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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氣의 자연과 인간 - 주자학의 미분화적 교호적 사고 논구
한형조, 한국학중앙연구원 철학과 교수
다산학 14호(2009.06) : 111~140
1. 주자학의 근본적 곤혹
이 글은 주자학의 근본적 곤혹 하나를 점검해보려는 시도이다.
의제는 주자학이 채택한 ‘자연과 도덕의 통합적 논의’이다.
주자학은 세계와 인간을 이기理氣의 프레임워크로 설명한다.
기氣가 사물과 현상의 변전하는 세계를 가리킨다면, 이理는 거기 내재된 질서와 원리를 가리킨다.
그런데 주자학은 이 이기理氣에 윤리적 가치와 당위의 세계를 접목시켰다.
이 병치 혹은 착종이 오랫동안 연구자들을 곤혹스럽게 했다.
근대에만 그런 것이 아니고, 조선의 주자학 논쟁, 그 밑바닥에 이 통합적 미분화적 구상이 깔려 있다.
근대 주자학 연구의 선구자인 니이덤은 이렇게 말한다.
중국학자들까지도 (북송의) 새로운 유학이 ‘윤리적’인 것과 ‘논리과학적’인 것을 너무 심하게 뒤섞어 놓았다고 우려를
표명했다.
주자는 왜 자연학과 윤리학을 착종시켰을까. 학자들은 그가 자연학에 충실하던가, 아니면 윤리학을 다른 디스코스로
구성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둘의 동거 혹은 혼재는 읽고 납득하기에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야마다 케이지의 주자의 자연학 또한 이 갈등葛藤을 부담스러워했다.
그는 이를테면 이 혼재 가운데서 윤리학 부분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자연학적 부문만을 분리해서 기술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런데 예외적으로 이 병치 혹은 착종을 환호한 사람이 있다.
중국의 과학과 문명이라는 책으로 중국의 문명의 수준을 세계에 알린 니이담이 그 사람이다.
그는 말한다. “그렇지만 가장 과학적인 철학자들은 자연세계에서의 윤리의 출현을 설명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 말을 음미해보자. 그는 지금 윤리의 출현이 자연학적 사건이라고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
과연 윤리학은 자연학에 종속되는가. 주자처럼 윤리학을 자연학적 기반 위에서 논하는 것이 전혀 기이하지 않고 오히려
정당한가. 니이담은 주자의 통합적 구상을 이해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고 안타까워했다. “
현대 중국학자를 통틀어 그라프(Graf) 정도만이 자연에 기반한 새로운 유학의 윤리적 성취를 이해하고 있었다.”
니이담의 평가가 맞다면, 기존의 접근법을 짚어보고 통념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 이는 만만한 일이 아니다.
그의 발언을 더 면밀히 탐구해야 하고, 무엇보다 우리의 선이해적 구조, 무의식적 사고습관을 반성해야 할지 모른다.
나는 문득 이런 물음을 거꾸로 던져 보게 되었다. “왜 우리는 굳이 자연과 윤리를 갈라보아야 한다고 생각할까?”
이 강박은 사실 자체라기보다 학습된 편견일 수도 있지 않을까.
거기 근대 이후 정착된 자연-인간관이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글은 이 ‘회의’를 출발점으로 하여 주희의 통합적 사고를 ‘추적’하고 ‘이해’해보려는 한 시도이다.
개인적으로 이 시도는 오래전에 쓴 학위논문의 비평적 보완의 의미도 갖고 있다.
「주희에서 정약용으로의 철학적 전환」은 다산의 탈주자학의 지평을 정당화하기 위해 주자의 사유에 통합된 자연적
조직과 인문적 의미 사이에 틈을 내고 그것을 비공감적으로 강조한 바 있다.
지금 이 글은 “주자가 원래 구상한 대로” 그 틈을 봉합한 자리에서 읽어보려는 공감적 접근임을 미리 짚어둔다.
2. 노장老莊의 일원론과 주자학의 이원론
주자는 자신의 사유를 두고 벌어질 후대의 훤요喧擾를 그다지 의식하지 않는 듯하다. 나는 기실 그것이 더 이상했다.
그는 자연과 윤리의 혼재, 사실과 당위의 착종을 변호하거나 안배할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의 어법은 단호하고 어조는 천연스럽다. 나는 이 점에 주목한다.
주자가 누군가. 그는 철학을 포함한 당대의 모든 지식을 점검하고, 그것을 자신의 체계 속으로 흡수한 이를테면 르네
상스적 인간이다. 그의 치밀함과 명석성은 정평이 나 있다. 왜 그는 이 ‘곤혹’을 전혀 문제로 느끼지 않았을까?
논의를 사상사적으로 짚어보기로 하자.
우선, 니이담이 지적했듯이, 이 곤혹은 도가道家의 기氣의 사유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도가는 기氣의 생성과 변화에 목적을 배제하고 그 무의미를 강조함으로써 ‘일원화’에 철저했기 때문이다.
이 생각을 한 마디로 요약하고 있는 말이 “천지불인天地不仁”이다.
이 선언은 자연의 과정에 어떤 인간적 냄새도, 윤리적 틈입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그에 의하면 자연은 이를테면 기氣의 자체 분화, 내재적 충동으로 흘러가는 거대한 강 같은 것이다.
이 강의 흐름 속에 부침하는 사물들은 전체의 의지, 도道의 무위無爲의 비의지적 기획의 결과이다.
하여 생명들은 유한하지만 절대적으로 선하다.
1) 유한하다는 것은 삶이 객려客旅이며, 결국 자신이 왔던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2) 절대적으로 선하다는 것은 어떤 하찮은 것도 우주적 기획의 일부이고 참여자이기에, 인간의 유위적 관심이 내린
선악의 판단을 넘어서 있다는 뜻이다.
시비와 선악은 인간의 것이지 자연의 것이 아니다. 그것을 이해한 성자聖者는 기쁨과 슬픔, 이해와 득실에 흔들리지
않고 삶과 죽음을 태연히 바라본다. 장자는 아내가 죽었을 때 두 다리를 뻗고 질그릇을 두들기며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친구 혜시가 지나치다고 비난하자, 이렇게 말했다.
처음에 아내가 죽는 것을 보고 나라고 어찌 슬프고 아득한 마음이 없었겠나. 그러나 생명의 시원始原을 돌아보니 그게
본래는 없었던 게 아닌가. 더 거슬러 가보면 생명은커녕 아무런 형체도 없었던 시절이 있었고, 형체는커녕 기氣조차
없었던 때도 있었네. 그 혼돈의 흐릿한 속에서 어쩌다가 기氣가 생겼고, 기氣가 변해서 형체가 되었으며, 형체가 변해서
생명이 있게 되었네. 지금 그게 또 변해서 죽음이 된 게 아닌가. 이건 사계절이 번갈아 진행되는 것과 같은 거야.
아내는 지금 천지天地라는 거실에 편안히 누워 있다네. 그런 걸 지금 울고불고 곡을 해서 시끄럽게 해야겠나.
그건 운명에 대한 무지의 소치라 생각되어 그만 둔 것일세.
장자는 이처럼 자연의 과정에 인간적 냄새를 거부하고, 그 냉혹한 이법을 그대로 수용하라고 권한다.
주자는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주자는 도가에 대해 양면적 평가를 내린다.
1) 불교의 환망관幻妄觀과 달리 자연의 과정을 기氣의 역동으로 파악하는 점에서 불교보다 더 ‘현실적’이다.
2) 그러나 도가는 그 기氣의 디테일을 격물格物하지 않고, 무엇보다 그 우주적 과정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서 그다지
유의하지 않았다. 나아가 인의仁義를 버리고 지식知識을 목 조르라는 제언에 대해서는 기겁을 한다.
3. 기氣의 세계, 혹은 양극성의 복합 구조
기氣 속에서 이理를 발견함으로써 주자학은 노장과 결별한다.
기氣는 ‘다양성’과 ‘변화’의 세계이고, 그것은 수많은 표징과 원리들을 갖고 있다.
주자는 이들을 이원적 대립항의 프레임워크로 설명해 나갔다.
1) 발생학적 접근 : 기氣는 원초적 태허太虛, 혼돈의 덩어리에서 1차적 분화를 겪는다. 무거운 것은 내려 앉아 땅이
되었고, 가벼운 것은 올라가 하늘이 되었다. 땅에 수화목금토水火木金土의 물질이 생겼고, 하늘에는 수화목금토의
별들이 생겼다. 땅위를 하늘이 돌게 됨으로써 흡사, 맷돌을 돌려 밀가루가 솔솔 흘러나오듯이 땅 위에 수많은 생명들이
생겨났다.
2) 이 과정을 이진법 수학으로 보여줄 수도 있다. 이 모델은 역易이 창안하고, 수많은 해설과 정교화 과정을 거쳤다.
하나인 기氣의 풀은 음양으로 2원화하고, 이것이 갈라져 4상, 그리고 8괘를 낳고, 이 기초 상징들의 복합으로 64괘가
형성된다. 각 괘들은 하나의 사태, 혹은 국면을 상징하고 있고, 이들은 추이에 의해, 혹은 다른 요소의 개입에 의해 다른
국면으로 이동한다. 변화는 전체적으로 순환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이진법의 체계는 라이프니츠가 찬탄한 것이기도 하다. 그는 이 원리를 중국의 선천도先天圖가 보여주고
있는 것을 보고 감탄해 마지않았다.
이 역易의 그림은 우주에 있어서 오늘날 존재하는 과학에 관한 최고의 기념물입니다.
더구나 이 과학은 내가 보는 견지에서는 4천년 이상의 고대의 것으로서 수천년이 지나는 동안에도 그 의미가 이해되
어지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나의 새로운 산술과 완전히 일치하고 …… 나는 당신께 고백하는 바이지만, 만일 내가 이
이진법 산술을 발명하지 않았다면 이 64괘의 체계, 즉 복희伏羲가 지은 도상의 목적을 통찰하지 못하고 막연하게 장
시간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사물과 현상들의 특징은 이 이진법적 분화로 설명된다.
0과 1만으로 세계를 설명할 수 있다는 것, 라이프니츠는 그것을 ‘하나님의 창조 방식과 그 비밀’이라고까지 찬탄했다.
이진법이 하나의 시선이 아니고 절대적 진리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적어도 지금 우리의 삶의 일부가 된 컴퓨터의 세계, 그 가상현실이 이진법 위에 구축되어 있다는 것은 놀랄
만한 일치라고 생각한다. 0과 1의 복합으로 텍스트가 조합되고, 그림이 만들어지며, 뿐인가, 동영상까지가 실제인 듯
생생하게 펼쳐진다. 옛적 중국인들이 이 컴퓨터의 원리를 일찌감치 발견했다고 자랑해도 될 듯하다.
이진법은 기氣의 세계를 보는 하나의 ‘시선’ 혹은 ‘관점’이다. 주
자는 1)과 2)가 서로 다른 체계라거나, 서로 모순된다고 생각하지 않고, 이들을 ‘대응’시켜 나가기까지 한다.
가령, 해는 뜨거운 양陽의 대표이고, 달은 차가운 음陰의 대표이다. 오행 가운데 물은 음이, 그리고 불은 양이 주도하는
것이고, 쇠와 흙은 이차적 결합물이다. 불은 온전히 양인 경우는 없고, 그 안에 음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 역도 마찬가
지이다. 그래서 술처럼 물이면서 불인 경우도 있고, 반대의 경우도 있다. 음 속에 양이, 양 속에 음이, 그리고 그 안에
또 다른 요소들을 품고 있는 것은 이진법의 체계에서 또 다른 이진법으로의 분화와 매칭된다.
사물은 그리고 운동은 결국 ‘양극적’ 대립과 분화로 요약된다. 양극성이 우주간 사물을 관통하고 있는 중심원리이다.
이 통찰은 선배인 정이천의 것인데, 그는 그 길을 그대로 따랐다.
하늘과 땅 그리고 만물의 이理는 홀로인 것이 없고, 반드시 짝을 가지고 있다. 모두 저절로 그러한 것일 뿐,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안배한 것은 아니다. 깊은 밤 일어나 그것을 생각할 적마다 손과 발이 춤추는 것을 어쩌지 못한다.
이 ‘대립’적 양극과 그 길항으로 굴신왕래屈伸往來, 사물들이 사이클을 이루고 이 패턴이 무궁한 변전으로 이어진다고
한다. 즉 “동죙靜에 단서가 없고, 음양陰陽에 처음이 없다.[動靜無端, 陰陽無始.]”
저간의 소식을 그림 하나에 집약한 것이 태극기에 채용된 둥근 상징이다. 주자는 다음과 같은 일화를 전하고 있다.
양귀산이 황정의 담계로의 집에 들렀다. 담이 역易을 묻자 양귀산은 종이 한 장에 둥근 원을 그리고 먹으로 반을 칠한
다음, ‘이게 바로 역易이오’ 했다고 한다.
이 해설이 아주 좋다. 역은 다만 일음일양一陰一陽인데, 수많은 모양을 산출한다.
