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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정은 다 다르지만 머리스타일은 모두 동일한 병마용의 병사들 |
장안으로 불리던 옛도읍지 서안(西安),
2005년 11월 중국언론에 진경원(陳景元)이라는 중국인이 병마용은 진시황과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기사가 실렸다.
진씨는 1974년 병마용이 발견됐다는 소식을 접하기 전까지 건축전문가로서 진시황릉에 대한 관심과 전문가적 소양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병마용이 발견된 후 그 장소가 고대황릉이 대체로 남북방향인데 비해 '병마용'은 진시황릉 동쪽에 있고 풍수지리적으로 어울리지 않는 곳에 진시황의 매장무덤이 있다는 점에 진씨는 최초의 의문을 품었다.
"병마용이 고대의 룰과 달리 진시황릉의 동쪽방향에 있다는 것"
궁금증을 품고 있던 진씨는 1976년 서안을 찾아을 때, 서안 박물관 담당자에게서 병마용이 진나라 통일 후 10여년 지난 후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의아해했다.
▲세월은 흘렀어도 붉은 빛을 그대로 간직한 병마용의 병사들 |
병마용을 자세히 관찰한 진씨는 병사들의 복장양식과 마차바퀴가 진시황시대 것이 아니라는 의심을 품었다. 진시황은 통일 후 중앙집권 통치를 위해 옷색깔을 흑색으로 통일했는데, 출토된 병사들의 옷색깔은 전체적으로 빨강색과 녹색의 전투복에다 자주빛 남색의 바지차림이라는 것.
이는 진시황의 엄명을 어긴 처사라 볼 수 있으며 따라서 병마용은 진시황 당시와 현저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고 진씨는 판단했다. 가만히 살펴보면, 그의 주장대로 병사들의 옷이 검은 색은 아닌 것 같다.
진씨는 또 마차바퀴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갱내를 조사한 결과, 마차의 바퀴형태가 서로 다 달랐다. 진씨는 이 역시 병마용이 진시황과 무관하다는 증거라고 판단했다. 진시황은 통일 이전에 이미 진나라 영토 내에서 차동궤(車同軌) 바퀴가 아니면 통행 자체가 불가능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통일 후엔 모든 마차 바퀴를 하나로 동일하게 사용하도록 명령한 진시황이 어째서 자신의 무덤에 부하들 맘대로 바퀴를 만들도록 윤허했단 말인가. 진씨의 의문이다.
진씨는 1974년 3월 24일 이지역 농민이 밭을 갈다가 병마용을 발견한 뒤 고고학자들이 이 유물을 진시황릉 건축의 일부분이라고 너무 결정을 빨리 내렸다고 주장한다. 진씨는 또한 그해 5월께 진시황릉에서 진나라 시대 무사들의 무덤이 출토됐다고 보도한 <신화사>도 그 이유를 상세하게 설명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진씨에 따르면, 이 보도를 중시한 당시 모택동과 주은래 등 중국 지도자들이 국가문물국에 병마용을 보존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지시하자마자 중국사회과학원의 전문가단이 재빨리 현장을 조사한 후 주위에 진시황릉 외에는 대형 무덤이 없다는 이유를 근거로 병마용의 주인을 진시황으로 단정해 버렸다는 것.
이에 대해 진씨는 왜 황릉과 멀리 떨어진 곳에 순장품이 있는지에 대한 의문도 제기되지 않았고 병마용에 대한 충분한 과학적 조사도 없이 결론이 내려졌다며 그 과정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진씨는 과학적이고 학술적이 아닌 정치적인 판단이 작용했다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진씨는 당시 문화대혁명의 막바지였던 중국에서는 병마용 발굴을 중앙집권의 상징이던 진시황과 연계할 필요가 있었으며 이를 실제 주도한 사람은 당시 권력의 중심에 있으면서 문화부문을 장악하고 있던 강청(모택동의 부인)이라고 믿고 있다.
진씨는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일생을 바쳤다. 진씨는 자료를 수집해 "병마용의 주인은 진시황이 아니다"라는 제목으로 중국사회과학원 간행물에 기고하기도 했으나 누구로부터도 동조받지 못했다.
