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가 어느 하나로 국한된, 특정의 신을 숭배하는 종교인 줄 알고 계시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또 외국에 가 보면 불교는 아예 미신의 소굴인 줄만 알고 계시는 분들이 있더군요.
너무나 기가 막혀서 이런 말을 했죠. “일체 미생물에서부터 생명 있는 것 전부, 그리고 우주 전체가 불(佛)이고, 이 세상에 일체 만물만생이 태어나 살면서 배우는 것이 교(敎)이기에 불교(佛敎)인데 당신네들도 불교 안에서 살면서 어떻게 불교를 그렇게 말하느냐. 그럼 당신네들도 귀신이겠네요.”하고 말을 한 적도 있습니다만, 불교는 그대로 진리인 것입니다.
우리가 다 죽는다 해도 불교는 남는 것입니다. 이렇게 얘기해도 전혀 손색이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불자들만 믿는 종교인 줄 알지 마시고, 또 불자들이나 배우는 종교라고 좁게 생각지 마세요.
불교는 지구뿐만 아니라 삼세간의 온누리를 한데 합친 것을 말합니다. 불교라는 이름 자체가 그대로 현실이고 그대로 진리이고 그대로 우리들의 삶입니다. 불교인이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우리들 모두가 지금 생활해 가는 자체가 그대로 불교이며 그대로 배울 수 있는 재료인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께서 이 세상에 나오질 않았다면 뭐가 있겠습니까? 상대성 원리도 없을 것입니다. 내가 있기 때문에 상대도 있고 종교도 있고 또 불교도 있다고 하는 거지, 내가 없는데 뭐가 있겠습니까?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백지장 하나 사이로 부처다 중생이다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 인생은 허허바다에 띄워놓은 배와 같다고 했는데 이 몸을 비유한 거죠. 여러분들 몸 속에 생명들이 천차만별의 모습을 해 가지고 천차만별의 의식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이 몸 하나가 우주와도 같고 별성과도 같고 블랙홀과도 같습니다. 모든 세계가 그 안에서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서 벌어진 모두를 중생으로 비유를 했거든요. 이 몸은 배로 비유하고 안에 들은 생명체들은 전부 중생으로 비유했습니다.
그런데 파도가 치고 바람이 불고 배가 뒤집히려고 한다면 중생들이 어떻게 해야만 되겠습니까? 오직 모든 것을 선장에게 일임하고 마음을 안정해야 배는 뒤집히지 않고 무사히 목적지까지 갈 겁니다. 우왕좌왕하고 온통 야단들이면 머지 않아 배는 뒤집힐 겁니다.
비유컨대 콩을 심어서 콩나무가 됐다면 과거는 지나갔으니까 없겠죠? 콩씨가 콩싹으로 화했으니까요. 여러분들 모습이 콩싹이라면 바로 그 콩싹은 또 콩씨를 열리게 합니다. 현재 여러분들한테 두고도 과거로 돌아가서 콩씨를 찾는다면 아마 백년이 걸려도 못 찾을 겁니다. 그래서 콩나무가 없어도 콩이 없고 콩이 없어도 콩나무가 없는 것입니다. 어디 정신계와 물질계가 둘입니까?
우리 육신을 끌고 다니는 장본인은 나무 뿌리와 같습니다.
나무 뿌리가 나무 전체를 성장시킵니다. 뿌리에서 수분, 철분을 흡수해서 올려 보내고 위에서는 공기력과 태양력을 흡수해서 내려 보내니 정맥 동맥이 돌아가듯 나무를 성장시킵니다. 푸르르게 살도록 말입니다.
부처님이 가르쳐 주신 뜻이 뭔가를 한번 가슴에 손을 얹고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이 모습을, 육신을 믿으라고 하신 게 아닙니다. 나를 따르라고 했지, 믿으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왜 편치 않게 살아야만 하겠습니까?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몸 속에 천차만별의 의식이 있는데 우리 육신은 그 생명들에게 뭐가 됩니까. 관리인이 되고 심부름꾼이 되고 집이 됩니다, 집!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한 컵에 물을 따라 마신다 하더라도 혼자 마시는 걸까요? 더불어 같이 먹는 것이기에 내가 먹었다고 내놓을 수가 없겠죠. 안 그럴까요? 내가 먹었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더불어 같이 먹었으니까요. 그래서 색이 공이고 공이 색이니라 한 거죠.