둥근 동그라미 안에 음과 양이 아래위로 맞서 있다. 이는 천지天地처럼 우주가 크고 작은 수준에서의 이원적 대립항
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상징한다. 그것이 서로를 밀고 들어가는 것은 운동과 순환의 패턴을 가리키고 있다.
어떤 그림은 이 밀고 들어가는 축 안에 작은 원을 그려놓기도 하는데, 이것은 음이 자신 속에 양을, 그리고 양 또한
자신 속에 음을 안고 있다는 역동성을 표현한 것이다.
4. 이理의 ‘소이所以’, 그 다극적 의미에 대하여
이렇게 보면, 이理는 기氣가 표징하고 있는 ‘이원적 대립과 그 복합’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요컨대 이理의 최초의,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의미는 바로 그 ‘운행의 질서’이다.
그런데 주자는 기氣의 표징 안에 ‘인문’과 ‘도덕성’까지를 포괄했다. 즉, 이理는 한편 자연의 유기적 질서를 가리키지만
또 다른 한편 인문적 가치와 덕성을 가리켰다.
주자는 이 둘을 동거시킴으로써 ‘새로운 유학(Neo- Confucianism)’을 창도했지만, 앞에서 적었듯이 후대인들은 어떻
게 동일한 이理에 이렇게 서로 다른 의미 차원이 매개 없이 공존할 수 있느냐고 곤혹스러워했던 것이다.
이 난제를 살펴보기 전에, 주변을 더 둘러볼 필요가 있다. 주자는 이理에 이처럼 ‘질서’와 ‘가치’만 짚어냈던 것은 아니다.
최근에 주자어류를 읽다가 나는 특이한 사실 하나를 포착했다. 즉, 주자의 이理에는 앞의 둘로 환원할 수 없는 의미
들이 다면적으로, 다분야에 걸쳐, 카테고리를 달리하며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선 적어놓기만도 이理는 때로는 기氣의 ‘속성’을, 때로는 기氣의 ‘기능’을 뜻하기도 했다.
범주 영역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위험을 무릅쓰고 말한다면, 주자는 기氣가 보여주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 “그것이
이理다”라고 말하는 듯하다.
김영식 교수도 주자에게서 “이理란 다만 기氣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고까지 말한 바 있다.
그러므로 복잡한 물체나 현상의 이理는 그 물체나 현상 자체보다 개념적으로 더 간단하거나 근본적이지 않다.
사실 이理는 주어진 물체나 현상 전체를 한꺼번에 지칭한다.
주자가 물체나 현상의 이理를 언급했을 때 그것은 그 물체나 현상이 존재하거나 일어날 것임을 보장할 뿐이다.
주자는 음양陰陽이 아니라 “일음일양의 소이所以”를 이理라 한 바 있다.
나는 주자어류와 문집을 읽을 때 이 소이所以와 맞닥뜨리면 그 실내용이 무엇일까를 확인하려고 늘 애를 썼다.
소이所以는 문맥에 따라 원인, 바탕, 이유, 과정, 용도, 재료 등등을 가리켰다. 지금 보니 알겠다. 이理는 바로 이들 제반
소이所以를 포괄적으로 가리키는 말이었다.
요컨대 확인될 수 있는 기氣의 차이, 인식될 수 있는 모든 구분이라면 어디서든 이理라는 딱지가 붙어있다.
심지어 이理는 기氣의 ‘근원’이라고까지 말해 조선유학의 주리主理-주기主氣논쟁을 유발시키기까지 했다.
천지天地가 있기 이전에 필경 이理가 있었다. 이 이理가 있었기에 이 천지가 있게 되었다. 이 이理가 없었다면 천지도
없었을 것이고, 사람도 사물도 없었을 것이고, 땅위에는 아무 것도 없었을 것이다.
이理가 있어 기氣가 유행했고, 만물을 발육發育하게 되었다.
이 포괄성이 이理의 애매성을 증폭시키고, 독자들을 혼란시켰다. 우리는 범주를 넘나드는데 익숙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왜 주자는 이 혼륜渾淪의 길을 따라갔을까.
1) 아마도 그는 이 다면적 다층적 접근이 ‘동일하게’ 기氣의 면모들이며, 이들이 풍부한 만큼, 그 사태를 더 잘 알 수
있다고 생각했음에 틀림없다.
2) 각 카테고리들은 다른 카테고리와 ‘감응感應’의 구조로 되어 있음을 염두에 두자. 음양과 오행의 ‘범주’들은 자연과
인간의 전 부면에 걸쳐 있다.
기상, 천문, 신체기관, 가족, 인간관계, 감정과 정서, 방위, 음식과 맛, 성격, 수명 등등 …… “불이 마른 곳을 향하고,
물이 젖은 곳을 따르듯,” 바람은 봄에, 불은 여름에, 차가운 쇠는 가을에, 검은 물은 겨울에 서로 짝하고 그들 사이는
유비적 친화성을 갖고 있다.
즉 범주들은 독립되어 있지 않고 서로 넘나들며 상호영향을 주고받는다.
이 발상에 동의한다면 기氣의 실제를 알기 위해서는 다층적 다多카테고리적 접근이 자연스럽게 요청된다 하겠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러분 보시라. 천지 사이에 무엇 다른 일이 있는가. 오직 음陰과 양陽, 두 글자가 있을 뿐이다.
어떤 물사物事도 여기서 벗어날 수 없다. 자신을 잘 살펴보라. 눈을 떴다 하면 음陰 아니면 양陽이다. 어느 것 하나
그렇지 않은 것이 없다. 인仁이 아니면 의義고, 강剛이 아니면 유柔다, 앞으로 나아갈 때는 양이고, 물러날 때는 음의
뜻이다. 움직였다 하면 양이고 고요할 때는 음이다. 달리 보아서는 안 된다. 있는 것은 일동一動 일정一靜이니 바로
음양이다. 복희가 이에 근거해서 괘를 그려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단순히) 일음一陰 일양一陽만으로는 중리衆理
를 다 포괄할 수 없어 이들을 착종錯綜시켜 64괘 384효를 만들었고, 나중 성인들은 여기 수많은 해설과 부연을 붙였다.
다른 책들은 사건이 있은 다음 이런 저런 도리道理를 말하는데, 역易만은 사건들 이전에 설명을 미리 신탁해 두었다.
가령 서경書經은 요순, 우탕, 문무, 주공이 있어 이들이 행한 수많은 일을 적어나가는데, 지금 역易은 사태 이전에
성인이 미리 사태를 기술하고, 사람들의 점占과 예견을 기다렸다.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할 것 없이 그 무엇도 이것을 벗어나지 않는다. 성인은 이를 가르침으로 내렸다.
그가 음양의 이진법을 모든 사태에 전방위적으로 적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개략 적어보더라도.
1) 걸음 : 앞서려 하면 양이고, 뒤서는 것은 음이다.
2) 의지 : 정동이나 욕구를 추동하면 양이고, 억제하면 곧 음이다.
3) 성질 : 굳세고 단단하면 양이고, 부드럽고 유약하면 음이다.
4) 덕성 : 동정과 공감의 특성은 인仁이고, 추상같은 원칙과 자기절제는 의義이다.
여기 인仁이 양에, 의義는 음에 해당한다.
다시 말하지만 주자는 이들 서로 다른 범주들을 구분하는 새로운 개념과 방법, 디스코스를 분리하여 개발하지 않았다.
음양으로 대표되는 이진법은 거의 만능이었다.
대체적으로 활동적이고, 굳센 것은 양陽, 수동적이고 부드러운 것은 음陰의 반열에 서 있다.
포커트는 음양의 이진법이 포괄하고 있는 수많은 범주들을 도표화해 본 바 있다.
김영식 교수 또한 주희의 자연철학의 3장에서 주자어류와 문집에서 조사한 음양의 대대항의 리스트를
거의 3쪽에 걸쳐 정리하고 있다.
두 책의 도표는 상당히 잘 정리되어 있다. 아마도 이 리스트는 거의 무한정 늘어날 수 있다. 구분과 대비가 있는 곳에,
거기 어디든 음양陰陽이 있다고 해도 좋겠다. 주자가 지금 살았더라면 아마도 아원자의 내부 구조에서 음양을 읽었을
것이고, 현대의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개인과 공동체, 자유와 책임 사이에 음양의 이름표를 붙였을 것이다.
잠시 판단을 멈추고 주자가 이끄는 대로 여러 범주와 다양한 접근의 롤러코스터를 타 보면 어떨까. 정돈의 강박을 벗
어난다면, 주자의 언급들이 오히려 기氣의 사태를 입체적으로 보는데 도움을 줄 수도 있다.
어떤 진술이든 그것은 사태의 한 ‘측면’밖에 보여주지 못한다. 그것이 언어의 숙명이다.
언어는 단선적 이분법 위에 기초하고 있다. 평면 위의 선 하나만으로는 ‘사물’의 형태를 보여줄 수 없지 않은가.
입체를 보여주자면 지금 컴퓨터 시뮬레이션처럼 수많은 선들이 그어져야 한다. 선이 많을수록, 그것들이 일정한 패턴
하에 배치된다면 보다 선명한 물체의 상을 갖게 될 것이고, 더 복잡해지면 동영상을 구현할 수도 있다.
주자가 기氣의 내부를 보여주는 이理의 수많은 ‘가닥’들을 가능한 한 많이 적어두고자 한 것도 이와 같은 취지가 아니
었을까 생각해 본다.
5. 인의仁義의 덕성에 강유剛柔의 물질적 특성을 적용해도 좋을까
앞 장의 인용문을 다시 살펴보자. 거기 주자는 인의仁義의 덕성 또한 사물의 특징과 같은 레벨에서, 음양으로 도식화
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사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여기서 두 가지 사항을 구분해서 살펴야 한다.
즉 가) 인의仁義로 대표되는 ‘도덕적 덕목’에 음양의 특성을 적용할 수 있느냐 하는 것과,
나) 인의仁義 등의 도덕적 품성이 자연의 산물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는 오래된 물음이다.
가)는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구체적으로 음양을 배정하고 적용하는 방식은 일률적이지 않다.
주자는 도덕적 특성에도 강한 것과 부드러운 것이 있다고 생각했다.
인仁이 부드럽고 봄의 소생에 해당한다면 양에 속할 것이고, 의義는 서릿발 같은 추상이고, 가을의 덕성이기에 음에
속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에 따라 중죄인의 처형은 만물이 소생하는 봄을 피하고 겨울에 집행되었다.)
그러나 달리 볼 수도 있다. 인仁은 부드럽고 유약하다는 점에서 음에 속하고, 의義는 굳세고 위압적이라는 점에서
양이라고 볼 수도 있다.
주자는 여기서는 음 속에 양이 있고, 양 속에 음이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즉 인이 부드럽게 시작하지만 결국 단단해
지며, (*이를테면 봄이 새싹으로 시작하다가 여름의 단단한 나무로 귀결되듯이……) 의義는 처음 단단하게 시작하지
만 수축과 억압으로 귀착된다. (*흡사 무성한 나무들이 가을날 여위고 조락으로 이어지듯이……)
이 사태를 보고 사람들은 난감해 할지 모른다. 음양 개념이 “보기에 따라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로
무한정의 자유로운 응용, 관점의 이동이 가능하다면, 이 설명의 프레임워크로 우리가 얻는 것은 무엇인가.
이 프레임워크를 ‘과학’이라 할 수 있겠는가.
소극적으로는 순환의 통찰과 중용의 지혜를 얻을 수는 있겠다. “모든 것은 돌고 돈다. 자연의 영고성쇠처럼 인생에도
업스(ups) 앤드 다운스(downs)의 기복이 있다. 언덕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으니 행운에 자만하지 말고, 불행에 좌절
하지 말라.” 사실 이것이 역易이 그리고 특히나 의리義理 역전易傳이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지혜요, 삶의
태도였음을 기억한다. 그러나 다시, 이것을 과학이라고 할 수 있을까
6. 자연과 인간의 미분화적 접근을 읽는다
나) 두 번째 문제를 살펴보자.
주자는 자연적 사실과 도덕적 사실을 구분하지 않았다. 그들은 범주의 차이들이 아니므로, 서로 넘나든다.
요컨대 그들은 ‘공히’ 기氣가 드러내는 ‘자연적’ 차이라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도덕을 자연과 분리하는 사유의 바탕에는 인간과 자연의 단절의식이 자리잡고 있다.
서구의 근대 휴머니즘의 지배는 주자학의 미분화적 사고를 더욱 납득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주자는 그러나 인간과 자연의 도끼날선 분리를 낯설어한다. “자연도 기氣고 인간도 기氣 아닌가. 신체의 재질뿐만
아니라 정신의 활동도 기氣라면…… 그리고 인간이 자연의 기氣 속에서 태어나 하늘의 호흡과 땅의 음식으로 살고
있다면……” 인간을 자연 밖에 두어야 한다는 주장은 지나칠 수 있겠다.
