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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죽음의 집의 기록’을 읽고.
알렉산드르 뻬뜨로비치 고랸치꼬프. 귀족 출신인 그는 자기 부인을 살해한 죄로 서부 시베리아 옴스끄 지방에 위치한 감옥에서 10년 간의 형기를 무사히 마치고, K시 이주민으로 정착하여 겸허하고 조용한 일생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과묵함을 넘어 대인기피증까지 있는 듯 사람들과의 접촉을 의도적으로 피하며 살고 있었다. 이른바 은둔형 외톨이 타입. 원래부터 그랬던 것일까, 아니면 유형 생활이 혹시라도 그에게 남겼을지 모르는 어떤 트라우마 탓이었을까. 그는 죽을 때조차 고독 속에서 홀로 죽었다. 그의 단절된 삶은 결국 죽음으로 끝을 맺었다. 10년 간 강제로 빼앗겼던 자유를 마침내 되찾았건만, 그는 왜 마치 여전히 자유를 빼앗긴 사람처럼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고립된 삶을 이어갔던 것일까. 과연 그에게 자유란 무엇을 의미했을까. 도스토예프스키는 왜 이런 한 사람의 모순된 삶의 결말을 먼저 보여주면서 이 책을 시작했을까.
‘나’라는 사람이 서두를 여는 이 작품은 액자식 구성으로써, 서두를 제외한 거의 모든 부분은 알렉산드르 뻬뜨로비치가 직접 쓴 생생한 유형 생활 기록이다. 그가 죽고 남긴 유품 중 두툼한 공책이 하나 있었는데, 그 공책을 가득 메운 기록들이 ‘나’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이 작품, ‘죽음의 집의 기록’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5대 장편 소설과는 달리 이 작품엔 강력한 서사가 없다. 주로 제한된 감옥 생활을 그리는 작품이기 때문에 어쩌면 이는 당연할지도 모른다. 다만, 이 작품은 마치 살아있는 현실인 것처럼 감옥 안 세계를 유감없이 생생하게 보여준다. 사실적인 묘사에서 과장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직접 경험 없는 공상만으로는, 혹은 유경험자에게 귀동냥만 해서는 결코 써질 수 없는 글이 분명하다. 그렇다. 이 책 역시 비록 소설이라는 형식을 따르고는 있지만, 사실은 저자 도스토예프스키의 실제 경험이 그대로 반영된 작품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 속 주인공 알렉산드르 뻬뜨로비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분신인 셈이고, 그의 유형 생활 기록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화 된 수기로 볼 수 있다.
도스토예프스키는1850년부터 1854년까지 4년 간 유형 생활을 했다. 그는 공상적 사회주의자 푸리에를 따르는 뻬뜨라셰프스키 독서 써클에 속해 있었는데, 1849년 4월 15일 모임에서 당시 금서였던 ‘고골에게 보내는 벨린스키의 편지’를 낭독했고, 그때 마침 그 써클 안에 잠입해있던 경찰 스파이의 밀고로 인해 써클 회원 모두가 체포된다. 황제 니콜라이 1세 체제에서 정치범으로 몰린 것이었다. 그들은 놀랍게도 모두 사형 선고를 받는다. 단지 금서 하나 낭독했다고 사형이 언도되는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은, 나중에 밝혀지기로는, 정치범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고자 상부에서 조작된 반인륜적인 연극에 불과했지만, 도스토예프스키는 실제 사형집행장에서 두 손과 두 발이 묶인 채 총구 앞에 서서 그야말로 죽음 직전까지 가는 극적인 경험을 해야만 했다. 물론 잘 짜여진 각본대로 도스토예프스키는 총살 직전 사면을 받고 감형되어 시베리아 옴스끄에서 4년 간 유형 생활을 하게 되었지만 말이다. 이 끔찍했던 경험은 그에게 트라우마가 되었고 그가 평생 앓은 간질병의 원인이 되었다.