1984년에는 스스로 조사연구한 결과를 토대로 병마용'의 진짜 주인은 진시황 이전 시대에 재위한 진나라 소왕의 생모인 진 선태후(秦 宣太后)라고 주장했다. 진씨는 진 선태후가 병마용 출토지역과 지리적으로 아주 가까운 곳에 안장됐다고 역사자료에 기록돼 있으며 <사기>에 따르면 진 선태후가 초나라 사람이었기에 '병마용'의 머리스타일과 옷색깔 등이 진나라가 아닌 초나라의 그것과 일치한다고 주장했다.
기원전 306년 진 소왕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섭정했던 선태후가 임종이 가까워지자 순장을 지시했으나 진소왕은 순장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아 사람들의 모양을 그대로 빚어 조각한 채 순총(殉俑)했다는 주장이다. 전리품을 가득 실은 마차를 통해 생모가 평생 돌아가고자 하던 고향인 초나라로 귀향하는 의미를 상징적으로만 담았다는 것.
진씨의 이런 주장은 아무에게도 주목받지 못하고 잊혀졌다가 지난해 말부터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역사는 역사답게 무게가 있어야 한다. 중국인들에게 최초의 통일국가의 '영웅'으로 묘사되는 진시황에겐 또 하나의 세계적 불가사의인 만리장성이 있다. 병마용의 진짜 주인이 진시황이 아니라 다른 사람인 것으로 확정되더라도 진시황은 아쉬울 게 없지 않은가. 13억 중국인 중 한 사람일 뿐인 진씨가 평생을 바쳐 노력한 것이 진정 진실에 가까운 것인지는 역사만이 알 것이다.
[펌]☞서안 병마용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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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병마용은 진시황과 무관한가?
병마용(兵馬俑)은 진시황(秦始皇)과 무관한가?
진경원(陳景元)은, 병마용의 주인은 진시황이 아니고, 그의 선조 진선태후(秦宣太后)라고 주장한다.
진경원은 올해 69세이다. 고고학계의 권위자도 아니고, 역사학자도 아니다. 그는 단지 건축학 쪽의 학자이고, 퇴직전에는 강소성 국토국에서 근무하였다. "거대한 진릉의 건설은 전부 건축학의 일이다. 지하궁전의 구조, 시공방법, 토목운수 및 능묘건축의 레이아웃, 주축선의 방향등 건축학전공을 벗어나서는 성립하기 힘들다"
의문점,
첫째, 병마용의 발견지점은 진시황의 능과 거리가 너무 멀다. 이것은 진경원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의문점이다. 공개된 자료를 보면, 진시황릉의 면적은 56.25평방킬로미터이고, 주위에는 병마용을 포함하여 여러곳에서 발견된 진시황의 배장품이 포함되어 있다.
"진시황릉은 정말 그렇게 큰가?" 진경원은 의문을 품는다...
...중략....
....우광원은 일찌기 그를 격려한 바 있다. "학술연구는 민주집중제로 할 수 없고, 더구나 소수는 다수에 따라야 하는 것도 아니다" 이 말은 계속하여 진경원을 격려하여왔다.
[펌]☞병마용은 진시황과 무관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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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마용의 주인은 진시황이 아니다.(1)(펀글) 옮긴이: 박달
이글은 차이니즈나이트,(저자:강효백)이라는 중국인 이야기책에서 저자 허락없이 펀글입니다.
대륙고려사(http://ginsengchicken.com/history/)게시판에서 아리랑님이 쓰신 글입니다.
진시황릉에서 남동쪽으로 1.5킬로미터 떨어진 지점 지하 4~5미터에서 발굴된 병마용은 진시황릉 동쪽끝을 보위하는 동부순위대로 추정, 발표됐다. 발견 당시부터 병마용은 전차전의 전투대형으로 배치되어 있었고 실물크기의 진흙으로 만든 상과 말은 아주 섬세하게 만들어졌다. 모두 6천여개쯤 되었다.
지금까지 모두 3호갱이 발견되었는데 1호갱은 거대한 돔으로 덮인 것으로 신장 178~187센티미터 크기의 병사가 3열종대로 늘어선 병마용과 40여승의 목조전차가 안치되어 있다. 1호갱보다 규모가 작은 2호갱의 병마용은 주력부대를 보조하는 부대일 것이다. 제일 작은 3호갱은 서로 머리를 맞대고 도로 양측에 정렬해 있어 경호부대로 보이는데 그곳에서는 사슴뿔, 짐승뼈 등이 출토되었다.