제자 하나가 “자연은 인간이 아니고, 인간은 자연일 수 없다.”고 항변하자 주자는 이렇게 말했다.
자연은 인간 속에 있고, 인간은 자연 속에 있다.[天卽人, 人卽天.] 사람이 처음 태어날 때는 자연에서 생명을 받았고,
태어난 이후에도 자연은 사람 속에 있다. 말하고 움직이는 것, 보고 듣는 것도 다 자연 속의 일이다.
지금 내가 말하고 있는 동안에도 자연은 이 속에 있다.
주자는 “자연과 내 몸의 기氣는 둘이 아니다!”라고 역설한다. 주자는 다음과 같은 체험을 토로한다.
내가 언젠가 운곡을 향해 가는 길이었는데, 산을 오르다가 도중에 큰 비를 만났다. 온 몸이 젖고, 땅까지 적셔 내리는데,
이때 깨달았다. 장횡거가 서명에서 말한 ‘내 몸이 자연의 분지이며 내 본성이 하늘의 의지’라는 말의 뜻을…….
인간을 자연 속에서 발견한 이 인간-자연 동형론적 사고를 보자. 외계는 인간과 완전히 분리된 것으로 인지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서로 교호하며, 서로 속에서 살고 있다.
이는 자연스럽게 미분화적 사고로 이끈다.
그 특징 몇 가지를 이 장에서 적어보고자 한다.
주자는 ‘물物 사이의 감응’ 즉 자연 기氣와 인간 기氣의 교호와 접점을 말한다.
이 생각 속에서는 자연에 속한 것과 인간에 속한 것이 뚜렷이 구분되지 않는다. 인간이 자연의 일부이고, 또 자연은
인간에 ‘대해서’, 오직 그때에만 의미를 가진다면 순수하게 자연적인 것은 없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감응이라 불리는 교호의 사고를 깊이 들여다보면, 주자의 미분화적 사고에 한발 다가설 수 있고, 그와 더불어 자연과
인문을 이원화시키는 것이 오히려 낯설게 보일 수도 있다.
이런 생각은 지금 아무래도 원시적이고, 혹은 비합리적이란 비판을 받기 쉽다. 변호하자면 세계는 하나일지 모르나
세계관은 여럿이고, 그것들 사이의 우열은 유효성과 시대성에 매여 있다면 지나칠까.
주자의 기氣의 세계관을 지금 ‘새로운 물리학(New Physics)’이 주목하고 있는 것을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될 줄 안다.
다음은 그 시대착오적 사고에 대한 어설픈 변명 몇 가지이다.
1) 신화: 의인화의 사유
의인화는 인류의 오래된 사고 습관이다. 원시사회에서 자연은 객관적 사태로 인지되지 않고 인간적 정서를 표출하는
준인격으로 인지되었다. 가령 우레는 신의 고함소리이며, 비는 하늘이 내려주는 축복이었다.
종교적 심성도 자연의 외경 위에 서 있다. 여기서 초월적 존재의 인격성은 다만 한 걸음이다.
지붕을 뒤흔드는 바람 앞에서 사람들은 ‘두려움’을 느끼며, 분노한 파도는 우르릉거리며 “나를 덮친다.” 봄이 되면 ……
부드러운 바람이 ‘따뜻한 손으로’ 나를 감싸준다. 아이들의 글짓기에서, 수없이 마주치는 이 자연의 인격화, 의인화는
신화적 미학적 태도라고 부를 수 있겠지만, 자연을 인식하고 교감하는 일반적 방식 가운데 하나이다.
동아시아인들은 기氣에서 표정을 읽는다. 그리고 그 기氣의 의지를 때로는 인간적 관점에서 읽고, 기록하는데 거리낌
이 없다. 그래서 그의 기氣는 흩어지고 모이기도 하지만, 분노하고, 화해하기도 하는 것이다.
여기 인간-자연의 구분은 없고,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연의 관점은 인간의 시선에 종속된다.
주자는 이 오래된 전통 위에 자신의 ‘합리적’ 사고를 정초했다.
2) 철학: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의 구분에 대하여
의인화의 사유는 ‘사물 그 자체’를 낯설어 할 것이다. 객관적 사실은 과연 존재할까. 실험실에서의 관찰도 인간이 설정
한 목표와 문제에 종속되어 있다.
최근 아원자의 세계는 관찰자의 시선 없이는 알 수도 기술할 수도 없다는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칸트 또한 사물은 우리 머릿속에 ‘복사’된다기보다, 우리의 주관적 범주에 의해 ‘캡처’된다고 말해 인식론의 코페르니
쿠스적 전회를 이끌었다. ‘관심’ 없이 사물은 인식되지 않는다는 것은 현대인식론의 상식에 속한다.
만일 우리가 객관적 ‘사실’이라고 믿는 것들이 사실은 ‘주관적 관심과 욕구의 투영’이라면, 그렇다면 엄밀한 의미에서
사실판단이란 없다는 말이 아닌가. 즉, 사실판단은 사실은 가치판단의 ‘일종’ 혹은 특수한 형태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불교는 모든 판단을 가치판단으로 본다. 버트란드 러셀은 ‘지시’를 넘어서 ‘판단’으로 들어서는 순간 원자 사실로부터
이탈한다고 말한 바 있다.
사정이 그렇다면 잠깐 멈추어서서 생각해보자. “이 꽃은 붉다”를 전통적으로는 사실 판단으로 분류하지만 그러나 이
또한 가치 판단의 일종이라고 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 꽃은 붉다”라는 명제 또한 주관적 관심이 투영된 것이고,
또 거기 일정한 선호가 늘 개입되기 때문이다. 요컨대 사실과 가치는 엄밀히 구분되지 않고 서로 넘나든다.
3) 과학: 기氣의 교호, 자연과 인간의 상호 작용
자연과 인간은 기氣로 관통하고 있다. 둘 사이의 교호는 직접적이고 근본적이다. 당장 인간의 생명이 자연의 음식과
호흡에 달려 있다. 그것만큼 분명한 것이 없다. 뿐인가, 자연의 기氣는 인간의 삶의 공간을 구성하고, 정신의 풍경을
좌우하는 입법자이기도 하다. 날씨가 흐리면 기분氣分(*이 말이 저간의 사정을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다운(down)되고, 날씨가 화창하면 기분이 업(up)된다. 인간은 쾌적하고 우호적인 자연적 사회적 ‘환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자연적‧개인적‧사회적 요소들은 긴밀하게 상호영향을 주고 있으며 하나의 감응 체계를 구성하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면 자연과 분리된 인간이라는 테제는 현실적이기보다 오히려 관념적이 아닌가.
7. 윤리는 자연적으로 출현하는가
앞 장에서 인간과 자연의 상관적 인식이 불합리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변호했다. 이 장에서 살필 것은 존재와 당위
의 연속적 사고이다. 이 테제는 맨 첫 장에서 인용한 니이덤의 말처럼 “윤리가 자연에서 출현하는가”로 번역할 수 있다.
주자가 착종시킨 기氣의 수많은 측면과 범주들 가운데 도덕과 덕성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
주자는 이들 사이를 다른 언어와 디스코스로 접근해야 한다는 의식이 전혀 없다. 그 곤혹을 앞에서 살핀 바 있다.
이것을 납득하자면 단 하나, 윤리와 덕성이 자연의 ‘특성’ 혹은 ‘표징’ 가운데 하나임을 증빙해야 한다.
주자에게서 이理는 기氣의 다양한 ‘표징’을 가리킨다고 했다. 그 가운데 이른바 소당연所當然과 소이연所以然도 들어
있다. 이 말은 유의를 요한다.
많은 사람들이 소당연을 ‘도덕적 윤리’로, 소이연을 ‘사물의 원리’로 읽고 나서, 주자가 두 범주를 의도적으로, 별다른
설명 없이 혼재시키는 억지를 부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엄밀히 읽으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여기 당연當然은 당위(Sollen)를 뜻하기 ‘이전에’ 사물의 내적 필연성을 가리킨다. 소이연지고所以然之故와 소당연지
칙所當然之則은 동일한 이理의 두 날개이다.
그런데 주희는 소당연지칙을 통해 소이연지고에 이르러야 한다고 자주 강조했음을 기억하자.
구체적인 예를 묻는 제자에게 주자는, “가령 배가 물 위로 가는 것이 소당연지칙(*즉 사물의 필연성)이고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원리가 소이연지고(*즉 필연성의 내적 이유)”라고 대답했다.
소당연所當然은 그러므로 “그래야 한다”가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다”는 필연성의 표명이고 소이연所以然은 “어째서
특정한 사물이나 현상이 다른 방식으로가 아니라 어김없이(*當然히)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존재하고 기능하는가”하
는 ‘까닭’, 즉 ‘원리’의 차원을 가리킨다.
이 규칙과 그 기원의 메카니즘을 탐구하는 것이 바로 격물인 것이다.
예를 하나만 들어보면 주자는 주자어류朱子語類 94:94에서 “어린 아이가 우물에 빠질 때 가슴이 철렁하는 것”이
‘당연히 그러하여 어쩔 수 없는[所當然而不容已]’ 현상이라고 말하면서, 도대체 이 윤리적 이타적 발로가 ‘대체 어떤
원리에서, 뒤바꿀 수 없는 사실로서 존재하는지[所以然而不可易]’를 탐구해야[格物] 한다고 역설했다.
우리말의 ‘당연當然’이 이 뜻을 그대로 갖고 있다. 일상적 대화에서 “당연하지”라는 말은 누가 시키거나 강제하지 않
아도, 필연적이고, 자연스러운, 그리하여 예측되는 사태나 행동을 뜻하고 있다.
그것은 당위當爲와는 다른 개념임을 다시금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리[理]’라는 말도 마찬가지이다. “그럴 리가 있나.”라는 말은 그 사태가 사물의 질서 속에서
자연적으로 일어날 수 없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요컨대 ‘-할 리’나 “당연하다”라는 말은 의도나 억지, 주자의 용어
를 쓰자면 안배按排 포치布置를 거치지 않은 자연의 질서를 가리킨다.
요컨대 이理가 당연이라고 했을 때, 그리고 그 안에 “부모에게 효도하고, 어른을 공경한다”는 것을 예로 들었을 때,
주자의 마음속에는 이 ‘행동’이 자연의 경향성으로 언급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사람들은 이 발상이 생소하다. 그래서 당연이라는 말을 듣고는, 무의식적 선이해의 간섭을 받아, ‘인위적 강제 혹은
선택’으로 읽어왔던 것이다. “너는 내키지 않겠지만 부모님께 효도해야 하고, 어른들한테 자리와 이익을 양보하도록
해야 한다” 정도로…… 이리하여 유학은 ‘생리적 욕구에 반하는 잔소리와 강제의 철학’으로 굳어졌다.
여기 좀 오해가 있다.
주자는 도덕적 선택을 당연한, 즉 인간내부의 자연적 발로로 읽었다. 즉 주자는 성선설에 기초하고 있다.
선구자는 맹자이다. 맹자 당시에도 저항은 컸다.
서구의 홉즈나 다위니즘은 성악설性惡說에 터 잡고 있고, 우리들의 상식도 여기 준하고 있어, 주자의 발상에 곤혹스
러워하는 것이다.
맹자는 사단四端의 예를 들어 인간의 내부에 존재하는 공동체적 책임과 공감적 배려를 인간성의 핵심으로 정의했다.
그는 “그것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다”라고까지 극언했다.
그는 심지어 의義라는 자기절제 또한 자연에 속한 것으로, 자발적 충동의 발현이라고 역설한다.
과연 인간은 순전히 이기적 충동에 맹목적인가. 도덕성은 순전히 전체를 위한 고육苦肉의 강제일 뿐인가.
인간은 그토록 황폐하고 잔인한가.
극단이 충돌할 때 진실은 그 중간쯤에 있다. 아무래도 세상은 이 두 경향이 뒤섞여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기이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주자 또한 세상이 선과 악으로 얽혀 있으며 인간성에는 선한 부분과 악한 부분이 혼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그렇고, 그리고 역사가 또한 그렇다.
주자는 선악善惡 또한 기氣의 이원적 대립항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모든 사물에 강유, 부드러움과 강함이 있듯이,
자연에는 선악, 좋고 나쁜 것이 공존한다. 뿐인가 인의仁義 또한 자연의 ‘특성’으로 자리 잡고 있다.
모든 특성이 기氣의 자연 안에 숨어 있다. 주자는 인의를 전 자연에 투여한 자주의 사유를 ‘진화론적’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주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자연 안에 선善의 부분이 본질적이고, 악惡은 우연적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인간성 안에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을 구분했다. 여기가 설득하기 가장 까다로운 곳이다.
주자는 인간이 일상에서 자기 속의 본질적 자연을 각성하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 진흙으로 뒤덮인 구슬, 때가 더덕더
덕한 거울은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비추어 줄 수 없다는 것이다.
