬비노는 시카고의 토니 아카르도에 비견될 수 있는 매우 현명한 보스로, 마피아의 역사를 통틀어 몇 번째 안에 꼽힐 수 있는 대단한 보스였다. 그는 크지 않은 체구에 항상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는 인자한 아저씨와 같은 외모로, 알버트 아나스타샤나 비토 제노베제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타입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의 이러한 외모와 조용한 성격 때문에 다른 보스들은 갬비노의 진면목에 대하여 계속적으로 잘못된 판단을 하였다.
갬비노는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에, 그것을 해결할 방법으로 폭력적인 것과 비폭력적인 것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을 경우에는 항상 비폭력적인 해결 방법을 우선적으로 고려하였다고 한다. 그의 인내심은 보통을 훨씬 넘는, 아주 대단한 것이어서 한번은 그가 부하들 앞에서 보스인 알버트 아나스타샤로부터 뺨을 맞을 뻔한 적이 있었을 때에도 모욕받은 티를 전혀 내지 않고 웃어넘겼다고 한다. 다른 보스들은 갬비노를 겁쟁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였지만 결국 끝까지 살아남은 것은 갬비노였고 비토 제노베제, 알버트 아나스타샤 등 그의 적들은 모두 쇠락의 길을 걸었다. 갬비노도 토니 아카르도와 마찬가지로 일생동안에 걸쳐 단 하루도 감옥에서 밤을 지새본 일이 없다.
갬비노는 1976년에 74세의 나이로 죽으면서 조셉 비욘도(Joseph Biondo) 이후 6년간 가문의 언더보스였던 아니엘로 델라크로체를 승진시키지 않고 자신의 사촌인 폴 카스텔라노를 지명하여 뉴욕의 지하세계를 긴장시켰는데, 이는 카스텔라노와의 비밀 약속으로 자신의 아들인 토마스 갬비노를 다음의 보스로 밀어주도록 부탁한 대신이었다. 결과를 놓고 볼 때 이 선택이 갬비노가 일생을 통하여 저지른 유일한 실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조셉 비욘도
아니엘로 델라크로체
폴 카스텔라노
델라크로체는 분노하였으나 가문의 고문인 조 갤로와 가문의 강력한 카포레짐인 제임스 파일라(James Failla), 에토레 자피(Ettore Zappi)가 카스텔라노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였으므로 그에게는 더 이상의 기회가 없었다. 더구나 무엇보다도 갬비노 사망 당시에 그는 교도소에 수감 중이었던 것이다. 또 델라크로체가 가장 신임하는 부하인 존 고티는 아직 큰 힘이 없어 쿠데타를 일으킬만한 실력이 부족했던 것이 그가 카스텔라노를 그대로 보스로 받아들였던 가장 큰 이유라고 볼 수 있었다. 카스텔라노는 그를 위로하기 위하여 수익성 높은 사업 하나를 떼어 건네주었고, 델라크로체는 이에 만족한 듯 조용하게 지내고 있었다.
제임스 파일라
에토레 자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