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수의 아들 -
☆ 2014년 가해 2월5일 (홍) 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
[청주] 아버지께 얻었습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제1독서 : 2사무 24, 2. 9. - 17
† 복음 : 6, 1 - 6
아가타 성녀는 이탈리아 남부의 시칠리아 섬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신심이 깊었던 그녀는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고자
평생을 동정으로 살았다. 성녀는 철저하게 동정을 지킨 나머지 그녀를
차지하려던 지방 관리에게 혹독한 고문을 받고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
기간(249-251년)에 순교하였다. 성녀에 대한 공경은 초대 교회 때부터
널리 전파되었다.
★ 다윗은 주님께 죄가 되는 인구 조사를 한다. 그리고 양심의 가책을
받고 주님께 자신의 죄를 고백한다. 다윗은 주님께서 이스라엘에
내리시려는 재앙에 무척 괴로워하면서도 주님의 자비를 믿으며 겸허하게
받아들인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 나자렛 회당에서 놀라운 지혜로 가르치시자 고향 사람들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신다
(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제1독서에서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의 인구 조사를 시행하는데,
성경은 이것이 하느님께 죄가 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벌로 온
이스라엘에는 흑사병이 창궐합니다. 현대인들이야 당연히 ‘인구 조사가
무슨 죄인가?’ 하는 의문을 갖지만 구약의 배경에서 이러한 행동은 사실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네가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를 세어 인구 조사를 실시할 때, 사람마다 자기
목숨 값으로 주님에게 속전을 바쳐야 한다.”(탈출 30,12) 하고 이르십니다.
이로써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이 오직 당신께 속해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하십니다.
그 당시의 인구 조사는 일차적으로 군사적 전략과 관계가 있었습니다.
백성을 군사 조직에 남김없이 편성하고 그렇게 조직된 군대를 자신의
힘과 소유라고 여기는 것이 그 시대 임금들의 기본적 태도였습니다.
그러나 시편에 “이들은 병거를, 저들은 기마를 믿지만, 우리는 우리
하느님이신 주님의 이름을 부르네.”(20〔19〕,8)라는 대목이 나오듯,
성경은 이렇게 사람의 힘과 군사력에 의존하는 것은 주님을 잊는 불신앙의
표현이며 유혹에 넘어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결국 다윗은 인구 조사의 행위로 주님이 아닌 사람의 힘에 의지하는
‘실천적인’ 불신앙의 죄를 저질렀다고 하겠습니다.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의 많은 사람이 주님께서 함께하신다는 믿음보다는 정치적 수완을
통한 강성한 국가를 바라는 마음을 가졌기에 다윗도 이러한 행동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스라엘 전체가 그 대가를 치르는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다윗은 먼저 자신의 죄를 깨닫고 괴로워하며 사람이 아닌 주님의
손에 나라의 운명을 맡깁니다. 그리고 고통 받는 백성을 대신해서 진심으로
자신이 벌을 받기를 청합니다. 이러한 다윗의 모습을 통하여 하느님의
진노는 자비로 변합니다. 서양 속담 중에 “하느님께서는 한쪽 문을 닫으실
때 다른 쪽 문은 열어 두신다.”라는 아름다운 말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고난 중에 열어 놓으신 문을 보게 되는 이는, 자신의 나약함과 죄를 온전히
고백하며 오직 주님의 자비에 희망을 두는 사람입니다. 다윗이 바로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아버지께 얻었습니다. |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가해 2월5일 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
연중 4주간 수요일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 마르 6,1-6
아버지께 얻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악마와 병마에게 종살이는 하는 사람들을 해방시켜
주심으로써 정신적 , 육체적 죽음에서 구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정작
당신의 고향 나자렛에서는 무시를 당하셨습니다. 고향사람들은
자신들과 같은 신분의 예수님이 자신들보다 월등한 능력과 지혜를
지니게 된 것을 이해하지 못했고 편견과 시기질투심에서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듯합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나자렛이 아닌 다른 지역
출신으로서 훌륭한 가문과 번듯한 학벌을 갖추고 등장하셨다면
그렇게 반응했을까요?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법입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놀라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마르6,2) 하고 말하였습니다.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물론
주님의 능력은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나왔습니다.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지혜도 역시 인간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나옵니다. 따라서 우리가 지혜로운 사람이 되려면 하느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또 실천해야 합니다.