그래서였을까. 내게 있어 알렉산드르 뻬뜨로비치가 묘사하는 감옥 안 세계는 책상 앞 상상력의 산물이 아닌, 오히려 도스토예프스키의 오감을 통과한 생생한 삶의 현장으로 읽혔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지만, 그곳은 살아있으나 죽은 자들의 세계였다. 살아있음과 죽어있음의 차이는 곧 ‘자유’의 유무였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작품을 통해 감옥 유형수들의 현장을 세상에 드러내보임과 동시에 자유에 대해서 뭔가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자유. 감옥 안 자유와 감옥 밖 자유. 둘은 과연 같을까 다를까. 아니면, 같은 자유를 다른 측면에서 보는 것에 불과할까.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린 이 책을 통해 감옥 생활을 거친 사람이 다시 맞이한 감옥 밖 자유 또한 고찰해 봐야 할 것이다. 많은 독자들이 놓치고 있는 것 같은 이 부분에 어쩌면 도스토예프스키의 메시지가 함축되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돈은 주조된 자유다.” 이미 유명해진 이 문장은 이 작품 첫 번째 장에 나오는 명문이다.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에서 언제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주재료 중 하나인 돈과 자유에 대한 관계를 아주 짧고 간결하게 표현한 문장이다. 감옥 안에서의 사유재산은 당연히 금지되어 있다. 발각되면 즉시 빼앗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유형수들은 돈을 벌기도 모으기도 하고, 비록 적은 양이지만 마음껏 탕진하기도 한다. 나름대로의 경제 구조가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유형수들은 감옥이라는 건물 안에만 갇혀 있지 않는다. 감옥은 유치장이 아니다. 새로운 삶의 터전이며 누군가에게는 죽기 전까지 살아야만 하는 모든 시공간의 베이스캠프다. 그들은 강제적으로 노동에 참여해야만 했다. 인근에 있는 건축 현장이라든지 농사 현장에 파견되어 철저한 감시 하에 나름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노동을 부여받았다. 외부 민간인들과의 접촉이 허락된 건 아니었지만, 감시라는 것 자체가 완벽할 수 없기 때문에 그 틈을 타 비밀리에 어떤 일을 청탁받고 (심지어 귀금속 세공자도 유형수 중에 있었다) 노동에 대한 댓가를 지불받는 것이었다. 물론 간수에 의해 적발되면 모든 걸 다 압수당했지만, 유형수들은 어딘가에 잘 숨겨두어 그들만의 경제 생활을 가능하게 하고 있었다. 다음은 위에 쓴 명문이 포함된 문장이다. 뒤의 몇 문장을 추가한다.
“돈은 주조된 자유였으며, 그래서 자유를 완전히 박탕당한 사람들에게 돈은 열 배나 더 귀중한 것이었다. 만일 돈이 주머니 속에서 짤랑짤랑 소리를 내기만 해도, 비록 그것을 쓸 수는 없지만, 벌써 반 이상이나 위로를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돈은 언제 어디서나 쓸 수 있었으며, 더욱이 금단의 열매는 두 배나 달콤한 법이었다. 감옥에서도 술을 구할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파이프 담배도 아주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지만 모두들 그것을 피우고 있었다. 돈과 담배는 괴혈병과 그 밖의 다른 질병으로부터 죄수들을 구해 주었다. 일도 그들을 범죄로부터 구해 주었다. 일이 없었다면, 죄수들은 유리병 속의 거미처럼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도 돈도 모두 금지되어 있었다.” (열린책들 3판 38-39페이지에서 발췌)
돈은 감옥 안에서도 힘이 있었다. 돈이 많고 적음에 따라, 비록 엉성하지만, 감옥 안에서도 나름대로의 피라미드 체계가 형성되어 있었으며, 감옥 밖에서의 신분, 이를테면 귀족인지 평민인지에 따른 출신성분 역시 감옥 안에서도 유효했다. 죄에 대한 댓가로 자유를 빼앗긴, 그래서 그 누구보다도 자유를 갈망할 수밖에 없는 유형수들에게도 돈은 여전히 자유의 상징이었다는 점이 내겐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인간이 자유함을 느낀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혹시 내가 일을 해서 돈을 벌고, 그 돈을 내가 마음대로 쓸 수 있다는 권한이 곧 자유함 아닐까. 맘껏 돈 벌 수 있는 자유와 맘껏 돈 쓸 수 있는 자유 중 어느 것에서 우린 더 자유함을 느낄까. 돈이 자유에 대해 가지는 힘은 어디까지일까. 돈이 없다면 진정한 자유가 가능할 수 있을까. 이를 단순히 자본주의 시대에 국한된 문제로 치부하고 축소시키진 말자. 오히려 인간 본성에 관련된 철학적인 질문으로 발전시켜 생각해 보자. 자유란 무엇인지. 혹시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타자의 반동적인 힘에 의한 만족으로부터 오는 행복에 국한된 느낌은 아닐지. 나의 자유를 위해선 누군가의 자유가 희생되어야 하는 건 아닌지. 그리고 결국 일해서 돈 벌 수 있는 자유보단 돈을 쓸 수 있는 자유에서 우린 진정한 자유함을 암묵적으로 느끼고 있진 않은지. 진지하게 한 번 생각해볼 문제일 것이다.
