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13일 온고을교회 수요예배 설교 – 황의찬 목사
《 공의로운 해와 치료하는 광선 》
말 4:1~3
〈 해야 솟아라 〉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너머 산 너머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너머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이글 앳된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시인 박두진이 1946년에 발표한 “해”라는 제목의 시입니다.
이 시를 기초로 한 대중가요 한 곡이 1980년에 탄생합니다.
MBC 대학가요제에 락그룹 ‘마그마’가 “해야”라는 제목의 노래를 불러서 은상을 탑니다.
‘마그마’는 3인조인데 리더인 조하문이 곡을 붙여서 함께 불렀습니다.
“해야 솟아라~” 곡조가 떠오르지요?
사람들은 이렇게 해를 노래했습니다. 물론 달도 노래했습니다.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
해와 달과 별, 우리와 떼려야 때지 못할 대화의 파트너입니다.
인류의 역사가 시작되면서부터 이미 해달별은 사람들이 노래 속에 등장을 했습니다.
해에게 희망을 걸고, 달에게는 소원을 빌고, 별에게는 추억을 담았습니다.
해달별이 없었더라면 어쩔뻔 했습니까?
우리에게 해달별이 있어 참 좋습니다. 그렇지요?
그런데 우리의 이러한 정서에 오늘은 딴지를 한번 걸어보려고 합니다.
왜냐면, 실체를 파악해 두는 것은 필요하거든요!
실체 파악없이 언제까지나 달타령, 별타령, 해타령만 할 수는 없지않겠습니까?
더욱이 오늘 본문에서 해에 대한 언급이 나옵니다.
(2절)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 진실과 진리 〉
박두진 시인은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했습니다.
말라기 선지자는요?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
“하나님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공의로운 해가 떠오른다”
박두진 시인의 시도 멋지지만, 말라기 선지자의 시 또한 그에 뒤지지 않습니다.
박두진 시인은 맑은 해에 낭만을 담았습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떠오른 해에 무엇을 담았습니까? ~ 그렇습니다. 진리를 담았습니다.
사람들이 쓰는 글에는 낭만을 담을 수 있습니다.
희망을 담아낼 수도 있습니다. 거기서 더 나아가면 진실을 담아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자기 글에 진리를 담지는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 인간이 유한한 존재라서 그렇습니다.
잘해야 100년을 사는데, 어떻게 천 년 만 년 변하지 않을 진리를 담겠습니까?
진리를 밝히는 글은 오직 성경 한 권뿐입니다. 할렐루야~
“진리를 밝히는 책이 성경입니다.”
“이글이글 앳된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이 한 줄의 시구 속에 낭만, 희망, 기쁨이 충만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진리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공의로운 해가 떠오른다”
말라기 선지자의 이 한 마디에는 온 인류의 소망과 진리가 담겨있습니다. 할렐루야~
우리 국어사전에 희망과 소망은 별 차이없이 혼용됩니다.
그러나 설교할 때는 두 단어를 구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희망’은 사전적 의미 그대로 이루어지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소망’은 사전적 의미 이상으로, “미래에 꼭 이루어지는 일”을 의미합니다.
아파트 재개발을 위해 살던 집이 헐렸습니다. 잠시 불편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재개발이 완료되면 더 좋은 집에 들어가 살게 됩니다. 이것이 소망입니다.
희망은 “우리도 열심히 노력하여 좋은 집에 들어가 살게 될 거야~”라는 막연한 바람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공의로운 해가 떠오른다”
☞ 말라기 선지자의 이 선포는 희망을 넘어 소망입니다. 반드시 이루어지는 소망입니다.
〈 희망 vs 소망 〉
더러 기독교인 중에, 하나님 믿기를 ‘희망’처럼 믿는 분들이 계십니다.
아직 덜 성숙한 믿음입니다.
성경은 희망을 노래하는 책이 아닙니다. 반드시 이루어지는 소망을 노래한 책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희망의 믿음이 아니라, 분명히 이루어지는 소망의 믿음이라야 합니다.
고전 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사랑이 제일이라는 것 매우 중요하지만,
‘소망’은 ‘희망’과 구별됨을 아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너머 산 너머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너머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이글 앳된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여기에는 희망이 담겨있습니다. 낭만과 서정이 담겨있습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
여기에는 희망보다 차원이 더 높은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진리가 담겨있습니다.
하나님은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분입니다.
창조 넷째날에 하늘의 광명체를 지으셨습니다.
☞ 사실 해달별은 사람들이 이렇게 노래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해달별에게는 희로애락이 없습니다.
사람들의 소원을 이루는 능력은 더더욱 없습니다.
그렇다고 오늘 제가 ‘앞으로 다시는 해달별을 보고 소원 빌지 마시오!’ 하자는 게 아닙니다.
사람이 한 평생 살아가는 중에 답답한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낙담이 되고 실망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나마 해달별이 있어 달을 보면서 눈물을 짓기도 합니다.
해를 보면서 희망을 품기도 합니다. 별을 보면서 추억을 아로새기기도 합니다.
그것, 누가 말립니까? 아무도 말리지 않습니다. 그것조차 없으면 인생이 얼마나 팍팍합니까?
☞ 노래하고 비세요~ 그러나 그것은 희망이라는 것을 아시면 참 좋겠습니다!
〈 공의로운 해가 뜨는 날 〉
해에게 희망을 걸고, 달에게 소원을 빌고, 별에게 추억을 새겨봅니다.
인생에 이런 낭만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낭만이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해 줍니다.