지혜의 근원은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실행함으로써 그
능력을 더 얻게 됩니다. 믿음으로 실천한 사람은 그것을 압니다.
집회서 1장 1절 이하를 보면 “모든 지혜는 주님에게서 오고 영원히
그분과 함께 있다. 지혜의 근원은 하늘에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이며
지혜의 길은 영원한 계명이다…주님의 사랑은 영광스러운 지혜이며
그분께서는 당신을 보여주실 이들에게 지혜를 나누어 주시어 당신을
알아보게 하신다.” 고 적혀 있습니다. 분명 지혜는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지혜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을 우선순위에 두어야 하는지를 구별하는
사리 판단력입니다. 또한 지혜란 인생의 올바른 방향 감각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올바른 방향을 당신의 말씀을 통해서 제시하십니다.
따라서 지혜로운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또 생활화 합니다.
그렇게 되면 균형과 조화를 통해 삶이 풍요로워 집니다. 사실 영적인
삶을 사는 사람에게서 배움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놀라운 지혜를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균형과 조화가 깨지면 소리가 나게 마련입니다.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 경제적인 것과 도덕적인 것, 자연과 인간의 조화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 균형과 조화는 올바른 사리판단력과
방향감각을 기반으로 합니다. 그러므로 지혜의 근원이신 하느님께로
다가가는 정성어린 노력이 필요합니다. 나의 고정관념을 버리고 내
생각의 틀을 넘어서 열린 마음으로 주님을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많이 아는 사람을 유식한 사람, 지식인 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학문이나 지성만으로 살아가는 것보다는 균형과 조화를 추구하며
슬기롭게 사는 사람을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지식인은 넘쳐 나고 지혜로운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세상의 많은 일들이
하느님의 지혜를 담은 사람들에 의해서 계획되고 해결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 봅니다.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하였을 때 서슴없이
“하느님께로부터 받았다”고 고백할 수 있다면 지혜를 넘어 영성적인
사람입니다. 영적인 지혜를 추구하는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기타] 옳음을 선택하십시오. 그것이 지혜입니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옳음을 선택하십시오. 그것이 지혜입니다.'
2014년 가해 2월5일 수요일 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 복음묵상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마르코6,2)
---
“너는 엄마하고 아빠하고 물에 빠지면 누구부터 구할 거냐?”
어제는 좀처럼 눈 구경 하기 힘든 이곳에 첫눈이 그것도 함박눈이
내렸습니다. 솔이는 태어나서 처음 보는 눈 내리는 풍경에 놀랍다는 듯이
하늘을 보고 앙칼지게 짖어대는데 그 모습 또한 사랑스러웠습니다.
날씨가 차가워지기 시작해서 곧바로 결정을 내려, 저녁 미사를 드리지
않는 것으로 비상연락망을 돌렸습니다. 이곳은 대중교통이 없어, 모두가
직접 차를 몰고 와야 하기 때문에 안전상 내린 결정이었지요.
덕분에 비디오 한 편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반창고’라는 영화였습니다. 한 소방대원과 의사인 아가씨간에 전개되는
러브 스토리인데, 처음에는 코메디물이라는 생각으로 가벼운 마음으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몇 분 지나지도 않아서 몰입하고 말았습니다.
간단한 줄거리지만 그 안에서 다루고 있는 이야기가 충분히 생각할 수
있고 동감을 이끌어내는 아름다운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작자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충분히 전달되는 기분 좋은 영화였습니다..
“너는 엄마하고 아빠하고 물에 빠지면 누구부터 구할 거냐?”
이 대사는 소방대장이 힘들어하고 있는 주인공 소방대원에게 던진
질문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부모님께서 물에 빠지시면 어느 분부터 구해드리겠습니까?
그 답은 의외로 간단했습니다.
“가까운 곳에 있는 분부터 구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 간단한 답을
곧바로 찾아내지를 못합니다. 왜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지혜에 사람들이 놀라워하였다고 합니다.
“저런 지혜는 어디서 받았을까?”
언젠가 지혜는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분명 옳은
것일 것이고, 그 옮음은 우리를 지혜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즉, 우리가 지혜로워지고자 한다면, 그 답은 간단합니다.
“옳음을 선택하십시오. 그것이 지혜입니다.”
이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의 욕심은 지혜를 볼 수 있는 눈을 흐리게
만들어 버립니다.