알렉산드르 뻬뜨로비치는 유형 생활에서 힘든 고통이 ‘자유의 박탈’과 ‘강제 노동’이라고 언급하고 있지만, 나중에 가서 깨닫게 된, 그 무엇보다 더욱 힘든 고통은 ‘강제적인 공동 생활’이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혼자 있을 수 없다는 것, 24시간 누군가와 함께 해야 한다는 것, 그것은 어쩌면 파괴적인 구속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리고 나는 일상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혼자 있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재발견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고립되고 단절된 삶은 곧 죽음을 의미하지만, 결코 혼자 있는 시간 없이는 사회적 동물로서 제대로 기능할 수 없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혼자 있을 수 있음은 곧 가장 기본적인 자유 중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지휘관들이 죄수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알렉산드르 뻬뜨로비치는 인권을 말한다. 사람들이 흔히들 오해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죄수들을 잘 먹여 주고, 잘 다루어서 모든 것을 법대로만 처리하면 만사가 끝이라고 믿는 것’이라고 일갈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은 누구나가 모두, 그가 모욕을 당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본능적으로든지 아니면 무의식적으로든지 자기의 인간적 가치에 대한 존중을 요구하는 것이다. 죄수 자신도 자기가 죄수라는 것을, 버림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간수 앞에서의 자기 위치도 알고 있다. 그러나 어떠한 낙인으로도, 어떠한 족쇄로도 그로 하여금 그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게 만들 수는 없다. 실제로 그는 인간이므로, 결국 그를 인간적으로 대하지 않을 수 없다.” (열린책들 3판, 177페이지에서 발췌)
그렇다. 어떤 죄를 짓고 그 댓가를 지불하기 위해 자유를 빼앗긴 채 감옥에서 살아야 한다고 해도 그 죄수는 여전히 인간이다. 그러나 죄를 지었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도덕적 가치를 부여한 뒤 그 사람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거나 혐오하게 된다면, 그 행위야말로 더 큰 죄를 짓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죄수는 감옥 생활로써 이미 그 댓가를 지불하고 있다. 이 점을 간과하면 안 된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말에서의 ‘모든’은 감옥에 갇힌 죄수도 포함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우리와 함께 숨쉬고 있는 여러 소수자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자유가 빼앗긴 감옥에서 얻은 이 깊은 인간 존중에 대한 깨달음. 지은 죄와 상관없이 인간은 인간이다. 이를 간과한다면 인간의 기본적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며, 중죄를 범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400 페이지 남짓한 분량의 이 작품은 위에서 언급한 사건과 주제 이외에도 많은 사실적인 유형수들의 생활을 묘사하고 있다. 알렉산드르 뻬뜨로비치는 그의 첫 1년과 마지막 1년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썼다. 특히 마지막 1년은 그 동안의 감옥 생활보다도 많은 혜택을 누렸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그의 떠남을 아쉬워하고 축하해주기도 했다고 기록했다. 여기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나의 26개월의 군생활에서 마지막 몇 달 동안 느꼈던 그 후련섭섭한 마음과 조금은 비슷하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그는 마지막 페이지에 와서 다음과 같은 하소연을 한다.
“이 벽 속에 얼마나 많은 젊음이 헛되이 매장되었으며, 여기에 얼마나 위대한 힘들이 덧없이 파멸해 버렸는가! 이제는 모든 것을 말해야만 한다. 실로 이 사람들은 비범한 인물들이었다. 어쩌면 이곳에 세상에서 가장 힘 있고 가장 유능한 사람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강력한 힘들이 덧없이 파멸해 갔다. 그것도 변칙적이고 불법적이며 되돌릴 수 없이 파멸해 갔다. 하지만 누구의 죄란 말인가? 정말로 누구의 죄인가?” (열린책들 3판 431-432페이지에서 발췌)
유형수들은 비록 법적인 절차를 거쳐서 각자가 지은 죄의 댓가를 치르기 위해 감옥에 모였지만, 과연 이 감옥 생활이 그들에게 적절한 조치였을까. 과연 그 조치로 인해 사회는 더 안전해지거나 나아졌을까. 혹시 알렉산드르 뻬뜨로비치가 외친대로, 오히려 사회에 필요한 사람들을 잃게 된 면도 많지 않을까. 그들을 감옥에 가둠으로써 얻은 것보다 잃은 게 혹시 더 많진 않을까. 감옥이란 도구를 이용하여 죄의 댓가로 자유를 빼앗는 행위는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일까.
많은 질문들이 쏟아지지만, 일괄적인 대답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경우에 따라 다를 것이 분명하고 사람이 사람을 판단하는 잣대가 어찌 객관적일 수 있겠는가. 다만, 나는 이 작품을 다 읽고 다시 서두를 들춰보며, 절망적인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다. 서두에서 ‘나’에 의해 기록된 알렉산드르 뻬뜨로비치의 고립되고 단절된 삶, 그리고 그의 외로운 죽음은 이 숱한 질문들에 대한 도스토예프스키의 암묵적인 답이자 그 제도에 대한 고발이 아닐까. 죄의 댓가는 과연 자유의 박탈로 상쇄될 수 있는 것일까. 어쩌면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의 유행 생활 후의 삶이 알렉산드르 뻬뜨로비치의 외롭고 단절된 삶으로 수렴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을 하고 있진 않았을까. 비록 우리가 알고 있는 그의 미래는 전혀 그렇지 않았지만 말이다.
