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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가을수양회 주제3강 (서아브라함)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말씀 / 사도행전 20:17-38
요절 / 사도행전 20: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바울은 본래 바래새인으로 유대교를 매우 열심히 믿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것을 이단 종교로 생각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핍박했습니다. 초대교회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인 스테반 집사를 죽이는데 가담하였습니다. 또 성도들을 체포하고자 이방 땅인 다마스쿠스로 가던 중에 빛으로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성도들을 핍박하는 바울을 책망하시고, 이제는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눈을 뜹니다. 이를 통해 바울은 예수님을 핍박하는 사람에서 이방에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그는 3차에 걸쳐 소아시아와 유럽에 전도여행을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다시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있을 때 일어난 일입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에 바울은 자신이 온 힘을 다해 도왔던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밀레도라는 항구로 불렀습니다. 거기서 고별 메시지를 전하는 내용이 오늘 본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바울이 어떤 자세로 에베소 양들을 섬겼는가 잘 배워서 우리도 하나님이 귀하게 쓰시는 목자들로 성장하길 기도합니다.
첫째로, 바울은 모든 겸손으로 양들을 도왔습니다. 17-19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오매 그들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바울은 에베소에 들어온 첫날부터 항상 똑같은 자세로 양들을 섬겼습니다. 그 자세의 첫 번째가 겸손이라고 말합니다. 겸손도 그냥 겸손이 아니고 모든 겸손, great humility입니다. 에베소 양들은 대부분 똑똑하고 부자들이었습니다. 그러니 팔레스타인에서 온 전도자 바울을 쉽게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바울의 어리숙한 외모와 어눌한 말투 때문에 무시했을 것입니다. 이때마다 바울은 속이 뒤집어지고 교만한 이들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고린도전서 4:13절에 보면 바울이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같이 되었도다” 바울이 얼마나 양들에게 무시를 많이 당했으면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취급을 받았다고 말하겠습니까? 그는 한마디로 쓰레기 취급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교만하고 이기적인 양들을 돕다 보면 너무 자존심 상하고 화가 날때가 있습니다. 까마득한 후배에게 인격적인 모독을 당할 때 목자고 뭐고 다 때려 치고 성질대로 해 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때 나의 본성대로 해 버리면 그 양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마음을 낮추고 또 낮추어야만 합니다. 겸손하고 또 겸손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을 도우실 때 자존심이 많이 상하셨습니다. 여인이 너무나 함부로 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유대인의 남자로서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왜 물 좀 달라고 하나이까?”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여인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도 몰라보고 자존심을 팍팍 긁었습니다. 이때 저 같으면 “뭐, 이런 자매님이 있어, 내가 당신의 과거를 다 불어 볼까?” 하며 기를 팍 죽여 놓고 시작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인의 교만한 태도에 전혀 맞대응하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겸손으로 끝까지 낮아지셔서 섬기셨습니다. 오히려 그녀의 남편으로부터 받았던 아픔과 상처를 깊이 이해하시고 그녀의 목마름을 아시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 성령을 소개해 주셨습니다. 그러자 여인의 완악한 마음이 부드러워졌습니다. 나중에는 예수님께 나아와 자신의 고민을 솔직하게 털어 놓고 적극적으로 도움을 구했습니다.
이렇게 하기까지 예수님은 한없는 겸손으로 상처 많은 한 양을 낮아져 섬기셨습니다. 아마도 바울은 이 예수님의 겸손을 묵상하며 모든 겸손으로 에베소에 교만한 양들을 섬겼다. 바울이 쓴 빌립보서 2:6-8절에 보면 그는 예수님의 겸손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그분은 하나님과 똑같이 높은 분이셨지만, 결코 높은 자리에 있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높은 자리를 버리시고, 낮은 곳으로 임하셨습니다.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시고 종과 같이 겸손한 모습을 취하셨습니다. 이 땅에 계신 동안 스스로 낮은 자가 되시며, 하나님께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목숨을 버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겸손이란 자신을 온전히 내려놓고 비우는 것입니다.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 내가 손해보고 망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높여 주십니다. 빌립보서 2:9절에 보면 “그러므로 하나님은 예수님을 최고로 높은 자리에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는 자를 높혀 주십니다. 사도 베드로도 베드로전서 5:6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 아래 자신을 낮추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때가 이를 때에 여러분을 높이실 것입니다” 했습니다. 우리가 겸손하게 낮아져서 양무리들을 섬길 때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높여주십니다. 그 인생을 아름답게 하시고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둘째로, 바울은 눈물로 양들을 섬겼다고 말합니다. 19절을 다시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바울은 문제 많고 거스르는 양들을 섬기느라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이 가는 곳마다 복음역사를 방해하고 바울을 모함할 때 마음이 힘들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무엇보다 마음을 드려 섬긴 양들이 떠나가고 바울을 비방하고 대적할 때 너무 마음이 아파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또 떠나갔던 양들이 회개하고 돌아와서 말씀에 순종하면 이것이 감사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바울은 31절에서도 양들을 눈물로 섬겼다고 했습니다. 3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바울은 3년 동안 양들을 복음에 굳게 세우고자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였습니다. 사도행전 19장에서 바울은 에베소를 개척할때 복음을 듣지 않고 반발하는 사람들을 떠나 예수님을 영접한 신실한 사람들을 두란노 서원에 따로 세우고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눈물로 가르쳤습니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바울도 스스로 텐트를 만드는 직업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틈이 나면 텐트를 짖고, 또 틈이 나면 양들과 시간을 정하여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이렇게 2년을 날마다 하였을 때 소아시아 지방의 모든 유대인과 헬라인이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바울의 손을 통해 놀라운 기적을 행하게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바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병이 낫고 마귀가 떠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에베소의 마술 하던 사람들이 마술책이 거짓인 것을 깨닫고 값비싼 마술책들을 다 불태워 버렸습니다. 또 아데미 여신을 섬기던 에베소 사람들이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3년동안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눈물로 각 훈계한 결과 였습니다. 이로서 에베소 교회가 형성 되었습니다. 우리도 바울의 눈물의 훈계를 배울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목자가 눈물과 사랑이 없다면 이것은 이미 목자가 아닐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도바울처럼 눈물을 가진 사랑의 목자가 될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로, 바울은 말씀전파에 대한 사명감으로 충만했습니다. 20,2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바울은 에베소 개척역사를 섬길 때 상황이 항상 여유롭고 평안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틈만 나면 유대인들이 찾아와서 훼방을 놓고 힘들게 했습니다. 이때 바울은 두려워서 드러눕거나 숨지 않았습니다. 복음의 원수들과 혈과 육의 싸움을 싸우지 않고 양들에게 쉬지 않고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힘을 썼습니다. 양들에게 도움이 되기만 하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그가 가르친 말씀의 핵심은 하나님께 돌아올 것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나 죄악된 길에 서 있습니다. 그 길에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러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이로서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어느 곳에서나 누구에게나 가르쳤습니다.
