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감우【久旱甘雨】
오랫동안 가뭄이 계속되다가 내리는 단비를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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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삿갓(523)
이별의 대동강
「부처님이란 모든 중생이 지니고 있는 온갖 미망(迷妄)과 번뇌(煩惱)를 깨끗이 떨쳐버리고, 자기 자신 속에서 불성(佛性)을 찾아내어 자연의 진리를 깨닫고 나서, 다른 중생들도 교화를 시켜 깨닫게 해준 성인을 부르는 칭호이지요. 처음에는 석가여래(釋迦如來) 한 분만을 <부처님>이라고 불러 왔지만,~
~ 그 후에 석가여래를 따르는 많은 선각자(先覺者)들이 생겨나서, 지금은 그들도 넓은 의미에서 부처님이라고 부르고 있다오.」
「그러면 <보살>이라는 것은 어떤 것이 옵니까?」
「보살----이라 함은, 위로는 부처님의 뜻을 받들어 구하면서, 아래로는 중생들을 교화시켜 성불(成佛)하게 하려고 수행에 힘을 기울이는 불자(佛子)들을 부르는 칭호이지요. 사람은 누구나 불성을 타고났어요. 그러니까 누구든지 수행만 잘하면 부처님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말이 쉽지, 그만한 수행을 쌓으려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겁니다.」
「그야 물론이지요. 신라 때의 고승 부설거사(浮雪居士)는 부처님의 경지에 도달한 심경을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말하고 있어요.」
눈에 뵈는 것이 없으면 분별이 필요치 않고
귀에는 시비가 없는 소리만이 들린다
분별과 시비를 모두 떨쳐버리니
마음은 절로 부처님에게 귀하게 되노라
目無所見無分別(목무소견무분별)
耳無所聽絶是非(이무소청절시비)
世上萬事都不看(세상만사도불간)
但看心佛自歸依(단간심불자귀의)
「부처님의 세계란 바로 그 게송의 세계와 같은 것이에요.」
김삿갓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아름다운 여인을 보면 육기가 먼저 동하는 나 같은 속물은 도저히 부처님이 될 수 없겠습니다.」 「무슨 말씀을! 삿갓 선생이야말로 부처님의 성품을 선천적으로 풍부하게 타고 나신 분 일 겁니다.」
「과찬의 말씀을 하시는 걸 보니, 대사께서는 술이 몹시 취하셨는가 봅니다.」
벽암 대사는 <취했다>는 소리에, 머리를 설레설레 내 젓는다.
「내가 취했다구요? 천만의 말씀이오. 술을 마셨다면 취했을지 몰라도, 곡차를 마시고 취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소이까.」
벽암 대사는 그와 같은 익살을 부려가면서
「나는 <방랑시인 김삿갓>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유(儒) . 불(佛) . 선(仙)에 모두 능통했던 북창(北窓) 정염(鄭磏) 선생을 연상하게 돼요.」 하고 말한다.
「정북창이라면, 중종 때의 유명한 학자 말씀입니까?」
「정북창과 삿갓 선생은 닮은 점이 너무도 많아요.」
「어떤 점이 어떻게 닮았다는 말씀입니까?」
「정북창은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오는 순간부터 울기를 그치지 않아, 부모가 크게 걱정을 했다는거에요.
그런데 하루는 어떤 이인(異人)이 지나가다가 그 사실을 알고, <이 아이는 지금 벽에 써있는 글을 읽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니까 이 아이의 울음을 멈추게 하려면 바람벽을 백지로 도배를 해버리십시오> 하더라는 거에요. 그래서 그 사람의 말대로 벽을 백지로 발라 버렸더니,
그 아이는 그제서야 울기를 그치더라는 거예요. 그걸 보면 정북창은 나면서부터 생이지지(生而知之)를 한셈이지요. 그런 점에 있어서 선생은 정북창과 너무도 닮았어요. 정북창은 벼슬이 싫어 선생처럼 운수행각(雲水行脚)으로 종신했으니, 그 점도 같구요.」
김삿갓은 그 말을 듣고 면구스러워 견딜수 없었다.
「정북창은 청사(靑史)에 빛나는 어른이신데, 걸객에 지나지 않는 나를 어찌 감히 그런 어른에게 견주십니까? 과공이 비례(過恭非禮)라는 말이 있지 아니합니까.」
「무슨 말씀을! 선생 자신은 모르실지 모르지만, 선생의 이름은 세월이 흐를수록 만인의 입에 널리 회자(膾炙)될 것이 옵니다.」
벽암 대사는 예언 비슷한 말을 한마디 던지고 나서,
「정북창이 세월을 떠날 때에 읊은 사세시(辭世詩)가 있어요.