1984년 당시 시안대학 고고학과 주임교수였던 천징웬은 학술잡지, 대자연탐구, 겨울호에서 "병마용의 주인은 진시황이 아니다" 라고 주장하는 논문을 발표해 중국천하를 깜짝 놀라게 했다.
첫번째, 병마용의 군진은 진시황 당시의 군진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띄고 있다. 1호, 2호갱에서 병사들은 전차를 중심으로 사열하고 있는 모습인데 사기, 문헌통보, 회남자 등의 사료를 비롯한 거의 모든 고전은 진시황이 기동력이 강한 기병을 활용하여 천하를 통일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진시황 당시 차전을 벌렸다는 역사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병마용의 군진은 진시황이 진을 통일하던 시대 이전의 것이라고 할 것이다.
두번째, 병마용의 병사들은 각양각색의 머리모양을 하고 있다. 일부는 모자까지 쓰고 있으나 전쟁 필수픔인 투구를 쓴 병마용은 볼 수없다. 이것으로 보아도 병마용은 적진을 향애 진격하는 군대가 아님은 물론, 진시황을 경호하는 호위대로 보기에도 병사들의 차림새가 허술하다.
세번째, 진시황이 기원전 221년 천하통일을 이룩한후 내린 첫번째 조치는 그간 개인적으로 소장해온 청동기를 전부 회수한다는 명령이었다. 그후 6국으로부터 수도로 운송한 후 무게가 각기 24만근 되는 동상을 12개나 주조했다. 진시황은 청동기를 전부 거둬들이면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싶어도 일으키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아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청동기를 소장하는 자는 극형에 처했다. 그렇다면 2호 갱내의 청동으로 된 80량의 전차는 누가 감히 황명을 어기고 제조하고 또 순장까지 했겠는가?
네번째, 병마용의 색깔은 진시황의 터부를 위반하고 있다. 진시황은 검은색을 통일제국의 색깔로 정하고 의복, 깃발, 휘장에 전부 검은색을 사용할 것을 규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마용 병사들은 진한 빨간색, 진한 녹색 도포와, 파란색, 보라색, 흰색 등 화려한 긴바지를 입고 있는게 이상하다.
다섯번째, 병마용에서 출토된 도끼와 병마용의 모자와 여성처럼 쪽진 머리모양, 병마용에 새겨진 문자를 연구한 결과 전국시대 초나라 풍속과 많은 유사점을 발견했다. 이어 천징웬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병마용의 주인은 진나라 28대 소왕의 모친, 즉 진시황의 고조할머니인 진선태후이며 (진선태후는 진소왕 시기에 41년동안이나 섭정을 한 여걸로 후세사람은 그녀를 진나라의 측전무후로까지 부르고 있다), 병마용은 진선태후의 유해를 그녀의 고향 초나라으로 운구하는 행렬이다.
천징웬의 주장은 1984년 병마용 발견 10주년 학술토론회에서 전문가와 학자들로부터 십자포화를 맞고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저명한 진.한시대연구 전문사학자 임검명은 1985년에 발간된 학술지, 문박제 1기에서, 진용지미, 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면서 아래 두가지 이유를 들어 천교수의 주장에 부분적 지지를 보낸 적이 있었다.
"병마용이 진시황릉의 일부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결정적 문헌자료는 아직까지 발견못했다."
"병마용에서 출토된 병기 대부분은 청동기인데, 이것은 철제무기를 보편적으로 널리 사용하던 진시황 당시의 야금기술 수준과 부합하지 않는다.
병마용의 주인은 진시황이 아니다.(2)(펀글) 박달
앞글에 이어 문제점을 계속 짚어보면,
첫번째, 사마천의 사기에서 사마천이 그렇게 몰두해쓴 '진시황본기'인데 병마용에 관해서는 단 한구절의 기록도 찾아볼 수 없는게 납득이 잘 가지 않는다. 사기 외에 회남자, 문헌통보 등 중국의 웬만한 고서란 고서를 전부 헤집어보아도 마찬가지다.
두번째, 병마용 양측에도 우리나라 경주의 신라고분만큼 큰 고분이 2기가 있다. 저 2기와 병마용의 관계는?