세속적 논리와 숫자로 판단하려 하고, 손익분기점을 따지려 합니다.
그러다 보면 너무도 당연한 정답을 놓치고 말게 되는 것이지요.
지혜로운 척하면서 그지없이 어리석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철저하게 성부의 뜻에 따라 세상을 바라보려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당신처럼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분과 닮은 눈으로 옳음과 그름을 식별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 다음은 옳음을 선택하려는 자기 싸움이 기다릴 것입니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수도회] 가장 시급한 불신과 의혹의 치유
2014년 가해 2월5일 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 마르 6,1-6
가장 시급한 불신과 의혹의 치유
활발하게 전개되던 예수님의 치유와 구마활동, 인류 구원 사업의
표징들이 어느 순간 갑자기 크게 위축되었습니다. 그 순간은 바로
예수님께서 당신의 고향마을에 머물던 순간이었습니다.
예수님 입장에서 보면 고향 마을 사람들 꿈에도 잊지 못할 고맙고
정겨운 사람들입니다. 다른 지역보다도 훨씬 더 애착과 마음이 가던
고을이었습니다. 그래서 더 많은 구원의 표징을 드러내고 싶었을
것입니다. 당신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더 많은 환자들을 치유하면서
구원자 하느님 아버지의 능력과 권위를 떨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그러한 소박한 꿈은 고향 마을 사람들의 높은 불신의
벽 앞에 즉시 가로막히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이 되어 어린
시절 늘 다니던 회당에 들어가시어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물론 고향
사람들이 깜짝 놀랄 정도로 예수님의 언변을 달라져 있었습니다. 때로
쌍날칼처럼 날카롭게 정곡을 찔렀습니다. 때로 물 흐르는 듯이
자연스러웠습니다. 때로 그 말씀이 한없이 달콤해서 세파에 지친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위로했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탁월한 말씀 앞에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고향 마을 사람들의 태도를 한번 보십시오.
불신과 의혹으로 가득 찬 시선으로 이렇게 수군거립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은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 입장에서 바라볼 때
차라리 외적인 치유나 구마가 필요한 나병환자들, 불치병 환자들,
하혈하는 사람들, 마귀 들린 사람들이 훨씬 더 나았습니다.
그들은 치유를 향한 간절한 열망과 더불어 예수님께 대한 신앙과 깊은
신뢰심이 동시에 있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그들은 치유와 회복이 훨씬
쉬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고향 마을 사람들 한번 보십시오. 그들은 겉은 멀쩡하고
건강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내면을 불신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들은 한
마디로 가장 좋지 않은 병세, 영혼의 불치병을 앓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 고향 마을 사람들, 하느님을 향한 불신의 벽이 얼마나 깊었던지,
그들이 앓고 있던 영혼의 불치병 증세가 얼마나 심했던지 예수님도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강한 불신과 완고한
마음에 고개를 저으셨습니다. 마음을 접으셨습니다. 그리고는 다른
고을로 발걸음을 돌리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가장 위험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불신과 의혹의
병입니다. 오늘 우리가 가장 시급히 노력할 일이 한 가지 있다면 그것은
불신과 의혹의 치유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노력이 한 가지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활짝 열린 마음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 인간에게 선물로 보내신 당신의 외아들이자
구원자임을 믿는 강한 확신입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 관구 부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서울] 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
2014년 가해 2월5일 연중 제4주간 수요일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 마르 6,1-6
오늘은 유경촌 티모테오 주교님과 정순택 베드로 주교님의 서품식이
있습니다. 두 분 주교님께서 주어진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갈 수
있도록 기도드립니다. 주교님이 되시면 주교의 문장을 만들고, 사목
표어를 정하게 됩니다. 유 주교님은 ‘너희가 서로 발을 씻어 주어라.’