도스토예프스키 읽기
1. 죄와 벌: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322765477768221
2. 백치: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381911478520287
3. 악령: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671867029524729
4. 미성년: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2791541264223971
5.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https://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236636616381098
6. 죽음의 집의 기록: 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311510975560328
7. 가난한 사람들: 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633890636655692
8. 도스토옙스키 (by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 www.facebook.com/youngwoong.kim.50/posts/3272627856115307
출처: https://rtmodel.tistory.com/1087 [흩어진 행복의 조각을 찾아서: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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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 사회적 범죄이자 실패
| 1849년, 표도르 도스토옙스키는 감옥방 벽에 다음과 같은 ' 사제와 악마' 이야기를 썼습니다 . 이 글은 50년 전 어두운 러시아에서 가장 끔찍한 감옥 중 하나의 벽에 쓰여졌습니다. 하지만 누가 같은 내용이 현재에도, 심지어 미국 감옥에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것을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자랑스러워하는 모든 개혁, 위대한 사회적 변화, 그리고 광범위한 발견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계속해서 최악의 지옥으로 보내지고, 그곳에서 그들은 폭행을 당하고, 굴욕을 당하고, 고문을 당합니다. 사회가 스스로 만든 유령으로부터 "보호"되기 위해서입니다. 감옥, 사회적 보호? 어떤 괴상한 정신이 그런 생각을 했을까요? 건강은 널리 퍼진 전염병에 의해 증진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스카 와일드는 18개월 동안 영국의 감옥에서 공포에 질려 세상에 그의 위대한 걸작, 독서의 발라드를 선보였습니다 . 사회는 이 유독한 공기를 계속해서 퍼뜨리고 있지만, 그 공기에서 가장 유독한 결과만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현재 감옥 시설을 유지하기 위해 하루에 3,500,000달러, 연간 1,000,095,000달러를 지출하고 있으며, 민주주의 국가에서 이는 밀 생산량의 합인 750,000,000달러와 석탄 생산량의 합인 350,000,000달러와 거의 비슷한 금액입니다. 워싱턴 DC의 부쉬넬 교수는 감옥 비용이 연간 6,000,000,000달러라고 추산했고, 범죄에 대한 저명한 미국 작가인 G. 프랭크 리드스톤 박사는 연간 5,000,000,000달러를 합리적인 수치로 제시했습니다. 야수처럼 우리에 갇힌 거대한 인간 군대를 유지하기 위한 전례 없는 지출! 1 그러나 범죄는 증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미국에서 20년 전보다 오늘날 100만 명의 인구당 4.5배나 많은 범죄가 발생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가장 끔찍한 측면은 남부처럼 강도, 횡령, 강간이 아니라 살인이라는 것입니다. 런던은 시카고보다 5배나 크지만, 시카고에서는 매년 118건의 살인이 일어나는 반면 런던에서는 20건에 불과합니다. 시카고는 범죄에서 선두 도시가 아닙니다. 4개의 남부 도시와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가 선두를 달리고 있는 목록에서 7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끔찍한 상황을 감안할 때, 교도소에서 사회 보호가 이루어진다고 떠드는 것은 터무니없는 짓으로 보입니다. 보통의 정신은 진실을 이해하는 데 느리지만, 가장 철저하게 조직되고 중앙집권화된 기관이 과도한 국가적 비용으로 유지되고 완전한 사회적 실패로 판명되면, 가장 둔한 사람도 그 기관의 존재 권리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가 "신의 권리에 의해 정해졌다"는 이유나 법의 위엄에 의해 정해졌다는 이유만으로 우리의 사회 구조에 만족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최근 몇 년 동안 교도소에서 광범위하게 이루어진 조사, 선동, 교육은 사람들이 사회의 가장 밑바닥, 사회와 개인 생활 사이의 끔찍한 불균형의 원인에 이르기까지 깊이 파고드는 법을 배우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그렇다면 왜 감옥은 사회적 범죄이자 실패일까요? 이 중요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범죄의 본질과 원인, 범죄에 대처하는 방법, 그리고 이러한 방법이 사회에서 범죄의 저주와 공포를 없애는 데 미치는 효과를 찾아야 합니다. 첫째, 범죄의 본질 에 대해 : Havelock Ellis는 범죄를 정치적, 열정적, 미친, 그리고 가끔씩의 네 가지 단계로 구분합니다. 