주자학의 훈련은 결국 ‘자신의 얼굴’과 대면하기 위한 훈련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서양의 사례가 참조가 된다. 록크가 인간은 그저 백지로 태어난다고 하자 라이프니츠가 즉각 반발했다.
그는 1700년 록크의 인간오성론을 읽고 나서 이렇게 언급했다.
영혼이 백지를 닮은 것이라 한다면 진리는 대리석 속에 들어있는 헤라클레스의 모습을 띤 무늬와 같이 우리 안에 들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어떤 모습이 아닌 헤라클레스의 모습을 띤 대리석 덩어리의 결이 있다고 한다면, 이 대리석
덩어리는 헤라클레스의 모습으로 결정된 것이다. 그리고 헤라클레스의 모습이 대리석 안에 있는 것처럼, 우리의 내적
인 지각도 타고난 것이다……. 대리석으로 헤라클레스를 조각하려면 헤라클레스의 모습으로 결을 깎아서 그 모습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그 결을 방해하는 것은 잘라내면 된다.
그는 인간의 영혼이 자신의 본질적 존재를 위해 필요한 모든 속성들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했다.
라이프니츠의 중국철학에 대한 해설을 쓴 먼젤로는 이 발상이, “인간의 도덕적 계발은 자신의 본성을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한 주자학의 입장과 상당히 유사하다”고 적었다.
주자는 샘물은 그저 투명해 보이지만 손을 집어넣어야 그 시린 것을 안다고 한 바 있다.
그리고 사물 속에는 “만상萬象이 삼연森然히 갖추어져 있다”고 역설했다. 자연 내부에 -아직 충분히 자각되지 않아
잘 모르겠지만- 인간의 길이 미리 예비되어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 길은 포괄적 도덕성의 길이다.
이 주장이 맞다면, 자연과 도덕은 자연의 ‘특성’으로서 한 자리에서 논할 수 있다.
사람들은 이 말을 잘 믿지 않는다. 퇴계는 그 길을 걷다 보니 “옛 사람들이 자신을 속이지 않았음을 알겠더라”고 자주
토로했다. 걸어보기 전까지는, 일상의 습관과 때에 절어 있어서는 이 소식을 모른다는 것이 아닌가.
훈련 없이, 즉 길을 나서보지 않고서는 이 테제는 가부를 논증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권위에 의한 논증을 해 보자면, 이 테제에 동의하는 동서의 현자들이 의외로 많다.
동쪽만 해도 유교와 노장, 그리고 불교가 한 목소리로 이 도덕성의 자연을 외치고 있다.
현대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사람들이 그동안 인간을 동물성 위에서 논의하는 우를 범해왔다고 지적했다.
그는 인간적 본성이 이기적 충동 너머에서 교감과 헌신 등의 지향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 실현은 개인의 성격적
지향에 달렸다. 또 한 사회가 집단적으로 이 본성을 더 많이 억압하거나 더 발현하는 성격을 가질 수가 있다.”
그는 말한다. “인간은 무한히 가소적이지 않다. 즉, 환경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 그저 ‘적응’하는 동물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본성을 갖고 있으며, 이 인간적 본성을 실현하기 전까지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
모든 인간은 그런 점에서 이상주의자이다.” 이것이 프롬이 자신의 오랜 사회심리학적 탐구가 이른 결론으로, 미래
인류에게 던진 메시지였다. 그는 이 통찰을 일찍이 노장과 불교가 발견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가 아마도 주자학의
사유를 알았다면 그 누구보다 자신의 발견을 이 오래된 지혜가 증거해주고 있음을 알고 환호했을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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莊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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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사전周易四箋의 텍스트 형성과정에 관한 고찰 - 정고본定稿本 및 신조본
新朝本의 저본底本을 찾기 위한 시론
방인, 경북대학교 철학과 교수
다산학 14호(2009.06) : 5~43
1. 들어가는 말
본고의 목적은 다산 정약용의 저술인 주역사전 텍스트의 형성과정을 문헌학적으로 고찰하고, 아울러 현존하는
여러 이본들에 대한 분석을 통해 그 차이를 드러내고, 그 성립계통과 상호관계를 밝히려는 데 있다.
다산이 주역사전 권두卷頭의 「제무진본題戊辰本」에서 밝히고 있듯이, 그는 강진유배시절 계해년(1803년) 동지
冬至 무렵부터 저술에 착수하여, 그 이듬해에 갑자년(1804년)에 갑자본甲子本(8권)을 처음으로 발간하게 되고,
그 이후로 을축본乙丑本 8권(1805), 병인본丙寅本 16권(1806), 정묘본丁卯本 24권(1807), 무진본戊辰本 24권(1808)
의 개정본改正本을 순차적으로 내어놓게 되니, 저술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이처럼 각고와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
경우는 다산의 저술 중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이렇게 연속적인 개정작업이 필요했던 이유는 주역사전의 핵심방법론에 해당되는 역리사법易理四法이 실험적
성격이 강했던 데서 찾을 수 있다.
다산은 역리사법을 괘효사해석에 적용했을 경우에 발생하는 해석상의 착오를 수정해가면서, 그 방법론적 정밀성을
지속적으로 높여갈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본고의 일차적 목표는 갑자본에서 무진본에 이르기까지 방법론적 발전과정에 대한 추적을 통해, 주역사전 텍스
트의 변천과정을 밝히는 데 있다.
그 다음으로 필자는 현존하는 무진본 텍스트의 이본異本에 대한 대조연구를 통해, 이본 간의 상호관계를 밝히고자
한다.
현존하는 주역사전의 텍스트로는 필사본과 활자본의 두 종류가 있다.
필사본으로 중요한 것은 규장각소장본, 국립중앙도서관소장본, 버클리대 아사미문고본 등의 세 종류가 있으며, 활자
본으로는 1936년에 간행된 신조선사본新朝鮮社本이 있다.
본고에서는 이들 텍스트를 각각 규장본, 국중본, 버클리본, 신조본이라는 약호略號로 부르기로 한다.
필자는 이 4종의 이본을 상호대조해서 분석한 결과, 신조본과 국중본이 동일한 계열에 속하며, 규장본과 버클리본이
또 다른 동일계열에 속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전의 주역사전에 대한 연구는 주로 신조본 아니면 규장본에 의존해 왔기 때문에, 이번 연구를 통해서 국중본과
버클리본이라는 새로운 자료를 고찰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은 매우 귀중한 경험이었다.
이러한 연구결과가 갖는 중요한 의의는 지금까지 신조본의 저본을 규장본으로 간주하였던 잘못된 인식을 수정할 수
있었다는데 있다.
즉, 신조본의 저본은 규장본이 아니라, 국중본이라는 점이 새롭게 밝혀졌으며, 버클리본은 사실상 규장본과 거의
동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신조본의 저본을 찾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과제는 주역사전의 정고본을 찾는 것이다. 필사본에 두 가지 계통이
있다면, 이 두 계통 중에서 저자인 다산이 최종적으로 인가한 필사본은 어떤 것이냐가 문제가 된다.
필자의 견해로는 신조본의 저본인 국중본(혹은 국중본의 원본)이 동시에 정고본일 가능성이 높은데, 그것은 신조본의
편찬자라면 당연히 정고본을 채택하여 저본으로 삼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2. 주역사전 텍스트의 형성과정
1) 갑자본에서 무진본에 이르기까지의 과정
주역사전의 성립과정은 무엇보다도 그 서두에 상세히 밝혀져 있다.
권두卷頭의 「제무진본」에 따르면, 다산이 주역사전의 저술에 착수하게 된 시점은 강진유배시절의 초기인 계해년
(1803년) 동지 무렵으로서, 이듬해 갑자년(1804년)에는 갑자본(8권)이 처음으로 세상에 빛을 보게 된다.
이후로 을축본 8권(1805), 병인본 16권(1806), 정묘본 24권(1807), 무진본 24권(1808)이 차례로 성립되게 되니, 모두
5차례에 걸쳐 연차적으로 성립하게 된 것이다.
갑자본과 을축본을 권수로 본다면, 두 경우 모두 8권본으로 되어 있으므로, 형태적으로는 거의 동일하게 보이지만,
내용적으로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갑자본은 추이推移, 물상物象, 호체互體, 효변爻變이라는 4가지 방법론을 실험적으로 적용한 산물로서, 그
대략적 골격은 완성되었으나, 그 실제에 있어서는 정밀하지 못하고 오류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폐기하고 새롭게 고쳐 쓴 것이 을축본(8권)이다. 병인본에 이르러서는 위의 네 방법 이외에 이전에 취하지
않았던 방법론적 원칙들이 새롭게 시도되는데, 그것은 양호작괘법兩互作卦法, 교역交易 등의 삼역지의三易之義,
유동留動 등을 가리킨다.
양호작괘법이란 본괘本卦를 통해서 효사에 일치하는 해석을 구할 수 없을 때 상호괘上互卦와 하호괘下互卦를 합쳐서
새롭게 괘를 제작함으로써 합당한 해석을 도출해내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교역이란 상괘와 하괘를 교차시킴으로써 괘의 변화를 해석하는 방법론을 가리키는데, 변역變易, 반역反易과
더불어 삼역지의를 구성한다.
다산은 병인본에서 새롭게 적용한 예로서 교역을 거론하였지만, 그것은 교역만을 적용했다는 뜻이 아니라, 교역을
삼역지의의 대표적 예로서 거론한 것 같다.
그런데 다산은 병인본을 완성할 즈음에 이르러, 종전의 해석에서 범했던 몇 가지 과오를 발견하게 되고, 해석학적
규칙을 새롭게 수정하게 된다.
그 중에서 중요한 것은 두 가지인데,
첫째는 중부괘中孚卦・소과괘小過卦와 관련된 것이고,
두 번째는 「독역요지讀易要旨」의 세칙細則 중의 하나인 유동과 관련된 것이다.
첫째 문제와 관련하여 다산은 귀매괘歸妹卦 초구初九의 “파능리跛能履”가 소과괘에서 취한 상象이라는 것을 새롭게
깨닫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 발언이 의미하는 바는 과연 무엇일까?
소과괘는 중부괘와 더불어 14벽괘설을 구성하는 요소이지만, 전통적인 괘변설卦變說에서는 벽괘辟卦로 인정되지
않았다. 다산이 중부괘와 소과괘를 14벽괘로 편입시킨 시기와 관련하여 분명한 언급은 발견되지 않는다.
아마도 다산도 다른 괘변설의 주장자들과 마찬가지로 초기에는 소과괘와 중부괘를 제외한 12벽괘 중심의 추이론推移
論을 전개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다가 위의 “파능리”의 경우처럼 중부괘․소과괘를 벽괘로 편입시키지 않을 경우에 해석이 잘 맞아떨어지지 않는
문제를 발견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다산의 추이론은 갑자본․을축본의 단계에서는 12벽괘를 기반으로 한 이론이었다가 병인본 이후로는 소과
괘와 중부괘를 포함시킨 14벽괘론으로 발전해갔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설령 중부괘와 소과괘를 이미 14벽괘속에 편입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위의 “파능리”의 예가 보여주는 것처럼 병인본
이전에는 그 적용이 원활치 못했음이 틀림없다.
두 번째로 유동의 규칙과 관련하여, 다산은 사괘 구이九二의 “사재중師在中”에서 괘주卦主는 변상變象을 취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유동이란 역경독해를 위해 수립한 규칙인 「독역요지」 중 제6칙에 해당되는 것으로서, 괘주인 경우에는 효변
爻變을 적용해서 지괘之卦의 변상을 취하지 않고, 본상本象으로 해석한다는 규칙을 가리킨다.
다산이 이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책이 다 완성되어 최후로 책의 장정裝幀을 다듬고 있을 무렵이었지만, 그는 이
에 개의치 않고, 다시 신본新本을 만들었다.
어쨌든 이처럼 새로운 방법론을 적용하다보니, 병인본은 양이 크게 확대되어 16권본이 되었다.
그런데 다산은 유동의 규칙을 뒤늦게 확립하였기 때문에, 병인본에는 이를 부분적으로밖에 반영할 수 없었고, 정묘본
에서 그 미진했던 부분을 계속 보충하게 되었다. 정묘본에서는 유동 이외에도 파성播性의 규칙을 새롭게 적용하였는데,
다산은 이를 「독역요지」의 제5칙으로 수립하고 있다.
파성이란 효변을 취해 본괘가 지괘로 변하더라도 해석의 중심은 여전히 본괘에 있기 때문에, 전적으로 지괘 위주의
해석을 하게 되면, 크게 착오를 범하게 된다는 것을 가리킨다.
정묘본(24권)은 병인본(16권)에 비해서 양적으로 확대되기는 하였지만, 파성과 유동의 원리를 적용해서 수정보완한
것을 빼놓는다면, 거의 대동소이 하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다산 스스로 정묘본이 병인본과 거의 같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방법론적 측면에서 본다면, 정묘본에 이르면 다산의 역학해석방법론의 체계는 실제적으로 거의 완비되었다고
보아야 하고, 무진본(24권)에 이르러 새롭게 적용된 부분은 없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무진본은 정묘본의 해석에 있어서 정밀하지 못한 부분들을 걸러내고, 수정보완한 것으로서, 무진년 가을에 귤원橘園
에서 최종적으로 완성하게 된다.