라고 정하셨고, 정 주교님은 ‘하느님 아버지, 어머니 교회’라고
정하셨습니다. 한분은 아주 실천적인 표어를 정하셨고, 다른 한분은
교회의 신앙을 표어로 정하셨습니다. 새는 왼쪽과 오른쪽의 양 날개로
하늘을 날 수 있습니다. 한 쪽 날개만으로는 제대로 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교회의 가르침과 일치를 이루어야 하고, 삶을 통해서
신앙을 드러내야 합니다. 두 분의 사목표어는 마치 우리가 걸어야 할
신앙의 길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성서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크시기 때문에 비록 악의 유혹에 넘어가서
죄를 지었다고 해도 뉘우치고 참회하면 하느님께서 내치시지 않으시고
받아 주신다고 이야기 합니다. 통회의 눈물을 흘렸던 다윗, 재를 뿌리고
옷을 찢으며 참회했던 니네베 사람들,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지만 새벽이 올 때 참회의 눈물을 흘렸던 베드로가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의 사랑으로 깊은 상처를 이겨내고 하느님께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성서는 또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합니다. 바로 ‘욥’의 이야기입니다.
욥은 하느님을 섬기고 열심히 살았습니다. 욥은 건강과 자녀를 축복으로
받았고 많은 재물을 얻었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습니다. 악한
세력인 사탄은 하느님과 내기를 합니다. 만일 욥에게 있는 것들을
빼앗아 가면 욥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버릴 것이라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탄에게 말을 합니다. 욥의 목숨을 제외하고 그가 가진
것들을 가져갈 수 있다고 하십니다. 이때부터 욥은 시련을 당하게
됩니다. 재물도, 가족도, 건강도 잃어 버렸습니다. 욥은 탄식하면서
하느님께 기도합니다. 어찌하여 제게 이런 일들이 생기는 것입니까?
하느님께서는 욥에게 이야기 하십니다.
더욱 기도하고 또 기도하여라. 욥은 모든 것을 뒤로 하고 하느님께
기도하면서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나에게 좋은 것을 주신 분이
하느님이시라면 나에게 나쁜 것을 주시는 하느님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결국 욥은 악의 유혹을 이겨냈고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런 욥의 이야기는 예수님과 사탄의 대화로 이어집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40일 동안 단식기도하셨습니다. 악의
세력인 사탄은 극도로 지친 예수님께 와서 유혹을 합니다. 이것은
성서에 나오는 유명한 3가지 유혹입니다. 배고픈 예수님에게 이렇게
유혹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을 빵으로 만들어 먹으면 되지
않는가! 예수님께서는 이야기 합니다. 사람은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흔들기 위해서 말을 합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천사가 지켜 줄 것이니 이 절벽에서 뛰어 내려
보시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을 시험하면 안 됩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보여주면서 말을 합니다. 나에게 절을
하면 나에게 무릎을 꿇으면 이 모든 것을 주겠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만을 섬겨야 합니다.
성서는 이야기 합니다. 사탄은 다음 기회를 노리면서 떠나갔다. 그리고
예수님의 생애에 사탄은 가장 큰 유혹을 합니다. 그것은 생명을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유다는 악의 유혹에 넘어가 예수님을 배반하였고, 로마의
총독은 황제를 섬기려 하지 않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게 합니다.
이번 싸움에서 악은 분명하게 이긴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성서는
우리에게 빈 무덤 이야기를 해 주고 있습니다. 악이 이긴 것 같지만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넘어서 부활하셨다고 전해주고 있습니다.
성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악의 세력이 물러났지만 아직
영적인 전투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선하신 하느님을 따르려는
사람들과 악의 편에 서서 세상을 악으로 물들게 하려는 사람들의 싸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마지막 날이 언제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날이 올
때까지 우리는 늘 긴장하고, 악의 유혹에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이래로 이미 도래했지만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도회] 회개의 여정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2월5일 수요일 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
사무 하24,2.9-17 마르6,1-6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 마르 6,1-6
회개의 여정
우리 삶은 회개의 여정입니다.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다시 시작해야 하는 회개의 여정입니다.
유일한 살길은 자기 삶을 반성하는 회개의 길뿐입니다. 비단 믿는
이들뿐 아니라 참 삶을 추구하는 모든 이들에게 해당되는 진리입니다.
민주당 상임고문 정 동영(다윗)의 인터뷰 내용 중 다음 대목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오늘 1독서의 주인공 역시 다윗인데 뭔가 공통점을
느낍니다.
“민주당이 어디로 가야 하나? 왼쪽도 오른쪽도 아니다.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그게 답이다. …왜 프란치스코 교황의 메시지가
그렇게 전 세계를 움직이나. ‘가난한 사람 편에 서라.’, 이 승자독식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이게 너무 많은 사람을 불행하게 하고 있지
않나. 이게 민주당의 메시지가 되어야 한다.”