그는 정치범은 다소 전제적인 정부가 자신의 안정을 유지하려는 시도의 희생자라고 말합니다. 그는 반드시 비사회적 범죄를 저지른 것은 아닙니다. 그는 단순히 반사회적일 수 있는 특정 정치 질서를 전복하려고 할 뿐입니다. 이 진실은 미국을 제외하고는 전 세계적으로 인정되고 있지만, 민주주의에서는 정치범을 위한 자리가 없다는 어리석은 관념이 여전히 만연합니다. 그러나 John Brown은 정치범이었습니다. Chicago Anarchists도 마찬가지였고, 모든 파업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하벨록 엘리스는 우리 시대나 지역의 정치범은 다른 시대의 영웅, 순교자, 성인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롬브로소는 정치범을 인류의 진보적 운동의 진정한 선구자라고 부릅니다. "감정에 의한 범죄자는 대개 건전한 출생과 정직한 삶을 가진 사람으로, 엄청난, 부당한 잘못에 대한 스트레스 속에서도 스스로를 위해 정의를 실현한 사람입니다." 2 휴 C. 위어(Hugh C. Weir)는 그의 저서 『경찰의 위협』 에서 격정적인 범죄자였던 짐 플라허티(Jim Flaherty)의 사례를 인용했는데, 그는 사회에서 구원받기는커녕 술주정뱅이이자 상습범으로 전락하여 결과적으로 가족이 파탄되고 빈곤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더 비참한 유형은 브랜드 휘틀록의 소설, 저울의 전환 에서 희생자로 등장하는 아치입니다 . 이 소설은 범죄를 저지르는 미국의 가장 위대한 폭로입니다. 아치는 플라허티보다 더 잔인한 비인간성으로 인해 범죄와 죽음으로 내몰렸고, 법률 체계를 무자비하게 핍박했습니다. 아치와 플라허티는 수천 명의 유형 중 일부에 불과하며, 범죄의 법적 측면과 이를 다루는 방법이 어떻게 우리의 사회 생활 전체를 훼손하는 질병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되는지 보여줍니다. "미친 범죄자는 실제로 어린아이보다 범죄자로 간주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유아나 동물과 같은 정신적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3 법은 이미 그것을 인정하지만, 매우 노골적인 성격의 드문 경우나 범인의 재산이 범죄적 광기의 사치를 허락할 때에만 그렇습니다. 편집증의 희생자가 되는 것이 꽤 유행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정의의 주권"은 여전히 그 권력의 모든 심각성으로 범죄적 광인을 처벌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엘리스 씨는 리히터 박사의 통계를 인용하여 독일에서 144명의 범죄적 광인 중 106명의 광인이 중형을 선고받았다고 보여줍니다. 가끔씩 범죄자가 "우리 교도소 인구의 가장 큰 계층을 대표하므로 사회 복지에 가장 큰 위협이 됩니다." 인류의 광대한 군대가 범죄를 저지르고 감옥 벽 안의 흉측한 삶을 외부의 삶보다 선호하게 만드는 원인은 무엇일까요? 확실히 그 원인은 희생자에게 탈출구를 남기지 않는 철의 주인이어야 합니다. 가장 타락한 인간도 자유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 엄청난 힘은 우리의 잔인한 사회적, 경제적 배열에 의해 조건지어집니다. 저는 범죄를 만드는 생물학적, 생리학적 또는 심리적 요인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사회적, 경제적 영향이 범죄의 가장 무자비하고 가장 독한 세균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진보된 범죄학자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선천적인 범죄적 경향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경향이 우리의 사회적 환경에서 풍부한 영양을 얻는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벨록 엘리스는 사람에 대한 범죄와 알코올 가격, 재산에 대한 범죄와 밀 가격 사이에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케틀레와 라카사뉴를 인용하는데, 전자는 사회를 범죄의 준비자로, 범죄자는 범죄를 처형하는 도구로 봅니다. 후자는 "사회적 환경은 범죄의 배양 매체이며, 범죄자는 미생물이며, 이 미생물은 그것을 발효시키는 매체를 찾을 때에만 중요해집니다. 모든 사회에는 그에 합당한 범죄자가 있습니다 ." 4 가장 "번영하는" 산업 시대는 노동자가 건강과 활력을 유지할 만큼 충분히 벌 수 없게 만듭니다. 그리고 번영은 기껏해야 상상의 상태에 불과하기 때문에, 수천 명의 사람들이 끊임없이 실업자 무리에 추가됩니다. 동서로, 남과 북으로, 이 광대한 군대는 일이나 음식을 찾아 떠돌아다니며, 그들이 찾는 것은 구빈원이나 빈민굴뿐입니다. 자존심의 불꽃이 남아 있는 사람들은 노골적인 저항을 선호하고, 빈곤의 쇠약하고 타락한 지위보다는 범죄를 선호합니다. 에드워드 카펜터는 기소 가능한 범죄의 6분의 5가 재산권 침해로 구성되어 있다고 추정하지만, 이는 너무 낮은 수치입니다. 철저한 조사를 통해 10건 중 9건의 범죄가 직간접적으로 우리의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 무자비한 착취와 강도 시스템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끔찍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범죄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설명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Havelock Ellis, Lombroso 및 기타 저명한 사람들이 편찬한 범죄 철학 모음은 범죄자가 사회가 자신을 범죄로 몰아간다고 너무나 예민하게 느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밀라노의 한 도둑이 Lombroso에게 말했습니다. "저는 도둑질하지 않습니다. 