그런데 왜 공했다고 말씀을 하셨을까요? 보는 것도 듣는 것도 말하는 것도 가고 오는 것도 고정된 게 하나도 없습니다. 찰나찰나 화해서 바꾸어 나투는데 어떻게 공했다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어떤 거 할 때에 내가 했다고 할 수 없으니까 공한 것이요 여여하다는 겁니다. 태어나 살면서 고정되게 보고만 있으면 목석이라고 하고 고정되게 듣고만 있으면 귀머거리라고 할 겁니다. 모든 것이 고정된 게 하나도 없으니 그대로 내가 한 바가 없이 여여하구나 하는 거죠.
윗눈썹과 아랫눈썹이 그렇게 가까이 있으면서 함께 작용을 하는 것과 같은데 너무 가까와서 그런지 자기를 못 보는 겁니다. 그대로 여여하게 살면서도 마음으로는 집착과 관습과 모든 얽힘을 붙들고 부자연스럽게 만들어 놓는 거죠. 사방이 다 터졌는데 말입니다.
보세요. 마음이 체가 있습니까? 체가 있다면 내 놔 보세요. 고정됨도 없어요. 여기에 앉아서도 집에 갔다 오시려면 한 찰나에 갔다 오실 수 있습니다. 신발이 어디에 놓여 있고 내 소지품이 어디에 있다는 것까지도 다 아시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얽매여서 트이질 못하고 물리가 터지지 못하고 지혜롭지 못하고 둥글리지 못해서 길면 길다고 야단, 짧으면 짧다고 야단을 하니 싸움이 일어나고 분별심이 생기고 그러죠.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상대가 짧으면 짧은 대로 네가 짧아지고, 길면 긴 대로 네가 길어지고, 둥글면 둥근 대로 네가 둥글어지라구요.
이 세상에 다 각자 높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배를 탈 때는 뱃사공이 높고, 치과에 가면 치과의사가 제일 높습니다. 제 아무리 내가 높다고 생각을 해도 그건 망상입니다, 망상! 내가 잘 안다고 해도 망상입니다.
개미 소굴에 가 보십시오. 개미 소굴에서는 개미가 높습니다. 그러니 부처님께서 미생물에서부터 일체 만물만생이 다 평등하다고 하신 것 아닙니까?
우리는 왜 공했다는 뜻을 말로만 알고 그 뜻을 모를까요.
내 부모 아님이 하나도 없고 내 자식 아님이 하나도 없고 내 형제 아님이 하나도 없이 평등한데 왜 그 뜻을 모를까 하는 겁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미생물에서부터 수억겁 광년을 거쳐서 사람으로까지 화해서 이날까지 진화되어 왔습니다. 내 자신이 나를 형성시켜서 이렇게 여기까지 끌고 왔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부모가 되고 자식이 되고 또 부모가 되고 자식이 되고 그러지 않습니까? 미생물에서부터 말입니다.
부모가 되고 자식이 되고, 또 부모가 되고 자식이 되면서 인간까지 성장을 했단 말입니다. 그렇다면 벌레라고 해도 내 부모 아닌 게 없는 겁니다. 과거의 내 모습이니까 말입니다. 내 모습 아닌 게 하나도 없어요. 그래서 내 모습이고 네 모습이고 간에 내 부모 아님이 하나도 없고 내 자식 아님이 하나도 없다는 결론이 나오는 겁니다.
이 생의 육신을 낳아 주신 부모만이 부모가 아닙니다. 우리들이 이 생의 부모를 통해서만 이 세상에 나왔을까요? 천만의 말씀이죠. 수억겁을 통해서 끊임없이 생존경쟁을 했을 겁니다. 잡아 먹히고 잡아 먹으면서 실랑이를 했을 겁니다.
우리는 업식의 종문서를 가지고 나왔기 때문에 주인의 종입니다. 주인과 종이 둘이 아니게 상봉을 해야만이 진짜 공부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의 주인을 이름해서‘부’라고 하고 현재의 자기는 ‘자’라고 합니다. 자와 부가 상봉을 해야만이 그때부터 무의 세계, 유의 세계로 뛰면서 공부를 하게 되는 겁니다.