결국 주역사전의 성립과정을 본다면, ①갑자본(사의四義의 실험적 적용)→②을축본(방법론적 수정보완)→③병인본
(양호작괘법, 교역, 유동 등의 신해석법의 적용)→④정묘본(파성, 유동의 방법론적 보완)→⑤무진본(최종적 보완)의
단계를 거쳐 이루어 졌으며, 전全과정을 통해 가장 획기적이고도 대폭적인 개편이 이루어진 것은 병인본을 완성할
무렵이었다고 하겠다.
병인본과 관련하여 한 가지 떠오르는 의문은 다산이 ‘병인丙寅, 단오일端午日, 서우보은산방書于寶恩山房’이라고 그
저술시기와 장소를 밝히고 있는 「제독역요지후題讀易要旨後」에서 ‘蓋自甲子陽復之後, (卽 癸險至), 至今, 凡五易稿矣’
라고 한 발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갑자본에서 을축본으로 바뀌면서, 일차 개고改稿가 이루어졌고, 을축본에서 병인본으로 바뀔 때, 이차 개고가 이루어
진 것이니, 모두 두 번의 개고 밖에는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어떻게 해서 ‘범오역고의’라고 한 것일까?
앞서 언급한 것처럼 다산은 병인본을 일단 완성한 뒤에, 유동의 원칙의 적용에 문제가 있음을 깨닫고, 책의 장정을
다듬고 있을 무렵이었지만, 과감하게 이를 폐기하고 다시 고쳐썼다고 말하고 있으므로 이것까지 포함하면 세 번의
개고가 된다. 이밖에도 또 다른 두 번의 개고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갑자본에서 무진본에 이르기까지의 5차례 저술과정 중에 집필환경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갑자본은 다신이 사의재四宜齋라고 부르던 누옥陋屋에서 이루어졌으나, 을축본부터는 혜장惠藏선사의 도움으로
보은산방으로 옮겨 저술작업을 안정된 환경에서 진행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는 맏아들인 학가學稼 정학연丁學淵(1783~1859)이 같이 기거하면서 저술을 도왔다.
학가는 병인본의 수정작업까지도 참여했으나, 일을 마치지 못하고 돌아가고, 그 이후로는 강진읍의 제자인 이학래
李鶴來(이청李田靑, 자는 금초琴招, 1792~1861)가 도와서 정묘본을 완성하였다.
최종적으로 무진본을 완성할 때에는 귤원으로 옮겨서 작업하였는데,
다산의 둘째 아들인 학포學圃 정학유丁學游(1786~1855)가 도와서 마침내 탈고하기에 이르렀다.
실제로 주역사전에는 ‘학가왈學稼曰’과 ‘학포왈學圃曰’로 시작되는 역주易注를 다수 발견할 수 있는데, 이 점에서
다산의 두 아들은 단순히 조력자의 차원을 넘어서 일정부분 공저자의 역할까지도 맡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 공저자의 역할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역할이란 다산이 제시한 방법론을 지침으로 삼아 실
험적 해석을 시도해서 제시해보고, 다산이 허락하는 한에서 수록하는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아울러 다산은 이학래로 하여금 정묘본을 준공竣工케 하였다고 말하고 있는데, 정학연과 정학유의 경우와는 달리
주역사전에서 이학래의 역주가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이학래의 역할은 교정, 윤문, 편집 등의 부수
적인 일에 국한되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이상 살펴본 바의 주역사전의 성서成書과정을 도표화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저술일지 | 텍스트의 형성과정 |
순조 2년 임술년 (1802) | 신유년(1801) 겨울에 강진에 유배되어, 동문밖 주막집에 거처를 정함. 임술년(1802년) 봄부터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정독하기 시작하였는데, 춘추관점 중에서 (1)진경중지서陳敬仲之筮, (5)백희가진지서伯姬嫁秦之筮 등에 대해서 궁구窮究함. |
순조 3년 계해년 (1803) | 계해년(1803) 동지부터 건괘를 읽기 시작해서 64일만에 상편과 하편을 다 읽고, 또 20여일간 「대전大傳」 2편과 「설괘說卦」 및 「서괘序卦」 등을 독파함. 11월 10일에 주막집 거처를 ‘사의재’라고 명명하고, 당호를 내검. |
순조 4년 갑자년 (1804) | 주역사전의 저술에 착수 |
역학해석방법론으로서 ①추이推移②물상物象③호체互體④효변爻變의 4대방법론을 확립하고, 이를 실험적으로 적용함 | |
갑자본(8권) 완성 | |
순조 5년 을축년 (1805) | 갑자본을 폐기하고, 전면적인 수정보완작업에 착수 |
을축본(8권)을 완성함(제1차 개고) | |
을축년(1805) 봄에 아암兒菴 혜장惠藏을 만나 효변법을 설명함 | |
을축년 겨울에 사의재에서 보은산방으로 거처를 옮김. 큰 아들 정학연이 도착하여, 보은산방에서 작업에 동참함 | |
순조 6년 병인년 (1806) | 봄에 양호괘와 교역의 방법론을 새롭게 적용하여 병인본(16권)을 완성함. (제2차 개고) |
봄에 「역론易論」(2)를 저술함. | |
병인본을 일단 완성하였으나, 다시 오류가 있음을 깨닫게 됨. 귀매괘 초구初九의 “파능리”가 소과괘의 상象에서 취해온 것을 알게 됨. 또 며칠 뒤 사괘 구이九二의 “사재중師在中”에서 괘주는 변상을 취할 필요가 없다는 유동의 원칙을 깨닫게 됨. 효사를 잘못 해석한 것이 열에 거의 일곱 여덟이며, 괘주를 변상에서 취해온 것도 견강부회가 많았음을 깨닫고, 상하편을 다시 고침. 이때는 편집을 다 마쳐서 책의 장정까지 완성될 무렵이었지만, 아까워하지 않고, 다시 신본을 만듦. | |
단오날에 「제독역요지후」를 씀. | |
가을에 이학래(李田靑)의 집으로 거처를 옮김. | |
순조 7년 정묘년 (1807) | 파성과 유동의 해석에 궐오闕誤가 많음을 확인하고, 정학연으로 하여금 개고하게 함. |
정학연이 작업을 마치지 못하고 귀환함에 이학래로 하여금 정묘본(24권)을 완성하게 함.(제3차 개고) 그러나, 정묘본은 병인본과 큰 차이는 없음. | |
순조 8년 무진년 (1808) | 무진년 봄에 윤단尹慱의 산정山亭이 있는 다산茶山으로 거처를 옮김. 둘째 아들인 학포 정학유가 방문함. |
정묘본이 사리가 정밀하지 못하고, 상의象義에 많은 착오가 있어 다시 개정에 착수함. | |
둘째 아들인 정학유로 하여금 주역사전을 준공케 함. 가을에 귤원에서 무진본 24권 완성 (제4차 개고) |
이상에서 주역사전의 성립과정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사실은 다산이 주역사전이 완간된
무진년 가을 이후에도 주석을 고치는 작업을 계속하였다는 것이다.
다산은 순조11년(신미년辛未年, 1811년)에 그의 중형仲兄 정약전丁若銓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연전에 살펴보신 초본은 옥으로 치면 가공하지 않은 박옥이고, 쇠로 말하면 광석이며, 쌀에 비유하면 겨입니다.
뼈로 치면 껍질에 불과하고, 질그릇에 견주면 초벌구이도 하지 않은 것이며, 장인으로는 솜씨 없는 자라 하겠습니다.
시경詩經에서 자르고 갈고 쪼고 연마하듯 한다고 한 것이 이를 두고 한 말입니다.
며칠 전에도 효爻하나를 고쳤습니다. 만약 제가 10년만 더 살아 주역배우기를 마친다면 더 많이 고칠 수 있을 것
입니다.(「답중씨答仲氏」: 제1집 시문집詩文集 서書28나)
여기서 하나의 의문이 떠오른다. 효爻 하나를 고쳤다는 말은 분명 효사爻辭의 주注를 고쳤다는 말일 것이다.
그렇다면 고치기 이전의 주석은 당연히 무진본의 주석을 가리키는 것일 것이다.
그렇다면 주역사전은 무진본 이후에도 계속 수정되고 있었다는 말이 될 것이다.
만일 무진본 완성 이후에 효사의 주를 고쳤다면, 현재 유통되고 있는 무진본에는 그 수정사항이 반영되어 있는 것일까?
만약 다산이 무진년 이후에도 수정작업을 계속하였다면, 그것을 반영시키지 않을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주역사전은 1808년 무진년에 완결되어 더 이상 가필加筆을 필요로 하지 않는 완전무결한 텍스트
라기보다는 미래를 향해 열려진 개방형 텍스트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2) 사라진 필사본의 편린片鱗
이렇게 주역사전은 5단계의 성서과정을 거쳐서, 갑자본, 을축본, 병인본, 정묘본, 무진본이 차례로 성립하게 되
었다. 그러나 5종의 필사본 중에서 현존하고 있는 것은 오직 무진본뿐이다.
갑자본에 대해서는 다산이 “갑자본甲子本, 사의수구四義雖具, 조략불완粗略不完, 수훼지遂毁之”라고 했으므로, 곧
바로 폐기했음을 알 수 있다.
을축본에 대해서는 나주해중羅州海中에 있다고 언급하고 있는데, 나주해중이란 아마도 정약전이 유배되어 머물고
있던 흑산도黑山島를 가리키는 듯하다.
그것은 다산이 역학서언易學緖言의 「玆山易簡」에서 흑산도가 ‘나주해중에 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병인본에 대해서는 광주에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아마도 경기도에 있는 자신의 고향집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갑자본은 다산 스스로 “遂毁之”라고 했으므로, 남아있을 가능성이 없지만, 나머지 을축본, 병인본, 정묘본 중 어느 것
도 아직 발견되고 있지 않다. 만일 이들 필사본이 발견된다면, 이를 통해서 다산역학의 발전과정을 살펴볼 수 있기
때문에, 학계의 소중한 수확이 될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역학서언속에 포함되어 있는 「다산문답茶山問答」(1권)을 통해서, 주역사전 이전의 초고에
대해서도 그 편린을 엿볼 수 있다는 점이다.
「다산문답」에서는 주역사전의 해석을 둘러싸고 다산과 그의 제자들 사이에 벌어진 문답을 기록하고 있는데,
질문자로는 ① 이강회李綱會(1789~?), ② 윤응겸尹應謙, ③ 이학래 ④ 정학연 ⑤ 정학유 ⑥ 신대윤申大允 등 6인이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제29번째 문항에서 ‘사전초본四箋草本’을 거론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는 무진본 이전의 자취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질문자는 소축小畜 상구上九의 “월기망月幾望”에 대한 사전초본의 해석을 거론하면서, 왜
지금의 해석이 그것과 달라졌는지 다산에게 묻고 있다.
草本四箋釋小畜上九“月幾望” | 戊辰本四箋釋小畜上九“月幾望” |
日西月東, 方爲正望. (月正盈) 今离居兌上, (二四兌) 日固在西, (离爲日) 乃坎由巽成, (上本巽) 月猶偏於東南也. (坎爲月) 日入之時, 而月在巽方, (月出已移時) 非幾望乎! (幾者, 幾及也.) 歸妹六五, 中孚六四之解, 亦然. | ○坎則爲月, (說卦文) 乾則爲圓, (說卦文) 故易例, 乾在坎位, (四五六) 則爲月正望, (望月圓) 兌在坎位, (四五六) 爲月幾望, (見歸妹) 蓋以八卦之序, 自兌而乾, (兌如夬) 自乾而巽, (巽如姤) 故兌爲幾望也. (又詳中孚卦.) 小畜自夬來, (上之四) 夬之時, 兌在坎位, (夬上兌) 月幾望也. (幾乎爲乾圓.) |
다산은 “前說有病, 熟玩之, 當自悟”라는 말로써, 사전초본의 해석에 문제가 있었음을 인정하면서, 초본의 해석을 수정
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를 밝히고 있다. 아마도 그 초본이란 무진본 이전의 정묘본을 가리키는 것일 가능성이 높으나,
확실히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이는 무진본 이전의 자취를 보여주는 자료로서, 다산역학방법론의 발전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라고 하겠다.
3. 이본의 대조연구
현존하는 주역사전의 네 가지 이본중에서 연구자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신조본과 규장본이다. 국중본과 버클리
본에 관해서는 최근에 이르러서야 그 존재와 가치가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러면 4종의 이본은 서로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일까? 이 4종의 이본 간의 관계를 추론하기 위해서는 먼저 각 이본의 특성에 대해서 파악한 다음에 4종본 상호간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식별해 내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면, 먼저 필사본 3종과 활자본 1종에 대해 각각 그 특성을 파악해
보기로 하자.