내가 그 시를 한번 읊어 보지요.」 하고 다음과 같은 시를 들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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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무더위에 건강 조심 하시고 즐겁고 행복한 하루 되세요.
《모나리자》는 《최후의 만찬》, 《동방박사의 경배》, 《광야의 성 히에로니무스와 함께 그 제작자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임이 명백한 작품이다.
1503년 10월부터리사 델 조콘도의 초상화로 그려지기 시작했다는 것이 중론이며 1503년 또는 1504년에피렌체에서 그려지기 시작했다는 이론도 있다. 루브르 박물관은 "의심할 것 없이 1503년에서 1506년 사이에 그려졌다"고 서술하지만 미술사학자 마틴 켐프는 확실히 날짜를 확인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고 말한다.
알레산드로 베초시는 이 그림이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생애 말기인 1513년 이후의 스타일로 그려졌다고 본다. 1513년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는 주장에도 문헌적 근거가 있는데, 4년 동안 그림을 붙잡고 있었지만, 끝내 완성하지 못한 채로 남겨두었다"는 바사리의 기록에 따른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의하면 1516년 다빈치가프랑수아 1세로부터 앙부아즈성 근처의 클로 루체(Clos Lucé)에서 일하도록 초청받았을 때 《모나리자》도 들고 가서 계속 작업했다고 본다. 미술사학자 카르멘 C. 밤바흐는 레오나르도가 1516년 또는 1517년까지 이 작품을 계속 다듬었을 것으로 본다. 이때 1517년경 레오나르도의 오른손이 마비된 것이 《모나리자》가 완성되지 않은 까닭으로 본다.
1550년에 출간된조르조 바사리의 《미술가 열전》에 의하면, 이 그림은 1503년 여름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Francesco del Giocondo)라는 상인이 새로 지은 자신의 집 거실에 걸어 두기 위해 자기 부인의 초상화를 의뢰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작품은 의뢰자에게 전달되지 못했는데 이에 관해서도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첫 번째는, 의뢰를 받은 몇 달 뒤에 베키오궁을 장식할 작품 주문이 들어와서 이 그림은 주문자인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에게 전달될 일이 없어졌다고 한다.
두 번째는, 그 당시 조콘도의 부인은 이미 아이 셋을 낳은 애 엄마였으나 조콘도가 원한 것은 23세로 아직 젊지만, 모성애 가득한 여인을 그려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조콘도의 기대와 달리 왠지 무서운 배경 속에 눈썹 없는 여인이 맘에 들지 않아 인수를 거절했다고 한다. 당시 눈썹이 없는 여인은 행실 나쁜 여인들을 가리키기도 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설은 다빈치가 완벽주의자였기 때문에 완성도가 떨어지는 그림을 의뢰자에게 내 놓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다빈치가 평생 동안 자신이 갖고 있게 된 것이다.
많은 전문가들은 1519년 레오나르도의 죽음 이후 그 행적, 제작 동기와 시기에 대한 상반된 기록들, 라파엘로의 스케치의 세부 사항 차이 때문에 레오나르도가 두 장의 그림을 제작한 것으로 추정한다.
이 주장에 의하면 첫 번째 그림은 1503년 즈음에 조콘도가 의뢰하여 레오나르도의 제자이자 조수인 살라치가 1524년 사망할 때까지 미완성 상태로 남겨져 있었다.
두 번째 그림은 현재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중인 작품으로, 1513년 줄리아노 데 메디치의 의뢰로 그려져 1518년 살라치가 프랑수아 1세에게 판매한 것으로 추정된다.
진정한 《모나리자》는 단 하나였다고 믿는 학자들도 있지만, 앞서 언급한 두 가지 운명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16세기 언젠가 그림에니스가 발라졌다.
《모나리자》는루이 14세가베르사유궁으로 옮길 때까지퐁텐블로궁에 보관되어 있었고,프랑스 혁명때까지 그곳에 있었다. 1797년부터 루브르 박물관에서 영구 전시되었다.
짜증 나셨나요?
시원한 오늘 되시길 소원합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드립니다~~^^&♡
감사드립니다~~^^&★
늘 잘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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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잘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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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게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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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배웁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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