화두를 들고 공부를 하시는 분들도 마음으로 화두를 받은 것이지 화두라는 이름을 받은 게 아니예요. 안 그렇겠습니까? 이름이 없으면 받았다는 느낌이 없으니까 화두라는 이름을 준 겁니다. 그런데 그건 어떤 경우이고 간에 마음으로 마음을 주었지, 화두라는 이름을 주지는 않았거든요.
그래서 받아들일 때 자기의 영원한 근본이 물 한 방울이라면 그 영원한 근본에 둘 아니게 수만 개를 넣는다 하더라도 물 한방울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그대로 영이죠. 그대로 한마음이에요. 한마음 가운데에서만이 근본자리가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하고 그 자리에 놓는 겁니다. 내고 들이는 것이 바로 그 자리이니까 그 자리가 있다는 것을 그 자리에서만이 증명을 할 수 있다 하고 놓는 것이죠.
일거수 일투족 움직이게 하는 것도 주인공, 잘 되고 못 되게 하는 것도 주인공, 잠자고 깨어나게 하는 것도 주인공, 일체가 다 주인공이죠. ‘너’라고 해도 좋고 ‘부처’라고 해도 좋고, ‘주인공’이라고 해도 좋고 ‘부’라고 해도 좋고, 자기에게 친근하게 닿을 수 있는 이름으로 방편을 삼아도 좋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많은 보살들을 생산시켰습니다.
한마음으로 이 몸 속에 있는 생명체들이 전부 보살로 화하여 털구멍을 통해서 들고 나게 만들고, 낮고 높고를 떠나서 사람이든 짐승이든 가리지 않고 응신이 돼 주라는 뜻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천백억 화신이 모든 중생들에게 응신으로 나투어 주신다 하는 거죠.
어떤 분들은 유전성, 인과성, 업보성, 세균성, 영계성 이 다섯 가지가 과거에 지어 놓은 인연에 따라 함께 하고 있습니다. 태어났으니까 현재 가지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업식을 가지고 있지만 나에게 부처도 있기에 그 모두를 이끌어 갈 수 있는 겁니다. 오신통이라는 다섯 가지도 그렇습니다. 오신통이라는 통 속에서 벗어나야 누진으로써 자유스럽게 들이고 내고 들이고 내게 되는 거죠.
다섯 가지 오신통을 컴퓨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다섯 가지 문제를 들이고, 다섯 가지 문제에서 풀려 현실로 나가 다시 들이고 하는 것이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참 묘하죠. 입력이 되는 대로 자꾸 누적이 되니 나오는 그 자리에다 다시 입력을 한다면 앞서 입력이 없어지지 않느냐는 소립니다.
오직 한 놈 속에서 들이기도 하고 내기도 하니까요. 구멍 없는 구멍이 아니라면 절대로 무의 세계의 궁전에는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 궁전에 들어서야만이 현실의 모든 법을 감지하고 무의 세계에서 실천하며 모가 나지 않게 둥글리니 진짜 공부는 그때서부터입니다. 그게 바로 점수입니다. 점수라고 일컬어 말하는 것이죠.
돈오와 점수가 어떻게 둘이겠습니까. 돈오는 어린애를 금방 낳은 것과 같고, 점수는 어린애를 키우는 것과 같은 겁니다. 키우는 일하고 낳는 일하고 뭐가 다릅니까? 선(禪)과 학(學)도 둘이 아니요, 생활과 부처님 법도 둘이 아닙니다. 우리 생활 자체가 그대로 부처님 법이자 우리들의 법이고 우리들의 법이자 공부할 수 있는 재료입니다. 공부할 수 있는 재료!
법당에 들어가서도 삼정례를 한다, 칠정례를 한다, 108배를 한다, 삼천배를 한다고 하는데, 부처님은 진정한 한 걸음을 걸은 것과 삼천 걸음을 걸은 것과 맞먹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산길이 산길이 아니고 들길이 들길이 아니고 그대로 한생각이면 길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들도 지금 그렇게 하며 살고 계신데 얼른 납득을 못해서 그럽니다. 자기가 자기 자신을 진짜로 믿고 콩 싹이 자기 콩 씨를 진짜로 믿고 어디가 아프다 해도 “영원한 친구야, 몸이 이렇게 불편한데 네 집이니 주인이 고쳐야지 누가 고치겠니? 네가 형성시켰으면 네가 고쳐야지.”하고 웃으면서 다정하게 내려 놓을 수 있는, 그런 보람을 느끼며 살 수 있는 삶입니다. 참으로 묘해서 말로는 다 형용할 수가 없습니다.