1) 네 종류의 이본에 대한 고찰
가) 버클리본에 대한 고찰
버클리본(Berkeley Manuscript)이란 캘리포니아 주립대학(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의 동아시아도서관
(East Asian Library)에 있는 아사미 문고(Asami Collection)에 소장된 주역사전을 가리킨다.
아사미문고란 일제강점기시대에 조선총독부 판사로 재직하였던 아사미 린타로(淺見倫太郞: 1869~1943)가 수집한
서적들을 미쯔이(三井)문고가 구입하여 그것을 다시 미국의 버클리대학에 매각한 문고이다. 버클리본의 특징은 표지
왼편에 ‘사암경집俟菴經集’이라고 큰 글씨로 쓰여져 있으며, 바로 그 밑에 ‘자, 축, ……, 술, 해’ 등의 12지의 각 글자가
적혀 있다는 데 있다.
즉 버클리본은 주역사전 24권을 각각 2권씩 합쳐서 12책으로 묶고, 거기에 ‘자, 축, ……, 술, 해’등의 12지를 차례로
배당한 것이다. 그리고 표지의 오른 쪽에는 “역사전易四箋”이라는 말과 그 본래의 권수卷數가 적혀 있다.
왜 표지에 책의 본래 제목인 “주역사전”을 적지 않고, “역사전”이라고 적었는지 그 이유는 잘 알 수 없다.
아사미문고에는 다산의 저서가 필사본으로 18종 소장되어 있고, 여기에는 ‘사암경집’이라는 표제가 붙어 있는데,
이 표제는 다산의 친필로 추정된다는 주장도 있다.
김영호金泳鎬에 따르면, 다산은 자신의 저작물들을 몇 개의 시리즈로 분류하여 편차를 정해놓았는데, 사암경집
시리즈도 그 중의 하나라고 한다.
학계에서는 최근 버클리본이야말로 다산의 정고본에 해당되며, 동시에 규장본의 저본이라고 보는 견해가 대두되고
있다. 그리고 신조선사본은 다산의 정고본을 저본으로 해서 편찬된 것이기 때문에, 신조본의 저본도 버클리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이본을 대조연구해 본 결과, 버클리본이나 버클리본의 전사본인 규장본은 신조본의 저본이 될 수 없다.
신조본은 오히려 국중본과 더불어 높은 일치도를 보이고 있기 때문에 필자는 오히려 신조본의 저본은 버클리본이나
규장본이 아니라 국중본으로 보아야 한다는 가설을 제안하고자 하며, 이를 아래의 논의에서 입증하고자 한다.
나) 규장본에 대한 고찰
매천梅泉 황현黃玹에 의하면 1885년과 1886년에 고종의 어명에 의하여 여유당집이 전사全寫되어 내각內閣에
수장收藏된 적이 있다고 한다. 현재 규장각에는 여유당집78책이 소장되어 있는데, 이것이 매천 황현이 언급한
고종의 어명에 의한 정사본精寫本이라는 견해도 있으나, 아직 입증되지 않고 있다.
이 규장각 소장 여유당집78책은 신조선사본보다 먼저 필사된 것으로 보이며, 정고본이 완질로 발견되지 않는
현재의 상황에서는 매우 중요한 기준자료가 된다.
그런데 이 여유당집 78책에는 상례사전喪禮四箋과 상례외편喪禮外篇을 제외한 육경六經관련 저작이
모두 빠져 있으며, 통행본인 규장본 주역사전도 역시 여기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렇지만 앞서 밝혔듯이 규장본과 버클리본에서 여유당집에 속해 있는 주역사전의 해당 권수를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규장각 소장 여유당집78책은 완질이 아니며, 본래의 여유당집에는 주역사전이 포
함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만일 현재 유통되고 있는 규장본 주역사전이 규장각 소장의 여유당집78책에 속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규장각 소장의 여유당집78책과는 별도의 경로를 통해서 규장각에 들어온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규장본의 특징에 관해 말해 보기로 하자. 규장본도 다른 필사본과 마찬가지로 10행 22자에 맞춰져 있다.
규장본과 버클리본을 비교하면, 양자가 필체가 매우 흡사하기 때문에, 양자가 동일인에 의한 필사가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상당히 차이가 나는 곳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에, 양자가 동일인에 의해
쓰여진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더욱이 규장본 내에서도 앞뒤의 필체가 조금씩 차이가 나기 때문에, 다수의 필사
자에 의해 전사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이 버클리본은 규장본과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 것일까? 버클리본과 규장본을 대조해 본 결과, 주역사전과
여유당집의 권수를 대응시키고 있는 몇 군데에서 양자兩者의 기술이 정확히 일치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규장본과 버클리본이 모두 여유당집의 권수를 기재했다는 것은 양자가 모두 여유당집 이후에 성립된 것임을
시사해준다.
그리고 주역사전 제13권과 제14권의 권두에서 “여유당집권지오십與猶堂集卷之五十”과 “여유당집권지오십일與猶堂
集卷之五十一”이라고 한 것은 아마도 “여유당집권지백삼십與猶堂集卷之百三十”과 “여유당집권지백삼십일與猶堂集
卷之百三十一”이라고 써야 할 것을 잘못 기재한 것이 아닌가 추측되는데, 이처럼 오기誤記에 있어서조차도 일치한다
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여유당집의 권수를 전체가 아닌 일부분에 한해서만 기재한 것은 필사자가 그것을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을 수
도 있고, 아니면 실수로 빠트렸을 수도 있다.
장동우의 「여유당전서 정본사업을 위한 필사본 연구」의 첨부자료2―권수가 표시된 저작목록재배치자료(다산학 제7호,
286쪽, 다산학술재단, 2005)―는 여유당집의 권수가 주역사전 24권에 어떻게 상응되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에 따르면 주역사전 24권에 상응되는 부분은 여유당집 118권~141권(총24권)이다.
이 배치도를 보면 대략 권수가 맞아 떨어지는 것 같기도 하지만, 138권은 아예 없고, 140권은 두 번이나 나오기 때문에,
어떤 착오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만일 139권을 138권의 오식誤植이라고 보고, 140권이 두 번 중복기재된 것을 각각 139권, 140권으로 수정한다면 전체
권수의 배치가 맞아 떨어지게 될 것이다. 그러면 장동우의 첨부자료2―권수가 표시된 저작목록재배치자료-를 참조하
여, 양본의 체제와 권수를 도표화해 보기로 하자.
주역사전 권수 | 사암경집 권수 (버클리본) | 여유당집 권수 | 권두의 시작어 |
1 | 자子 | 118 | 제무진본題戊辰本~ |
2 | 119 | 역례비석易例比釋~ | |
3 | 축丑 | 120 | 건괘乾卦~ |
4 | 121 | 둔괘屯卦~ | |
5 | 인丑 | 122 | 사괘師卦~ |
6 | 123 | 태괘泰卦~ | |
7 | 묘卯 | 124 | 겸괘謙卦~ |
8 | 125 | 임괘臨卦~ | |
9 | 진辰 | 126 | 박괘剝卦~ |
10 | 127 | 이괘頤卦~ | |
11 | 사巳 | ★128 | 괄례표括例表(下)~ |
12 | ★129 | 둔괘遯卦~ | |
13 | 오午 | ★50(130?) | 가인괘家人卦~ |
14 | ★51(131?) | 손괘損卦~ | |
15 | 미未 | 132 | 췌괘萃卦~ |
16 | 133 | 혁괘革卦~ | |
17 | 신申 | 134 | 점괘漸卦~ |
18 | 135 | 손괘巽卦~ | |
19 | 유酉 | 136 | 중부中孚~ |
20 | 137 | 춘추관점보주春秋官占補註~ | |
21 | 술戌 | ★139(138?) | 대상전大象傳~ |
22 | ★140(139?) | 계사전繫辭傳~ | |
23 | 해亥 | ★140 | 시괘전蓍卦傳~ |
24 | ★141 | 설괘전說卦傳~ |
다) 국중본에 대한 고찰
국중본이란 국립중앙도서관國立中央圖書館 소장의 주역사전 필사본을 가리킨다.
과문의 탓인지 몰라도 필자는 이전의 다산역학과 관련된 논문들에서 국중본 및 버클리본에 관한 언급을 전혀 발견하
지 못했다.
학계에서는 그동안 신조본과 규장본에만 의존해왔기 때문에, 국중본과 버클리본 등의 문헌연구로까지 나아가지 못했
던 것이 현실이었다.
버클리본은 저 멀리 미국의 버클리대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국중본은 가까이 국립중앙도서관
에 소장되어 있고, 심지어 인터넷으로도 열람가능한데도 그토록 오래동안 방치해 두고 있었다는 것은 안이한 연구태
도였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우선 국중본의 형태적 특성을 보면, 규장본・버클리본과 마찬가지로 10행 22자의 배열로 되어 있음을 관찰할 수 있으나,
규장본이나 버클리본과는 달리 여유당집의 권수를 기재한 곳이 전혀 눈에 띄지 않는다.
또한 “열수정용술洌水丁鏞述”이라는 저자 표시가 규장본이나 버클리본과는 다른 곳에 있다는 점도 역시 특이하다.
그리고 규장본이나 버클리본은 필체가 반듯하고 잘 정돈되어 있으나, 국중본은 심지어 난필亂筆이라는 느낌마저 받게
된다.
최익한이 초고본을 열람한 뒤에 단정아묘端正雅妙한 필법筆法과 명결우아明潔優雅한 표제標題라고 감탄을 금치 못
하였다고 하는데, 유감스럽게도 현존의 국중본에서는 이에 필적할만한 모습을 발견할 수 없다.
또 필체에 있어서도 전체적으로 일관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다수의 필사자에 의해 전사轉寫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현존의 국중본 이전에 원형의 국중본이 별도로 있었으며, 현존본은 그로부터의 전사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하
지 못한다고 하겠다. 그러나 그것이 전사본이라고 해도 국중본이 갖는 고유한 가치를 훼손하지는 못할 것이다.
필자의 주역사전의 이본대조를 통한 이본간의 관계분석에서 드러나듯이, 국중본은 신조본의 저본일 가능성이 매우
높을 뿐 아니라, 국중본의 원본은 정고본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라) 신조본에 대한 고찰
신조선사본 여유당전서의 저본은 다산의 종손 정규영이 소장하고 있던 다산의 수고원본手稿原本이 기초가 된
것이라고 한다.
최익한에 따르면, 정규영은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한강이 범람하여 다산의 고택이 물에 잠겨 서책이 떠내려갈 위기
에 놓였을 때 다산의 유고를 필사적으로 구출한 인물이다. 정인보에 따르면 을축년 홍수가 난 다음 해에 간행에 대비
하여 옮겨 적기는 하였으나, 일을 끝내지 못하였는데, 그 뒤 1934년부터 1938년 사이에 권태휘가 주관한 신조선사에
서 여유당전서를 간행하여 완간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장동우는 그의 논문 「여유당전서 정본사업을 위한 필사본연구」에서 신조선사본 여유당전서의 저본이 된 것은
여유당집이라고 말하고 있다.
2) 네 종류의 이본에 대한 대조분석
A-1) 신조본-국중본의 계열과 규장본-버클리본의 계열 사이에 현저한 차이가 있는 경우
출전 | 新朝本․國中本 | 奎章本․버클리본 |
括例表上 | 四時之卦, 京房謂之十二辟卦. 今擬除乾坤二卦, 別取再閏, 以充十二辟卦, 十二辟卦, 分其剛柔, 衍之爲五十衍卦, 此所謂, 大衍之數五十. 此之謂, 推移也 | 四時再閏之中, 乾坤爲父母, 餘十二卦, 漢儒謂之十二辟卦. (卽類聚之卦) 十二辟卦, 分爲剛柔, 衍之爲五十衍卦 (卽, 群分之卦) 此所謂大衍之數五十. 此之謂. 推移也. |
蒙六三 | 又按, 用躬叶韻 (用音庸) 且禽陰深諶, 本叶東韻, 風楓終隆, 本叶侵韻, 則金於古韻, 亦當與躬, 叶, 宜以勿用爲句也. | 又按, 用躬叶韻 (用音庸) 宜以勿用爲句也. |
蠱初六 | 泰之乾君, 前有震男, (三五互) 是, 有子也. | 泰之時, 乾君在內, 移之爲蠱, (一之上) |
蹇六二 | 小過之移 (四之五) 一足旣蹇 (義見上) 變而爲井, 一足又病 (下倒震, 今爲大坎) 王臣之蹇蹇也 | 泰之初剛, 本震足也. (復一陽) 移爲坎疾 (一之五) 王臣之蹇也. 自小過來 (四之五) 本有此蹇 (本象也) 蹇而又蹇 (井亦蹇) 王臣蹇蹇也. |
中孚初九 | 虞吉者, 虞祭之吉也 | 虞吉之義 未詳. |
旣濟六四 | 曷然哉, 坎盜离防 (上本坎) 本有禦寇之象 | 曷然哉, 旣濟爲卦, 離防在內, 坎盜在外 (上本坎) 有禦寇之象 |
乾卦 「大象傳」 | 震德旣極, 自兌爲乾故, 說卦, 序卦, 每云, 乾健 | 六健旣合, 其健彌甚, 故說卦, 序卦, 遂云, 乾健 |
繫辭傳의 “包羲氏沒”에 대한 學圃의 注 | 學圃云, 卦自否來, 斲之揉之, 皆巽木也 (否互巽) 然, 剛自上墜 (四之一) 剖而落之, 是, 斲木也, 因其本剛 (上本乾) 巽以曲之 (變爲巽) 是, 揉木也. | 學圃云, 卦自否來, 斲之揉之, 皆巽木也. (否互巽) |
그러면 이 네 종류 이본의 관계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축자대조를 통해 그 차이를 분석해 보기로 하자.