저는 단지 부자들에게서 그들의 잉여 재산을 빼앗을 뿐입니다. 게다가 변호사와 상인들도 도둑질하지 않습니까?" 한 살인자는 "사회적 미덕의 4분의 3이 비겁한 악덕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부자를 공개적으로 공격하는 것이 사기를 조심조심 조합하는 것보다 덜 비열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라고 썼습니다. 다른 사람은 "저는 계란 6개를 훔쳐서 감옥에 갇혔습니다. 수백만 달러를 훔친 장관은 존경을 받습니다. 불쌍한 이탈리아!"라고 썼습니다. 교육받은 죄수 한 명이 데이빗 씨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회의 법은 권력과 계산에 세계의 부를 보장하고, 그로 인해 인류의 더 많은 부분이 권리와 기회를 박탈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그들이 권리 이상을 빼앗은 사람들로부터 비슷한 수단으로 빼앗은 것에 대해 왜 저를 처벌해야 합니까?" 같은 사람이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종교는 영혼의 독립성을 빼앗습니다. 애국심은 세상에 대한 어리석은 숭배이며, 그로 인해 이익을 얻는 사람들이 주민들의 안녕과 평화를 희생하는 반면, 자연적 욕망을 억제하는 땅의 법은 우리 존재의 법의 명백한 정신에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와 비교하면" 그는 결론지었습니다. "도둑질은 명예로운 추구입니다." 5 분명히 이 철학에는 사회의 모든 법과 도덕에 관한 책보다 더 큰 진실이 담겨 있습니다. 경제적, 정치적, 도덕적, 물리적 요인이 범죄의 미생물인데, 사회는 이 상황에 어떻게 대처합니까? 범죄에 대처하는 방법은 의심할 여지 없이 여러 차례 변화를 겪었지만, 주로 이론적 의미에서 그렇습니다. 실제로 사회는 범죄자를 다루는 데 있어 원초적인 동기, 즉 복수를 유지해 왔습니다. 또한 신학적 사상, 즉 처벌을 채택했으며, 합법적이고 "문명화된" 방법은 억제 또는 테러와 개혁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곧 네 가지 모드가 모두 완전히 실패했으며, 오늘날 우리는 암흑 시대보다 해결책에 더 가까워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원시인이 반격하고 잘못을 복수하려는 자연스러운 충동은 시대에 뒤떨어졌습니다. 대신, 용기와 대담함을 잃은 문명인은 국가가 더 이상 남성성이나 일관성이 없는 일을 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믿는 어리석은 믿음 속에서 자신의 잘못을 복수하는 의무를 조직된 기계에 위임했습니다. 법의 위엄은 이성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원시적 본능에 굴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사명은 "더 높은" 본질입니다. 사실, 그것은 여전히 정화의 수단 또는 죄의 대리적 속죄로서 처벌을 선포하는 신학적 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그러나 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법령은 단순히 범죄자에게 고통을 가하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무서운 효과를 미치기 위해 처벌을 행사합니다. 하지만 형벌의 진짜 근거는 무엇일까요? 자유의지라는 개념, 즉 인간은 언제나 선과 악에 대한 자유로운 행위자라는 생각입니다. 후자를 선택하면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이 이론은 오래전에 폭발하여 쓰레기 더미에 던져졌지만, 정부 전체 기구에서 매일 적용되면서 인간 삶에 가장 잔인하고 잔혹한 고문이 되었습니다. 이 이론이 지속되는 유일한 이유는 공포스러운 형벌이 퍼질수록 예방 효과가 더 확실해진다는 훨씬 더 잔인한 개념 때문입니다. 사회는 사회적 범죄자를 다루는 데 가장 과격한 방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왜 억제하지 않을까요? 미국에서는 유죄 판결이 날 때까지는 무죄로 간주되어야 하지만, 법의 도구인 경찰은 무차별 체포, 구타, 곤봉질, 괴롭힘, "3급"이라는 야만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불행한 희생자들을 경찰서의 더러운 공기와 보호자의 더욱 더러운 언어에 노출시키는 등 공포의 통치를 계속합니다. 그러나 범죄는 빠르게 증가하고 있으며 사회는 그 대가를 치르고 있습니다. 반면에 불행한 시민이 법의 완전한 "자비"를 받고 안전을 위해 최악의 지옥에 숨었을 때 그의 진정한 갈보리가 시작된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입니다.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박탈당하고, 의지와 감정이 없는 단순한 기계 장치로 전락하여 잔혹한 관리인의 자비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된 그는 매일 비인간화 과정을 겪습니다. 그에 비하면 야만적인 복수는 순전히 어린애 장난에 불과합니다. 미국에는 "선행을 위해" 곤봉, 곤봉, 속박, 물 치료, "벌새"(인간의 몸을 따라 움직이는 전기 장치), 독방, 투우장, 단식 등의 수단을 통해 고문을 받지 않는 형무소나 교도소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이러한 시설에서 그의 의지는 꺾이고, 그의 영혼은 타락하며, 그의 정신은 감옥 생활의 치명적인 단조로움과 일상에 의해 제압됩니다. 