함께 솟는 해를 보면서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을 가까이 두십시오!
달을 보고 눈물지어야 하는 사람도 가슴에 품어두시기 바랍니다.
별을 보면서 영롱한 추억도 새기고, 별을 보면서 스스로도 반짝반짝거려 보십시오!
☞ 여기서 한 걸음 더 내딛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해와 달과 별을 지으신 분이 계시다!
해달별을 창조하신 분, 그분,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히 3:4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 그 하나님은 우리에게 희망을 넘어 소망을 주시는 분입니다!
이렇게 고백할 때,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 ‘주님’ 주의 이름을 경외할 때,
우리에게 “공의로운 해”가 떠오릅니다.
“공의로운 해”는 어떤 해일까요?
매일매일 동녘에서 떠오르는 그 해를 하나님이 새롭게, 공의로운 해로 만들어 띄우실까요?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면 달과 별이 시샘을 할 것이니, 하나님은 그리하지 않으실 겁니다.
“공의로운 해”가 떠오르는 날은 어떤 날인지 본문 1절에 나와있습니다.
(1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에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공의로운 해”가 떠오르는 날은 “~ 용광로 불 같은 날”입니다.
그냥 평범한 날이 아닙니다. “공의로운 해”가 떠오르는 그 날은 경천동지할만한 날입니다.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세상이 뒤집어지는 날’입니다.
‘하늘과 땅이 딱 달라붙어 맷돌 갈리는 그런 날’입니다.
보십시오! 그 날은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 들이 용광로 속에 들어가 녹아버립니다.
☞ 신학적으로 “공의로운 해”가 떠오르는 날은 최후심판 날이고 예수님 재림의 날입니다.
〈 외양간에서 나와 뛰는 송아지 〉
“공의로운 해”가 떠오르는 날, 그날 떠오르는 “공의로운 해”는 지금의 해가 아닙니다.
“공의로운 해”는 다시 오시는 예수님, 파루시아의 예수님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말세의 날입니다.
그날의 주인공은 재림하시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공의로운 해”입니다.
“공의로운 해”가 되어 떠오르는 날, 세상 심판은 용광로의 불같이 타오릅니다.
그날에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쇳물이 끓는 용광로에 지푸라기처럼 던져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용광로에 던져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치료하는 광선을 쬐고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같이 뜁니다.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말라기 선지자가 표현한 가장 빼어난 생동감의 레토릭입니다.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는 아직 코뚜레도 하지 않았습니다. 세상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겅중겅중 뛰어오르는 송아지의 모습, 상상만으로도 흐뭇합니다.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생명을 얻고 가장 건강하게 살아있음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생동감”을 이보다 더 절절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종말의 날 “공의로운 해가 떠오르는 날”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처럼 뛰는 이들이 있습니다.
종말의 날 “지푸라기”같이 끓는 쇳물에 던져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극에서 극입니다.
“지푸라기” 요즘 세대 사람들은 잘 모를 겁니다. 7080세대들은 잘 압니다.
가을걷이가 끝난 들판 곳곳에 지푸라기가 드문드문 흩어져 있습니다.
나락을 떨고 나서 짚단을 묶는데, 짚단에 끼지 못하고 흩어진 볏집입니다.
지푸라기를 밟으면서 학교에 가고, 학교에서 돌아왔습니다.
가장 가치 없는 것이 길가에 떨어진 지푸라기입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습니다.
눈비 맞으면서 바람에 날리기도 하다가 사그라드는 먼지와 같은 지푸라기!
종말의 때에 그렇게 용광로에 버려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입니다.
☞ 교만은 하나님이 없다 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의 행동에는 선이 없습니다.
〈 악인을 밟는 의인의 발 〉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동의어입니다.
교만한 자를 악을 행한다 하고, 악을 행하는 자를 교만하다 합니다.
자기의 사상에 하나님이 없는 자들입니다.
아침마다 떠오르는 해를 보면서 사람들은 희망을 걸었습니다.
날마다 떠오르는 해를 보면서 사람들은 새롭게 여기고 절망을 물리쳤습니다.
그러나 해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하나의 광명체일 뿐입니다.
그것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사람들은 아침 해를 신선하게 그리고 신성하게 여겼습니다.
절망하지 않으려는 몸부림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참으로 갸륵합니다.
하나님은 하나의 광명체에게 희망을 거는 사람들의 애처로움을 외면하시지 않습니다.
그 희망의 연장선상에 “공의로운 해”가 솟아오르게 합니다.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너머 산 너머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너머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이글 앳된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하나님은 시인의 노래를 듣고 외면하시지 않습니다.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이글 앳된 얼굴 고운 해로서 “공의로운 해”를 보내주십니다.
시인이 그냥 시인이겠습니까?
시인의 마음처럼, 사람들은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이글” 타오를 “공의로운 해”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응답하시는 분입니다.
(3절) “또 너희가 악인을 밟을 것이니 그들이 내가 정한 날에 너희 발바닥 밑에 재와 같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은 악인을 지푸라기가 밟히듯,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의 발에 밟히게 하십니다.
아까 말씀드렸습니다. 추수가 끝난 벌판 여기 흩어진 지푸라기들, 사람들의 발에 밟힙니다.
그와 똑같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참으로 오묘합니다.
그날에 일어날 일들에 대한 복선(伏線)을 이 세상 곳곳에 깔아두셨습니다.
밟히는 지푸라기 되지 말고, 치료하는 광선을 쬐고,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같이 뜁시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