주역사전에 관한 4종의 이본을 대조해 본 결과, 어떤 곳에서는 내용에 확연하고도 현저한 차이가 나는 부분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대조작업을 통해, 필자는 가)신조본과 국중본이 하나의 계열로 묶일 수 있고, 나)
규장본과 버클리본이 또 다른 하나의 계열로 묶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즉, 계열내부 사이에는 일치하지만, 다른 계열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 경우이다.
A-2) 현저한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신조본․국중본과 규장본․버클리본이 각각 같은 계열에 소속됨을 보여주는
사례들
출처 | 신조본․국중본 | 규장본․버클리본 |
訟卦 九二 | 水卑天高 | 水卑山高 |
比之彖 | 其事永也 | 其象永也 |
比上六 | 上之二 | 上之五 |
小畜之彖 | 自巽風也 | 自巽風也 |
小畜 九五 | 上今艮 | 下今艮 |
小畜 上九 | 五陽皆君子 | 五陽爲君子 |
泰 彖傳 | 坤由艮成 | 坤由田成 |
泰 初九 | 忽高一寸 | 忽高三寸 |
泰 上六 | 外郭雖存 | 外郭雖好 |
泰 上六 | 何以歸告 | 何以告歸 |
泰 上六 | 物極必變 | 物之必變 |
同人 九三 | 巽木敵兌金 | 巽木兌金克 |
同人 上九 | 雷天卦 | 雷下卦 |
謙 彖傳 | 案 諸人 | 案侯果諸人 |
隨 九五 | 兩互之漸 | 兩互之占 |
蠱 | 秋風所損 | 秋風所隕 |
蠱 | 兌秋而巽風 | 兌, 秋也, 巽風 |
蠱之彖 | 前三用辛 | 前三用新 |
噬嗑 九三 | 噬嗑有坤土 | 噬嗑本坤土 |
噬嗑 六二 | 蓋以鼻自中嶽也 | 蓋以鼻者中嶽也 |
復之彖 | 行之以艮路 | 行之以震路 |
无妄 上九 | 上今兌 | 上今巽 |
坎 九五 | 掘地 | 掘水 |
家人 六二 | 列女傳 | 烈女傳 |
升 上六 | 君子富實 | 君子富貴 |
艮 六五 | 漸自泰來 | 漸自否來 |
繫辭傳 | 當子丑 | 當子午 |
蓍卦傳 | 蓍卦傳 (本繫辭上傳文) | 蓍卦傳 |
蓍卦傳 | 地水, 親而不尊 | 水火, 親而不尊 |
A-2)의 경우는 A-1)의 경우처럼 현저한 차이를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신조본‧국중본과 규장본‧버클리본이 각각
하나의 계열로 묶여짐을 입증해 주는 자료라고 하겠다. 즉, 신조본과 국중본은 서로 일치하며, 규장본과 버클리본도
서로 일치한다. 따라서 신조본‧국중본이 하나의 계열로 묶여지며, 규장본‧버클리본이 또 다른 하나의 계열로 묶여진다.
이상의 축자 대조를 통해 추론할 수 있는 사항은 다음과 같다.
① 신조본과 국중본은 일치하는 하나의 계열이며, 규장본과 버클리본은 일치하는 또 하나의 계열이다.
먼저 신조본‧국중본이 동일한 계열에 속한다는 증거는 「역론易論」의 배치에 있다.
「역론」은 신조본과 국중본에서는 상경上經이 끝난 뒤에 바로 계속해서 배치되어 있으나, 규장본과 버클리본에는 아예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 다음으로 버클리본과 규장본 사이에도 중요한 일치점이 있다. 양자를 대조해본 결과, 규장본과 버클리본에서는
비록 몇 곳에 한해서이기는 하지만 여유당집의 권수를 기재하고 있으며, 거기에서 모두 기술이 일치하고 있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주역사전의 제13권과 제14권의 권두에서 “여유당집권지오십與猶堂集卷之五十”과 “여유당집
권지오십일與猶堂集卷之五十一”이라고 한 것은 각각 “여유당집권지백삼십“與猶堂集卷之百三十”과 “여유당집권지백
삼십일“與猶堂集卷之百三十一”의 오기로 보인는데, 이처럼 오기에 있어서조차도 양자가 일치한다는 점은 필사자가
동일인이거나, 아니면 어느 한 쪽이 다른 쪽을 재필사하지 않았다면 발생하기 힘든 사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규장본과 버클리본에 모두 여유당집의 권수를 기재했다는 것은 양자가 모두 여유당집 이후에 성립된
것임을 시사해주며, 양자가 저본으로 삼고 있는 것이 여유당집에 속한 주역사전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국중본에서는 여유당집의 권수를 기재한 곳이 전혀 눈에 띄지 않는다.
② 국중본(혹은 국중본의 저본)은 신조본의 저본이다. 신조본과 국중본은 대부분의 경우 너무나 완벽하게 일치하기
때문에, 신조본의 저본이 규장본이나 버클리본이 아니라 국중본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다.
신조본의 편찬자가 규장본 혹은 버클리본을 참조했을 수도 있지만, 분명한 사실은 위의 경우처럼 현저하고 확연한
차이가 나는 부분에서는 국중본을 선택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조본의 저본이 규장본이라는 종래의 통설은 수정
되어야 마땅하다.
③ 버클리본은 규장본의 저본일 것으로 추정된다. 다산학술문화재단의 「여유당전서정본사업 제2차년도 연구결과
요약」(2006.12)에 따르면, 버클리대 아사미문고에 소장된 다산필사본들이 규장본의 저본일것이라는 추정이 가능
하다. 즉 아사미문고본과 규장본의 상호비교를 통해서, 두 필사본의 목차 및 편제가 거의 일치함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바로 둘 중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필사하였음을 의미한다.
게다가 아사미문고본에서 수정가필하거나 산삭한 부분이 규장각 본에는 어느 정도 반영되어 있다는 점은 더욱 이러
한 판단을 강하게 뒷받침해 준다는 것이다. 아울러 아사미문고의 필사본에는 다산의 친필로 보이는 표제명이 있는
것으로 보아, 버클리본은 다산의 정고본에 해당되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러나 필자는 버클리본이 정고본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그 이유를 아래에서 밝히고자 한다.
B) 신조본․규장본․버클리본 사이에서는 서로 일치하지만 국중본은 일치하지 않는 경우
출처 | 신조본․규장본․버클리본 | 국중본 |
坤之彖 | 學圃云, 周禮牧師 | 學圃云, 周牧師 |
大畜 九三 | 損自泰來, 剛往于外 | 賁自泰來, 剛往于外 |
咸 九四 | 鏞嘗讀周禮 | 鏞嘗讀周易 |
恒九三 細注 | 六五詞 | 五六詞 |
明夷 | 此六書假借之法 | 此六書家借之法 |
明夷 六二 | 震帥出征 | 震師出征 |
无妄 大象傳 | 萬物終於艮 | 萬里終於艮 |
A의 사례분석을 통해, 우리는 신조본과 국중본이 하나의 계열을 이루고, 버클리본과 규장본이 또 다른 하나의 계열을
이룬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앞서 필자는 신조본의 편집자가 저본으로 삼은 것은 국중본일 것이라는 가설을 제기
하였다. 그렇다면 신조본의 편집자는 규장본의 존재를 전혀 몰랐기 때문에 참조할 수 없었던 것일까?
B에 대한 분석은 신조본의 편찬자가 규장본(혹은 버클리본)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으며, 실제로도 참조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드러내준다. 만일 국중본이 신조본의 저본이라면, 이런 경우는 왜 발생하는 것일까? 이러한 종류는 대부
분 국중본이 명백한 오류로 확인되는 경우들이 대부분이다.
예컨대, 대축大畜 구삼九三에서 “손자태래損自泰來”라고 써야 할 것을 국중본에서 “분자태래賁自泰來”로 쓴 경우처럼,
신조본의 편집자는 이것이 오기誤記임이 명백함을 확인하고서는 국중본國中本을 따르지 않고 규장본奎章本을 따랐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C) 국중본․규장본․버클리본은 서로 일치하지만 신조본은 일치하지 않는 경우
국중본․규장본․버클리본은 일치하지만, 신조본만 차이를 보이는 경우는 어떤 경우일까? 언뜻 생각하면, 이런 경우는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다. 신조본은 필사본을 저본으로 삼아 가장 최후로 성립된 것이므로, 그것이 저본으로 삼고 있
는 국중본과 일치해야 하는 것이 원칙이며, 저본에 문제가 있다면, 다른 필사본을 참조해서 그것을 수정하여 반영해
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들을 조사해 보면, 저본이나 다른 필사본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는데, 신조본만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경우들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이러한 경우들은 활자로 옮기는 과정에서의 단순한 실수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 | 신조본 | 국중본 | 규장본 | 버클리본 |
易例比釋 (下) | 姤初五爲卦主 | 姤初爲卦主 | 姤初六爲卦主 | 규장본과 같음 |
遯 上九 | 以向 | 巨向 | 呂向 | 규장본과 같음 |
艮 九三 | 網之中綱 (망지중강) | 綱之中綱 (강지중강) | 網之中網 (망지중망) | 綱之中網 (강지중망) |
中孚 上九 | 變而爲坎(上今坎)雞則亡矣.卦象(巽今亡)如此 | 變而爲坎(上今坎) 雞則亡矣(巽今亡) 卦象如此 | 變而爲坎(上今坎) 雞何去也(巽今亡) 卦象如此 | 규장본과 같음 |
蓍卦傳 | 合同摩轉 | 合用摩轉 | 合成摩轉 | 신조본과 같음 |
D) 신조본‧국중본‧규장본이 모두 일치하지 않으며, 버클리본에는 일정한 규칙성이 없는 경우
이런 경우는 신조본, 국중본, 규장본이 모두 다른 경우이다. 그리고 버클리본은 대체로 규장본과 일치하지만 신조본과
일치하는 경우도 있으며, 어느 것과도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있어 규칙성이 약하다. 어쨌든 이본들간의 차이가 크게
벌어지는 이런 경우는 주역사전 전체를 통틀어 볼 때 그렇게 많지 않다. 둔상구遯上九의 “이향以向”의 경우는 필사본
중 어느 하나(규장본의 여향呂向)는 맞는데, 신조본에서 반영하지 못한 경우이다. 또 간구삼艮九三의 망지중강網之
中綱의 경우는 필사본의 어느 것도 맞지 않아, 신조본에서 수정한 경우라고 하겠다.
출처 | 신조본 | 국중본 | 규장본 | 버클리본 |
易例比釋 (下) | 姤初五爲卦主 | 姤初爲卦主 | 姤初六爲卦主 | 규장본과 같음 |
遯 上九 | 以向 | 巨向 | 呂向 | 규장본과 같음 |
艮 九三 | 網之中綱 (망지중강) | 綱之中綱 (강지중강) | 網之中網 (망지중망) | 綱之中網 (강지중망) |
中孚 上九 | 變而爲坎(上今坎)雞則亡矣.卦象(巽今亡)如此 | 變而爲坎(上今坎) 雞則亡矣(巽今亡) 卦象如此 | 變而爲坎(上今坎) 雞何去也(巽今亡) 卦象如此 | 규장본과 같음 |
蓍卦傳 | 合同摩轉 | 合用摩轉 | 合成摩轉 | 신조본과 같음 |
4. 주역사전의 정고본 찾기
이상에서 필자는 주역사전에 관한 네 종류의 이본을 축자대조하여 그 관계를 분석하였다. 필자는 이러한 분석을 통해,
㉮신조본‧국중본이 하나의 계열이며, ㉯규장본‧버클리본이 또 다른 하나의 계열이라는 사실을 밝혀내었다.
이제 우리에게 요구되는 과제는 이러한 분석결과를 토대로 주역사전의 정고본을 찾아내는 일이다. 정고본이란 일단
필사본에만 해당되는 개념이다. 신조본은 필사본을 저본으로 삼아 다시 활자화된 것이므로, 그 자체가 정고본이 될
수는 없다.
그러면 정고본이란 무엇인가?