위 아래 중간 즉 대천세계 중천세계 하천세계가 따로따로 있다고 생각을 하지 않고 우리가 둘 아니게 둥글려서 시공을 초월해서 돌아가지만 법도를 지키려면 바로 하천세계는 하천세계고 중천세계는 중천세계고 상천세계는 상천세계입니다.
과거·현재·미래가 따로 있으면서도 따로 없고, 한 찰나에 과거고 한 찰나에 미래고 한 찰나에 현실이며, 우리가 죽어서 과거로 가고 또다시 미래를 향해서 현재로 다시 오는 것은 어느 생명체든 다 똑같습니다.
무슨 지옥이 따로 있는 게 아니예요. 가만히 보세요. 현실세계에 지옥이 있고 극락이 있지 않습니까. 한 생각에 지옥을 만드는 것도 자기요, 한 생각에 극락을 만드는 것도 자기인데 그렇게 미묘하고 광대하게 생각 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정말이지 참마음은 아주 기묘해서 이 세상을 다 삼키고도 남음이 있고 이 세상을 다 끌어 당길 수도 있고, 집어 삼킬 수도 있고 뱉어 내 놓을 수도 있고 자유자재할 수 있는 권도라고 할까요, 권도! 자유권도! 그러기에 몰라서 잘못한 사람을 잘못했다고 탓하지 말라는 겁니다.
우리들이 부처님과 한자리하면서 산다는 생각을 한다면 한 치도 어긋나지 않게 부처님 법을 그대로 알게 될 겁니다.
왜 넓게 살아라, 둥글게 살아라, 낮은 걸 보고도 낮다고 생각을 하지 말고 네 모습으로 보고, 네 마음으로 보고, 네 아픔으로 보고, 네 몸으로 생각하라고 하겠습니까. 수억겁을 거치면서 그 모든 것의 부모가 됐었고 그 모든 것의 자식이 됐었고 그 모든 것의 형제가 됐었으니, 상대가 모자란다고 해도 옛날의 네 모습으로 본다면 모든 것이 평등하니라 한 것입니다.
우리는 한 치 앞도 내다 보지 못하고 삽니다. 한 생각이 중요합니다. 왜 한 생각에 밝은 미래를 가져 오기도 하고, 한 생각에 과거도 현실로 끌어 올 수 있고, 미래도 현실로 끌어다 놓을 수 있는 미묘한 법을 방치한단 말입니까. 방치하고는 남의 탓만 하고 남이 모자란다는 생각을 하고 남이 잘못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이만하면 됐지 뭐 하지만 그래선 안 됩니다.
비구 스님들은 비구들만 성불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비구니 스님들은 비구니라서 성불 못 한다는 생각 때문에 그만 걸립니다. 하늘이 비구라면 땅은 비구니입니다. 산하대지의 일체 만물만생을 길러내는 어버이입니다. 젖소로 따진다면 젖입니다, 바로! 비구 스님들이 젖소라면 비구니 스님들은 젖줄입니다.
하물며 돌 한 조각도 부처 아닌 게 없고, 공안 아닌 게 없고, 형제 아님이 없고, 내 몸 아닌 게 없고, 도량 아닌 게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어찌해서 그렇게 함께 심부름 해 주는 사람들을 무시하느냐는 겁니다.
좀더 너그럽고 지혜롭게 한 팔로 이 세상을 다 안고도 남음이 있게끔 안는다면 세상에 뭐가 부러울 게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때로는 비구가 됐다가, 때로는 비구니가 됐다가, 때로는 작부가 됐다가, 때로는 짐승이 됐다가, 때로는 미생물이 됐다가 천차만별로 화해서 바뀌고 나툰다고 하셨는데 어떤 것을 할 때 비구니라고 하고 어떤 것을 할 때 비구라고 하겠습니까?