오하이오, 일리노이, 펜실베이니아, 미주리, 그리고 남부에서 이러한 공포는 너무 노골적이 되어 외부 세계에까지 영향을 미쳤지만, 대부분의 다른 감옥에서는 여전히 동일한 기독교적 방법이 널리 퍼져 있습니다. 그러나 감옥 벽은 희생자들의 고통스러운 비명소리가 빠져나가는 것을 거의 허용하지 않습니다. 감옥 벽은 두껍고 소리를 흐리게 합니다. 사회는 이러한 20세기의 공포의 방으로부터 보호를 바라는 것보다 모든 감옥을 한꺼번에 폐지하는 것이 더 큰 면역이 될 수 있습니다. 해마다 지옥의 감옥 문이 세상에 돌아온다. 쇠약하고, 기형이고, 의지가 없고, 난파된 인류의 승무원들이 이마에 카인의 표식을 하고, 희망은 무너지고, 모든 자연적 성향은 좌절되었다. 그들을 맞이할 것은 굶주림과 비인간성뿐인 이 희생자들은 곧 존재의 유일한 가능성인 범죄로 다시 빠져든다. 반평생을 감옥에서 보낸 남녀를 찾는 것은 전혀 드문 일이 아니다. 아니, 거의 평생을 감옥에서 보냈다. 블랙웰 섬에 있는 한 여성을 알고 있는데, 그녀는 38번이나 드나들었다. 그리고 한 친구를 통해 피츠버그 교도소에서 간호하고 돌보았던 열일곱 살의 어린 소년이 자유의 의미를 전혀 몰랐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교도소에서 교도소로 가는 것이 이 소년의 삶의 길이었는데, 몸이 부서져 사회적 복수의 희생자로 죽었다. 이러한 개인적인 경험은 감옥이 억제 또는 개혁 수단으로서 완전히 무익하다는 것을 압도적으로 증명하는 광범위한 데이터에 의해 입증됩니다. 선의의 사람들은 이제 감옥 문제에서 새로운 출발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즉, 수감자에게 인간이 될 가능성을 다시 한 번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칭찬할 만한 일이기는 하지만, 곰팡이 낀 병에 좋은 와인을 붓는 것에서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없을까 두렵습니다. 사회를 완전히 재건하지 않는 한 인류를 범죄라는 암으로부터 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우리 사회적 양심의 둔한 날이 날카로워진다면, 형벌 기관에 새로운 광택을 입힐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취해야 할 첫 번째 단계는 다소 황폐해진 상태인 사회적 의식을 혁신하는 것입니다. 범죄는 정도의 문제이며, 우리 모두는 정신적, 신체적, 사회적 환경에 따라 다소간 범죄의 기초를 가지고 있으며, 개별 범죄자는 단지 집단의 경향을 반영한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슬프게도 필요합니다. 사회적 의식이 깨어나면, 평균적인 개인은 법의 사냥개가 되는 "명예"를 거부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사회적 범죄자를 핍박하고, 멸시하고, 불신하는 것을 멈추고, 그에게 동료들과 어울리며 살아갈 기회를 줄 수도 있습니다. 물론 기관은 도달하기 어렵습니다. 기관은 차갑고, 뚫을 수 없고, 잔인합니다. 하지만 사회적 의식이 활성화되면 감옥 희생자들을 감옥 관리, 경비원, 간수의 잔혹함에서 해방시킬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여론은 강력한 무기입니다. 심지어 인간 먹이의 간수조차도 여론을 두려워합니다. 그들은 약간의 인간성을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자신의 일이 여론에 달려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조치는 수감자에게 감옥에 있는 동안 일할 권리를 요구하는 것과 함께, 석방되는 날, 새로운 삶을 시작할 때를 대비해 돈을 조금 따로 모아둘 수 있는 금전적 보상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노동자, 즉 임금 노예가 죄수 노동에 반대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현재 사회에서 많은 것을 기대하는 것은 거의 터무니없는 일이다. 나는 이 반대의 잔혹함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지만, 단지 그것이 실행 불가능하다는 점만 고려할 것이다. 우선, 지금까지 조직 노동이 제기한 반대는 풍차에 대한 것이었다. 죄수들은 항상 일해 왔다. 오직 국가만이 그들을 착취했고, 개별 고용주는 조직 노동을 약탈했다. 주들은 죄수들을 정부를 위해 일하게 했거나, 죄수 노동을 개인에게 팔았다. 29개 주가 후자의 계획을 추구한다. 연방 정부와 17개 주는 그것을 버렸고, 유럽의 주요 국가들도 그랬다. 왜냐하면 그것이 죄수들의 끔찍한 과로와 학대, 끝없는 뇌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올드리치가 지배하는 로드아일랜드는 아마도 최악의 사례를 제공할 것입니다. 1906년 7월 7일에 작성된 5년 계약에 따라, 민간 계약자의 선택에 따라 5년 더 연장할 수 있는 로드아일랜드 교도소와 프로비던스 카운티 교도소 수감자의 노동력은 1인당 1일 25센트도 안 되는 가격으로 Reliance-Sterling Mfg. Co.에 매각되었습니다. 이 회사는 실제로 거대한 교도소 노동 신탁으로, 코네티컷, 미시간, 인디애나, 네브래스카, 사우스다코타 교도소의 죄수 노동력과 뉴저지, 인디애나, 일리노이, 위스콘신의 교도소, 총 11개 시설의 죄수 노동력도 임대합니다. 로드아일랜드 계약에 따른 뇌물의 엄청난 규모는 이 회사가 네브래스카에서 죄수의 노동에 대해 하루에 62 1/2센트를 지불하고, 예를 들어 테네시가 Gray-Dudley Hardware Co.에서 죄수의 노동에 대해 하루에 1.10달러를 받고, 미주리가 Star Overall Mfg. Co.에서 하루에 70센트를 받고, 웨스트버지니아가 Kraft Mfg. Co.에서 하루에 65센트를 받고, 메릴랜드가 셔츠 제조업체인 Oppenheim, Oberndorf & Co.