정고본(Finalised Manuscript)이란 일반적으로는 저자가 직접 쓴 초고본을 수정하여 저자 스스로가 최종적으로 손질
하여 완성한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다산의 저술에 대해서는 이러한 정고본의 개념을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곤란한 점들이 있다.
왜냐하면 주역사전에 대해서만 보더라도 이학래와 다산의 아들인 정학연과 정학유 등이 저술작업에 동참하고 있기
때문에, 다산의 친필이 아니더라도 저자가 최종적으로 이를 승인하고 확정했다면, 정고본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최익한에 따르면, 을축년(1925년) 대홍수 때에 다산의 고택에 강물이 넘쳐 모든 서책이 떠내려갈 위기에 처했을 때
다산의 현손 정규영이 필사적으로 건져냈다고 하는데, 김영호는 이 때 정규영이 건져낸 것이 다산의 정고본 책상자
이며, 신조선사본 여유당전서는 이 정고본을 저본으로 사용하여 편찬된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다만 김영호는 신조선사본이 모두 이 정고본을 저본으로 사용한 것이라고는 단정하지 않고, ‘어느 정도까지는’ 이것
을 갖고 편찬에 이용했다고 말하고 있다.
한편 장동우는 ‘경집 관련 기타 필사본에 속하는 주역사전은 여유당전서의 주역사전의 저본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추정하였는데, 장동우가 말하는 ‘경집관련기타필사본’이란 규장각소장의 필사본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장동우는 신조선사본의 저본이 규장본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 된다.
한편 다산학술문화재단의 「여유당전서 정본사업 제2차년도 연구결과요약」에 따르면, 버클리대 아사미문고에 소장
된 다산필사본들이 규장각본의 저본일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즉, 아사미문고본과 규장각본의 상호비교를 통
해서, 두 필사본의 목차 및 편제가 거의 일치함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바로 둘 중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필사
하였음을 의미한다. 아사미문고본에서 수정가필하거나 산삭한 부분이 규장본에 어느 정도 반영되어 있다는 사실은
규장본이 버클리본보다 이후에 성립된 것이라는 추정을 가능하게 해준다.
아울러 아사미문고의 필사본에는 다산의 친필로 보이는 표제명이 있는 것으로 보아, 버클리본이야말로 다산의 정고
본에 해당되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이러한 일련의 논의를 종합해보면, 신조선사본은 다산의 정고본을 저본으로
해서 편찬되었으며, 다산의 정고본에 해당되는 것은 바로 버클리본이라는 것이 된다.
그리고 버클리본은 다시 규장본의 저본이 되었다고 주장되고 있다.
이상 정고본과 관련된 일련의 주장들은 언뜻 보면 매우 정합적으로 보인다. 정규영이 건져낸 정고본을 저본으로 삼
아 신조선사본 여유당전서가 편찬되었고, 그 정고본이란 다름 아닌 버클리본이며, 버클리본은 다시 규장본의 저본
이 되었다는 것이다.
필자는 전자의 주장, 즉 정규영이 건져낸 정고본을 저본으로 삼아 신조선사본 여유당전서가 편찬되었다는 주장이
정인보와 최익한의 전언에 의거하고 있는 상당히 신빙성 있는 가설이라는데 동의한다.
아울러 필자는 버클리본이 규장본의 저본이라는 「여유당전서 정본사업 제2차년도 연구 결과 요약」의 주장에 대해서
도 충분히 동의할 수 있다. 그렇지만 문제는 과연 그 정고본이 버클리본인가 하는 데 있다.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신조선사본의 저본으로 사용된 것이 다산 고택에 있던 정고본이라는 전반적인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주역사전에 대해서도 그것이 다산의 고택에 있던 정고본을 저본으로 삼은 것이라는 데 그다지 의심하지
않은 듯하다.
그렇지만 주역사전에 관한 한, 그러한 주장을 의심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문제는 신조선사본이 버클리본
(혹은 규장본)과 결정적인 부분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고, 오히려 국중본과는 거의 일치한다는데 있다.
신조선사의 편찬자라면 최상의 선본을 저본으로 삼았을 것이고, 그것이 정고본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만일 버클리본이 정고본이라면 왜 신조선사본의 편집자는 버클리본을 저본으로 사용하지 않았던 것일까? 앞서
필자가 ‘A-1)신조본-국중본의 계열과 규장본-버클리본의 계열 사이에 현저한 차이가 있는 경우’의 분석을 통해 밝
혔듯이, ㉮신조본과 국중본, ㉯버클리본과 규장본은 각각 동일한 계보로 묶일 수 있다. 만일 현저한 차이를 보이고
있는 부분에서 신조본이 버클리본이나 규장본과 공통점이 전혀 없고 오히려 국중본을 따르고 있다면, 신조본의
저본이 버클리본이나 규장본이라는 가설은 그 성립근거를 잃게 된다.
어쨌든 분명한 사실은 신조본이 저본으로 삼은 것은 규장본이나 버클리본이 아니라 국중본(혹은 국중본의 저본)이라
는 점이다. 그렇다면 오히려 국중본(혹은 국중본의 저본)이 다산의 정고본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버클리본에서처럼
단정아묘한 필법과 명결우아한 표제를 국중본에서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은 국중본이 정고본이라고 단정 짓는 것을
주저하게 만든다. 더구나 버클리본에는 다산의 친필로 보이는 표제명도 있기 때문에 버클리본이 정고본일 것이라는
심증을 포기하기가 쉽지 않다.
그렇지만 버클리본이 정고본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혹시 그 명결 우아한 외관에 현혹되어 그런 것이 아닐까?
김영호에 따르면, 정고본은 반드시 다산의 자필이라고 해서 정고본이라고 할 수는 없고, 반대로 제자들의 글씨라고
해서 정고본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다. 국중본에서 단정아묘하고 명결우아한 필체를 볼 수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국중본도 전사본의 일종이라고 본다면, 국중본은 정고본 그 자체는 아닐지 몰라도, 적어도 그 정고본으로부터의
전사본이라고 볼 수는 있을 것이다.
여기서 정고본과 관련된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필자는 하나의 가설을 제안하고자 한다. 즉 정고본은 비정고본보다
더 완전에 가까워야 한다는 가설이 그것이다. 중부초구中孚初九의 주를 예로 들어 보기로 하자.
㉮의 계열에서는 ‘虞吉者, 虞祭之吉也’라고 하였지만, ㉯계열에서는 ‘虞吉之義 未詳’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만일 버클리본이 다산의 정고본이라면, 왜 다산은 ‘우길지의, 미상’이라고 말한 것일까?
어쨌든 ㉮계열에서는 ‘미상’이라고 하지 않고, 의미를 확정하고 있지 않은가? 처음에는 ‘우길’의 뜻이 명확치 않았기
때문에 ‘미상’이라고 했다가, 나중에 궁리를 거듭한 끝에 최종적으로 ‘虞吉者, 虞祭之吉也’라고 그 의미를 확정한 것
이 아닐까?
따라서 ㉮가 ㉯보다 더 완성도가 높고, 더 이후에 성립되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이후에 성립된 것이 이전에 성립된
것보다 더 완성된 것이며, 더 정고본에 가깝다고 보는 것은 합리적인 추론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국중본이 ㉯버클리본보다 더 정고본에 가깝다는 가설을 지지한다. 「계사전繫辭傳」의 ‘包羲氏沒’에
대한 정학유의 주注는 이러한 가설을 지지하는 하나의 단서를 제공해 준다.
정학유의 주는 ㉯계열(규장본‧버클리본)은 ㉮계열(신조본‧국중본)에 비해 주의 상당부분이 생략되어 있고 불완전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정학유는, 다산의 명을 받아 무진본 주역사전을 최종적으로 준공한 인물이다. 정학유가 원고의
최종완성을 위임받은 인물이었다면, 그는 주역사전 무진본이 일단 완결된 이후에도 수정하거나 보충해야 할 부분이
눈에 띄었을 때, 과감하게 손을 댈 수 있지 않았을까? 더군다나 그 부분이 정학유 자신의 역주라면 더욱 그랬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정고본의 기본적 정의로 되돌아가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앞서 정의한 것처럼 정고본이란 저자가 직접 쓴 초고본을 수정하여 최종적으로 완성한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주역사전의 주저자는 물론 다산이지만, 제자 이학래와 두 아들인 정학연과 정학유도 공동저자의 역할을 제한
적인 범위 내에서 담당하고 있다. 다산이 무진본 주역사전의 준공을 정학유에게 위촉한 이상 정고본의 최종 완성자는
다산이 아닌 정학유가 될 것이다.
5. 결론
필자는 본 소고를 통해, 주역사전 텍스트의 변천과정을 밝히고자 하였다. 주역사전은 최초로 갑자본이 형성
된 이래 무진본에 이르기까지 8권본이 24권본이 되는 등 양적 확대가 이루어졌을 뿐 아니라, 그 내용에 있어서도 방
법론의 수정이 상당한 정도로 이루어졌다. 무진본이 완성된 이후 원본에 대한 여러차례 필사가 이루어졌고, 그 결과
여러 개의 필사본이 존재하게 되었다.
필자는 필사본을 대조한 결과, 국중본은 버클리본‧규장본과는 내용적으로 몇 곳에서 결정적 차이를 드러낸다는 점을
발견하였다. 아울러 신조선사에 의해 활자화된 신조본은 그 결정적 차이를 드러내는 부분에서 국중본과 거의 일치함
을 밝혀내었다.
따라서 신조본의 저본은 국중본이거나 아니면 국중본이 필사한 원본이 된다는 것은 확실하다.
문제는 신조본의 저본이 동시에 주역사전의 정고본인가 하는 데 있다.
필자의 견해로는 양자가 일치해야 된다고 본다. 여유당전서의 간행을 주관하는 편찬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당
연히 정고본을 저본으로 삼으려 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학계에서는 신조선사에서 여유당전서를 편찬하면서 을축년(1925년) 대홍수 때 정규영이 건져낸 필사본들을 저
본으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지극히 높으며, 그 필사본이 바로 정고본이라고 주장하였다.
필자의 생각으로도 정규영이 건져낸 필사본이 다산의 고택의 소장본인 이상 그것이 정고본임을 의심할 이유는 별로
없다. 문제는 학계에서 그동안 그 정고본이 바로 규장본이라고 믿고 있었다는데 있다. 과연 그동안 학계에서 믿고
있었듯이, 과연 그 정고본이 바로 규장본(흑은 그 원본이라고 생각되는 버클리본)일까? 주역사전에 국한된 이야기이
기는 하지만, 주역사전의 저본은 규장본(혹은 버클리본)이 아님이 명백하지 않은가?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국중본에서 단정아묘한 필법과 명결우아한 표제를 목격할 수 없다는 점은 국중본 그 자체를 정
고본이라고 단언하기를 주저하게끔 만드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국중본도 일종의 전사본이라고 본다면, 국중본의
원본은 단아한 필체를 간직하고 있었을지도 모르므로 필체만 가지고 국중본을 정고본이 될 가능성에서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상 주역사전의 네 종류의 이본의 검토를 통해 필자가 내린 주요한 결론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주역사전의 이본은 ㉮신조본과 국중본, ㉯버클리본과 규장본의 두 계열로 묶일 수 있다.
② 버클리본과 통행본 규장본의 저본이 된 것은 완질본完帙本 여유당집에 속한 주역사전이다. 규장각 소장
여유당집78책에는 주역사전의 통행본이 포함되어 있지 않으나, 여유당집78책에는 상례사전喪禮四箋
과 상례외편喪禮外篇을 제외한 육경 관련 저작이 모두 빠져 있으므로, 이를 완질로 볼 수 없을 것이다.
통행본 규장본과 버클리본에서는 비록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여유당집에 속해 있는 주역사전의 해당 권수를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본래의 완질 여유당집에는 주역사전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③ 버클리본과 통행본 규장본은 여유당집을 저본으로 삼았지만 사암경집계열에 속한다.
④ 규장본의 저본은 버클리본이며, 규장본은 버클리본을 다시 베껴 쓴 전사본이다.
⑤ 신조본의 저본은 국중본(혹은 국중본의 원본)이다. 신조본의 편찬자가 버클리본(혹은 규장본)을 저본으로 사용하
면서도 국중본을 단지 보조적으로만 활용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겠으나, 그 가능성은 그다지 높지 않다.
신조본과 국중본의 일치도가 매우 높게 나타나는 것으로 볼 때, 신조본의 저본이 버클리본(혹은 규장본)이 될 수는
없다. 신조본의 편찬자는 가능한 모든 필사본들을 고루 참조하려고 시도했을 것이므로, 국중본 이외에 규장본(혹은
버클리본)도 참조했을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차이가 나는 부분에서 모두 국중본을 채택했다는 사실은
국중본이야말로 신조본의 저본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된다.
⑥ 국중본은 정고본 그 자체는 아닐지 몰라도 최소한 정고본으로부터의 전사본은 될 수 있다. 신조본의 편찬자가
국중본(혹은 국중본의 저본)을 저본으로 채택했다면, 그것이 정고본에 가장 가깝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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