우리가 앞으로 한국 불교를 수호하고 모두를 리드해 나가려고 한다면 의식이 바뀌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 나라는 청소년들도 그렇고 모든 면에서 어려움에 빠져 있는 것 같습니다. 물질적 발전은 된다 하지만 청소년들이 얼마나 집을 뛰쳐 나가는지 아십니까? 그리고 얼마나 나쁜 짓을 하는지 아십니까?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승가대학을 좀더 마음으로라도 뒷받침을 해서 금 같이 굳고, 대쪽 같이 바르고, 넓기로 말하면 우주를 싸고도 남음이 있는 그런 스님네들이 배출되기를 바라면서 항상 염원하고 동참하자고 하는 겁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물에서 노는 고기들이 물 밖에 나오면 죽습니다. 부처님은 우리들을 너무나 가엾이 여겨서 팔만대장경을 일러 주셨습니다. 오직 그것만 생각하시고 일깨워 주신 건데, 우리가 첨단은 넘어설 수 없을지언정 어찌 실천을 하려고 노력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린 지금 공기 주머니 속에서 한발짝도 나가지 못하고 갇혀 사는 겁니다. 통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지구 속에서도 벗어날 수가 없어요! 그리고 심안으로 보기만 해도 ‘도’라고 그러는데 천만의 말씀이에요. 보는 것도 도가 아니고 남의 마음을 잘 아는 것도 도가 아니며, 또 오고 감이 없이 오고 간다 하더라도 도가 아니고, 자기가 어디서 나온 줄 안다고 해도 도가 아니며, 모든 것을 듣는다고 해도 도가 아니며 그 다섯 가지 통 속에서 벗어나야 자유자재권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가끔 얘기하듯이 지구가 버스라면 버스 안에서 내다 보지도 못하고 어디로 돌아가는지도 모르면서 그냥 내 의자니 네 의자니 하고 서로 뺏는 것과 뭐가 다릅니까. 그렇게 싸워야 되겠습니까? 이 버스가 어디로 돌면서 시공을 초월해서 도는지, 어떻게 해서 찰나찰나 걸림이 없이 돌아가는지를 증득하여 내가 나를 벗어난다면 모든 데서도 속박 안 받고 자유스러울 겁니다.
어떤 때 보면 사람들이 도깨비 장난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즐거워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미생물에서부터 천차만별로 헤아릴 수 없는 생물들을 보면 짝을 지어 자식을 낳고 사는데 사람들처럼 질투를 하는 게 없고, 숫놈이 암놈을 많이 두어도 그저 순간순간만 인연 맺고 그냥 넘어가며 착을 두지 않고 살더라구요.
그런데 사람은 왜 그렇게 착을 두는 것일까요. 한 철 살다가 가고 또 한 철 오고 가는 것뿐인데 그렇게 야단들이거든요. 조그마한 것 가지고도 불편하게 싸우고 네가 잘못했느니 내가 잘했느니 그러는가 하면 어디 그것뿐입니까. 자식이 나가서 안 들어온다고 마구 욕을 하고 여차하면 때리기도 하고 그러거든요. 업식으로 그렇게 되는 건데, 그 의식이 자꾸 나와서 상황을 그렇게 만드는 것이니 마음에서 고장난 걸 마음으로 고쳐야지 때리고 욕을 한다고 해서 고쳐지는 게 아닙니다.
벌써 자식과 부모 사이는 가설이 돼 있거든요. 그러니 주인공에 모두 맡긴다면 거기까지 불이 들어오게 돼 있어요. 통신이 되게 돼 있다구요. 통신이 되어서 마음이 몸을 끌어 들여야 합니다. 마음에서 하기 싫어야 안 하게 되는 거지, 마음으로 자꾸 나가고 싶으면 몸도 따라 나가는 거 아닙니까.
그 도리를 여러분들이 잘 알아서 행하시면 아주 편안하게 사실 겁니다.
지금 영계성으로 인해서 집이 비고 주장자가 없다 보니까 그게 바로 정신병자가 되는 겁니다. 아무나 자기 집이라고 들어와서 살거든요.
그러니 여러분들이 잘 아셔서 욕으로 다스리지 말고 아무리 나가서 자고 오더라도 따뜻하게 대해 주고 인의롭고 부드러운 행동으로 대하면서 맡긴다면 그쪽으로 통신이 가게 돼 있습니다. 그러나 욕을 하고 말로 다스리려고 한다면 통신은커녕 오히려 마음이 천리만리 달아나게 됩니다.