에서 하루에 55센트를 받는다는 사실에서 추정할 수 있습니다. 가격의 차이 자체가 엄청난 뇌물을 나타냅니다. 예를 들어 Reliance-Sterling Mfg. Co.는 셔츠를 제조하는데, 무료 노동 비용은 12개당 최소 1.20달러인 반면, 로드아일랜드에는 12개당 30센트를 지불합니다. 게다가, 국가는 이 신탁에 거대한 공장 사용료를 청구하지 않고, 전기, 난방, 전기, 심지어 배수에 대한 요금도 청구하지 않으며, 세금도 부과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큰 뇌물인가! 이 나라에서 매년 1,200만 달러 상당의 작업용 셔츠와 작업복이 교도소 노동으로 생산된다고 추산됩니다. 그것은 여성의 산업이며,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엄청난 양의 무료 여성 노동이 이렇게 대체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고려 사항은 석방 후 자립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직업을 배워야 할 남성 수감자들이 돈을 벌 수 없는 이 일에 계속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이 노동의 대부분이 교도소에서 이루어지고, 수감자들이 유용한 시민이 되도록 훈련한다고 큰 소리로 주장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더욱 심각합니다. 세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고려 사항은 죄수 노동으로 이렇게 짜낸 엄청난 이익이 계약자들에게 불행한 희생자들에게 자신들의 능력을 넘어서는 일을 강요하고, 그들이 요구한 과도한 요구에 부응하지 못할 경우 잔인하게 처벌하는 끊임없는 동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석방 후 생계를 유지할 수 없는 일을 하도록 죄수들을 정죄하는 것에 대한 또 다른 단어. 예를 들어 인디애나는 현대 형벌학 개선의 선두에 서는 데 큰 돈을 쓴 주입니다. 그러나 "교도소"의 훈련 학교에서 1908년에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135명이 사슬 제조에 종사했고, 207명이 셔츠 제조에 종사했으며, 255명이 주조에 종사했습니다. 총 597명이 세 가지 직업에 종사했습니다. 그러나 이 소위 교도소에서 수감자는 59개 직업을 대표했으며, 그 중 39개는 시골 활동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인디애나는 다른 주와 마찬가지로 교도소 수감자들에게 석방 후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직업을 훈련시키고 있다고 공언합니다. 그녀는 실제로 그들에게 사슬, 셔츠, 빗자루를 만드는 일을 시켰는데, 후자는 Louisville Fancy Grocery Co.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 빗자루 만들기는 맹인이 독점하는 무역이고, 셔츠 만들기는 여성이 하며, 주에는 무료 사슬 공장이 하나뿐이고, 그 공장에서 풀려난 죄수는 일자리를 구할 희망이 없다. 이 모든 것은 잔인한 희극이다. 그렇다면 국가가 무력한 희생자들에게서 엄청난 이익을 빼앗는 데 도구가 될 수 있다면, 조직 노동이 헛소리를 멈추고 죄수들에게 합당한 보수를 요구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요? 노동 조직이 스스로를 위해 주장하듯이요? 그런 식으로 노동자들은 죄수를 노동의 이익에 대한 적대자로 만드는 세균을 죽일 것입니다. 저는 다른 곳에서 수천 명의 죄수들이 무능하고 직업도 없고 생계 수단도 없이 매년 사회 계층으로 돌아간다고 말했습니다. 이 남자들과 여자들은 살아야 합니다. 전과자조차도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감옥 생활은 그들을 반사회적 존재로 만들었고, 그들이 풀려날 때 그들을 맞이하는 엄격하게 닫힌 문은 그들의 괴로움을 줄일 가능성이 없습니다. 피할 수 없는 결과는 그들이 파업파괴자, 흑족, 형사, 경찰이 끌려가는 유리한 핵심을 형성하고, 그들은 주인의 명령을 기꺼이 따르기만 합니다. 따라서 조직 노동은 감옥에서의 일에 대한 어리석은 반대를 통해 자신의 목적을 무너뜨립니다. 그것은 경제적 개선을 위한 모든 시도를 억누르는 유독한 연기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됩니다. 노동자가 이러한 효과를 피하고 싶다면, 그는 죄수의 일할 권리를 주장해야 하고, 그를 형제처럼 만나고, 그의 조직에 데려가고, 그의 도움으로 둘 다 괴롭히는 시스템에 맞서야 합니다 . 마지막으로,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확정형의 야만성과 부적절함에 대한 점점 더 큰 깨달음이 있습니다. 변화를 믿고 진지하게 변화를 목표로 하는 사람들은 인간에게 보상할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는 결론에 빠르게 도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앞으로 10년, 15년, 20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을 때 어떻게 그것을 할 수 있겠습니까? 자유와 기회에 대한 희망은 삶, 특히 수감자의 삶에 대한 유일한 동기입니다. 사회는 그에게 오랫동안 죄를 지었습니다. 적어도 그에게는 그렇게 놔두어야 합니다. 저는 그것이 일어날 것이라고 확신하지 못하며, 수감자와 간수를 낳는 조건이 영원히 폐지될 때까지 그 방향으로 실제적인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 1 범죄와 범죄자들 . WC 오웬. 2 범죄자 . 하벨록 엘리스. 3 범죄자 . 4 범죄자 . 5 범죄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