세번째, 진시황릉은 세계최대 쿠푸왕 피라미드보다 10배이상 크고 넓다. 병마용 6천개가 아니라 6천만개를 묻어두어도 남을만큼 광활한 진시황릉을 그대로 놔두고 1.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묻어둘 필요가 있을까? 또한 진시황릉에서 병마용부근까지 1.5킬로미터 외곽으로 더 나아가 거기서 원을 그려 산출되는 총면적은 19.925킬로미터로 1999년 12월 중국이 포르투갈로부터 회수한 마카오 면적보다 넓다. 만일 그렇다면 진시황릉은 야산이 아니라 가히 산맥이라 할 수 있다. 설사 진시황릉이 중국 천하가 아니라 지구 전체를 통일했다 하더라도 황릉이 마카오보다 더 넓어야 했을까?
네번째, 순장이나 부장품은 능원 안에 있지, 능원 밖에서 발견된 예는 중국의 공간과 시간에서 단 한건도 없다. 어떠한 순장이나 부장품도 능원에서 5리나 떨어진 지하에 묻어둔 적이 없다. 최근 1999년 9월28일 일반인에 개방된 시안의 한양릉의 도용과 장쑤성 쉬저우의 한양묘의 병마용도 전부 능원안에 있다.
다섯번째, 병마용 발견 당시 중국당국은 병마용이 기껏해야 진시황릉원의 동쪽 끝을 보위하는 동순위대애 해당한다고 발표하고 난 후에 부지런히 진시황릉 주변 4방을 발굴해 왔다. 그러나 나머지 남서북순위대의 발굴은 실패하고 말았다. 병마용의 주인이 정말 진시황이라면 유사이후 동서남북 4방을 다함께 중시해온 중국이 동쪽에만 병마용을 묻어두었을 리 없다.
여섯번째, 병마용의 정확한 위치는 진시황릉의 정동쪽이 아니라 남동쪽에 있다는 점이다. 진선태후의 고향 초나라는 진나라의 남동쪽에 있다.
일곱번째, 당시 진나라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사람과 가축을 산채로 옹관에 넣어 순장하는게 주된 풍습이었다. 더구나 사서도 증언하고 있듯이 진시황은 '분서갱유'시 수백명의 유생을 생매장한 것도 모자라 만리장성, 아방궁, 진시황릉을 건설한 노역자 수만명을 산채로 파묻어버린 '생매장'방면에 자타가 공인하는 위인이다. 그런 진시황이 자비심을 발휘해서 순장 대신 그토록 많은 도용을 파묻을 필요가 있었겠는가라는 의문점이다.
중국역사상 순장의 악습은 하, 은나라대 왕후장상들의 보편적인 장례습속이었으나 주나라 시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순장은 춘추전국시대의 진, 송 형국 등 주로 중국 회수 이북에 위치했던 나라에서는 여전히 성행하고 있었다. 그 반면 회수 이남의 초, 월, 오 등에서는 순장 대신 도용,목각,옥기등 각종 부장품을 매장했다. 도용은 순장의 폐단을 피하기 위해 살아있는 사람과 가축들의 대용품으로 고안된 것이다. 따라서 위의 순장에 관한 중국역사와 진선태후가 초나라 사람이었다는 사실과도 맞아 떨어진다.
그런데 1990년대 이후에 나오는 중국사료에는 '진시황 병마용'대신 '진시대에 만들어진 도용"이라는 뜻의 "진용(秦俑)"이라고 적는 예가 부쩍 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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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상투에 대하여
상투에 대한 검색 결과. 2006.12.01
한국인이 상투를 한 시기는 매우 오래전부터로 B.C. 3C의 기록인 《삼국지》에는 위만이 조선에 들어 올 때 “상투를 하고 왔다”고 하였고, 《증보문헌비고》에는 “단군 元年에 나라 사람들에게 머리 빗는 법을 가르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상투를 한 모습은 고구려 (B.C. 37 ∼A.D. 668)의 고분 벽화에서 볼 수 있는데 작은 상투를 하고 관모를 쓴 귀족과 관모를 쓰지 않고 크게 상투를 올린 장사도를 볼 수 있다. 이 상투머리는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계속 행해졌다. 고려시대의 《고려도경》에서는 “왕 이하 서민에 이르기까지 속발(束髮)을 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속발은 상투를 설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여러 초상화나 풍속화를 통하여 계층을 막론하고 상투 튼 모습을 볼 수 있다.