바로 이게 예수님의 길, 교회의 길임을 깨닫습니다. 교회가 살 길은 또
우리가 영적으로 살 길은 아래로 내려가는 길 하나뿐입니다.
오른쪽도 왼쪽도 아닌 아래로 내려가는 게 바로 회개의 길, 겸손의
길이요 바로 거기서 주님을 만납니다.
회개와 겸손을 통해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 역설적으로 영광의 주님께
올라가는 길입니다. 아래로 내려가는 회개와 겸손의 길은 저절로 가
아닌 하느님의 은총과 부단한 깨어있는 노력을 요합니다.
오늘 다윗은 또 죄로 넘어집니다만 신속한 회개로 일어섭니다.
-다윗은 이렇게 인구 조사를 한 다음, 양심에 가책을 느껴 주님께
말씀드렸다.
“제가 이런 짓으로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주님, 이제 당신 종의
죄악을 없애 주십시오. 제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을 저질렀습니다.”-
회개의 달인, 다윗입니다. 바로 이게 다윗의 위대한 점이요 하느님의
전폭적 신뢰와 사랑을 받았던 이유입니다.
왜 인구 조사한 것이 큰 죄가 되는지 평소 의아해 했는데 얼마 전 그 답을
찾았습니다. 살다보면 내 자신이나 공동체의 현실을 헤아리면서 순간
낙심하거나 절망할 때가 있는데 그 순간은 하느님을 까맣게 잊었을
때입니다. 사실 위로 하느님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살아가야 하는데
하느님을 잊고 아래로 눈길을 향하다 보면 온갖 걱정에 부정적인 면들이
많이 눈에 띠기 마련입니다.
바로 다윗이 인구조사를 한 것은 하느님을 잊고 모든 것을 자기 힘으로,
자기 손으로 하려던 교만과 야심이 작용했던 것입니다.
자기도 모르게 유혹에 빠졌던 다윗입니다.
악마는 디테일 안에 숨어있다는 진리가 역시 입증되는 상황입니다.
인구조사의 목적은 두 가지입니다.
세금(稅金)과 전사(戰士)의 확보입니다. 돈과 사람만 있으면 모두가
될 듯이 착각했던, 잠시 하느님을 배제했던 다윗의 오판입니다.
모든 것 다 있어도 하느님 도움 빠지면 다 헛일입니다.
백성을 치는 천사를 보자 다윗은 주님께 아뢰며 거듭 죄를 뉘우칩니다.
“제가 바로 죄를 지었습니다. 제가 못된 짓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 양들이야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그러니 제발 당신 손으로 저와 제 아버지의 집안을 쳐 주십시오.”
신속한 회개를 통해 다윗의 믿음 또한 새로워졌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에게 결핍된 것은 바로 이런 회개의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언행에 크게 놀랍니다만 질투와 편견으로 그들은 그분을 아주
못 마땅하게 여깁니다. 믿음이 완전 질식된 모습입니다.
하여 예수님도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고, 이들이 믿지 않는 것에 예수님은
놀라셨다 합니다.
회개를 통한 믿음 없이는 기적은 불가능하고 또 무의미할 뿐입니다.
믿음의 눈이 있어야 기적을 보는 데 믿음의 눈이 없으면 아무런 기적도
알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마지막 대목에서 예수님의 한결같은 믿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르치셨다.’
고향 사람들의 냉랭한 반응에 좌절하지 않고 곧장 일어나 믿음의 여정에
올라 하느님 주신 당신 사명을 다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회개한 우리 모두에게 좋은 믿음을
선사하십니다.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 -
◈ [서울] 예수님이 놀라실 그런 일은 안하며
2014년 가해 2월5일 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 마르 6,1-6
예수님이 놀라실 그런 일은 안하며
하늘이 놀랐다는 말은 어떤 경우에 하는 건지 생각이 잘 안되네요.
매우 악한 일을 크게 저지르면 그 때 하는 말이 아닐까 생각은 합니다.
또는 모든 사람이 놀랄 정도로 아주 좋은 일을 해도 그럴 것 같고요.
결국 대자연의 당연질서와 너무 빗나가 창조의 힘님도 놀라셨다는
거겠지요. 예수님이 놀라셨다는 말은 바로 여기에 해당되는 것이라
생각 드네요. 우린 예수님이 놀라실 그런 일은 안하며 자연의 순리 따라
살기로 합시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르치셨다. (마르코 6,6)”
-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인천] 고향사람...