바울은 이제 예루살렘을 향해서 나아가고자 합니다. 2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고자 하는 이유는 그동안 모금한 구제헌금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하고자 함이었습니다. 이로서 예루살렘 교회와 이방인 교회가 하나 되는데 힘을 쓰고자 했습니다. 또 예루살렘교회에서 파송을 받고 로마개척을 위해 떠나고자 했습니다. 이 모든 계획은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의 방향을 따라 성령에 사로잡혀서 된 것입니다. 당시 예루살렘에는 바울이 오면 그를 잡아 해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사랑하고 걱정하는 사람들은 제발 예루살렘에 올라 가지 말라고 말렸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이 기어코 예루살렘에 가고자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23,2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바울은 주 예수께 받은 사명으로 그 마음이 불탔습니다. 모든 이방인들을 믿어 순종케 하고자 하는 거룩한 열정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롬1:5). 그는 본래 복음의 비방자요, 폭행자요, 핍박자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어야 할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불쌍히 여기셔서 죽이지 않고,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빛으로 만나 주시고 살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를 이방인의 빛으로, 이방인의 사도로 이방인 구원역사에 크게 쓰셨습니다. 1,2,3차에 걸쳐서 아시아와 유럽을 오가며 복음을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수 많은 교회를 개척하도록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 였습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를 깊게 체험한 사도바울은 이제는 예루살렘을 거쳐 로마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다 이루시고, “다 이루었다” 말씀하심으로 인류 구원역사를 완성하셨듯이 자신도 로마까지 가서 복음을 전파함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사명을 다 이루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명보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더 귀하게 여겼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단 내가 살고 봐야하는 것 아닌가?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쓰신 종들을 보면 자신의 생명보다 사명을 앞세웁니다. life-giving spirit으로 충만합니다. 이처럼 사명을 앞세우며 살면 죽을 것 같은데 죽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마태복음 16:25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명없이 편하게 살고자 하면 좋을 것 같아도 그렇지 않습니다. 사명이 없이 안일하고 이기적인 삶을 살면 오히려 죄의 열매만 가득합니다. 그러나 주와 복음을 위해 헌신하면 오히려 하나님께서 축복하셔서 많은 영혼을 구원하고 능력 있는 인생을 살게 하고 성령의 열매가 맺히게 합니다.
우리 가운데도 피곤하고 힘이 들어도, 일대일과 일용할 양식, 기도모임과 전도모임을 소중히 여기고 기를 쓰고 감당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처럼 life giving spirit으로 사는 사람은 손해만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신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부활의 비밀을 체험하게 됩니다.
33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물질생활에서도 본을 보였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의 은이나, 금, 의복을 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기 스스로 텐트를 만들어 파는 것으로 돈을 벌어 자기와 자기와 동행하는 사람들의 필요를 충당했습니다. 또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라는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연약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베풀기에 힘을 썼습니다. 그가 이렇게 헌신적으로 양들을 섬겼기 때문에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은 마음으로 바울을 존경하고 눈물로 배웅을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배우고자 애를 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드려서 아낌없이 섬겨 주었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0:45절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자신의 목숨까지 아낌없이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제물로 내어주셨습니다. 이로써 우리가 구원을 받았고, 풍성한 생명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산 사도바울, 그리고 우리 UBF 믿음의 선배들의 헌신적인 삶을 우리도 끝까지 배우며 따라갈 수 있길 기도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한양을 예수님처럼 사도바울처럼 헌신적으로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소감)
결론적으로 바울은 주 예수님께 받은 사명,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자기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동안 3년동안 밤 낮 쉬지 않고 에베소 성도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예루살렘에 가고자 하고, 그곳에서 파송되어 로마까지 가서 은혜의 복음을 전하고자 합니다. 저희도 사도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고자 하는 소원과 열망을 가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