*출처: http://www.koreandb.net/dictionaries/Viewframe.aspx?id=2114
신라에 있어서도 경주 금령총(金鈴塚) 출토의 도기로 만들어진 기마인물에 상투가 잘 나타나고 있다. 백제에서는 아직 뚜렷한 자료가 발견되고 있지는 않지만, 삼국 공통의 풍습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들 관모는 모두 상투 위에 쓰기에 적합한 모양이며, 속발도 상투를 설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278년(충렬왕 4) 왕의 명에 의하여 모든 관료층에서는 정수리부분의 머리카락만 남기고 뒤통수에서 묶어 길게 땋아 내린 몽고식 개체변발을 하였다. 그러나, 일반백성들까지 그에 따랐다고는 볼 수 없다. 공민왕의 복구적인 중흥정책 이후에는 다시 상투를 하게 되었다. 조선시대는 초상화나 풍속화를 통하여 계층을 막론하고 상투 튼 모습을 볼 수 있다.
*엠파스 백과사전 http://100.empas.com/dicsearch/pentry.html/?s=K&i=242356
전족은 중국의 전국시대부터 서한 전기까지 운남성(雲南省) 전지(滇池) 지구에서 활동한 오래된 민족의 하나이다. 유명한 사학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 서남이열전(西南夷列傳)≫에 의하면, 전족은 서남이(西南夷)의 일종으로 야랑국(夜郞國) 서쪽에 분포하여 촌락을 이루고 살면서 농업을 경영하였으며, 머리는 뒤쪽에 몽치 모양의 상투를 땋았다. 전족은 고대의 복료(濮僚) 계통에 속하며 지금의 맹고면어(孟高棉語)계 민족(더앙족, 부랑족 등)이나 좡어(壯語)계 민족(좡족 등)과 연관이 있다.
낙월(駱越)은 가장 남쪽에 위치한 백월의 한 갈래이다. ≪사기(史記) · 남월열전(南越列傳)≫에 의하면 낙월은 진 · 한 시기 교지군(交趾郡)의 토착민이었다. 그들의 활동 중심은 지금의 홍하(紅河) 삼각주 이북과 이동 지구였다. 남월과 인접하였지만 사회적 발전은 월족의 다른 갈래보다 낙후되어 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계급사회에 진입하기 시작하였다. 낙월인들은 상투 머리에 맨발로 다니고 베에 구멍을 뚫어 머리를 집어넣을 수 있도록 된 옷을 입었는데, 짧은 머리에 문신을 한 우월이나 몽치 모양의 상투를 하고 다리를 뻗고 앉는 남월 등과 다른 점이 많았다.
『고려 男 ) 장가를 가지 않은 남자아이는 머리카락을 끈으로 묶고 늘어뜨렸다. 그리고 머리 위에 수건을 동여맸다. 여자와 다른점은 검정끈을 사용하고, 묶은 머리카락을 뒤로 늘어뜨린 것이다. 장가를 들면 머리카락을 묶어 상투를 틀어올린 뒤 두건을 썼다. 송나라 사람들은 뒷머리카락을 쳐서 올렸는데 고려 사람들은 그대로 틀어올렸다. 앞머리카락을 밀지 않은 점이 변발과 달랐다.』
『'삼국지위지동이전'에는 사람들이 관모를 쓰지 않고 상투만으로 다녔다는 기록이 있다. 또 고구려 고분 벽화에도 크고 작은 상투를 튼 모습이 보인다. 따지고 보면 거의 2천년 가까이 상투를 트는 풍습을 유지했던 것이다.』
옛날 남자들은 상투를 틀 때 우선 정수리 주변의 머리카락을 깨끗이 깎아냈다. 그런 다음 주변머리를 모아 한데 빗어 올려 정수리 부근에서 상투를 틀었다. 그러니 만약 머리를 풀어헤치면 정수리만 반짝반짝 빛이 나 아주 재미있는 모습이 된다. 죄인들은 상투를 틀지 못하고 머리를 풀어헤치게 되어 있는데, 앞으로는 사극에서 이런 모습을 찍으려면 머리 가운데를 빡빡 민 모습으로 재현해야 옳을 것이다.
다만 고려-몽고지배기에 "개체변발"이라는 것을 하게 되는데 , 이것은 상투를 트는 것과는 정반대로 정수리 부근의 머리카락만 남기고 나머지는 깨끗이 민 다음 뒤통수에서 묶어 길게 땋아내린 것이다. 1278년에 충렬왕이 변발령을 내렸는데, 다만 이때의 조치는 관리들에 대한 것으로 일반 백성이 이에 따랐다는 기록이 없다.