2014년 가해 2월5일 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마르코 복음 6장 1~6절)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예수님 시대에 있었던 일들이 지금 나에게도 비슷하게
반복되는 거 같다.. 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두 부분에서 그랬는데요.
첫 번째는 2절의 말씀입니다. ‘안식일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많은 이가 듣고는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제가 예수님처럼 대단한
가르침을 신자들에게 했다는 이야기를 드리려는 것이 아니고요. 저의 달라진
모습을 신자들이 신기해 한 적이 있다는 걸 말씀드리려고 하는 겁니다.
재작년에 공소 건축을 위해서 모금을 다녔었는데 그 중에는 제가 보좌로
있던 본당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주말 내내 미사를 봉헌하면서 모금강론을
했었는데요. 강론을 듣고 신자들이 많이 했던 이야기들이 이런 겁니다.
‘신부님이 입이 터지셨네.. 이야기가 많이 느셨네...’ 신자들이 봤던 모습은
말도 없고, 강론도 원고를 지루하게 있는 모습이었기 때문에 그런 거 같습니다.
거기까지가 신자들이 보아왔던 모습인데요. 그 이후에는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그 모습일 거야..’ 하는 생각에 머물러 계셨던 거
같습니다. 좋은 주임 신부님(?)을 만나 신자들의 눈을 바라보고 강론을 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는 것도 모르시고, 꾸준히 묵상글을 써내며 말해왔다는 것을
모르시니까..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가끔 오랜만에 만나는 친척을 만나도 그런 뉘앙스의 말을 할 때가 있잖아요.
어렸을 때 봐왔던 그 모습만 기억하며 여전히 그런 줄 알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그런 모습이요. 아마도 그런 말은 제가 생각하기에 관심의 부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본당에 계신 신부님이 어떻게 보면 가족이라고 할 수 있을 거고, 떠난 신부님은
가끔 보는 친척이라고 할 수 있을 거 같은데요. 그 친척인 신부에게 아무런
관심도 가지지 않고, 기도도 해 주지 않으면 어떨까요? 아마도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변화하고 성장한 모습들을 알아보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두 번째는 1절과 5절의 말씀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고향으로 가셨는데...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그 비슷한 느낌이 지난 겨울 판공 성사를 주러 출신 본당에 갔을 때
있었습니다.
저는 섬이었기 때문에 출신 본당과 같은 지구에 묶여 있었어도 거기에 갈
일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해인 작년에는 그 쪽 본당 신부님이 섬
신부들에게도 도움을 요청하셔서 별 생각 없이 그 본당에 갔었습니다.
그리고 성사를 주러 제의방에 들어가서 신자들을 기다리는데 말씀과 비슷한
모습이 펼쳐지더라고요. 조금 바꾸어서 말해보면.. ‘그때에 김 신부가
출신본당으로 갔는데.. 아무에게도 성사를 줄 수가 없었다.’
정말 성사를 주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제가 있던 공간이 누군지 모르게
가림막이 있던 곳이 아니라 서로 얼굴을 보고 성사를 했는데요. 들어오시는
할머님, 자매님, 청년들이 다 아는 사람들이니까, 들어오시면 성사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인사하고 안부 묻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느라 성사를 못
드리겠더라고요.^^; 그래서 출신 본당에서 성사 주기는 어렵구나.. 라는
생각을 했었던 거 같습니다.
아무래도 아는 곳에 가면 성사를 보기 어렵게 만드는 방해물이 많이 생기는
거 같습니다. 친분도 그렇고, 선입견도 그런데요. 주님이 일하시는 동안만이라도
잠시 그런 마음을 내려놓고 주님이 하시는 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진지하고 성실한 마음을 가진다면, 성사가 이루어지고 주님이 일으키시는
기적을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다가오는 주일에 척사대회를 한다. 성모회장님이 빈대떡을 판다고
하시는데, 전에는 그 판매를 주로 신부님이 도와주신 거 같다.
각설이 복장을 입고 웃음을 주시고 판매를 도와 주셨던 거 같은데,
신자들이 은근히 나에게도 바라는 거 같았다. 그래서 내가 신자들에게
이야기했다. “전임 신부님을 초청 해야겠네요~”^^;
- 밤송이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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