부부지간도 그렇고 부모자식 지간도 그렇습니다. 가정에서 한번 보십시오. 찰나에 남편이 되고 아버지가 되고, 아들이 되고 사위가 되면서 살지 않습니까? 그렇게 찰나찰나 바뀌면서 살아나가는데 내가 남편이 됐을 때 나라고 하겠습니까. 아들이 됐을 때 ‘나’라고 하겠습니까.
모두가 공해서 찰나찰나 화해서 돌아가고 나투어 가는 것이니 ‘나’라고 고집하지 마시고 둥글게 안아서 굴리며 통 속에서 벗어나서 만사에 다 부끄럽지 않고 자유스럽게 되어 고요한 적멸궁에 든다면, 다시 이 세상에 소임을 맡아 나올 때는 별성으로 화해서 이 세상에 떨어질 때 거기에도 별성이 있고 여기에서도 별성이 항상 같이 해 주기 때문에 자기 소임을 잘 하고 갈 겁니다.
그렇게 된 분들은 가시는 것도 없고 오시는 것도 없습니다. 오신 것이 없기 때문에 가실 것도 없고 과거가 현재고 미래가 현재니까 영원한 오늘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영원한 오늘에 지금 그대로 계십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마음 깊은 속을 안다면 부처님의 그 마음을 둘 아니게 알아서 부처님이 계신 걸 아실 수 있을 겁니다.
질문자1: 반야심경에 보면 ‘공(空)’자와 ‘무(無)’자가 많이 나오는데요, 특히 이 공(空)자에 대해서는 이해가 어렵습니다.
불교사전에 보면 ‘진공묘유, 진여실상’ 등으로 풀이되어 있습니다. 스님께서 뜻으로 풀이하신 반야심경에는 ‘색불이공 공불이색’을 ‘물질과 마음이 다르지 않고 마음은 모든 물질적 현상과 다르지 않나니’하여 공을 마음으로 풀이하셨습니다.
그리고 법문집에 모든 것이 다 공에서 나온 것이므로 그 공에다가 다 맡기라고 자주 거론하셨습니다. 이 기회에 다시 한번 ‘공(空)’에 대한 가르침 주시기 바랍니다.
스님: 그렇다고 공에 빠지면 안 됩니다. 빌 공자에 빠지면 안 되죠. 공이라 하면 용(用), 무(無)를 말하죠. 용(用)무(無)! 우리가 그냥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있는 그 자체 그대로가 공입니다. 아까 얘기해 드렸죠? 찰나찰나 나투면서 화하여 돌아간다구요. 그냥 비었단 얘기입니다.
아버지가 됐을 때 나라고 하겠느냐 남편이 됐을 때 나라고 하겠느냐 했으니 그거는 어떤 거라고 말할 수 없으면서 그대로 용무가 되죠. 그냥 그대로예요. 그래서 여래라고 아마 이름을 붙여 놓은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대로 여래 속에서 여래의 행동을 하니, 법이 그대로 용이면서 무다 이겁니다. 비었다고 해서 빈 줄로만 알지 마시고 꽉 찼다 하더라도 꽉 찬 줄로만 알지 마세요.
엊그저께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 지구에서 에너지가 다 없어진다면 무엇으로 살 것인가? 그런데 이 허공에 생명들이 꽉 찼는데 생명이 꽉 찼다는 것은 에너지도 꽉 찼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용, 무를 알아서 진실하게 함이 없이 할 줄 안다면 에너지를 얼마든지 끌어 쓸 수가 있다는 얘기입니다.
우리는 왜 못 한다고만 생각합니까? 왜 우리는 중생이기 때문에 죄가 많다고 생각을 하고, 우리는 왜 못 한다고만 생각합니까? 그 생각이 문제입니다.
옛날에 이런 예가 있었습니다. “묘지가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애비 것이고 하나는 자식 것인데 양쪽에 구멍이 뚫렸느니라. 애비가 자식한테로 가면 자식으로 하나가 되고 자식이 애비한테로 가면 애비로 하나가 되니 그건 무슨 연고인가?” 하는 질문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발이 띄어지지 않아서 3일을 그냥 앉았었죠. 그러다 보니까 이런 생각이 납디다. 영에다 영을 넣어도 둘이 아니요, 만 불을 일 불에다 넣어도 둘이 아니라구요. 그래서 그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만 어찌 공했다고 부처님께서 말씀 안 하셨겠습니까? 이 묘한 법을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