그 나라(일본)의 풍속은 남녀가 다 알락달락한 옷을 입는데 그 형상이 구별이 없다. 여자는 머리털을 북상투쪽을 지어서 어깨를 덮고, 남자는 중이 된 자는 머리를 깎는데, 그들의 갓과 옷은 우리 나라의 승려들과 같다. 중이 되지 않는 자는 머리를 깍지 않는다. 머리털을 틀어서 상투를 짜고 상투(촌마게) 위에 조그만 갓을 쓴다.
병사들은 두 가지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전포(戰袍;군인이 겉에 입는 긴 웃옷)만 입은 병사와,전포 위에 갑옷을 걸친 병사.갑옷은 거의 위통과 어깨만 가린 가뿐한 차림이었는데,장교들 것이 더 화려했다.사병은 상투를 오른쪽으로 틀었고,장교는 가운데에 상투를 틀고 괭이 모양의 모자를 썼다.
갱 속의 무사용(武士俑)은 오른쪽 여밈의 짧은 털옷에 허리띠를 하고, 머리를 묶고 볼록한 상투는 머리 오른쪽 부분으로 치우쳐 있다.
[펌]☞상투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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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사람들은 옛날부터 신체발부 수지부모, 즉 신체의 모든 것은 부모한테 물려받은 것이므로 다치게 해서는 안된다고 여겼다. 그래서 부모한테 물려받은 머리털을 보존하기 위해 전통적인 방식으로 남자들은 상투를 틀고 여자들은 쪽을 지어 비녀를 꽂았다.
상투는 <삼국지> 위지동이전에 나온 구절만으로도 오래전부터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도 상투튼 모습을 볼수 있고, 신라의 토용가운데 인물상에서도 상투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고려시대,조선시대에도 상투를 틀었다. 극히 일부지만 요즈음도 상투를 틀고 생활하는 사람이 있다.
상투에서 중요한 것은 결혼한 남성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일단 상투를 틀면 어른으로 대접받았고, 나이를 더 먹어도 상투를 틀지 못한 사람에게는 하댓말(반말)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어린 신랑에게 봉변당하지 않으려고 나이 많은 노총각은 결혼과 관계없이 상투를 틀고 다녔는데, 이를 건상투라고 했다. 이처럼 상투는 결혼한 남성의 상징구실을 하여 단발령이 실시되자 유생들은 거세게 저항하는 의병운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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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구전설화에는 은혜를 입으면 '머리털을 베어 신을 지어 갚는다'라고 한다. 그만큼 머리카락을 귀하게 여겼던 것이다. 실제로 왕가를 비롯한 지체 높은 사대부가문 여자들이 머릿단을 사서 가발을 만들어 본래의 머리위에 얹는 가체라는 것을 많이 해서 이를 금하는 교지가 여러번 내렸던 것을 실록을 통해 확인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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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묘형태상 짱깨의 릉은 아닙니다.
기존의 피라밋 하나를 진시왕릉으로 개조 했을 조건.
단군조선의 피라밋 기술자들을 고용 했을 경우.
그리고 기존의 서안 피라밋과 구분하기 위해 봉토를 했을 것으로
추정이 가능하겠지요.
그러나 민족 고유의 무덤양식을 진시가 파격적으로
이민족의 분묘형태를 도입이 가능했을지는 의문입니다.
@치우 또 하나의 의문은 진시가 도굴을 방지하기 위해 수은 어쩌고
합니다.
합리적으로 추정하면 진시와 무관하니 발굴을 하지 않겠다는
의심을 합니다.
저들은 이미 발굴을 했고 중국 유적 유물과 무관하니
발굴 기피를 합니다.
마치 왜가 고대 릉을 발굴하면 가야 백제 신라 고구려가 나오니
발굴을 꺼립니다.
왜 짱개 유럽 유대 다 역사왜곡의 달인들이지요.
조선사 말살책입니다.
그러나 이씨대륙조선설은 아닙니다.
@치우 극이라는 청동기 잘 보세요.
나무에 지지하기 위한 구멍이나 형태가 완전 신제품입니다.
극을 나무에 매단 노끈과 극의 구멍 그리고 극의 표면과
새긴 글씨를 잘 보세요.
최근 작품으로 보이지요.
병마용갱은 대사기죠...
15년 밖에 않되는 진왕조가 병마용갱을 만들었다..
개가 들어도 웃을 일입니다...